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스•로마신화에 하계인 하데스, 그곳에 가려면 다섯 강을 건너야 한다.
아케론(Acheron)은 슬픔/비통, 코키투스(Cocytus)는 탄식/비탄, 플레게톤(Phlegethon)은 불, 레테(Lethe)는 망각,
스틱스(Styx)는 증오를 상징한다.
레테에서 강물을 마시면 이생에서 겪었던 모든 기억을 잊게 된다. 이생의 기억을 가지고 지옥에 간다면 더 고통스러울 테다.
불교식이라고 하지만 결코 불교식이 아닌 명계에서 심판, 49재도 있다.
이 심판에 따라 극락을 가거나 지옥에 간다. 때론 다른 이의 몸을 빌려 환생하지만 전생을 기억하진 못 한다.
중국에서는 북망산천을 가기도 하고 황천(구천)으로 들어가기도 한다. 북망산천은 공동묘지이다. 황천은 지하이다.
극락이니 지옥이니 천당이니 그런 게 없다. 가고나면 끝이다.
그리스도인은 요단강을 건넌다고 한다.
요단강, 요단강을 건너면 미지의 세상이지만 젖과 꿀이 흐르는 땅, 하나님이 약속한 가나안에 이른다.
가나안은 천국인 셈이다. 구약성경에서 유대인을 보호하는 하나님인 여호와란 신이 약속한 낙원이다.
애굽에서 탈주, 광야에서 헤맴 등이 이생의 삶이다. 요단강을 건너는 것은 이생의 삶을 끝내고 천국인 가나안으로 가는 것이다. 모두가 요단강을 건널 수는 없다. 선택 받은 자만 간다. 순결한 믿음의 삶을 산 사람만.
아버지는 늘 말씀하셨다.
"내가 죽으면 장송곡을 부르지말고 기쁜 찬송가를 불러다오. 하늘나라 가는 길이 신나고 기쁜 일인데 왜 슬픈 곡을 들어야 하나?"
천국 가는 길은 즐겁고 기쁜 일이며 그리스도인의 소망이다. 어느 목사가 그런다.
"그리스도인의 장례는 장례가 아니라 잔치이다. 천국 환송식이다."
장자가 생각난다.
모친이 죽으니 춤을 추었다.
자연에서 와서 자연으로 돌아가는 순리, 그 순리가 이뤄졌기에 기쁜 일이라고.
죽음.
분명 슬픈 일이다.
상실감.
회한.
이런 복잡한 감정이다.
나는 지금 마음은 평온하지만 배가 아파서 바닥에 누워 글을 쓴다. 아버지가 계신 병원 갈 때는 괜찮았다.
숨이 멎은 아버지, 그 어깨에 손을 얹고 기도하였다.
"주여, 이 생명이 주의 나라로 갔으니 영접하여 주소서. 이생에서 여러 고난이 있었으나 주를 의지하고 살아왔습니다.
주와 함께 천국에서 영생하길 기도합니다."
"아버지, 사랑합니다."
아버지가 즐겨 부르신 찬송가이다.
「지금까지 지내온 것 주의 크신 은혜로다. 한이 없는 그의 사랑~♬」
종교가 자신의 삶을 위로하고 버틸 수 있는 힘을 준다면 그 종교는 오랜 세월 사람들과 함께 할 것이다.
아버지는 매주 복권을 사셨지만 당첨하게 해달라고 기도하신 적은 없다.
내가 좋아하는 찬송가이다.
「궁궐이나 초막이나 주 예수 계신 곳이 천국일세.」
내가 어떠한 처지에 있을찌라도 진리와 함께라면 즐겁고 기쁜 것이다. 곧 천국에서 삶이다.
2022년 7월 4일 월요일 오후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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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초등학교 4학년 때 아버지는 장로로 임직하셨다. 서른다섯이었다. 감리교에서 장로 자격 가운데 나이 제한이 있다.
서른다섯 미만이면 장로로 임직될 수 없다. 보통 40대 후반이나 50대 초반에 장로로 임직을 받는다.
아주 이른 나이에 장로가 되셨지만 내게 고통스러운 일이였다.
나는 싸움을 자주 하는 아이였다. 싸움하고 나면 듣는 말이 있다.
"장로아들이 깡패냐!"
나는 장로아들인 게 싫었다.
일제강점기 때 아버지는 교회를 다니기 시작하였다.
소학교에 있는 풍금, 풍금을 마음껏 치고 싶었지만 학교 풍금은 칠 수가 없었다. 교회는 가능했다.
풍금 치고 싶은 마음에 교회를 나가셨다. 소학교 4학년 때였다고 하셨다.
