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더위’와 ***
2021년 여름 더위는 참으로 참기 어려웠던 ‘무더위’라 하는데, 2018년의 더위도 그에 못지않았다고 한다. 사람들은 해마다 오는 한여름 더위를 전에 없이 ‘매우 매우 무더웠다!’고들 말한다. 그런데 1994년의 더위는 나에게는 잊히지 않는 ‘진짜 무더위’로 각인돼 있다. 달포가 넘게 계속된 무더위가 마치 일 년씩이나 계속된 것처럼 느껴졌었기에 그 후로는 웬만한 더위쯤은 그다지 힘들게 느껴지지 않아서인 것 같다.
‘무더위’는 기온과 습도가 동시에 높아서 느껴지는 심한 더위라서, 그 느낌은 ‘불볕더위’나 ‘땡볕 더위’와도 사뭇 다르다. 차라리 ‘찜통더위’라 하는 게 더 잘 어울린다. ‘물기’를 동반한다고 해서 ‘물 더위’라 하고 발음이 줄어들어 ‘무더위’가 되었다고 한다. 이 ‘찜통더위’는 7월 중순에서 8월 중순까지, 대략 한 달 동안 계속되는 삼복(三伏)더위를 이르는 말인데, ‘무더위’는 지구의 자전축이 23.5도 기울어 있어서 해마다 한여름에 겪어야 하는 자연현상이므로, 4계절이 있는 나라에서는 이 ‘무더위’도 거의 비슷하게 나타날 것으로 생각한다. 그러니 저 멀리 유럽의 프랑스에도 ‘삼복더위’가 있겠지?
번역 삼아 프랑스어에서 찾아낸 말이 ‘Canicule, fortes chaleurs’이다. 한글로 음역(音譯)하면 ‘까니뀔, 포르뜨 샬뢔르’라고 할 수 있겠고, ‘삼복 폭서(暴暑)’라고 번역할 수 있겠다. ‘까니뀔’(Canicule)은 별자리 중 ‘큰개자리’에서 특히 빛나는 별로, 시리우스(Sirius 천랑성)를 이르는 라틴어 이름 까니꿀라(Canicula, 작은개)에서 온 말이다. 바로 이 절기가 천문학에서는 ‘큰개자리’의 시리우스(Sirius) 성(星)이 태양과 함께 뜨고 지는 시기로, 옛 서양 사람들은 그리스 말로 ‘불태우는 자’라는 뜻을 지닌 이 별이 한낮에 하늘에 떠올라 있어 뜨거워진다고 믿었다.
프랑스 사람들은 ‘작은 개’(Canicule)라 부르는 이 별이 정오에 남중(南中)하는 7월 22일부터 8월 23일까지의 무더운 날을 ‘개 날’(jours caniculaires)이라 부른다. 그러고 보면 ‘복날’은 필시 동서(東西)가 다 ‘개’와 관계가 있는 날인 것 같기도 하다. ‘개’ 때문에 휴가도 포기할 만큼 개를 사랑하는 프랑스 사람들도 불쾌하거나 짜증이 날 때는 ‘개’라는 말을 자주 들추어 쓰는 것을 보면, 이렇게 무덥고 짜증 나는 날에는 ‘개 날’이라는 말도 서슴없이 나옴 직하다. 개를 사랑한 나머지 ‘사랑하는 개처럼 귀여운 날’이라는 뜻으로 봐줘야겠다.
‘까니뀔’의 자료를 찾아보던 중 우연히 ‘세계 개의 날’(International Dog Day, 8월 26일)이 있다는 것을 알았다. 그 밖에도 이런 날들이 있다. 3월 23일은 ‘강아지의 날’(National Puppy Day), 10월 4일은 ‘세계동물의 날'(World Animal Day)이다. 10월 2일은 ‘세계 농장 동물의 날’(World Day for Farmed Animals)이고, 10월 28일은 ’반려동물(Companion Animal)의 날'이다.
