드라마 <야인시대>가 지난 1월20일부터 2부가 시작되었다. 안재모가 열연한 청년 김두한 시대가 지나고 김영철이 연기하는 장년 김두한 시대가 펼쳐지는 것. 그런데 앞으로 전개될 <야인시대>에서 새롭게 등장하는 주요 인물이 있다. 67회 정도부터 등장해 김두한이 사망하는 마지막회까지 김두한을 최측근에서 보좌할 조일환씨(65)다.
조씨는 이미 김두한의 공식 후계자로 널리 알려진 인물. 또한 60∼70년대 전국을 휘어잡았던 주먹계의 살아있는 전설이기도 하다. 최근 자신과 김두한의 인연, 알려지지 않은 비화를 담은 책 <후계자>를 펴내기도 한 그를 만나 파란만장한 인생역정과 ‘야인시대 2부’에 그려질 김두한의 실제 면모를 미리 들어보았다.
천안에 있는 자택에서 만난 조일환씨는 육중한 몸과 보통 사람의 두세 배는 족히 될 듯한 주먹 등 환갑을 훨씬 넘긴 나이에도 여전히 상대를 제압하는 힘이 느껴졌다. 또한 주먹에 남아 있는 깊은 상처들, 끝마디가 없는 오른손 새끼손가락이 그의 거칠었던 지난날을 상징처럼 보여준다.
“요즘은 야인시대 보는 재미에 삽니다. 더구나 앞으로 제가 가까이서 모시던 시절의 모습이 그려지니까 설레기도 하고, 한편으로 잘못 그려질까봐 걱정이 되기도 합니다.”
인터뷰는 자연스럽게 드라마 <야인시대> 이야기부터 시작되었다. 그는 “한때 김두한이 종로 상인들에게 돈을 뜯어 그걸로 술을 마시고, 기생들과 노는 모습이 나오는 등 사실과 다른 모습이 그려져 화가 나기도 했지만 전체적으로 그의 애국심과 의리가 잘 그려진 것 같다”며 흐뭇한 미소를 지었다.
김두한에 대해 그만큼 잘 아는 인물도 많지 않다. 따라서 드라마를 제작하기 전 작가나 PD가 자문을 많이 구했을 것 같다고 하자 “그렇지 않았다”고 한다. 본인으로서도 할말이 많았을 것 같은데 의외였다.
“드라마가 시작되기 전에 이환경 작가와 장형일 PD로부터 만나자는 연락이 왔지만 안 만났어요. 물론 그들을 격려해주고 싶고 도와주고 싶죠. 하지만 제가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는 건 월권이란 생각이 들었어요. 사람들은 누구나 남이 자기 영역을 간섭하면 기분이 나쁘잖아요. 그들의 영역을 존중해야죠. 저는 가만히 있다가 잘못 그려지는 부분이 있으면 그때 바로잡으면 된다고 생각합니다.”
상대의 영역을 존중하고 침범하지 않는 것은 과거 주먹들 사이의 불문율이었다. 70년대 후반, 정정당당한 대결 대신 생선회 칼을 들고 조직적으로 상대를 습격하는 신흥 조폭의 등장으로 이런 전통이 깨어진 지 오래지만 그는 여전히 전통 주먹시대의 정신을 고수하고 있는 것이다.
삼성 이병철 회장 다리 부러뜨리기 위해 집앞에서 잠복하기도
그렇다고 그가 <야인시대>를 모른 척한 것은 아니었다. <야인시대> 실제 주인공들과 함께 촬영장을 찾아 격려하고, 출연자들이 연기하는 데 도움이 되도록 김두한에 대한 에피소드를 들려주는 등 남다른 애정을 쏟았다.
드라마 1부에서 김두한은 패기와 의협심이 강한 인물로 그려졌다. 그렇다면 장년이 된 후 김두한의 실제 삶은 어땠을까.
“말년엔 동지도 후배도 다 떠나고 참 외롭게 살았어요. 돈 때문이었죠. 만약 그 분이 권력에 편승했더라면 동지와 후배들에게 돈도 많이 나눠주었을 테니까 그렇게 외롭게 살지는 않았을 겁니다. 하지만 지금 이렇게 많은 사람들에게 갈채와 존경을 받지는 못했겠죠. 이제 드라마를 통해 그분의 정신이 바로 알려지는 것 같아 흐뭇합니다.”
