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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명의 새로움 속에서 행하기
"그러므로 우리가 죽음 안으로 침례를 받아 그분과 함께 묻혔나니 이것은 그리스도께서 아버지의 영광을 힘입어 죽은 자들로부터 일으켜 세우심을 받은 것같이 우리도 생명의 새로움 속에서 행하게 하려 함이라." (로마서 6장 4절) KJV.
오늘 말씀의 제목이 “생명의 새로움 속에서 행하기”입니다. 조금은 생소하게 들릴 것입니다. 개역성경에서는 “새 생명 가운데서 행하게 하려 함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 말이 무슨 말입니까? 이제 우리는 거듭났습니다. 그렇다면, 우리 안에 하나님의 생명이 주어진 것입니다. 곧, 우리 안에 하나님의 본성과 특성이 주어졌다면- 이제 우리가 어떻게 살아야 하겠습니까? 이제는 새 생명의 본성으로 살아야 합니다. 다시 말해서 거듭난 생명으로 기능해야 한다는 말입니다.
그런데 허다한 사람들이 거듭난 생명을 소유했음에도 불구하고, 거듭난 생명으로 기능하는 것을 모르고 있습니다. 오늘은 이 부분을 살펴보려고 합니다.
하나님의 본성을 가진 거듭난 우리들은- 하나님처럼 기능하도록 창조되어졌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하나님처럼 기능하는 것을 배우고 익히지 않으면- 하나님처럼 살 수가 없다는 것입니다. 물론 우리가 하나님처럼 기능한다고 하나님이 되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우리가 하나님처럼 기능함으로서- 우리는 그의 성품과 능력을 드러낼 수 있기 때문에- 우리는 하나님처럼 기능하는 것을 배우고 훈련해야 합니다.
창세기 1장 26절을 보시면- “하나님이 가라사대 우리의 형상을 따라 우리의 모양대로 우리가 사람을 만들고 그로 바다의 고기와 공중의 새와 육축과 온 땅과 땅에 기는 모든 것을 다스리게 하자” 하셨습니다. 이것을 영어성경으로 보면- "…in the image of God, in the likeness of God."으로 되어 있는데- 이 말은 In the image of God 은 <to look like God>인데- 그 뜻은 하나님의 본성과 특성과 그 능력 그대로 창조되었다 말이고, In the likeness of God은 <to function like God.>입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의 본성과 특성과 그 능력을 가지고 하나님처럼 기능하고 살도록 창조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렇지만 우리가 하나님처럼 기능하고 살려면- 이를 개발하고 훈련해야만 한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옛 본성은 죽었고, 다 지나간 것이 되었는데- 아직도 새로운 것에 포커스를 맞추지 못하고 옛 본성과 싸우려하기 때문에- 하나님처럼 기능하는 것을 개발하고 훈련하지 못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제 우리의 관심은 하나님처럼 기능하는 것을 개발하고 훈련하는데 초점이 맞춰져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
1. 거듭난 자신이 누구인지를 바로 인식해야 합니다.
로마서 6장4절을 KJV 함께 읽겠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죽음 안으로 침례를 받아 그분과 함께 묻혔나니 이것은 그리스도께서 아버지의 영광을 힘입어 죽은 자들로부터 일으켜 세우심을 받은 것같이 우리도 생명의 새로움 속에서 걷게 하려 함이라." 이 말은 <우리로 거듭난 본성으로 기능하게 하려 한다>는 말입니다. 이 말을, 한 마디로 말하면- 내가 누구인가를 알고 사는 것입니다. 이 세상에서 가장 무서운 사람이 누구인줄 압니까? 총이나 칼을 가진 사람이 아니라, <내가 누구이며, 내 안에 어떤 능력을 가지고 있는지 아는 사람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내 안에 하나님의 생명이 있다는- 이 의식이 우리의 무의식 속에서도- 작동될 수 있도록, 의식화 하는 것이 매우 중요하다는 겁니다.
그래서 우리는 ‘I know who I am.’ <나는 내가 누구인지를 안다>는 이 말을 매일 매 시간 반복해서 외쳐야 합니다. 우리 한 번 외쳐봅시다. <나는 내가 누구인지 안다.> 누구입니까? 나는 하나님의 생명을 가진 자이다. “전에 존재하지 않았던 새로운 피조물이다”는 겁니다. 그래서 내 안에 하나님의 본성과 특성과 능력이 내 안에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 사실이 의식이 무의식이 되도록 해야 합니다.
로마서 6장 6절에 "우리가 알거니와 우리 옛 사람이 그분과 함께 십자가에 못 박힌 것은" 그러니까, 죄에서 자유케 된 옛 사람은 이제 다 지나갔고, 지금은 이전에 존재하지 않았던 전혀 새로운 종족인 새 피조물이 되었다는 것입니다. 함께 암송하겠습니다.
