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2년 만의 만남
늘봄
13살의 초등학생들이 무심히 흐른 세월을 따라 45세의 중년이 되어 있었다. 그러나 나는 그 중년의 어른들이 32년 전의 초등 6학년 학생처럼 느껴졌다.
한 달 전 쯤, 내 휴대폰에 “채찬석 선생님이 맞으신가요?” 의 문자가 있었다. 회답으로, “예, 그런데 누구신가요?” 하고 보내면서 제자들과 연락이 되었다.
그 연락으로 알게 된 정선미와 조민식이 주선하여, 32년 전, 담임을 했던 초등 6학년 학생들을 만나게 된 것이다. 제자들은 인터넷 검색어에서 나에 대한 정보를 얻었고, 동창회를 준비했다.
3월 8일(토). 나는 18시 30분 의정부역에 내렸고, 마중 나온 민식이의 안내로 제자들이 모인 식당에 들어가니 20여 명이 일제히 일어나 인사를 했다. 이름표를 가슴에 단 낯선 중년의 남녀들이 환한 얼굴로 나를 반겼다.
내가 인사말을 하고 자리에 앉으니, 학생들도 앉아 있다가 한 사람씩 일어나 자기소개와 인사를 했다. 이름표를 보니 30년 전의 얼굴이 거의 떠올랐고 그때의 일들이 생각났다. 특히 기억을 도와준 건 벽에 걸린 현수막의 6학년 때 사진이었다.
형석이의 코흘리던 얼굴, 민식이의 절도 있는 언행, 선일이의 착실하던 모습, 상혁이의 활발하고 밝은 얼굴, 상철이가 도시락을 못 싸와 점심시간에 살그머니 교실에서 나가던 일, 세란(숙희)이의 일기에 담겨 있던 슬픈 가족사, 영선이의 통통한 얼굴, 시원하게 키가 컸던 선미의 모습, 내성적이며 조용한 금순이의 표정, 마음 여리고 곱상하던 수진이, 특색은 없었지만 조용하던 은경이는 최근에 쌍커풀 수술을 했나보다. 착하고 예뻤던 윤혜경, 표정이 진지하여 잘 웃지 않았던 정인, 지금도 여전히 마른 체형의 민숙, 매우 진지하여 열심히 강의를 듣던 아린(복순). 32년 전의 제자들의 얼굴과 성격 등이 생각났다
모임을 주선한 민식이는, 아파서 세상을 떠난 제자와 오토바이 타다가 오래 전에 세상을 등진 안○○이에 대해 알려주었다. 마음 아픈 일이었다. 그 자리에 나오지 못했지만 내가 심하게 야단쳐서 지금도 너무 미안한 김혜경, 반장하던 조정환도 생각이 났다. 한 학기 정도를 동두천에서 버스로 통학하던 조영희도 궁금했다.
제자들은 인터넷에서 나를 검색해 보고, 내가 책을 몇 권 썼다는 사실을 알고 작년에 출간한 교육 수필집 “자녀의 성공은 만들어진다”를 참석자 수만큼 사가지고 와서 각기 배분하더니 각자 책을 가지고 내 옆으로 와서 사인을 해달라고 했다. 내가 기억하는 제자의 장점을 한 구절씩 써 주었다. 어떤 제자는 더 자세히 써 달라고 주문하여 덧붙여 주기도 했다
참치회와 여러 종류의 음식, 제자들이 소주잔에 따라주는 맥주를 몇 잔 마시니 가슴이 뿌듯했다. 제자들이 나를 잊지 않고 찾아주었다니 정말 고마웠다. 그래서, 제자들에게 나의 인생 경험을 바탕으로 도움이 되는 말을 해주고 싶었다. 지하철을 타고 가며 “제자들을 만나면 무슨 말을 해서 도움을 주나?” 두 시간 가량 고심하며 메모를 했다. 그 메모를 보며 잠시 아래와 같은 말을 해 주었다.
나이 60이 되니 지위가 높아진 사람도, 돈을 많이 번 사람도 그다지 부럽지 않았다. 요즘에 가장 부러운 사람은, 술 담배 거침없이 할 만큼 건강하고 노후가 보장된 사람이라는 생각이 든다. 대통령도 물러나면 야인이 되고, 돈 많이 번 사람도 사는 건 비슷하다. 건강이 좋지 못해 세상을 일찍 떠나거나 활동을 제대로 못하는 친구들을 보면, 역시 건강이 제일이라는 말이 맞는 것 같다
제자들 중에는 이 모임에 오고 싶지만 형편이 어려워 못 오거나 사정상 못 온 안타까운 제자도 있을 것이다. 그래서 한 때 농담으로 유행하던 말을 먼저 꺼냈다.
