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옹(醒翁: 김덕함의 호)의 막역한 친구 박동량(朴東亮,1569-1635)
박동량은 성옹보다 7년 연배로 임진전쟁 당시 피난 조정에서 비변사 일을 함께 본 인연에다 승문원제조로도 같이 있었음으로 누구보다도 가까운 사이였다. 그래서일까 선조29년(1596) 성옹이 선천군수로 재임 중 박동량이 동지사冬至使로 선천관아를 지나자 성옹이 고개 마루까지 따라 나서며 그에게 알량한 글을 들려 보냈다.
봉주 박동량에게 부치다/寄鳳州朴公東亮
요하와 한강은 물길이 모여서 강이 되듯/遼河漢水混成江
주막 가엔 한 쌍의 우뚝한 인물이 짝을 이루는데./冉店牙山等作雙
이 못난이, 고개 마루에서 오직 기쁨으로 보내노니/嶺表罪人猶送喜
분지로 쏟아지는 밝은 햇살이 몸속 깊이 스며드네./盆中白日照丹腔
두 사람은 요하와 한강의 물 구비가 만나듯 뜻을 모아 주막 가엔 두 큰 인물이 우뚝 하게 처신해가자면서, 성옹이 오직 기쁜 마음으로 그대를 멀리 떠나보내노니 햇살이 몸속 깊이 스며들듯 든든하다고 읊고 있다. 이에 박동량이 연행 길에 성옹의 글에서 차운한 화답을 부쳐왔다.
운을 따 김덕함에 주다/寄次韻金公德諴
사수泗水(노나라의 강)는 어찌하여 한강과 그리 멀기만 한가?/泗水何曾隔漢江
편지에 노니는 잉어 한 쌍을 그려 부치네./尺書遙寄鯉魚雙
홀로 서서 그대를 회상하노니 큰 산에 뜬 달이라/懷君獨立王山月
구비마다 구름이 머무니 마구 목이 메는구나./一曲停雲咽不腔
박동량은 중국어에 능통해 임진전쟁을 치르며 대 명나라 관계 일을 도맡다시피 잘 처리한 데다 자부가 선조의 정한옹주인지라 선조의 사랑을 한 몸에 받기도 했다. 박동량은 이항복의 질녀를 부인으로 맞았고, 신흠의 딸을 며느리로 삼았으며, 이명한을 사위로 들이는 등 든든한 가문으로 기반을 갖춘 집안이었다.
선조의 승하를 앞두고는 영창대군의 보필 부탁을 받은 유교칠신遺敎七臣의 한사람으로 지목받은 중신이기도 하다. 그러나 이 일로인해 광해정권이 들어서자 권력의 실세로 떠오른 대북세력의 미움을 사 유교칠신들을 내쫓을 때 박동량도 벼슬을 빼앗기고 도성 밖으로 내 좇기는 문외출송門外出送을 당하고 말았다.
만능재주 꾼 박동량은 훗날 인조반정으로 정권이 뒤집히자 광해 때 유릉저주사건裕陵詛呪事件(선조 비 의인왕후 박 씨의 묘를 저주한 사건)을 놓고 “영창대군사람들이 요망한 무당과 함께 왕후 영상을 만들고 활과 칼로 흉악한 짓을 했다는 이야기를 들었습니다.”라고 말해 대비가 유폐되는 곤혹을 치르게 한 죄로 전라도 강진에 안치되었다가 부안으로 이배되었으며, 다시 충원忠原(충주)에 양이量移되었고, 나중에 풀려나 고향에서 만년을 보내다 67세로 별세했다. 그의 너그러운 인품으로 남을 해치는 일이 없었음에도 광해나 인조정권에서나 아까운 재주가 묻혀 버리는 불운을 겪은 선비였다.
박동량이 죽은 후, 성옹이 대사간으로 있을 때 언관 이해창이 박동량을
이홍주와 싸잡아 옛 축첩을 문제 삼자 그를 적극 변호하고 나서서 인조가 따르게 했다.
“동량은 선조 때의 충신입니다. 그가 살았을 때 이미 사면의 은전을 받아 서울로 돌아옴을 허락받았으니, 그가 죽어서 사실을 밝혀 주는 것도 물론 괴이하게 여길 것이 없겠으나 묘당에서 의논을 드린 것이 현재 결정이 나지 않았으니 가볍게 의논할 수 없습니다.…”
그래서 일까 박동량의 손자 박세채는 성옹의 묘표음기墓表陰記와 위패모신 배천문회서원제문을 쓰는 일에 선뜻 나서기도 했다.
▲박동량 유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