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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거룩하고 복된 주의 날에 살아계신 하나님 앞에 나와 예배드리는 모든 성도님께 하나님의 은혜와 평강이 함께 하길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오늘 말씀의 제목은 “오래 참고 기다리시는 하나님”입니다.
우리가 웃을 때 뇌에서 좋은 호르몬이 나와서 몸의 나쁜 세균을 퇴치한다고 알려져 있습니다. 그래서 많이 웃으라고 하니 즐겁고 기뻐서 웃는 것이 아니라 억지로라도 웃는데 놀라운 사실은 우리 뇌가 기뻐서 웃는지, 억지로 웃는지를 구분하지 못한답니다. 그래서 억지로 웃어도 엔돌핀이 나온답니다. 참 다행입니다. 지금 억지로라도 한 번 웃어보십시오. 비웃지는 마시고.
우리 하나님은 사랑과 긍휼이 많으신 분이십니다. 그래서 우리가 회개하고 돌아오기를 오래 참고 기다리시는 좋으신 아버지이십니다. 그러나 마지막까지 회개하고 돌아오지 않은 자에게는 반드시 심판하시는 하나님이십니다. 오늘 본문에 말씀하고 있는 하나님은 바로 이런 분이십니다. 주께는 하루가 천년 같고 천년이 하루 같다는 것은 하나님은 영이시니 이 땅의 시간 개념이 적용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즉 천년이라도 하나님께는 하루와 같은 잠시 잠깐이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히10:37에도 “잠시 잠깐 후면 오실 이가 오시리니 지체하지 아니하시리라”고 했습니다. 그리고 마지막 때는 반드시 심판이 있으리라고 했습니다. “사람이 한 번 나서 죽는 것은 정한 이치요 그 후에는 반드시 심판이 있”다고 했습니다(히9:27). 그날에는 창세 이후로 모든 자들이 하나님 앞에서 심판을 받을 것입니다.
최근에 인문학 분야에서 베스트셀러 작가로 활약하는 조승연 씨가 방송에서 이런 강연을 했습니다. 고대 그리스에 파라곤이라는 돌이 있습니다. 이 돌은 금이 진짜인지, 가짜인지를 구분하는 돌이랍니다. 파라곤이라는 돌을 금에 대면 화학반응이 일어납니다. 그래서 진짜인지, 가짜인지 알게 됩니다. 가짜 금은 화학변화가 일어나지 않기 때문입니다. 이처럼 하나님께서 세상에 하나님의 말씀의 돌판을 주신 것은 선과 악이 드러나도록, 거짓과 참이 구별되도록 주셨습니다.
그리고 거짓과 위선과 어둠으로 가득 찬 세상에 예수님을 보내신 것도 진리를 통해 거짓이 드러나고, 빛을 통해 어둠이 구분되고 진실을 통해 위선과 외식과 거짓이 드러나고 깨끗함을 통해 더러움이 드러나도록 예수님을 보내주신 것입니다. 파라곤 앞에서 진짜와 가짜 금이 드러나듯이 예수님 앞에서 불의와 불법이 드러나는 것입니다. 예수님 앞에서 바리새인들의 외식과 거짓이 드러나고 참된 기도와 가증한 기도가 드러나고 어둠의 행실이 드러나고 참 이스라엘 사람과 위선자가 드러났습니다. 불의와 죄가 드러났을 때, 거짓이 드러났을 때 끝까지 감추고 인정하지 않는 자는 심판을 면치 못하지만 자신의 죄와 허물을 시인하고, 부끄러워하고, 회개하고. 돌이키는 자는 용서와 구원을 선물로 받는 것입니다. 할렐루야!