나이 30에는 결혼을 했는지 안했는지 잘 모르고, 40에는 많이 배웠는지 못 배웠는지 잘 모르고, 50에는 잘 생기고 못 생긴 것이 별 차이가 없고, 60에는 좋은 옷을 입었거나 좋지 않은 옷을 입었거나 별 차이가 없고, 70에는 돈 많은 사람이나 없는 사람이나 비슷하고, 80에는 산 사람이나 죽은 사람이나 별 의미가 없다는 말이 있었다. 나이가 들면 대부분 비슷해지더라는 말이다.
그리고 시대별로 환영받는 배우자에 대해, 내가 오래 전부터 정리해 온 내용을 다음과 같이 말해주었다.
1960년대에 환영받는 남편감은 생활력이 강한 남자였다. 가족들이 굶지 않도록 열심히 일해 가족들의 생계를 책임질 줄 아는 남자여야 했다. 그리고, 아내감은 알뜰한 여인이어야 했다. 어려움을 이겨내기 위해서는 살림살이를 알뜰하게 해야 절약을 할 수 있었다. 그 시절 “알뜰한 당신”이라는 제목의 노래가 인기 있었다.
70년대는 우리나라의 산업화가 시작되던 때여서 도시로 나가 공장에 취업을 하든지 장사를 하던 사람들이 잘 되던 시대였다. 낮에 일하고 야간 대학이라도 나오면 회사, 은행. 학교 등으로 취업이 잘 되던 시대라서 도시로 용감하게 뛰쳐나갔던 사람들이 잘 되어 박력이 있는 남자를 선호했다. 그리고 시부모와 며느리가 함께 살던 때라 시부모를 잘 봉양하는 여자가 환영받는 시대라서 아내감으로는 조용한 여자를 선호했다.
80년대에는 국민소득이 늘어나 먹고 사는 문제에 대해 걱정을 벗어날 수 있었다. 부부 모임 등 친목회 모임이 생기고 여가생활에 관심을 가질 수 있었다. 그래서 여자들은 아내를 존중해주는 가정적인 남자를 원했다. 남자들은 아내와 동창회나 친목회에 부부동반을 할 기회가 많아졌기 때문인지 좌중에서 품위가 돋보이는 분위기 있는 여자를 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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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0년대에는 우리나라에 컴퓨터와 자동차 등 기계들이 급격히 늘어났다. 운전도 할 줄 알아야 하고 컴퓨터도 잘해야 했다. 도시에서나 농촌에서 기계화가 이루어져 기계를 잘 다룰 줄 알아야 환영을 받았다. 그래서 여러 방면에 유능한 남자를 선호했다. 또 경제발전에 따라 일자리가 많아져 여성의 취업이 늘어났고 맞벌이 가정이 늘어났다. 여자가 취업을 하거나 식당이나 가게를 운영하며 가정 경제를 돕게 되자 활동적인 여성이 환영을 받았다.
2,000년대 와서는 다양한 분야에서 전문성을 지닌 사람들이 국내에서나 외국에서 두각을 나타냈다. 세계적인 운동선수, 음악가 등이 유명인이 되었다. 유명 미용사나 요리사도 인기와 부(富)를 이룰 수 있었다. 그래서 어느 분야에서나 전문성이 있으면 환영받았다. 그래서 전문성이 있는 남자를 선호했다. 그리고, 여성들이 취업을 하거나 사회활동을 하면서 이혼이 늘어났다. 남편과 이혼을 하더라도 능력이나 여건을 갖춘 여성은 이혼하더라도 화려한 재혼이 가능해졌고 혼자 사는 것에 대해 어려워하지 않았다. 그래서 당당하게 “무소의 뿔처럼 혼자서 가라”는 소설과 영화도 나왔다. 그렇게 당당하게 살 수 있는 여자를 자기세계가 있는 여자라고 했다.
