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먼저 영화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1592년에 발발한 임진왜란(일명 : 조일전쟁) 7년 동안 이순신 장군의 활동상을 간단히 살펴보아야 하겠고, 다음으로 이순신장군이 전라좌도수군절도사 겸 삼도수군통제사로서 막강한 수군을 양성해 놓고도 무슨 이유로 조정에 소환되어 파직되고 또 백의종군을 하게 되었는지, 또 일본의 정유재침 이후의 이순신장군이 복직하여 명량해전 이전까지 7개월간을 조명한 후, 마지막으로 명량해전을 좀 집중적으로 살펴보는 순서로 감상문을 쓸까 한다.
서기1592년(임진) 4월 13일 일본군은 총 병력 약 20만 명에 달하는 대규모의 침략전쟁을 일으킨다. 이를 임진왜란 일명 조일전쟁이라 한다.
이때 일본의 수군은 350여척의 전함으로 진격해 왔다. 당시 조선의 수군과 그 장수는
경상좌수사 박홍(朴泓, 부산포)
경상우수사 원균(元均, 경상우수영=현거제도의 가배량=오아포吾兒浦)
전라좌수사 이순신(李舜臣, 여수)
전라우수사 이억기(李億祺, 전라우수영=현 해남군 문내면 학동리) 등이 바다를 지키고 있었는데 박홍과 원균이 일본 수군을 막지 못하였고, 전라좌도의 수군 도움을 청하였지만 군 경계를 이유(실은 적을 막을 준비가 덜 되었기 때문)로 출전을 주저하고 있었다. 이순신장군은 막하 장수들과 토론 끝에 4지역의 연합함대가 출동하여 일본 수군의 예봉을 꺾을 수 있었다. 다음은 이순신 장군이 7년 동안 수행한 전쟁들인데 속칭 23전 23승이라 말하고 있는데 어떤 해전이 이에 포함되어 있는지는 확인되지 않고 있다. 아마 다음에 열거한 해전들 중에 포함되어 있을 것으로 생각되어 다음 블로그에서 조사한 것을 여기에 열거한다.
(http://blog.daum.net/ryong262에서 옮겨 온 글, 날짜는 양력으로 계산한 것임)
(제1차 출전)
1. 옥포해전 : 서기1592년 6월16일, 거제 옥포, 26척
2. 합포해전 : 서기1592년 6월16일, 경남 마산, 5척
3. 적진포해전 : 서기1592년 6월 17일, 경남 고성군 거류면 당동리, 11척
(제2차 출전)
4. 사천해전 : 서기1592년 7월 8일, 경남 사천시 용현면 선진리(왜성 근처, 거북선 실전에 투입),13척
5. 당포해전 : 서기1592년 7월 10일, 통영시 산양읍 삼덕리, 21척
6. (1차)당항포해전 : 서기1592년 7월 13~14일, 경남 고성군 회화면 당항포리, 26척
7. 율포해전 : 서기1592년 7월 15일, 경남 거제 장목면 율천리, 7척
(제3차 출전)
8. 한산대첩 : 서기1592년 8월 14일, 경남 통영시 한산도, 59척
9. 안골포해전 : 서기1592년 8월 16일, 경남 진해시 안골동, 20여척
(제4차 출전)
10. 장림포해전 : 서기1592년 10월 4일, 부산시 사하구 장림동, 6척
11. 화준구미해전 : 서기1592년 10월 5일, 부산시 사하구 다대동 화손대, 5척
12. 다대포해전 : 서기1592년 10월 5일, 부산시 사하구 다대동, 8척
13. 서평포해전 : 서기1592년 10월 5일, 부산시 사하구 구평동 감천항, 9척
14. 절영도해전 : 서기1592년 10월 5일 부산시 영도구, 2척
15. 초량목해전 : 서기1592년 10월 5일, 부산시 동구 초량동, 4척
16. 부산포해전 : 서기1592년 10월 5일, 부산시 동구 좌천동, 100여척
(제5차 출전)
17. 웅포해전 : 서기1593년 3월12일,14일,30일,4월7일, 경남 진해시 웅천동, 병사 100여명 사살
(제6차 출전)
18. 읍전포해전 : 서기1594년 4월 23일, 경남 마산시 진동면 고현리, 6척
19. 어선포해전 : 서기1594년 4월 23일, 경남 고성군 회화면 어선리, 2척
20. 자구미포(시구질포)해전 : 서기1594년 4월 23일, 경남 마산시 구산면, 2척
21. (2차)당항포해전 : 서기1594년 4월 24일, 경남 고성군 회화면 당항포리, 21척
(제7차 출전)
22. 장문포해전 : 서기1594년 11월 11일, 경남 거제시 장목면(상륙전 구사), 2척
(정유재침)
23. 어란포해전 : 서기1597년 10월 8일, 전남 해남군 송지면 어란리,
24. 벽파진해전 : 서기1597년 10월 16일, 전남 진도군 고군면 벽파리,
25. 명량해전 : 서기1597년 10월 26일(음9월16), 전남 해남군 문내면, 진도군 녹진리, 31척
26. 절이도해전 : 서기1598년 8월 20일, 전남 고흥군 금산면 거금도, 50여척
27. 장도해전 : 서기1598년 10월 19일~11월 4일, 전남 순천시 장도(육상의 성 공격)
28. 노량해전 : 서기1598년 12월 15~16일, 경남 남해군 설천면 노량, 관음포 일대, 약 450척
이상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한 두 달 간격으로 출전하게 된 이유는 그 당시 우리의 판옥선은 돛을 달지 않고 노를 저어서 운항을 하였기 때문에 한 번 출전하려면 승선인원 125~130명(노꾼 70명, 포수 36명, 궁수 18명 등)이 사용할 일상생활에 필요한 모든 물자를 조달하여야 했고, 지금처럼 기관으로 움직일 수 없어서 순전히 노꾼이 거센 파도를 해쳐나가야 했기 때문에 기동력이 떨어졌고 튼튼한 노꾼이 충분하여 휴식조와 노역조가 교대로 노를 저어 갈 수 있어야만 출동할 수 있었다. 따라서 전쟁 초기 경상좌우 수군이 일본 수군에 의해 박살났음에도 이순신장군이 출전을 주저한 이유도 설명이 되었으리라 본다.
