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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기(傳記) 및 채널링에 대한
몇가지 정보(2)
대중 앞에 서다.
사람들로부터 비웃음을 사고, 불신을 당할까 봐, 나는 예수아와 연결되어 있다는 사실을 그때까지 아무에게도 이야기하지 않았습니다. 내가 누군가에게 “예수아 혹은 예수와 채널링을 하고 있어요.”라고 말을 한다는 것이 나에게는 불가능한 것처럼 보였습니다.
내 마음 한구석에 이러한 회의론적인 시각이 남아 있어, 내가 잘 난체 하고 있으며, 착각하여, 제정신이 아니거나, 아니면 더 심각한 상황일 수 있다고 말해주는 것만 같았습니다. 나는 이러한 사실을 가까운 친구 몇 명에게 털어놓았으며, 우리는 함께 모여, 몇 번의 작은 모임도 가졌으며, 일은 잘 이루어졌었습니다. 또한 내 웹 사이트(네덜란드어)에 첫 번째 시리즈의 채널링 내용을 공개하기도 했습니다.
그 후, 예수아와 만난 지 약 일 년이 지났을 무렵, 나는 벨기에의 한 영성 센터로부터 공개 채널링을 해달라는 요청을 받게 되었습니다. 공개 채널링을 한다는 생각만 해도, 나는 소름이 돋았지만, 또 한편으로는 요청을 거절해서는 안 되며, 이러한 두려움은 반드시 극복해야 하며, 예수아께서 내가 길을 잃게 하지는 않을 거라는 사실을 알고 있었습니다.
나는 몇 주 동안 신경이 곤두서 있었으며, 강연회 며칠 전부터는 아프고, 잠도 제대로 자지 못한 채, 드디어 첫 번째 채널링을 하게 되었습니다. 이것은 나에게 커다란 긍정적인 충격을 주었습니다. 짧은 채널링과 질의 및 응답 시간(이 책의 2부에 소개된 치유 시리즈의 첫 번째)이 있었지만, 나는 나를 통해 예수의 현존이 흘러들어오는 것을 아주 분명하게 느끼게 되었습니다. 사람들은 따뜻하고, 열정적인 반응을 보여주었으며, 염려했던 것과 같은 공개적인 망신은 당하지 않았습니다.
첫 번째의 공개 채널링이 있은 후, 나는 자신감을 가지게 되었으며, 곧바로 내 집에서 모임을 가지기로 했으며, 실제로 그렇게 했습니다. 하지만 두려움이 완전히 사라진 것은 아니었습니다. 청중들 앞에서 채널링을 해야 할 때마다, 나는 커다란 저항과 두려움을 느꼈으며, 화도 났습니다. 나는 결코 사람들 앞에 나서서 편안하게 말을 잘하는 그런 사람이 아니었으며, 수줍음이 많고, 성격도 내성적이었습니다.
내 입에서 논리 정연한 말이 흘러나올 수 있을지, 그리고 무엇보다 예수아가 거기에 있을 지도, 알 수 없는 상황에서, 내가 왜 그렇게 상처받기 쉬운 장소에 있어야 한단 말인가! 물론, 예수아는 나를 위해 언제나 그곳에 있었습니다. 지속되는 불안과 두려움 그리고 “내가 이 일을 꼭 해야 하나?”라는 것에 대한 분노는 단지 믿을 수 없는 이러한 무모한 짓을 그만두게 하려는 내 에고의 마지막 몸부림이었습니다. 예수아가 나를 통해 말을 한다는 것은 내가 지니고 있던 모든 방어 체계와는 맞지 않는 것이었습니다. 그것은 내가 가졌던 모든 습성들, 즉 조심스럽고, 내성적이며, 방관자적인 습관들을 무시해 버렸습니다. 나는 오랫동안 사람들과의 접촉을 꺼려 왔으며, 사람들을 쉽게 믿지도 않았습니다. 이제 이 에너지적인 존재가 내 안에서, 나를 통해, 사람들에게 자신은 사람들을 사랑하고, 아끼며, 자신들이 지니고 있는 내적인 앎과 힘을 받아들이도록 촉구하고 있으며, 심지어 사람들의 완고함과 저항에 대해서는 유머러스하게 사람들을 꾸짖기까지 하고 있는 것입니다. 어떻게 이것이 나일 수가 있단 말입니까!
