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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러브] 송지나
# 1 BLACK
# 2 엘에이 공항
카메라 플래쉬가 터지면서 비로소 비춰지는
모습.
양복형으로 태극마크가 달린 유니폼을 입은
다섯명의 선수와 중년의 이감독이 렌즈를
보는 자세로 프레임에 들어와있다. 명수는
끝에 서있는데 키가 커서 위쪽이 잘리고 있
다.
기자E 자, 웃으시고. 이왕이면 오선수가 가운데
서시죠.
카메라 기자의 지시대로 일제히 움직이고,
명수가 무뚝뚝한 얼굴로 가운데로 선다. 명
수에게 중심을 맞추자 아직 끝에 서있는 경
철이 아슬아슬하게 걸린다.
카메라기자 좋습니다. 웃어주세요.
각자 서툴게 웃는 얼굴이 되는데 명수만 이
그러진 얼굴이다. 플래쉬가 터진다.
이제야 전체의 모습이 보인다.
신문사 기자들과 카메라 기자들 다섯명, 그
리고, '한국 선수단 파이팅'이라는 현수막을
들고 서있는 30여명의 교포 마중객들.. 그들
이 있는 곳이 엘에이 국제공항임을 알 수
있는 어떤 샷.
웅성거리며 각자 웃으며 다가서 악수도 하
고 ..
기자들이 명수에게 몰려든다.
기자1 이번에 세계기록에 도전한다고 하든데요.
기자2 컨디션은 어떻습니까?
기자1 식이요법은 언제부터 시작할거죠?
명수는 질문들에 아랑곳없이 곤혹스러운 얼
굴로 다른데를 두리번거리고 있다. (마치
도망갈 곳을 찾는 기분)
경철이 그 옆으로 들어서며
경철 엘에이 날씨가 아주 덥잖습니까. 그래서
현지 적응훈련이 아주 중요합니다.
바로 훈련 시작할겁니다.
우리 선수들 모두 컨디션 최고구요.
엘에이 금메달 딸겁니다. 지켜봐주십쇼.
경철의 떠드는 소리 옆에서 명수는 눈이 부
신 듯 하늘을 우러른다.
태양이 가득하다.
# 3 아리조나 연습의 몽따쥬.
* 강렬한 아리조나 사막의 태양
* 지열이 오르는 불볕 태양 속으로 뛰는 선
수들.
* 그들의 뒤를 따르는 감독의 트럭. 그 트
럭에서 날리는 먼지.
* 뛰는 발들.. 그 발들에서 피어나는 흙먼
지.
* 뛰는 그들의 모습이 얼고 높은 시선에서
잡힌다.
* 그들을 바라보고 있는 인디언.
* 하늘을 나는 독수리..
* 선수들이 달리는 옆에 말들이 달리고 있
다. 말을 탄 인디언들이 그 옆을 달려 지나
쳐간다.
그들의 뒤를 따르고 있는 감독의 트럭
* 이들의 기세에 놀라 흩어지는 양떼
* 가까이 잡히는 선수들.. 그들의 거친 호흡
소리.
선두부터 하나씩 뒤로 훑어가다보면 맨뒤
에 달리고 있는 명수의 모습이 보인다. 명
수는 호흡이 흩어지고 있다. 명수의 시선에
서 앞을 달리는 동료선수들이 모습이 점점
거리가 벌어진다. 달리던 경철이 고개를 돌
려 명수를 바라보는 모습이 보인다. 명수의
호흡소리가 점점 거칠게 흩어지고. 명수의
시선에서 경철의 얼굴이 흔들리다가 기우뚱
하늘을 향한다. 태양이 작렬하는 하늘..
명수가 아예 뒤로 넘어진 것. 누워서 헐떡
거리며 하늘을 보고 있는 명수.
# 4 숙소 앞 / 새벽
아직 어둠이 깔린 새벽. 대학교 기숙사와
같은 숙소.
명수가 혼자 걸어나오고 있다. 가방을 둘러
메고 있다.