다음에는 1592년 임진왜란이 발발하였을 때, 이순신장군이 전라좌수사로 종군하여 이후 통제사로서 일본 수군과의 싸움에서 승승장구(乘勝長驅)하며 조선반도 남해의 제해권(制海權)을 장악하였던 것은 이순신 장군이 남다른 군사의 조련으로 역사상 전무후무한 강력한 수군을 양성하여 남해를 호령하였지만, 1597년 정유재침으로 조선의 운명이 백척간두에 있었던 전쟁 중에 통제사직에서 해임되고 한양으로 압송되었다가 죽음 직전에 다시 방면되었으나 단지 죄인에서 방면된 한낱 병졸의 신세로서 무슨 일을 할 수 있겠는가! 그러다가 다시 조정과 주상의 명으로 허울뿐인 통제사로 다시 임명되었으나 나라의 운명이 백척간두에 선 1597년 8월 초까지의 과정을 살펴보고자 한다.
전쟁이 일어난 지 1년여 만인 1593년 7월 이순신장군은 본영(本營)을 여수에서 한산도로 옮겼다. 또 20여 차례의 전쟁에서 연전연승한 이순신장군이 승진하여 삼도수군통제사(三道水軍統制使, 충청·전라·경상)가 되었고, 일본 수군이 노리는 남·서해를 지나서 한양으로 보급을 쉽게 운반하고자 하는 일본의 책략을 분쇄하여 일본 육군의 연전연승을 뒷받침하는 보급로를 차단시켜 군량미 부족으로 전쟁을 교착상태에 빠져들게 만들었다. 그러는 사이에 조·명(朝明)연합군은 전쟁을 반전(反轉)시키는 계기를 마련할 수 있었다. 마음이 조급해진 일본은 강화협상을 시작하였고 대부분의 병력은 본국으로 철수하고 일부의 병력만 조선에 남아 전쟁은 휴전이나 마찬가지 상태에 들어갔다.
1595년과 1596년에는 큰 싸움이 없이 두 나라 사이에 강화협상을 두고 심리적 공방전만 벌어졌다.
조선반도에서 물러나 제 땅 일본에서 2년 동안 전쟁 준비에 몰두하여 전쟁준비를 끝낸 일본은 1597년 1월(음) 몰래 군사를 다시 조선 반도로 이동하였다. 이른바 정유재침(丁酉再侵)을 단행한 것이다. 일본의 간계(奸計, 일본군의 군사이동 일자를 흘리는 거짓정보)로 조선 조정에서 이순신장군에게 출동명령이 내려졌지만, 그것이 일본의 간계임을 알아차린 이순신장군이 출동하지 않자, 조선 조정은 이순신이 이적(利敵) 행위를 하였다는 모함으로 파직하여 한양으로 압송하였다.
이로 인해 이순신장군은 그 동안 둔전(屯田)으로 확보해 놓았던 군량미 9,914석, 화약 4,000근, 재고의 총통(銃筒) 300자루 등 진중의 비품을 신임 수군통제사 원균에게 인계한 후, 2월 26일(음) 압송되어 3월 4일 한양 의금부에 투옥되었다. 가혹한 문초 끝에 이순신을 죽이자는 주장이 분분했으나, 판중추부사 정탁(鄭琢)이 올린 신구차(伸救箚, 구명진정서求命陳情書)에 힘입어, 이순신은 도원수(都元帥) 권율(權慄) 막하에 백의종군(白衣從軍, 졸병으로 강등)하라는 하명을 받고 특사되었다. 4월 1일(음) 28일간의 옥고 끝에 석방된 그는 권율의 진영이 있는 경상도 초계(草溪)로 백의종군의 길을 떠났다.
