[ESSAY]
내 인생을 바꾼 그날 밤 그 아이의 눈물
박연주 갤러리 서종 대표
탁구선수에 뽑히지 못하면 학교 못다녀 내게 양보해줘… 한밤중 울먹이며 찾아온 친구가 내게 한 말 '그래 네가 나가 난 화가가 될게'라며 부둥켜안았다 너나없이 가난해 장학금 못받으면 학비 못대던 중1 시절의 아스라한 기억…
나는 남쪽 바닷가 작은 도시에서 태어났다. 인근 바다에 넓은 어장이 있고, 고기잡이배를 가진 선주 집에서 살림살이에 큰 어려움이 없이 살았다. 앞마당 같은 바닷가는 어린 날 내 꿈의 놀이터였다.
긴 방파제 끄트머리에는 등대가 있고, 가까이 또 멀리 아름다운 다도해의 섬들이 올망졸망 펼쳐진 아름다운 해안 마을이 보였다. 공원의 오솔길을 오르내리며 먼 바다와 하늘과 구름을 하염없이 바라보던 날들이 있었다. 내 마음 맨 밑바닥에서 햇살처럼 반짝이는 이 풍경은 안타깝게도 초등학교 2학년 때 산산조각이 나고 말았다.
1959년 추석 무렵의 사라 호 태풍! 남해안 지방을 삽시간에 쑥밭으로 만들어버린 그 무시무시한 폭풍우와 해일은 수많은 사람의 삶과 꿈을 한꺼번에 앗아가 버렸다. 37만 명이 넘는 이재민을 낸 대재난이었다. 우리 집도 지붕이 날아가고, 마당까지 바닷물이 넘쳐 허겁지겁 피신해야 했다. 만선(滿船)을 기다리던 우리 배도 실종되고 말았다. 순식간에 우리 가족은 모든 것을 잃었다.
어느 날 학교에 갔다 오니 몇 개 남은 가구에까지 붉은 딱지들이 붙어 있었다. 아버지는 돈을 구하러 일본으로 떠나시고, 남은 우리는 변두리 작은 셋방을 겨우 얻어, 보리죽이나 고구마로 끼니를 때우면서 살게 되었다. '잘 살아보세'라는 노래가 배경음악처럼 들려오던 그때, 어쩌다 푼돈이 생기면 근로자를 위해 한 그릇 5원인가에 팔고 있던 '애민국수'를 언니와 함께 나눠 먹으며 울었다. 그 장면들을 잊을 수가 없다.
그런 가난 속에도 나는 중학교에 들어갔다. 당시 학교에선 각 부문의 체육장학생을 뽑았다. 내가 학교에 다니기 위해서는 장학생이 되는 길밖에 없었다. 목표는 탁구선수였다. 목숨을 건 듯이 탁구만 했다. 곧 1학년 중에 1등을 다투게 되었다.
그러던 어느 날 미술 선생님이 교무실로 나를 불렀다. 선생님은 그 전날 미술시간에 그려 낸 내 그림을 앞에 놓고 기다리고 계셨다. 웃음 띤 얼굴로 선생님은 내 손을 꼭 잡으셨다. "야! 너는 대단한 소질을 가졌구나. 중학 1학년이 이렇게 뛰어난 그림을 그리다니. 당장 미술반에 들어오도록 해라"라고 하셨다.
나는 체육장학생이 안되면 학교에 다닐 수 없었다. "선생님, 싫어요"라고 대답했다. 그래도 선생님은 세상에 많은 직업이 있어도 화가가 된다는 것, 특히 여성이 화가가 되면 얼마나 멋진 일인지, 하늘의 별처럼 빛날 수 있다고 하시며, 어린 나를 한참 동안 설득하셨다. 하도 열성적으로 말씀하시니 뿌리치기가 어려웠다. 일주일만 여유를 달라고 하고 빠져나와 다음 날 있을 탁구선발대회에 대비해 연습을 했다.
그날 밤이었다. 막 잠이 들려는데 집 밖에서 누가 내 이름을 불렀다. 나가 보니 어둠 속에 움츠리고 선 아이는 내일 탁구시합을 앞둔 나의 라이벌 친구였다.
그 아이는 한참 고개를 숙이고 있더니, "나는 탁구선수에서 탈락하면 학교에 다닐 수가 없어. 너는 그래도 나보다는 나은 것 같은데, 내게 양보하면 안 되겠니. 도저히 잠이 안 와서 이렇게 찾아왔다"며 울먹였다. 나는 얼떨결에 친구의 손을 잡고 "울지 마! 네가 탁구선수가 돼라. 나는 미술반에 들어가 화가가 될 끼다"라고 말해 버렸다. 그 어린 나이 아이들 사이의 대화는 지금 생각해도 눈물이 난다.
선생님의 격려 때문인지 나는 거짓말처럼 크고 작은 미술대회에서 대상과 특선을 연달아 받았다. 내 이름이 신문에 나오고, 미술선생님의 간곡한 추천으로 우리 학교 미술장학생 1호가 돼 중학교를 졸업할 수 있었다.
그토록 꿈에 그리던 부산으로 나가 고등학교까지 미술특기생으로 다녔다. 또 어렵사리 미술대학까지도 진학했다. 좋은 화가가 될 줄 알았다. 그러나 부족하다는 것을 서서히 깨달아 갈 무렵에 결혼을 하게 되었고, 평범한 주부가 되었다.
10여년을 화필을 쥘 여유 없이 살아가던 어느 날, 미술전시회에 갔다가 대학 시절의 스승 한 분을 만났다. 그분은 "널 많이 찾았다. 그림을 그릴 줄 알았더니, 왜 붓을 놓고 있느냐. 여의치 않으면 내 화실로 와서 그려라"라고 간곡히 권하셨다. 며칠 생각하다가 스승의 화실을 찾아 오랜만에 붓을 잡았다. 오랜만에 든 붓은 그리 쉽게 움직이지 않았다. 나는 다시 고민에 빠졌다.
얼마 후 스승은 내게 아트 디렉터의 길을 조심스레 권했다. 화가도 좋지만 화가를 길러내고 뒷받침하는 아트 디렉터도 중요하다고 하셨다. 그러면서 "외롭고 가난한 작가들, 지방에 묻혀 있는 작가들도 격려하고 알릴 수 있을 것"이라는 말이 귀에 와 닿았다.
어릴 적 어려웠던 내 모습, 울먹이던 탁구 친구 모습이 떠올랐다. 내 마음 깊은 곳에서 뭔가 솟구치는 것을 느꼈다.
그로부터 20여년이 흘러갔다. 스승의 말씀대로 나는 아트 디렉터가 되었고, 보람을 느끼며 살고 있다. 이제는 두 분 스승에게 받은 은혜를 주변의 작가들에게 나눌 일이 남아 있다. 내 삶에 좋은 스승님들이 계셨다는 것을 이제 와서 깨닫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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