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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BC 성서연구 제21B강 역대상하 메시야왕국의대망 -
(73) 아끼는 자 없는 죽음 역대하 21:11-20
인생에 하나의 선택지만을 가지고 태어나는 사람은 없습니다. 어려운 환경 중에서, 온통 신앙의 불모지에 살아도 여전히 바르게 선택할 수 있고, 인내와 경건을 붙들 수도 있습니다. 많은 분들로부터 “나는 이렇게 살 수밖에 없었다”는 이야기들을 접하곤 합니다. 나를 위한 내 스스로의 결정과 선택을 할 수 없었던, 가난하고 어려운 현실 앞에서, 짊어지고 책임져야할 사람과 일들, 의도치 않은 버거운 환경과 상황에 어쩔 수 없이 지금의 이 모습으로 이끌려 살았다고 이야기를 합니다. 물론 다른 선택이 쉽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지금의 내가 되게 한 모든 선택은 내가 한 것입니다. 안정과 변화, 익숙함과 낯설음, 평안과 위험 중에 늘 선택해온 것이지요. 오늘 우리는 어떤 선택을 하게 될까요? 하나님은 또 우리에게 어떤 것들을 말씀하실까요?
요즘 새벽에 드린 말씀이 그것입니다. 지도자들이 바뀔 때마다 외치는 개혁과 변화에 대한 말들, 그만큼 달라져야 한다고 몸부림을 치는데, 대부분 잠시동안의 변덕으로, 그리고 이제는 예전보다 더 못한 변질로 바뀌어버리는 경우가 많다는 것을 말이지요? 섣부르게 인간의 욕심으로 내딛은 어리석은 발걸음들이 되려 우리를 고통스럽게 하는 것이지요. 그래서, 우리는 더욱 천지를 지으신 하나님, 그분이 부여하신 법칙과 질서, 그 가운데 우리에게 가르쳐주신 말씀, 그것을 따라 살 때 복이되고 형통하고 번성하며 살 수 있다고 말입니다. 익숙한 내 경험과 상식을 내려놓고, 생소한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아침에 깊은 곳에 가서 오른편에 그물을 내리는 것이 빈 그물과 빈 배로 갈 수 밖에 없었던 내 발 걸음을 두 배가 가득 채워진 만선의 기쁨으로 집에 돌아갈 수 있게 하는 것이라고 말입니다. 우리의 결정, 우리의 선택, 하나님께서 기뻐하시고 하나님께서 복을 주시는 선택, 특별히 이번 11월 감사의 달은, 사랑함으로 감사함으로 청종하는 달, 하나님 내게 주신 말씀대로 살아감으로 감사를 표현해보시자는 말씀드렸습니다. 생각나시죠?
우리는 살아가면서 많은 선택과 결정의 기로에 놓이게 됩니다. 예수님은 잘 모르겠을 때, 좁은 문으로 들어가기를 힘쓰고, 많은 사람이 드나드는 크고 넓은 길로 다니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손해보는 길, 자기를 부인하는 길, 내 유익이 아닌 타인의 유익을 구하는 길로 가라고 말이지요.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내 자신같이 사랑하는 길로 가라고, 그들이 나에게 해주기를 바라는 것, 그것을 하면서 살라고 가르쳐주셨습니다. 그야말로 당신께서 힘껏 걸으셨던 길이기에 기꺼이 소개하셨던 것입니다. 오늘 본문은 끝내 바른 길을 버리고 자기의 길을 걸었던,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선택이 아니라, 자신을 위한 선택을 내렸던 이의 마지막 최후를 소개하고 있는데, 어떤 모습들인지 살펴보겠습니다.
열왕기를 보면 엘리야-엘리사로 이어지는 걸출한 선지자들이 저 그릇된 길로 가고 있는 북이스라엘, 아합과 아하시야를 대상으로 사역한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런데 오늘 역대기 본문에 무엇을 이야기하고 있지요? 그가 오늘 여호람에게도 글을 보내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미워하고 악을 행한 왕에게 보내셨던 선지자가, 오늘 남유다의 왕에게 글을 보내고 있는 것입니다. 남유다가, 남유다의 왕이 북이스라엘, 북이스라엘의 왕이 되어버렸다는 뜻이겠지요. 오늘 21장은 두 번이나 이야기합니다. 6절과 13절, 여호람이 이스라엘 왕들의 길로 행하여 아합의 집과 같이 하였다. 아합의 집이 음행하듯 하였다. 그쵸?