가는 도중 아산에 이르렀을 때 어머니의 부고를 받았으나(4월13일) ‘하늘이 내린 효자’라고 불리던 그는 죄인의 몸이어서 잠시 상복을 입었다가 장례를 치른 후 바로 길을 떠나야만 했다.(4월19일) 공주-예산-전주-임실-남원-운봉-구례-순천에 도착하여 반달 정도 머물면서 그 지역의 전황을 살펴보았다.(4월27일~5월13일) 다시 길을 잡아 구례(5월14일~25일)-석주관(26일)-모여곡(6월4일)-초계(草溪6월5일)에 도착하였더니 도원수 권율은 출타 중이었다. 8일 권율장군과 상면하였다. 이순신은 도원수의 배려와 권유로 6월6일~7월18일(음)까지 40여일을 권율의 막하에서 백의종군하는 동안 해안지역의 전황을 파악하고 고문의 후유증 치료에 전념하였다.
한편 원균이 이끄는 조선함대(100척)는 1597년 7월 16일(음) 새벽 칠천량(漆川梁)에서 일본수군(1000척)의 기습을 받아 이순신이 조련해 놓은 막강한 조선수군은 힘 한번 써보지 못하고 완전 궤멸(潰滅) 되었다. 배를 버리고 육지로 피신한 원균은 연로하여 몸조차 활발하지 못해 왜병의 추격을 받아 살해되어 버렸다. 이번에도 김응서 및 권율을 경유한 일본 첩자 ‘요시라’의 같은 계략(計略, 거짓정보)이 적중하여 이번에는 이순신 대신 원균이 당한 것이었다. 정유재침의 다급한 사태에 엄청난 파탄이 초래되었으나, 조정은 속수무책이었다.
7월 18(음)일 권율도원수의 권유로 해안지역의 전황을 파악하고 난 병졸의 신분인 이순신은 자청하여 수군 수습에 나섰고, 1597년 8월 3일 조선 조정에서 그를 다시 삼도수군통제사로 복귀시켰다.(조정에서 그를 수군통제사로 재임명한 것은 7월 23일이었으나 거리가 있어 9일 후에야 교지를 받은 것임)
이순신장군은 1597년 8월 3일 교지를 받은 즉시 9명의 군관과 약간의 군사를 거느리고 ‘초계’를 떠나, 종일 행군하여 그날 초저녁 ‘행보역(경남)’에 들어섰고, 잠시 쉬었다가 자정에 길을 떠나 ‘두치’에 도착(4일)하니 날이 새고 있었으나 길을 재촉하여 ‘구례’에 도착하여 쉬었다. ‘곡성’(5일)-‘옥과’(6일)–‘석곡’(7일)-‘부유’-‘순천’(8일)에 이르렀다. 다시 ‘낙안’을 거쳐, 8월 9일(음)에는 ‘조성(鳥城)’으로 가서 군량미를 확보, 8월 11일(음)에는 ‘송곡’(松谷, 양산항梁山杭의 집, 현 보성군 득량면 송곡리 ‘박실’마을)에서 3숙(宿)을 하며 역시 군량미를 조달하고, 8월 14일(음) ‘보성(寶城)’ 열선루(列仙樓, 보성군청)에 머무르면서 장인(丈人)인 전 보성군수 방진(方震)을 그리면서, 거제현령 안위에게-8월 17일(음)까지 보성군 회천면 군영구미(軍營龜尾, 전일리 휘리구미)로 배설(裵說)의 병선이 도착하도록-군령을 주어 보내기도 하였다. 다음 날인 한가위 날(8월 15일)에는 선조가 보낸 선전관 ‘박천봉’이 교지를 들고 찾아왔다. 교지에는 ‘수군을 폐하고 육군에 편입하라’는 내용이었다. 이에 이순신은
“今臣戰船尙有十貳 死出力拒戰則猶可爲也”
“신에게는 아직도 배가 열 두 척이나 남았습니다. 죽음을 무릅쓰고 싸운다면 왜적을 무찌를 수 있습니다.”
(신이 두려워한 것은 왜적이 남해를 지나 서해안으로 따라 올라가서, 한강에 상륙하고 서울을 점령하면 조정은 다시 피난가야 하는 사태입니다.)
라고 장계를 써 올렸고, 열선루에서 그 유명한 ‘閑山島歌’를 지었다는 역사학자의 보고도 있다.(순천향대 李鍾學교수의 학술 발표)
閑山島月明夜上戍樓 撫大刀深愁時何處 一聲羌笛更添愁
한산섬 달 밝은 밤에 수루에 올라
큰칼 어루만지며 깊은 시름 하던 차에
어디서 일성호가는 다시 시름을 더하네.
