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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랑스11 - 카페왕조를 이은 발루아왕조1 : 필리프 6세 영국과 100년 전쟁!
프랑스 카페왕조 샤를 4세 사후 자식이 없으니 외손자인 잉글랜드왕 에드워드 3세와 필리프 4세
의 친조카인 발루아 백작 필리프 6세 사이에 프랑스 왕을 선택해야 하는 상황이 벌어져서는
1328년에 왕위에 오른 필리프 6세는 최초의 발루아 왕조의 왕인데 치세 초기에는 자신을
선출한 귀족들에 대해 위엄을 높이기 위한 여러 정책들을 실시했지만 십자군이 실패로 돌아갑니다.
이후 프랑스의 왕위를 주장하는 영국왕 에드워드 3세의 도전을 받게 되었으니 9년 후인 1337년에
이른바 "백년전쟁" 이 발발했는데.... 필리프 6세의 프랑스군은 영국왕 에드워드 3세와 그의 아들
웨일즈공 에드워드가 이끄는 잉글랜드군에 연전연패했으니 특히 1347년 ~ 1350년 동안 유럽을
휩쓴 흑사병은 왕국의 처지를 더욱 비참하게 만들었으며 왕실 또한 흑사병을 피해갈 수 없었습니다.
그러니까 샤를 4세가 남성 후계자를 두지 못하고 사망하자 프랑스의 대제후들은 누가 프랑스
왕에 적합한지 논의했으니 한명은 필리프 4세의 딸인 이자벨이 잉글랜드왕 에드워드 2세
와 결혼해 낳은 잉글랜드왕 에드워드 3세이고 다른 한명은 필리프 4세의 동생인 발루아
백작 샤를의 아들 필리프 6세였으니 모계 직계와 남계 방계 중에 한 명을 선택해야 했습니다.
잉글랜드에서 태어난 이방인 에드워드 3세가 아니라 프랑스에서 태어나 프랑스적 본성(natura)을 갖고
있는 발루아 백작 필리프를 왕으로 선택했고 같은 해 5월 필리프 6세는 왕으로 축성식을 올렸는
데..... 루이 10세의 딸인 나바라 여왕 잔 2세와도 왕위를 둘러싸고 협상을 벌여야 했으니, 자신의 왕위
를 인정받는 대신에 잔 2세에게 나바라 왕위와 샹파뉴 및 노르망디 일부 영지에 대한 권리를 인정합니다.
이렇게 해서 프랑스 왕은 직계나 방계와는 상관없이 남성남계를 통해서만 계승된다는 원칙이
세워졌고, 이는 얼마 지나지 않아 태고적 부터 내려오는 게르만 프랑크족의 ‘살리 프랑크 법’
으로 둔갑했는데 게르만족에게는 살리 프랑크 법이 있긴 했지만 그것은 기본적으로 분할
상속을 원칙으로 했고 남성남계에 의한 단일한 왕국계승을 명시한 구절은 어디에도 없습니다.
필리프 6세는 귀족들의 선택으로 왕위에 올랐기에 권위를 내세울 수가 없었지만 1328년 8월 플랑드르
반란군과 맞선 카셀 전투에서 승리를 거두었고 1329년 6월 6일에는 17살의 에드워드 3세로부터
기옌 지역에 대해 봉건신서를 받았으며 12월에 필리프 6세는 뱅센 성에서 교회 및 세속 재판정과
관련한 토론회를 조직하면서 프랑스 왕은 성직자와 세속인을 아우르는 최고 주권자임을 과시합니다.
1332년 필리프 6세는 사법 주권을 행할 기회를 갖게 되었으니 영지계승과 관련해 고모 아르투아
여백작 마틸다와 소송중이던 로베르 3세가 문서를 위조한 것이 들통났고 이에 필리프 6세는
로베르 3세에게 추방령을 내렸으니 이는 1328년 왕위계승 관련 귀족회의 당시 자신을
지지했던 공신에 대한 엄벌이었으니...... 대귀족들에 대해 왕권을 당당하게 표출할수 있었습니다.
1332년 필리프 6세는 십자군 원정을 계획했으니 교황 요하네스 22세는 프랑스내 십일조를 십자군
원정 준비비용으로 충당하도록 하고 그를 십자군 총사령관에 임명하는데 한편으로는 프랑스
왕권이 교황권에 종속되어 있는듯 인상을 준다는 점에서 썩 마땅치 않았지만..... 필리프 6세는
필리프 4세가 보여준것 처럼 교황권 보다 우월한 프랑스 왕권의 모습을 보여줄 기회를 갖게 됩니다.
1333년 12월 요하네스 22세는 ‘지복직관론’ 을 발표하고는 프란체스코 수도회 총장 기랄 오로 하여금
유럽 전역에 전파하는 임무를 부여했지만 기랄 오는 파리에 도착하자 필리프 6세가 조직한 파리
대학 신학 교수들의 토론회에 불려가 교황의 사상이 이단적이기 때문에 철회해야 한다는 훈계를
듣고 아비뇽으로 돌아오게 되었으니..... 모욕에 충격을 받은 요하네스 22세는 1334년에 숨을 거둡니다.
이후 이단심문관 출신의 베네딕투스 12세 교황은 필리프 6세의 십자권 원정을 후원했지만 지지
부진한 준비 상황에 실망하고 1336년 1월 지원을 철회하니 필리프 6세는 좌절과 함께 권위
가 크게 실추되었다는 점도 느끼게 되었는데..... 마침 같은해 8월 플랑드르 일부 귀족들이
잉글랜드왕 에드워드 3세를 채무 불이행 문제로 파리 고등법원에 고발하는 일이 벌어집니다.
필리프 6세에게는 프랑스의 사법주권을 과시할 기회와 잉글랜드왕 에드워드 3세에게 다시한번
주종 관계를 확인시킬 기회가 찾아 왔으니 자신의 무력을 과시할 요량으로 필리프 6세는
지중해 지역에 대기하고 있던 십자군을 도버 해협으로 이동시켰는데, 위험을 감지한
베네딕투스 12세가 잉글랜드와 프랑스를 중재하려고 했으나 결국 실패로 돌아가고 말았습니다.