그러나 이것은 심판의 메시지가 아닌, 사랑의 촉구, 그 악한 길에서 돌이켜 살라! 부르시는 하나님의 요청의 말씀이었던 것이지요. 그래요. 본문이 증언합니다. 여러 산당을 없애지 못했던 것이 여호사밧의 오점이었는데, 오늘 그 아들은 오히려 산당을 세우기 시작하였다는 것입니다. 언제? 에돔이 배반하고 립나도 배반하고 저들에게 죽을 뻔 하였다가 간신히 살아돌아온 그가, 백성들에게로부터 버림을 받은 왕이 오늘 하는 일이 하나님께 회개하는 것이 아니라, 유다의 산들마다 산당을 세우는 일이었던 것이지요? 그런 여호람에게 하나님께서 다시한번 기회를 주셨던 것입니다. 이제 사역을 정리하고 하나님께로 돌아갈 준비를 하고 있던 엘리야에게 마지막 명령을 주셨던 것이지요? 엘리야가 사역을 마치고 수레를 타고 올라가기 전, 그의 생애 마지막으로 하나님 말씀을 대언했던 일입니다. 위대한 선지자의 마지막 메시지에도 오늘 여호람은 귀를 기울이지 않았던 것입니다. 대하 21장 12-13절
“선지자 엘리야가 여호람에게 글을 보내어 이르되 왕의 조상 다윗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이같이 말씀하시기를 ‘네가 네 아비 여호사밧의 길과 유다 왕 아사의 길로 행하지 아니하고 오직 이스라엘 왕들의 길로 행하여 유다와 예루살렘 주민들이 음행하게 하기를 아합의 집이 음행하듯 하며’ 또 네 아비 집에서 너보다 착한 아우들을 죽였으니”
엘리야의 글에 의하면 여호람에게는 두 가지, 그가 가진 두 이름, 그의 정체성에 기반한 선택이 주어졌었습니다. 하나는 ‘아사의 손자, 여호사밧의 아들’이라는 정체성으로, 유다 왕들의 길입니다. 또 하나는 ‘아합과 이세벨의 사위’라는 정체성으로, 이스라엘 왕들의 길입니다. 이 둘을 어느 정도 걸쳐 있지도 않았다고 이야기합니다. 하나님은 엘리야를 통해 오늘 저 여호람이 여호사밧와 아사의 길이 아니라, 오직 이스라엘 왕들의 길, 아합의 길을 선택했음을, 그리고 그로 말미암아 행한 일과 당할 일을 지적하고 알리시지요. 무엇입니까? 유다 여러 산에 산당을 세워 음행을 부추기고, 유다를 미혹하게 하였던 것입니다. 또한 여호람보다 선한 아우들을 잠재적인 적으로 간주하여 다 죽였기에 이제 하나님의 심판을 피할 수가 없다는 것이었습니다. 14-15절이 이렇게 기록합니다.
“여호와가 네 백성과 네 자녀들과 네 아내들과 네 모든 재물을 큰 재앙으로 치시리라 또 너는 창자에 중병이 들고 그 병이 날로 중하여 창자가 빠져나오리라 하셨다 하였더라”
그렇게 하나님께서는 여호람에게 마지막 경고를 하셨던 것이지요. 이때라도 돌이켰으면 이 재앙들이 임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첫 번째 재앙을 겪고서 돌이켰으면, 두 번째 재앙만큼이라도 당하지 않았을지도 모릅니다. 그런데 어땠다고요? 나라와 집안은 큰 전쟁으로 약탈을 당해야 했고, 자신 역시 큰 병이 들어 날로 중하여 창자가 빠져나와 죽게 되었던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여호람이 ‘아합의 사위’가 된 것은 어쩌면 아버지 때문이었는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아합의 사위로 살아가느냐 마느냐의 문제는 스스로 결정할 수 있는 일이었지요. 얼마든지 하나님을 섬기며, 아내를 하나님의 백성이 될 수 있도록 도우며,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선한 통치를 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여호람은 더욱 하나님을 떠나고 아합의 사위, 이스라엘의 왕들의 길을 걸어갔던 것입니다.