이와 같이 이순신은 8월 17일, 보성 열선루를 떠나 보성군 회천면 군영구미로 갔으나 배설이 군선을 보내오지 않아 거기에서 일박하고, 8월 18일 보성을 떠나면서 9박 10일 동안 수립하였던 전술전략과 보성에서 조달한 군량과 병장기 그리고 보성에 까지 오면서 규합한 군졸 120여명을 인근 보성에서 징발한 어선에 싣고 결사 항전의 태세로 배설의 함선이 있는 장흥 회령포(대덕읍 회진리, 18일~19일)로 갔다. 공교롭게도 아니 아이러니 하게도 ‘칠천량 해전’에서 군령을 어기고 도망친 경상우수사 ‘배설’이 몰래 숨겨 놓았던 판옥선 12척, 이 보잘 것 없는 군사력을 기반으로 이순신장군은 다시 일어나서 나라를 구할 수 있었다. 그러나 실제로 명량해전(鳴梁海戰) 당일에는 13척이 참전하였다고 조선실록에는 기록되어 있다. 당시 배설이 거만한 행동으로 이순신장군의 명에 쉽게 복종하려 하지 않자, 이순신장군은 이 회령포에서 전 장졸들을 모아놓고 주상이 내린 교지에 사은숙배토록하면서(통제사 취임식) 일종의 의식을 통해서 정식으로 통제사로서의 군령권을 발동한 것이다.
이순신장군은 8월 20일(음) 해남 어진으로 가서 군영(軍營)을 설치하였다. 24일(음)에는 어진을 떠나 군영을 좀 더 서쪽에 있는 해남 어란(於蘭)으로 옮겼다가, 이어서 장도(노루섬)로 갔다가 작전상 요충지인 명량(鳴梁, 울돌목)의 입구 진도 벽파진(碧波津, 29일)에서 일본 수군과의 결전을 계획하고 약 15일 동안 작전에 필요한 모든 준비를 차근차근 진행하였다.
이순신장군이 23전 23승의 전략 즉 승리의 공식은 무엇이었을까? 그것은 다음과 같이 설명할 수 있다.
손자병법의 제4 군형편(軍形篇)에
勝兵先勝而後求戰(승병선승이후구전) : 이기는 군대는 먼저 승리할 상황을 만들어 놓고 전쟁에 임하고,
敗兵先戰而後求勝(패병선전이후구승) : 지는 군대는 먼저 전쟁을 일으킨 다음 승리를 구한다.
고 하였다.
위와 같이 이순신 장군의 전략은 ‘강한 군사력’과 ‘이기는 전쟁’이었다. 그것이 자신의 유일한 전략이었다. 따라서 만에 하나 ‘약한 군사력에 질 전쟁이라면’ 출전하지 않고 기다렸다가 전략이 완성된 후에 출전하는 것이었다.
이에 따른 전술은 무엇인가?
즉 강군을 만들기 위해서 먼저 장졸들이 건강하도록 잘 먹이고, 잘 재우고, 잘 훈련하는 것이다. 이를 개을리 하면 가차 없이 곤장으로 벌을 내렸다.
주둔지에 있는 둔전을 경작하여 언제든지 군량미를 충분히 확보하고 있어서 조정에서 보내오는 군량미의 보급이 없더라도 항상 이순신장군은 병사들을 배불리 먹일 수 있었다 한다.
또, 평상시에 병장기(총포와 화약, 활과 창 등)와 군선(軍船)을 창의적으로 제작하여 준비해 두었다가(당시 조선수군이 보유한 군선은 거북선, 판옥선, 방패선, 척후선 등이었다.) 유사시를 대비하여 준비된 병장기로 상황에 맞는 전법을 선택하여 반드시 승리할 수 있도록 그 전법에 익숙해 질 때까지 반복 훈련하고 반성하고 토론하였고, 더 나은 전술을 구사할 수 있도록 부단히 연마하였다고 한다. 또, 이순신장군 자신이 진중 막사에 살면서, 군관들과 군막에서 이루어지는 전술회의 외에도 바둑 장기를 두거나 담소를 나누는 동안에도 전술에 대한 토론을 하여 장군으로부터 군졸에 이르기까지 끊임없는 소통으로 시행할 전술을 완전 숙지하고 있어서, 목숨이 경각에 달려 있는 긴박한 전투상황에서도 겁먹지 않고 당황하지 않고 장졸이 혼연일체가 되어 연습했던 작전을 차질 없이 구사할 수 있어서 희생자 없이도 아니 최소의 희생으로 전쟁에 이길 수 있는 강한 군사력을 갖출 수 있었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훈련과 소통’이 전쟁 승리의 원동력의 하나였다는 것이다.
다음으로 이순신장군은 우리 조선 수군이 보유한 ‘함선과 화력’에 적합한 전술을 개발하여, 일본 수군이 자랑하는 ‘조총과 세끼부네’를 견제하고 격파하여 전쟁을 우리에게 유리하도록 방향을 바꾸어 남해안의 제해권을 확보할 수 있었다.
