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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종교란 무엇인가 (일송윤덕선선생추모사업위원회 p323-334)
“신은 죽었다.”는 니체가 한 말이다. 그는 초월신(超越神)에 대한 믿음은 무의미하다는 뜻으로 이렇게 말했고, 종교는 이제 시대에 뒤떨어진 것이라고 했다.
고도의 기술과 과학의 시대에 종교에 대해 이야기함은 난센스라고 하는 사람이 많다. 또 과학적 세계관에서는 풀 수 없는 수수께끼란 없다고도 하지만, 과학으로 모든 것이 투명화한 이 시대에도 종교의 대체물(代替物)을 발견하지 못하고 많은 사람들이 종교를 찾고 있다. 하이데거는 “오직 신만이 우리를 구원할 수 있다고 하였다. 사실 과학이 발달할수록 종교는 더 기세를 부리고 있다. 마치 주유소와 교회당이 늘어만 가고 있듯이 말이다. 사람들은 이 시대에도 기도를 올릴 수 있는 신, 제단을 꾸며 제사를 드릴 수 있는 신을 원하고 있다.
종교는 인류 역사만큼 오래 된 인류의 문화 현상이라고 한다. 종교는 절대적이고 궁극적인 가치 체계를 말한다. Religion' 이라는 말은 Religio, 즉 초자연에 대한 의경의 감정과 그것을 표현하는 의식 등의 행위를 말한다. 알기 쉽게 말하면 종교는 신이나 부처 등을 뜻한다고 해도 무방하다. 인간 이상의 초월적 현상에 대한 믿음의 발로로 종교가 되었다고 해도 된다.
인류는 원시시대부터 초자연에 대한 신앙을 가져왔다. 천둥·번개와 지진·태풍을 신의 진노라 믿어 왔고, 그것이 전기 현상이라고 현대 과학이 증명하면서도 그 전기 현상의 행위자인 신의 존재를 믿고 있음은 원시 때나 과학의 현 시대나 다름이 없다. 공산 소비에트에서 탈출 망명한 솔제니친(Solzhenitsyn)은 “현대의 비극은 우리 모두가 신을 망각한 데에서 비롯된다.”고 하였다. 종교는 신(神)을 믿는 것이고, ‘신’은 인간 세계를 초월한 초자연자나 초월자를 가리킨다.
종교에는 크게 나누어 세 형태가 있다. 즉 기도하고 기복하는 마음, 진리를 탐구하는 구도(求道)의 마음, 그리고 현재의 사회 조건에 불만을 가지고, 변혁하려는 (미륵 사상 같은) 행위 등을 들 수 있다.
기도하는 마음은 종교인만이 가지는 것은 아니다. 초자연이나 초인간의 존재를 꼭 믿고 안 믿고가 아니다. 우리는 자주 또는 항상 누군가에게 우리의 소원을 간청한다. 내가 약해져서 더 큰 용기가 필요할 때 나에게 힘을 달라고 기도한다. 누군가 나에게 힘을 줄 수 있는 분이 있다고 믿기에 기도하는 마음, 그것이 곧 종교의 시작이다. 나를 위하기보다 남을 위해, 나라를 위해, 내가 사랑하는 사람들을 위해 기도하며, 이러한 숭고한 마음가짐은 기복의 차원보다 더 큰 변혁의 차원에서도 이루어질 수 있다. 내가 정성들여 기도하는 마음을 가지면, 그 소원은 이루어지게 마련이다. 지성이면 감천이라는 말은 기도하는 간절한 마음을 가지면 그 소원이 이루어진다는 뜻이다. 즉 지성이면 감천이라는 말은 기도하는 간절한 소원이며, 그것이 그렇게 간절하니만큼 자신의 최선을 다하기 때문에 그 소원은 이루어지게 마련인 것이다. 그렇게 해서 변혁을 가져올 수도 있다.
조선 민족은 원래가 종교성이 강한 민족이다. 농경 생활을 하면서 천재지변은 물론이지만 땅 · 물 , 나무, 모든 것이 인간의 능력 밖에서 이루어졌다. 이러한 것들은 인간에게 밀접한 영향을 주는 것들이어서 그들은 거기에서 초월적 존재를 발견하고숭상하는 습관이 생겼다.