고린도후서 5장 17절 “그런즉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 것이 되었도다.”
이는 요한복음 1장 13절을 보면- "이들은 혈통으로나 육신의 뜻으로나 사람의 뜻으로 나지 아니하고 오직 하나님께로부터 태어난 자들이니라." <나는 하나님께로 태어난 자입니다> 이 의(義)의 의식이 무의식이 되도록 하라는 겁니다.
2. 거듭난 생명의 본성(특성, 능력)을 바로 이해하라.
1). 영생 (Eternal life-ZOE): 하나님의 생명과 똑 같은 본성과 특성을 지닌 생명(God- kind of Life)입니다. Eternal life 하니까, 길이가 긴 생명처럼 연상되는데- 물론 영원히 사기 때문에 길게 산다는 의도 있겠지만, 영생은 하나님의 생명을 말씀하는 것입니다. 이 생명은 죽어서 천국 가는 생명이 아니고 지금 우리 안에 하나님을 하나님 되게 하는 생명이 우리 안에 있다. God- kind of Life가 우리 안에 있다는 것입니다.
요한복음 10장10절에 "도둑은 오직 도둑질하고 죽이며 멸망시키려고 오지만 내가 온 것은 양들로 생명(ZOE)을 얻고 더 풍성히 얻게 하려 함이라"했는데- 이것이야 말로 주님이 오신 궁극적인 목적입니다. 물론, 주님은 우리의 죄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 오셨지만, 그것은 우리에게 바로 이 생명을 주시기 위한 한 과정일 뿐, 그 목적은 아닙니다. 바로 이 생명을 우리에게 주시고 더 풍성케 하기 위해서 오신 것이다. 여기서 “더 풍성히 얻게 하려 함이라”란 말은- 우리가 하나님의 생명으로 100% 기능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해서 오셨다는 말입니다.
요한일서 5장 13절 '내가 하나님의 아들의 이름을 믿는 너희에게 이런 것들을 씀은 너희에게 영생(Z0E)이 있음을 알게 하려 함이며…."했고, 베드로후서 1장 4절에선 "…하나님의 본성에 참여하는 자가 되게 하셨느니라."하신 것입니다.
2). 우리의 새 생명은 사단이나 질병, 가난보다 우세하다
고린도후서 8장9절 함께 읽겠습니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를 너희가 알거니와 부요하신 자로서 너희를 위하여 가난하게 되심은 그의 가난함을 인하여 너희로 부요케 하려 하심이니라” 그리고 베드로전서 2장24절도 함께 읽겠습니다. “친히 나무에 달려 그 몸으로 우리 죄를 담당하셨으니 이는 우리로 죄에 대하여 죽고 의에 대하여 살게 하려 하심이라 저가 채찍에 맞음으로 너희는 나음을 얻었나니”라고 말씀해 주고 있는데- 우리의 새 생명이 왜, 사단이나 질병, 가난보다 우세하다는 것입니까?
로마서 8장 2절을 보시면-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생명의 성령의 법이 죄와 사망의 법에서 너를 해방하였음이라” 여기에 두 법이 나옵니다. 생명의 성령의 법과 죄와 사망의 법인데- 생명의 성령의 법은 새 생명 안에서 역사하는 법을 말하고- 죄와 사망의 법은 사단과 질병, 가난에서 역사하는 법을 말합니다. 그런데 여기서 우리가 알아야 하는 것은- 생명의 성령의 법이 죄와 사망의 법에서 너를 해방하였다는 겁니다. 그러니까, 생명의 성령의 법이 죄와 사망의 법보다 위에 있는 법이고, 더 우세한 법이다 는 말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우리의 새 생명은 사단이나 질병이나 가난이 우리를 주관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이런 진리를 늘 의식하면서 살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야 새 생명으로 기능할 수 있다는 겁니다.
3). 우리의 생명은 피에 있지 아니하고 영에 있다. (이 말은 우리가 이제는 피에 의해 제한 받는 삶이 아니고 영으로 기능하는 삶을 살고 있다는 겁니다.)
구약시대는 레위기 17장11절을 보시면- "육체의 생명이 피에 있다"했습니다. 그런데 신약시대에는- 로마서 8장 11절을 보시면- "예수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분의 영이 너희 안에 거하시면 그리스도를 죽은 자들로부터 살리신 분이 너희 안에 거하시는 그 분의 영으로 인하여 너희의 죽을 몸도 살리시리라."하신 것입니다.
이 말씀은 새 언약 속에 사는 우리는 이제, 영으로 기능하는 새로운 삶을 살아야 하는 겁니다. 그것은 생명의 성령의 법이 우리를 죄와 사망의 법에서 해방하였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우리가 생명의 성령의 법으로 살 때, 더 이상 죄와 사망이 역사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제 우리의 생명은 더 이상 피에 있지 않고 영에 있음을 아셔야 합니다.
