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 12. 15. 주일예배 설교(대림절 세 번째 주일)
마태복음 2장 1~12절
아... 박사님들...
■ 어떤 일을 보고, 또는 어떤 말을 듣고 할 말을 잃을 때 이런 신음 소리를 내죠. ‘아...’ 그런데 이 신음 소리 ‘아...’를 단순하게 정리하면 두 가지의 의미로 사용됩니다. 하나는, 감탄이나 감동의 의미로 사용됩니다. 반면에, 탄식이나 불편함의 의미로 사용됩니다. 그렇다면 오늘 본문은 이 두 가지 의미 중 어느 의미의 신음 소리 ‘아...’를 내게 할까요?
■ 하나님은 예수님으로 오시던 날 예배를 받고 싶으셨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사람으로 오셨다는 사실을 믿지 못하는 인간들이기에 대안을 마련하셨습니다. 동방박사들이었습니다. 동방박사들을 통해 경배를 받으시기로 하셨습니다. 그러나 단순히 경배만을 받자고 하신 것은 아니었습니다. 그렇다면 무엇이었을까요? 잠시 뒤에 설명 드리죠.
우선 알고 싶은 것은, 하나님은 왜 동방박사들을 택하셨을까요? 이를 성서가 명백히 설명하지 않으니 단지 추측할 뿐입니다. 추측컨대 이들이 점성술사였기 때문일 것입니다. 점성술은 별을 중심으로 하늘의 움직임을 통해 세상에 어떤 일이 벌어지는지를 알아낼 수 있다고 믿는 일종의 통계적 신앙입니다. 당시 이 기술은 메소포타미아나 페르시아 등 팔레스타인 동쪽 지역에서 번성하였습니다.
그래서 이스라엘로 보면 동방에 점성술사들이 많이 있었던 것입니다. 이들은 별의 특별한 움직임을 통해 세상에 엄청난 일이 벌어지고 있다는 것을 추측할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하늘의 메시지도 읽을 수 있었습니다. 하나님은 이들만이 하늘의 메시지를 읽고 예수님을 경배할 수 있다고 보신 것입니다.
이렇게 해서 하나님은 동방박사들을 움직이셨습니다. 그들은 먼 낮선 길을 별 하나에 의지하여 예루살렘까지 잘 왔습니다. 별을 잘 살피며 예루살렘까지 왔습니다. 그런데 그만 예루살렘에 도착하자 별을 보지는 않고 소문을 내기 시작했습니다. 2절입니다. “‘유대인의 왕으로 나신 이가 어디 계시냐? 우리가 동방에서 그의 별을 보고 그에게 경배하러 왔노라!’하니”
아이고, 이들은 소위 사고를 쳤습니다. 내지 말아야 할 소문을 내고 만 것입니다. 세상에, 누구보다도 헤롯 왕이 이 이야기를 듣고 좋아했겠습니까? 헤롯 왕이 얼마나 당황했는지 3~4절이 잘 설명합니다. “헤롯 왕과 온 예루살렘이 듣고 소동한지라. 왕이 모든 대제사장과 백성의 서기관들을 모아 ‘그리스도가 어디서 나겠느냐?’ 물으니” 이 소동의 분위기는 단순한 호기심이 아닙니다. 커다란 긴장감이 감도는 분위기입니다. 왕 직이 걸려 있는 문제 아니겠습니까?
헤롯 왕의 이 당황하는 모습에 잔뜩 긴장한 서기관들이 예언의 말씀을 찾아냈습니다. 5~6절입니다. “이르되 ‘유대 베들레헴이오니 이는 선지자로 이렇게 기록된 바, 「또 유대 땅 베들레헴아, 너는 유대 고을 중에 가장 작지 아니하도다. 네게서 한 다스리는 자가 나와서 내 백성 이스라엘의 목자가 되리라.」하였음이니이다.’”
이 예언의 말씀을 들은 헤롯 왕의 마음은 어땠을까요? 불안과 질투로 가득 채워졌습니다. 7~8절을 봅니다. “이에 헤롯이 가만히 박사들을 불러 별이 나타난 때를 자세히 묻고 베들레헴으로 보내며 이르되 ‘가서 아기에 대하여 자세히 알아보고 찾거든, 내게 고하여 나도 가서 그에게 경배하게 하라.’” 헤롯 왕의 이 말이 다 거짓인 것 아시죠? 그러니 그의 마음은 불안과 질투로 가득 찼다고 볼 수 있습니다. 죽이고자 했던 것입니다.
그러나 이를 알 턱이 없는 박사들은 그러겠다고 하고는 궁 밖을 나왔습니다. 어디로 가야하나 하고 잠시 망설이던 순간이었습니다. 지금껏 그들을 인도하던 그 별이 어느 방향을 향하여 움직이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어딥니까? 9절입니다. “박사들이 왕의 말을 듣고 갈새 동방에서 보던 그 별이 문득 앞서 인도하여 가다가 아기 있는 곳 위에 머물러 서 있는지라.” 한편으로는 다행스러운 일이지만 한편으로는 아쉬운 일입니다. 박사들이 내내 별만 쳐다봤다면 헤롯 왕의 마음에 질투의 불을 지르지 않았을 텐데 말입니다. 참으로 안타까운 일입니다.