이와 같은 여건에서 발생한 원시 신앙이 무속 신앙이다. 무속이란 무당을 중심으로 하여 전승되는 종교적 현상이다. 무속 신앙은 샤머니즘(shamanism)이다. 샤먼(shaman)이란 저승과 교신하고 병자를 치료하는 무당을 뜻한다. 이러한 사머니즘은 시베리아 · 우랄 알타이 · 동북 아시아 - 아메리카 북부 지방에 뿌리를 내리고 있었고, 지금도 그 종교적 경향은 크다. 무당은 소망을 비는 신앙의 신으로 삼신 · 천신 · 칠성신 · 용신 등의 자연신이나 장군신, 왕신 등을 모시고 있다. 한반도 중북부 지방에서는 박수류에 속하는 강신무가 주이며, 남부에서는 단골신 · 심방신 방계로 선무당 등 세습무(世襲巫)가 많이 유행하고 있다.
우리나라의 개국 신화 · 시조 신앙 · 설화 등이 모두 무속 신화에 속하며, 단군 · 혁거세 등이 그 실례이다. 개국 초기에는 무속과 왕은 동일하였으나, 삼국시대에 중국으로부터 불교가 도입되어 무속과 서로 타협하게 되었고, 시대가 지나면서 우리나라 가족제도와 유교의 충효 사상이 서로 작용하여 정치와 종교의 분리가 주장되었다. 무속은 점복술 · 의무(醫巫) · 용 신앙 등으로 변천되기도 한다.
이러한 우리나라의 무속 신앙은 1세기 초에 있었다는 기록이 남아 있고 4세기 후반에 처음으로 불교가 우리나라에 전래되면서 무속 신앙과 마주치게 된다. 무속은 사람과 신의 결혼인 단군 신화를 낳게 했고 노래와 춤으로 신령과 교체해서 인생 문제를 해결하려고 했다.
내가 옛날에 잘 아는 정 모라는 요정 마담이 있었다. 하루는 그 요정에 갔더니, 정 마담이 무당 내렸다고 하며 신(神)을 차려놓고 점을 치고 있다는 말을 들은 적이 있다. 한 10년 세월이 흘렀는데, 비서실로 정 모 마담이라고 하며 자꾸 면회를 오겠다는 것이다. 언제 찾아오라고 했더니, 하루는 그 사람이 찾아왔다. 퍽 오래간만이지만 하나도 변한 것이 없었다. 명함을 보니 마포구 합정동에 있는 무슨 회사 검사역이라고 씌어 있다. 어떻게 왔느냐고 했더니, 그냥 보고 싶어 왔다면서 그 이유를 말하지 않는다. 내가 듣기에 무당 내렸다고 들었는데 어떻게 된 거냐고 했더니, “그런 소리 다 들으셨군요.” 하면서 다음처럼 말한다.
어느 날 갑자기 신이 와서 성화를 한다. 아무리 벗어나려 해도 벗어날 수 가 없어서 수녀원도 찾아가 보았고 절에도 가서 한두 달간 살아보았지만, 도저히 헤어날 수가 없었다. 고생 고생하다 모든 것을 단념하고 찾아오는 신을 받아들이기로 했다. 지금은 부천에 있는 아파트 방 한구석에 신주를 모시고 사는데, 어디서 들었는지 손님들이 찾아오고 있다. 신방에 들어가 기도하면 신이 다 말해 준다. 이 사람은 왜 왔고 어떻게 해주라고 신이 시키는 대로 말해 주면, 손님들은 기가 막혀 하면서 돈을 놓고 간다. 아마 올 때는 한 오만원 놓고 갈 생각으로 왔다가 십만 원, 이십만 원 놓고 간다. 하루에 세 사람만 만나도 밥 먹고 애들 학교 보내는 데는 지장이 없다.