우리가 받았던 호응들에, 나는 놀랐습니다. 먼저, 우리는 모든 체널링 내용들을 네덜란드 웹 사이트에 올렸으며, 점점 많은 사람들이 모이기 시작했습니다. 우리는 그 메시지에 큰 감동을 받았으며, 마치 예수아가 자신들에게 직접 이야기하는 것 같았다고 하는 사람들로부터 몇 년에 걸쳐 수백 건의 이메일을 받았습니다.
얼마 후, 나는 채널링 내용을 영어로 번역했으며, 또한 영어로 된 웹 사이트도 개설했습니다. 처음에는 많은 독자들이 모이지 않았지만, 예수아는 우리에게 그냥 그대로 놔두고, 기다리라고 했습니다. 정말로 일 년이 조금 지나자, 우리는 영어를 사용하는 독자층들로부터 메시지를 받기 시작했으며, 또한 외국에 있는 사람들에게 원격 리딩도 제공하기 시작했습니다. 모든 일들이 바쁘게 진행되어 갔습니다.
확장
그 후, 이메일을 통해 다른 나라에 살고 있던 몇몇 사람들이 우리와 접촉하게 되었으며, 예수아의 메시지를 자원해서 번역을 해주기도 했습니다. 우리들 앞에 별안간 사람들이 나타나게 되었으며, 이들은 유능한 번역가들이며, 같은 계보의 영(spirits)들로서, 가족처럼 편안하게 느껴졌습니다. 단지, 예수아의 자료를 통해 영감을 받았다는 이유만으로 서비스를 제공해준 것입니다. 이것은 놀라운 일입니다. 스페인어, 히브리어, 불어, 포르투갈어, 독일어, 핀란드어로 번역된 사이트들을 인터넷으로 이용할 수 있게 된 것입니다.
우리는 전 세계 사람들과 친구가 되었으며, 문화적인 경계를 벗어나, 공통의 관심사와 소망을 함께 나누고 있는 것입니다. 예수아께서는 나에게 자료를 단지 글로 쓰기만 하고, 그다음은 그냥 내버려 두라고 말했습니다. 그 글은 가야 할 길을 스스로 찾아갈 것이라고 했으며, 정말로 그랬습니다.
이러한 일을 하기 위해, 인터넷이 주요한 도구가 되었습니다. 우리의 이야기 속에서, 동시적으로 일어나는 일들 가운데 하나는 게릿이 IT 컨설턴트로 일하고 있으며, 또한 웹 사이트를 꾸미고, 유지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나 또한 철학자로서의 경력이 예수아의 에너지를 말과 개념으로 번역하는데 많은 도움이 되고 있다고 느끼고 있습니다. 또한, 나는 언제나 글을 쓰는 것을 좋아했으며, 철학을 배우는 학생으로서, 영어로 글을 쓰는 훈련도 해왔었습니다.
채널링을 하고, 독자들을 위해 리딩을 할 때, 내가 결국 “내 일을 하고 있다"라고, 즉 태어나서 하기로 되어 있던 일을 하고 있다고 느끼고 있습니다. 전 세계 사람들로부터 따뜻하고, 친절한 호응을 받게 되어, 나는 깊은 보람을 느끼고 있으며, 또한 가장 하고 싶어 하는 일을 하면서, 생계를 꾸려갈 수 있다는 것에 감사함을 느끼고 있습니다.