잠시 후 급하게 문으로 달려나와 명수의 앞
을 가로막는 경철.
경철 너 못 가. 너 미쳤어. 너 완전 돌았어.
명수 (성가신 표정이 되어 보는)
경철 감독님 알기 전에 조용히 드가. 어
명수 비켜
경철 씹새애. 니가 할 줄 아는 게 이거 밖에
더 있어. 가긴 어딜 가아.
명수 (경철을 비켜 가려는데)
경철 (악착같이 막아서며)
너 새꺄 이렇게 나가면 다시 못 돌아와.
너 한국에도 못 가.
너 지금 무슨 짓 하는지 알고 있어?
너 갈 데 없어어.
명수 (옆으로 거칠게 밀쳐내버리고 간다)
경철 (그 뒤를 보며 악을 쓰듯)
야 이 개새꺄.
너 지금 토끼면 평생 토끼구 살거다. 그
렇게 살다 뒈질거냐 이 씹새야!
명수 (뒤도 안보고 계속 가는)
경철 (거의 울 듯해서 가는 명수를 보다가)
돌아 올거지? 어이 내일 올거지? 너 갈데
는 있어?
가는 명수의 뒷모습이 창문 안에서 보인다.
창가에 기대 서서 감독이 담배를 뻑뻑 피며
명수를 보고 있다.
# 5 거리 공중전화 박스 / 낮
명수가 수첩을 보며 전화를 하고 있다.
띠띠띠.. 버튼 누르는 전자음. 신호가 떨어
지길 기다리다가
명수 핼로우 여보세요. 거기 오기철씨 댁이죠?
박기철씹니까? 전 오명수라고 하는데요.
그러니까 제 아버지하고 오기철씨 아버
님하고 사촌이거든요. 그래서 전 기철이
형님의 육촌동생이 됩니다.
근데 저 여기 미국인데요. ...
# 6 거리. 만남의 장소로 할만한 곳. / 낮
난폭하게 달려오는 왜곤. 기다리는 명수를
지나쳐서 요란하게 급브레이크로 선다. 역
시 난폭하게 백을 해오더니 명수의 앞에 정
거한다. 명수, 멀뚱하게 왜곤을 바라보는데
제니E 오명수씨?
# 7 거리 (차 내부)
운전을 하고 있는 제니의 모습만 보이는 상
태.
제니는 말없이 운전을 하고 있는데.. 현재
속으로 사랑밖엔 난 몰라의 노래를 부르고
있는 중이다. 그 노래의 박자에 맞춰서 어
깨와 고개를 들썩이고 있다. 중간지점부터
는 아예 소리를 내서 흥얼거리더니.. (서툴
게.. 웃지도 않고.. 조금씩 소리가 커지며..)
후렴구에 가서 진지하게 바이브레이션을 연
습한다. 처음에는 높은 옥타브로..
제니 사랑밖엔 난 몰라으으.. ( 다시 한 옥타브
를 내려서 ) 사랑밖엔 나은 모을라으..
순간 옆의 명수가 제니에게 툭 쓰러진다.
잠이 들어있다.
제니 순간 경직되더니 거의 반사적으로 핸
들을 훽 꺽어버린다. 명수, 반동으로 반대
유리창에 머리를 부딪치고 어벙벙해서 눈이
떠진다. 제니는 명수쪽을 절대 돌아보지 않
고 있다. (제니는 기본적으로 타인에게 관
심이 없이 자기 세계에 살고 있다)
# 8 세탁소 외부 / 저녁
거대한 도심을 배경으로 '브레드 크리너'라
는 네온간판
그 앞에 도착하는 차.
제니가 운전석에서 내리더니 문을 콰앙 닫
는다.
그 위로 들리기 시작하는 심수봉의 '사랑밖
엔 난 몰라'의 전주..