이 여자 말이 “선생님, 이상하게 생각하지 마세요, 아주 확실한 것은 신이 있다는 거예요.” 란다. 고등학교 다니는 애가 둘 있고 남편은 없는데, 애들이 엄마 뭘 하느냐고 물어보면 무당이라고 대답하기 힘들어 애들 아버지 친구가 하는 회사에 이름만 붙여 달라고 했다고 한다. “사실 오늘 선생님 찾아 온것은 그 신이 하도 선생님 찾아보라고 해서요. 이제는 됐습니다.” 라며 인사하고 돌아간 일이 있다.(2편에계속)
*2 종교란 무엇인가 (일송윤덕선선생추모사업위원회 p323-334)
샤머니즘과 종교와의 관계는 그리 간단하고 쉽게 풀이될 수 있는 문제는 아니다. 그러나 누가 말했듯이 안다는 것은 아무것도 모른다는 것이라고 하지만, 무속과 종교는 깊은 뜻이 있다고 하면 나보고 아무것도 모르는 소리를 한다고 하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오랫동안 종교 경험의 내용이 서구 위주의 주관적 성격을 가지고 있어서 종교 연구의 객관성을 유지하기란 불가능한 것으로 종교학에서는 믿어 왔다. 그러다가 18세기 이후 유럽의 지성 사회에 중근동(中近東)과 동양 문화가 소개되면서 모든 종교는 객관적 입장에서 비교 연구해야 한다고 생각하게 되었고, 무속 신앙도 종교 범주 내에서 다루게 되었다. 신비주의라는 것이 있다. 가톨릭에서는 먼저 신앙과 신비주의 교리에 심취한 후 그 교리와 자신의 삶으로부터 개인적 경험을 가지게 되는 사람을 신비주의자라고 한다. 신비주의(misticismo)는 신(Dios)과의 친밀한 합일(合一)을 열망하는 것이며, 완전하게 절대적 신의 세계에 이르는 길을 말한다. 이들의 최후 목적인 신과의 정신적 합일인 환희의 순간까지는 세 단계의 과정을 거쳐야 한다.
첫째, 금욕의 단계(Via Purgativa) : 외부 세계를 차단하고 모든 느낌과 감정을 전부 씻어 버려 현재의 삶에 얽힌 일체를 벗어 던지고 자아를 비워야 한다. 둘째, 계시의 단계(Via illuminativa) : 이전의 속박에서 벗어난 영혼은 신(Espiri yus santo)을 향유하게 되고 신의 존재를 환희로 받아들이게 된다. 셋째, 합일의 단계(Via Unitiva) : 신을 명상하는 차원이다. 신과의 내적 합일을 이루어 육체와 영혼이 완전히 분리되는 것을 인식하는 동시에 영혼과 신이 접촉하는 감격적 순간을 맛보게 된다.
기도를 통해서 신비의 경험을 하게 되는데, 하느님이 우리 내부에 있게 되고 자신은 그의 포로가 되는 것이다. 육신의 느낌으로써가 아니라 영혼으로써 이루어지는 것이라고 신비주의자 소화 데레사(1873 ~ 1897)는 말한다. 여기서 나는 죽지 않음으로써 죽는다는 말이 나오게 된다. 그리스도도 많은 초월적 행동, 다시 말해서 기적을 이루었다. 눈먼 소경의 눈을 뜨게 했고, 하혈하는 여인의 병을 낳게 했고, 또 제자들이 보는 앞에서 바다를 걸어왔다. 제자들이 같은 흉내를 내다가 물에 빠졌을 때 신앙이 모자란다고 했다. 참된 신앙과 굳은 믿음은 무엇이든 성취시킬 수 있다. 신앙의 힘은 사실 한없이 크다. 사람의 힘이나 오관은 헛됨이 많다. 눈으로 볼 때 확실히 거의 잉크색 같은 바닷물이 그릇에 떠 보면 무색일 때를 우리는 경험한다. 이렇게 사람의 눈은 헛된 것이다. 보고도 보지 못함이 판단의 기준이 결코 될 수 없음을 우리는 자주 경험한다. 여기서 종교는 신앙의 눈으로 볼 것을 요구한다.
