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5년, 남영동 대공분실 5층 515호. 고문관들이 일제히 그리스 비극의 코러스처럼 입을 모아 합창한다. 민주화운동 관련자들을 불법 연행하여 자신들이 원하는 답을 거짓 자백으로 받아낼 때까지, 그들은 치밀하게 계획된 하나의 거대한 고문 시나리오에 맞춰 움직이는 연기자처럼 움직인다. 그 기계성이, 고문 받는 타인의 지옥같은 심정에 전혀 무관심한 차가운 눈매가, 육체가 극한의 고통을 느끼는 지점이 어딘지 너무 잘 알고 있는 그 익숙한 손길이 엄청난 공포로 다가온다.
"이 남영동 사람들은 제시되고 결정된 방향으로 자기들의 직무를, 아니 작업을 추진해 나가면 그뿐입니다. 이들은 예정되고 설정된 모종의 정치적 목표를 위해, 단정적으로 가정하고 있는 불온함과 불순함을 무슨 수를 써서라도 획득해 내야 합니다."(<남영동>, 김근태 지음, 중원문화 펴냄)
정지영 감독의 신작 <남영동 1985>는 고 김근태 의원(영화 속 이름은 '김종태'다)이 남영동 대공분실에서 고문 기술자 이근안(영화 속 이름은 '이두한', 일명 '장의사'로 불린다)을 비롯한 몇몇 고문 경찰들에게 22일 동안 당했던 참혹한 경험의 기록을 스크린으로 옮겼다. 정지영 감독은 전작 <부러진 화살>에서 김명호 전 성균관대 수학과 교수의 '석궁 테러 사건'을 극화하며 사법부 개혁에 대한 직언을 서슴지 않았다. 이번 <남영동 1985>에서도 고 김근태 의원의 수기 <남영동>을 바탕으로, 80년대 민주화운동을 탄압하던 세력이 여전히 한국의 지도층에 잔존하고 있음을, 당시의 상황에 대해 제대로 정리되거나 진정한 화해가 이루어진 적이 없음을 다시 한번 매서운 어조로 상기시킨다.
<프레시안>은 <남영동 1985>의 11월 22일 개봉에 맞춰 14일 삼청동에서 김종태를 연기한 배우 박원상을 만났다. 다음은 인터뷰 전문이다. <편집자>
▲ <남영동 1985>에서 김종태 역을 연기한 배우 박원상. ⓒ프레시안(최형락)
프레시안: 11월 5일 언론시사회 이후 지금까지 인터뷰를 정말 많이 했다고 들었다.
박원상: 인터뷰를 이렇게 많이 한 건 처음이다. 하지만 더 많이 해야 한다. <남영동 1985>가 부산국제영화제 때 처음 공개된 다음 관객분들이 힘을 많이 보내주셨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관람을 주저하실 분이 더 많을 것 같다. 사실 편한 영화일 수가 없으니까. 영화 볼 때 너무 정신적으로 힘들지 않을까 걱정하는 분들이 적지 않을 것 같아서, 홍보 기회를 더 더 더 달라고 내가 주문하고 있다. 할 수 있는 방법이 그것밖에 없겠더라. 많은 분들이 '직구의 영화'라고들 하시던데, 홍보하는 방법도 결국은 영화와 같이 가는 수밖에 없는 것 같다. 원래 말주변이 없지만, 이번 영화 관련해서 말이 많아졌다.
프레시안: 정지영 감독의 영화 <부러진 화살>과 <남영동 1985>에 연이어 출연했다.
박원상: <부러진 화살>을 통해서 정지영 감독님을 만났다는 게, 연극으로 연기를 시작한 지 10년이 넘은 내게 가장 큰 사건이었다. 정지영 감독님의 영화를 예전부터 좋아했고, 특히 <하얀 전쟁>은 마음 속에 크게 자리잡은 작품이지만 그분과 함께 작업할 수 있을 거라는 생각을 해본 적이 없다. 좋아하면서도 왠지 나와는 너무 멀리 떨어져있는 분 같았는데, <부러진 화살>을 찍으면서 정말 많이 배웠다. 드디어 마음의 지표 같은 선생님을 만나게 된 거다. 그분이 "이러이러한 소재로 다음 영화를 찍을 건데 같이 하자"라며 <남영동 1985>를 권하셨을 때 거절할 이유가 없었다.
