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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맑스세미나] 콜론타이 강독(4차시)
콜론타이⋅레닌 『여성문제의 사회적 기초⋅세계 여성의 날』
2024.10.24(목)
발제자 명혜영
[1921년 세계 여성노동자의 날-블라디미르 일리치 레닌](pp.117~122)
볼셰비키 이념과 러시아 10월 혁명의 핵심: 자본주의적 억압에서 노동자와 특히 여성을 해방
1. 자본주의 비판: 자본주의 체제에서 노동자, 특히 여성 노동자와 농민은 이중으로 억압당하며, 부르주아 민주주의조차 이 불평등을 해결하지 못한다. 자본주의에서 사적 소유가 유지되는 한, 착취와 억압은 불가피하다는 점을 강조한다.
2. 소비에트 혁명의 본질: 소비에트 권력은 토지와 공장에 대한 사적 소유를 폐지하고, 국가 권력을 노동자에게 집중시킴으로써 대중이 직접 새로운 사회를 건설하는 데 참여하게 만든다. 이는 대중이 자본주의의 속박에서 벗어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라는 점을 강조한다.
3. 여성 억압 문제: 자본주의 아래 여성은 가정과 사회에서 이중으로 억압받는다. 여성은 경제적 착취 외에도 가정 내에서 "가정 노예"로서의 역할에 묶여 있으며, 부르주아 민주주의조차 이 불평등을 해결하지 못한다.
4. 소비에트 혁명과 여성 해방: 소비에트 러시아는 남성과 여성 사이의 법적 불평등을 완전히 철폐했다. 특히 결혼, 가족, 자녀 문제에서의 불평등을 제거함으로써 여성 해방의 첫걸음을 내디뎠다고 주장한다. 이는 기존의 어떤 민주주의 국가도 시도하지 못한 진전이다.
결론적으로, 볼셰비키 혁명은 경제적, 사회적 억압을 동시에 해결하며 특히 여성 해방에 중점을 둔 역사적 사건으로 묘사된다.
여성 해방을 위한 사회적, 경제적 변혁의 필요성: 특히 토지와 공장에 대한 사적 소유 폐지가 여성의 완전한 해방을 위한 핵심 단계임을 강조
1. 사적 소유 폐지와 여성 해방: 여성의 가정 속박을 해방하기 위해서는 소소한 개인 가사 노동을 사회화된 서비스로 대체하는 것이 필요하다. 이를 위해서는 토지와 공장의 사적 소유권을 폐지하여 경제적 기반을 변혁해야 한다. 이는 여성 해방의 문을 열 수 있는 중요한 전환점으로 제시된다.
2. 변혁의 어려움: 이 과정은 매우 힘들고 오랜 시간에 걸쳐 완성될 수밖에 없다는 점을 강조한다. 기존의 질서와 자본주의적 가치관이 깊게 뿌리내린 상태에서 이를 재구축하는 일은 간단하지 않지만, 혁명적 변화가 이미 시작되었다고 주장한다.
3. 소비에트 러시아의 선도적 역할: 소비에트 러시아는 세계에서 처음으로 이러한 여성 해방과 사회적 변혁의 임무를 시작한 나라로 평가받으며, 이는 전례 없는 도전이다. 세계 여성 노동자들은 이 소비에트 러시아를 지지하고 연대하며, 특히 부르주아 계급의 강력한 저항에 맞서 싸우는 데 정신력을 잃지 말아야 한다는 메시지를 전달한다.
4. 부르주아 반발: 특히 자유롭고 민주적이라는 부르주아 국가들이 자본주의를 방어하며 노동자 혁명에 강력히 저항할 것이라고 경고한다. 미국은 그러한 국가의 대표적인 예로 제시되며, 그곳에서 자본주의자들의 반동적 반응이 강력할 것으로 예상된다.
5. 전 세계적인 노동자 각성: 제국주의 전쟁을 계기로 전 세계적으로 깨어난 노동자 계급이 더 이상 억압에 머물지 않고, 노동 해방을 위한 투쟁을 계속해 나갈 것이라고 주장한다. 이 흐름은 아시아와 같은 뒤처진 지역까지 확산되며, 결국 자본주의의 굴레에서 벗어난 노동 해방이 전 세계적으로 승리할 것이라는 낙관적인 전망을 제시한다.
결론적으로, 이 글은 여성 해방과 노동 해방을 위한 혁명적 변화를 강조하며, 소비에트 러시아가 그 변화를 선도하고 있다고 주장한다.