당시 우리나라는 200년 동안 전쟁이 없는 태평세월이라 비용이 많이 드는 수군을 철폐하자는 논의까지 있었던 상황이라 전쟁에 대한 대비도 소홀한 실정이었고, 일본은 100동안의 내전으로 천하를 통일한 ‘토요토미 히대요시’의 막부가 엄청난 군사력으로 조선은 안중에도 없고 明나라까지 손에 넣겠다는 야심찬 포부로 조선을 침략해 왔기 때문에 우리는 일본을 대적할 만한 군사력을 전혀 보유할 수 없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불행 중 다행으로 이순신장군이 전라좌도 수군절도사로 특채되면서 유사시를 대비하여 우리의 함선과 총포에 맞는 전술을 개발하여 훈련해 놓은 것이 천만다행이었다 할 수 있는 것이다.
그 중에서 가장 손꼽을 수 있는 것이 우리 수군이 보유하고 있는 주력 함선인 ‘판옥선과 그에 맞는 총포 공격 전술’이다. 이미 알고 있는 거북선의 위력은 명량해전에서는 없어서 쓰지 않았으니 그에 대한 설명은 접어 두기로 한다.
중요한 것은 판옥선이다. 판옥선은 2층 구조로 두꺼운 송판으로 제작되었으며 동력은 일반범선과 달리 돛이 있지만 돛은 싸움이 없는 한가할 때만, 그것도 순풍으로 운항할 때만 사용할 뿐이고, 주로 사람이 노를 저어 움직였다. 그래서 잘 훈련된 노꾼이 제일 중요하고 또 승선인원 총 160~200명 중에 노꾼이 110명 이상으로 그 수가 가장 많았다. 아래층에는 노꾼이 안전한 상태에서 노를 젓는대만 전력할 수 있도록 하였다. 그리고 2층 갑판에 뱃전을 빙 둘러 성(城)처럼 판자 난간을 방패처럼 설치하고, 천자총통, 지자총통, 현자총통, 지자총포 등 화력을 좌·우현에 배치하여 사수(궁수)가 18명 이상으로 활을 쏘고, 총포꾼 36명 이상이 신속한 행동으로 총포를 발사 할 수 있도록 되어 있었다. 또, 갑판 한 가운데에는 망루를 높게 설치하여 대장이 상황을 보면서 전투를 지휘할 수 있도록 하였다.
그래서 판옥선은 적선이 멀리 떨어져 있어도 총통의 사정거리에만 들어오면 지휘자의 명령에 따라 움직이는 노꾼의 신속한 역할이 가장 중요하였다. 우리 판옥선의 화력이 좌·우현에 배치되어 있어서 좌현의 포가 가동한 후에 재빨리 우현이 포를 가동하려면 노꾼이 신속히 배를 제자리에서 180도 선회하여 발포가 준비된 우현이 적을 향하도록 움직여야 하였다. 배가 선회하는 동안 발사를 마친 총포꾼은 장약을 준비하고 총통에 포탄을 넣어 발포할 준비를 해 놓아야 한다. 이런 동작을 반복하면, 지금의 자주포가 연속하여 발사하는 것과 같은 효과를 400여 년 전인 당시에 발휘하여 적선을 순식간에 격파 침몰하게 하는 가공할 만한 총포 공격 전술인 것이다.
일본 수군 함대는 대개 접근전으로 적선에 기어올라 칼로 백병전을 하거나, 적의 함선에 근접하여 사정거리가 짧은 조총을 발사하여 우리를 공격하는 전술인데, 그들은 그런 전술을 써보기도 전에, 우리 수군의 원거리 공격으로 이미 일본 수군의 주력 함선인 ‘세끼부네’들은 박살이 나거나 불태워져 기동성과 전력이 마비되어 버린 것이다. 이렇게 이순신장군은 노꾼과 전투원이 혼연일체가 되어 공격하는 함포 공격 전술을 개발하여 수없이 반복 연습해 놓은 것을 1592년 임진왜란이 발발했을 때 실전에 활용하여 큰 효과를 보았고, 한산도해전의 넓은 바다에서 ‘학익진(鶴翼陣)’으로 함포 공격을 하여 대승을 거둔바 있다. 그래서 일본 수군은 이순신장군만 나타났다하면 아예 싸우려하지 않고 미리 겁을 먹고 꽁무니를 빼고 도망가기 바빴다고 한다.
또, 판옥선은 2층 구조로 높이 제작하였기 때문에, 만일의 경우 접근하여 백병전을 할 때에 일본 수군이 칼을 들고 기어올라 백병전을 시도하기 어려웠다. 또, 판옥선의 높은 구조는 위에서 우리가 보유한 명사수들이 아래를 향하여 활을 쏘기에 매우 유리하고, 우리가 보유한 함포 포좌가 높게 만들어져 명중률이 높았던 것이다.