프레시안: 두 작품 모두 실화를 바탕으로 했다. 실화를 극화한 영화들을 대할 때 어떤 식으로 부담이 더해지는지, 그리고 <남영동 1985> 같은 경우는 어떤 식으로 다가왔는가.
박원상: 흔히 얘기하는 부채의식이 분명 있다. 내 직업이 배우인데, 내가 할 수 있는 일을 통해 간접적으로라도 함께 참여할 수 있다면 보람을 느끼게 된다. 지금까지 '이건 해야만 하겠다'면서 마음이 끌렸던 영화들이 나를 조금씩 성장시켜준 것 같다. 연기술의 성장이 아니라 내 안의 성장 말이다. 오히려 작품을 통해 내가 더 받게 된다. 특히 <남영동 1985> 같은 경우, 난 정말 생각 없이 살던 놈인데, 생각이 아니라 궁리만 하면서 살았던 것 같은데, 이 영화를 통해 생각이 많아졌다.
물론 고민은 컸다. 고문 연기를 어떻게 하지, 하는 고민은 아니었다. 영화는 다같이 머리를 맞대고 방법을 찾아내는 과정이며, 아무리 어려워도 함께 찍을 수 있으니까 고문 장면은 큰 문제가 아니었다. 김종태라는 인물이 고 김근태 의원을 모델로 했다는 건 누구나 안다. 내가 그분을 감당해도 되나, 감당할 수 있을까, 그런 자의식이 발목을 많이 잡았다. 지금까지 회색으로만 살았는데, 내가 이 역을 맡았을 때 관객들을 설득할 수 있을까? 감독님이 내민 손을 놓고 싶지 않은데, 한 손으로는 그 손을 꼭 쥐고 또 한손으로는 시나리오를 든 채 '미치겠다, 어떡하지' 고민했다. 하지만 다른 방법이 없었다. 가자, 해보자, 버티는 수밖에 없었다.
프레시안: 고 김근태 의원을 어디까지 닮아야 한다는 압박감이 있었는가. 혹은, 김종태 역에 본인의 해석이 어느 정도까지 들어간 편인가.
박원상: 처음엔 고 김근태 의원에 대한 자료를 닥치는 대로 찾아봤는데 어느 순간 이게 아니다 싶었다. 촬영하다가도 쉬는 짬이 생기면 유튜브로 그분 영상을 찾아보고 그랬는데, 틀린 방향이었던 거다. 물론 대사를 통해 민청련(민주화운동청년연합) 전 의장이었다는 과거가 나오면서 당연히 김근태 의원을 모델로 했다는 걸 알 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정지영 감독님이 시나리오에 구축한 건 김종태라는 인물이고, 김근태 의원 외의 수많은 고문 피해자를 부분적으로 대변하는 인물이다. 그래서 뒤늦게 '아니구나' 싶어서 시나리오로 다시 돌아갔고, 김종태라는 인물에 집중했다.
▲ 영화 <남영동 1985>. ⓒ아우라픽처스
개인적으로는 김종태가 고문에 못 이겨 '배후 세력'으로 함세웅 신부님, 권호경 목사님 이름을 댄 다음, 환상 속에서 자기 분신을 만나는 장면이 정말 힘들었다. 김근태 의원께서 정말 끝을 느끼셨겠구나, 이 좁은 공간에서 스스로를 지탱해줄 수 있는 것까지 무너졌겠구나 그런 생각이 들었다. 정서적으로, 감정적으로 많이 들어가는 장면들을 연기할 때에는 오히려 이성의 힘을 더 많이 배치해야 한다. 그래야 관객들과 좀 더 깊은 차원에서 만날 수 있으니까. 하지만 이 장면을 찍을 땐 그런 안배를 할 수가 없었다. 리허설 없이 바로 촬영했는데, 끝난 다음 많이 아팠던 기억이 난다. 아마 김 의원에게도 그 자백이 고문보다 더 큰 상처가 아니었을까….
프레시안: <와이키키 브라더스><범죄의 재구성><화려한 휴가><부러진 화살> 등에서의 임팩트가 워낙 강해서인지, 경쾌하고 다소 야비하면서도 미워할 수 없는 인물로서의 색깔이 강했다. 아무래도 <남영동 1985>는 많은 관객들에게 박원상을 '진중한 역'으로 처음 각인시키는 영화가 아닐까 싶다.
