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盧가 '바보'라면 崔東源은 '偉大한 바보'다!"
[정희준의 '어퍼컷'] 崔東源, 불꽃으로 타오르다
기사입력 2011-09-20 오전 8:12:37
지난 주 知人과 저녁을 하는데 그가 뜬금없이 "바빠 죽겠는데 社稷(洞)에 다녀왔다"고 한다. 속으로 '거긴 왜?' 하며 뜨악한 표정으로 그를 바라보는 순간 곧 알아차렸다. 社稷野球場이었다. 고 崔東源 選手의 焚香所에 다녀온 것이다.
"野球 좋아해요?" 하고 물었다. 아니란다. 그런데 거길 왜 갔을까. 그가 설명을 덧붙인다. 롯데 자이언츠가 1988년 崔東源을 三星 라이온즈로 쫓아낸 이후 롯데와는 因緣을 끊었단다. 그 이전까진 학교가 野球場과 가까워서 野球場에 뻔질나게 드나들었단다. 崔東源 보러. 40代 女性이다.
事實 釜山에서 '野球 좋아하냐?'는 말처럼 멍청한 질문은 없다. 釜山은 野球에 미친 도시다. 問題는 롯데 자이언츠를 좋아하냐 아니냐는 것인데 롯데 野球는 그렇게 싫어해도 자이언츠 野球는 또 다들 본다. (헷갈리시죠?)
지난 주 崔東源이 世上을 뜨자 그를 추모하는 글들이 봇물을 이루었다. 나도 그를 추억하는 글을 써야겠다는 당연한 다짐을 하며 이리저리 기사와 자료들을 훑었다. 그런데 그 시절을 더듬다 보니 곧 그 시절로 빠져들었다. 글은 쓰지도 못하고 기사만 봤다. 꼬리에 꼬리를 물고 그 시절의 조각들을 붙여 나간다. 그 시절이 내 앞에 펼쳐진다. 그의 競技를 보는 것만 같았다.
자이언츠의 시작, 崔東源
▲ 고 崔東源 選手. ⓒ연합뉴스
얼마 전 올 한해 프로野球 관중이 600만 명을 넘어섰다고 한다. 다수의 野球 전문가들은 그 600만 명의 折半은 롯데 팬이라고 말한다. 그러면 이제까지 프로野球 역사에서 그렇게 별다른 記錄도 없고 워낙 구두쇠 球團이라 프로를 꿈꾸는 野球選手조차 드래프트에서 피하고 싶어 하는 롯데가 어떻게 그렇게 엄청난 팬을 긁어보았을까? 롯데 자이언츠의 人氣엔 도대체 무엇이 섞여 있는가?
지금 롯데가 만끽하고 있는 地域社會에서의 (황당할 정도로) 독보적 人氣와 전국적인 人氣는 상당 부분 1980년대에 빚지고 있다. 그 주역은 당연히 崔東源이다. 지금 롯데 팬의 절반은 崔東源이 불러낸 팬이라면 과장일까. 그리고 앞의 지인의 예에서 보듯 釜山 사람의 롯데 자이언츠에 대한 不可思議한 愛憎關係는 바로 崔東源이라는 人物에게서 출발한다. 롯데는 崔東源에게 엄청난 빚을 지고 있는 것이다.
3년 전의 로이스터 熱風!? 다 필요 없다. 롯데의 모든 것은 崔東源이 있었기에 가능한 것이다.
그의 驚異的인 完投能力, 아무도 따라할 수 없는 大膽함, 高等學校 시절부터 쌓아온 놀라운 記錄들이 등장하며 그를 '무쇠팔,' '不世出의 스타'라고 칭했다. 그러나 그는 그 以上이었다. 그를 '스타'라고 이름 붙이기엔 어딘가, 뭔가 부족한 느낌이다. 그는 한 시대를 風味한 風雲兒였다. 反抗兒였다. 事實 바보였다.
많은 사람들이 그를 이야기하며 1984年을 말한다. 자이언츠가 첫 優勝을 했을 때다. 다들 三星이 優勝할 거라고 했다. 三星은 껄끄러운 OB베어스를 피하기 위해 시즌 막판 약체인 롯데와의 競技에서 '져주기'를 불사하며 코리안 시리즈 상대로 롯데를 簡擇(?)했다. 勝負造作이었다. 당시 <京鄕新聞>은 기사 제목을 "野球냐 야바위냐"로 뽑기도 했다.