채널링 - 오류를 밝힘
끝으로, 나는 채널링 현상에 대해, 몇 가지 일반적인 이야기를 하고자 합니다. 내가 네덜란드인이며(이들은 아주 현실적인 사람들입니다!), 내가 접하고 있는 새 시대에 대한 일부 자료들에 대해 아주 회의적이지만, 나는 채널링에 대한 몇 가지 사항들을 넓은 시각에서 보고자 합니다.
메시지를 주는 채널러와 메시지를 받는(channeled) 존재 간의 관계
나는 채널링 현상을 인간과 스승으로서의 역할을 하는 비-육체적인 존재 사이의 협력이라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스승은 영감과 폭넓은 시야를 인간에게 제공해주며, 인간은 영적인 존재가 제공해주는 에너지를 가정교육과 교육 및 문화를 통해 익히 잘 알고 있는 말과 개념들로 해석하게 됩니다. 비-육체적인 존재의 에너지를 순수하게 전하기 위해서는 메시지를 받는 인간 쪽에서는 완벽하게 자기 자신을 제쳐두어야 한다거나, 제쳐두는 것이 바람직하다고 여기지만, 나는 그렇게 않다고 믿고 있습니다.
나는 메시지를 받는 사람이 지니고 있는 마음자세, 인식과 어휘력이 받고 있는 메시지에 크게 영향을 미칠 수밖에 없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비록 메시지를 받는 사람이 무아의 경지에 들어간다 할지라도, 메시지를 받는 사람은 수신자이며, 메시지를 담는 용기이므로, 자료를 공동으로 창조하고 있는 것입니다. 나는 채널러가 메시지를 받는데 아무런 역할도 하지 않고, 전적으로 외부로부터 메시지를 받을 수 있다는 것은 천진난만한 생각이라고 믿고 있습니다.
나는 메시지가 채널러의 의식을 통해 내면으로부터 나오며, 영적인 스승의 의식에 의해 확대된다고 믿고 있으며, 채널링의 질(質)은 채널러가 자기 자신을 어느 정도 배제하느냐에 달려 있는 것이 아니라, 전하는 존재와 받는 사람 모두가 지니고 있는 의식 수준에 달려 있다고 믿고 있습니다. 본질적으로, 채널링은 공동으로 창조하는 작업입니다.
채널링된 정보의 질을 판단하는 방법
채널링은 아름다운 것이며, 영감을 줄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채널링은 터무니없는 빈말이나, 틀에 박힌 두려움을 주는 이야기로 이어질 수도 있습니다. 최악의 경우, 채널링은 보이지 않는 영적인 계층구조에서, 이름과 지위를 제외하고는, 아무런 도움도 되지 않는 인물들을 숭배하는 것으로 이어질 수도 있습니다. 우리의 외부에 존재하는 이해할 수 없는 인물들을 우러러보는 것, 이것이야말로 모든 영적인 스승들이 우리에게 경계하라고 주문했던 것 아닌가요?
정보가 교신된다는 것은 정보의 질하고는 아무런 관계가 없는 것입니다. 과학적 이론들이 과학적이거나, 믿을 만하게 만드는 것이 무엇인지를 조사하는 철학의 한 부류인, 과학론(科學論)에서, “발견의 맥락”과 “ 정당화의 맥락” 간에는 서로 명백하게 구별되어야 합니다. 과학적인 이론의 발견으로 이어지는 것은 “정당화될 수 있느냐”하는 것과는 아무런 관계도 없습니다.
과학자들은 개인적인 꿈, 관념 혹은 몽상들을 기초로 하여, 어떤 이론이든 만들어낼 수가 있지만, 이론을 만든 이상, 그 이론은 일반적으로 인정될 수 있는 기준, 즉 경험에 의거한 확인, 일관성, 설명할 수 능력(explanatory power)에 기초하여, 동료 과학자들에 의해 평가를 받게 됩니다. 따라서 발견의 맥락에서는 모든 것이 허용되지만, 반면에 정당화의 맥락에서는 과학계가 가치를 인정할 수 있도록, 일정한 품질기준에 맞아야만 합니다.