박원상: 사실 박원상이라는 배우를 <부러진 화살>이나 다른 영화에서 봤더라도, 이 역과 저 역을 연기한 사람이 동일 인물이라는 걸 연결 못 시키는 분들이 많다.(웃음) 크게 두드러지지 않는 외모 때문에도 그럴 것 같은데, 개인적으로는 특정 이미지로 남는다는 것에 크게 개의치는 않았다. 앞으로 하고 싶은 역이 뭐냐는 질문을 많이 받는데, 난 그런 게 별로 없다. 같이 작업하는 즐거움 자체가 연기의 동력이다.
<남영동 1985>의 고민은 그런 기존 이미지 때문이라기보다는, 부채의식에서 비롯된 고민이 더 컸다. 1988년 대학에 입학했고, 4년 내내 연극반 생활하면서 공연장에만 틀어박혔다. 연극이 너무 하고 싶었고, 대학에 들어왔으니까 내가 하고 싶은 걸 하고 살겠다 했다. 그렇게 4년을 보냈고 지금 마흔 세 살이 되기까지 계속 연기를 할 수 있었으니 참 행복하게 인생의 절반을 살아왔다. 그런데 나만 행복했던 거지. 참 많이 잊고 살아왔고.
촬영 끝내고 감독님과 PD님과 함께 김근태 의원이 안장된 마석 모란 공원을 찾았다. 참외 좋아하셨다는 말을 부인이신 인재근 의원님께 듣고는 참외랑 막걸리를 사들고 '무탈하게 잘 마쳤다'는 인사를 드리려 찾아갔다. 그런데 김 의원님 묘가 있는 그 구역 초입에 박래전 선배의 묘가 있었다. 83학번 숭실대 인문대 학생회장이었고 학생회관 옥상에서 분신했었다. 1학년 때 공연하다가 그 소식을 들었다. 부학생회장 선배는 독문과 선배였는데 그 선배가 상복 입은 모습도 생각났다. 그동안 다 잊고 있었던 거다. 가슴이 철렁했다. 아마 정지영 감독님이 이 영화를 같이 하자고 하셨을 때 주저하고 고민했던 이유 중에 그 부채의식도 있었던 것 같았다. 다 잊고 살아왔던 놈이 이래도 될까 싶었던….
박원상: 시나리오는 안 나온 상태였다. <부러진 화살> 홍보 활동 중에, "다음에 고문 이야기를 할 거다. <부러진 화살> 멤버가 그대로 넘어와서 같이 하지 않으면 의미가 없을 것 같다. 네가 김종태 역을 해줬으면 좋겠다"고 하셨다. 그래서 김근태 의원의 수기 <남영동>과 여타 고문 관련 책들을 찾아서 읽었다. 이걸 대체 어떻게 영화로 만들려고 하시는지 궁금했다. 영화적으로 좀 다르게 풀어내실까? 그런데 완성된 시나리오는 <남영동>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감독님은 '관객들을 아프게 만들게 하려는 게 목적'이라고 하셨다. 영화적으로 에둘러 가거나 윤색, 각색을 해서는 정면 대면을 할 수가 없다. 정면응시를 위해 이 시나리오가 가장 정직하고 효과적인 방식이었다는 데 동의한다.
감독님이 얼마 전 무대인사 때 "여러분, 두 시간 동안 아프게 해드려서 죄송해요. 우리 스탭들은 두 달 동안 아팠고, 엔딩 크레딧에 등장한 분들은 평생을 아프다 돌아가셨거나 여전히 진행형입니다. 그러니까 우리가 두 시간 동안 같이 아픔을 느껴서 그분들 마음에 위로가 된다면, 괜찮지 않을까요"라고 하셨다. 전적으로 동의한다. 그걸로 큰 위로가 되지 않을 거라는 건 알지만, 같은 프레임 안에 살고 있는 사람으로서 취할 수 있는 최소한의 태도가 아닐까 싶었다.
프레시안: 정지영 감독은 왜 <부러진 화살> 팀이 그대로 가길 원했던 건가.