‘튜셰’라는 말이 있습니다. 프랑스어인데 펜싱경기에서 쓰는 말입니다. 이 말의 뜻은 ‘찔렸다.’ ‘내가 한 방 먹었다’는 뜻입니다. ‘찔렀다’가 아니라 ‘찔렸다’는 것입니다. 경기에서 찌른 사람, 점수 딴 사람이 외치는 말이 아니라 찔린 사람, 점수를 잃은 사람이 외치는 말입니다. 왜냐하면 펜싱 경기는 워낙 빠르고 칼끝이 가늘어서 잘 보이지 않기 때문에 찌른 사람은 자기가 제대로 찔렀는지, 닿았는지를 모릅니다. 그럼 누가 압니까? 심판도 제대로 모릅니다. 지금이야 컴퓨터로 채점하지만 이전에는 가장 정확히 알 수 있는 사람은 심판도, 찌른 사람도 아니라 찔린 사람입니다. 찔린 사람이 솔직히 인정해야 하는 경기입니다. 찔린 사람이 ‘투셰’라고 소리치는 것입니다. 알고 보면 참 멋지고 신사적인 경기입니다. 그런데 요즘 뉴스를 보니까 찔렀다는데도 찔린 사람은 안 찔렸다고 하고 합니다. 맞았는데 안 맞았다고 합니다. 줬는데 안 받았다고 하고 받은 기억이 없다고 합니다. 그러니 도대체 누가 거짓말을 하고 있는지도 모르게 되어 버립니다. 이전에 어떤 사람이 하도 자기 아이가 아니라고 하니 DNA 조사를 하여 일치하는 것으로 결과가 나왔습니다. 그런데도 자기 아들 아니라고 했습니다. 그 아이가 나랑 왜 일치하는지 모르겠다고 했습니다. 오늘날 우리의 문제가 바로 이것입니다. 다 드러났는데도 아니라고 합니다. 아무도 ‘투셰’라고 말하는 사람이 없습니다.
우리는 하나님 앞에서 ‘투셰’라고 말할 줄 알아야 합니다. 그렇게 말하는 것은 자기의 잘못을, 자기가 진 것을, 자기의 실수를, 자기의 죄를 기꺼이 시인하는 것입니다. 숨김없이 고백하는 것입니다. 그래야 깨끗이 해결할 수 있고 새롭게 시작할 수 있고 다시 일어설 수 있는 것입니다. 성경에 나오는 다윗왕이 위대한 것도 바로 이처럼 하나님과 사람들 앞에서 ‘투셰’를 외치는 자였기 때문입니다. 자기 죄를 지적받았을 때 변명하지 않고 숨기지 않고 잘못을 시인하고 용서를 구했기 때문입니다. 즉시로 그 자리에서 하나님 앞에 무릎을 꿇었습니다. 누구를 탓하지 않았습니다. 오로지 하나님 앞에 자신이 죄인임을 고백하고 자신의 죄를 자백하고 눈물로 회개했습니다. 얼마나 회개했든지 침상을 적셨다고 했습니다. 뿐만 아니라 그는 자기 백성들의 죄로 인해서도 마치 자기가 죄를 범한 것처럼 눈물을 흘리며 회개했습니다. 시119:136에 보시면 “그들이 주의 법을 지키지 아니하므로 내 눈물이 시냇물 같이 흐르나이다.”고 했습니다. 다 남 탓하고 자신은 깨끗하다고, 나는 하나도 먹은 것 없다고 하는 세상인데 다윗왕은 다릅니다. 달라도 많이 다릅니다. 백성들의 잘못도 자기와 무관한 일이라고 하지 않는 것입니다. 그러니 하나님이 다윗을 보시고 저가 내 마음에 합한 자라고 한 것입니다. 모세도 기도하기를 이 백성들을 버리시려거든 차라리 내 목숨을 거두어달라고 했습니다. 예수님도 말씀했습니다. 선한 목자는 자기 양들을 위해 목숨을 버린다고. 위대한 지도자는 바로 이런 것입니다.
하나님 앞에서 자기의 잘못을 인정하고 패배를 인정하는 것, ‘투셰“라고 외칠 줄 아는 자가 진정한 승리자입니다. 하나님 앞에서 패배를 시인하고 인정하는 것이 하나님의 도우심을 받는 지름길입니다. 하나님은 이런 자를 사용하시고 기뻐하십니다.