프랑스의 십자군 준비를 늘 위험하게 생각하던 에드워드 3세에게 지중해에 있던 십자군의 실체를 명백
하게 드러내 주는 순간이었으니 그 십자군은 이슬람을 원정하려는 기독교 세계의 보편적 군대가
아니라 잉글랜드를 침략하려는 프랑스 군대로 전락하니, 1337년 혈기왕성한 25세의 에드워드 3세는
필리프 6세에 대한 봉건신서를 철회하고 프랑스의 왕위를 요구하며 필리프 6세에게 도전장을 내밉니다.
“스스로 프랑스 왕이라고 하는 필리프 드 발루아에게...”, 도전장은 이렇게 시작되었으니
직계 모계를 통한 왕위 계승은 이미 12세기 헨리 2세에서 보는 바와 같이 잉글랜드
에서는 얼마든지 주장할 수 있는 권리였는지라.... 이렇게 해서 프랑스와 잉글랜드
두 국가들 사이에 향후 116년 동안이나 진행될 "100년 전쟁" 의 막이 오르게 되었습니다.
필리프 6세의 치세 후반기는 1337년부터 시작된 백년전쟁의 초기에 해당되는데 치세 전반기
가 왕권의 위신과 영향력을 높이려는 다양한 시도들로 이루어졌다면..... 치세 후반기는
쓰디쓴 패배의 연속과 통치의 실패, 그리고 절망적인 상황들로 점철되었으니 먼저
잉글랜드와의 전쟁은 직접적인 충돌 보다는 외교적인 연대 관계를 맺는 것으로 시작됩니다.
잉글랜드와 계속해서 전쟁 중이었던 스코틀랜드가 프랑스와 연대를 맺었고 경제적으로 잉글랜드
와 가깝고 수시로 프랑스에 반란을 일으켰던 플랑드르가 잉글랜드와 연대를 맺었고
독일 지역에서는 비텔스바흐 가문은 잉글랜드편에, 룩셈부르크 가문은 프랑스 편에 섰으며
그 밖의 수많은 제후들과 왕들은 각자의 이해관계에 따라서 잉글랜드 또는 프랑스를 지지합니다.
백년전쟁에서 잉글랜드와의 충돌은 플랑드르 경제권과 기옌 지역을 둘러싸고 벌어진 프랑스와
잉글랜드 간의 오랜 신경전의 산물이었으니.... 전자가 다분히 경제적인 문제라면 후자는
이제 막 등장한 주권 개념과 관련한 정치적 문제였는데, 봉건적 관계에서는 문제가 되지
않았던 기옌 지방이 누구의 주권에 속하게 되었는가와 관련해 첨예한 문제로 떠오른 것입니다.
백년전쟁은 1337년에 시작됐지만 영국군은 성과를 거두지 못하고 철수한후 본격적 충돌은 1340년대
부터 시작되었는데 1340년에 슬뤼이스 해전이 벌어지니 그 전에 프랑스는 노르망디와 제노바 용병
들로 구성된 대해군을 집결시켜 잉글라드해안과 선박을 습격해 잉글랜드군이 바다를 건너는 것을
저지하려고 했으며 이후 제일란트의 에클뤼즈에 정박하니 190척으로 사령관은 위그 카에레 였습니다.
잉글랜드 함대는 200척에 달했으나, 병사외에 왕비의 시녀등 비전투원이 많이 탑승한데다가, 적지 않은
수송선도 포함한 것이라 잉글랜드 함대는 전력상 열세였습니다. 해전 전문가이며 정예의 갈레선 부대
를 보유한 바르바베라는 맞아 싸워 해상전투를 제안했으나 베위셰는 이를 기각하고, 항에 닺을 내리고,
배를 봉쇄하는 것처럼 합쳐 거대한 요새로써 맞아 싸우기로 결정했으니 많은 배들이 섞였기 때문입니다.
잡다한 여러나라 배들이 모인 관계로 통일된 행동을 할 수 없었기 때문에 전력적인 우세를 고려한다면
상식적인 작전이었지만.... 해전 전문가로서 제안했는데 거부당하자 불만을 품은 바르바베라는 휘하
20척 갈레선을 이끌고 출격해 잉글랜드 함대 일부와 교전하여 에드워드 3세 왕에게 부상을 입히고는
잉글랜드 선박 2척을 나포해 전장에서 이탈하는데 성공했고 에드워드 3세는 회복해 함대를 정비합니다.
24일 아침 항에 주류중이던 프랑스 함대와 대전하니 잉글랜드 함대는 바람을 받으며 태양을 등지는 좋은
위치를 차지한채 한 부대는 정면에서, 다른 부대는 측면에서 공격하게 했는데 당시 해전은 적의 함선에
뛰어들어가 배를 빼앗는 것이 주체여서 말 그대로 백병전이었으나, 잉글랜드군 우위는 저녁까지 계속
되었고 50척의 플랑드르 함대가 우군으로 참전하면서 잉글랜드의 승리는 확정되고 제해권을 차지합니다.
프랑스 함대는 거의 모두 파괴되었거나 나포되었으니 프랑스 십자군 함대는 잉글랜드 함대에 대패
당했으며 이후 영국군은 아무 방해없이 프랑스 해안에 언제든지 상륙이 가능해졌고 1341년에는
브르타뉴 공작 장 3세가 사망하자 그의 이복형제 장 드 몽포르와 조카딸 잔 드 팡티에브르 사이
에서 공위계승을 둘러싼 전쟁이 발생했으며 이는 곧 잉글랜드와 프랑스 사이의 대결로 비화됩니다.
그 이유로는 장 드 몽포르는 잉글랜드편인 플랑드르 백작 딸 잔과 결혼을 했고, 잔 드
팡티에브르는 프랑스 왕의 친척인 블루아 백작 샤를과 결혼을 했기 때문이었는
데.... 초창기에는 블루아 백작이 이끄는 프랑스 군이 승기를 잡았으나 곧 잉글랜드의
후원을 받은 장 드 몽포르의 군대가 블루아 백작을 포로로 잡고 브르타뉴를 장악합니다.
