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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ola Scriptura Tota Scriptura
하박국 3장 17-18절
여호와만을 영원토록 즐거워하라
본문에 대해서는 웨스트민스터 소요리문답 제1문의 후반부 본문으로 살핀 적이 있고, 또 주일 설교 때 몇 번 인용한 적도 있습니다. 또한 하박국 내용의 결론으로 잘 알려져 있는 그런 내용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본문의 내용으로 살고 있는가를 묻는다면 긍정으로 대답할 수 있는 사람은 없을 것입니다. 그래서 반복되는 성격이 있지만 본문을 통하여 우리가 어떤 마음과 자세로 살아가야 하는지를 다시금 생각해 보고자 합니다.
오늘 본문의 경우 하박국 선지자의 기도 내용 가운데 마지막 부분입니다. 그러나 앞에 있는 기도의 내용을 다 확인하지 않더라도 본문이 말하는 성격은 너무나도 뚜렷합니다. 18절 말씀처럼 여호와로 말미암아 즐거워하며 구원의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기뻐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 사실을 위해 무엇으로 대조적으로 놓고 있느냐 하면 17절입니다. 무화과나무가 무성하지 못하며, 포도나무에 열매가 없으며, 감람나무에 소출이 없으며, 밭에 먹을 것이 없으며, 우리에 양이 없으며, 외양간에 소가 없을지라도 여호와 하나님만을 영원토록 즐거워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말씀의 위치가 구약에 속해 있다는 것을 기억해 둘 필요가 있습니다. 우리가 구약을 이해하는 데 있어 기억해야 할 한 가지 사실이 있습니다. 신구약 동일한 말씀이지만 형식에 있어 차이를 두어 기록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 구약의 경우 마치 유아를 대상으로 하여금 말씀하시는 듯 한 형식을 가지고 있다면, 신약의 경우는 장성한 자를 대상으로 말씀하시는 듯 한 형식을 가지고 있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구약의 경우 아이들을 달래며 말씀하시는 듯 외적 복을 자주 강조하는 것을 보게 됩니다. 그래서 마치 무화과나무가 무성한 것이 복의 내용으로, 포도나무의 열매가 가득하거나 감람나무에 소출이 많은 것이 복의 내용으로, 밭에 식물이 많고, 우리에 양 떼가, 외양간에 소가 가득한 것이 복의 내용으로 표현하고 있는 듯 한 말씀들이 참으로 많습니다. 대표적인 예가 신명기 28장입니다. 2절 이하의 말씀을 조금 읽어드리면 “네가 네 하나님 여호와의 말씀을 청종하면 이 모든 복이 네게 임하며 네게 이르리니 성읍에서도 복을 받고 들에서도 복을 받을 것이며 네 몸의 자녀와 네 토지의 소산과 네 짐승의 새끼와 소와 양의 새끼가 복을 받을 것이며 네 광주리와 떡 반죽 그릇이 복을 받을 것이며 네가 들어와도 복을 받고 나가도 복을 받을 것이니라”(신28:2-6) 이어지는 말씀도 동일한 측면에서 말씀하고 있지만 조금 뛰어 넘어 12절 하반부와 13절 상반부도 읽어드리면 “...네 손으로 하는 모든 일에 복을 주시리니 네가 많은 민족에게 꾸어줄지라도 너는 꾸지 아니할 것이요 여호와께서 너를 머리가 되고 꼬리가 되지 않게 하시며 위에만 있고 아래에 있지 않게 하시리니...” 오늘날 적지 않은 교회들이 이 말씀으로 성도를 유혹합니다. 또한 성도 역시 이 말씀에 유혹을 받아 이런 내용으로 기도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같은 구약의 말씀에서 그 모든 것이 없을지라도 여호와로 말미암아 즐거워하고 구원의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기뻐한다는 오늘 말씀은 비록 구약에서 외적인 복의 내용을 많이 말한다 할지라도 그 모든 내용이 실제로는 우리에게 신앙의 핵심으로 와 있는 것은 아니었다는 것을 잘 말해주고 있는 본문입니다. 오히려 신명기 8장 3절에 근거하자면 구약에서 말하는 외적인 복의 내용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고자 하시는 것이 무엇인지를 그런 것들을 통해서 더욱 자세히 비추시고자 하는 것에 불과하다고까지 말할 수 있습니다. 