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핑
유병덕
2015harrison@naver.com
어쭙잖은 놈이 바쁘다. 춘천에서 친척 예식을 보고 대전 약속이 있어 서둘러 발길을 돌리던 참이다. 그런데 웬 이가 손목을 부여잡고 놔주지 않는다. 그는 지난 일을 뒤적이며 반기는데 아무리 기억을 더듬어 봐도 아리송하다. 한참 이야기를 듣다 보니 어렴풋이 기억난다. 고교 시절 잠시 함께 지냈던 친구다.
학창 시절 친구는 흉허물이 없다. 금방 가까워진다. 그는 자기 고향으로 가자고 막무가내다. 난데없이 그에게 끌려가다시피 했다. 예전엔 한계령이나 미시령을 넘어가려면 두세 시간 걸렸는데 한 시간 남짓 달리니 동해가 보인다. 지난날 없던 고속도로가 만들어져서다.
저녁노을이 드리운 바다는 스산하다. 삽시간에 설악산 그늘이 흥건해졌다. 그는 검푸른 바다가 내려다보이는 카페로 데리고 가더니 자리에 앉자마자 뜬금없이 내일 서핑을 즐겨보자고 한다. 깜짝 놀라서 손사래 쳤다. 한 번도 해보지 않은 운동이라 두려워서다. 그는 안심시키려고 애쓴다. 어린아이도 일어설 수만 있으면 할 수 있는 운동이라고 한다. 그의 서핑 이야기를 자정 무렵까지 들었다.
잠잘 곳이 마땅치 않다. 그와 함께 바로 옆에 있는 24시 사우나실로 옮겼다. 몸과 마음이 피곤하여 잠을 청해 보지만, 밤새 밀려오는 파도 소리에 잠을 이룰 수 없다. 간이침대에서 뒤척거리다가 동살을 보며 일어났다. 하얗게 밀려오는 파도가 마음을 무겁게 한다. 서핑 때문이다. 현직에 있을 때도 각본에 없는 일이 생기면 당황하곤 했다. 아무리 생각해 봐도 서핑할 자신이 없다. 아침 식사를 하며 통일전망대나 가보자고 하니, 그는 쾌히 받아들인다.
사람의 마음은 알 수 없다. 그는 아침 식사가 끝나자마자 금강산 가는 길로 앞서 내달린다. 잰걸음으로 통일전망대를 돌아 나오더니 바로 양양으로 향한다. 눈 깜짝할 사이에 양양 해변에 당도했다. 양양은 서핑의 메카다. 해변에 서퍼들로 가득한 풍경이 이색적이다. 젊은 남녀들이 파도에 밀려서 모래 해변으로 나온다. 넘어지고 젖혀지며 즐거운 표정이다. 그는 양양 해변을 한 바퀴 돌더니 하조대해수욕장에서 차를 세운다. 서슴없이 서핑강습장으로 들어가더니 서프보드와 슈트를 가지고 나온다. 마치 제집 드나들 듯한다.
그의 고집을 꺾을 재간이 없다. 하조대 해변은 군데군데서 서핑 강습이 한창이다. 젊은이들이 하얀 모래 위에서 뙤약볕을 머리에 이고 보드에 누웠다 일어났다 한다. 서핑을 즐기러 온 이들이 단체로 기초훈련을 받느라 땀을 뻘뻘 흘린다. 어떤 이는 힘이 들어서인지 강습을 받다 말고 모래 위에 주저앉아 있다. 서핑 강습은 단체보다 일 대 일로 받아야 제대로 받을 수 있겠다는 생각이다.
그가 내 독선생이다. 그는 평생 파도를 벗 삼아 살아온 바다 사나이다. 가장 먼저 바다 안전을 위해서 파도 타는 방법과 서퍼들 간에 충돌을 피하는 규칙을 가르치더니, 이어 기초 이론과 슈트 착용 방법을 알려 준다. 슈트는 체온유지는 물론, 해파리 등의 피해를 막기 위해서 입는다. 서프보드에서 일어서는 기본동작을 선보이더니 바로 따라 해 보란다. 바다 위에 떠 있는 보드에서 중심을 잡고 일어서기란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다. 서프보드에서 일어서려면 어린아이가 걸음마 하는 것처럼 수없이 미끄러지고 넘어져 봐야 한다.
긴 장마가 끝나고 무더위가 기승을 부리는 날이다. 에메랄드빛 파도를 보며 서핑하는 게 힐링 될 것 같아 용기를 냈다. 강습에 마지막 코스인 서프보드와 오른쪽 다리를 연결하는 리쉬를 묶었다. 그는 내가 리쉬를 잘 착용하는지 꼼꼼하게 살피더니 바다로 나가서 즐겨보란다. 순간 어린 날 부모님 곁을 떠나는 심정이었다.
바다로 나가면 바로 일어날 것 같았다. 보드가 생각보다 무게감이 있다. 보드를 들고 파도가 출렁이는 바다로 나가는데 살짝 긴장되었다. 더운 날씨라 빨리 바닷물에 입수하고 싶은데, 높은 파도가 밀려오면 어쩌나 하는 두려움이 스쳤다. 서프보드 위에서 무게중심을 잡기가 쉽지 않았다. 잔잔한 파도에서는 일어설 수 있으나 큰 파도가 밀려오면 이내 무게중심을 잃고 바다로 빠지곤 했다. 그는 해병대 출신답게 파도에 몸을 싣고 가볍게 미끄러져 나간다.
서핑은 인생의 축소판이다. 시간이 쌓은 흔적을 되돌았다. 무수한 일들이 밀려온다. 아직 생생한 기억이 있다. 젊은 날 웅지를 펴보려고 무던히 애쓴 때가 있었다. 고시에 매달려 발버둥 치던 일이 서툰 서퍼가 높은 파도에 휩쓸려 허우적거리는 모습처럼 다가온다. 큰 파도를 만나 서프보드의 중심을 잡지 못하고 미끄러지듯 높은 고시의 벽을 넘지 못하고 번번이 떨어졌다. 웅지의 꿈이 모래성처럼 무너져 내렸다.
세상사 각본 때문에 삶이 긴장되고 고달프다. 노련한 서퍼처럼 바람이 불면 바람이 부는 대로, 파도가 치면 파도가 치는 대로 몸을 실어 보면 어떨까. 매사 피할 수 없으면 즐기면 되리라.
그에게 고마움을 표하고 차에 올랐다. 갑자기 구름이 끼어 사위가 어둡다. 큰 고갯길을 넘어오며 생각해 보니 이번 주말은 각본에 없는 일로 채워졌다. 하나 즐거운 시간이었다. 다시 서핑을 즐기고 싶다.
첫댓글 유병덕 수필가님,.
귀한 수필 잘 읽었습니다.
가슴에 와 닿습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