1346년 8월 26일 크레시전투가 벌어지게 되는데.... 1346년 에드워드 3세는 흑태자와 함께 1만
2천명의 병력으로 노르망디의 라 우그에 상륙하여 동쪽으로 횡단하여 캉 시를 유린하고
7월 26일 카엔 전투와 8월 24일 블랑셰타크 전투에서 승리한후 프와시에서 센 강을 건너
파리로 향했으나 필리프 6세는 아키텐에서도 병사들을 불러들여 생드니에 대군을 집결시킵니다.
프랑스군의 저지에 막힌 에드워드 3세는 벨기에 플랑드르로 철수하기 위해 북상을 하니 프랑스
군은 그 뒤를 쫓았으나... 잉글랜드군은 낮은 개천을 방위하여 프랑스군 분대를 격파하고
솜므 강을 건너는 데 성공하니 잉글랜드군을 포위하려던 프랑스군의 작전은 실패했고,
잉글랜드군은 전투에 유리한 지형이 있는 크레시에서 대열을 정비하고 프랑스군을 기다립니다.
8월 26일 아침에 잉글랜드군은 웨일스에서 징병한 장궁병 부대의 약점을 보완하기
위해 크레시 근교 낮은 산에 진지를 구축해 방어적인 진형을 짠 에드워드 3세는
병사들에게 말에서 내리라고 명령했으니 잉글랜드군 중앙에 3개의 보병대를
배치하고, 16살이었던 아들 흑태자 에드워드가 그 중 한 부대를 지휘하도록 합니다.
완만한 경사에 걸쳐 역 V 자형으로 구성된 양익에 장궁병부대를 배치하고, 공격에 약한 그들
에게 기병의 돌격과 진격속도를 늦추기 위해 캘트롭과 장애물들을 전방에 깔아 놓았으며
에드워드 3세 자신은 후방에 진을 구축하고 풍차를 지휘소로 삼았으니 후방 언덕이
시야 확보와 안전에 좋았기 때문으로 에드워드 3세와 측근들은 그 곳에서 전투를 지휘합니다.
정오쯤에 이르러 필리프 6세가 이끄는 프랑스군이 도착했는데 프랑스군의 기사들은 자신들의 힘을
과신하고, 혈기왕성하여 무질서했고 적을 무시했으니 필리프 6세는 급히 추격해 온지라 당일은
휴식하고 다음날 공격하려 했지만 통솔이 어려움을 알고 계획을 바꾸어 전투 개시를 결정헙니다.
영국군은 잉글랜드와 웨일스, 아일랜드에 프랑스내 가스코뉴와 아키텐 및 노르망디에 플랑드르
백작과 브르타뉴공작 및 신성로마제국 에노백작등 4,000명 기사와 7,000명 장궁수에
5,000명 장창병으로 대포 5문을 가졌으며 프랑스군은 프랑스와 신성로마제국의
보헤미아왕국, 뤽상부르백작, 로렌공국에 마요르카오아국, 제노바공국 및 나바라왕국등
60,000 기병과 15,000 노궁수를 보유했으니 16,000 대 75,000 으로 프랑스군이 우세했습니다.
필리프 6세는 잉글랜드군의 장궁병에 대항하기 위해 제노바 노궁병들에게 전열을 맡겼고,
후열을 프랑스 기사 중기병부대로 채웠으니 1346년 8월 26일 프랑스 기사들은 언덕위
영국군 진영으로 돌진해 들어갔으나 잉글랜드 궁병들의 세찬 화살 공격 앞에서 대패합니다.
선공은 프랑스군 제노바인 용병들로 구성된 노궁병들이 사격을 개시했으니 15,000명의
노궁병이 볼트의 소나기를 날렸는데 동시에 프랑스 악단의 음악이 울려 퍼졌으니 이에
웨일스의 자유농민들로 구성된 장궁병 부대들이 응사하기 시작해 사격전이 시작되었습니다.
그러나 노궁병들은 전투에서 완전히 쓸모 없음을 사상자로 증명했으니 이들은 1분당 4발의 화살을
쏠 수 있었는데, 그에 비해 영국 장궁병들은 1분에 15발의 화살을 쏠 수 있었으니 에드워드 1세
시대부터 시간을 들여 연습을 시켜 숙련도가 높아져 노궁에 비해 다루기 힘들던 장궁을 완벽하게
사용할수 있었던 것이고 행군하는 동안 제노바 노궁이 비를 맞았기 때문에 위력이 급감해 있었습니다.
장궁병들은 비가 오는 동안 활줄을 풀어 놓아서 이런 대참사를 피할수 있었는데 더욱 노궁병들은 그들
의 트레이드 마크 파비스 방패도 가져오지 않았으니 후방 보급부대에 방패를 놓아두고 싸운 것이기
때문에 혼란에 빠진 채로 노궁병들은 엄청난 사상자를 낸채 퇴각하는데 사정거리나 명중률로
보면 노궁이 더 뛰어났으나, 장궁병이 언덕 윗쪽에서 아래로 사격을 했기에 지리적인 우위에 있었습니다.
노궁병들을 겁쟁이라고 생각한 프랑스 군대가 도망치는 노궁병들을 죽이기 시작했으며... 프랑스 기사
들이 줄을 맞춰 돌격했지만 경사와 진흙탕, 잉글랜드군이 미리 뿌려둔 장애물들이 돌격의 속도를
늦추어 위력을 감소 시켰으니 프랑스 기사들이 헤매고 있는 동안 장궁병들은 화살의 커튼을 뿌립니다.
무려 16번이나 돌격 시도를 했지만 프랑스 기사들은 잉글랜드군의 전열을 전혀 흐트러
뜨리지 못했고 흑태자 에드워드가 전투 중 위기에 처했지만 에드워드 3세는 구원병
을 보내는 것을 거절했는데 나중에 그는 그것이 "자신의 아들이 분발하기를 원해서"
였다고 말했으니.... 그 결과 흑태자는 자신이 아주 뛰어난 군인이라는 것을 증명합니다.