그래요. 많은 이들이 어쩔 수 없었다고 하는 말들은 사실이 아닙니다. 누구에게나 올바른 선택을 할 수 있고, 다른 선택을 할 수 있는 기회가 있습니다. 수많은 압력도 억압도 상황도 우리가 하겠다고 하면 누구도 막을 수 없습니다. 늘 바른 선택지를 내려놓고, 남들이 상황이 환경이 제시하는 선택지를 붙들어온 우리의 걸음을, 우리는 늘 어쩔 수 없었다고 변명하고 있을 뿐입니다. 더 늦기 전에 하나님의 말씀을 붙들고, 멈추고 돌이키고 바르게 걷기 시작하는 우리, 이제라도 그렇게 걷기 시작하는, 그렇게 생명길을 걷기 시작하는 우리이길 축복합니다.
여호람의 재위기간은 8년이었습니다. 아사왕 41년, 여호사밧의 25년에 비하면 정말 짧습니다. 하나님의 경고에 아무런 제스처가 없으니 하나님의 징계가 곧바로 임하였던 것이지요. 유다에 음행을 강요하고, 동생들을 죽인 죄에 대한 보응으로, 하나님께서는 블레셋과 구스지역의 아라비아 사람들을 보내십니다. 여호람의 모든 재물뿐 아니라 막내아들 여호아하스를 제외한 모든 아들과 아내들을 빼앗으셨습니다(16~17절).
“여호와께서 블레셋 사람들과 구스에서 가까운 아라비아 사람들의 마음을 격동시키사 여호람을 치게 하셨으므로 그들이 올라와서 유다를 침략하여 왕궁의 모든 재물과 그의 아들들과 아내들을 탈취하였으므로 막내 아들 여호아하스 외에는 한 아들도 남지 아니하였더라”
아비처럼 대적할 줄 모르고, 어찌할 줄 모르고 주만 바라봅니다 하며 간절히 백성들과 함께 기도하였거나, 다윗처럼, 이 백성들이 무슨 죄가 있습니까 죄는 내가 지었으니 나를 벌하소서 했으면 하나님께서 방법을 친히 가르쳐주셨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렇게 하지 않습니다. 알면서도 하지 않습니다. 수많은 재산과 생명이 죽어가고 있음에도 전혀 돌이킴이나 뉘우침이나 하나님을 향한 부르짖음이 없었지요. 완악한 강퍅한 그를 보시며 하나님은 그의 생명도 불쌍히 여기지 않으셨습니다.
하나님은 극히 패역한 악인들을 심판하실 때, 단숨에 죽게 하지 않으시는 것을 봅니다. 천천히 죽이시고 더러운 자리에 던지십니다. 그렇게 그의 죄악을 만민이 알게 하시는 것이지요. 그 결과는 어떻게 되요? 아끼는 자 없이 죽음에 처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의 죽음을 슬프게 여기는 사람도 없이 세상을 떠났다.”(20절새번역)
“He passed away, to no one's regret”(NIV)
아무도 가여워하거나 유감스러워하지 않았다.
“There were no tears shed when he died--it was good riddance!”(MSG)
속이 시원한 일이었다. 체증이 풀리는 일이었다.
보십시오. 여호람을 아무도 불쌍하다 여기지 않았고 그를 아무도 기억하지 않았으며, 그의 모든 것을 기억조차 하지 않게 만드는 죽음을 당하게 하신 것입니다. 그래요. 아합이 전쟁터에서 온 종일 피를 흘리며, 쓰러지도록 쉼 없이 싸우다 죽게 하시곤, 그 피를 개들이 핥게 하시는 것처럼, 여호람은 오랜 동안 고통당하고 결국 창자가 빠져나오는 더럽고 혐오스러운 병에 걸려 앓다가 죽게 하셨습니다.
그렇게 죽어서인지, 죽은 후에도 왕으로서 대접을 받지 못하게 되었지요. 사실 그의 죽음을 슬퍼해 줄, 동생들도 방백들도, 그리고 가족들도 자녀들도 백성들도 모두 죽고 탈취를 당했고, 모든 재물도 다 빼앗겼으니 장례를 치른 것 자체가 기적입니다. 그래요. 19절을 보니 백성들이 그에게 분향하지 않았습니다. 다윗성에 장사되기는 했으나 열왕의 묘실에 안치되지 못했습니다.