신명기 8장 3절 말씀을 읽어드리면 “너를 낮추시며 너를 주리게 하시며 또 너도 알지 못하며 네 조상들도 알지 못하던 만나를 네게 먹이신 것은 사람이 떡으로만 사는 것이 아니요 여호와의 입에서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사는 줄을 네가 알게 하려 하심이니라” 하나님께서 광야 40년 동안 저들을 먹이셨는데, 왜 먹이셨는가? 사람이 떡으로만 사는 것이 아니라 여호와의 입에서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사는 줄 알게 하기 위해서 그렇게 했다는 것입니다. 알게 하고자 하시는 것은 사람이 떡이 아니라 하나님의 모든 말씀으로 산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떡을 주지 않는 것이 교육적인 면에서는 더 효과적입니다. 떡을 주지 않고 말씀만 주면서도 살아간다는 것을 알리실 때 “아! 말씀만으로 살 수 있구나!” 이렇게 나올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방식은 떡을 먹이시면서 떡이 아니라 여호와의 입에서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산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핵심은 신명기 8장이나 오늘 본문이나 동일한 정신 가운데 있습니다. 다시 말해 떡을 먹이시면서 말씀으로 산다는 것을 가르치거나 무화과나무가 무성하지 못하며 포도나무에 열매가 없으며 감람나무에 소출이 없으며 밭에 먹을 것이 없으며 우리에 양이 없으며 외양간에 소가 없을지라도, 다시 말해 하나님께서 그런 역사를 펼치셔서 우리에게 있는 모든 것을 다 가져 가실지라도 여호와 하나님만으로 즐거워하며 기뻐할 수 있다는 것을 가르치는 것이 동일한 정신으로 있다는 것입니다. 즉 말씀으로 사는 것을 가르치기 위해서, 오늘 말씀처럼 하나님만으로 즐거워하며 기뻐할 수 있다는 것을 가르치기 위해서 하나님은 먹을 것을 줄 수도 있고 반대로 먹고 마시는 것, 또 인생에 있어 필요한 모든 것을 우리에게서 다 가져가실 수도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신앙생활을 하는 데 있어 매우 주의해야 할 것이 있습니다. 구약의 많은 말씀들처럼 외적인 것에 의해 하나님의 복이 있는 것처럼 생각하는 것, 혹은 외적인 것이 우리의 모든 것을 결정하는 기준으로 삼는 것은 매우 잘못된 생각입니다. 그러니까 구원받는 것도 같고, 천국에 가는 것도 같은데 이 땅에서 어떻게 사느냐가 하나님의 참된 복을 누리느냐, 누리지 않느냐로 판단한다면, 그것이 기준처럼 있다면 매우 어리석은 생각이라는 것입니다.
성경은 이 땅에서 외적으로 누리게 되는 그 모든 것들을 복이라 말하긴 하지만 거기에 무게를 싣는 것을 거절합니다. 아니 성경은 전혀 그것을 추구하라고 가르치지도 않습니다. 오히려 성경을 통해 알리시는 것은 외적인 것이 있건, 없건 상관없다가 훨씬 더 강합니다. 왜 그런가 하면 우리의 신앙은 그런 것으로 좌우되는 것도 아니요, 그런 것에 의해 더 깊은 신앙을 가지는 것도 아니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신앙은 있다가도 없어지고, 없다가도 있는 것을 대상으로 하지 않습니다. 좀 더 간단히 말하면 변하는 것들이 우리의 신앙 대상으로 있지 않다는 것입니다. 본문의 내용으로 하자면 무화과나무나 포도나무의 열매, 감람나무의 소출, 밭의 식물과 우리의 양, 외양간의 소와 같은 것들을 신앙의 대상으로 삼는 자들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오히려 그런 것들을 주시기도 하고, 주셨다가도 취하기도 하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분이 우리를 향한 사랑에는 변함이 없으시고, 뿐만 아니라 사랑하시기에 너희와 항상 함께 하시겠다는 약속에 있어서는 변함없는 하나님만이 우리의 신앙의 대상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우리의 모든 신앙은 변함없는 하나님만이 초점이 되어야지, 도리어 외적인 것들에 의해 우리의 신앙이 좌우되는 것이라면 그것은 하나님을 믿는 자임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 우리를 택하여 부르신 그 부름의 목적과는 전혀 상관없는 삶을 살아가는 자, 그것과는 거리가 먼 자라 할 수 있을 것입니다.
