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서초동 출신 윤석열 대구行, 정통보수 기반 굳히기 시도 - 尹, 여소야대 국회에 지선 압승 절실...‘보수 결집’ 승부수
[일요서울 l 정두현 기자] “면목 없다. 죄송했다.” 지난 12일 대구에서 박근혜 전 대통령을 만난 윤석열 대통령 당선인이 자세를 낮추며 건넨 말이다. 박 전 대통령 탄핵과 구속수감이라는 비극의 시발점이 됐던 국정농단 특검수사를 주도한 데 대한 사과의 뜻으로 읽힌다. 이와 함께 이날 윤 당선인은 ‘불명예 퇴장’으로 얼룩진 전직 대통령의 명예 회복과 치적 계승을 약속했다. 미래권력의 정점이 구(舊)권력에 몸을 숙인 이색 풍경이다. 윤 당선인의 검사 시절 수사 철칙에 대한 자기부정이라는 지적도 나온다. 그럼에도 윤 당선인은 4년 9개월의 옥고를 치른 전직 대통령에게 손을 뻗었다. 뒤엉킨 ‘구원(舊怨)’의 실타래를 풀겠다는 확고한 의지를 방증하는 제스처다. 여기엔 윤 당선인의 다양한 정치 셈법이 깔렸다는 분석이다.
윤 당선인은 5월 10일 대통령 취임을 앞두고 방대한 고민에 둘러 싸였다. 초대 내각 완성을 통한 국정 브랜드 구축, 172석 거대야당과의 협치, 보수진영 내 정통성 확보, 6.1 전국동시지방선거 등 굵직한 현안에 봉착한 상황이다.
우선 윤 당선인은 국가 최고 의사결정권자이기 이전에 보수 정치인으로서 기반 다지기에 나선 것으로 보인다. 지난 12일 박 전 대통령의 대구 사저 예방이 대표적 사례다. 제1보수정당 후보로 20대 대통령에 당선됐지만, 비정치권 출신인 윤 당선인이 전통 보수 세력에 구애하며 그립감을 높이려는 시도다.
윤 당선인으로선 박 전 대통령의 탄핵과 구속수감을 ‘윤석열의 원죄’로 규정한 골수 보수층의 마음을 얻어야 온전히 진영 결집을 이룰 수 있다고 판단했을 공산이 크다. 아울러 윤 당선인의 이번 대구행이 예비 집권여당인 국민의힘을 ‘윤석열당’으로 변모시키기 위한 정지작업이란 분석에도 힘이 실린다.
뇌물혐의 등으로 구속기소 된 박근혜 전 대통령이 29일 오전 서울 서초동 서울중앙지법에서 열리는 3차 공판에 출석하기 위해 호송차에서 내려 법정으로 향하고 있다. 2017.05.29. [뉴시스]
2012년부터 이어진 尹-朴 악연
윤 당선인과 박 전 대통령은 깊은 구원으로 얽혀 있다. 윤 당선인은 ‘국가정보원(국정원) 댓글조작 사건’ 특검 수사팀을 진두지휘했다. 국정원 사태는 이명박 정부가 18대 대통령선거를 겨냥해 온라인에서 조직적으로 여론을 조작한 사건으로, 2012년 대선에서 승리한 박 전 대통령의 부정선거 혐의로도 이어졌다. 당시 박 전 대통령은 국정원 의혹으로 후보 사퇴론이 들끓으며 중도하차 위기를 맞기도 했다.
그럼에도 박 전 대통령은 문재인 민주통합당 후보를 3.53%P 득표율 차로 누르며 신승을 거뒀고, 이 과정에서 윤 당선인은 “사람에게 충성하지 않는다”며 당해 국정감사장에서 수사 외압이 있었다고 폭로했다. 결국 박근혜 정부 출범과 함께 ‘역린을 건드린’ 윤 당선인은 좌천되고 한직을 전전했다.
2016년 국정농단 사태는 ‘검사 윤석열’의 부활 신호탄이 됐다. 박영수 특별검사팀 수사팀장을 맡은 윤 당선인은 박 전 대통령과 그 측근들을 정조준하며 차례로 구속시켰고, 이는 현직 대통령 탄핵의 발단이 됐다. 이와 반대로 윤 당선인에겐 검찰총장 초고속 승진이라는 문재인 정부 포상이 내려졌다.
박 전 대통령이 수감된 이후에도 두 사람의 악연은 이어졌다. 박 전 대통령 측은 윤 당선인이 서울중앙지검장이었을 당시 허리통증 등을 이유로 두 차례에 걸쳐 형집행정지를 요청했지만, 이는 전문가 소견을 이유로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윤 당선인은 박 전 대통령 재판 중에도 서울중앙지검장, 검찰총장으로 공소 유지를 전담했다.