조씨는 김두한에 대해 “동지들을 사랑했지만 그들보다 국민을 더 사랑한 사람”이라고 소개했다. 조씨가 이야기한, 평생 양복 3벌 이상 가진 적이 없고, 돈이 들어오면 자기가 쓰기보다는 어려운 사람들에게 나눠주고, 심지어 입고 있던 외투마저 헐벗은 사람에게 나눠주고 돌아오는 김두한의 모습은 분명 권력과 결탁해 이권을 챙기는 데 주력하는 오늘날의 조폭과는 달랐다. 하지만 그게 꼭 좋은 것만은 아닌 모양이다.
“그분과 제가 다른 점이 딱 하나 있는데 바로 돈에 대한 것이에요. 그분은 깨끗하게 살았지만 그로 인한 동지와 후배들의 고통이 너무 컸어요. 부조리하게 돈을 갈취해서는 안되지만, 어느 정도 품위유지를 할 정도의 돈은 있어야 한다는 게 그분을 보면서 제가 한 생각이에요. 그래서 전 일찍부터 사업을 하면서 후배들이 자립할 수 있는 길을 닦아놓으려고 했죠.”
그가 61년 김두한의 부름을 받으면서 처음 인연을 맺었다. 당시 ‘천안 곰’이란 별칭으로 불리던 그는 천안을 시작으로 차례차례 전국의 기차역 주먹조직들을 평정, 맹위를 떨치고 있었다.
“천안에서 태어나 여섯살 때 고아가 되어 떠돌이 삶을 살았어요. 걸인, 소매치기, 넝마꾼 패거리들의 ‘꼬붕’이 되어 생활을 했죠. 지금 같은 겨울이면 길거리에서 15명이 모여 서로 끌어안고 잠을 잤는데, 아침에 깨어보면 절반 이상이 얼어죽어 있어요. 하루하루 ‘생’과 ‘사’의 갈림길에서 살았죠. 그때부터 자연스럽게 삶에 적응력이 생긴 것 같아요.”
그는 17세였을 때 몸무게가 90kg이 넘은데다 운동으로 단련된 몸으로 이미 그세계에서 주목받기 시작했다. 그는 자연스럽게 천안역의 주먹들과 매일매일 싸움을 벌이며 천안역 보스로 성장했다. 당시 천안은 우리나라 교통의 중심지였다. 이어 그는 기차길을 따라 대전, 평택, 수원, 서울 등 전국의 역전을 차례로 평정했다.
“그땐 등을 기댈 곳만 있으면 1백명과 싸워도 이길 수 있었어요. 제가 지나간 자리엔 상대편 사람들이 다 널브러질 정도였죠. 뿐만 아니라 조직도 컸어요. 아마 우리나라 주먹계 역사상 하루 만에 진짜 주먹 1천명을 동원할 수 있는 사람은 저밖에 없었을 겁니다.”
물론 죽을 고비도 많이 넘겼다. 상대편에서 주먹으론 상대가 안 되자 테러를 한 것이다. 자고 있을 때 권총을 들이대 포박당한 후 죽을 정도로 두드려맞은 채 백사장에 버려진 적도 있었고, 뱀이 득실득실한 깊은 구덩이에서 구사일생으로 살아나온 적도 있었다.
이렇듯 잘 나가는 그였지만 김두한의 부름을 받자 만사를 제쳐두고 서울로 올라와 김의 오른팔이 되었다. 당시 김두한은 전국 폭력배들에게 새 삶을 찾게 해주자는 취지로 애국단이란 단체를 만들었다. 하지만 일이 꼬이는 바람에 전국의 주먹들로부터 지탄과 협박을 받게 되었고, 그때부터 동료, 후배 주먹들이 그에게서 등을 돌리기 시작했다.
그래도 김두한은 자기가 옳다고 하면 앞뒤 안 가리고 밀고 나가는 성격이었다. 김두한이 국회의원을 하던 시절의 일이다. 구치소로 재소자 면회를 갔는데 한참이 지나도록 면회를 시켜주지 않고 있었다. 그런데 자기보다 늦게 온 여당 국회의원이 먼저 면회하러 들어가는 게 보였다. 그는 그 순간 구치소 책임자를 한 주먹에 때려눕혀 버렸다. 그에게 맞은 책임자는 다음날이 되어서야 제정신을 차렸을 정도로 그의 주먹이 셌다고 한다.