“여러 날 후 이 년 만에 그의 창자가 그 병으로 말미암아 빠져나오매 그가 그 심한 병으로 죽으니 백성이 그들의 조상들에게 분향하던 것 같이 그에게 분향하지 아니하였으며”(대하21:19)
아버지 여호사밧의 길이 아니라, 장인 아합의 길을 선택한 결과, 유다왕들의 길이 아니라, 이스라엘왕들의 길을 선택한 결과는 8년으로 끝이었습니다. 그마저도 자기가 피흘려 죽게 하든지, 타인이 피흘려 죽게 하는 내전과 침략 속에 살았고, 그 마지막은 병으로 고통당하는 2년을 살다가 죽은 것이지요.
그래요. 악한 길을 선택했던 여호람은 모든 것을 잃습니다. 사람도 재산도 건강도 그리고 마지막 그를 추억하고 기억해줄 이들도 다 잃었던 것입니다. 아시지요? 원피스 히루루크의 명대사,
“사람이 언제 죽는다고 생각하나? 심장이 총알에 뚫었을 때? 아니!
불치병에 걸렸을 때? 아니! 맹독 버섯 수프를 먹었을 때? 아니!
사람들에게서 잊혀졌을 때다!”
아무도 그를 불쌍히 여기지 않는 아끼지 않는 자가 되어 비참한 죽임을 당해야 했던 것이지요. 이것이 성경이 증언하는 악인의 최후입니다. 형통한 것 같지만, 이내 흔적도 찾을 수 없는 존재가 저 악인입니다.
그래요. 성경에는 수도 없이 많이 기록됩니다. 악인들의 비참한 최후와 의인들의 번성한 결국을 말이지요. 그걸 모르지 않습니다. 다 알고 있습니다. 그럼에도 우리는 하나님을 좇는 길, 하나님의 가르침을 따르는 길을 선택하기보다, 여전히 눈 앞의 것들을 보고 불나방처럼 달려가면서 살아갑니다. 내 눈에, 사람들의 눈에 좋아보이는 길, 에덴 동산같아 보이는 저 소돔과 고모라의 길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가라하시는 길, 예수님께서 먼저 걸어 발자국을 남겨두신 길을 선택해야 합니다.
at the WHEEL, in the WILL
하나님 앞에서, 그리스도(말씀) 안에서
은혜 앞에서, 은혜 안에서
우리는 선택하고 결단하고 응답하며 사는 것입니다. 어쩔수 없었다고 말해야 한다면, 하나님 앞에 어쩔 수 없었다고 말하지 말고, 사람들 앞에 어쩔 수 없었다고 말씀하시자구요. 하나님 앞에 구구절절 이것탓 저것탓 변명하지 말고, 사람들 앞에 이것이 내가 붙든 소명이요, 목숨을 걸고 좇아온 하나님의 뜻이었노라고 말씀하시자구요. 여호람의 모습을 더욱 교훈삼고, 내게 주어진 여러 선택지 중에 늘 우리 하나님이 사랑하시어 살 수 있고 새로워질 수 있도록 기회로 열어주신 길을 걷는 주의 종들 우리 모두가 되시길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그래요. 세상이 변하고, 웰빙의 시대를 지나 우리는 웰다잉을 이야기하는 시대를 맞았습니다. 잘 사는 것 못지 않게 잘 죽는 것이 중요하다는 것을 세상도 알기 시작했습니다. 웰다잉을 하려면 준비를 잘해야 합니다. 어떤 준비, 예, 하나님을 잘 믿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보내신 예수님을 잘 믿는 것입니다. 그렇게 우리 인생의 경주를 아름답게 채워가는 것입니다.
세상은 누군가의 업적과 공로만 이야기합니다. 어떻게 살았다는 것이지요. 그러나 성경은 인생의 마지막인 죽음을 꼭 기록합니다. 그 이유는 죽음 다음의 세상이 있기 때문이지요. 아름다운 죽음을 맞은 사람은 하나님의 나라에서 눈을 뜨고 영생을 누릴 것입니다. 그러나 고통스럽고 추한 죽음을 맞은 사람은 예외없이 이땅에서보다 더 고통스러운 곳에서 영벌을 받게 되는 것이지요. 그러니 어떤 죽음을 맞느냐가 참으로 중요한 일입니다. 성경이 왜 그렇게 사람들이 어떻게 죽었는지를 이야기하는 지를 잊지 말아야 합니다. 오늘 본문의 제목으로 삼은, 여호람의 죽음, 아무도 아끼는 이가 없었다는 것, 하나님마저도 그를 아끼지 않으셨다는 뜻입니다. 세상은 우리를 아끼지 않아도 하나님이 그 죽음을 귀히 보시고 여겨주시면 문제가 없는데, 오늘 여호람은, 아무도 유감을 표명하지 않고, 아무도 아쉬워하지 않는 죽음, 그러니 아무도 기억하지 않는 죽음이었습니다. 크신 하나님께서도 말이지요.