문제는 우리가 끊임없이 외적인 것으로 인하여 유혹을 받는다는 데 있습니다. 학생이라면 좋은 학교 가고 싶고, 학생을 벗어나 직업을 가질 나이가 되면 좋은 직장에 가고 싶고, 그래서 모든 일에 있어 형통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우리 마음을 지배한다는 것입니다. 그렇게 만사형통이 우리 마음을 지배하기 때문에 그런 것으로 유혹을 받기도 합니다. 물론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우리가 생각하는 외적인 축복의 경험을 주시면 그러한 경험을 주신 분이 하나님인줄 알고 그것에 대하여 감사하면 됩니다. 그러나 우리의 착각은 그것이 마치 최고의 복인 것처럼 생각한다는 데 있습니다.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고 하면서도 우리가 알지 못하는 생각의 이면에 그런 생각이 깔려져 있습니다. 심지어 인간의 교만은 그런 복을 받았을 때 내 열심, 내 수고 혹은 신앙적으로 생각하자면 내가 신앙생활을 잘 해서라는 그런 생각이 깔려져 있기도 합니다. 그래서 신앙의 유일한 대상이신 하나님을 기억하는 데 있어 자꾸 불순물이 끼어들고, 결국 자기 자신이 신앙의 대상으로, 또는 하나님께서 주신 것들이 신앙의 대상으로 등장하는 꼴이 되곤 합니다.
실제로 우리가 즐거워하고 기뻐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한번 생각해 보십시오. 다 외적인 것들이 풍성할 때가 아닙니까? 반대로 우리의 염려는 무엇에 대한 것입니까? 많은 부분 먹고 마시는 것에 있지 않습니까? 물론 먹고 마시는 것 외에도 염려하는 것들이 있지만, 결국 세상의 모든 것이 물질로 귀결되는 일이 많다고 할 때 우리의 모든 염려는 물질에 대한 염려라고도 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주께서 이렇게 말씀하셨다는 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네 보물 있는 그 곳에는 네 마음도 있느니라”(마6:21) 그리고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한 사람이 두 주인을 섬기지 못할 것이니 혹 이를 미워하고 저를 사랑하거나 혹 이를 중히 여기고 저를 경히 여김이라 너희가 하나님과 재물을 겸하여 섬기지 못하느니라”(마6:24)
결국 이런 말씀을 통해 성경이 우리에게 알리고 있는 것은 우리 신앙의 대상이 하나님이 아니라 바로 외적인 것과 관련되어 있다고 말하는 것과 같습니다. 하나님을 믿고,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했기 때문에 신앙의 대상이 하나님이 되는 것이 아니라, 비록 하나님의 백성이 되고,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지만 여전히 본성상 세상을, 세상을 대표하는 돈을 더 사랑하더란 것입니다.
이런 우리에게 성경은 누누이 그 모든 것들을 베푸시고 또한 거두시기도 하시는 하나님만이 유일한 신앙의 대상이라고 말씀하고 계신 겁니다. 그래서 18절에서 표현하고 있듯이 우리의 즐거움과 기쁨은 무화과나무나 포도나무의 열매, 감람나무의 소출, 밭의 식물, 우리의 양, 외양간의 소, 이런 데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즐거워하고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기뻐하는 것, 여기에만 있다고 말씀하고 계신 것입니다. 남녀노소 불문하고 하나님의 백성에게 있어 유일한 신앙의 대상은 하나님 외에 없다. 그것도 외적인 복을 많은 부분 말하고 있는 구약 자체에서 이런 내용을 확고히 밝혀놓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백성에게 유일한 힘은 변하는 외적인 것에 있지 않다는 것을 명심해야 합니다. 오히려 하박국 선지자는 19절에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주 여호와는 나의 힘이시라...” 다시 말해 나의 힘은 무화과나무나 포도나무의 열매, 감람나무의 소출, 밭의 식물이나 우리의 양, 외양간의 소가 아니라는 겁니다. 좋은 대학 가고, 좋은 직장 가서 안정한 생활을 하고, 돈도 많이 벌고, 하는 일마다 잘 되는 것이 우리의 힘이 아니라, 우리의 힘은 처음부터 끝까지, 항상, 언제든지 하나님 한분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 하나님 한 분 외에는 우리의 힘이 없고, 하나님 한 분 외에는 우리의 즐거움과 기쁨이 없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성경 전체를 통해 우리에게 알리고자 하시는 내용입니다.