하나님은 사실 우리가 무엇을 했는지, 어떻게 했는지 다 알고 계십니다. 다 아시고 찾아오십니다. 다윗에게 나단 선지자를 보내 죄를 책망하실 때도 먼저 다 알고 계셨습니다. 아담이 선악과를 따 먹은 것을 하나님이 몰라서 네가 무엇을 하였느냐고 물은 것이 아니라 그가 무엇을 하였는지 다 알고 계셨습니다. 가인에게도 그가 동생을 죽인 것을 몰라서 네 동생이 어디 있느냐고 물은 것이 아니라 다 알고 계셨습니다. 그런데도 찾아와 물은 것은 고백하라는 것입니다. 시인하고 돌이키라는 것입니다. 회개하고 용서받으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물으신 것입니다. 하나님 앞에서 숨는 것은 그야말로 손바닥으로 하늘을 가리는 것입니다. 타조가 도망가다가 바위틈에 자기 머리를 숨기고는 안 보이는 줄 아는 것과 같습니다. 손으로 눈을 가리면 자기는 못 보지만 상대방은 눈을 가리고 있는 것까지 다 봅니다. 하나님 앞에 숨는 것은 이와 같습니다.
본문에서 베드로 사도가 말씀하는 내용도 바로 그것입니다. 먼저 하나님은 우리가 하나님께로 돌아오기를 오래 참고 기다리시는 분이십니다. 예수님은 탕자의 비유에서 집을 나간 아들이 돌아오기를 문을 열어놓고 기다리는 아버지에 대하여 말씀하셨습니다. 형은 동생이 잘못을 뉘우치고 돌아와도 용서가 안 되지만 아버지는 아들의 죄를 먼저 용서하고 살아 돌아오기만을 기다리는 마음입니다. 왜 그렇습니까? 사랑하기 때문입니다. 우리를 사랑하시기에, 그래서 하나님은 우리가 아무도 멸망 받지 않기를 원하시는 것입니다. 소돔 고모라 성을 멸하실 때는 의인 열 명만 있어도 심판하지 않겠다고 하신 분이 아니십니까? 그런데 렘5:1에 보시면 “너희는 예루살렘 거리로 빨리 다니며 그 넓은 거리에서 찾아보고 알라 너희가 만일 정의를 행하며 진리를 구하는 자를 한 사람이라도 찾으면 내가 이 성읍을 용서하리라”고 했습니다. 한 사람의 의인, 하나님이 보시기에 합당한 자가 한 사람만 있어도 심판하지 않겠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딤전2:4에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하나님은 모든 사람이 구원을 받으며 진리를 아는 데에 이르기를 원하시느니라” 하나님은 바로 이런 분이십니다. 하나님은 모든 사람이 진리를 알고 구원에 이르기를 원하십니다. 다 회개하기를 원하시어 오래 참고 기다리시는 분이십니다. 할렐루야!
하나님은 죄인들을 심판하실 날만 기다리는 것이 아니라 다 회개하기를 원하시는 분이십니다. 예수님이 복음을 전하실 때 처음으로 외친 말씀이 무엇입니까?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이 왔느니라”고 했습니다. “천국이 가까이 왔으니 너희는 회개하고 복음을 믿으라”고 했습니다. 인자가 온 것은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요 죄인을 불러 구원하게 하려 왔다고 했습니다. 그래서 사55:7에 “악인은 그의 길을, 불의한 자는 그의 생각을 버리고 여호와께로 돌아오라 그리하면 그가 긍휼히 여기시리라 우리 하나님께로 돌아오라 그가 너그럽게 용서하시리라”고 했습니다. 누구든지 하나님 앞에서 ‘투셰’라고 시인하고 뉘우치면 너그럽게 용서하시겠답니다. 아니 이미 용서해놓고 돌아와서 용서의 은혜를 받으라는 것입니다.