# 9 이층거실 / 밤
창고같은 분위기. 그러나 볕이 잘 드는 커
다란 창문과 따스한 분위기의 실내. (물론
지금은 밤)
텔레비젼 모니터에서는 열린 음악회가 비디
오로 보여지고 있고, 심수봉의 '사랑밖엔
난 몰라'가 공연되고 있는 중이다.
그 모니터를 보면서 제니와 브레드가 열창
을 하고 있다.
언제나 해오던 것이라서 손발이 척척 맞는
다.
이만치 앉아서 조금은 어이없는 기분으로
보고 있는 명수.
일절이 거의 다 불러지고 제니와 브레드,
마지막의 '사랑밖엔 난 몰라'의 부분을 심
수봉보다 더 바이브레이션을 불러서 마무리
한다. 제니 온 정성을 다하여 한번 더 한다.
현재 명수를 환영하는 파티 중이다.
// 시간경과, 식탁 쪽
테이블에 늘어져있는 여러가지 밑반찬.
브레드가 육계장이 가득이 든 커다란 사발
을 놓으며
브레드 기이가 막히다. 그러니까 자기하고 나하
고 손가락 잘라서 피를 내보면 그게 똑같
은 피다 이거네요. 그쵸?
명수 ... 저기.. 말씀 놓으세요.
브레드 (제니에게) 들었지? 이 분이 내 친척이
야. 내 동생이라고. 진짜 동생.
제니 (전혀 관심없이 육계장 국물을 떠먹어보
고 있는 중) 이거 맛이 좀 이상해.
브레드 뭐가 이상해. 한국산 고사리로 제대로 끓
인건데. (명수에게) 먹어봐요. 응?
먹어봐.
명수 (떠먹어보는)
브레드 (긴장하여 먹는 걸 보고 있다가)
어때? 괜찮지.
명수 (어정쩡해서) 예
브레드 얼크은하지?
명수 예
제니 싱거워.
브레드 그럴리가 있냐. (그제야 먹어보는)
명수 (제니에게 인사할 기회를 찾고 있지만 )
제니 (육계장에만 관심이 있다)
브레드 제대루 됐네. (명수에게)
이게 진짜 한국 정통 육계장의 맛이야.
명수 (제니를 흘낏거리며) 저...형수님이시면..
브레드 제니? 아냐. 얘는 나하구 같은 입양아야.
(명수의 얼굴을 새삼 들여다보는)
근데 동생 참 잘생겼다아.
명수 (어색해서 웃고 얼핏 제니를 보는)
제니 (육계장만 먹다가)
아무래도 싱거워.
브레드 한국사람들은 원래 싱겁게 먹는거야.
알어? 미국애들이 기냥 짜게 쳐먹어대서
비만에 성인병 죄다 걸리는거야.
너 한국 사람 중에 뚱뚱한 사람이 있는
줄 알어? (명수에게) 그치? 없지?
명수 예? 아..
브레드 어서 먹어. 이건 뜨거울 때 땀 쫘악 빼
면서 먹어야 돼. 어서어서...
브레드는 그저 명수가 먹는 것만 최대의 관
심으로 보고 있다.
명수 (어쩔수없이 먹는)
브레드 동생은 어디서 묵을거야. 갈 데 있어?
명수 (입에 넣은 거 겨우 삼키고 자세
바로 하더니) 저 여기 있을 수 있을까요
브레드 아이구 그럼 여기 있어야지. 진짜 형 집
인데.
(표정이 달라지더니) 얼마나 오래?
명수 그게..(생각해본 적 없다) 잘 모르겠는데
요.
브레드 (잉?하는 얼굴이 된다 )
명수 저.. 일자리를 구할 수 있을까요?
# 10 집 전경 (새벽)
집 전경 크레인에서 이층 창가의 화분까지.
(이 창가는 집의 뒷마당에서 보여지는 창
문)
# 11 이층거실 (새벽)
창가 소파에서 보이는 창문 밖 하늘..
어디선가 시계의 초침 소리가 들리고 있다.