잉글랜드군은 코니쉬 보병과 웨일스 보병이 진군하는 동안 계속 장궁을 쐈으니 이 사격 때문
에 많은 프랑스 기사가 죽었으며, 밤이 되자 필리프 6세는 총퇴각을 명했으니 아주
당혹스럽고 처절한 프랑스군의 패배였는데.... 프랑스군과 제노바 용병들의 사상자는
11명의 왕자와 1,200명의 기사를 포함 15,000명 정도로 필리프 6세도 중상을 입었습니다.
반면에 영국은 기록에 보면 200명으로 매우 적은 숫자라 신빙성이 낮으니 아마도
과소평가 되었을 공산이 큰데 사망자중 프랑스 측의 중요한 귀족은 필리프
6세의 동생인 알랑송 백작 샤를 2세, 보헤미아 왕이자 신성로마제국
황제 카를 4세의 친부 얀, 플랑드르 백작 루이 1세, 로렌 공작 라울 등 입니다.
프랑스군이 퇴각하자 잉글랜드군은 부상자 중에서 몸값을 받을만한 사람을 추려냈으니 부상이
심해 옮기기 어려운 기사는 미제리코르테라는 칼로 갑옷으로 보호되지 않는 겨드랑이
부분으로 심장을 찌르거나 바이저 틈새로 머리를 찔러 죽였는데 크레시 전투에서는 소작농이
기사를 죽였으며, 기사는 기사가 아닌 평민의 화살에 맞아 죽었으므로 기사도는 종말을 고합니다.
크레시 전투는 잉글랜드·웨일즈 장궁병이 프랑스의 노궁병과 중무장 기사 조합 보다 우수함을
증명한 전투였는데, 자유 농민이었던 장궁병은 당시의 노궁병 보다 화살을 더 많이, 더
멀리 쏠 수 있었기 때문이니 크레시 전투의 결과는 이후 상당기간 전술에 큰 영향을 주게 됩니다.
크레시에서 승리한 에드워드 3세는 칼레를 11개월 동안 포위공격한 끝에 프랑스 북부에 교두보를
확보할 수 있었으니 향후 200년 넘게 잉글랜드의 지배를 받으며 잉글랜드가 대륙으로
진출하는 주요 교두보가 되지만... 전쟁은 흑사병 으로 인해 휴전 협정을 맺고 본국으로 귀환합니다.
해외 귀족들의 지원을 받은 프랑스 기사들은 잉글랜드 장궁병들에 의해 추풍낙엽처럼
떨어지고 말았으니 봉건 기사의 무용을 자랑하던 프랑스 기사들의 전투 방식은
강력한 장거리 투석기에 의해 무용지물이 되었으며 군대를 잃은 필리프 6세는
에드워드 3세 군대가 칼레시를 공격해 점령하는 모습을 지켜 보고만 있어야 했습니다.
패전은 필리프 6세에게 너무 큰 충격이었으며 왕국에서 권위는 급속도로 추락했으니 칼레, 노르망디
해안가, 브르타뉴, 기옌으로 이어지는 왕국의 북부와 서부 해안가는 모두 잉글랜드군에게 장악
되어 잉글랜드군은 마음만 먹으면 언제든지 프랑스 왕국에 상륙할수 있는 상황이 되었으며
패전은 전비 마련을 위한 과세를 힘들게 만들었고 과세가 힘들어지자 군대를 조직할수 없게됩니다.
1347년 부터 흑해 지역에서 제노바 상인들에 의해 전파된 흑사병이 전 유럽을 휩쓸기 시작했으니
마르세유부터 스칸디나비아까지 급속도로 북상한 흑사병은 유럽 인구의 절반 또는 2/3를
죽음으로 몰아넣었는데 마을이 사라지기도 했으니 14세기 초부터 시작된 인구와 식량의
불균형은 만성적인 기근을 초래했고 때문에 질병의 위협은 사람들에게 치명적인 결과를 초래합니다.
왕궁에서도 왕비와 세자비가 흑사병으로 사망했으니 1347년 ~ 1348년 동안 프랑스는 정치, 경제,
사회 모든 측면에서 위기를 맞이했으니 1348년 이후 필리프 6세는 대부분의 정사를 세자인
장에게 위임하는 수밖에 없었으며 1350년 필리프 6세는 22년 동안의 드라마틱한 치세를
마치고 사망하지만 다행히 31세의 장 2세가 왕위를 계승하는 데에는 아무런 문제도 없었습니다.
장 2세(Jean) 는 발루아 왕조 두번째 왕으로 부왕 필리프 6세와 달리 신분회의를 자주 개최해 소통
하는 군주로서의 면모를 보이고자 했지만 루이 10세의 손자인 나바라왕 샤를 2세가 일으킨 내전
으로 인해 국정이 마비될 지경에 이르렀고 다가올 잉글랜드의 침입을 제대로 방비하지 못했습니다.
결국 1356년에 재개된 잉글랜드군의 침입을 막아내기 위해 직접 군대를 이끌었으나 푸아티에
근처에서 잉글랜드 군의 포로가 되었으니 이후 국정은 세자 샤를이 이끌었고 샤를은
에티엔 마르셀의 봉기와 자크리의 봉기를 수습해야 했는데..... 장 2세는 1360년
브레티니 조약으로 왕국의 서부 지역을 양도하는 대가로 석방되었으나 1364년에 사망합니다.
장 2세는 노르망디 공작령을 물려받았으며 신성로마제국 룩셈부르크공 요한 1세의 딸 본(Bonne)
과 결혼했는데, 필리프 6세는 십자군 원정을 선포하며 장 2세를 왕위에 올릴 것을 대귀족들과
고위 성직자들로 부터 약속받았지만 그의 봉토인 노르망디에서 귀족들 모두가 충성을
다짐한 것은 아니었으니 일부는 잉글랜드왕 에드워드 3세와 긴밀한 관계를 유지하고 있었습니다.