현대 종교는 크게 셋으로 구분할 수 있다. 그 첫째가 기독교나 이슬람 종교이다. 이들은 다 하느님(초월적 신)의 계시를 받아 중생에게 계명을 지시한다. 그 계명의 주요 골자는 절대신을 굳게 믿고 남을 사랑하는 신에 대한 절대 복종을 요구한다. 모든 가치관은 신의 계시에 따르며, 신에 대한 절대 신앙은 죽음을 이길 수 있고, 영생과 천국을 약속한다고 한다. 예수 그리스도는 신앙의 극치이기에 신의 아들이 되었고, 십자가에서 죽었으나 3일만에 다시 살아났다가 40일 만에 하늘로 올림을 받았다. 그러나 그의 신령은 항상 우리와 함께 있다고 한다. 이처럼 기독교나 이슬람교는 신의 계시로써 이루어지는 종교이며, 그 계시가 삶의 전부라 할 수 있다.
둘째로 불교 신앙이다. 불교는 하늘의 계시로 이루어진 것이 아니고 깨달음의 종교이다. 다시 말해 구도로써 이루어진 종교이다. 싯달타는 왕궁을 벗어나 온갖 고행과 사색하기를 5년, 드디어 깨달음(大覺)으로 붓다가 된다. 인간의 생사 · 애증·병고, 이 모든 것은 환영(幻影)에 지나지 않으며, 깨달음끝에 그는 중생에 대한 고난을 건지려는 대자비를 찾았다. 그의 구도는 드디어 생사를 초월한 해탈에 이른 것이다.
셋째로 유교(儒敎)이다. 유교는 나의 도덕적 양심의 명령을 초월자에게서 구하지 않는다. 이는 어디까지나 인(人)의 사이(間)에서 성립되는 윤리관이기 때문에, 나의 실존(實存)에 내재하는 본성(本性)에서 구한다. 그 본성은 초자연적 실재에서 찾으려 하지 않고, 그 자체가 자연적 절대자이며 궁극이라고 주장한다. 즉 인간 세상의 도덕은 야훼의 계명으로 유지되는 것이 아니라 나의 실존에 내재하는 본연지성(本然之性)에 의해 발현되는 것이다. 그 발현을 끊임없이 가능케 하고 그것의 발현에 장애를 일으키는 요소들을 끊임없이 제거하는 직업이 이루어져야 하는데, 이러한 인간 스스로가 담당할 작업은 시간과 공간이라는 인간세의 역사 속에서 이루어질 수밖에 없다고 믿어 왔다.
동양 사람은 예로부터 하늘에 계신 하느님을 믿지 않았고 역사라는 신을 믿어 왔으며, 인간의 가치는 절대자와의 관계에서 일시적인 결단에 의함이 아니라 지속적 체험의 축적 속에서 그 윤곽이 나타나고 있다고 믿어 왔다. 이것이 성리학(性理學)의 근본이며, 거기서 기(氣)의 철학이 자리잡게 된 것이다. 기철학은 성리학에서 완성된다.
인간은 존재이다. 인간은 인식이다. 인간은 존재할 때 우주 만상이 같이 존재하고, 인간이 살아서 인식하기에 우주의 섭리가 인식된다. 그래서 인간은 소우주(小宇宙)라고 하면서 대우주(大宇宙)의 생명(生命)이 곧 인간 안에서 운영되고 있다고 주장한다. 인간이 인식하고 존재하는 한에서 우주의 섭리도 있지만, 인간이 죽으면 그 인간에게는 아무것도 없다. 그러기에 인간 안에서 우주의 섭리가 살아 있다고 주장한다. 이 우주의 운명에는 기(氣)가 있어서 기에 의해 인간의 우주와 대우주가 호흡을 같이하고 있다고 한다. 그런데 사람은 이 우주의 섭리를 무시하고 파괴하면서 발전했다고 주장하지만, 사실 발전한 것은 아무것도 없다. 첨단 과학도 인공 위성도 그 우주 운명 안에 있는 것들이며, 그 이상의 비상도 변화도 가져오지 못한다.
우주는 그저 영원하고, 소우주는 그 대우주의 운명 속에서 같이 살고 죽는 우주의 운명에 끼어들고 있을 뿐이다. 우주를 정복했다느니 현대 과학이 천문을 해독했다느니 따위의 생각은 아주 경박한 것이라고 주장한다. 부연이 길어졌지만, 이와 같은 것이 동양 철학인 유교의 개략이라고 할 수 있겠다.
