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간으로의 여행 크로아티아, 발칸을 걷다]
Serbia
07 세르비아 니시 그리고 마케도니아 스코페(1)
니시는 모라바강과 그 지류인 니샤바강이 만나는 부근에 위치한다. 로마시대부터 나이수스(Naissus)라는 옛 이름으로 불렀으며, 콘스탄티누스 대제의 출생지로 알려져 잇다.
스코페는 마케도니아에서 제일 큰 도시로 정치, 문화, 경제 및 학문의 중심지이다. 도시명칭은 1912년 우스쿠브(Uskub)에서 스코폴리에(Skoplie)로 변경되었고, 1950년대 이후 스코페(Skopje)로 불리었다.
스코페는 칼레(Kale) 요새에서 발견된 석기시대 유적을 통해서 알 수 있듯이 기원전 3500년경부터 사람들이 거주해왔다. 비잔틴 제국, 오스만투르크제국의 통치를 받아 왔으며, 1991년 유고슬리비아 공화국에서 독립하면서 마케도니아의 수도가 되었다.
차의 짐 정리를 하고 호텔 로비에서 그녀를 기다렸다. 10분 전 8시이다. 리셉션을 마주 보고 있는 로비의 소파에 앉아 그녀를 기다렸다.
5분쯤 흘렀을까, 엘레나가 짐을 가지고 내려왔다. 짐을 트렁크와 뒷좌석에 실었다. 자동차에 그녀와 나란히 앉아 간다는 것이 왠지 어색한 느낌이 들었다. 나는 엘레나에게 안전벨트를 매라고 하였다. 그런 다음 아직은 서먹한 가운데 함께 출발하였다.
한 시간 정도 지났을 때 맥도날드 휴게소가 보였다.
“커피 한잔 어때요?” 내가 말햇다.
“좋아요.”
휴게소에 차를 멈추고 커피 두 잔을 시켰다.
“아메리카노!”
나는 개인적으로 진한 아메리카노나 에스프레소를 좋아한다. 진한 맛의 커피는 가끔 나를 각성시켜 주기 때문이다. 커피를 가지고 차에 탄 다음 다시 여행길에 올랐다.
휴게소에서 목적지인 니시에 도착한 것은 약 한 시간 반 정도 지난 후였다.
이곳으로 오는 동안 나는 엘레나에 관하여 이것저것 물어보았다. 여행을 같이하게 돼서 오는 호기심만은 아니었다. 개인적인 관심이었다.
‘무엇을 하는 사람일까?’, ‘왜 이곳으로 여행을 왔을까?’ ‘보다 여행하기 좋은 데도 많은데’하는 여러 생각이 들었다.
엘레나의 성격을 말하자면 아주 명랑한 여자였다. 독일 남부의 여자 같은 명랑함을 지닌 느낌이었다.
엘레나에게 말했다.
“니시는 세르비아 남부의 중심지입니다. 현재 베오그라드, 노비사드 다음가는 제3의 도시입니다. 인구는 약 30만 명 정도 되고요.”
엘레나가 말하였다.
“이곳에서 콘스탄티누스 대제가 태어났다는 거 아세요?”
나는 핸들을 꺾으면서 엘레나의 물음에 답하였다.
“알죠, 그는 로마제국의 몇 안 되는 발칸 출신 황제 중 한 명이죠. 그리고 더욱 중요한 것은 밀라노 칙령으로 기독교를 공인한 황제라는 겁니다.”
“니시는 여러 나라의 지배를 받았던 도시이죠.”
“맞습니다. 이민족의 침입으로 파괴도니 적도 있고 불가리아령이었던 때도 있었습니다. 그 후 헝가리와 비잔틴제국의 세력권에 있다가 12세기에는 세르비아, 그다음에는 거의 500년간 오스만 투르크가 지배합니다.”
엘레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거리는 비가 와서 그런지 촉촉한 느낌이 들었다. 내가 말했다.
“배 안 고프세요?”
“좀 출출하긴 하네요.”
“그렇죠?”
“식당이 있나 한번 보죠.”
도시로 들어가는 입구에 레스토랑이 하나 보였다. 차를 레스토랑 앞에 세우고 내렸다. 레스토랑의 입구에는 개가 핫도그를 물고 있는 사진이 크게 걸려 있었는데, 말 그대로 ‘핫도그’였다.
레스토랑 안으로 들어가서 직원이 안내해 주는 자리에 앉았다. 메뉴판을 가져다주었는데 음식이 무엇인지 알 수가 없었다. 우선 음료를 시키기로 하였다. 나는 운전을 하니 콜라를 시켰고 엘레나는 로컬 세르비아 레드 와인을 시켰다. 음료가 나오고 주위를 둘러바았다. 나는 다른 테이블에서 식사를 하고 있는 사람을 가리켰다. 그러자 종업원이 말했다.
“플레스 카비차.”
나도 ‘플레스 카비차’하고 중얼거렸다. 나는 그것으로 주문하였고 엘레나는 피자를 시켰다.
음시이 나왔다. 음식은 완두콩, 당근, 감자, 옥수수, 그리고 고기가 접시에 놓여있는 것이었다. 오스만 투르크의 지배를 오랫동안 받아서인지 약간의 향내가 있었다.
밖에는 비가 내리고 있었다.