아버지는 기력이 떨어지실 때까지 집에서 전자오르간을 치면서 찬송가를 부르셨다.
아버지와 함께 하였던 추억, 내 어린 시절은 행복했다.
여름방학이면 한 달을 강에서 천렵을 하면서 지냈다. 자식에게 야단치신 적도 없으셨다.
늘 건강하고 남을 괴롭히는 자가 되지말라고 하셨다.
1등이나 명문대 진학도 바라시지 않았다.
육신의 건강을 유지하고 사회에 해를 끼치는 자가 되지말라고 하셨다. 건강한 사회인이 되라고 하셨다.
물론 그리스도인으로 자식들이 살기를 바라셨다.
코로나19가 오기 전에 모시고 고향에 갔다오지 못한 것이 못내 안타깝고 죄송한 마음이다.
2022년 7월 5일 아침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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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후 3시에 입관 예배를 드렸다. 수의로 감싼 몸, 얼굴은 평온하다. 다만 입과 코를 막고 있는 흰 솜이 나를 갑갑하게 하였다.
내 수의는 아내와 결혼식 때 입었던 양복으로 나는 결정해 놓았다. 내 결정이 이뤄질는지는 자식의 몫이다.
아들만 넷, 우는 이는 어머니뿐이다. 2009년 먼저 간 여동생이 있었다면 목 놓아 울었을 거다.
오후 5시가 넘으니 문상 오시는 분이 부쩍 늘었다. 슬픔은 잠시 내려 놓았다.
11시 50분, 아버지와 추억이 많았던 아들 솔이 아버지 영정을 보면서 울었다. 아들은 내게 묻는다.
"아버지는 왜 울지 않나요?"
"응, 아버지는 마음으로 우는 거야."
몸은 피곤하지만 쉬이 잠에 빠질 수 없어 글을 쓴다. 새벽 5시 30분에 발인이다.
7시에 화장하고 추모공원에 모시면 장례는 마친다. 아버지 얼굴은 입관 때 본 것이 영원이 되었다.
그리우면 마음에 넣어둔 사진을 꺼내 볼 수밖에 없다.
날이 새면 여동생은 기쁠 것이다. 아버지가 옆에 와서 꼭 안아줄 테니까.
나는 그 모습을 상상하며 1시간이라도 눈을 붙여야겠다.
2022년 7월 6일 새벽 3시 3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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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
오자마자 잠에 빠졌다.
이젠 여기저기 인사할 일이 한 꾸러미다.
어젠 비가 온 것 같다. 오늘은 흐렸다.
새벽, 영락공원으로 가는 길은 막힘이 없었다. 이렇게 아버지는 막힘 없이 천국에 가셨겠다.
이제쯤 먼저 온 이들과 인사를 마쳤는지 모르겠다.
「그리스도인에게 부활이 없다면 예수께서 이땅에 오신 게 뜻 없는 일이 된다.」
심판 날이 언제일까 난 모른다. 아버진 믿음대로 심판을 면하실 것이다.
화장을 진행 하는 이들의 모습에서 로봇을 봤다.
오늘은 딸이 몹시 서럽게 운다.
나는 동생이 왔는가 하는 느낌이 들었다. 차마 내 느낌을 말하진 못 했다. 옆에서 할어머니가 손녀를 다독인다.
하나님은 산 자를 위한 하나님이다.
화장 시간은 약 2시간, 아침을 먹었다.
유골함.
한줌 남은 육신, 언젠가 고향산천으로 모셔야할 일이다. 추모공원에 먼저 가 있는 딸 곁으로 모실 수 있다. 다행이다.
딸을 내려다 볼 수 있는 맞은 편에 빈 공간이 있다.
"은경아, 아버지 오셨다. 이젠 홀로 심심하지 않을 거다. 아버지를 안아 드려라. 오빠가 미안하다."
내가 치는 소리를 울음이 먹어 버렸다.
점심은 아버지가 맛 있다고 하신 집 근처 음식점으로. 형제간에 위로의 말을 건네고 내가 먼저 일어나 나왔다.
어머니는 내 딸과 아들이 늦게까지 함께 할 것이다. 아들은 내일 중요한 학회 발표가 있어 마지막 비행기로 간다고 한다.
긴 잠도 짤은 잠도 한순간 잠이다.
긴 꿈도 짧은 꿈도 한순간 꿈이다.
믿음은 비이성적이라 하나 스스로의 선택이기에 존중하여야 한다. 옳고그름을 따질 일도 아니고 비웃음거리도 아니다. 믿음대로 영혼은 갈 것이다.
2022년 7월 6일 오후 8시, 집에서.
7이 겹친다.
7시 화장, 7번로.
봉안당 17호실 700번.
오늘이 7월 7일이었다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