당시 崔東源은 그 스스로 三星은 열 번 싸우면 아홉 번 지고 한 번 이길 상대였다고 吐露했다. 三星 역시 롯데를 얕봤고 崔東源을 만만히 봤다. 그러나 그는 1984년 27勝을 거둔 最多勝 投手였고 특히 후반기에만 18승을 거둬 롯데를 혼자 힘으로 코리안 시리즈에 밀어올린 張本人이었다. 결국 崔東源은 1차전 完封勝, 3차전 完投勝, (5차전 完投敗,) 6차전 구원승, 7차전 完投勝으로 혼자 4승을 거머쥐며 롯데에 기어코 優勝을 안긴다.
많은 이들이 그와 선동열을 比較한다. 事實 比較不可다. 崔東源이 선동열보다 나이가 다섯 살이나 많았기에 그들은 아마추어에서는 서로를 상대할 수 없었다. 프로에 와서야 세 번 맞대결을 했는데 각각 1승 1무 1패를 記錄했고 마지막 대결은 1987년 15회까지 가는 연장 사투 끝 2대2 無勝負였다. 韓國프로野球史의 전설로 기억될 맞대결이었다. 선동열이 232個를 던졌고 崔東源이 209個를 던져 양 選手가 한 競技에서 441個를 던진 것이다.
프로에서의 記錄上으로 그는 선동열에 뒤진다. 그는 通算 103승 74패 26세이브를 記錄했다. 通算 防禦率은 2.46이고 脫三振은 1019개였다. 선동열의 通算 146승 132세이브 脫三振 1698 그리고 防禦率 1.20에는 확실히 뒤진다. 事實 그는 記錄에서 10위권 안에 드는 것이 거의 없다.
그런데 왜 사람들은 자꾸 崔東源과 선동열을 比較할까. 게다가 崔東源이 선동열보다 더 낫다고 주장하는 사람들까지 있다. 그들은 도대체 무슨 배짱으로 그런 주장을 할까.
이길 때까지 던진다.
보통 山嶽人들은 '산이 있어 오른다.'고 한다. 崔東源은 마운드가 있어 올랐다. 어릴 때부터 그랬다.
1975년 경남고 2년 시절 高校 野球 최강팀인 慶北高等學校를 상대로 完投하며 노히트노런을 記錄하고서 이튿날 善隣商業高等學校를 맞아 8회까지 노히트 행진을 펼쳐 17이닝 노히트노런을 記錄했다. 이듬해 청룡기 勝者決勝 群山商業高等學校 전에서 脫三振 20개의 記錄으로 完投勝을 거두고는 이틀 뒤 最終決勝에서 다시 群山商高를 맞아 2안타 12脫三振으로 5대0 完封勝을 거둔다.
延世大學敎 시절의 崔東源은 23연승으로도 유명했지만 그의 진가는 괴력의 連投能力 그리고 팀을 優勝시키는 決定力에 있었다. 1978년 大統領旗全國大學野球大會 東亞大學校와의 準決勝에서 동아대 投手 임호균과 피말리는 投手戰을 벌이는데 연장 14회 0-0인 상태에서 해가 저버렸다. 일몰 일시정지 競技가 돼서 이튿날 競技가 이어졌는데 그는 또 다시 등판해 던졌다. 연장 18회 터진 김봉연의 결승 홈런으로 1-0 승. 그는 이길 때까지 던졌다.
決勝戰은 바로 몇 시간 뒤. 이틀간의 血戰을 치르고 올라온 延世大를 기다리던 상대는 成均館大學校. 成大를 상대해 마운드에 오른 先發投手는 다시 崔東源. 延世大는 접전 끝에 成均館大를 3-2로 물리치고 優勝했다. 崔東源은 이틀에 걸쳐 27이닝 동안 92명을 상대로 投球數 375個 12안타 33脫三振 2失點이라는 믿을 수 없는 투구를 보여준다.
大學卒業 후 입단한 實業팀 롯데에서도 그의 능력은 이어진다. 데뷔하자마자 전기 리그에서 아마추어 롯데는 13승 2패로 優勝을 차지하는데 이때 崔東源의 記錄은 13승 1패였다. 거의 모든 競技에 등판해 거의 모두 이긴 것이다. 결국 신인으로서 그는 17승을 거두며 最優秀新人, 最多勝投手 뿐 아니라 最優秀選手賞까지 거머쥔다. 1주일에 6번 마운드에 오르기도 했다. 그야말로 혼자 던졌고 그가 팀을 優勝시켰다. 多勝 2위 그룹 投手들의 이닝 수에 거의 두 배였다.