식사를 하고 스컬타워라 불리는 해골 탑을 보러 갈 예정이었다.
약간은 어두운 듯한 간접 조명의 레스토랑 안, 그리고 밖에는 비, 모든 것이 운치 있었다. 식사를 하고 차를 운전해서 스컬타워로 갔다. 스컬타워는 주차장에 내리자 바로 앞에 있었다. 우리는 티켓을 산 다음 안으로 들어갔다.
해골 탑은 스컬타워(Skull tower)라 부르며 세르비아어로는 쿨라라고 한다.
해골을 기반으로 세워진 첨탑이라는 것이 왠지 묘한 느낌을 불러일으켯따. 천천히 한 바퀴 돌면서 보았다.
엘레나가 물었다.
“혹시 이 해골 탑이 어떻게 세워지게 된 건지 아세요?”
나는 그녀 쪽으로 고개를 돌리고
“그냥 조금요. 세르비아의 해방 봉기에서 발단되었다는 것 정동. 그리고 죽기 전에 가봐야 될 장소를 순위로 매기면 천 번째가 조금 넘는다는 것 정도?”하면서 웃었다.
그러자 그녀도 역시 웃으면서 말하였다.
“이 탑에 얽힌 이야기에는 ‘스테반 신젤리지’라는 이름이 나옵니다.”
나는 “스테판 신젤리치”라고 중얼거렸다.
“그리고 세르비아 봉기와 연관이 있습니다. 제1차 세르비아 봉기가 1804년에 일어나는데 이 봉기는 1813년에 진압당하죠. 아시다시피 세르비아는 15세기 이후 거의 500년 동안 오스만 투르크의 지배를 받았죠. 우리나라의 역사적 경험과 연관하여 본다면 이해가 쉽게 갈 거라 생각됩니다. 그러다가 1차 진압 2년 후인 1815년에 2차 봉기가 일어나는데, 이 2차 봉기는 성공을 하게 됩니다. 그리고 독립은 1829년에 하게 되죠.”
엘레나에게 물어보았다.
“그럼 이 해골 탑, 스컬타워는 언제 만들어진 것이죠?”
“결론부터 이야기하면 이것은 1차 봉기의 유물입니다. 그것도 오스만 투르크에 의해 만들어진 것이죠.”
“그래요? 그럼 그 부분에 대해 이야기해 주실 수 있는지요?”
그녀는 미소를 지으며 이야기를 계속하였다.
“이 스컬타워는 오스만제국이 1809년 니시에서 일어난 세르비아 반군을 성공적으로 진압한 것을 기념하기 위해 세운 기념비입니다. 앞서 이야기하였듯이 ‘스테반 신젤리치’라는 지방 영주는 초기에는 오스만제국과의 전쟁에서 승리를 거두었습니다. 하지만 후반으로 갈수록 지휘관들의 의견 분열과 수적 열세로 점점 수세에 몰리게 됐죠. 결국 절망적인 상황이 되자 그는 탄약고를 폭발시켰습니다. 그렇게 해서 오스만 투르크 군과 세르비아 군대는 같이 전멸하게 됩니다. 전투가 끝나고 오스만의 사령관 파샤 후르시드는 세르비아 군의 시신에서 그 목을 베어 머리를 건축용 블록으로 사용해 기념비를 지으라고 명령합니다. 이렇게 해서 만들어진 것이 스컬타워, 해골 탑입니다.”
나는 엘레나에게 다시 물어보았다.
“그러면 그 해골의 수가 얼마나 되지요?”
“스컬타워의 높이는 3미터인데 해골의 수가 약 952개라고 합니다. 하지만 지금은 줄어들어 50-60개 정도 된다고 합니다. 타워 꼭대기에는 신젤리치의 머리가 있다죠. 이 타워는 승리를 거둔 점령 세력이 세르비아인들에게 경고하는 의미로 세웠습니다. 하지만 이 타워는 아주 비극적이었지만 영웅적이었던 세르비아 해방을 위한 전투의 상징이며 세르비아 독립의 상징이 되었지요.”
“강자와 약자, 지배하는 자와 지배받는 자, 이것은 역사 속에서 반복되는 일인 것 같군요. 그곳에는 항상 영웅이 나타나고 말입니다.”
하고 나는 엘레나에게 말했다.
밖으로 나왔다. 날씨는 비가 언제 왔냐는 듯하였다. 햇살의 가시광선은 물방울이 맺혀있는 나뭇잎을 비추고 있었다. 우리는 길 건너 차로 자연스럽게 걸어갔다. 다음 목적지는 마케도니아. 이곳에서부터 국경까지는 약 두 시간 반 정도 거리이다. 차를 타고 니시를 빠져나왔다. 그리고 도로를 따라 달렸다. 한 시간 정도 지났을 때 도로는 국도로 바뀌었다. 국도는 그리 좋지는 않았다. 파여진 도로를 피해가며 한 시간 정도 더 달려갔다. 휴게소가 나왔다.
주유소 휴게소. 우리는 이곳에서 커피를 한 잔씩 주문하였다. 스마트 폰을 열어보니 와이파이가 잡혔다. 메일을 확인하고, 문자를 한 다음 나는 직원에게 국경까지 얼마나 걸리느냐고 물어보았다.
“피프틴.”
직원은 영어로 나에게 말하였다. 우리는 커피를 들고 차로 이동하여 출발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