소파에 누워 잠들었던 명수, 갑자기 뭔가에
놀란 듯 잠에서 깬다. 잠시 있는 곳을 몰라
하다가 후딱 머리맡을 본다. 거기 사이드
테이블 위에 탁상시계가 하나 있어서 초침
이 채칵채칵 움직이고 있다.
아침 6시 정도.
명수. 눈을 뜬 채 잠자코 그 소리를 듣고
있다. (여기서 초침소리는 매일 새벽마다
마라톤 연습을 하던 명수의 초조함이다)
초침소리가 점점 커지다가.. 갑자기 양쪽방
에서 들려오는 요란한 자명종 소리. 명수,
누운 채 긴장하는데...
자명종이 하나씩 꺼지고..
제니의 방문이 열리고 반은 눈을 감은 제니
가 부엌 쪽으로 간다.
(부시시한 머리와 구겨진 남자용 티셔츠차
림 )
브레드 방문이 열리더니 반쯤 눈을 감은 브
레드가 나와서 파자마 차림인 채로 제니와
엇갈려 욕실로 들어간다.
명수는 누운 채 그들을 보고 있다.
제니 부엌에 놓여있던 물조리개를 들고 창
가의 소파 쪽으로 온다. 명수 놀라서 일어
나 앉는다.
제니, 아직 잠에서 덜 깨었다. 명수 옆의 소
파로 기어올라가더니 화분에 물을 준다. 여
전히 명수에게는 시선 한번 안주고 비틀거
리며 제 갈길로 간다.
# 12 세탁소 내부
뿜어져 나오는 수증기.
여기저기서 뿜어지는 수증기 속에서 일을
하고 있는 종업원들.
열기로 웃옷을 거의 다 벗고 일하는 멕시컨
종업원 남1. 여2.
명수가 밀차에 산더미같은 옷을 담고 좁은
통로로 나오다가 제니와 부딪힌다. 제니는
다림질 된 옷을 한아름 들고 있다.
제니는 무뚝뚝한 얼굴로 막무가내로 밀고
오고 명수 할 수 없이 뒤로 빽해서 길을 비
켜준다.
그런 상황들 뒤로 브레드가 손님을 맞는 모
습과 소리가 적당히 섞여 들어간다.
그들 옆으로 주르르 돌아가는 옷걸이.
카운터 옆의 브레드가 돌아서 선 옷걸이에
서 능숙하게 양복 한벌을 꺼내 기다리는 백
인 여자에게 내어주며
브레드 (영) 여기 있습니다. 좋은 하루되세요. 감
사합니다. 미세스 브라운.
백인 여자 인사하고 간 뒤에 기다리고 있는
이사장.
들고 온 옷가지를 건네준다.
브레드 아이구 어서 오십쇼. 이사장님
이사장 장사 잘됩니까?
브레드 맨날 거기서 거깁니다. 근데 이번에 득남
하셨다면서요?
이사장 아..하하 이 나이에 챙피합니다.
브레드 가만있어봐. 위로 윤희 윤아 두 따님하고
몇살 차이나는거죠?
# 13 세탁소 전경 / 저녁
저녁이 되고 있다. 세탁소 뒤로 보이는 엘
에이의 하늘에 노을이 물들고 있고.
브레드 크리닝이라는 간판에서 주욱 내려오
면 명수가 쓰레기 봉지와 신문 한뭉치를 들
고 나선다. 쓰레기통에 쓰레기를 넣고 신문
도 넣으려다가 문득 멈춘다.
언뜻 눈에 띄었던 한인신문 겉면을 자세히
본다.
공항에서 찍었던 마라톤 선수들과의 사진이
나와있다.
[마라톤 선수단 도착. 7월 LA마라톤 대비
전지훈련 ]
이라는 제목이 큼직하게 찍혀있다.
명수, 무심한 얼굴로 신문을 쓰레기통에 쑤
셔넣어버린다.
명수가 들어가고 난 세탁소 앞. 점차 어둠
이 짙어지고 있고.