▲ 배우 박원상 ⓒ프레시안(최형락)
박원상: 감독님은 <부러진 화살>을 13년 만에 작업하셨는데, 관객들이 생각 이상으로 전폭적인 응원을 보내주었다. 아마 지금까지 30년 동안 감독으로서 감당을 하며 살아오신 이력의 그 연장선일 수도 있고, 당신 이야기를 계속 듣고 싶다고 응원해준 관객들에 대한 감독님의 선택일 수도 있다. 십시일반으로 큰 선물을 받은 데 대한 자연스러운 보답으로서, <부러진 화살> 스탭들이 최대한 넘어와서 작업하는 게 의미가 있다고 생각하신 게 아닌가 싶다.
사실 이게 정상적인 제작 형태는 아니다. 이야기에 맞는 제작비를 들여 모든 스탭들이 적절한 개런티를 받고 일하는 게 상식적이다. 하지만 <부러진 화살>과 <남영동 1985>는 서로에 대한 믿음이 전제가 되었기 때문에, 영화가 흥행에 실패해서 설령 내 보수를 못 받더라도 상관없고 같이 작업하는 것 자체가 의미 있다는 마음으로 모여서 일했기 때문에 가능했다.
조심스러운 부분인데, 그렇게 만들어진 <부러진 화살>이 경제적으로 상당한 성공을 거두었다. 얼마 안 되는 돈으로 촬영 23회 차만에 완성한 영화가 이만큼의 흥행수입을 얻었다고 했을 때, 그 수입만 가져가려는 제작 형태는 반대한다. 부디, <부러진 화살>에서 외형적인 숫자만 빼려 하지 말고 이 사람들이 어떻게 어떤 마음으로 모여서 작업했는지를 벤치마킹하시길 바란다. 이야기는 통계나 수치로 만들 수 있는 게 아니다. 하지만 내가 보기엔 자꾸 통계로만 이야기를 대하려고 만들려고 하는 것 같다. 그러면 고만고만하고 비슷한 시행착오들이 자꾸 재생산될 수밖에 없고 관객들도 덩달아 불행해진다. 백양백색으로, 다양한 제작비로 그에 맞는 이야기들이 나와야만 욕을 하고 싸우더라도 생산적인 싸움이 될 수 있을 것이다.
프레시안: 이경영, 명계남, 문성근, 김의성, 서동수, 이천희, 김중기 등 근래 보기 드물게 남성 배우들의 힘만으로 대부분 이끌어가는 영화다. 이들과의 앙상블은 어땠나.
박원상: 촬영 회차는 25회 차, 한 달 반 정도 촬영했다. 양수리 6세트장에서 90퍼센트를 촬영하고 숙소에서 같이 묵었다. 이천희 이 친구가 캠핑 마니아다. 촬영 첫날이었나, 현장에서 뭔가 자꾸 뚝딱뚝딱 만들더라. 자기 집에 있던 테이블이랑 의자를 들고 오고, 널빤지로 탁자를 만들고 협탁도 하나 배치하면서 우리들이 앉을 자리를 만들었다. 아침에 촬영 콜타임 받고 세트장에 오면 천희가 만든 자리에 나이 순서대로 죽 앉았다. 명계남 선배가 "시나리오 펴" 그러면 다들 엄숙하게 시나리오를 펼치다가, 회의는 집어치우고 다들 낄낄거리면서 수다 삼매경에 빠졌다.
이천희는 워낙 대중적인 인지도가 있는 친구인데 그가 <남영동 1985>에 합류한다는 얘길 듣고 반갑고 놀라웠다. 시나리오를 본 다음 본인이 직접 연락해서 '김 계장' 역을 자청했다고 들었다. 이 계장 역의 김중기 같은 경우 영화 경험이 거의 없는 친구인데, 극 중에서 김종태에게 심정적으로 동화하는 변화를 표현해야 했다. 주변에서 하도 "네 역할이 너무 좋다"고 칭찬들을 하니까 부담이 많았던 것 같다. 나를 포함해서 그 친구들이 전부 명계남 선배, 이경영 선배, 문성근 선배 등과 섞이면서 아주 빨리 현장에 적응할 수 있었다.