육체의 모든 질병은 피에서 유래 됩니다. 그래서 사람이 병이 들면 피부터 검사합니다. 그렇지만 우리는 위에 있는 법(영으로)으로 기능하기 때문에 육체의 질병과 무관한 것입니다. 그래서 HIB(헤모필루스 인프렌자 페구균)이나, 피로 인해서 생기는 병에 의해서 우리의 건강이 좌지우지 되지 않는다는 겁니다. 그래서 우리에게 질병이 유발하면 이 병을 거절해야 합니다. 왜냐면 우리 안에는 그보다 더 위에 있는 생명의 법으로 살기 때문입니다. 제가 지금 말씀드리는 것은 이러한 의식들로 기능하라는 것입니다. 이러한 의식이 무의식이 되도록 말입니다.
4). 우리의 생명은 생명을 주는 영이다
(고전 15:45) "첫 사람 아담은 살아 있는 혼이 되었느니라. 함과 같이 마지막 아담은 살려 주는 영이 되었느니라." 예수님이 살려주는 영이시면, 우리도 살려 주는 영을 가진 자인 것입니다. 왜 그런 것입니까? 우리가 복음을 전해 줌으로 새 생명을 얻게 해주고, 또 우리가 안수함으로 병든 자를 치료해 주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처럼 우리는 말씀을 전해 줌으로 생명을 살리고, 병든 자에게 복음을 전해 줌으로 치료를 하고 가난 한 자들에게 복음을 전해 줌으로 부요한 자가 되게 해 줍니다. 이렇게 우리가 생명을 불어 넣어주는 자가 된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우리를 평범한 보통 사람으로 생각하지 않으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도바울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고린도전서 3장 3절에서 “너희가 아직도 육신에 속한 자로다. 너희 가운데 시기와 다툼과 분열이 있으니 어찌 너희가 육신에 속하여 사람들처럼 걷는 것이 아니리요?”한 것입니다. 이것은 고린도 교인들이 아직도 시기와 다툼으로 분열하고 있는 것을 이상하게 생각하고 안타까워한 것입니다. 이것은 저들이 마땅히 새 생명으로 살아야 하는데- 곧, 하나님처럼 기능해야 하는데- 아직도 육신에 속한 사람들처럼 살고 있는 것을 꾸짖고 있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우리가 신의 아들들이 되었는데 아직도 사람의 아들들처럼 살고 있는 것을 안타까워 하셨다는 겁니다. 더 노골적으로 말하면, 우리는 사람이 개처럼 살고 있으면- “아이고 저 등신들”하면서 혀를 차고 있듯이 하나님의 아들들이 아직도 사람의 아들들처럼 시기하고 다투고 분열하는 것이 너무도 한심하다는 말인 것입니다.
이러한 개념으로 다시 한 번 읽어 보십시오. “너희가 아직도 육신에 속한 자로다. 너희 가운데 시기와 다툼과 분열이 있으니 어찌 너희가 육신에 속하여 사람들처럼 걷는 것이 아니리요?” 그러니까, 우리는 사람들처럼 걸어서는 안 되는 하나님의 아들들인데- 아직도 사람들처럼 걷고 있는 것을 안타까워하셨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세상 사람들과는 다르다는 것입니다.
로마서 6장 19절도 그렇습니다. 사도 바울은 로마에 있는 그리스도인 중에 어떤 사람들은 아직도 세상 사람들처럼 살고 있었기 때문에- 안타까워하시면서- 그리스도인은 저들과는 그 본질이 다르다는 것을 말씀하기 위해서 이렇게 말씀한 것입니다.
“너희 육신이 연약하므로 내가 사람의 방식[관례(慣例)]대로 말하노니 전에 너희가 너희 지체를 부정함과 불법에게 종으로 내어 주어 불법에 이른 것같이 이제는 너희 지체를 의에게 종으로 내어 주어 거룩함에 이르라.”고 하신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의 본질은 세상 사람들과는 근본적으로 다르다는 겁니다. <We are more than a man.>입니다. 우리는 초자연적인 하나님의 생명을 가진 자들인 것입니다.
3. 하나님께서 거듭난 영에 전이해 주신 것들을 발견하여 훈련해야 한다.
우리가 100% 하나님처럼 기능하며 살기 위해서는 우리에게 훈련이 필요합니다. 그러니까, 하나님께서 우리가 거듭날 때, 전이해 주신 것들을 발견해서 훈련해야 하는데- 하나님께서 전이해 주신 것들이 어떤 것들이 있을까요? 하나님께 속한 성품과 능력입니다.