2010년대가 되자 젊은이들의 취업이나 사회 진출이 심각해졌다. 월급이 적고 힘든 일을 기피하여 외국인들이 많이 들어왔고, 기계화로 인하여 일자리는 자꾸 줄었다. 그래서 배우자에게 많은 것을 기대하게 되었다. 결혼할 때는 다 갖추고 시작하려 했다. 그래서 좋은 직장인이어야 했고, 자기 차와 집이 있어야 하고, 부모의 경제력 까지 기대했다. 그래서 기반(인프라)을 갖춘 남자를 원했다. 그렇게 잘 갖추고 살아야 여가를 즐길 수 있는 삶이 가능하고, 해외여행도 가끔 갈 수 있기 때문이다.
또, 국민소득이 2만 불을 넘자 취미활동이나 여가생활에도 깊은 관심을 갖게 되었다. 그래서 같은 직업인을 원하거나 취미가 같은 사람을 원하게 되었다. 실제로 연예인은 연예인끼리, 공무원은 공무원끼리, 판검사나 의사들도 같은 직업인들이 서로 어울리며 결혼하는 시대가 되었다. 직업이 같으면 함께 대화 나누기가 좋고, 직장생활 문제에 대해서도 서로 의논을 하거나 도움을 줄 수 있다. 휴가도 함께 즐길 수 있고 생활 리듬도 함께 할 수 있다. 그래서 동반자가 될 수 있는 여자를 원하게 되었다.
그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그리고, 훗날을 위해 다음과 같은 말도 해주었다.
내가 이 학생들을 가르치던 80년대 초. 그 당시 마을의 논밭이 길가에는 평당 10만원, 마을 안쪽은 5만원 정도였다. 그런데 20년 후 길가의 땅은 평당 1,000만원이 넘었다. 그때 땅을 산 사람들이 지금에는 상당한 재산가가 되었다. 그러니, 한 5년 열심히 일하고 지독하게 돈을 모아 부동산에 투자하면 10~20년 뒤에는 노후에 평탄한 삶을 누릴 수 있고, 나아가 재산가도 될 수 있다는 말을 해 주었다.
제자들과 두어 시간 이야기를 나누며 회포를 풀었다. 제자들은 동창들과 나누고 싶은 이야기가 많을 거라서, 내가 자리를 떠나야 할 거라는 생각으로 자리에서 일어났다. 제자들은 나에게 선물 두 보따리와 꽃다발을 하나 주었다. 그걸 들고 전철로 가기에는 좀 불편하니 수원까지 택시를 타고 가시라며 운전사에게 택시비도 주었다. 고맙기도 했지만 거금을 쓰게 하여 미안했다. 나도 동창회비라도 냈어야 도리에 맞는데….
내가 저 아이들에게 잘한 것도 없는데 이런 과분한 대우를 받을 자격이 있나? 정말 제자들에게 뭘 잘했는가? 잘한 게 생각나지 않는다. 제자들은 몇몇이 그런 말을 했다. 학창시절에 가장 기억에 남고, 존경하는 선생님이었다고…. 그러나 나는 돌아오는 택시 안에서, ‘교사 시절 더 잘 가르쳤어야 하는데’ 하며 반성을 했다.
요즘, 은사를 찾는 일도 그리 많지 않다. 사는 게 바쁘기도 하지만 살아가는 현재가 중요하지 흘러간 과거는 그리 중요하지 않게 여기기 때문이다. 지금 내가 그 고마운 제자들을 위해 무엇을 할 수 있는가? 오늘 받은 선물에 대해 어떻게 빚을 갚아야 하는가? 열세 살 소년소녀들이 이제 중년이 된 모습을 보게 되어 반갑고, 내게 보고 싶었다는 인사를 해주어 고마웠다. 교직에서 36년을 보낸 보람을 느낄 수 있었다. 제자들의 얼굴을 생각하며 오래도록 흐뭇해 할 것 같다.
첫댓글 제자들이 '가장 기억에 남고 존경하는 선생님'이라는 말보다 더 좋은 말이 있을까요? 부럽습니다.
부럽습니다~ 여러 곳을 옮겨다니다 보니 스승찾기를 통해 몇몇 제자들이 어렵사리 연락을 해오는데...
( 단체모임을 정말 대단해보입니다~ 페스탈로찌정신을 잘 실천하신듯?.....)
6학년 졸업반을 세번 했는데 다행이 그 아이들과 소식을 나누며 가끔 동창회에 불러주어 가보곤 합니다. 졸업반을 한 덕택인 것 같습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