# 14 이층 거실/ 밤
브레드 책상 앞에 앉아서 메모를 하며 전화
를 해대고 있다.
브레드 홀트 쪽에서 주소를 알려줬으면 일단 그
주소 동사무소에 알아봐야 되요. 그럼 이
사간 주소를 알 수 있거든요.
그리고 어머니 이름을 안다매요. 몇년생
이신지 알아요?
아니 어머니가 몇년생인지 아냐고.
대충 몇살쯤 됐는지도 모르시나?
경찰에 이름하고 나이대고 예전에 살았던
동네 대고.. 그럼 알수도 있는데..
브레드 떠들고 있는 뒤로 명수가 현관으로
나가는 모습이 보인다.
# 15 뒷마당 밤
뒷문으로 나선 명수, 주머니에서 담배갑을
꺼낸다. 아직 뜯지도 않은 새담배갑이다. 포
장을 뜯고 한개피를 꺼내고 불을 붙인다.
한모금을 깊이 빨아들인다. 아주 오랜만에
피는 담배다. 피잉 도는 느낌을 눈을 감고
만끽하며 휘청..이듯 뒤의 문에 기댄다. 다
시 한모금을 빨아들인다. 그러다가 문득 들
리는 소리.
제니E 꺼진다 꺼진다. 꺼진다.. 꺼진다.
명수, 눈을 뜨고 한쪽을 돌아본다.
거기 마당 한쪽에 제니가 벤치에 올라앉아
옆의 가로등을 보며 주문을 외고 있다.
명수 저도 모르게 가로등을 본다.
제니 꺼진다. 꺼진다.
순간 가로등이 피비거리더니 꺼진다.
제니 만족스럽게 가로등을 보다가 일어서더
니 명수가 있는 입구 쪽으로 온다.
바로 명수 앞까지 오더니 멈춰선다. 그러나
명수의 얼굴을 보는 것이 아니라 마치 장애
물을 보듯 명수의 가슴께를 보고 있다. 명
수 옆으로 비켜준다. 그러자 제니는 안으로
들어가버린다.
남은 명수, 뭔가 다 어이없는 기분이다.
# 16 이층 거실 / 낮
거실에 흐르고 있는 한국 가요.
제니가 바닥에 엎드려 걸레질을 하고 있는
중이다. 엉덩이가 들린 별로 좋지는 못한
모양새. 제니는 썩썩 걸레질을 해가면서도
시선을 텔레비젼 모니터에서 벗어나지 못하
고있다. 소파에 앉아 제니를 힐끗거리는 명
수는 대단히 불편한 마음이다. TV 모니터
에서는 비디오로 가요무대가 흐르고 있다.
제니가 소파 주변으로 걸레질을 해온다. 명
수의 다리 쪽으로 온다. 명수, 얼른 다리를
소파 위로 올린다. 제니는 모니터를 보며
소파 밑을 닦는다. 그러다가 모니터 속의
가수가 클라이막스 부분을 부르자 손이 멈
춰서 멍청이 모니터를 보며 속으로 따라부
르며 외우기라도 하는 듯.. 그 부분이 지나
자 다시 걸레질을 하며 멀어져간다.
# 17 세탁소 안 / 낮
종업원들이 일손을 멈추고 한 곳을 일제히
보고 있다.
제니E 왼쪽 등 뒤에 점이 하나 있거든요. 옛날
부터 있던 점인데요.
앞쪽 카운터에서 제니가 전화를 하는 중이
고. 브레드는 애타는 얼굴로 그 옆을 서성
이며 코치하는 중.
제니 오른쪽 무릎에 흉터도 있어요. 화상 흉터
같아요. 어렸을 때 데었나봐요
브레드 (작게) 발가락.. 발가락 얘기도 해.
제니 (브레드를 보며) 내 발가락이요. 둘째랑
가운데랑 길이가 똑같아요. 보통 사람들
은 가운데가 더 길잖아요. 난 길이가
똑같아요. (상대의 말을 듣는...)