어떤 사람은 하나님께 사랑을 달라고 간절히 기도합니다. “주님, 저 사람을 사랑할 수 있도록 사랑을 주세요?”기도하지만- 사랑은 기도해서 얻을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이것은 우리가 거듭날 때 이미 전이 된 것임을 아셔야 합니다.
로마서 5장 5절에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 마음에 부은바 됨이니“고 말씀해 주고 있고,
로마서 12장 3절에 “하나님께서 각 사람에게 나누어 주신 믿음의 분량에 따라 건전하게 생각하라” 했음을 봅니다. 그리고 디모데후서 1장 7절을 보면-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것은 두려워하는 영이 아니라 능력과 사랑과 건전한 생각의 영이라" 한 것을 보면- <사랑>이나 <믿음>이나 기타 하나님의 성품과 특성에 속한 것들은 모두 거듭날 때, 함께 전이된 것입니다.
갈라디아서 5장 22,23절에 있는 9가지 열매가 있는데- 사람들은 이 열매를 성령의 열매라고 알고 있습니다만- 사실, 이 열매는 성령의 열매가 아니고- 재창조된 우리의 영의 열매입니다. 왜 그런가 하면, 요한복음 15장을 보면, 포도나무의 비유가 나옵니다. 실제로 포도 열매는 어디에서 맺는 것입니까? 가지에서 맺습니다. 가지는 누구입니까? 그리스도의 지체인 우리입니다. 그러므로 이 열매는 성령의 열매가 아니고, “재창조 된 우리 영의 열매인 것입니다. 그래서 이렇게 읽어야 합니다.”재창조 된 우리 영의 열매는 사랑과 기쁨과 화평과 오래 참음과 친절과 선함과 믿음과 온유와 절제니 이 같은 것을 금지할 법이 없느니라." 이 열매는 모두가 내 안에 있습니다. 이것은 기도해서 얻는 것이 아니고, 내 안에 있음을 발견하여서 개발하고 훈련해야 열매로 드러납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우리 안에 주신 모든 것들은 잠재력과 함께 씨의 형태로 주어졌음을 아셔야 합니다. 이 씨를 발아하여 꽃을 피우는 것은- 그것을 개발하여 밖으로 드러내는 훈련을 통한 나의 책임임을 이해하셔야 합니다.
4. 영적으로 생각하는 훈련이 필요합니다.
이것은 육적인 생각과 영적인 생각을 분별해서 이제는 영적으로 생각하는 훈련을 해야 합니다.
로마서 5장6절을 보면- "육신적으로 생각하는 것은 사망이나 영적으로 생각하는 것은 생명과 화평이니라."했는데- 여기서 <사망>이란 것은 육신적으로 생각하는 사람은 하나님과 사귐이 깨어진다는 말입니다. 더 노골적으로 말하면, 육신의 생각으로 사는 자는 영으로 살 수 없기 때문에- 이 세상 시스템의 희생자가 된다는 말입니다. 그러므로 영적으로 생각하는 것은 생명과 평안인 것입니다.
(1) 육신적으로 생각하는 것이란? 오감에 의해 생각하는 것을 말합니다.
예) 열왕기하 6장15-17절을 보면, 엘리사와 그의 종의 이야기가 나오는데- 수많은 군대가 엘리사를 죽이겠다고 그들을 에워싸고 있었습니다. 이 때, 엘리사는 아람의 군대보다 더 많은 천군 천사들을 보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 종 게하시는 그것을 보지 못하고 있기 때문에 두려워하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엘리사가 그 종의 눈을 뜰 수 있도록 기도한 것입니다. 정말로 무엇이 진짜인지를 보게 한 것입니다. 이와 같이 우리가 오감에 의해서만 곧, 귀로 듣고 눈으로만 본 것을 의지하면- 이 세상의 희생자가 되고 맙니다.
이것이 무슨 말이냐 하면, 요즘 아이들 유괴사건이 자주 일어나고, 성폭행 사건이 자주 일어나고 있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이 모두 두려워서 아이들을 직접 픽업하겠다고 등하교길이 자동차 행렬로 장사진을 이룬다는 신문기사를 보았는데- 보십시오. 세상 사람들은 이것이 두렵기 때문에 여기에 묶여버리고 맙니다. 그러나 우리는 우리 아이들에게 하나님의 천사가 함께한다는 사실을 영적으로 알기 때문에 우린 두려워하지 않고 이 세대의 풍조를 따라할 필요가 없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믿음의 사람은 우리 눈에 보이는 대로 살지 않고 하나님의 말씀이 그것을 어떻게 말씀해 주고 있는가를 따라서 행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이와 같이 믿음으로 사는 것을 훈련해야 합니다.