하나님 앞에 잘못을 시인하고 나오는 자가 용서받지 않은 경우가 없습니다. 하나님 앞에 ‘뚜셰’라고 외친 자가 용서받지 못한 자가 없습니다. 동생을 죽여 최초로 살인한 가인도 자기 죄벌이 너무 중하다고 뉘우칠 때 하나님은 가인을 만나는 자가 아무도 그를 죽이지 못하도록 표를 주었다고 했습니다. 동생을 매매로 팔아버리고 죽었다고 거짓으로 아버지를 속여 온 요셉의 형들도 용서받았습니다. 예수님은 세리나 창기라도 회개하면 그들이 용서받고 너희보다 먼저 천국에 들어가리라 하였습니다. 베드로는 주님을 모른다고 세 번이나 저주하면서까지 부인했습니다. 그러나 그도 새벽닭 울음을 듣고 주님의 말씀이 생각나서 회개할 때 주님은 그에게 다시 찾아와서 만나주셨습니다. 용서하셨습니다. 더 큰 사명을 맡겼습니다.
예수 믿는 자를 죽이러 다니던 사도바울도 다메섹에서 예수님을 만나고 나서 자기 죄를 회개하고 용서받았습니다. 그는 돌이킨 후에 이방인을 위한 주님의 사도가 되었습니다. 용서받지 못할 죄인은 없습니다. 다만 그가 하나님 앞에서 자기 죄를 인정하고 돌이키지 않기 때문입니다. ‘투셰’라고 인정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주님이 십자가에 달리실 때 왼편 강도는 끝까지 하나님을 원망하며 세상을 원망하며 자기 죄를 고백하지 않고 죽었지만 그러나 오른편 강도는 죽음 직전에라도 주님 앞에서 자기 죄를 고백하며 뉘우쳤습니다. 주님께 용서를 구하며 불쌍히 여겨달라고, 자기 영혼을 맡아 달라고 부탁했습니다. 그러자 주님께서는 그 영혼을 받아주셨습니다. 용서해 주셨습니다. 이것이 진정으로 회개하는 자에게 하나님이 베푸시는 은혜입니다. 구원의 은총입니다.
본문에서 주의 약속이란 주님이 다시 오시는 약속을 말합니다. 그 날이 도둑 같이 오리라고 했습니다. 그날이 더디다고 생각하는 것 같이 더딘 것이 아니라 하나님은 우리가 다 회개하고 돌아오기를 기다리고 계시는 것입니다. 사44:22에 “내가 네 허물을 빽빽한 구름 같이, 네 죄를 안개 같이 없이하였으니 너는 내게로 돌아오라 내가 너를 구속하였음이니라”고 했습니다. 슥1:3에서도 “만군의 여호와께서 이처럼 이르시되 너희는 내게로 돌아오라 만군의 여호와의 말이니라 그리하면 내가 너희에게로 돌아가리라 만군의 여호와의 말이니라”고 했습니다. 렘3:12에서는 “여호와께서 이르시되 배역한 이스라엘아 돌아오라 나의 노한 얼굴을 너희에게로 향하지 아니하리라 나는 긍휼이 있는 자라 노를 한없이 품지 아니하느니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고 했습니다. 할렐루야! 우리가 하나님께로 돌아가면 하나님도 우리에게 돌아오시겠다는 것이 하나님의 약속입니다. 주님이 오시는 날까지 구원의 문은 열려 있습니다. 아직은 회개하여 용서받을 기회가 남아 있습니다. 그래서 지금이 구원의 날이요 은혜 받을 때라고 했습니다. 우리는 회개하고 하나님께로 돌아가야 합니다. 또한 아직 주님께로 돌아오지 않은 자를 인도하여 돌아오게 해야 합니다. 그 책임이 우리에게 있습니다.
그리고 이미 회개하여 용서받은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합니까? 본문 11절 이하에 보시면 “너희가 어떠한 사람이 되어야 마땅하냐 거룩한 행실과 경건함으로 하나님의 날이 임하기를 바라보고 간절히 사모하라”고 했습니다. 먼저 거룩하고 경건한 성도가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주님이 오시기를 사모하며 기다리는 신앙이 되어야 한다고 했습니다. 우리 모두 그러한 삶으로 주님 오시는 날에 부끄럽지 않는 성도가 되길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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