오래전, 리더스 다이제스트(Reader’s Digest)에서 읽은 ‘개 이야기’가 생각난다. 영국에서 한 남자가 친가에 가는 아내를 배웅하러 역에 나와, 행장을 챙겨 아내를 지정 좌석에 앉히고 열차에서 내리려 하는데, 그 사이에 열차가 출발하고 말았다. 당황한 남편은 얼른 비상 정지 손잡이를 당겼다. 여객 전무가 달려와 무슨 일인지 물었다. 남편은 아내를 배웅하러 왔다가 미처 내리지 못했으니 자기를 열차에서 내려달라고 했다. 그런데 열차가 이미 출발한 다음에는 열차를 멈추게 할 수 없다는 것이었다. 남편은 자동차 안에 개를 두고 왔다고 했더니, 여객 전무가 자동차 창문이 닫혀 있는지 열려 있는지 물었다. 창문이 닫혀 있다고 하자, 여객 전무는 열차를 멈추게 하고 그 남편을 내려주었다는 것이다.
집에서 기르는 짐승이 아무리 귀여워도, 심지어 생명의 은혜를 입었을지라도, 방안에서는 기르지도 못하고, 마당에 집을 만들어 기르는 것이 원칙(?)이라 여기던 시절이 그다지 오래전이 아닌, 요 얼마 전의 일로 생각되는데, 그런 시대에 그런 ‘동물권’(動物權) 이야기는 지구 바깥 세계의 이야기로만 들렸었다. 그런데 지금은 사람들이 ‘개’를 ‘무척’이나, 아니 ‘지나치게’도 사랑한 나머지, ‘개’와 관련된 광고나 기사가 넘쳐나는 것을 본다. 가축 중 집 마당에서 집을 지키는 것이 유일한 사명이던 ‘개’가, ‘개의 날’을 필두로 ‘개 사랑’, ‘개 팔자’, ‘애완견’, ‘반려견’이 되어, 거처(居處)도 안방 침대로 옮기고, 한 가족이 되고 한 식구가 되었다.
사전에서 ‘개’ 항목을 보면 그 기본의미로 “개는 포유류 갯과에 속한 가축으로, 사람을 잘 따르고 영리하며 냄새를 잘 맡고 귀가 밝아 사냥이나 군용으로 쓰인다.”라고 그 속성을 설명하고 있다. 전해오는 이야기나 남의 이야기에서가 아니더라도 우리는 정말 ‘영리하고 충직한 개’를 실제로 경험한다.
어렸을 적에, 30리도 더 떨어져 있는 외갓집에 가려면 버스를 타야 했는데, 우리 집은 산골 마을에 있어서, 읍내에서 시외로 나가는 한길까지 이르는 데는 어린 마음에 한 시간쯤 걸어 나가야 할 것이라고 여겼다. 신작로까지 걸어가는 동안 내 뒤에는 우리 검둥개가 따라오고 있었다. 집으로 돌아가라고 아무리 소리를 치고 팔을 휘둘러도 개는 잠시 후 또 따라오곤 했다. 마을을 여럿이나 거치고 산길이랑 들길을 지나서 마침내 버스가 지나다니는 큰길에 이르러, 내 뒤를 따라오던 우리 개를 남겨두고, 나는 때맞추어 온 버스를 탔다. 버스 속에서 내내 우리 검둥개 생각을 떨칠 수가 없었다. 그 먼 거리를 무턱대고 따라왔다가 버스 안으로 사라진 주인을 원망하며, 돌아가는 길을 잃고 얼마나 헤맬까? 어쩌면 집을 찾지 못하고 사라져버렸을까? 일을 마치고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도 마음이 편치 않았다.
심란한 마음으로 집 앞에 이르렀는데, 우리 개가 대문 앞까지 마중을 나와 있었다. 얼마나 반갑던지! 그보다 먼저 얼마나 놀랐던지! 어떻게 그 먼 곳에서 집으로 돌아올 수 있었을까? 우리 개가 참으로 영리하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 학자들은 맹수를 비롯한 모든 네발짐승이 오줌을 누는 것은 바로 ‘자기의 영역을 표시하는 것’이라고 했다. 우리 개도 내 뒤를 따라오는 동안 수시로 ‘자기 영역’을 표시했었다. 그런데 최근 들어, 아니 이 글을 쓰면서 깨달았다. 우리 개는 ‘영역표시’를 한 것이 아니라, 혼자서 돌아올 때 길을 잃을까 봐 냄새를 따라 다시 돌아올 수 있도록 수시로 ‘길 표시’를 해두었다는 것을.