김두한을 납치했던 조일환
조씨는 재미있는 에피소드를 또 하나 들려주었다. 65년 삼성에서 사카린을 밀수하다 적발돼 국민들이 분노한 사건이 있었다. 그때 김두한이 조용히 조씨를 불렀다.
“삼성 이병철 회장을 국민의 이름으로 응징을 해야 한다며 저에게 이회장의 다리를 부러뜨리라고 하더군요. 저 역시 고민할 필요도 없이 ‘알겠다’고 했어요. 그런데 솔직히 그때 이회장이 어디에 사는지도 몰랐어요(웃음). 그래도 김의원 말씀이니 하라면 해야죠.”
그는 즉시 수소문해 알아낸 이회장 집앞에서 잠복을 했다. 하지만 3일이 지나도록 이회장은 얼굴도 볼 수 없었다. 나중에야 안 일이지만 그때 이회장은 일본에 머물고 있었다. 김두한 만큼이나 조씨 역시 단순하고 우직한 성격의 소유자인 셈이다.
“며칠 후에 잠복을 중단하라고 하더군요. 그리고 김의원이 직접 다른 방법으로 응징을 했는데, 그게 바로 유명한 국회 인분투척 사건입니다.”
언뜻 즉흥적이고 단순해 보이는 김두한의 모습이지만 그렇다고 마냥 단순하기만 했던 것은 아닌 모양이다. 참아야 할 땐 참을 줄 아는 강한 인내력의 소유자였다는 게 조씨의 이야기. 67년 제7대 국회의원 선거 때였다고 한다. 김두한은 아무 연고도 없는 경기도 수원에 공천을 받아 빈 가방 하나 달랑 들고 내려가 선거를 치렀다. 하지만 탁월한 연설솜씨로 금세 유권자들을 사로잡아 투표일을 며칠 앞두고부터 민심이 그에게 쏠리기 시작했다.
“선거를 하루 앞두고 다방에 앉아 차를 마시고 있는데 누군가 오더니 ‘야, 두한아’ 그러면서 시비를 걸어요. 나중에 알았지만 일부러 시비를 건 것이고 싸움이 붙으면 김의원을 잡아가려고 밖에 경찰들이 대기하고 있었어요. 김의원이 상대를 안하니까 갑자기 뜨거운 엽차를 그분 얼굴에 쫙 끼얹는 거예요. 그 순간 제가 일어나려니까 김의원이 제 손을 탁 잡고는 참으라고 하면서 자리를 피하더라고요. 상대측 작전에 말려들지 않으려는 생각에 그 수모를 다 참으면서 인내심을 발휘한 거죠.”
|
김두한의 후계자란 말에 사인을 요청하는 여학생들.
하지만 김두한은 결국 국회의원에 당선되지 못했다. 개표를 하던 중 그가 1등으로 올라서자 갑자기 개표를 중단하고 반공법 위반으로 구속했기 때문이다.
그후 김두한의 삶은 궁핍과 고난의 연속이었다. 누가 금색 덩어리를 가져와 ‘내가 캔 금이다. 같이 금광사업을 하자’고 하면 믿고 투자를 할 정도로 사람을 잘 믿다보니 사기도 많이 당했다. 또한 정릉 국제관광단지 개발사업을 추진하던 중 직원들에게 일을 믿고 맡기다 직원이 횡령을 하고 사라지는 바람에 빚만 잔뜩 진 채 사업을 접어야 했다.
“정말 기가 막힌 일도 있었어요. 71년 8대 국회의원 선거 때였는데, 누군가 몇몇 여당후보에게 김두한이 지지연설을 하도록 해주겠다며 돈을 챙긴 거예요. 그러니까 김의원은 당신 이름으로 일어난 일이니 어쩔 수 없지 않냐며 진짜 지지 연설을 하겠다며 유세장엘 갔어요.”
아무리 김두한이 자신의 후계자로 공언할 만큼 충성심이 강하고, 실제로 10년 넘게 김두한을 수행하며 한번도 말을 거역한 일이 없는 조씨였지만 ‘이것만은 아니다’ 싶었다. 그는 당장 차를 몰고 유세장으로 가서 찬조연설을 할 준비를 하는 김두한을 납치해 고향 천안으로 내려왔다.