그 선배들의 도움이 정말 컸다. 김종태 역 때문에 내가 스스로 고립되려고 하던 걸 많이 끄집어내주셨다. 촬영할 때야 가해자와 피해자를 연기하지만 촬영이 끝나고 나서까지 그 무게를 짊어지고 있으면 안 된다. 만일 내가 끝까지 촬영 초반처럼 임했다면 영화를 완주 못했을 수도 있었다. 하지만 명계남 선배가 객쩍은 소리라도 막 하면서 웃음을 주는 역할을 가장 앞장서서 해주셨다. 그래서 이토록 힘든 영화를 찍는데도 현장 분위기가 참 아이러니하게, 대단히 화기애해하고 재미있었다. 정말 고마운 일이다.
배우들끼리 그렇게 매번 몰려다니면서 작품과 전혀 상관없는 수다를 떨면서 친해지니까, 정지영 감독님도 연기에 대한 디렉션을 거의 안 하셨다. 시나리오를 읽고 다 같이 공감한 게 있으니까, 믿음과 신뢰가 있으니까 별 말씀을 안 하셨다. 그런 게 배우들끼리 서로 의지하게 하는 최상의 디렉션인 것 같다. 개인적인 의견으로는, 캐스팅을 완성하고 나면 연출의 절반은 끝났다고 생각한다. 어차피 이러저런 사람들을 모아서 화학작용을 일으키기 위해 가장 고심하는 부분이 캐스팅인데, <남영동 1985>는 배우들이 다 자발적으로 원해서 모인 조합이었기 때문에 완벽했다.
프레시안: 대공분실 세트가 아주 정교하게 지어진 것 같다. 얼마 전 대공분실 실제 설계도가 언론을 통해 공개되어 화제를 모으기도 했는데, 영화를 통해 다시 보니 정말 그 공간의 분위기와 조명 등이 일종의 공포영화적 효과를 주더라. 직접 그 안에서 연기를 하는 입장에서는 어땠나.
▲ 영화 <남영동 1985>. ⓒ아우라픽처스
박원상: 뉴스에도 나왔지만, 남영동 대공분실 건물을 지은 분이 김수근 건축가다. 그분이 소극장 '공간사랑'을 만드셨지 않나. 고등학교 1학년 땐가 거기서 처음으로 소극장 연극을 본 다음 연기의 꿈을 키웠다. '공간사랑' 옆의 원서 공원도 참 좋아하는 곳이어서 대학생 때 자주 드나들었는데, 김수근 건축가가 대공분실을 설계했다는 얘길 듣고…그분을 탓하려는 게 아니라, 그 훌륭한 능력을…참 아이러니했다. 씁쓸하기도 했고.
우리 미술팀이 실제 대공분실에 가서 실측을 해왔고, 촬영하기에는 실제 사이즈가 너무 좁기 때문에 약간 넓힌 규모로 세트를 만들었다. 다들 고생했지만 조명팀은 특히 고생이 많았다. 외부에서 빛이 들어올 수 있는 창이 제한되어 있는데, 그나마 간유리가 끼워져 있는 쪽창이다. 전적으로 방 안의 조명만으로 갈 수밖에 없는데, 게다가 제한된 공간 내에서 카메라 앵글은 계속 바뀐다. 조명팀 입장에선 미칠 노릇이다. 카메라의 각도가 틀어질 때마다 조명을 계속 다르게 쳐야 했다. 나중에 완성된 영화를 보면서 우리 조명팀 생각이 정말 많이 나더라.
프레시안: 사운드 부분도 신경을 많이 썼다. 고문 현장에서 틀어놓는 라디오 소리 말고도 대공분실 곳곳에서 들려오는 소리들 말이다.
박원상: 나는 청파동에 태어나서 바로 그 근처, 선린 중학교 근처에서 30년을 살았다. 대공분실이 바로 근처였던 거다. 남영역도 그곳에서 가깝다. 그 앞에는 술집도 많고 온갖 소음이 섞여있다. 전동차 들어오는 소리, 새벽 되면 술 취해서 꽥꽥거리는 소리 같은 것들. 영화 속에서 김종태가 창가로 다가가서 귀를 대는 장면이 있다. 우리 영화가 굵은 직선처럼 나가는 게 아니라 좀 더 디테일하게 들어갔다면 그 소리들이 좀 더 들어갈 수 있었을 것 같다.