사무엘상 17장 28절과 사무엘상 17장 20,22절을 보면- 다윗과 그의 형제들 이야기가 나옵니다. 여기서 다윗이 아버지의 심부름으로 형들과 장군들의 쓸 물건을 가져왔습니다. 22절을 보면, 다윗은 그 짐을 지키는 자의 손에 맡겨두고, 형들에게 가서 인사를 한 겁니다. 그런데, 그 형들은 다윗이 아무것도 가지지 않고 맨 손으로 온 것을 보고 엘리압이 성을 내면서- “어찌하여 네가 여기에 왔느냐? 네가 맡겨진 광야에 있는 양을 어떻게 하고 네가 교만한 마음을 품고 이 전쟁을 구경나왔느냐?”라고 함부로 눈에 보이는 대로 판단하고 책망한 것을 봅니다. 이렇게 우리가 오감에 의해서 눈으로 보고, 귀로 들은 것만으로- 다른 사람의 소문만으로 함부로 판단한다면- 그 사람은 이 세상의 희생자가 되고 마는 것입니다. 우리는 항상 그 배후에 있는 눈에 보이지 않는 영적인 세계를 감지하면서- 하나님이 말씀하신 대로 생각하고 판단하는 훈련을 해야 합니다. 이것이 영적으로 생각하는 것입니다. 예를 들면, 요즘 물가와 기름 값이 폭등하고, 주가가 곤두박질치고 있습니다. 모두가 걱정하고 염려하고 있습니다. 우리도 자칫하면 뇌화 부동할 수 있습니다. 세상의 보이는 것과 소문에 의해서 근심하고 두려워함으로- 그래서 자칫하면 이제는 자동차 운행을 자제하고, 생활비도 줄어야 하겠다는 보편적인 생각을 할 수 있는데- 물론, 건전한 생각입니다만, 그러나 영적으로 생각하는 사람은- 이런 것들과 상관없이 살아야 합니다. 내핍하지 말라는 말이 아닙니다. 세상의 소문 때문에 위축되지 말고, 우리의 모든 쓸 것을 다 채워주시는 주님을 바라보고, 담대하게 사셔야 한다는 것입니다. 시편 34편 10절에 “젊은 사자는 궁핍하여 주릴지라도 여호와를 찾는 자는 모든 좋은 것에 부족함이 없으리로다.”는 말씀대로 두려움 없이 담대하게 사셔야 합니다. 이렇게 영적으로 생각지 않으면, 이 세상의 세파에 휩쓸려 희생자가 되고 마는 것입니다.
(2) 영적으로 생각하는 것이 무엇입니까?
하나님의 말씀대로 생각하는 것입니다. 구약시대의 사람들은 어떻게 생각한 것입니까? 이사야 55장 8-9절을 보면- "주가 말하노라 내 생각은 너희 생각과 다르며 내 길은 너희 길과 다르니 하늘들이 땅보다 높음 같이 내 길이 너희 길보다 높으며 내 생각이 너희 생각보다 높음이라."했는데- 그렇습니다. 성령이 오시지 않았던 구약시대의 사람들은 어느 누구도 하나님처럼 생각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신약시대에 성령을 모신 우리들은 어떻게 생각해야 합니까? 하나님처럼 생각해야 합니다.
빌립보서 2장 5-6절을 보면 "너희 안에 이 생각을 품으라. 곧 그리스도 예수 안에도 있는 생각이라 그는 하나님의 형체로 계시므로 하나님과 동등하게 되는 것을 탈취라 생각지 아니하셨고" 예수님께서 자신을 하나님과 동등하게 생각하는 것 자체를 강도질(탈취)하는 것으로 생각지 않으셨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개역성경은 “하나님과 동등 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라고 반대로 번역했는데- KJV이 옳습니다. 하나님과 동등하게 생각하는 것을 탈취로 생각지 않았습니다. 우리도 그렇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처럼 생각함으로 하나님이 되는 것은 아니지만- 우리가 예수의 마음을 품고, 예수님처럼 생각하는 것은 그 자리를 탈취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범사를 하나님처럼- 예수님처럼 생각하는 자가 되셔야 합니다.
고린도전서 2장 16절을 보면- "우리는 그리스도의 생각을 가졌느니라."했는데- 우리는 영적으로 생각하는 훈련을 해야 합니다. 어떤 사건이든, 어떤 사물을 보든 하나님처럼 100% 기능하기 위해서 영적으로 생각하는 훈련을 하셔야 합니다.
5. 환경을 지배하고 다스리는 훈련이 필요합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왕국에 들어 왔어도- 왕같이 다스리는 권세를 사용하는 훈련이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왜냐면, 우리의 새 생명은 하나님의 말씀과 일치하지 않는 어떠한 상황도 변화시킬 능력이 있기 때문입니다.