아뇨. 난 평화 고아원이었는데.. 네살때부
터 거기 있었는데..
브레드 (애타서 보는)
제니 (계속 듣다가 천천이 브레드를 본다)
브레드 뭐래?
제니 (천천이 고개를 젓는다)
브레드 속이 상해서 몸을 돌린다. 보고 있
는 종업원들을 향해 고개를 저어보인다. 모
두들 안타깝다는 듯이 오우.. 한마디씩 위로
의 말을 하고 다시 작업으로 돌아간다.
제니 네.. 감사합니다. 전화주셔서 고마워요. 아
니요. 괜찮아요.
제니 전화를 끊는다.
이만치에 서서 보고 있는 명수의 시선에 브
레드에게 가리다 말다 하는 제니의 모습이
보인다. 제니는 다시 평소의 무표정으로 돌
아와 수화기를 내려다 보고 있다.
# 18 빌딩 옥상 / 저녁
하늘에서 보이는 엘에이의 도심.
그 아래 한 건물.
그 옥상 위에 제니가 서있다.
저 아래 까마득하게 보이는 거리.
그녀가 딛고 서있는 곳은 가장자리. 발의
반 이상이 가의 밖으로 나와있어서 서있는
상태가 아주 위태롭다. 옆에는 벗어놓은 신
발이 놓여있다.
저 아래는 너무 멀고 이곳은 너무 높아서,
아래를 지나는 차소리 등은 전혀 들리지 않
는다. 눈을 감은 제니의 귓가에 들리는 바
람소리...
상체를 기웃해서 아래를 내려다보다가 아차
떨어질 뻔해서 두 팔을 휘둘러 간신이 균형
을 잡는다.
제니, 천천히 양팔을 들어올리더니 마치 공
중을 날아 나아가는 듯한 느낌...
상상 속의 공중을 수영해 나아가는 제니의
상체가 앞뒤로 건들거리다가 그러다가 제니
한순간에 날아오른다. 일순간 제니는 허공
에 날아 오른 듯이 보인다.
그러나 다음 순간, 제니, 추락한다.
그녀가 뛰어내린 곳은 옥상 위의 또 다른
구조물 위. 옥상 위로 안착해 내린다.
엘에이 도심 한가운데 빌딩 옥상에 조그맣
에 보이는 제니는 신발을 찾아들고 가버린
다.
노을이 지는 엘에이의 도심은 벌겋게 물들
어있다.
# 19 이층거실 / 밤
한밤중이다. 모든 불이 꺼져있다.
소파에서 잠들었던 명수, 잠이 덜 깬 상태
에서 일어난다. 비칠거리며 화장실을 찾아
간다. 불을 켜고 문을 열다가 놀라 정지한
다. 욕실 내부에서 변기 뚜껑을 내리고 앉
아있는 제니. 울고 있었다. 제니 벌컥 일어
나 오더니 안에서 문을 쾅 닫아버린다.
거의 문에 받칠 뻔 한 명수, 잠이 완전히
깬 기분에서 서있다.
# 20 욕실 내부
제니 다시 변기 뚜껑에 앉아 계속 운다. 별
로 크게 소리를 내지 않으면서 아주 섧게
운다. 휴지를 뜯어 코를 풀어가며 울다가
치솔꽂이 옆에 놓여진 치솔을 본다. 치솔을
제대로 꽂이에 꽂아넣고 계속 운다.
# 21 욕실 밖
문이 열리고 제니가 나온다. 멈칫해서 보면
옆의 벽에 기대서 기다리고 있는 명수. 걱
정되었던 듯 제니를 본다. 제니, 명수를 본
다. (제니로서는 처음으로 명수를 제대로
보는 시점) 제니 돌아서 자기 방으로 가버
린다. 그 뒤를 계속 보고 있는 명수.
# 22 수퍼 마켓 내부 / 낮
명수가 밀차를 밀고 그 뒤를 제니가 따르며
장을 보고 있다.