나는 동일한 기준이 교신된 자료에도 적용된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채널링된 메시지는 “단순한 인간들”이 전하는 영적인 내용과 동일한 기준에 따라 평가되어야 합니다. 다시 말해, 정보가 명확한가?, 여러분이 지니고 있는 지식에 새로운 통찰력을 보태주는가?, 자신을 더 많이 사랑하도록 영감을 불어넣어 주는가?, 메시지로 인해, 계몽되고, 고양되었다고 느끼는가? 등. 만약 그렇다고 한다면,
누가 그 메시지를 보내주었는가 그리고 어떻게 해서 그 메시지가 나오게 되었는가 하는 것(발견의 맥락)은 상대적으로 중요하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증거(품질)는 실질적인 이익(pudding)에 있는 것이지, 그 메시지를 전해주는 자가 근거도 없이 주장하는 계급이나 지위에 있는 것이 아닙니다.
채널러로서의 나의 체험
에수아를 채널할 때, 나는 내가 작아지는 것이 아니라, 더 커지는 것을 느끼게 됩니다. 이 에너지로 인해, 나는 나의 더 큰 자아의 위대함으로 상승하게 되는 느낌을 받게 됩니다. 나는 예수아가 일상적인 작은 나와 더 큰 나 사이를 중재하고 있으며, 내가 나(Me)를 조금 더 많이 체화할 수 있도록 돕고 있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예수아가 이렇게 하고, 내가 그것을 허용할 때마다, 나는 내 의식을 조금 더 많이 확장하고 있는 것이며, 이로 인해 나의 성장과 권능도 영향을 받게 되는 것입니다.
한 번은 내가 채널링(새 시대의 관계들)을 했을 때, 나 자신의 상위 존재, 혹은 더 큰 자아(내가 “오렐리아(Aurelia)”라고 부르는)를 아주 강하게 느꼈으며, 내가 예수아를 채널링하고 있는지를 의심할 정도였습니다. 잠자리에 들기 전에, 나는 예수아에게 그 건에 대해 물어보았으며, 예수아는 나에게 아주 사랑스러운 말을 전해주었습니다. “항상 기억해 두세요. 내가 당신을 위해 거기에 있는 것이지, 당신이 나를 위해 거기에 있는 것이 아닙니다.” 이 말로 인해, 그것이 나에게 명확해졌습니다. 우리 모두는 여기 지구에서 우리의 더 큰 자아들을 온전히 체화하고, 구현하도록 되어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우리의 길을 갈 수 있도록 돕기 위해, 스승은 나타나게 되며, 만약 그 스승이 참된 스승이라면, 여러분이 그 스승을 필요로 하는 한, 여러분을 돕게 될 것이며, 그런 다음에는 길에서 비켜나게 될 것입니다.
처음에 했던 것만큼 많은 채팅(담소)은 하지 않고 있지만, 그래도 나와 예수아는 함께 하고 있습니다, 종종, 개인적인 질문을 하면, 예수아는 “당신이 그것에 대해 정말로 느끼고 있는 것이 무엇인가요?”라고 나에게 되묻습니다. 그리고 내가 그것에 관심을 집중하면, 내 내면의 앎과 직관에서 나온 답이 거기에 있는 것입니다.
따라서 예수아는 우리 모두에게 자신이 지니고 있는 힘을 받아들이고, 채널링을 목적이 아니라, 수단으로 여길 것을 촉구하고 있습니다. 아마, 나도 언젠가는 예수아에 더 이상 의존하지 않고, 나 자신의 상위 혹은 그리스도 자아와 채널할 수 있게 될 것입니다. 예수아가 가장 먼저 나에게 박수를 보낼 줄 거라고 나는 확신하고 있습니다.