요한일서 5장 4-5절을 보면- "이는 하나님께로부터 태어난 자는 누구든지 세상을 이기기 때문이라 세상을 이기는 승리는 이것이니 곧 우리의 믿음이라.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믿는 자 외에 세상을 이기는 자가 누구냐?" 환경을 다스리며 지배하는 일을 어떻게 하느냐가 문제입니다. 육체로 하느냐, 아니면 생각으로 하느냐는 것인데- 성경은 다스리는 것을 왕 노릇한다고 말씀합니다.
로마서 5장 17절을 보면 "은혜와 의의 선물을 넘치게 받는 자들은 한 분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생명 안에서 왕 노릇 하리로다." 했는데 우리가 무엇으로 왕 노릇한다는 것입니까? 입으로 하는 것입니다.
계시록 2장 16절을 보시면- “그러므로 회개하라 그리하지 아니하면 내가 네게 속히 가서 내 입의 검으로 그들과 싸우리라”했고- 19장 15절엔- “그의 입에서 예리한 검이 나오니 그것으로 만국을 치겠고”했는데- 여기서 ‘입’이 헬라어는 <스토마>인데 이 뜻은 양쪽날을 가진 무기란 뜻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왕국을 통치해야 하는데- 무엇으로 통치하느냐 하면, 입의 말로 통치를 하는 것입니다.
전도서 8장 4절에 "왕의 말에는 권위가 있나니"- 그러기 때문에 우리가 말하거나 기도할 때에 구걸하지 않아야 합니다. 구걸하는 왕을 보셨습니까? 그래서 세 방면에 구걸하지 않습니다. 첫째는 하나님께 구걸하지 않고, 두 번째 마귀에게 구걸하지 않으며- 세 번째 이웃에게도 구걸하지 않습니다. 왕은 명령하는 자입니다. 그 밑에 있는 신하들은 듣고 순종합니다. 예수님이 어떻게 통치하셨는지 보시겠습니다. 마가복음 11장 13,14절 말씀을 보시면- “멀리서 잎사귀 있는 한 무화과나무를 보시고 혹 그 나무에 무엇이 있을까 하여 가셨더니 가서 보신즉 잎사귀 외에 아무 것도 없더라. 이는 무화과의 때가 아님이라. 예수께서 나무에게 말씀하여 이르시되 이제부터 영원토록 사람이 네게서 열매를 따 먹지 못하리라 하시니 제자들이 이를 듣더라.”했는데- KJV에서는 “예수께서 대답하여 무화과나무에게 말씀하시기를”이라고 되어 있습니다. 무화과나무가 언제 예수님께 물어본 적이 있습니까? 그런 적이 없었습니다. 그런데 어찌 대답하여 무화과나무에게 말씀하셨다고 하셨습니까?
그것은 하나님이 만드신 모든 만물은 지성이 있어서 말씀을 들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 주님이 귀머거리 환자를 치유할 때, “열려라”하고 명령하셨습니다. 이 말을 듣고 순종했습니다. 예수님은 모든 만물에게 말하셨습니다. 나무에게도, 파도에게도, 죽은 시체에게도 말씀하셨습니다. 모든 만물에게 말씀하셨습니다. 이처럼 우리가 통치를 무엇으로 하느냐 하면, 입으로 한다는 겁니다. 입으로 말할 때, 그것이 이루어집니다. 이것은 긍정적인 것만이 아니라 부정적으로 잘못 말한 것도 우리가 말한 대로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기도할 때도 마찬가지입니다. “엄마 나 감기 걸렸어요. 어, 그래 너 감기 걸렸니” 그렇게 말하고 기도하면 그 기도로 감기가 나을까요? 안 낫습니다. 왜 그런 것입니까? 이미 감기 걸렸다고 말했기 때문입니다. 그 말로 확정했기 때문입니다. 말로 묶어 놓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 저 오늘 진급 못했습니다.” 이렇게 진급하지 못했다고 확정했는데- 하나님이 어떻게 역사할 수 있겠습니까? 왜, 우리 기도가 불평하고, 원망하면서 응답되기를 기도합니까? 불평하는 것을 빼고 진급해달라고 기도할 수 있지 않습니까?
아무튼 제가 말씀드리고자 하는 요지는- 우리가 환경을 지배하고 다스리고 훈련을 해야 하는데- 어떻게, 하나님처럼 100% 새 생명으로 기능할 수 있어야 합니다. 어떻게 하느냐는 것입니다. 왕으로서 입으로 한다는 것입니다. 이제부터는 모든 만물이 지성을 가지고 듣고 있다고 했는데 그러므로 입으로 통치하는 훈련을 하셔야 합니다. 왕의 권세를 가지고 입으로 명령하는 훈련을 하셔야 합니다. 어떤 분은 습관적으로 “안 돼요”라고 말하기를 좋아 하는데- 그 습관을 고쳐야 합니다. 안 된다고 말했기 때문에 안 되는 것입니다. 부정적인 말을 하면 부정적으로 통치가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긍정적으로 말하면 긍정적으로 통치가 이뤄지는 것입니다. 이렇게 통치는 입으로 하는 것입니다. 왜, 양날 가진 무기가 입의 말이기 때문입니다.