사실 이것은 너무나 자주 반복되는 성경의 가르침입니다. 어떤 면에서는 교회에서 많이 듣게 되는, 그리고 듣게 될 내용으로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가장 하나님의 백성에게 약한 부분이기도 합니다. 그래서 끊임없이 가나안 땅을 우리에게 주시면 그 가나안 땅에 우리의 모든 마음을 두는 것이고, 심지어 천국을 약속하고 있으면 천국 자체에만 마음을 두고 있는 것이 우리의 현실입니다. 그 모든 것을 베푸시는 하나님이 초점이 되고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베푸시는 것들이 초점이 되고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잘 알고 있는 시편 23편에 보면 다윗이 이런 고백을 합니다. 먼저 1절은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내게 부족함이 없으리로다” 여호와 한 분 만으로 부족한 것이 전혀 없다는 것입니다. 무화과나무가 무성하기 때문에, 포도나무에 열매가 있기 때문에, 감람나무에 소출이 있기 때문에, 밭에 먹을 것이 있고 우리에 양이 있고 외양간에 소가 있기 때문에 부족함이 없다고 말하는 것이 아니라, 여호와가 나의 목자이시기 때문에 부족함이 없다는 것입니다. 4절에서는 “내가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로 다닐지라도 해를 두려워하지 않을 것은 주께서 나와 함께 하심이라 주의 지팡이와 막대기가 나를 안위하시나이다” 간혹 예수 믿으면 아무런 어려움도 없어야 하는 것처럼 이해하고자 하는 분들도 있지만, 결코 그렇지 않습니다. 그러나 다윗은 그분이 나의 목자이시기 때문에 나에게는 전혀 부족함이 없다고 말하면, 아무리 어려움 가운데 놓여 있다 할지라도 그분이 나와 함께 계시기 때문에 두려워하지 않는다고 고백합니다. 이것이 신앙의 핵심입니다. 나무에 열매가 많고, 소출이 풍성하며, 밭에 식물이나 양과 소가 넉넉한 것으로 부족함이 없다, 두려워할 필요가 없다는 게 아니라는 겁니다. 하나님 자신만이 우리에게 모든 것이 되고 있다는 것을 구약에서부터 분명히 말씀하고 계셨던 겁니다.
그런데도 우리는 늘 흔들립니다. 왜 그렇습니까? 우리 안에 하나님의 말씀이 있어서 그 말씀으로 생각하고 그 말씀을 판단하기보다는 이미 우리 마음이 세상을 향해 있기 때문입니다. 말로는 하나님을 사랑한다고 하지만 우리의 마음은 세상을 향한 사랑이 더 크기 때문입니다. 세상을 향한 마음이 크고 세상을 향한 사랑이 더 크지만 그것을 모르고 있기 때문에 늘 흔들리는 것입니다. 그러나 오늘 본문을 기억하고 또 기억하셔야 합니다. “비록 무화과나무가 무성하지 못하며 포도나무에 열매가 없으며 감람나무에 소출이 없으며 밭에 먹을 것이 없으며 우리에 양이 없으며 외양간에 소가 없을지라도 나는 여호와로 말미암아 즐거워하며 나의 구원의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기뻐하리로다”(합3:17-18)
웨스트민스터 소요리문답 제1문은 인생의 제일 되는 목적이 무엇인가를 묻습니다. 이 질문에 대한 답으로 우리의 선배들은 성경을 따라 다음과 같이 답합니다. 인생의 제일 되는 목적은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것과 그를 영원토록 즐거워하는 것입니다. 바로 이 내용이 우리의 신앙의 내용으로 와 있어야 합니다. 그런데 얼마나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삽니까? 또한 얼마나 하나님만을 영원토록 즐거워하며 삽니까?
