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두의 시제 김경주
마지막으로 그 방의 형광등 수명을 기록한다 아침에 늦게 일어난다는 건 손톱이 자라고 있다는 느낌과 동일한 거 저녁에 잠들 곳을 찾는다는 건 머리칼과 구름은 같은 성분이라는 거 처음 눈물이라는 것을 가졌을 때는 시제를 이해한다는 느낌, 내가 지금껏 이해한 시제는 오한에 걸려 누워 있을 때마다 머리맡에 놓인 숲, 한 사람이 죽으면 태어날 것 같던 구름
사람을 만나면 입술만을 기억하고 구름 색깔의 벌레를 모으던 소녀가 몰래 보여 준 납작한 가슴과 가장 마지막에 보여 주던 일기장 속의 화원 같은 것을 생각한다 그곳에는 처음도 끝도 없는 위로를 위해 처음 본 사람이 필요했고 자신의 수명을 모르는 꽃들만 살아남았다
오늘 중얼거리던 이방(異邦)은 내가 배운 적 없는 시제에서 피는 또 하나의 시제, 오늘 자신의 수명을 모르는 꽃은 내일 자신의 이름을 알게 된다
구름은 어느 쪽이건 죽은 자의 머리칼 냄새가 나고 중국 수정 속으로 들어간 곤충의 무심한 눈 같은 어느날
사람의 눈으로 들어온 시차가 구름의 수명을 위로한다
새가 떨어지지 않는 하늘이 없다/김경주
시 때문에 죽고 살 일은 없었으면 하는데 자꾸 엄마는 시를 놓으라고 울고 나는 고양이를 울린다 자꾸 시 가지고 생활을 반성하는 놈 좀 없었으면 하는데 시 때문에 30분을 책상에 앉아 있다가도 참혹해지고 시 한 편 발표하고 나면 몰래 거리에 쓰레기 봉지를 두고 온 기분이 든다
시 때문에 살 일 좀 생겼으면 하는데 사형수가 교수대를 향해 걸어가면서 뒤따라오는 간수들에게 갑자기 자꾸 밀지 말라고 울먹이는 광경처럼
밀지도 않는데 떠밀리고 있다는 느낌으로부터
시만 써서 이대로 생활을 할 수 있겠는가 하는 생각
시 때문에 누어 있다가 벌떡 일어나 오래 시 안 쓰다가 다시 쓴다는 놈 생각 좀 하고 다시 쓴다는 놈치고 세상의 속물 다 겪은 후 오만하게 돌아온 것 못 봤다 그게 시의 구원이라면 시 때문에 형편없는 연애라도 그만두어서는 안 되겠다는 생각 도 해 보지만 시 때문에 죽어서도 까불지 못하겠다는 생각도 해 본다
따지고 볼 것도 없이 신파란 내 쪽에서 먼저 부러우면 지는 법이다 이기고 지고 살 일도 아닌데 시 때문에 이름 없는 무덤 옆에 가서 잠도 자 보았다
시 때문에 울먹이는 일 좀 없었으면 하는데 하루도 새가 떨어지지 않는 하늘이 없다
질감/김경주
오늘의 구름을 망칠 수 있는 것은 미친 자의 웃음뿐이다
땅강아지 한 마리 앞발을 들고 서서 먼 저녁 하늘을 바라본다
내가 돕는 허공으로 날이 조금 더 어두워진다 귀 먹은 새처럼
저녁이 날아오는
사이
인간이 여러 개의 문으로 희화화된다 가령 구멍에서 기어 나와 어두워지는 땅에 몸을 비비기 시작하는 땅강아지가 만드는 작은 그늘은 이름은 잊었지만 내가 알던 입술의 색, 구름을 훌렁훌렁 넘어 밤이 오기 전, 인간의 눈 안쪽으로 넘어가야 하는 노을은 색은 잊었지만 내가 외우던 설치식물의 이름을 닮았다
귀먹은 새들을 돕는 나의 바람이 여기 있다
오늘의 피를 망치는 것은 말라 죽은 땅강아지가 입 밖으로 내놓은 목젖이 여러 개의 그늘로 희미해지는
사이
귀먹은 새가 와서 돕는다
질감 2/김경주
귀먹은 개가 와서 돕는다 한밤의 줄넘기를 쥐가 나는 발가락을 빛바랜 알약들을 공벌레를 그녀의 둔부를 정오의 햇빛을 피를 마셔본 기억을 욕조 속에 죽은 채 누워 있던 사생활을 서식지 없는 문장들을
어젯밤엔 검은 통을 비우고 오늘 아침엔 붉은 물을 깨문다 누가 내버렸는지 모를 죽이 골목에 흘러 있는데
외로운 식성을 이야기하는 밤이 있다
언어에 대해 피 맛에 대해 이해를 피하는 표정에 대해 예리한 숲에 대해
문장을 각오하고 앉으면 가장 예리한 세월을 놓치지 않는 새들
있어
즐겁고 캄캄한 복도라는 게
획劃 / 김경주
새들이 마주 오는 죽은 새들을 마주칠 때 그들은 서로의 속눈썹을 얼굴로 쓰다듬고 지나간다
바람은 그 높이에선 늘 눈을 감는다
서로 다른 붓털이 만나서 가는 하나의 획
이상하게 한 획을 긋는 붓에서는 바람 냄새가 난다
붓을 삶는다
삶은 붓은 혈압에 좋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