채널링에 대한 예수아의 견해
이제 채널링에 대한 채널링으로 끝을 맺고자 하며, 채널러로서의 나와의 관계에 대해, 예수아께서 하신 몇 가지 말씀을 전하고자 합니다.
채널링은 비물질적인 다른 존재의 도움으로 자기 자신에게 더 가까이 다가갈 수 있는 방법입니다. 이 존재는 일시적으로 스승으로서의 역할을 하게 됩니다. 여러분이 자기 자신의 더 깊은 단계에 도달할 수 있도록, 스승의 에너지가 돕게 되는 것입니다. 이러한 스승의 에너지로 인해, 여러분은 자신의 빛을 계속해서 가리고 있는 두려움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스승은 여러분 스스로가 지니고 있는 빛을 여러분에게 보여주게 됩니다. 스승은 여러분이 지니고 있는 빛에 대해, 여러분보다도 더 많이 알고 있습니다. 여러분이 이러한 빛, 즉 내면의 앎에 접근할 수 있게 되자마자, 스승은 더 이상 필요가 없게 될 것입니다. 그러면 여러분은 자신의 빛과 교신을 할 수 있게 될 것입니다. 스승은 여러분과 여러분의 상위 자아를 이어주는 다리의 역할을 더 이상 할 필요가 없게 되는 것입니다.
나는 여러분 자신이 지니고 있는 빛에 대해 잠시 상기시켜주고 있는 것입니다. 나는 예수아 밴 요셉의 모습으로, 여러분의 위대함을 여러분에게 보여주고 있는 것입니다. 내 안에서, 여러분은 자기 자신을, 즉 자신의 그리스도 자아를 보고 있지만, 여러분은 아직까지 이것을 충분히 깨닫지 못하고 있습니다. 여러분에게, 나는 기본 틀과도 같은 것입니다. 내 에너지는 횃불로서의 기능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나는 여러분이 자신의 그리스도 자아와 좀 더 깊이 친숙해질 수 있도록 돕고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의 그리스도 자아가 서서히 전면에 등장하게 되면, 나는 뒤로 물러서게 될 것입니다. 이렇게 하는 것이 맞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렇게 되어야 합니다. 이러한 관계 속에서, 내가 여러분을 위해 거기에 있는 것이며, 여러분이 나를 위해 거기에 있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잊지 말기를 바랍니다. 나는 목표가 아니라, 수단입니다. 그리스도의 재탄생은 여러분의 그리스도의 자아가 깨어나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며, 내가 깨어나는 것이 아닙니다.
여러분의 더 큰 자아에게 도움이 되는 바에 따라, 나는 행동하게 됩니다. 내 목표는 여러분이 나를 필요로 하지 않도록 만드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나와 채널할 때, 자신이 작아지거나, 보이지 않게 되려고 애쓰지 마세요. 나는 여러분이 더 커지고, 자신의 참된 힘이 밖으로 흘러, 세상을 비추는 것을 느끼도록 만들려고 하는 것입니다.
스승은 길을 가리켜주지만, 그 길을 걷는 것은 바로 여러분입니다. 얼마 후, 여러분은 혼자 걷고 있으며, 스승은 뒤에 남겨두고 왔다는 사실을 알게 될 것입니다. 이때가 바로 숭고하고, 신성한 순간입니다. 스승은 여러분과 함께 할 것이며, 내적인 존재로서, 여러분의 가슴속에 살아 있겠지만, 분리된 별개의 인물은 사라지게 될 것입니다.
우리는 연결되어 있지만, 여러분이 성장함에 따라, 나를 점점 덜 보게 되거나, 분리된 존재로서, 나를 부르고 싶지 않게 될 것입니다. 나는 서서히 여러분 에너지의 일부가 될 것입니다. 그리고 어느 시점이 되면, 내가 여러분과 더 이상 분리되어 있다고 여기지도 않게 될 것입니다. 이렇게 되는 것이 여러분이 진실로 내 말을 들었으며, 나를 보았다는 것을 말해주고 있는 것입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