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40회 구미문예공모전 입선작]
민들레처럼
남 현 숙
상크름한 바람이 부는 계절, 낙엽 몇 장이 카펫처럼 깔려 있는 바위틈에 홀로 피어있는 노란 민들레를 보았다. 봄이 아닌 가을에 좁은 바위틈을 비집고 뿌리를 내린 민들레는 연약한 꽃대를 흔들며 환한 미소를 짓고 있다. 하늘의 별이 떨어져 민들레가 되었을까? 별빛이 퍼진 것처럼 꽃잎이 밝은 빛을 뿜고 있다. 노란 꽃잎이 바람에 한들거린다. 연약하지만 연약하지 않을 것 같은, 왠지 모를 강인한 생명력이 느껴진다.
민들레를 바라보며 생각에 잠긴다. 민들레 홀씨는 바람에 날려 좁은 바위틈에 떨어졌겠지. 그 씨앗은 굳건한 바위 옆 비좁은 틈에 있는 거친 흙에 뿌리를 내리고, 살기 위해 몸부림쳤을 것이다. 목마름을 채우기 위해 있는 힘껏 물을 빨아들이고, 비바람에 뽑히지 않으려 잔뿌리 하나까지 안간힘으로 버티며 흙을 움켜잡았을 것이다. 그렇게 버티다가 마침내 눈부신 꽃을 피웠겠지.
민들레는 메마른 땅에도 긴 뿌리를 내린다. 거친 환경을 탓하지 않는다. 밟아도 꿋꿋하게 다시 일어난다. 시린 겨울을 이겨내고, 봄이면 기지개를 켜듯 다시 싹을 틔우고 눈부신 꽃을 피운다. 그 강인함을 굳이 티내지 않으며 환한 미소로 사람들의 발길을 사로잡는다. 민들레를 보니 문득 「민들레꽃」 시가 생각난다.
아무 곳도 넘보지 않는다
다만 혼자
주어진 한계 그 안에서 아슬아슬
한 치의 틈도 없이 끝까지
바위 새를 비집거나 잡초 속이거나
씨 뿌려진 그 자리가 바로 내 자리
터를 잡고
물을 길어 올리는 실뿌리
어둠을 힘껏 밀어내는 떡잎
그리고 그것들이 한데 어울려
열심히 열심히 한 댓새
-이형기 「민들레꽃」 중에서-
“잘 있다가 오거래이.”
눈시울을 붉히며 말하시던 어머니의 모습을 뒤로하고 나는 오빠가 운전하는 낡은 트럭을 타고 고향을 떠나 이곳 구미로 향했다. 앙상한 나뭇가지가 스산한 바람에 몸을 떨던 겨울, 민들레 홀씨처럼 바람에 날려 어느 낯선 곳에 툭 떨어진 느낌이었다. 차창 밖으로 보이는 풍경이 아지랑이처럼 일렁였다. 창밖만 하염없이 바라보는 사이 어느덧 공단에 도착했다.
산으로 둘러싸인 아늑하고 포근한 고향과 달리 아스팔트 위를 쌩쌩 달리는 자동차와 회색빛 건물들을 보니 떠나온 고향 집과 어머니가 더 그리웠다. 차가운 바람이 나뭇가지를 흔들었고, 내 마음도 그 나뭇가지처럼 흔들렸다. 가족과 떨어져 지내야 한다는 불안함이 어둠처럼 밀려왔다. 하지만 다시 돌아갈 수는 없었다.
아버지가 돌아가시고 어려운 집안 형편으로 인해, 나는 대학진학을 포기하고 돈을 벌어야만 했다. 그래서 공장에 취직하게 되었고, 줄지어 서 있는 공장 중 한 곳으로 가게 된 것이다. 그곳에는 고향을 떠나온 내 또래의 친구들과 언니들이 많이 있었다. 하지만 모든 것이 낯설고 불편했다. 그리운 어머니 생각에 베개는 날마다 눈물로 얼룩졌다.
게다가 처음 해보는 공장 일은 너무나 힘들었다. 전자 제품에 들어가는 작은 부품을 끼우는 일이었는데, 단순하지만 쉽지 않은 작업이었다. 자고 일어나면 손가락이 퉁퉁 부어 잘 구부러지지 않을 정도로 손에 힘이 많이 들어가는 일이었다. 몸이 지칠 때마다 다시 집으로 돌아가고 싶어 꿈틀대는 마음을 꾹꾹 누르며 참아야만 했다.
하지만, 시간이 흐르면서 모든 것들은 차차 적응되어갔다. 친한 친구들도 생겼고, 일도 숙달되어 많이 힘들지 않았다. 스무 살을 갓 넘긴, 친구들은 그들의 일을 즐기면서, 한참 멋 부리고 싶은 나이라 그런지 대부분 자신을 치장하는 데 돈을 썼다. 그즈음 내 안에 꿈 하나가 몽글몽글 피어나기 시작했다. 그 꿈은 등록금을 마련하여 내 힘으로 대학을 가는 것이었다. 그래서 돈을 모으기 시작했다.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대학교에 가고 싶었는데 가지 못한 것이 가슴 한편에 응어리로 남아 있었던 것 같다.
그때부터 낮에는 일하고 밤에는 공부했다. 혼자 공부하는 것은 외롭고 힘든 싸움이었다. 그래서 한 친구에게 공부해서 같이 대학교에 가자고 말해 보았다. 물론 그 친구가 흔쾌히 그러겠다고 대답할 거라고 기대하진 않았다.
“우리 공부해서 같이 대학 가지 않을래?”
“그럴까? 나도 대학 가고 싶다는 생각한 적 있어.”
내 예상과 달리 친구는 긍정적인 대답을 했다. 사막에서 오아시스를 발견한 것처럼 기뻤다. 우리는 같이 공부하게 되었다. 둘이라서 훨씬 좋았다. 잘 모르는 것도 서로 물어볼 수 있었고 서로에게 의지가 되었다. 포기하고 싶은 마음이 생길 때마다 서로의 마음을 다잡아 주었다.
마침내 시험 날이 다가왔고, 그동안 공부한 실력으로 시험을 쳤다. 다행히 둘 다 대학교에 합격했다. 합격 발표가 나던 날 구름 위를 걷는 기분이었다. 정말 꿈만 같았다. 우리는 서로에게 축하를 보내며 함께 기뻐했다. 일 년 전 눈물로 일렁이던 그 풍경들은 기쁨으로 출렁였다. 그렇게 나는 내가 번 돈으로 대학교를 다니게 되었다. 졸업 후 결혼을 하고, 30년이 흐른 지금 여전히 구미에 살고 있다.
하얀 홀씨 바람에 날려 바위틈에 툭 떨어졌지만, 그곳에 뿌리를 내린 민들레처럼, 나는 이곳에 나의 뿌리를 내렸다. 온갖 시련을 이겨내고 눈부신 꽃을 피운 민들레처럼, 나도 나만의 꽃을 피우며 살고 있다. 모든 것에 감사하는 마음으로 살아가니 행복은 늘 마음속에 스며든다. 노란 민들레의 꽃말 행복과 감사처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