1337년부터 잉글랜드와의 전쟁이 시작되었고 장 2세는 1340년대부터 직접 전쟁터를 누비고
다녔으니 세자로서 본분을 다하는 모습을 보여주었지만 1347년 크레시 전투에서 대패후
정치적 희생양으로 필리프 6세는 장 2세의 궁정 출입을 금했으니 대신에 아비뇽 교황궁
을 방문하면서 이탈리아에서 유입된 새로운 문화적 흐름에 크게 관심을 보이기 시작합니다.
그는 모후 잔 드 부르고뉴를 닮아 책과 회화에 큰 관심을 보이고 있었으며 교황궁을 방문했던
인문주의자 페트라르카로 부터 라틴어를 구사할줄 아는 박식한 군주로 인정받기까지
했는데 현재 루브르 박물관 내 프랑스 미술관 첫 관람실을 장식하고 있는 장 2세의 초상화
는 이탈리아 시에나 화파의 영향 아래 그가 세자였던 시절에 제작된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장 2세는 부왕을 대신해 국정을 이끌어 나가기 시작했지만 절망의 시기였으니 1347년 마르세유 부터
시작된 흑사병이 전 유럽을 휩쓸어 유럽 인구의 절반 또는 2/3가 사망하게 된 것이니 집집마다
죽음의 행렬이 이어졌고 만성적인 기근을 초래했으니 질병의 위협은 치명적인 결과를 초래했는
데, 이 모든 위기들이 지나고 1350년 8월이 되자 필리프 6세가 사망했고 장 2세는 왕위에 오릅니다.
장 2세는 정사를 돌보는 데 있어서 폐쇄적이었던 필리프 6세와 달리 최대한 개방적이며 소통하는 모습
을 보여주고자 노력했으니 즉 그는 루이 9세나 필리프 4세를 추종하던 필리프 6세의 방식과는 달리
정치 사회 구성원들과의 소통을 통해 이들의 지지를 이끌어내고 왕권의 정당성을 획득하고자 했습니다.
1351년 1월 30일에는 흑사병 이후 전개되고 있던 물가와 임금 상승에 대한 강제적인 안정화를
내용으로 하는 칙령을 반포했고 에드워드 3세가 창설한 가터 기사단에 자극을 받아 1352년
1월 신성기사단을 조직했는데 군제를 재정비하고 귀족들의 충성심을 확보하고자 했으며
지방 신분회의들의 개최를 통해 정당한 동의에 입각한 세금을 확보하기 위해 노력했습니다.
하지만 이러한 그의 모든 노력은 프랑스 왕위를 주장하는 새로운 인물에 의해 위협받기 시작했으니....
그 인물은 바로 나바라 여왕 잔 2세의 아들로 1349년 나바라 왕위에 오른 샤를 2세였는데
어머니의 영지를 물려받았기 때문에 그는 나바라 왕국 외에도 프랑스 왕국 내에 샹파뉴와 노르망디
에 일부 영지를 가지고 있었는데 1352년부터 샤를 2세는 장 2세의 측근들과 자주 충돌하기 시작합니다.
1354년 1월에는 장 2세의 최측근인 샤를 드 라 세르다를 암살했으니 후대에 ‘사악왕(le Mauvais)’
이라는 별명이 붙은 나바라 왕 샤를 2세는 자신이 거느리던 샹파뉴와 노르망디 영지를 기반으로
장 2세 반대파들을 규합하고 세력을 불려 나갔으며 왕정 내부에서도 관료 세력들이 젊은 샤를
2세의 왕위계승 정당성을 긍정하면서 그를 필리프 6세의 실정을 개혁할 왕으로 지지하고 있었습니다.
결국 북부 프랑스 지역에서는 내전에 가까운 상황이 연출되고 있었고 중앙에서는 장 2세의 명령이
제대로 관철되지 않는 국정 마비 사태까지 오게 되었는데, 하지만 프랑스의 개혁을 바라는 이러한
세력의 열망과는 달리 실제 샤를 2세는 개혁이 무엇인지도 모르는 야심 많은 철부지에 불과했습니다.
장 2세를 압박하고 자신의 세력을 불리기 위해 샤를 2세는 잉글랜드와 손을 잡았고, 심지어
에드워드 3세와 왕국의 분할까지 논의했으니 이러한 태도는 결국 그의 지지자들을 점차
이탈시키게 만들었고 왕국의 분열을 막기 위해 그와 어쨌든 화해를 하려고 했던 장 2세
를 분노케 했는데 결국 1356년 4월 장 2세는 기습적으로 샤를 2세를 체포하는 데 성공합니다.
1347년 잉글랜드와 맺은 휴전이 1355년에 끝나기 때문에 잉글랜드의 공격에 대비해 전국적인 과세
의 필요성 때문에 총신분회의를 개최했지만 왕국의 개혁과 샤를 2세의 석방에 대한 요구들로
과세는 무산되었고 장 2세는 전쟁을 제대로 준비하지 못하니...... 1356년 9월 기옌을 출발한
잉글랜드 왕세자 웨일즈공 에드워드의 군대가 프랑스 남부를 노략질하자 장 2세는 급히 출정합니다.
1356년 9월 19일 장 2세는 푸아티에에서 에드워드 군대와 큰 전투를 벌이는데.... 푸아티에 전투는
1356년 9월 19일 벌어진 대규모 전투로 백년전쟁의 1,2기를 거쳐 3차례 영국에게 결정적 승리를
안겨준 전투중 두번째니 3번의 전투는 크레시 전투, 푸아티에 전투, 아쟁쿠르 전투인데 1356년
8월 8일 흑태자 에드워드는 대규모 기병 약탈전을 영국령 아키텐에서 출발해 북쪽으로 수행합니다.
영국군 약탈 출격 부대들은 거의 저항을 받지 않았으니 영국인과 프랑스의 가스코뉴 출신 군대는
수많은 마을들을 불태워 없애고, 철저히 약탈하며 루아르 강 인근의 투르(Tours)에 이르렀는데
폭우로 에드워드의 군대는 도시와 성을 공격하지도 마을들을 불태우지도 못하는 상황이 됩니다.