명수는 한 손에 메모지를 들고 있다. 메모
를 보며 일회용 그릇 뭉치 하나를 밀차에
넣는다. 뒤따르던 제니, 그것을 집어내고 다
른 상표의 것으로 넣는다. 명수, 그런 제니
를 보지만 제니는 명수를 보지 않고 있다.
// 과일 코너. 명수가 오렌지를 열심히 비
닐에 넣고 있다. 메모를 보고 갯수를 세어
가며. 막 비닐봉지를 밀차에 넣었느데, 다른
곳에서 뭔가 하나를 들고 와 밀차에 넣은
제니. 오렌지 봉지를 꺼내더니 우루루 쏟아
내고는 옆의 다른 종류의 오렌지를 넣기 시
작한다.
// 카운터 부근.
줄을 서서 기다리고 있는 명수와 제니. 문
득 명수의 시선에 들어온 어린 아이가 이쪽
을 보며 키득키득 웃고 있다. 그 아이의 시
선을 따라 돌아보면 제니가 아이를 보며 우
스꽝스러운 표정을 짓고 있다. 명수로서는
처음 보는 제니의 그런 표정이다.
# 23 유니온 파크, 바베큐 근처 / 낮
도시 외곽의 공원. 공원의 나무 사이로 바
베큐 연기가 피어오른다.
테이블에 순 한국식으로 차려진 음식. 아까
수퍼에서 샀던 일회용 식기들이 보이고.
풋고추를 찍어먹는 흑인 혼혈아. 유창한 한
국어들.. 모두 한식구같은 정겨움.
테이블을 중심으로 둘러선 입양아들.
회비를 걷기 위한 수첩을 들고 있는 브레드
가 좀 떨어져 있던 명수를 끌고 테이블로
오며
브레드 얘가 내 동생 오명수야. 내 본명이 오기
철이잖어. 같은 오씨야. 같은 피.
잘생겼지? 응?
명수 어색한대로 고개 숙여 인사를 한다.
박수를 보내고 브레드에게 야유도 하는 분
위기 속에서
만복 (흑인혼혈) 근데 어디서 많이 보던 얼굴
같다. 미국에 처음이에요?
명수 (잠깐 긴장하는데)
브레드 나하구 닮아서 그럴거야. (명수옆에 붙어
서며) 봐봐. 닮았지? 이미지가 비슷하잖
아.
야유소리. 웃음소리..
명수, 어색하게 웃으며 누군가 건네주는 접
시를 인사하며 받고..
브레드 만복이 안됐다. 니네 아버지 기록은 좀
더 기다려봐야겠어.
만복 난 급할 거 없어. 우리 아버지가 급할거
야. 20년이나 아들을 못 봤으니까.
옆의 누군가가 만복을 치며 으이그.. 웃고..
명수, 제니를 찾아본다. 저만치에서 제니는
아이들과 어울려 따로 놀고 있다.
브레드 아 그리고 너 병석이. 넌 영어 좀 배워라.
생긴 건 미젠데 어떻게 입만 열면 전라도
냐.
병석 (백인 혼혈) 하이고 시방 성님이 넘헌테
충고할 입장이 아닐 것인디.
그라지 말고 성님이나 장가갈 생각하쇼.
노총각 냄시가 우리 동네꺼정 폴폴 날린
당게.
브레드 생각해줘서 고마워라우. 근데 자네 회비
가 두달 밀린 건 알제?
웃음소리..
제니는 아이들과 뭔가 하며 웃고 있다.
# 24 경기장 근처
족구공 하나가 하늘을 나른다.
거기 공 잡아 공.. 하고 떠드는 소리.
공이 날라간 쪽 외곽에 있던 명수가 공을
좇아 뛴다.
아이들과 놀던 제니가 문득 뛰어가는 명수
를 본다. 명수는 날렵하게 뛰어가 공을 잡
더니 경기장 쪽으로 멀리 던진다.
입양아들끼리 족구 대회가 열리고 있다.
처음에는 풀샷으로..
