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상 주님과 함께!
171126 살전 4:13-18
1. 소중한 위로
지난 주간 한 장의 사진이 인터넷을 뜨겁게 달구었습니다. 호주 퀸즐랜드주 응급구호기관인 '퀸즐랜드 앰뷸런스 서비스(QAS)'는 전날 오전 자체 페이스북에 두 대원의 활동상을 담은 사진 한 장을 올려 큰 주목을 받고 있습니다. 이 사진은 한 구급대원이 들것에 있는 한 환자 옆에서 바다 쪽을 향해 서 있는 모습으로, 환자는 반쯤 세워진 들것에 가려 모습이 보이지 않습니다. 이 모습이 사진에 담기게 된 것은 고통 완화 치료를 받으러 병원에 가던 여성 말기 환자가 자신을 태우고 가던 두 구급대원에게 마지막이 될 것 같다며 바닷가에 가보고 싶다는 의사를 비쳤기 때문입니다. 두 대원은 흔쾌히 여성에게 기회를 주기로 하고 길을 돌아 바닷가로 향했습니다. 그래미 쿠퍼라는 대원은 "그녀는 바닷가와 그 주변 산책길을 좋아한다고 말했다"며 자신들이 그녀의 바람을 들어주겠다고 했을 때 "기뻐 어찌할 줄 몰라 했다"고 ABC 방송에 말했습니다. 쿠퍼는 바위 때문에 바닷물 쪽으로 가는 길이 막히자 봉지에 바닷물을 담아오기도 했습니다. 여성은 바닷물에 손을 담갔고, 입으로 살짝 맛을 보기도 했습니다. 동료의 모습을 촬영한 대니얼 켈란 대원은 바다를 바라보는 환자에게 '어떤 생각이 드느냐'고 물었을 때 "평화롭다. 모든 게 좋다"라는 답을 들었다고 소개했습니다. 퀸즐랜드 앰뷸런스 서비스(QAS) 에서는 "때로는 가장 필요한 것이 약품이나 교육, 숙련도보다는 공감 능력이며, 그것이 중요하다"며 두 대원의 행동을 칭찬했습니다. 이 한 장의 사진은 삽시간에 전 세계로 퍼지면서 “좋아요!’, 공유, 댓글이 끝없이 이어지고 있습니다.
경기도 파주 용미리 묘지에 가면 ‘나비정원’이란 곳이 있습니다. 서울시립 화장장에서 화장한 만 12세 미만의 아이들을 위한 묘지입니다. 꽃피어보지 못한 채 이 땅의 생을 마감한 어린 아이와 아기들을 위한 공간입니다. 그래서 일반적인 묘지 분위기와는 다르게 사뭇 화사하고 아름답게, 나비의 모양을 주된 테마로 하여 밝게 꾸며 놓았습니다. 2014년도에 개장하였는데, 이듬해부터는 매년 5월 초에 추모제 행사도 개최하고 있습니다. 유족인 부모와 가족들을 배려한 것인데 참 고마운 일입니다. 제가 소개해 드릴 다음 내용은 생후 넉 달도 채 안 된 아기를 나비정원에 묻은 한 엄마의 사연입니다. 이런 처지의 엄마들이 모이는 채팅방에 “나비정원에 다녀왔어요.”라는 제목으로 올린 사연입니다. 저는 이 글을 읽으면서 얼마나 마음이 찡했는지 모릅니다.
“우리 아기 이번 수요일 날 벽제에서 화장하고 나비정원으로 왔어요. 근데 어젯밤 꿈에 병원에서 아기엄마냐는 전화 받는 꿈을 꿔서 오늘 남편이랑 우리 아이 잠들어 있는 곳에 왔네요. 수요일은 비도 오고 정신도 없어서 그냥 따라온 것 같은데, 오늘 와보니 아이들 놀기에 정말 예쁜 곳인 것 같아요. 하루 종일 햇볕도 잘 들 것 같고, 나무도 많고, 꽃도 많아요~ 혼자 너무 멀리 있는 곳에 두는 건 아닐까 걱정했는데 그래도 여기에 두길 잘 한 것 같아요. 115일 동안 병원에서만 있다가 가서 그런 건지. 누나 물건 쓴다고 아이 물건 준비하지도 않았고, 섭섭할까봐 베넷저고리 하나 만들어 놓은 것밖에 없었는데 그건 같이 보내줬더니, 모유 말고는 집안 정리할 것도 없네요. 그리고 생각보다 잘 지내고 있는 것 같아요. 밥도 먹고, 큰 아이랑 놀이터도 가고, 이번 주는 신랑이 휴가 받아 쉬어서 같이 있다 보니 괜찮은 것 같기도 하고... 다음 주부터 혼자 있어야 하는 낮 시간이 걱정이긴 해요. (나비정원 사진 포함된 글) 참 혹시 불편하시면 사진 내릴게요. 불편하시면 말씀해주세요.”