[콜론타이의 여성의 날, 그리고 레닌](옮긴이 해제, pp.123~143)
알렉산드라 콜론타이(Alexandra Kollontai)는 혁명적 여성 운동가이자 볼셰비키의 중요한 인물로서, 특히 여성 해방과 관련된 많은 오해를 받았으나 그녀의 실질적 공헌은 역사적으로 깊이 자리 잡고 있다. 콜론타이의 삶과 세계 여성의 날과 관련된 그녀의 활동을 연표를 통해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1. 콜론타이의 생애와 업적
1872년: 알렉산드라 콜론타이 출생.
1895년: 사회주의 운동에 뛰어들며 활동을 시작.
1909년: 《여성 문제의 사회적 기초》 출간. 이 저서에서 여성 억압의 사회적 원인을 분석하며 여성 문제를 계급 문제와 연결짓는다.
1910년: 독일의 여성 혁명가 클라라 체트킨과 함께 3월 8일을 '세계 여성의 날'로 정하자는 제안을 한다. 이 제안은 국제 여성 노동자 운동의 상징적인 출발점이 된다.
1913년: 콜론타이는 세계 여성의 날에 대해 글을 발표하고, 성매매에 반대하는 운동을 벌인다. 그녀는 성매매를 노동이 아닌 억압과 착취의 '족쇄'로 본다.
1915년: 볼셰비키에 가입하여 더 적극적으로 활동을 전개.
1917년: 10월 혁명 당시 볼셰비키 중앙위원회의 유일한 여성 위원이 되며, 혁명과 여성 해방에 중요한 역할을 담당.
1920년: 혁명 후 세계 여성의 날에 대한 글을 발표하며, 혁명 이후의 변화된 여성의 지위를 설명.
1922년: 여성 노동자 운동을 마무리하고 외교 분야로 전환.
1923-1952년: 콜론타이는 소련의 외교관으로 활동하며, 세계 최초의 여성 대사로 임명된다.
2. 콜론타이와 레닌, 볼셰비키와의 관계
콜론타이는 종종 볼셰비키 내부에서 레닌과 갈등을 겪은 인물로 알려졌지만, 실제로 그녀가 레닌이나 볼셰비키에 저항한 기간은 짧은 2년 동안의 '노동자 반대파' 활동에 불과하다. 이는 주로 경제 정책과 관련된 내부 분쟁이었으며, 그녀의 전체 경력에서 일시적인 부분에 지나지 않는다. 이러한 단편적인 갈등으로 콜론타이를 평가하는 것은 잘못된 시각이다. 이후 그녀는 여전히 볼셰비키의 중요한 일원으로 활동하며 혁명과 여성 문제에서 큰 역할을 했다.
3. 세계 여성의 날과 혁명의 변화
콜론타이가 1913년과 1920년에 발표한 두 글은 러시아 혁명이 여성의 날의 의미와 위상을 어떻게 변화시켰는지를 잘 보여준다. 1913년 혁명 전에는 여성의 날이 자본주의와 성적 억압에 맞서는 상징적인 저항의 날이었다면, 1920년 혁명 후에는 여성 노동자의 해방과 사회주의적 변혁의 기초가 마련된 기념일로 자리잡았다. 혁명 이후 여성 해방이 제도적으로 실현되었음을 강조하며, 여성의 날은 단순한 저항의 날에서 새로운 사회를 구축하는 기념일로 전환되었다.
4. 오해와 진실
콜론타이에 대한 두 가지 주요 오해는 (1) 그녀가 '성 노동자 운동의 대모'라는 잘못된 평가와 (2) 레닌과 볼셰비키 노선에 대해 끊임없이 반대했다는 인식이다. 첫 번째 오해는 그녀가 성매매를 노동으로 인정하기보다는 착취로 보았다는 점에서 사실과 다르며, 두 번째 오해는 그녀의 반대파 활동이 단기적인 것이었음을 고려할 때 부정확하다.
결론적으로, 알렉산드라 콜론타이는 러시아 혁명과 여성 해방 운동에서 매우 중요한 역할을 한 인물로, 세계 여성의 날을 제안한 주역 중 하나이다. 그녀는 성매매에 반대하며 여성의 해방을 노동 해방과 연관시켜 분석한 이론가이자, 실천적인 활동가로서 독보적인 위치를 차지했다.
레닌이 1921년 3월 4일 발표한 세계 여성의 날에 대한 글과 그가 콜론타이를 바라본 관점은, 당시 러시아 혁명과 여성 해방 운동의 복잡한 정치적 배경 속에서 중요한 맥락을 제공한다.
1. 레닌과 콜론타이의 관계
1917년 이전: 콜론타이는 국제 혁명 운동에 적극적으로 참여하면서 레닌과 함께 러시아 혁명 전선에서 활동했다. 그녀는 클라라 체트킨 등과 함께 국제 여성 운동을 주도했고, 세계 여성의 날 제정을 제안한 인물 중 하나였다. 혁명 전 국제적 활동가로서 콜론타이는 러시아와 유럽 사회주의자들을 연결하는 중요한 역할을 했다. 레닌은 이 점을 높이 평가해 그녀에게 많은 국제적 임무를 맡겼다.