그는 던지는 걸 자신의 팔자로 알고 던졌다. 그냥 던졌다. 事實 그의 프로 選手生活은 그리 길지 못했음에도 80번이나 完投했다. 通算 完投 1위는 윤학길의 선발 231競技 중 100회였는데 崔東源은 고작(?) 선발 124競技에서 80회 完投했다. 崔東源보다 選手生活이 훨씬 길었던 선동열도 完投는 68회 밖에 하지 않았다.
우승을 거머쥐었던 1984년에도 페넌트레이스 100競技 중 51競技에 出場해 27승을 거뒀다. 동료 投手 중 힘을 보태 줄 10승 投手는 단 한 명도 없었다. 코리안 시리즈에서 5번 出場해 4승을 만들었을 뿐 아니라 무려 40이닝을 혼자 던졌다. 그래서 사람들은 '오직 한 競技'를 위해서라면 선동열을 택하지만 '한 시즌'을 위해서라면 주저 없이 崔東源을 택할 거라고 하는 것이다.
롯데에 버림받고 三星에서 放出되고…
보통 사람들이 世上사는 맛도 알고 요령도 터득할 서른 즈음, 그는 正反對로 갔다. 바보처럼 말이다. 당시 運動選手에겐 槪念도 없던 프로野球選手協議會 結成을 推進한 것이다.
그는 당시 1억 원 가까운 年俸을 받던 選手였다. 그러나 1988년 選手들의 平均 年俸은 600만 원에 불과했다. 2군 選手들은 제대로 식사도 하지 못하는 상태였다. 그는 富者였지만 生活苦에 시달리는 周邊의 選手들, 事故나 隱退로 인해 가족의 生計까지 어려워지는 프로野球選手들의 現實을 지나치지 못했다. 그래서 뭐라도 해야겠다고 해서 시작한 게 바로 相助會였다. 野球選手들끼리 서로 돕자는 것이었다.
그러나 球團들은 이를 勞動組合 結成으로 여기고 主動者들에게 報復을 가했다. 아주 卑劣하고도 苛酷한 報復이었다. 球團들은 選手들의 아내들을 脅迫했고 選手들이 말을 듣지 않으면 다른 팀으로 보내버린 것이다. 롯데는 釜山에서 태어나 慶南高等學校를 나오고 자이언츠의 看板이었던 崔東源을 三星으로, 三星은 大邱商高 出身의 에이스 김시진을 자이언츠로 쫓아내 버린다. 프랜차이즈 스타들을 내버리고 이들을 洛東江 오리알로 만들어 버린 것이다.
특히 三星으로 쫓겨난 崔東源의 苦難은 심했다. 우리나라에서 가장 排他的 地域인 大邱의 팀인데다가 勞組라면 驚氣를 일으키는 三星이었기에 그는 三星에서 왕따 같은 존재가 되어버린다. 충격적인 트레이드 이후 뜻 없는 곳에서 選手生活을 해야 했던 崔東源은 과거와 같은 投手가 아니었다. 그는 전혀 崔東源답지 않은 볼품없는 2년을 大邱에서 보낸 후 그의 불꽃 튀는 選手生活을 마무리한다. 훗날 선동열이 수석코치와 감독을 하며 부와 영예를 누리던 三星에서 崔東源은 放出된 것이다. 崔東源에겐 隱退式도 없었다.
이후 崔東源의 人生은 순탄치 못했다. 事實 1988년 選手協 파동 당시 롯데는 選手會에 관여했던 다른 選手들에게 選手會에서 손 떼겠다는 覺書를 일일이 받으면서도 崔東源에게는 그런 要求조차 하지 않았다. 崔東源은 트레이드 對象에 올리거나 放出해 迷兒로 만들어버리겠다는 計算을 이미 해놓고 있었다는 뜻이다.
隱退 후에도 롯데는 崔東源을 외면했다. 다른 팀에서도 指導者 생활을 할 수 없었다. 反抗兒 이미지의 그를 불러줄 球團은 없었다. 지금 프로野球에서 감독, 코치를 하는 이들은 모두 選手로 뛰던 시절 감독님과 球團의 말을 잘 듣던 이들이다. 球團의 방침에 이의를 제기하거나 바른 말 하는 選手는 절대로 코치가 되지 못한다.