판옥선의 또 한 가지 전술은 충파(衝破, 배로 적의 배를 부딪쳐 적의 배를 부수는) 전술이다. 우리 판옥선이 두꺼운 송판으로 제작되어 적의 함선과 충돌했을 때 적의 함선에는 충격을 주어 파손시키지만 우리 판옥선은 충격을 이겨내는 강점이 있어서 파손되지 않는 다는 것이다. 또, 우리 판옥선의 뱃머리에는 돌기가 난 철판을 붙여 적선과 충돌하여도 적선만 깨지고 우리 판옥선은 충격을 받지 않아 안전을 꾀하는 전술이다.
이러한 전술이 완성되었어도 이순신장군은 함부로 군사를 움직이지 않았다. 반드시 이겨야 하는 최상의 전투를 위해서는 정찰, 탐망, 정보 분석, 지리적 우위, 날씨 등 모든 것을 고려하여 최상의 조건을 만들었다고 판단된 후에 전투에 임했기 때문에 전투에 진다는 것은 상상할 수 없는 일이었다. 그래서 병사들도 두려움 없이 전투에 임했고, 싸우면 반드시 이길 수 있다는 승전에 대한 확고한 자신감으로 충만해 해 있었다.
이순신장군은 전라좌수사로서 또 삼도수군통제사로서 휘하의 수군을 철저하게 조련하였다. 그런데 1597년 정유재침 때 원균 통제사가 지휘한 칠천량해전에서 그렇게 자신이 조련해 놓은 조선수군은 궤멸되어 버리고, 1597년 8월 다시 통제사로 복귀한 이순신장군 휘하에 남은 함대에는 12척의 판옥선뿐이었고, 이순신장군이 직접 조련하지 않았던 군관과 병사들이 태반이었다. 그래서 벽파진에서 보름 동안 휘하에 들어온 함대를 새로이 조련하면서 전쟁과 죽음에 대한 공포감을 불식시키고 자신감을 불어넣는 한 편 나약한 패배의식을 백절불굴의 감투정신으로 바꾸어 놓는데 모든 것을 바쳤다.
이순신장군은 전쟁준비가 완료된 9월 15일에 명량해협을 지나 가까이에 있는 전라우수영으로 함대를 옮긴 후에 각 전선(戰船)의 장령들을 소집하여 다음과 같은 군령으로 필승의 결의를 다짐하였다.
兵法云 必死則生 必生則死, 一夫當逕 足懼千夫
“병법에 이르기를, 죽고자 하면 오히려 살고, 살고자 하면 도리어 죽는다.”
고 했거니와,
“한 사람이 길목을 지킴에 넉넉히 1,000명도 두렵게 할 수 있다.”
라고 엄한 명령을 내리고 격려하면서,
“너희 여러 장수들이 조금이라도 명령을 어기는 일이 있다면 즉시 군율을 적용하여 조금도 용서치 않을 것이다.”
라고 거듭 말하며, 장병들과 죽기를 각오하고 싸울 것을 결의하였다. 그리고 상대적 전력의 열세로 엄습해오는 공포감을 용기로 바꾸는데 전력을 다 하였다.
영화 ‘명량’에서 이튿날 벌어질 결전을 앞두고 이순신장군이 아들 회에게 한 말
“두려움을 용기로 바꿀 수만 있다면 그 용기는 백배 천배 큰 용기로 배가 되어 나타날 것이다.”
라고 한 말에서도 당시의 상황을 여실히 보여주고 있다.
한 편, 아무리 전력이 우세한 일본 수군이기는 하지만, 이순신의 말만 들어도 경기(驚氣)를 일으킬 만큼 그들도 이순신장군에 대한 공포심을 가지고 우리에게 접근해 오고 있다는 것을 우리 군사들은 모르고 있었다. 다만, 우리 수군들은 앞날에 대한 절망과 공포감 속에서도 ‘우리의 대장은 백전백승의 이순신이다.’라는 한 줄기 빛 같은 믿음으로 자신을 추스르면서 공포감에서 벗어나려 했을 것이다. 이순신장군에 대한 신뢰는 수군 장병들뿐만 아니라, 당시 배를 가진 수많은 양민들과 전라도 백성들이 피난을 가지 않고 이순신장군의 진영 부근으로 집결했으며, 우수영으로 진영을 옮기자, 진영 주위에 가솔들을 이끌고 와서 이순신장군에게 힘을 실어 주기도 하였다. 또 명량해전 당시 이순신함대의 후방에 민간 어선들이 군선처럼 위장을 하고 진을 치고 떠 있었으며, 부녀자와 어린 아이들은 명량이 내려다보이는 산에서 군사처럼 위장을 하고 지켜보고 있었던 것으로도 알 수 있는 것이다.