기독교에서는 예수의 부활을 강조한다. 예수는 십자가에 못 박혀 운명하고 사흘 만에 다시 부활해 40일 만에 승천했다고 한다. 불교에서는 사람이 죽으면 그 혼이 49일을 떠돌아다니며 중음(中陰)을 가다가 다음 생(生)의 인연을 찾아 다른 ‘생’ 을 맞이하게 된다고 했다. 이러한 종교의 설득은 삶의 불멸이나 영원성을 말한다. 초목이 싹트고 꽃피우고 열매맺고 시들어 죽었다가, 다시 봄이 되면 거기서 싹이 나고 새 삶을 계속한다. 인간도 태아가 자라서 어른이 되고 자식 낳고 살다가 죽지만, 그의 삶은 그의 정신과 자식들을 통해서 반복된다. 죽음은 삶의 한 과정이요, 연속이다. 죽음은 산다는 말이다. 삶은 영원하다. 죽음은 결코 삶이 없어지는 것이 아니라 삶의 또 다른 부활로 영원히 계속된다는 뜻이다. 그래서 삶은 소중하다는 것을 종교는 가르치고 있다.
초인간적 또는 초자연적 어떤 힘의 존재는 우주의 모든 현상에 비추어 볼때 누구도 부인하지는 않는다. 이 초자연의 힘을 신(神)이라 불러도 된다. 사람이 소우주(小宇宙)로서 대우주의 섭리 속에 있는 것처럼 신(초자연의 힘) 안에서 살고 있기 때문에, 그 신을 이해하고 같이 살기 위해 인간은 신과 가까워야 하고 마치 아버지처럼 대해야 한다. 그래서 신(하느님)은 사람의 모습을 하고 있다고 한다. 그러나 현대 종교는 신을 미끼로 자기의 도그마 dogma)를 팔아먹는 신앙의 매매 행위에 빠져서는 안된다.
(3편에계속)
* 3 종교란 무엇인가 (일송윤덕선선생추모사업위원회 p323-334)
신은 우리와 함께 있다. 그러나 그가 사람의 모습을 하고 있다면, 그는 남자인가, 여자인가? 그는 신으로서 사람의 모습을 하고 있지만 노사(老死) · 병사가 없다고 하면서 무조건 믿어라, 믿음이 약한 자가 되지 말라고 강요할 수는 없다. 예수는 신의 아들이어서 죽어서 사흘 만에 부활하고 40일 만에 승천하여 하느님 오른편에 앉아 인간을 다스린다고 하는 것과 같은 종교의 모습은 이제 바뀌어야 한다. 예수가 하늘로 날아간다면, 하느님은 하늘에 있다는 말인가? 있다 없다. 존재의 개념조차 뛰어넘은 신의 존재를 우리는 알고 있으니, 현재와 같은 차원에서 종교의 신앙을 주창하지 말라. 21세기에는 새로운 탈바꿈을 해야 할 것이다. 신의 섭리, 우주의 제어, 규범, 규칙, 리듬, 하모니 등의 신의 섭리 안에서의 가치관 · 우주관을 찾아야 할 때이다.