제가 얼마 전에 케네스 헤긴 목사님의 간증을 통해서- 돈을 향해 명령기도를 하라고 한 적이 있지요. 우리는 왕이기 때문에 하나님께도 구걸하듯이 “하나님 저에게 돈을 좀 주세요!”하지 마시고 명령기도를 드려야 한다고 했지요. 그래서 “money come!”하면 천사가 우리의 말을 듣고 역사한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그 명령을 해 놓고, 응답이 더디면, 부정적인 생각을 하면서- “에이 안 오네!” 하고, 부정적인 말을 하면- 천사들이 헷갈려한다는 것입니다. 실끈 긍정적인 말을 해놓고선, 부정적인 말을 보태면 그것이 희석되어서 유야무야 되고 마는 것입니다.
마가복음 11장 23절에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누구든지 이 산더러 들리어 바다에 던지우라 하며 그 말하는 것이 이룰 줄 믿고 마음에 의심치 아니하면 그대로 되리라”하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이 믿음으로 우리의 말에 모든 만물이 듣고 순종한다는 믿음을 가지고 환경을 다스리고 통치하는 훈련을 하셔야 하는 것입니다.
끝으로 역대하 20장 보겠습니다. 우리는 어려운 상황이 오면, 금세 슬퍼하고 절망하고 좌절하는 태도를 보일 때가 있는데- 이것은 올바른 태도가 아닌 것입니다. 우리가 의사로부터 암 선고를 받았다 할지라도- 혹은 사업이 잘 안 된다는 보고를 받았을 때도, 그것 때문에 실망하고 다운되면- 우리의 환경을 통치하는데 훈련되지 못하는 것입니다.
이사야 53장 1절을 보면- “우리가 전한 것을 누가 믿었느냐 여호와의 팔이 누구에게 나타났느냐”했는데- KJV "Who has believed our report?"라고 했는데- 이 report라는 말은 우리가 주로 받는 은행 고지서나 의사의 통보 또는 법원에서 보내신 고지서 등, 여러 가지 나쁜 보고서를 받을 때- 우리에게는 눈에 보이지 않는- 또 다른 보고서가 있다는 것을 아셔야 합니다. 이 보고서는 주님에게서 오는 보고서입니다. 이 보고서가 세상으로부터 오는 나쁜 보고서를 압도하고 이길 수 있는 보고서라는 것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우리는 세상에서 온 나쁜 보고서를 보고서도 춤을 출 수 있어야 합니다. 이것이 이 세상을 이기는 비결입니다.
이것을 우리는 역대기하 20장에서 살펴볼 수 있습니다. 여호사밧 왕 때에 모압과 암몬과 다른 족속들이 연합군이 되어 예루살렘을 침공해 왔습니다. 보이는 상황은 절망이었습니다. 그런데 여호사밧이 어떻게 했습니까? 낙망치 않고 여호와 하나님께로 나아가 기도한 것입니다. 거기서 주님께로 온 다른 보고를 들을 수 있었던 것입니다. “이 전쟁은 너희에게 속한 것이 아니요 하나님께 속한 것이라” 했고, “이 전쟁에는 너희가 싸울 것이 없나니 대열을 이루고 서서 너희와 함께 한 여호와가 구원하는 것을 보라”고 했던 것입니다.
그래서 어떻게 했습니까? 맨 앞에 성가대를 세웠습니다. 그 결과 어떻게 됐습니까? 원수들이 저희들끼리 치고 박고 멸절된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도 여호사밧처럼 절망적인 상황에서도 찬송을 부를 수 있어야 합니다. 그러면, 하나님이 역사가 나타나는 것입니다.
우리가 여기서 무엇을 배우게 됩니까? 우리에게 또 다른 보고서인 하나님의 말씀이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 말씀을 의지하여 믿음으로 말하고, 명령해야 합니다. 이것이 우리가 왕으로서 통치하는 삶을 사는 것입니다. 이것이 곧 생명의 새로움으로 행하는 것입니다.
ㅣ한가족교회 소식 ㅣ
1. 저희 교회에 참석하신 여러분 모두를 진심으로 환영하고 축복합니다. 서로 문안하십시오.
2. 지난 주 고려대학교에서 있었던 대학생 전도집회가 은혜속에서 마쳤습니다. 기도 후원에 감사드립니다.
3. 지난 10월 28일 판교역이 개통 되었고,330번 버스가 오전 4시부터 12시까지 20분 간격으로 교회 옆까지 운행되고 있습니다. 많은 이용바랍니다.