9월 16일(명량해전)
이 때, 어란포(해남군)의 일본 수군은 구루시마 미치후사와 도도 다카토라, 와키사카 야스하루, 가토 요시아키, 구키 요시타카가 지휘하는 200여 척의 대 함대를 보유하고 있었다. 일본 수군은 목포 쪽으로 흐르는 북‧서류를 타고 명량해협을 통과하여 전라도로 서진(西進)하여 일본 육군과 합류할 계획이었다. 명량해협은 진도와 화원 반도 사이에 있는 좁은 수로(水路)로 조류는 당시 조선의 수로 중에서 가장 빠른 곳이고 전 세계에서도 5번째로 빠른 곳이다. 빠른 수로를 이용하여 잔존하는 조선 수군을 격파한 후 일본 육군과 합류하여 한양으로 진격하려는 것이었다.
일본 수군은 1592년의 전훈을 참조하여 내륙으로 깊숙이 진격하기 전에 반드시 서해의 해상권과 전라도를 장악하고자 하였다. 이순신이 복귀했다는 것은 알고 있었지만, 12~3척의 전선만으로는 무력하리라는 것이 일본 수군의 판단이었다.
이른 아침 명량해협으로 일본 수군 200여 척(약 1만명)이 접근해 왔다. 이들은 새벽 5시경에 어란포를 출발하여 순류(順流)를 타고 아침 8시경에 명량에 도착하였다. 그들은 이미 군사력의 우위를 앞세워 사기가 충천해 있었다.
일본 수군의 전위 함대를 맞이한 것은 이순신장군의 대장선이었다. 다른 군선들은 대장선의 후방에서 숨을 죽이며 이순신장군의 명령을 기다리고 있었다. 우리 수군은 동쪽에서 일본수군이 타고 오는 순류를 따라 뒤로 물러나지 않고 버티어야 하였다. 그러니 우리 노꾼들은 필사적으로 노를 저어야 하였다. 이순신장군의 대장선에서는 일본수군 함대가 사정거리 안에 들어오자 발포가 시작되었다. 일본 수군 함선은 차례로 격파되었다. 비록 일본 수군이 많은 함선으로 진격해 왔지만 명량의 좁은 수로를 돌파하려면 고작 2~3척만 통과할 있으니 원거리에서 함포로 저항하는 이순신장군의 대장선에서 일본 수군의 최전방 함선으로 집중적으로 날아드는 포탄에 차례로 격침되었으며, 적진에서는 순류(順流)를 타고 뒤따르는 일본 함선과 앞에서 격침되고 있는 일본 함선이 서로 뒤엉켜 아수라장이 되고 만 것이다. 그래서 자기 함선들끼리 혼선을 빚어 일사분란 한 전투가 아닌 오합지졸이 되고 말아 스스로 지리멸렬하고 만 것이다.
이제 유속(流速)이 가장 빠른 10시경이 되었다. 오로지 이순신장군의 대장선 한 척으로 일본 수군의 예봉을 맞아 고군분투한 것이다. 유속이 빨라지자 서서히 이순신장군의 대장선이 밀리기 시작한 것이다. 대장선에서는 호각을 불고 초요기(招搖旗, 부하장수를 부르는 깃발)를 걸었지만 우리의 후방 함대에서는 응답이 없었다. 그러자 난중일기에
“안위야, 군법에 죽고 싶으냐?”
의 구절이 나오지만, 어찌되었던 거제현령 안위가 적진 속으로 들어가 일본 수군과 대적하였으며,
“당장 처형할 것이로되”
의 말을 듣고 중군장 김응함이 대장선을 호위하게 되고, 이어서 송여종과 정응두가 뒤따라 합세하니 고군분투하던 대장선이 숨을 돌릴 수 있게 되었다.
이러한 전황이 또 2시간여 지나자 드디어 오후 1시경 조류가 바뀌기 시작한 것이다. 우리 수군이 북서 조류 즉 순류 타고 일본 수군은 역류(逆流)를 타게 되었으니 12척의 우리 수군이 퍼붓는 원거리 함포사격으로 일본 수군은 뒤에 진을 치고 있던 후방 함선들까지 타격의 대상이 되어 점차 5~60척은 흔적도 없이 사라져 버리고 일부 피해를 입은 함선까지 100여척에 이르게 된 것이다. 나머지 함선들은 저녁 6시가 넘자 더 이상 버티지 못하고 어둠 속으로 물러나고 말았다. 진격해 왔던 200여척이 다 피해를 본 것은 아니겠지만 여러 기록으로 보아 100여 척이 피해를 본 것은 확실하다 할 수 있겠다.
결론적으로 이순신장군이 명량해전을 승리로 이끌 수 있었던 주요 요인으로는 울돌목의 지형과 시간에 따른 조류의 변화를 이용한 이순신장군의 뛰어난 전술과 잘 훈련된 병사들이 있었기 때문이라 할 수 있다. 또한, 일본 수군의 장기인 접근전과 백병전을 피하고 우리 수군의 판옥선을 앞세운 원거리 함포공격과 충파전술을 적절히 활용하였으며, 이순신장군에 대한 신뢰를 바탕으로 우리 순군을 뒷받침해 준 전라도 백성들이 피난을 가지 않고 자기들이 소유하고 있던 배를 징발하여 열 지어 늘어놓아 더 많은 배가 있는 것처럼 위장전술을 펴서 일본 수군을 심리적으로 위축시켰던 점 들이라고 할 수 있겠다.