“제가 ‘타시죠’ 하니까 ‘알았어’ 하면서 타더군요. 그분도 정말 하고 싶지 않았던 일이어서 두말없이 제 말을 들은 거죠. 그러자 여당에선 난리가 났죠. 그 일로 인해 전 죽이겠다는 위협과 평생 먹고 살 정도로 돈을 주겠다는 회유를 동시에 받았어요. 하지만 아닌 건 아닌 거죠. 그때 김의원이 저에게 그러더군요. ‘역시 내 후계자다워’라고.”
이 일이 있은 지 1년여 만인 72년 11월 김두한은 의문의 죽음을 맞았다. 후계자였던 조씨로서는 후계자라는 명예와 함께 김의원의 가족들을 챙겨주어야 하는 책임과 의무가 생겼다.
“돌아가시기 얼마 전에 저에게 그런 말을 하더라고요. 나와 꼭 닮은 아들이 하나 있으니 잘 부탁한다고. 깜짝 놀랐죠. 저도 그때서야 본부인 이재희 여사, 둘째 부인 김부미 여사, 그리고 마지막 돌아가실 때까지 동거했던 박정인 여사 외에 또다른 부인이 있었다는 걸 알았어요. 고인의 유언대로 마지막 부인인 김순옥 여사와 막내 아들 범상군을 제가 책임졌어야 하는데, 소식이 끊기는 바람에 어떻게 할 도리가 없어 마음이 아팠어요. 다행히 몇 년 전부터 소식이 닿아 그때부터 뒷바라지를 하고 있죠.”
이미 주먹세계에서 발을 뺀 지 오래인 조씨이지만 그 세계에서 그는 여전히 큰어른으로 인정을 받고 있다. 아직도 세인들의 기억에 선명한 김태촌, 조양은, 이동재 등 80년대 3대 패밀리는 물론 최근 언론에 이름이 오르내리는 전국의 주먹 보스들이 그 앞에선 무릎을 꿇고 앉는다. 특히 조양은은 그가 자신의 친구 딸을 중매해 결혼시켰을 정도로 인연이 각별하고, 김태촌 역시 처음 인연을 맺은 후 김씨가 감옥에 있는 지금도 면회를 갈 정도로 깊은 형제애를 나누고 있다.
야인으로 살았지만 평생 한 여자만 사랑한 조씨
평생 거침없이 살아온 것 같은 조씨도 꼼짝하지 못하는 사람이 있다. 바로 40년 동안 그를 뒷바라지한 아내 박경자씨(63)다.
“아내는 제게 누나 같고 엄마 같은 존재죠. 제가 좀 속을 썩였겠어요. 그래도 불평 한번 제대로 하지 않고 묵묵히 저와 아이들의 뒷바라지를 했어요. 제가 삼청교육대에 끌려간 이후 20년 동안 저를 위해 하루도 빼놓지 않고 정화수를 떠놓고 기도했어요. 그런 아내를 어떻게 사랑하지 않을 수 있겠어요. 그래서 밖에 나갔다 오면 꼭 사탕 하나라도 아내를 위해 사와요. 물건이 아니라 사랑하는 마음의 표현이죠.”
70년대 조씨의 집은 방이 16개나 됐다. 감옥에서 나왔지만 막상 갈 곳 없는 사람들이 찾아와 함께 살곤 했으니 살림집이라기보다 주먹세계 ‘후배’들의 임시 거처였던 셈이다. 한때는 2백여명이 함께 살았던 적도 있다. 하지만 박씨는 그 거친 마구잡이 인생들의 뒤치다꺼리를 싫다는 내색 한번 없이 정성을 다했다.
“재미있는 게, 후배들이 밖에서 싸우고 난동을 부리다가도 아내가 가서 ‘삼촌, 그만하고 집에 갑시다’ 한마디하면 살벌하던 싸움판도 곧바로 ‘상황 끝’이에요(웃음). 아무리 화를 내거나 행패를 부리다가도 아내가 뭐라 하면 다들 말을 들었어요. 정을 제대로 못 받고 자란 사람들이라 따뜻하게 대해주니까 잘 따랐던 것이죠.”
그러고 보면 김두한과 후계자 조일환씨와 다른 점이 또 하나 있었다. 김두한은 여러 여자를 사랑했지만 조일환씨는 한 여자만을 평생 사랑했다는 것이다. 그래서 일까, 그는 3백명이 넘는 후배들의 주례를 설 때마다 자신 있게 “아내를 사랑하라”고 강조한다.
|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