박사들은 별을 보고 매우 크게 기뻐하였습니다.(10절) 당연하지 않겠습니까? 마침내 그들은 별이 멈춰선 그곳으로 들어갔고, 드디어 왕이신 예수님을 뵈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이 이들의 경배 행위를 통해 우리에게 들려주시고자 하는 메시지를 보여주셨습니다. 그것은 아기께 경배하고 난 후 보배합을 열어 바친 예물의 의미에 있습니다. 예물이 무엇입니까? ‘황금’과 ‘유향’과 ‘몰약’입니다.
‘황금’(χρυσὸ̀ν, 크뤼손)은 부를 상징합니다. 그래서 왕에게 드리는 예물이라고 합니다. 그러니 만왕의 왕이신 예수님께 황금을 드리는 것은 합당한 일입니다. ‘유향’(λίβανον, 리바논)은 관목에서 채취한 향기로운 송진으로서 제사지낼 때 사용하는 것으로 제사장이 성막에서 하나님을 예배할 때 사용했습니다. 그래서 유향은 영원한 대제사장이신 예수님께 합당한 예물입니다. ‘몰약’(σμύ́ρναν, 스뮈르난)은 시체를 염할 때 사용하는 고가의 방부제로서, 매우 귀한 신분을 가진 사람이 죽었을 때만 사용하는 물품입니다. 그러므로 몰약은 예수님의 수난과 죽음을 미리 준비하는 예물로서 합당한 예물입니다.
이 세 가지 예물의 의미를 정리해 볼까요? 예수님이 온 세상의 진정한 왕이시며, 경배 받아 마땅한 분이라는 것입니다. 그럼에도 이 세상을 위해서 스스로 고난의 길을 가심으로써 이 세상을 구원하실 분이라는 것입니다.
■ 예수님께 모든 예(禮)를 다 드린 후 박사들은 집을 나와 궁으로 향하려 하였습니다. 이곳에 오기 전에 헤롯 왕과 약속했기 때문입니다. “가서 아기에 대하여 자세히 알아보고 찾거든, 내게 고하여 나도 가서 그에게 경배하게 하라.”(8절)는 말에 박사들은 그러겠다고 약속을 했습니다.
그런데 집을 나서기 전 잠시 눈을 붙인 사이에 꿈을 꾸게 되었습니다. 그 꿈속에서 주님의 지시를 받았습니다. 12절입니다. “그들이 꿈에 ‘헤롯에게로 돌아가지 말라!’ 지시하심을 받아 다른 길로 고국에 돌아가니라.” 어떤 지시입니까? 헤롯에게 가지 말라는 지시였습니다. 왜 그러셨을까요? 헤롯이 예수님을 죽이려고 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이를 13절을 통해 확인할 수 있습니다. “그들이 떠난 후에 주의 사자가 요셉에게 현몽하여 이르되 ‘헤롯이 아기를 찾아 죽이려 하니, 일어나 아기와 그의 어머니를 데리고 애굽으로 피하여, 내가 네게 이르기까지 거기 있으라.’ 하시니”
자신의 왕위에 불안감을 느낀 헤롯이 질투심에 의해 예수님을 살해하려고 했던 것입니다. 이런 일은 역사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일들입니다. 정치적 욕망을 가진 이들 중 다수가 자신의 욕망을 채우거나 지키기 위해 그 어떤 끔찍한 일도 마다하지 않습니다. 한국의 정치사에서도 흔히 볼 수 있습니다. 당장 현재 검찰의 태도에서도 알 수 있습니다. 검찰은 정치하는 곳이 아닙니다. 사법적 정의를 이행하는 곳입니다. 그럼에도 정치화가 되어 얼마나 끔찍한 폭력을 휘두르고 있습니까? 자신들의 이익과 목적을 이룰 때가지 독점한 수사권, 기소권, 공소권를 마구 휘두르고 있지 않습니까? 금번 성탄절을 분기점으로 이 폭력적 권력이 견제 받게 되거나 사라지기를 소망합니다.
■ 오늘 본문의 사건을 통해 우리가 전체적으로 느끼는 것은 무엇인가요? 박사들의 행동에 대한 아쉬움입니다. 만약 그들이 “유대인의 왕으로 나신 이가 어디 계시냐? 우리가 동방에서 그의 별을 보고 그에게 경배하러 왔노라!”(2절)고 동네방네 소문을 내지 않았다면, 예수님의 신변은 물론 아기들의 생명이 안전하지 않았을까요?
우리는 역사에서 ‘만약 그때 그러지 않았다면..’이라는 후회 혹은 아쉬움을 내 쉴 때가 많습니다. 충분히 공감 가는 일입니다. 그러나 과연 바꿔 했다면 다 잘되고 좋았을까요? 그건 알 수 없습니다. 더 잘 될 수도 있었겠지만, 더 안 될 수도 있었을 것입니다. 그래서 인생 새옹지마(塞翁之馬)라고 하는 것 아니겠습니까?
이를 신앙적으로 정리하면, 앞길은 주님의 시간입니다. 인간의 시간이 아닙니다. 우리의 시간은 현재를 잘 살아가는 것입니다. 내일은 기다리고 기대하는 시간입니다. 우리가 만드는 시간이 아닙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시간과 주님의 시간을 구분하여 사는 것이 지혜이고 신앙입니다.
동방박사들의 행동이 아쉽지만 그것은 우리가 판단할 일이 아닙니다. 설령 판단할 수 있다 해도, 결과는 주님의 영역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리스도인인 우리는 절망 중에도 희망하는 사람들입니다. 그리스도인은 ‘절망을 희망으로 읽는 소망의 사람’입니다. 이것이 대림절의 의미이기도 합니다. 주님을 바라보며 힘내십시오! 아멘!
첫댓글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