햄버거힐에서 복숭아 먹다가 죽을 뻔한
아서 위크닉 주니어
1969년 봄, 난 101공수사단 병장으로 베트남에 들어갔다. 포트 베닝의 보병학교 소부대 지휘 과정을 막 졸업한 후다. 베트남에 들어오면서 난 보병분대장 보직을 받았고, 베트남에 들어오고 6개월도 되지 않아 12명을 책임지는 분대장이 된다. 정확히 말하면 베트남 들어오고(in-country) 4개월 만이다.
분대원들은 전투 경험이 있었고, 난 없었다. 나는 이 분대 지휘를 어마어마한 부담으로 직면했다.
중대 안에서 내 자신을 증명해야 할 기회는 바로 왔다. 그 유명한 햄버거힐 전투의 일부로 참가하게 된 거다. 남베트남 북단의 어샤우 계곡에서 5월 10~20일 동안 벌어진 전투다.
작전지역에 들어가기 전에 우린 불필요한 모든 걸 빼고 병기, 탄약, 수통 하나의 물만 가지고 들어간다. 우린 간단히 뭘 점령하고 끝난다고 생각했다. 그때 나는 출출할 것 같아서 C-레이션의 복숭아 통조림을 하나 챙겨서 가지고 간다.
우린 공격 지점으로 느리게 기동했는데, 일대는 무시무시한 정글에 수목이 빽빽해서 적지 아니 지연이 발생한다. 다른 부대도 같은 문제를 겪고 있었고, 그로 인해 공격은 다음 날로 연기된다. 이 말은 우리가 산 하단에서 하룻밤 보내야 한다는 거다.
아침이 왔고, 모두가 배고팠다. 우린 마지막 식사 후 24시간 가까이 공복이었다. 주제넘게 지시를 어긴 병사 몇만이 먹을 걸 가져왔고, 나는 그때 복숭아 통조림을 따서 먹기 시작한다.
즉시, 병사들이 날 노려보기 시작한다. 현실적으로 그 작은 깡통을 12명이 먹을 순 없고, 나는 급하게 깡통의 과일을 먹어 치웠다.
아무도 말하지 않았으나, 차가운 응시를 보노라니 내가 실수했다는 걸 확실히 알 수 있었다. 게다가 분대장인 내가 말이다. 그 순간 난 분대원이 아닌 나 자신에게 실망스러웠다.
얼마 지나지 않아, 우린 산으로 공격하란 명령을 받는다. 우리가 전투 구역으로 들어가자마자 엄청난 사격 아래 놓인다. 적은 작은 방어선을 구축하고 총알이 정말 비처럼 쏟아졌다.
나는 이 살벌한 사격을 피할 데를 둘러본다. 왼쪽에 작은 능선이 있었는데, 수풀이 무성해서 은폐 엄폐하기 적격으로 보였다.
난 즉시 일어나 분대원에게 “나를 따르라! 우린 저 위로 간다!” 소리치고 전력으로 질주했다. 그 능선 위까지 난 미친 사람처럼 돌격했다. 뛰는 동안 내 발을 따라서 총알들이 재봉질처럼 때렸지만 무시했고, 나뭇가지를 밀면서 뛰어 올라간다.
그 능선의 봉우리에 도착했을 때,
난 방어에 정말 최적인 장소로 왔음을 확인했다.
뛰어오는 분대원을 향해 고개를 돌리며
이 사실을 말하려고 하는데,
I was alone!
분대원들은 나 혼자 뛰어가는데 가만있었다.
안 따라왔다.
30분 지나 전투가 소강상태가 되자
분대원들이 내가 있는 곳으로 마침내 올라왔다.
난 분대원을 모아 꾸짖었다.
“왜 씨발 날 안 따라온 거야!
봐! 엄폐물이 여기 한두 군데야?
날 바로 따라 올라왔으면 상황이 전혀 달랐을 거 아냐!!!”
아무도 입을 열지 않는다.
분대원들끼리 머쓱한 표정으로 서로 번갈아 보고,
적진을 향해 혼자 돌격하는 전우를 방치했음에 미안한 기색이 보인다.
잠시 후,
한 명이 침묵을 깼다.
“분대장님이 복숭아를 안 줘서 안 따라갔습니다.”
갑자기, 껄껄껄껄 웃음이 분대원에게서 터져 나왔다.
나도 웃었다.
그날 중요한 걸 배웠다. 전투지대 같은 위험한 곳에서 복숭아 깡통 같은 거 조금 안 줬다가 사람 죽을 수도 있다는 거. 말은 편하게 하지만 다시 절대로 그러면 안 된다고 생각했고, 나의 이기심에 속죄할 길을 찾게 된다.