세상이 혼란해지면서 문화가 정착하지 못하고 국민이 방황하게 되니, 새로운 세상을 살아가려는 많은 사람들 특히 젊은 층에 불신 풍조가 팽배하고, 사람과 사람 사이에 믿음이 없어지고, 가치관이 허물어졌다. 이러한 세태에서 여러 가지 허황된 신흥 종교가 창궐해서 사람들을 바람직하지 못한 곳으로 끌어가며 사회 혼란을 가중시키는 근래의 정신 문화의 빈곤을 볼 때, 종교는 절대적 책임을 지고 인류의 갈 길과 가는 방법을 명시해야 할 때이다. 지금까지 종교는 초자연적 힘을 의인화(擬人化)하며 여러 가지 신앙을 전파해 왔다. 그러나 종교가 찾는 목표에는 변화가 있을 수 없지만, 지금까지의 예수 승천이나 불교의 윤회(輪廻) 신앙 같은 것은 깊은 성찰과 음미를 거쳐 과감하게 개혁해야 할 것이다. 종교의 뿌리가 너무 깊게 인류 사회에 자리잡고 있기 때문에, 어떤 사상적 개혁을 거론함은 종교로부터 탄핵받을 소지가 있어 어느 누구도 입 밖에 내려 하지를 못했다. 그러나 대우주의 영원 불멸의 삶이란 신의 존재를 현세의 유기적 믿음으로 설명하려 할 것이 아니라, 우주의 대자연과 인간의 영원불멸성을 다스리는 초자연적 힘 즉 신 안에서 우리 인간을 인식하고 거기서 신에게 기도하며, 신 안에 사는 인간들이 서로 사랑하고 아끼는 삶의 가치관이 명시되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한때 휴거라는 허황된 신앙이 전파되어 많은 사람들에게 엄청난 정신적·물질적 피해를 준 일이 있다. 모월 모시에 선택된 신자들은 하늘에 끌어 올려져 천년 만복(千年萬福)을 받게 되고, 천년 후 예수그리스도가 내려와서 만민을 심판하여 휴거되지 못한 사람들이 지옥의 고통을 받는다는 주장이다. 얼마나 지금 사회가 정신적으로 빈곤하면 이러한 허황된 시한부 종말론을 주장하는 교단의 맹신자가 우리나라에만 10여만 명이나 될까 하는 사실에 적어도 종교에 몸을 둔 사람으로서 깊은 관심을 가져야 할 일이다.
이 종말론은 다니엘서 · 요한묵시록 · 데살로니아전서(15장 51절) 등에 근거한다고 하며, 소년 선지자가 하느님의 계시를 받고 나타나 어린 종으로서 만민을 지도한다고 하는 데 근거하고 있다. 미국에서도 한때 짐 존스가 이와 유사한 종교로 930명의 집단 자살을 가져온 일도 있다. 예언서나 묵시록을 해석하는 데는 그들이 세워진 2천~4천 년 전 시대 상황, 그 당시의 역사 상황 · 풍습 등이 고려되고 해석되어야 하는데, 이를 현대에 그대로 적응해서 시한부 종말을 예언하는 어리석음이 일어나는 사태에서 현대 정신 문명의 빈곤이 얼마나 극에 달했는가를 알 수 있다.
아무것도 믿을 수 없는 세상이기에 아무거나 믿는 세태가 되어서는 안된다. 진실은 변할 수 있어도, 진리는 변하지 않는다. 진리란 관념적 사념(思念)이고, 진실은 육감(感)과 더불어 느끼는 것이다. 사랑한다 미워한다, 있다 없다, 간다 온다는 다 진실이며, 육감으로 느낄 수 있다. 진리는 진실보다 한 차원 높은 사상이다. 폭 넓은 사랑의 진리란 인간적 매력, 성적 매력, 이성간의 매력으로 사랑하는 것이 아니고, 내 나라를 사랑할 때에도 이 국토를 이국민을 이 정부를 사랑한다가 아니라 전체적인 포괄적 내 나라를 사랑한다는 것이다. 내 자식을 사랑하기 때문에 추운 곳에 헐벗고 나가게 하지 않는다는 것은 진실은 될지언정 진리는 아니다. 사랑하기 때문에 추운 곳에 내보낼 수도 있고 안 내보낼 수도 있다는 것을 초월한 것이 진리이다.
종교는 천국이나 극락으로 가는 길을 가르치는 것이다. 그 천국은 오직 천국이요, 극락이다. 천국에는 춥지도 덥지도 않고 온갖 먹을 것이 다 있고, 지옥은 뜨겁고 기름 가마나 불타고 있는 곳이라고 가르치는 것이 종교는 결코 아니다. 불변의 진리를 가르치는 것이 교회이며, 진리를 터득할 때 우리 인간은 해방이 되며 거기서 영생의 길을 찾을 수 있다. 이 혼돈된 세상에 진리의 빛을 주라. 그것이 종교이다.