그런데 그토록 ‘영리하고 충직한’ 개의 속성과는 달리, ‘개’라는 말을 앞에 붙여서 합성어처럼 쓰는 말들은 그 상징적·비유적 의미가 사뭇 다르다. 사전에서 ‘기본의미’ 다음으로 설명하는 ‘개’는 “성질이 나쁘고 행실이 좋지 않은 자를 욕하여 이르는 말”이기도 하고, “권력자나 부정한 사람의 앞잡이를 비유적으로 이르는 말”이기도 하며, “일부 식물 명사 앞에 붙어, ‘야생의’ 또는 ‘질이 떨어지는’의 뜻을 더하는 말”이기도 하다. 그뿐만 아니라, “일부 명사 앞에 붙어, ‘헛된’, ‘쓸데없는’이라는 뜻을 더하는 말”이기도 하고, “부정적인 뜻을 가지는 일부 명사 앞에 붙어, ‘정도가 심한’, ‘엉망진창의’의 뜻을 더하는 말”이기도 하며, 지금에 이르러서는 “긍정적”인 뜻을 더욱 강조하는 뜻으로도 쓰인다.
어찌 되었든 ‘개’가 붙은 말은 그것이 비록 ‘좋은’, ‘행운의’ 라는 의미로 쓰인 것일지라도 ‘얕잡아 이르는, 좋지 않은 말’로 들린다. 요즈음 인터넷 자료를 찾다 보면, 무슨 말이든 그 앞에 ‘개’를 붙여 쓰는 듯하다. “개구리다, 개멍청하다, 개싫다, 개여신, 개이득, 개이뻐, 개대박, 개좋아, 개짱, 개맛있어, 개부럽다, 개여신, 개재미있다, 개매너, 개안습, 개웃기다, 개졸립다, 개못났다, 개멋지다, …”
프랑스에서도 ‘개’의 속성은 다를 바가 없겠지만, ‘개’가 붙어 합성어가 되면 ‘영리하고 충직한’이라는 뜻에서는 거리가 멀다. ‘서장(署長)의 개’(chien du commissaire, 서장의 비서), ‘병영의 개’(chien du quartier, 특무상사), ‘교정의 개’(chien de cour, 중등학교 감독관), ‘함정(艦艇)의 개’(chien du bord, 부함장), ‘개자식’(fils du chien), ‘개 같은 날씨’(chien de temps), ‘개처럼 살다’(vivre comme un chien, 비참하게 살다), ‘개처럼 죽다’(mourir comme un chien, 비참하게 죽다), ‘개처럼 아프다’(malade comme un chien, 중병에 걸렸다), ‘개 대하듯 하다’(traiter qn comme un chien, 푸대접하다), ‘개처럼 죽이다’(tuer qn comme un chien, 무자비하게 죽이다), ‘개 같은 삶’(vie de chien, 비참한 생활), ‘개 고통’(mal de chien, 지독한 고통), ‘정원사의 개 같다.’(comme le chien du jardinier, 심보가 나쁘다), ‘개 이름 붙일 놈’(nom d’un chien, 개 같은 놈), ‘개 같은 직업’(metier de chien, 심히 고된 직업), 그 밖에도 ‘개’와 관련된 표현은 수없이 많다.
‘그냥 개’일 뿐이던 과거의 ‘개’에서 ‘사랑받는’ 충성스럽고 영특한 오늘의 ‘개’로 진화하면서, 거처(居處)도 마당의 ‘개집’에서 주인의 ‘안방’으로 옮겨, ‘애완견’보다 더 가까워진 ‘반려견’, 더 나아가 ‘한 가족, 한 식구’가 된 ‘개’, 이제는 그 ‘개’라는 말의 쓰임새에도 오늘날의 ‘사랑스러운’ 개에 어울릴 만한 진화가 있어야겠다. 그것이 거친 나라말을 순화하는 데에도 크게 한 몫을 하리라. 무더위는 매년 여름이면 달포쯤 겪는 연중행사인데, 이런 날씨에는 ‘개 같은 날씨!’라고 투정할 일이 아니라 ‘개처럼 함께 해야 할 사랑스러운 연중 날씨’라고 고쳐 말…함 직하지 않을는지요(?) -2021-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