1921년: 콜론타이는 혁명 후 볼셰비키 내부에서 노동자 반대파로 활동하며 경제 정책에 대해 레닌의 노선에 반대했다. 그러나 이는 짧은 기간 동안의 일시적인 갈등이었으며, 이후 콜론타이는 자아비판을 통해 당에 복귀했다. 레닌은 이러한 갈등에도 불구하고 콜론타이의 역량을 인정했고, 그녀를 세계 최초의 여성 대사로 임명했다.
1921년 3월 4일: 레닌은 콜론타이가 제안한 세계 여성의 날에 대한 글을 발표했다. 이 글에서 그는 혁명과 여성 해방의 연관성을 강조하며, 여성의 해방이 사회주의 혁명의 필수적인 부분이라고 보았다. 하지만 동시에 그는 며칠 후 열릴 10차 러시아공산당 전당대회에서 콜론타이가 숙청될 것을 알고 있었다. 이는 레닌에게 복잡한 감정을 불러일으켰을 것이다.
2. 콜론타이의 숙청과 외교 임명
1921년 3월 8일~16일: 10차 러시아공산당 전당대회에서 콜론타이는 노동자 반대파로 활동한 이유로 숙청되었다. 숙청은 단순히 정치적 실각이 아닌, 일종의 자기반성과 재교육 과정을 거치는 단계로 이해할 수 있다. 콜론타이 역시 이 과정을 거친 후 당에 복귀하게 된다.
1922년: 콜론타이는 외교 업무를 맡게 되었고, 이는 소련의 초기 외교 정책에서 중요한 역할을 맡는 계기가 되었다. 콜론타이가 외국과의 교류와 무역을 통해 신생 소련의 경제적 생존을 돕는 일은 매우 중대한 과업이었으며, 이를 통해 그녀는 세계 최초의 여성 대사로 활동하게 되었다. 레닌은 콜론타이를 단순히 국내 정치에서 배제하기 위해 외교로 돌린 것이 아니라, 그녀의 국제적 역량을 인정하고 전략적 임무를 맡긴 것이다.
3. 레닌의 심정과 콜론타이의 공헌
레닌이 콜론타이를 숙청하는 데 있어 개인적인 감정은 복잡했을 것이다. 그는 콜론타이의 역량을 높이 평가했지만, 당내 갈등과 반대파 활동으로 인해 콜론타이를 정치적으로 견제할 필요가 있었다. 그러나 그녀를 완전히 배제하기보다는 외교적 임무를 통해 그 능력을 발휘하게 했다. 이는 레닌이 콜론타이에 대한 존경과 신뢰를 유지했음을 보여준다.
콜론타이는 외교 업무에서 두 차례의 노동 적기 훈장과 레닌 훈장을 수여받으며, 그녀의 공헌을 인정받았다. 그녀는 소련의 외교 정책에 큰 기여를 했을 뿐만 아니라, 노벨 평화상 후보에도 오를 정도로 국제적으로 인정받는 인물이 되었다.
4. 세계 여성의 날과 여성 해방의 의미 변화
레닌이 1921년에 발표한 세계 여성의 날에 대한 글은 여성 해방이 혁명적 사회주의 체제에서 이루어질 수 있음을 강조한 내용이다. 그가 여성의 날을 공휴일로 제정한 1922년에는 여성 해방이 혁명의 중요한 성과로 평가받았고, 콜론타이 같은 여성 혁명가들의 활동이 사회 전반에 긍정적 영향을 미쳤다. 이 시점에서 레닌은 콜론타이를 단순히 숙청된 여성 혁명가로 보는 것이 아니라, 혁명적 과제에서 중요한 동지로 바라보았을 가능성이 크다. 그가 그녀에게 외교적 임무를 맡기고, 세계 여성의 날을 공식적으로 기념하는 국가적 기념일로 제정한 것은 혁명 동지로서 콜론타이의 기여를 존중했음을 보여준다.
결론적으로, 레닌과 콜론타이의 관계는 단순한 정치적 갈등을 넘어, 서로의 능력과 혁명적 신념을 인정한 동지적 관계였다. 레닌은 콜론타이가 세계 여성의 날을 제안한 것을 기념하며 여성 해방의 중요성을 재확인했고, 콜론타이는 외교 업무에서 뛰어난 성과를 남기며 자신의 역량을 입증했다. 이 모든 맥락을 통해 레닌의 세계 여성의 날에 대한 글을 읽을 때, 그의 혁명 동지인 콜론타이에 대한 존중과 혁명적 과제에 대한 진지한 고민을 엿볼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