창세기 15장 1절 말씀도 종종 말씀드리지만, 하나님께서 자신에 대해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아브람아 두려워하지 말라 나는 네 방패요 너의 지극히 큰 상급이니라” 현실 앞에서는 두려울 수 있고 현실 앞에서는 답답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런 우리에게 두려워하지 말라고 말씀하십니다. 왜냐하면 내가 너의 방패요, 내가 너의 지극히 큰 상급이라고 말씀하시기 때문입니다. 그 말은 현실만 바라보지 말고 하나님만을 바라보는 인생이 되라는 겁니다. 신명기 8장의 말씀으로 하자면 떡만 보지 말고 그 떡을 주시는 하나님을 바라보라는 겁니다. 그런데 우리가 그렇게 하고 있느냐는 겁니다.
물론 하나님께서는 떡을 주시기도 하시지만 떡을 주시지 않기도 하십니다. 하나님은 생사화복의 주인으로써 생명만 주시는 게 아니라 주신 생명을 거두기도 하십니다. 물질도 마찬가지입니다. 이때 하나님만 바라본다는 것은 떡을 주실 때, 생명을 주실 때, 물질을 주실 때만 바라보라는 게 아니라, 떡을 주시지 않을 때도, 주신 생명을 거두어 가실 때도, 물질 또한 취하여 가실 때도 하나님만 바라보라는 것입니다. 그분이 우리의 지극히 큰 상급이기 때문에 그 모든 것이 없다 할지라도 그분만을 바라보면서 기뻐하고 즐거워할 수 있는 것, 여기에 진정한 신앙이 있는 겁니다. 이런 신앙으로 여러분은 훈련을 하고 있습니까?
강조하여 말씀드리지만 하나님만이 모든 것의 모든 것이 되십니다. 창세기 15장 1절을 통해 주어진 어떤 것도 주신 자보다 클 수 없다는 말씀을 드린 바가 있지만, 모든 것 위에 모든 것을 주관하시면 다스리시는 하나님이 계십니다. 그 하나님께서는 자신의 뜻을 따라 모든 것을 베풀기도 하십니다. 반대로 하나님께서는 베푸신 것에 대하여 거두어가시기도 하십니다. 때를 따라 주시기도 하시지만, 주신 것을 취하여 하시기도 하십니다. 이런 것과 관련해 전도서 3장은 다음과 같이 말씀합니다. “범사에 기한이 있고 천하 만사가 다 때가 있나니 날 때가 있고 죽을 때가 있으며 심을 때가 있고 심은 것을 뽑을 때가 있으며 죽일 때가 있고 치료할 때가 있으며 헐 때가 있고 세울 때가 있으며 울 때가 있고 웃을 때가 있으며 슬퍼할 때가 있고 춤출 때가 있으며 돌을 던져 버릴 때가 있고 돌을 거둘 때가 있으며 안을 때가 있고 안는 일을 멀리 할 때가 있으며 찾을 때가 있고 잃을 때가 있으며 지킬 때가 있고 버릴 때가 있으며 찢을 때가 있고 꿰맬 때가 있으며 잠잠할 때가 있고 말할 때가 있으며 사랑할 때가 있고 미워할 때가 있으며 전쟁할 때가 있고 평화할 때가 있느니라”(전3:1-8) 여러분, 이럴 때가 있고 저럴 때가 있다는 것은 한 마디로 변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렇게 변하는 모든 만물 가운데 말하고자 하는 핵심이 무엇입니까? 그때도 여전히 변함없는 분은 하나님 자신 밖에 없다는 겁니다. 그래서 전도자는 이어지는 말씀을 통해 이렇게 말합니다. “하나님께서 행하시는 모든 것은 영원히 있을 것이라 그 위에 더 할 수도 없고 그것에서 덜 할 수도 없나니 하나님이 이같이 행하심은 사람들이 그의 앞에서 경외하게 하려 하심인 줄을 내가 알았도다”(전3:14)
만약 우리가 우리의 신앙의 대상을 하나님 자신만으로 만족하지 못하고, 또 그렇게 훈련하지 않는다면, 도리어 변하는 것들에 마음을 두게 되면 우리는 언제나 변하는 것이 우리에게 유익을 줄 때만 즐거워하고 기뻐할 것입니다. 그리고 그때만 감사하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을 허락하신 분이 하나님이신 것을 알 때, 그래서 우리에게 희노애락(喜怒哀樂)이라고 말하는 어떤 것을 우리에게 주신다고 할 때 그 모든 목적이 하나님을 경외하도록 하는 데 있다는 것을 안다면 주실 때만이 아니라 거두시고 취하여 가실 때도 그분으로 인해 즐거워하고 기뻐하며 그분으로 인해 감사할 수 있어야 합니다.