진짜 바보 되다
崔東源은 1991년 初代 廣域醫院 選擧에서 釜山 西歐 地域區에 출마했다. 그런데 金泳三이 이끄는 民自黨이 아니라 民主黨이었다. 아니, 그냥 民主黨도 아니고 꼬마 民主黨이었다.
그는 選手協 結成을 主導했을 뿐 아니라 같은 해 <釜山日報> 罷業現場에 유니폼을 입고 가 激勵金 100萬 원을 快擲하기도 했고 全國大學生代表者協議會 모임에도 參席했을 뿐 아니라 金泳三이 主導했던 3黨 合黨을 이를 3당 野合이라고 批判하며 이를 審判하기 위해 出馬했다고 한다.
慶南高 先輩인 金泳三이 이끄는 民自黨의 제안도 있었지만 社會의 構造的 問題에 눈을 뜬 그는 眞正性을 認定받기 위해 民主黨을 택했다. 그런데 그는 여기서도 바보 같은 選擇을 한다. 그가 당돌하게 選擇한 地域區는 바로 金泳三의 텃밭인 西歐였다. 西歐는 金泳三이 1960년 제5대 總選부터 1988년 제13대 總選까지 7번 當選된 '金泳三의 땅'이었다. (11,12대는 金泳三의 왼팔이라 불리는 서석재가 1등 當選됐다.) 金泳三의 땅에서 金泳三의 3당 野合을 審判하겠다고 나섰던 것이다.
結果는 當然히 落選이었다. 政治人 盧武鉉이 '바보'면 野球인 崔東源은 '偉大한 바보'다.
지난 주 롯데는 崔東源의 현역 시절 등번호 11번을 永久 缺番하기로 決定했다고 한다. 롯데는 1988년 그를 쫓아내면서 事實상 그와의 因緣을 끊었다. 그를 코치로 데려오라는 팬들의 열망을 무시해오던 롯데였다. 그러나 이제 눈을 감은, 안전한(?) 崔東源은 받아들이려나 보다.
崔東源 대 선동열
나는 몰랐었다. 이번에 알았다. '롯데 맨'으로 알려진 崔東源의 롯데 生活은 고작 6年이었다는 것을. 롯데에서 쫓겨난 후 衝擊과 彷徨과 따돌림 속에 보낸 三星에서의 2년을 除外하면 프로에서 崔東源이 力鬪한 것은 고작 6년이었다.
그리고 選手協 問題로 시끄럽던 1988년을 除外하고 崔東源은 1983년 데뷔부터 5년 연속 매 시즌 200이닝 이상을 던졌다. 선동열은 해태에서 11년, 일본에서 4년, 총 15년이나 프로 選手生活을 했지만 200이닝 이상 던진 시즌은 고작 2시즌이었다.
선동열은 자신의 몸管理와 記錄管理에 徹底했다. 그러나 崔東源은 鬪魂의 野球였다. 崔東源은 선동열보다 나이가 다섯 살이나 많았지만 그는 몸을 아끼지 않았다.
선동열은 프로에서 꽃을 피웠다. 당시 大學의 投手들을 평가해보면 將來性은 윤학길이었고 스타성은 박노준이었으며 選手들 간에는 이강철이 最高라고 했다. 물론 선동열이 이들에게 뒤지지 않았지만 어쨌든 그들과 한 묶음이었는데 結局 프로에서 滿開한 選手가 선동열이었다.
그러나 1970년대 大學生活을 한 崔東源에겐 敵手가 없었다. 아니, 高校, 大學, 實業을 거쳐 프로에 이르기까지 그는 언제나 最高였다. 다만 프로에서의 選手生活이 너무 짧았다. 선동열이 프로에서 꽃을 피웠다면 崔東源은 프로에서 불꽃을 태우고 스스로를 불살랐다.
그래서 韓國프로野球 最高의 投手를 꼽으라면 단연 선동열이다. 그러나 韓國野球 最高의 投手를 꼽으라면 오직 崔東源이다.
高校 때부터 프로까지 유난히 酷似를 당했던 崔東源의 죽기 전 말이다.
"無理는 亦是 代價가 있게 마련이더라. 그러나 後悔한 적은 없다. 다시 그날로 돌아가도 난 1次戰부터 7次戰까지 던질 거다. 왜냐? 그게 崔東源이니까."
/정희준 東亞大學校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