마지막으로 결전을 마치고 이순신장군이 뇌까렸던 말은 ‘천행(天幸) 이었다.’는 말이다. 매우 적절한 말이다. 최선을 다 하였지만 천우신조가 없었다면 결코 이길 수 없는 전쟁이었다는 말을 한 마디로 표현한 것이다.
다음은 ‘위키백과’에서 ‘명량해전 상황’을 구체적으로 기록한 글을 옮겼으니 참고하기 바람.
이순신은 일본군이 조선군을 가볍게 보고 있다는 점을 이용하여 그들을 유인하고자 했다. 음력 9월 7일, 조선 수군은 벽파진 근처에서 일본 수군의 소함대를 격파했다. 일본 수군은 조선 수군이 13척뿐임을 알고, 해상의 적 이순신과 조선 수군을 완전히 제거하기로 결심했다.
벽파진에서 우수영으로 옮긴 이튿날인 음력 9월 16일 오전, 일본 수군 130여 척이 순조(順潮)를 타고 울돌목으로 접근했다. 일본 수군 지휘부는 중형 군선인 관선(세키부네) 133척으로 진영을 짜고 협수로를 통과, 조선 수군을 향해 진격했다. 이때 조류는 동쪽에서 서쪽으로 흐르고 있었다. 즉, 일본 수군의 진격 방향이 조류의 흐름과 일치하는 순방향이었다.
이순신은 보고를 받고 즉시 닻을 올리고 울돌목으로 향했다.
전투가 시작되자, 조선 수군이 적의 기세에 밀려 겁을 먹고 뒤로 물러서기 시작했다. 그러나 이순신이 탑승한 기함은 계속 자리를 고수하며 부하들을 독려했고, 초요기를 올려 뒤로 물러나있던 중군장 미조항 첨사 김응함과 거제현령 안위를 진격해 오도록 한 뒤, 그들을 심하게 다그쳤다. 두 사람의 배가 적진으로 공격하기 시작하고 평산포 대장 정응두와 녹도 만호 송여종도 가세하였다. 특히, 안위의 군선으로 일본 수군의 공격이 집중되었다. 격전의 와중에 대포와 화살에 맞아 안위의 배를 둘러쌌던 3척의 적선이 바다에 빠졌는데 이 광경을 보고 있던 이순신 기함에 탑승하고 있던 투항해 온 일본 수군 준사(俊沙)가
“저기 그림무늬 붉은 비단 옷을 입은 자가 바로 적장 마다시(馬多時,구루시마로 추정)다.”
라고 알렸다.
이순신은 물 긷는 병사 김돌손을 시켜 즉시 구루시마를 끌어올릴 것을 명했다. 갈고랑쇠에 낚여 배 위로 끌려 올라온 적장 ‘구루시마 미치후사’는 곧바로 토막 내어졌으며, 조선 수군의 사기는 급격히 올라갔다. 반면에, 전투 중에 지휘관이 적군에 의해 참수되고 토막 난 것을 본 일본 수군의 사기는 떨어졌다.
일본군에게 또 하나의 악재로, 오후가 되자 점차 조류의 방향이 바뀌기 시작하였다. 이번에는 조류의 방향이 조선 수군에는 순조(順潮)가 되고, 일본 수군에 역조(逆潮)가 되어, 일본 수군에게 대단히 불리한 상황이 조성되었다. 역류가 흐르는 상황에서 군선이 ‘첨저선’이었던 일본 수군은 배가 선회하려면 많은 공간이 필요했다. 그러나 좁은 해협에 많은 수의 전선을 끌고 왔던 일본 수군에게 급한 역류가 흐르는 상황에서 배를 운신하며 전열을 정비한다는 것은 매우 어려웠다.
이에 1킬로미터 가량 떨어져있던 전라우수사 김억추도 합세하여 조선 수군은 포격전과 당파를 거듭했고, 일본 수군은 조류의 역조(逆潮)와 조선 수군의 포격과 당파로 인해 전혀 반격할 수 없었으며, 또한 군선이 많은 것이 오히려 독이 되어 군선끼리 서로 부딪히기 시작하였다.
이러한 혼란 속에서 군감 모리 다카마사는 바다에 빠졌다가 구조되었고, 이 전투의 총사령관 도도 다카토라가 부상을 당했다. 군감이 바다에 빠졌다가 구조되고, 총 사령관이 부상을 당한 것으로부터, 일본 본대도 큰 피해를 입었던 것으로 보인다.
결국 130여척의 대 함대를 12척으로 추격하는 형세가 되었고 일본 수군은 유시(酉時 오후 5시~7시) 무렵, 물살이 느려지고 바람이 일본 수군 쪽으로 부는 것을 이용, 퇴각하였다.
첫댓글 공부 많이 했군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