특히 하나님이 변치 않는 분으로 있다고 할 때 하나님이 하나님의 백성을 향한 마음 역시 언제나 변치 않으십니다. 그가 우리를 위해 가지시는 목적이 자신을 경외하도록 하는데 있다면 그 일을 이루기 위하여 주시든, 주신 것을 거두어 가시든 결국 합력하여 선을 이루게 될 것입니다(롬8:28). 합력하여 선을 이루기 때문에 주실 때도 감사해야 하지만 주신 것을 거둘 때도 감사해야 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훈련해야 할 부분이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다시 하박국으로 돌아오시면 하박국이 하나님께 던진 유명한 질문이 있습니다. 하박국 1장 4절을 보시면 “이러므로 율법이 해이하고 정의가 전혀 시행되지 못하오니 이는 악인이 의인을 에워쌌으므로 정의가 굽게 행하여짐이니이다” 한마디로 말해 하나님의 백성인 유다가 하나님의 율법을 지키지 않고 정의가 시행되지 못하고 있다는 탄식입니다. 그때 하나님께서는 유다를 심판하시기 위해 심판의 도구로 이방인인 바벨론을 세울 것이라 말씀하십니다. 그러니까 또 다시 질문을 하게 되는데, 하박국 1장 13절입니다. 보시면 “주께서는 눈이 정결하시므로 악을 차마 보지 못하시며 패역을 차마 보지 못하시거늘 어찌하여 거짓된 자들을 방관하시며 악인이 자기보다 의로운 사람을 삼키는데도 잠잠하시나이까” 그러니까 지금 하박국은 이해할 수 없어서, 납득되지 않아서 되묻고 있는 겁니다. 유다가 하나님께 범죄함으로 징계받는 것은 알겠는데, 왜 하필 하나님의 백성보다 더 악한 바벨론이 하나님의 심판의 도구입니까? 우리의 질문도 다르지 않습니다. 왜 예수 믿는 자가 믿지 않는 자보다 못합니까? 왜 저런 인간보다 더 못살고, 저런 인간보다 못한 모습으로 있습니까? 하나님은 그런 하박국에게 이렇게 답변하십니다. 하박국 2장 4절입니다. “보라 그의 마음은 교만하며 그 속에서 정직하지 못하나 의인은 그의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쉽게 말해 그런 것 따지지 말고 너는 나만 보고 살라는 겁니다. 하나님만을 믿는 믿음으로 살라. 마음이 교만한 자, 그런 교만으로 정직하게 행하지 않는 자를 보면서 어떻게 하나님께서 이러실 수 있는가 따지지 말고, 하나님만 바라보면서 그만을 믿는 믿음으로 살라는 것입니다. 지금 당장 마음이 교만한 자를 어떻게 하시는 것은 아니지만 결국 그들도 심판 받게 될 것인데, 지금 당장 그렇게 되지 않는다고 해서 답답해하고 낙심하는 것이 아니라 너는 여전히 하나님만 바라보면서 하나님만을 믿으면서 그렇게 살라는 것입니다.