생후 115일된 아기를 먼저 보낸 젊은 엄마의 애절한 사연이 우리를 숙연하게 만듭니다. 죽은 자들에 대한 추모와 남은 자들에 대한 위로는 매우 중요합니다. 우리 교회는 교회력상 일 년의 마지막 주일을 영원주일로 지킵니다. 믿음의 선조들을 추모하면서 영원한 생명에 대하여 묵상하는 귀한 주일이 되기를 바랍니다.
2. 본문 이해
초대교회에서는 예수께서 곧 다시 오실 것으로 생각했습니다. 얼마나 빠르게냐 하면, 본인들이 살아 있을 동안에 주님께서 다시 오시리라 기대했습니다. 그런데 주님께서 재림하시기도 전에 교회 공동체 내에서 죽는 교우들이 나오기 시작하였습니다. 데살로니가 교회의 교우들은 먼저 죽은 교우들이 다시 오실 주님을 만나지 못하게 된 것을 매우 안타까워했습니다. 이러한 데살로니가 교회의 사정을 전해들은 바울은 데살로니가 교회의 교인들에게 죽은 자들도 하나님의 구원의 대상이라는 점을 확인해주면서 위로하였습니다. 오늘의 본문이 바로 그 내용입니다. 살전 4:13-14절입니다.
형제자매 여러분, 우리는 여러분이 잠든 사람의 문제를 모르고 지내는 것을 원하지 않습니다. 여러분은 소망을 가지지 못한 다른 사람들과 같이 슬퍼하지 않아야 할 것입니다. 우리는 예수께서 죽으셨다가 살아나신 것을 믿습니다. 이와 같이 하나님께서 예수 안에서 잠든 사람들도 예수와 함께 데리고 오실 것입니다.
여기서 잠든 사람들이란 죽은 사람들을 말합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산 사람들 만이 아니라 죽은 사람들도 모두 구원하신다는 것입니다. 데살로니가 교회 교인들은 산 사람들만 구원을 받고 죽은 사람들은 배제된다고 생각하여 실망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바울은 전연 그렇지 않다고 설명합니다. 15절입니다.
우리는 주님의 말씀으로 여러분에게 이것을 말합니다. 주님께서 오실 때까지 살아남아 있는 우리가, 이미 잠든 사람들보다 결코 앞서지 못할 것입니다.
16절 뒷부분부터 17절 앞까지를 제가 읽어드립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죽은 자들이 먼저 일어나고, 그 다음에 살아남아 있는 우리가…
죽은 자들이 먼저다? 산 자들이 먼저다? 죽은 자들이 먼저라는 말씀입니다. 죽은 자들은 하나님의 구원으로부터 배제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우리 산 자들보다 먼저 하나님의 구원의 반열에 드는 것이란 말씀입니다. 바울은 이와 같은 말씀으로 절망과 슬픔에 빠진 데살로니가 교회의 교인들을 위로한 것입니다. 18절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은 이런 말로 서로 위로하십시오.
그런데 문제는 이와 같은 바울의 위로의 말씀 가운데 나오는 한 부분을 종말과 재림에 대한 사실적 묘사로 이해하는 것입니다. 16-17절을 다시 봅니다.
주님께서 호령과 천사장의 소리와 하나님의 나팔 소리와 함께 친히 하늘로부터 내려오실 것이니, 그리스도 안에서 죽은 사람들이 먼저 일어나고, 그 다음에 살아남아 있는 우리가 그들과 함께 구름 속으로 이끌려 올라가서, 공중에서 주님을 영접할 것입니다. 이리하여 우리가 항상 주님과 함께 있을 것입니다.