작전의 지연은 프랑스 왕 장 2세가 에드워드의 군대를 따라 잡아 격멸하겠다는 시도를 현실화
할수 있게 해주었으니... 노르망디에서 랭커스터 공작 헨리의 영국 군대와 대치 중이던
왕은 영국군에 포위당해 있던 투르의 북방인 샤르트르에 대군을 소집했는데 기동력을 높인
다는 이유로 17,000 명 보병들을 해산해 버렸으니 이는 양군의 병력 차를 크게 줄여주었습니다.
프랑스군의 이동을 듣고 에드워드는 질서있게 후퇴하였으니 프랑스군은 푸아티에 남서쪽에서
영국군을 따라잡았는데 흑태자는 16세때 크레시 전투에서 사용된 전술을 사용하기로
결심했으니 군대를 좌측의 시내와 뒤편의 숲으로 보호되는 수비에 좋은 평원에 배치 합니다.
푸아티에에서 보르도로 가는 주된 교통로인 옛 로마 도로 위에 엄청난 양의 약탈품으로 가득찬
짐수레들을 놔두어 오른쪽 측면을 보호하는 방벽으로 삼았으며 하마한 기사와 병사들을
세개의 대열로 편성하고 잉글랜드와 웨일즈 출신 장궁 궁수들을 양 측면에 V 자 형태로
배치하였으며 소수의 기병 부대를 장 드 그레이 3세의 지휘하에 후방의 숲 속에 매복시킵니다.
프랑스군은 4개의 단위로 편성되었는데 최전방에 선 첫번째 부대는 클레르몽 장군이 지휘하는
300명의 정예 기사와 독일인 용병 파이크맨으로 구성된 혼성부대니 이 부대의 임무는 영국
의 궁수 대열로 돌격하여 위협을 제거하는 것이었고 뒤에는 하마한 기사로 구성된 세개의
보병집단이 따랐으니 지휘관은 샤를 5세인 왕세자 도팽, 오를레앙 공작, 국왕 장 2세였습니다.
영국군 좌익의 위장 퇴각은 전투를 개시하게 만들었으니 이는 프랑스 기사들이
궁수들을 향해 성급한 돌진을 하게 만들었지만 영국군들은 예상하고 있었고
재빨리 적에게 화살 비로 공격을 가했으니 특히 기사가 탄 말이 목표물 이었습니다.
프랑스 기사 갑옷을 영국 화살이 관통하지 못했고 갑옷의 표면에 미끌어지거나 화살촉이 깨졌다고
기록하지만 영국은 뾰족한 송곳 같은 촉을 가진 화살은 그 시대 대부분의 플레이트 아머를 관통
하는 성능을 가졌다고 했는데 정지된 상태의 판금철판에 대한 장궁사격 에서는 영국측 기록이
맞지만 갑주는 굴곡이 있고 목표물인 움직이는 사람은 좋은 표적이 아니니 양쪽 다 일리가 있습니다.
마갑은 측면과 후면에서의 공격에 취약하므로 영국 궁수대는 기사들의 측면으로 위치를 옮겨서 말을
쏘았으니 이는 돌진하는 기사들을 저지하는 널리 알려진 방식인데 쓰러지는 말들이 적의 전열을
붕괴시켜 적 기사들의 집단이 가하는 위협을 없앨 수 있으니 그런 경우 기사들에게는 재앙이었습니다.
첫번째 기마부대 공격후 왕세자 도팽이 이끄는 보병 부대인데 이들은 갑옷을 입은 상태의 무거운 몸으로
1킬로 이상 떨어진 적군 진영 게다가 길도 오르막이었으니 행군하느라 기진맥진하였던 상태였는
데 하마만 하였을뿐 영국의 하마 기사들 처럼 궁병, 창병과 혼성 대형을 이루는 정도까지는 아니었습니다.
이들은 영국군 전열에 이르지도 못한채 쏟아지는 화살비에 큰 손실을 입고는 부대를 재편하기 위해
퇴각하기 시작하였으며 그 다음 세 번째 부대인 오를레앙 공작의 보병들은 왕세자의 부대
가 공격도 시도하지 못하고 물러나는 것을 보고는 공황상태에 빠져서 뒤돌아 퇴각하기 시작합니다.
달아나는 프랑스군은 국왕 장 2세가 인솔하는 마지막 전열의 움직임도 묶어 버렸으니
이때 영국 궁수들은 화살을 다 쏴 버린 상태였지만 장 2세의 제4 부대가 패주하는
부대에 발이 묶여 있는 사이 궁수들은 재빨리 보병들 사이에 섞여 보병대오를 형성
하였으며 이들 중 일부는 말에 올라타 즉흥적으로 기병대오를 형성하려 시도했습니다.
장 2세의 네번째 부대가 전선에 이르러 격전이 벌어졌는데 흑태자에게는 후방 숲속에 잠복시켰던
기병대가 있었고, 숲에서 빠져 나와 우회하여 프랑스군의 측면과 후방을 기습하니 프랑스군
은 포위당한다는 두려움에 도주를 시작하였고 프랑스 왕 장 2세는 측근들과 함께 포로가 되었습니다.
프랑스에게 있어 군사적으로나 경제적으로 결정적인 참패였으니 프랑스는 왕의 귀환을 위해 몸값으로
나라 전체의 1년치 수익의 두배인 300만 크라운을 준비해야 했는데 그러나 장 2세는 포로 생활을
하면서도 융숭한 대접을 받으며 영국에서 이국생활을 즐기다가 몸값을 마련하기 위해 귀국했지만
몸값을 다 준비할 능력이 없다며 1364년에 영국으로 자진해서 되돌아 왔다가 수개월 후에 병사합니다.