이런 내용을 우리 인생에 그대로 적용하자면 우리에게도 어려움이 있을 수 있습니다. 우리에게도 힘든 일이 있을 수 있습니다. 요즘 사람들이 말하는 것처럼 이번 생은 망했다고 하는 그런 인생처럼 나타날 수 있습니다. 사방이 막힌 것처럼 있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런 역사 이면에 하나님이 계십니다. 하나님이 계시기에 하나님만 믿고 살라는 것입니다. 모든 것을 합력하여 선을 이루시기 때문에 그 하나님만 바라보면서 살라는 것입니다. 나사로는 거지로 죽었습니다. 세상 사람들 말로 하자면 망한 인생입니다. 그러나 그의 생이 망했다고 할 수 있습니까? 결과적으로 보자면 결코 그렇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그는 천국 백성으로 아브라함 품에 안겼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믿음으로 산다는 것을 이런 식으로 적용하는 것은 주의해야 합니다. 믿음으로 좋은 대학 가고, 믿음으로 좋은 직장 가는 등 외적인 복을 믿음과 연결시키는 것, 주의해야 합니다. 다시 말해 믿음으로 견디면 결국 외적인 복까지 허락하실 것이라는 그런 것으로 연결시키는 것을 주의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방금도 말했지만 나사로는 거지로 죽었습니다.
여러분,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믿음은 히브리서 11장의 증거에 의하면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 보이지 않는 것들의 증거로 주신 것입니다(히11:1). 달리 말하면 믿음은 우리의 소망과 연결되어 있되, 그 소망은 결코 이 땅에 있는 것과 연결되어 있지 않다는 것입니다. 때문에 믿음을 말하면서 썩어질 것, 사라질 것과 연결시키는 것은 결코 성경 이해와 맞물러 있지 않습니다. 믿음은 믿음의 대상이신 하나님과 그분의 뜻과 연결되어 있습니다. 이런 측면에서 히브리서 11장은 하나님께서 이미 구약 백성들에게 약속하신 바가 결코 이 땅 위에 있는 것이 아님을 다음과 같이 증거 합니다. “그들이 나온 바 본향을 생각하였더라면 돌아갈 기회가 있었으려니와 그들이 이제는 더 나은 본향을 사모하니 곧 하늘에 있는 것이라 이러므로 하나님이 그들의 하나님이라 일컬음 받으심을 부끄러워하지 아니하시고 그들을 위하여 한 성을 예비하셨느니라”(히11:15-16) 이곳이 바로 새 하늘과 새 땅, 천국이 아닙니까!
물론 천국도 하나님보다 크지 않습니다. 주어진 것이 어떻게 주신 자보다 클 수 있겠습니까? 그러나 비교적인 차원에서 이 땅의 것이 아니라 장차 주어질 것, 사라질 것이 아니라 영원토록 있는 것, 그것이 소망의 내용이라는 것입니다. 우리의 믿음은 바로 이것을 약속하신 하나님께 있는 겁니다.
여러분, 믿음으로 산다는 것은 무화과나무나 포도나무에 열매가 있건 없건, 감람나무의 소출, 밭의 식물이 있건 없건, 우리의 양, 외양간에 소가 있건 없건 간에 여호와 때문에 즐거워하고 구원의 하나님 때문에 기뻐할 수 있는 신앙인 것입니다. 내가 가고자 하는 대학에 붙건 떨어지건, 내 소원하는 바가 이루어지든 이루어지지 않든, 내 주위 환경이 열려있든 닫혀있든지 간에 여호와 하나님 때문에 즐거워하고 기뻐할 수 있는 자로 사는 것. 그래서 근본적인 의미에서 감사할 수밖에 없는 것, 이것이 신앙입니다.
동일한 뜻으로 주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기도 하십니다. “공중의 새를 보라 심지도 않고 거두지도 않고 창고에 모아들이지도 아니하되 너희 하늘 아버지께서 기르시나니 너희는 이것들보다 귀하지 아니하냐 너희 중에 누가 염려함으로 그 키를 한 자라도 더할 수 있겠느냐 또 너희가 어찌 의복을 위하여 염려하느냐 들의 백합화가 어떻게 자라는가 생각하여 보라 수고도 아니하고 길쌈도 아니하느니라 그러나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솔로몬의 모든 영광으로도 입은 것이 이 꽃 하나만 같지 못하였느니라 오늘 있다가 내일 아궁이에 던져지는 들풀도 하나님이 이렇게 입히시거든 하물며 너희일까보냐 믿음이 작은 자들아 그러므로 염려하여 이르기를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무엇을 입을까 하지 말라 이는 다 이방인들이 구하는 것이라 너희 하늘 아버지께서 이 모든 것이 너희에게 있어야 할 줄을 아시느니라 그런즉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마6:26-33) 이것은 신약에서야 비로소 말씀하신 것이 아니라 구약에서부터 말씀하신 것이요, 실제로는 아담에게서부터 알려주신 내용입니다. 하나님께서 아담에게 에덴에 있는 모든 것을 다 다스리고, 자기 임의대로 할 수 있도록 하셨지만 유일하게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실과는 먹지 못하도록 금지하셨습니다. 왜냐하면 그것을 통해 너를 다스리는 자가 있다는 사실을 알리시기 위해서입니다. 다시 말해 너는 모든 것을 다스릴 수 있는 권한을 부여받았지만 여전히 너는 피조물이고, 그 피조물로서 당연히 창조주를 기억하라는 것입니다.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한다는 것은 바로 이와 같은 것입니다.