이에 친박(親朴) 등 강경 보수층 사이에선 윤 당선인을 향한 적의가 여전하다. 대표적 친박 교섭단체인 우리공화당 서울시당 관계자는 윤 당선인에 대해 “우파 궤멸과 박근혜 대통령 투옥에 앞장섰던 공공의 적이라는 생각에는 변함이 없다”라며 “대구를 찾았다고 해서 2016년 대참사의 아픔이 봉합될 것이라고 생각한다면 큰 오산”이라고 앙금을 드러냈다.
윤석열 대통령 당선인이 4월 12일 오후 대구 동성로를 방문해 환영나온 시민들에게 감사 인사를 전하고 있다. [뉴시스]
대구 찾아가 몸 낮춘 尹의 속내는
10여 년의 불편한 과거사를 뒤로하고 두 사람은 지난 12일 대구에서 조우했다. 이날 회동에 배석한 국민의힘 권영세 의원은 “일종의 악연에 대해 굉장히 죄송하다는 말씀을 당선인께서도 하셨다”며 “당선인께서 박 전 대통령께서 하신 일에 대한 계승도 하고 널리 홍보도 해서, 박근혜 전 대통령의 명예를 회복하겠다는 말씀도 있었다”고 전했다. 윤 당선인이 전직 대통령에게 한껏 몸을 낮춘 당시 상황을 추론할 수 있는 대목이다.
유죄가 입증된 사건 수사를 집도한 ‘수사팀장’이 훗날 ‘피고인’에게 저자세를 취한 배경은 무엇일까.
윤 당선인은 정권교체 민심 속에 불과 8개월여 만에 검찰총장을 사임한 야인(野人)에서 권력의 정점에 올랐다. 정치 신예가 청와대로 직행하는 초고속 급행열차를 탄 셈이다. 수직상승 쾌거의 이면에는 윤 당선인이 속성으로 쌓아올린 정치적 기반이 탄탄하지 못하다는 ‘모래성’ 리스크가 엄존한다. 윤 당선인의 뿌리는 여의도가 아닌 서초동이다. 윤 당선인이 박 전 대통령과 관계 회복에 나선 근본적 이유도 여기에 있다는 평가다.
윤 당선인은 차기 보수정권을 이끌 리더로서 ‘정통성 확보’가 시급하다. 박 전 대통령의 정치적 성과를 추켜세우며 ‘명예 회복’과 ‘계승’을 언급한 것은 보수 적통 명분과 상징성을 갖추기 위한 움직임으로 풀이된다. 윤 당선인이 대선 이후 첫 민심 탐방지로 보수의 심장 TK(대구·경북)를 택한 것도 이 때문이다. 박 전 대통령으로선 예비 대통령의 대면 사과로 실추된 명예와 옥중에서 보낸 4년 9개월을 보상받고, 존재감을 재확인하는 계기가 됐다는 평가다.
오는 6.1 지방선거도 윤 당선인의 대구행을 부추긴 요소로 지목된다. 집권 후에도 윤 당선인은 여소야대 국회의 파고를 넘어야 한다. 172석 민주당이 입법부를 틀어쥐고 있는 만큼, 향후 윤석열 정부의 국정운영이 녹록치 않을 전망이다. 이렇다 보니 윤 당선인은 초기 정부의 국정 동력을 마련하기 위해서라도 반드시 지방선거 압승으로 권력 균형을 맞춰야 하는 입장이다. 지선에서 패할 경우 사실상 ‘식물 정부’가 불가피하다.
결국 윤 당선인의 대구 방문에는 2024 총선까지 여소야대 국정 가시밭길을 극복할 해법으로 ‘보수 선(先)결집’으로 실마리를 풀겠다는 정무적 판단이 깔린 것으로 분석된다. 박근혜 사저 방문으로 TK·영남 중심의 반윤 정서를 일소시키며 보수 결집을 시도하는 한편, 대외적으론 통합·협치 코드를 내세워 중도·진보 민심을 동시에 어루만지는 투트랙으로 지방선거를 대비하려는 복안인 셈이다.
박 전 대통령을 향한 유화적 제스처가 당권개편 노림수라는 분석도 나온다. 국민의힘은 윤핵관(윤석열 핵심 관계자)의 맏형 격인 권성동 의원이 신임 원내대표로 선출되는 등 ‘윤석열당’으로 전환이 시작됐다. 하지만 윤 당선인이 당내 친박계 출신 등 일부 강경 보수 그룹과는 화학적 결속을 이루지 못했다는 평가다.
이는 향후 당청 관계에 걸림돌이 될 수 있는 만큼, 구보수권과 융화를 도모하기 위해 박 전 대통령과 만남을 적극 추진했다는 분석이다. 정치권 일각에선 중기적으로 2024 총선을 기해 국회를 자신에게 우호적인 윤석열계로 채우겠다는 계산이 깔렸다고 보는 시각도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