주님께서 하늘로부터 내려오시고, 죽은 사람들 가운데 믿는 사람들이 먼저 일어나고, 그 다음에 살아있는 성도들이 이들과 함께 구름 속으로 이끌려 올라가서 공중에서 주님을 영접할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이른바 ‘휴거(携擧)’입니다. 매우 감격스러운 장면입니다만, 그러나 이를 액면 그대로 받아들이는 것은 바르지 않습니다. 우리나라에도 과거에 기독교 내 일부 종파들이 이 같은 내용을 액면 그대로 받아들여 세상과 단절된 생활을 하고, 거룩한 흰옷을 입고 공중으로 들려 올라가는 상상을 하며, 그들만의 고립된 생활을 했습니다. 어떤 경우에는 재림의 그날을 고시하면서 사람들을 혹세무민하기도 했습니다. 결론적으로 말씀드리면, 이 말씀은 종말론적, 묵시문학적인 사고가 일반적이던 1세기 초대교회 성도들의 화법(話法)으로 읽어야 합니다. 재림의 지연에 대한 실망과 사별한 교우들로 말미암은 슬픔에 깊이 빠져 있던 데살로니가 교회의 교우들을 위로하기 위한 바울의 스펙타클한 설명일 뿐입니다. 주님께서 스스로 자신도 모른다고 하셨던 그 날과 그 때의 시간과 모습을 바울만이 알고 있었다고 생각할 수는 없습니다. 그러므로 이 구절을 재림과 종말의 장면에 대한 실제적인 묘사라고 보는 것은 옳지 않습니다.
3. 항상 주님과 함께!
그런데 이 말씀을 세상 종말에 대한 청사진으로 받아들이는 것도 그릇된 것입니다만, 이 말씀을 단지 위로의 말씀, 미사여구로만 여기고 영원한 생명에 대한 메시지를 읽어내지 못하는 것도 문제입니다. 여기서 바울이 말하고자 하는 것은 무엇일까요? 17절 마지막 문장입니다.
… 이리하여 우리가 항상 주님과 함께 있을 것입니다.
“우리가 항상 주님과 함께 있을 것”이라는 게 바울이 말씀 하는 바의 핵심입니다. 우리가 항상 주님과 함께! 여기서 ‘항상’이란 무슨 뜻일까요? 언제를 말하는 것일까요? 우리의 형질(形質)이 생기기 전부터 우리의 형질이 나타난 후까지, 그리고 그 이후, 우리의 형질이 변화하여 흙이 되고, 먼지가 되고, 우주의 기운이 되고, 우리가 짐작하거나 이해할 수 없는 차원의 존재가 될지라도 우리는 만유의 주님과 함께 거한다는 뜻입니다. 이와 같은 내용을 설명할 수가 없어서 우리 조상들은 옥황상제를 그렸고, 중세의 화가들은 최후의 심판을 그렸습니다. 그러나 옥황상제, 지옥도, 최후의 심판 이런 모든 것들은 비유입니다. 그렇게 되지 않을 것입니다. 그 그림은 틀렸습니다. 그러나 그들이 표현하고자 했던 바가 틀린 것은 아닙니다. 우리가 이 점을 분명히 깨달아야 합니다. 넓고 넓은 생명 세계에 대하여 이렇게 생각하지 못하는 것은 기계론적 사고에 빠진 현대인의 병증 때문입니다. 1,2,3,4의 양수만 헤아릴 줄 알지 음수와 허수를 몰라요. ‘눈에 보이는 것이 다’라고 생각하는 병입니다. 육체만 볼 줄 알지, 인간의 영혼을 볼 줄 몰라요. 물질의 세계만 이해하지 신령한 세계를 이해하지 못해요. 이렇게 편협하게 생각한 시기는 인류 역사상 불과 최근의 2~300년 밖에 안 됩니다. 우리가 생명 세계에 대하여 더 깊이 묵상해야 합니다.
안타까운 죽음을 봅니다. 인생의 마지막 순간에 생명에 대한 짧은 이해에서 나오는 절망감으로 몸부림치는 모습, 임종을 앞둔 이에게 정말 필요한 것이 무엇인지를 모르는 가족들의 처사, 불안과 고독 속에서 죽어가는 모습을 보곤 합니다. 우리 믿음의 형제들은 이와는 다른 모습이어야 할 것이라 생각합니다. 우리는 태어나기 전부터 영원까지 주님의 자녀입니다. 이 사실을 꼭 기억하시기를 바랍니다. “우리가 항상 주님과 함께 있을 것입니다.” “우리가 항상 주님과 함께 있을 것입니다.” 이제 우리의 생이 머지않아 마무리 되겠지요. 저를 포함하여 우리 교우들은 모두 이 땅위의 생을 마칠 때, 아름답게 찬송하면서 갈 수 있기를 바랍니다. 이제 그 찬송을 연습하겠습니다. 찬송가 314장 3절입니다.
이 세상 떠날 때 찬양하고 숨질 때 하는 말 이것일세
다만 내 비는 말 내 구주 예수를 더욱 사랑 더욱 사랑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