구약에 수많은 내용이 외적인 복을 말할지라도 그 진의는 바로 오늘 말씀에 있습니다. “비록 무화과나무가 무성하지 못하며 포도나무에 열매가 없으며 감람나무에 소출이 없으며 밭에 먹을 것이 없으며 우리에 양이 없으며 외양간에 소가 없을지라도 나는 여호와로 말미암아 즐거워하며 나의 구원의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기뻐하리로다” 이것을 질문 형식으로 바꾸면 이렇게 되는 겁니다. 너희에게 외적인 것이 있건 없건 나로 인하여 만족하겠느냐? 우리는 언제나 이 물음 앞에 있는 겁니다.
우리가 잘 아는 욥은 부자였다가 하루 아침에 모든 것을 다 잃었습니다. 이때 그가 고백 했는 것이 무엇입니까? “이르되 내가 모태에서 알몸으로 나왔사온즉 또한 알몸이 그리로 돌아가올지라 주신 이도 여호와시요 거두신 이도 여호와시오니 여호와의 이름이 찬송을 받으실지니이다 하고”(욥1:21) 고통스럽지 않았던 게 아닙니다. 힘들지 않았던 게 아닙니다. 그는 겉옷을 찢었습니다. 머리털을 밀었습니다. 이런 것을 통해 자신의 고통과 어려움을 나타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 엎드렸습니다. 그리고 고백한 것이 이것입니다. 올 때도 가지고 온 것이 없고 갈 때도 가지고 온 것이 없으되 주신 이가 여호와시오, 거두신 이도 여호와시다. 때문에 그만이 찬송을 받는 것이 마땅하도다.
사람들은 욥기의 결론을 주목합니다. 모든 과정 이후 하나님께서 두 배의 복을 허락하신 것을 주목합니다. 이 복 때문에 인내하라고 말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욥기 1장에서부터 고백한 그 고백은 그가 그런 고백을 하지 않았다 할지라도, 그런 고백에 걸맞은 삶과 다른 삶을 살았다 할지라도, 나아가 하나님께서 두 배의 복을 주지 않았다 할지라도 거짓 없는 사실로 있을 뿐입니다. 때문에 우리는 두 배의 복 때문에 그런 고백을 하는 자로 있어서는 안 되고, 주시든지 아니면 주신 것을 거두시든지 욥의 고백이 사실로 있다는 것을 인정해야 합니다. 하나님은 주실 수도 있고 거두실 수도 있는, 그러나 어떤 경우에도 하나님은 찬송을 받으시기에 합당한 그런 분이라는 것을 인정해야 합니다.
욥을 시험하셨던 것처럼 하시는 그런 시험이 모든 성도에게 있는 것은 아닙니다. 대부분의 성도에게 그런 시험은 좀처럼 있지 않습니다. 그런 시험이 올 때 욥과 같은 자세를 가질 수 있는가? 개인적으로는 부정적일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우리를 다양한 방법과 방식으로 다루신다고 할 때 하나님 자신은 변함없는 분으로 계시다는 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그리고 변함없는 하나님께서 우리를 향한 뜻과 계획을 가지고 계시다는 것, 그것을 이루기 위해서 그리스도까지도 내어놓으셨다는 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그리스도까지 주셨는데 하나님 편에서 무엇을 아끼겠습니까? 때문에 우리는 이런 말씀을 기억하면서 그분을 의지하고 그분만을 바라고 그분만으로 만족하고 그분만으로 기뻐하고 즐거워할 수 있도록 훈련하면서 주의 은혜를 구해야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