4. 오늘 오후는 만찬예배를 드린 후에 브라질 레마 교회의 셀 폭팔 동영상 4번째 강의를 함께 시청하고 기도하는 시간을 가질 것입니다. 이어서 수요일 9시에도 5번 째 동영상 강의를 듣고 기도회를 가질 것입니다. 많은 참여바랍니다.
5. 지난 금요일 10시부터 오후 4시까지 "십자가에서 보좌까지"를 번역한 서승훈 목사님을 모시고 목회자 1일 세미나를 본 교회에서 가졌습니다. 점심식사를 준비하여 대접해 주신 50대 자매님들께 감사의 말씀을 드립니다.
6. "나는 누구인가?" 을 함께 고백하겠습니다. Identity 암송대회를 준비해 주십시오.
7. 12월 Wonderful day는 12월 17일이고, 24일은 예수 가족의 밤이고, 31일은 송구영신의 날입니다. 일정에 차질이 없기 바랍니다.
- 11 월 달 집중 기도 제목 -
1. 12월17일에 있을 5차 Wonderful day에서 많은 분들이 구원받고, 제자로 더해 질 수 있도록 기도합니다.
2. Wonderful day에서 구원을 받은 모든 분들이 금요성령집회에 연결되어 계속 교제할 수 있도록 기도합니다.
3. 주일 예배가 성령의 임재와 능력이 나타나는 영광스러운 예배로 자리잡을 수 있도록 기도합니다.
4. 가정모임 목자로 훈련을 받고 있는 분들이 충성된 마음으로 훈련에 임하고, 가정 모임을 개척할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5. 올 겨울에 따뜻한 환경에서 예배드릴 수 있도록 난방시설이 제대로 갖춰질 수 있도록 기도합니다.
6. 예배당 보수와 은행 원금환수를 위해 모두가 자발적으로 건축헌금에 동참할 수 있도록 기도합니다.
7. 2012년 신년 계획과 함께 가정모임 개척에 새로운 변화가 일어나길 기도합니다.
(교회의 비전)
우리의 비전은 이 땅(가정, 교회, 지역사회)에 하나님의 나라를 임하게 하는 성령의 군대가 되는 것이다.
(교회의 핵심가치)
1. 우리는 그리스도의 임재와 그의 인도하심에 가치를 둔다.
2. 우리는 섬김과 돌봄을 통해 공동체를 세우는 것에 가치를 둔다.
3. 우리는 그리스도의 성품을 닮는 거룩한 삶에 가치를 둔다.
4.우리는 성도의 권세로 이 땅을 다스리고 정복하는 것에 가치를 둔다.
5.우리는 영적 추수로 하나님 나라를 확장하는 일에 가치를 둔다.
6. 우리는 영적 아비(어미)로 셀 모임이 번성하는 것에 가치를 둔다.
7. 우리는 건강한 가정을 세우는 일에 가치를 둔다.
(성도의 실천사항)
1. 매일 말씀의 실재로 경청의 방을 하고 성경읽기를 한다.
2. 매일 중보기도를 한다.
3. 매일 지체들에게 축복과 격려의 말을 한다.
4. 매주 그리스도의 몸을 세우기 위하여 셀 모임과 주일예배에 참여한다.
5. 매주 후원자와 만나고 후원자가 된다.
6. 내가 먼저 주변에 있는 사람을 존경하고 겸손히 섬긴다.
7. 기회가 있을 때마다 손 대접하기를 힘쓴다.
8. 때를 얻든지 못 얻든지 복음전파에 힘쓴다.
9. 매주 가정예배와 품성훈련에 힘쓴다.
10. 매일 잠자기 전에 가족과 대화하고 기도드린다.
주일예배봉사담당 |
11월 13일 |
11월 20일 |
11월 27일 |
12월 4일 |
12월 11일 |
대표 기도 |
윤태흥집사 |
임한일 집사 |
김선규 집사 |
최영수 집사 |
박상용 집사 |
간증 / 특송 |
임한일 집사 |
박영숙 집사 |
강다영 청년 |
이 연주 청년 |
강신천 집사 |
* 11 월 달 헌 금 위 원 : 이호영, 양미순 집사님.
성 경 읽 기 (1년 1독)
11 / 7 월 히브리서 7장 예레미아 13장 - 14장
11 / 8 화 히브리서 8장 예레미아 15장 - 16장
11 / 9 수 히브리서 9 : 1-10, 예레미아 17장 -18장
11 / 10 목 히브리서 9: 11- 28, 예레미아 19장 - 22장
11 / 11 금 히브리서 10: 1-18, 예레미아 23장 - 25장
11 / 12 토 히브리서 10 : 19 -39, 예레미아 26장- 28장
11 / 13 일 히브리서 11:1-16, 예레미아 29장 - 30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