푸아티에 전투에서 프랑스군이 대패한데다가 국왕 장 2세까지 생포되었으니 같은 패전이었
지만 왕국의 여론은 크레시 당시와 전혀 달랐으니 모든 비난의 화살은 국왕도 보필하지
못하고 패전한 귀족층들에게 향했고..... 반면 장 2세는 무능한 귀족들에도 불구하고
왕국을 구하기 위해 끝까지 싸우다 포로가 되는 수모를 겪은 숭고한 왕으로 여겨졌습니다.
귀족이 아닌 부르주아가 주도하는 신분회의가 모든 국정을 담당하고 개혁을 이루어야 한다는 움직임
이 힘을 받기 시작했으니 1357년을 전후로 파리시장 에티엔 마르셀과 랑 주교 로베르 르 코크
가 주도하는 신분회의 운동이 국정을 장악하고 개혁칙령을 발표했지만...... 부왕을 대신해
섭정이 된 세자 샤를은 끌려다니다가 곧 샹파뉴와 부르고뉴 귀족들을 규합해 반격에 나섭니다.
1358년 장 2세가 없는 수도 파리는 가장 격렬한 해를 보냈으니..... 세자 샤를의 공세에
파리 시장 에티엔 마르셀의 저항은 격화되어 갔고 그 사이 5월에는 파리 북부 농촌
보베지에서 무능한 귀족 타도와 국왕 보필의 기치를 내세운 자크리의 난이 발발합니다.
에티엔 마르셀은 한때 자크리 세력과의 연대를 타진해 보기도 했지만 자신들이 지지하던
나바라왕 샤를 2세는 도리어 반귀족적인 이 자크리 세력들에게 대학살로 응답했으니
결국 에티엔 마르셀 세력은 포위된 파리에서 저항을 계속하다가 내분이 일어나게
되었고 7월 31일 에티엔 마르셀이 암살되면서 파리 봉기는 실패로 돌아가고 말았습니다.
이후 세자 샤를은 핵심 주동자만을 처벌하고 에티엔 마르셀의 봉기나 자크리의 봉기에
가담했던 많은 자들에 대해 관대하게 용서를 베풀었으니.... 이로써 나바라 왕 샤를
2세에 대한 지지는 크게 줄어들었고 세자 샤를은 새로운 국정의 주도자로 떠오르게
되었으며 이후 세자 샤를은 잉글랜드와의 협상을 통해 부왕 장 2세의 환송을 추진합니다.
장 2세는 독자적으로 런던에서 에드워드 3세와 협상을 진행했는데 그 내용은 막대한
몸값 지불은 물론 왕국 서부 지역 양도를 조건으로 한 자신의 석방이었지만......
이제 프랑스인들에게 하나의 정치 공동체가 된 왕국은 분할 및 양도 불가능한
것으로 여겨졌고 이에 세자 샤를이 주도하는 총신분회의는 장 2세의 제안을 거절합니다.
장 2세는 세자 샤를의 행동에 분개했고 에드워드 3세는 자신의 주장을 관철하기 위해 1359년 10월
다시 한번 프랑스를 침공했지만 세자 샤를은 도시의 철통 수비만을 주문하며 아무런 군사적
대응을 하지 않았고 겨울을 맞이한 에드워드 3세는 약탈도 못하고 추위에 떨다 물러가고 말았습니다.
1360년 에드워드 3세는 장 2세에게 애초 안 보다 줄어든 액수와 영토를 요구했고 장 2세는 독단적
으로 이를 수용했는데 이 브레티니 조약에 명기된 몸값은 향후 프랑스에 지속적인 과세의 명분이
될 만큼 큰 액수였고 양도하기로 한 영토 또한 과거 헨리 2세의 통치 영역과 맞먹는 크기였습니다.
1360년 왕궁으로 귀환한 장 2세는 세자 샤를을 견제하면서 왕권을 회복하기 위한 정책들을 펼쳐나가니
화폐개혁을 통해 양화인 ‘프랑크화’ 를 주조했고 뱅센성과 바스티유 축조를 계획했으며 전쟁의 피해
를 복구하고 몸값 지불을 위한 과세를 진행했는데 1364년 봄에 장 2세는 브레티니 조약 이행 문제
와 볼모로 남아 있던 왕자 루이의 도주 문제로 런던을 다시 방문했다가 4월 8일 런던에서 사망합니다.
샤를 5세 (Charles V le Sage) 는 발루아 왕조의 세번째 왕으로 1364년 즉위한 이후부터 잉글랜드에
대해 승리를 거두고 왕국내 평화와 질서를 확립했는데 전사보다는 현자로서의 이미지를 널리
알렸고 스스로 프랑스어 번역을 장려하여 프랑스 왕국의 문화적·학문적 발전에 크게 기여했으며
성스러운 왕권과 왕국간의 불가분한 관계에 대한 왕권 이데올로기를 공식화하고 널리 선전했습니다.
샤를 5세는 즉위 이전부터 정치 무대에 등장했으니 장 2세에게 왕위를 요구하며 도전하던 나바라왕
샤를 2세와 친분 관계를 맺었고 1356년 나바라 왕이 장 2세에 의해 체포될 당시에도 연회장에
함께 있다가 처벌을 받아야 했는데 무능해 보였던 샤를 5세는 부왕 장 2세가 1356년 푸아티에
전투 후에 포로로 잡혀가고 에티엔 마르셀의 봉기와 같은 위기들을 거치며 세자 수업을 받게됩니다.
즉위한 샤를 5세는 왕국의 재건에 매진했으니 왕권을 중심으로 한 평화와 질서의 확립을 목표로
하고 있었기 때문에 폭력적 사태를 초래하는 요인들인 척결 대상들은 잉글랜드군, 나바라왕
샤를 2세의 세력, 그리고 평화 기간에 비적 집단이 된 구 용병 세력들이었는데 1370년경
까지 장군 베르트랑 뒤 게클랭을 등용해 짧은시간 내에 효과적으로 이들을 모두 격퇴합니다.