어찌보면 짧은 시간이지만 세상의 기준으로는 영화를 누린 사람입니다. 왕이었고, 모든 사람을 자기 발 아래 두었습니다. 그렇게 자신의 권력을 공고히 하려고 동생들과 사돈들까지 죽였지만, 그의 인생은 마지막까지 결코 행복하지 않았습니다. 가장 외롭고 비참하게 생을 마감한 불쌍한 이였습니다.
그래요. 하나님께서 기억하시고 아끼시는 죽음이 있습니다. 바로 성도의 죽음이지요? 요한계시록이 이렇게 기록합니다. “주안에서 죽는 자들은 복이 있도다”(계14:13). 이들은 예수님을 믿고 인내하면서 하나님의 계명을 지킨 사람들입니다. 비록 이 땅에서는 아끼는 이가 없었을지언정, 하나님께서는 아끼시는 생애입니다. 그래서 후대하시고 눈물을 닦으시고 영원한 영광에 거하게 하시는 생애입니다.
그래요. 우리 성도들의 삶을. 그 고귀한 시간들을 어쩌면 세상이 기억하지 못할지 모릅니다. 아닌게 아니라 성도의 삶은 대부분 세상이 주목할만한 일들을 행하며 사는 것이 아닌 경우가 많기 때문이지요. 하나님 나라를 위해서 다 나누고 베풀고 소진하고 살았기 때문입니다. 일용할 양식만 가지고 구제하고 선교하며 살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성경은 이들이야말로 복되다고 이야기를 합니다. 왜요?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지시기 전, 제자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너희는 마음에 근심하지 말라 하나님을 믿으니 또 나를 믿으라 내 아버지 집에 거할 곳이 많도다 그렇지 않으면 너희에게 일렀으리라 내가 너희를 위하여 거처를 예비하러 가노니 가서 너희를 위하여 거처를 예비하면 내가 다시 와서 너희를 내게로 영접하여 나 있는 곳에 너희도 있게 하리라”(요14:1-3)
그래요. 우리는 비록 이땅에서 여호람처럼 내 맘대로 군림하는 왕으로 살지는 못할 것이지만, 하나님 나라에서 만큼은 주님과 함께 왕노릇하면서 주와 함께 다스리는 삶을 살게 될 것입니다. 그러하기에 우리가 더욱 복있는 삶입니다. 이 땅에서는 비록 짧은 삶을 살더라도, 하나님 나라에서는 영원한 삶을 살 것이기에 복이 있습니다. 그래서 성도는 이 땅의 부귀와 권세를 부러워하지 않습니다. 우리의 죽음 마저도 귀하게 보시고 복을 주실, 하나님을 더욱 기억하면서, 더욱 우리의 죽음이 복된 죽음이 되도록 하나님께 인정받는 삶을 이어가야 하겠습니다.
그래요. 여전히 많은 이들이 살기위해 사는 것을 위해 많은 준비와 수고를 합니다. 집도 준비하고, 음식도 준비하고 옷도 준비하고 돈도 준비합니다. 노후를 미리미리 잘 준비합니다. 근데 그 노후후, 노후 다음, 죽는 것을 미리 준비하는 사람이 드뭅니다. 영정사진을 찍어두고, 상조서비스를 미리 준비해 두었느냐는 이야기가 아닙니다. 그것은 죽을 준비가 아니고 그저 장례식 준비입니다.
하나님 나라에서 영원히 살 준비를 하는 것이 죽음에 대한 준비입니다. 천국에 가서 부를 찬송가 연습많이 해두시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만나 올려드릴 고백들을 준비하고, 하나님 나라에서 누릴 보물을 부지런히 쌓아가는 것입니다. 예전 부흥강사님들 말씀하시던 개털 면류관은 혹시 없을지 모르지만, 내가 하늘에 쌓아둔 상급은 각각 다를 것입니다. 다시 오실 우리 주님을 맞을 준비, 언제 오셔서 깨끗하고 순결하게 믿음으로 서 있으실 준비를 오늘부터 더욱 부지런히 해 나가시는 우리 모두가 되시길 구주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기도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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