종교는 한 나라의 흥망에 깊이 관여해 왔다. 신라와 고려에서는 불교가 그러했고, 조선 후기의 유교가 교조적으로 퇴락함은 입만 앞세운 선비 정신의 나약과 더불어 조선 왕조의 쇠락을 가져왔다. 러시아에서는 국민들이 그렇게 굳게 믿어 왔던 기독교의 부패 때문에 볼셰비키 혁명을 초래했고, 중동 지역의 끊임없는 분쟁도 종교 때문이다. 인도 - 파키스탄 · 방글라데시가 종교에서 벗어나지 않는 한 빈곤에서 헤어나지 못할 것이라고 한다. 이처럼 종교는 여러 가지 사물에 대한 옳고 그름과 착하고 악함을 판가름하는 기준인 가치관을 인간에게 심어 주는 역할을 한다. 그만큼 종교는 사회에 여러 가지 건설적인 기초적 기여를 한다.그러나 그 세력이 커져서 국가나 사회가 마치 종교를 위해서 있는 것처럼 될 때, 그 나라는 멸망하고 만다. 이러한 종교의 부패는 설득력없는 신앙을 신자들에게 강요한다. 그러면서 교회 지도자들은 물질적 가치에 눈이 어두워 진리의 전파보다 더 크고 더 웅장해 보이려는 욕망에서 화려하고 웅장한 교회나 사원을 짓는 데에만 열중하게 된다. 그렇게 하여 그들은 더 큰 권력을 탐하게 되고, 종교의 타락을 초래하고 만다. 지금 우리 사회에는 교회가 우후죽순으로 세워지고 있다. 그 많은 교회나 사원이 진심으로 진리의 전파를 위함인가를 모든 종교인은 깊이 반성해야 할 것이다.
종교에서는 믿음이 그 기초이다. 그러나 종교에서의 신에 대한 믿음만이 믿음이 아니다. 사람과 사람 사이의 믿음, 남편과 아내 사이의 믿음, 부모 형제간의 믿음, 친구간의 믿음, 국가와 국민 사이의 믿음, 사랑하는 사람끼리의 믿음 등 인간 만사도 믿음에서 시작되고, 그 믿음의 시초는 신에 대한 믿음에서 시작된다. 나는 집에서 개를 기르고 있다. 매일 아침 일어나면 뜰에 나가 개 우리에 가서 개를 쓰다듬어 준다. 날마다 되풀이하는 동안 개는 나를 믿게 되었다. 어느 날 개가 개집에서 뛰어나왔다. 식구들이 아무리 잡으려 해도 잡을 수가 없었다. 그러다가 내가 나가서 오라고 했더니, 그 개는 당장 쫓아와 기대고 비빈다. 쉽게 붙들어 개집에 집어넣을 수 있었다. 믿음인 것이다.
그 개의 믿음을 보면서 자연에 대한 믿음과 신에 대한 믿음을 생각해 보았다. 돈을 꾸어 주었더니 갚겠다고 약속을 하고는 갚지를 않으니 믿을 수가 없다고 한다. 돈은 결코 꾸어 주는 것이 아니라 남이 꾸어야 할 정도로 궁했으면 그냥 주는 것이다. 받을 것으로 기대했기 때문에 속았다느니 믿음을 제버렸다느니 한다. 나는 남에게 돈을 꾸어 줄 때 언제 갚겠냐고 물어 보지 않는다. 백 번 속아도 좋다. 인간사 무엇이 그리 대단한 것이라고 못 믿고 살 것인가. 그러다 한 번이라도 속지 않을 때, 나는 무척 흐뭇해진다. 백번 속아도 무방하다고 생각하며 항상 믿고 살 때, 우리는 하느님을 믿을 수 있게 된다.
나의 집은 5대조부터 천주교 집안이어서 나 또한 태아 때부터 천주교 신자이다. 나의 부모님은 그렇게 독실한 신자일 수가 없었다. 기도 생활로 일생을 보낸 분들이며, 그들은 무조건 믿는다. 성경 말씀 · 기도책 · 성가책을 마음으로부터 믿으며 살아오신 분들이다. 그들은 나같이 따지고 생각하고가 없다. 나는 이러한 부모님 밑에서 살았기 때문에, 종교는 나의 일부 또는 나의 생활의 일부이다.
나는 항상 기도하고 항상 사랑하려고 노력한다. 만일 나에게 종교가 없었다면, 나는 정말 아주 악인이 되었을지도 모르지 않는가? 그래서 나는 또 신에게 감사한다. 나는 자꾸 따진다. 그러면서도 굳게 믿고 있다. 그것은 나의 일부이니까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