샤를 2세는 패배해 나바라왕국으로 돌아갔으니 프랑스에 대한 개입을 할수 없게 되었으며, 전화의
피해가 적었던 동남부 프로방스에 준동하는 용병 출신 비적들을 소탕했고 잉글랜드를 국제적
으로 고립시키기 위해 프랑스 외부 세력들과의 연대를 공고히 해 나갔으니 신성로마제국 황제
인 카를 4세는 샤를 5세의 외숙부로 든든한 지원자가 되었고 아비뇽 교황 우르바누스 5세
와 관계도 돈독히 해 두었으며 카스티야는 물론 스코틀랜드, 웨일즈와도 동맹 관계를 구축합니다.
왕국의 질서와 평화를 확립하는 일과 함께 샤를 5세는 왕권을 공고히 하기위한 이데올로기적 작업에
착수했으니 그 당시까지 산발적으로 내려오던 왕권의 상징들을 하나의 일관된 체계로 고안한
것인데 메로빙거-카롤링거-카페(발루아)로 이어지는 프랑스 세 왕조들의 혈통의 연속성과 신성성
을 바탕으로 프랑스 왕권은 가장 기독교적인 왕으로서 독보적인 은총을 받는다는 내용 이었습니다.
왕국의 방어를 의미하는 백합 모양의 왕실 문장을 삼위일체를 뜻하는 세 송이로 정리하고 신성한
붉은 왕기의 전설, 성자 레미가 받은 마르지 않는 성유에 의한 축성식을 강조하였으며 무엇
보다도 필리프 4세가 발전시켰던 프랑스 왕의 연주창 안수 능력이 크게 부각되었으며 신체가
병약했던 샤를 5세는 스스로를 ‘현명왕(le Sage)' 으로 내세우며 새로운 왕권의 모범을 보였습니다.
전사 보다 현명왕을 통해 보여주고자 하는 국왕은 왕국에 대한 정보들과 학문적 성과들을 수집하고
실천적으로 운용해 왕국을 경영하는 자였으니 부왕 장 2세의 장서들을 바탕으로 루브르궁에 왕실
도서관을 개장하고 막대해진 재정들을 바탕으로 서적들을 제작하고 구입했으니 서적들의 채색
삽화에는 도서관에서 책을 읽는 샤를 5세의 모습이 그려졌고 귀족들을 모아 독서회를 조직했습니다.
또한 니콜 오렘과 같은 신학자들에게 아리스토텔레스의 『정치학』 과 『윤리학』 을 프랑스어로 번역
하도록 후원해 프랑스어 발전에 큰 족적을 남겼는데 필리프 6세와 장 2세부터 시작된 왕실의
프랑스어 번역운동은 샤를 5세에 들어와 궤도에 올랐고 대귀족들은 현명한 제후들로서의 모습
들을 선전하기 시작하니 문화적 주도권을 장악함으로써 발루아 왕조의 정당성을 확립한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샤를 5세는 왕국내 남아있는 잉글랜드 세력을 격퇴할 계획을 세우고 있었으니 이를
위해서는 브레티니 조약으로 강제된 평화를 깰 전쟁의 빌미가 필요했는데 계기는 1368년
‘가스코뉴인들의 상소’ 이니 잉글랜드에서도 프랑스와 전쟁이 장기화되자 무거운 과세가
부과되었고 기옌 지방 남부 가스코뉴인들은 통치자인 왕세자 에드워드의 과세에 반발 합니다.
이들은 봉건제적 질서에 따라 기옌 지방의 최종 종주권자인 샤를 5세에게 에드워드를 고발하는
상소를 올리게 되니 다시 한번 기옌 지방은 잉글랜드와 프랑스라는 두 주권자들의 충돌
지대가 되었는데 샤를 5세는 에드워드의 법정 출두를 명했고 당연히 에드워드왕은 이를
거부했으며..... 또 당연히 샤를 5세는 기옌 몰수를 선언했고 이로써 전쟁이 다시 시작 됩니다.
1377년 말까지 진행된 샤를 5세의 원정은 커다란 성과를 거두었으니 브레티니 조약으로 잉글랜드에 양도
하기로 했던 영토들을 되찾았고 기옌 지방과 잉글랜드 남부 지방에 대한 공격으로 잉글랜드는 연패의
늪에서 허덕였는데 이번에는 행운의 여신이 프랑스를 향하니 1376년 뛰어난 무용을 자랑했던
잉글랜드 왕세자 웨일즈공 에드워드가 사망했고, 이듬해 백년전쟁의 주역 에드워드 3세 또한 사망합니다.
10세 밖에 안된 리차드 2세가 에드워드의 손자로 왕위에 올랐으나 잉글랜드 입장에서는 전열을 가다
듬고 프랑스를 공격할 처지가 아닌지라 샤를 5세는 브르타뉴와 칼레, 기옌 지역 일부를 제외
하고 프랑스 왕국에서 잉글랜드군의 영향력을 크게 약화시키는데 성공했으니 향후 잉글랜드는
리차드 2세의 실정과 1399년의 반정의 영향으로 당분간 프랑스를 공격할 생각을 하지 못합니다.
1378년 1월 샤를 5세는 외숙부인 신성로마제국 황제 카를 4세 일행을 프랑스로 초대했으니
잉글랜드의 침략을 물리치고 확고한 주권을 확립한 자신의 왕권을 유럽세계에 과시하는
행사였지만 그는 처음으로 신분회의의 동의 없는 전국적인 과세가 일방적으로 시행했는데
에티엔 마르셀의 봉기후 약화된 신분회의 운동은 왕권에 의한 일방적 과세를 조장한 것입니다.
대귀족들은 일방적인 과세를 왕보다도 악용할 소지가 컸으니 국가 재정의 주요 목적이 전쟁비용인
국가 체제에서 전쟁의 주역들이자 그 재정의 수혜자들이 바로 그들이었기 때문이라.... 샤를 5세
는 1380년 11월 16일 임종을 앞두고 모든 세금을 철폐하라는 유언을 남기고 죽었지만 대귀족
들이 이 좋은 먹잇감을 철폐할리 없었고 반면 이 유언은 소문으로 퍼져 민중 반란을 야기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