빛이 차단되면 눈으로 볼 수 있는 게 제한되니까 어쩔 수 없이 귀가 예민해진다. 촬영할 때 고문대인 칠성판에 눈 감고 누우면 세트장의 다양한 소리들이 크게 들린다. 고 김근태 의원도 아주 잠깐 혼자 남겨지던 순간에, 그런 소리들이 어떤 느낌으로 다가왔을까 자주 상상했다.
프레시안: 고문 장면을 찍을 때 원칙은 어떤 것이었나. 고춧가루야 가짜겠지만, 실제로 물을 들이붓는 장면에서는 실제로 배우의 안위가 걱정될 지경이었다. 그걸 보고나니 나중엔 때리는 장면조차도 전부 실제로 구타당하는 것 같아 무섭기도 했다.
박원상: 그게 감독님의 연출의도였을 것이다. 카메라가 멀리서 바라보는 게 아니라, 가해자의 시선처럼 가까이 들어오는 앵글이 많잖아. 연기의 합이나 다른 방식으로 피해갈 수 있는 길은 없었다. 조금씩 고문 연기에 적응해서 찍을 수 있는 시간을 늘려갔다. 물론 이전에 그런 걸 해봤던 경험치가 없으니까 시행착오를 겪을 수밖에 없었다. 알아서 방법을 찾아야 했다.
예를 들어 칠성판에 묶여서 물고문 당하는 장면을 처음 찍을 때, 눈이 가려진 다음 물이 눈코입으로 막 들어오는데 어릴 때부터 갖고 있던 물 공포증이 발동해서 갑자기 몸이 경직됐다. 바로 NG가 났다. 명계남 선배가 "연극했던 놈이 왜 그래, 호흡으로 조절해"라고 걱정하는데, 몸이 말을 안 들었다. 생각다 못해 내가 컷 사인을 보내겠다고 했다. 버틸 수 있는 데까지 버티다가 안 되면 신호 보내겠다고, 대신 손발이 묶여있으니 머리를 세차게 흔들겠다고 했다. 그렇게 약속하고 슛 들어갔는데, 힘들어서 머리를 막 흔들어도 내 머리를 잡은 손과 어깨에 힘이 더 들어가더라. 내 사인을 못 알아들었구나 싶어서 이러다 죽는 줄 알았다.(웃음)
▲ 배우 박원상 ⓒ프레시안(최형락)
다시 의논했다. 머리를 흔드는 게 연기인지 신호인지 헛갈리기도 하거니와, 선배들은 이런 장면일수록 한 번에 가야 한다고 주장했다. NG낼수록 몸이 더 고달프니까. 결국 스크립터에게 물어봤다. 고문 장면 촬영 컷 중 제일 짧은 것과 긴 것의 평균을 내보니까 15초가 나오더라. 그 다음부터 촬영할 때 감독님이 스톱워치 들고 있다가 15초 되면 컷을 불렀다. 촬영을 거듭할수록 조금씩 더 길게 찍을 수 있었다. 한쪽에선 자꾸 안 좋은 기억으로 몸이 경직되지만 또 한쪽에선 자꾸 떨쳐내려 노력하면서 조금씩 극복됐다.
이게 들숨 날숨 호흡으로 조절하기는 힘들었고, 일단 머금은 숨으로 연기를 해야 했다. 고춧가루 뿌리고 물고문하는 장면은 장면 자체가 긴 호흡으로 가야 했는데, 그렇게 몸을 적응시키니까 되더라. 이렇게 얻어진 고문 연기 노하우를 다른 분들이 사용할 작품이 안 나오면 좋겠지만, 혹시라도 만에 하나 비슷한 영화가 나온다면 그 역할 하는 분 찾아가서 노하우를 전수시켜주고 싶다.(웃음)
많은 분들이 물고문 장면을 물어보시는데, 다른 연기보다 물론 몇 배 더 힘들다. 하지만 못 버틸 정도는 아니었다. 적응이 되어간다. 나는 적응할 수밖에 없고, 적응이 되는 일을 한 거다. 하지만 과거에 그곳에선 고문에 적응을 할 수가 없지 않나. 점점 더 낯설고 끔찍해지고. 나 역시 촬영 중간 그 괴리감이 딱 찾아왔을 때 무척 힘들었다. <남영동 1985>의 원제는 <야만의 시대>였다. 정말 미친 시대였던 것 같다.