오래 지나지 않아 난 방법을 찾았다. 베트남전쟁에서 미군이 공포를 잊고 정신 팔리는 것이 소포다. 고향에서 온 소포. ‘care package’라 불렀다. 가족의 소포에는 과자, 과일 케이크(fruitcake), 조미료, 주스 분말과 다양한 통조림이 들어 있었다.
어느 날 내 소포를 받으니, 어머니가 뉴햄프셔 산 7온스 사과주스 깡통을 보내셨다. 극단적 갈증에 시달렸던 두 달 만에 나에게 정말 좋은 소포였다. 그걸 마시니 생기가 돋고 기분 상큼해지며 사람 살 것 같다. 나는 그 사과주스 통조림 회사에 감사의 편지를 썼다.
편지에, 베트남에서 보병의 상황을 간단히 설명했다. 물이 없어서 고무나무 부레를 빨고 논의 물까지 얼마나 마셨는지 모르는 우리에게 귀 회사의 주스는 정말 맛있었다! 그리고 마지막에, 귀 회사에서 한 박스 정도 보내주면 우리 분대원들과 즐겁게 나눠 마시겠다...
약 2주 후, 나는 축사가 적힌 편지와 함께 4온스 통조림 20개 소포를 받는다. 사람 환장할 정도로 놀랐다! 사회에서 거들떠도 안 보던 것이 야전에서 그렇게 행복할 줄 몰랐다!
전장의 보병은 그런 과일 주스 깡통 하나에도 정말 감사를 느끼게 된다. 맛이 좋아서뿐이 아니다. 거기서 저 멀리 희미한 고향과 친구들을 느끼게 하기 때문이다.
나는 머리를 굴려 다른 납품회사에도 혹시 보내주지 않을까 같은 편지를 써서 보냈다. 요구를 보내면 답은 대략 2주 걸렸다.
얼마 지나지 않아 물품이 굴러들어 오기 시작한다. 어마어마한 양의 땅콩, 비스킷, 과일 넥타, 딸기 블랙베리 깡통, 스테이크 소시지 등이 들어왔다. 나는 농담 삼아 담배 도매상에게 시가를 요청하기도 했고, 한 회사에 두 번 보내는 실수를 하지 않기 위해 내가 편지 쓴 곳의 목록까지 정리해야 했다.
자연스레 분대원들은 나에게 물품 박스가 쌓이는 것을 의아해했고, 나는 삼촌이 식료품 창고에서 일한다고 간단히 둘러댔다. 그런 사실이 밝혀져 분대원들이 공짜를 바라는 똑같은 짓을 할까 두려웠다!
나중에, 내가 관대한 사람들에게 너무 이익을 취하지 않나 자책했는데, 곧바로 그 생각을 그만뒀다. 전투 보병은 도저히 참을 수 없는 무수한 조건에서 고통받으며 바닥 수준의 음식만 먹고 버틴다. 병사의 거대한 공포는 사람들이 모른다. 베트남전에서 많은 병사가 그런 문제로 힘들어했던 게 마음에 남아 있다. 내가 받은 그 공짜 음식물들은 병사들에게 상상할 수 없을 위안이었다. 사탕 과자 나눠 먹는 것이 병사들 정신에 어떤 영향을 끼치는지는 처해보지 않고 모를 것이다.
분대원들을 나를 ‘작전 세력(Operator)’이라 부르기 시작했다. 명칭은 1953년 영화 [17포로수용소]에서 따온 말로, 척박한 수용소에서 무엇이라도 손에 넣으려고 머리를 쓰던 윌리엄 홀덴 역할이 불렸던 별명에서 따온 것이다. 어쨌거나 난 혼자 나가면 안 되는 분대장이었다.
[끝]
(잇빨 주 : fruitcake는 우리가 생각하는 무른 케이크가 아니라 과일이 들어간 빵과 쿠키의 중간 정도 반고체다. 소포로 보내려면 상하지 않게 오픈에서 살짝 딱딱하게 구워서 보냈을 것 같다. 베트남 기후를 몰라 그냥 보냈다가 상한 상태에서 받는 일도 벌어졌다. 이건 한국전도 비슷한데, 무른 '엄마의 맛' 음식을 보냈을 때 겨울에 받으면 상태 나쁘지 않지만 여름에 받으면 썩어 있곤 했다. 그걸 떠나서 한국전은 베트남전보다 소포가 두 배 이상 시간이 걸려, 기본 한 달이었다. )
첫댓글 콩(통)하나도 나누어 먹는 사이
글쓴 분대장이 잘깨닿고 실천하는 모범입니다.
한국군은 절대 혼자 먹지 않았을것 같네요.. 가오가 있지..ㅎㅎ
혼자서는 못 먹겠죠
저도 12개월이 지난 상태에서
첫 휴가 나가서 자짱면을
제일 먼저 먹은것 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