나뿐만 아니라 이 영화에 참여한 분들 모두 비슷할 텐데, 본능적으로 힘이 드니까 방어기제가 발동했다. 한 장면 한 장면 완성될 때마다 하나하나 지워나갔던 것 같다. 말 그대로 뇌를 자꾸 포맷시킨 거다. 부산국제영화제 때 처음으로 간담회를 여는데, 촬영을 어떻게 했는지 기억이 잘 안 나더라. 결국 같이 연기한 김의성 형한테 촬영 당시 상황을 페이퍼로 정리해서 메일로 보내달라고 부탁했다.(웃음)
<남영동 1985> 쫑파티 때, 농담삼아 그런 말을 했다. 이 작품을 통해 방만했던 몸을 재정비하고 물 공포증을 극복할 수 있어 좋았다고. 촬영 끝나고 가족 여행을 다녀왔다. 숙소에 수영장이 있었는데 아이들이 먼저 들어갔다. 옆에서 구경하다가, 나도 수영장에 들어갈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지금까지 30년 동안 배꼽 위로 올라오는 물속에 들어간 적이 없었고, 다른 영화 촬영할 때도 물 장면은 모두 피했었다. 하지만 <남영동 1985>를 끝내고 나서, 30년 만에 내 의지로 수영장에 들어가 눈을 뜨고 잠영을 했다.
▲ 배우 박원상 ⓒ프레시안(최형락)
이게 참 어떤 면에선 우습다. 고문 피해자분들은 현재 진행형으로 '오늘'을 살 수밖에 없는데, 난 이 작품을 통해서 마음 속 짐을 덜어낼 수 있었다는 게, 어떻게 보면 그게 영화인 것 같다는 생각도 든다.
프레시안: <남영동 1985>에서 가장 흥미로운 캐릭터의 변환은 아무래도 이경영이 연기한 고문기술자 '장의사'일 것이다. 고 김근태 의원 수기 <남영동>에선 고문 기술자가 "거리 어느 한 구석에 있을 깡패, 전형적인 어깨 타입의 풍모…눈은 불안정하고 뻐기면서 걷는 인간 백정" 같다는 묘사가 나오는데, 영화 속 장의사는 '미친 과학자(Mad Scientist)' 캐릭터 같더라. 너무 냉정하고 침착해서, 극 중 김종태가 다른 고문관들보다 장의사에게 느끼게 되는 공포가 오히려 그 냉정함에서 유발되는 것 같다.
박원상: 정지영 감독님이 이경영 형한테 "이근안 자료 줄까? 볼래?" 물었더니 "전 대본만 볼래요" 했다더라. 현명한 판단이었다고 생각한다. 영화 마지막에 세월이 흘러 두 사람이 다시 마주했을 때에도, 장의사가 김종태에게 "용서해주십시오"라고 비는 장면이 나온다. 그 장면 찍기 전 이경영 형이 감독님한테 슬쩍 물어봤다더라. "진심이었을까요?" 감독님은 그럴 거 같다고 하셨는데, 이 선배는 "전 그냥 어사무사하게 할래요" 하고는 그렇게 연기했다. 난 그게 좋았다.
프레시안: 그렇다면 그 마지막 장면을 찍을 땐 어땠나. 세월이 흘러 둘이 다시 마주하는 장면은, 관객에게도 어떤 감정적인 서스펜스를 느끼게 했는데.
박원상: 김 의원이 특별면회실에 혼자 들어간 게 사실이고, 그 공간에 두 사람만 있었으니까 정말 무슨 일이 있었는지는 아무도 알 수 없다. 두 사람이 무슨 말을 할 수 있었을까. 정지영 감독님은 처음에 김종태와 장의사가 아무 말 없이 앉아있는 장면을 무척 길게 주문하셨다. 나 역시 슛 들어가니까, 다른 생각 없이 앞에 앉아있는 장의사를 물끄러미 오래 쳐다보게 되더라. 첫 대사가 "세월이 참 많이 흘렀네요"인데, 기분이 묘했다. 실제로 두 사람은 어떤 기분이었을까.
<남영동> 책을 보면 김근태 의원이 용서를 하지 못했다는 게 나온다. 아마 그런 자신에 대한 자책까지 끌어안고 가시지 않았을까 싶은데…그건 정말 궁금하다. 정말 진심이었다면 백 번이고 만번이고 무릎 꿇고 철저하게 용서를 구했어야 옳다. 하지만 실제 고문기술자 이근안은 시대가 바뀌고 나니 "고문은 예술" 운운하는 이야기를 하는 걸 봐선 그 사과가 진심이었다고 생각되질 않는다.
정지영 감독님도 이근안이 이 영화를 봤으면 좋겠다는 말을 하신 적이 있다. 음…당사자 외에는 알 수 없겠지만 개인적으로 나는 용서가 안 될 것 같다. 몸이 기억하고 있으니까. 대본에서도 김종태가 용서하는 건지 아닌지 분명히 지시되지 않았다. 김종태가 황급히 몸을 돌려 면회실을 나가려다가 환청처럼 휘파람 소리를 듣고 다시 돌아보는 장면이 있다. 지워버리려고 해도 사라지지 않는 족쇄처럼, 몸이 기억하는 어떤 것이 그 순간 따라붙었기 때문이다. 돌아보는데, 나를 쳐다보는 이경영 형 입이 정말 휘파람 부는 것처럼 보였다. 이건 정말 몸의 기억이구나, 그 휘파람 소리가, 싶어서 소름끼쳤다.
원래 촬영한 엔딩 신 중에는 우희진 씨가 연기한 아내와 바닷가를 거니는 장면도 있었다. 장의사를 용서 못한 것에 대해 김종태가 자책하자 아내가 위로한다. "그건 당신 몫이 아닐 거예요"라고. 하지만 특별면회실 장면 찍으면서 내 눈을 클로즈업하는 카메라를 봤을 때, 이게 엔딩 컷이 되겠구나 싶었다. <남영동 1985>가 관객과 만나고자 하는 지향점이 그 눈에서 다 설명되는 것 같았다.
▲ 이날 카페에서는 타 매체와의 인터뷰를 위해 <남영동 1985>에서 장의사 역을 맡은 배우 이경영도 와있었다. 휴식 시간에 박원상과 이경영이 마주 앉았다. ⓒ프레시안(최형락)
프레시안: <남영동 1985>가 어떤 의미로 남을 것 같은가.
박원상: 사실 이 작품이 일상에서 스트레스 받은 걸 두 시간 동안 잊게 해주는 상업영화는 당연히 아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22일 개봉할 때 불특정 다수 관객들이 주저하지 않고 와주시길 바라는 마음이 크다. 워낙 정보를 어마어마하게 접할 수 있는 시대니까 '영화가 아프다, 힘들다'는 입소문 때문에 의지가 꺾이지 않으셨으면 좋겠다. 홍보할 때도 이 부분이 가장 난감하다. 관객들을 어떻게 효과적으로 '꼬실' 수 있는지 모르겠다. 영화가 사실 힘든데, '힘들지 않아요'라고 할 수도 없는 것 아닌가. 마음이 통하기를 바라는 수밖에 없다. 나는 이 영화를 세 번 봤는데, 그때마다 충분히 의미 있고 가치 있는 영화라고 생각했다. 관객들도 이 기회를 흘려보내시지 않고, 저의 유혹에 동참해주셨으면 좋겠다.(웃음)
프레시안: 차기작은 김규리와 함께 등장하는 로맨틱 코미디 <진영이>다. <여교수의 은밀한 매력> 출연 당시 그 연애 연기를 아주 인상적으로 봤는데(웃음), 이번에 다시 볼 수 있는 건가.
박원상: <진영이>를…(박원상은 행복한 미소를 크게 지어보였다) 굉장히 재밌게 찍었다. 한 여자의 성장통을 독특하게 다룬 영화다. 며칠 전 어떤 모임에서도 박철민 선배가 키스신 있는 영화를 찍는다고 엄청 부러워했다. 막 시기, 질투, 분노, 협박을 금치 못하던데(웃음), 나로서는 이런 기회가 너무 즐겁고 고마울 뿐이다. 가끔은 이렇게 행복한 영화를 찍을 수 있는 기회가 생긴다면 감사할 따름이다.(웃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