명수도 그 중의 하나로 뛰고 있다.
//
누군가 잘못 차낸 공이 포물선을 그리며 날
라간다. 명수의 시선으로 그 공은 아이들과
놀고 있는 제니에게로 날라간다. 소리를 지
르며 공을 피해 웅크리는 아이들.. 제니 바
로 옆의 여자애를 감싼다. 아이들 사이로
떨어진 공.
제니, 공을 집어 달려온 한사람에게 던져준
다. 그러다가 제니의 시선이 명수와 잠깐
마주친다.
//
이제 명수는 경기에 열중해있다.
폭발적으로 날렵하게 움직이는 그의 모습이
아름답게 비치고..
제니, 이제 경기장을 보고 있다. 제니의 관
심처럼 명수의 모습이 중앙으로 집중이 되
어간다.
# 25 바베큐 근처
테이블에 아직 남아있는 음식들 위로 빗방
울이 하나둘씩 떨어지기 시작한다.
# 26 경기장 근처
사람들이 점점 거세어지는 비를 피해 우루
루 사방으로 흩어지고 있다.
사람들은 커다란 나무 밑으로 들어선다.
나무 밑마다 우루루 모여있는 입양아들.
그 중에 제니가 있다. 제니, 보는 곳.
명수가 몇몇의 남자들과 테이블의 음식을
급하게 치우고 있다.
// 나무 밑
제니, 자기 발밑을 보고 있다. 그 옆에 명수
의 발이 달려와 옆에 선다. 명수, 옆에 선
제니를 본다. 제니는 추운 듯 보인다. 명수,
자기 손에 들린 잠바를 본다. 경기 중에 벗
어놓았던 잠바를 들고 온 것. 명수, 망설이
다가 제니에게 잠바를 내민다. 제니, 자기
앞으로 내밀어진 잠바를 보다가 받아든다.
받아든 상태에서 어쩔줄을 몰라 들고 있다
가 제니, 옆을 돌아본다. 명수는 비에 흠뻑
젖은 채 팔짱을 끼고 떨며 다른데를 보고
있다.
그렇게 추위에 떠는 명수와 잠바를 어정쩡
하게 든 제니가 나란히, 각자 딴 데를 보며
서있다.
비가 오고.
그 옆으로 다른 입양아들이 내리는 비를 바
라보는 나무 밑..
# 27 세탁소
재봉틀이 다르르 돌아간다. 익숙한 솜씨로
재봉질을 하고 있는 제니. 익숙하게 노루발
에서 옷을 꺼내 휙 뒤집는다.
모두 열심히 작업을 하고 있다. 명수는 세
탁기에서 옷을 한아름씩 꺼내고 있다. 브레
드도 뭔가 일을 하고 있고.
제니, 노루발 밑에 옷을 끼우다가 문득 옆
을 돌아본다.
창문으로 보이는 밖에 누군가 안을 기웃거
리다가 제니와 눈이 마주친다. 경철이다.
# 28 이층거실 / 밤
브레드, 명수, 경철이 둘러앉아 술판을 벌이
고 있다. 그들 가운데는 이미 한바탕 먹어
치운 술안주며 음식들.. 빈 술병..
브레드와 경철은 이미 잔뜩 취해있다. 경철
은 취하고 싶은 것이고, 브레드는 진짜로
취했다.
경철 이 새끼 완전 나쁜 놈입니다. 형님.
브레드 왜애. 싸우지 마아.
경철 형님이 몰라서 그러는데요. 이 새끼 내가
중학교 때부터 압니다. 그런데 진짜
나쁜 놈입니다. 이런 새낀 죽어야 됩니다.
정말입니다.
브레드 동생친구. 나도 알어. 근데 사람은 다 나
쁘다. 동생친구가 그걸 모르는거야.
경철 이런 새낀 친구도 뭣도 좇도 없어요. 여
기 왜 와있나 물어보세요. 저 새낀 지금
똥폼 잡고 있는 겁니다. 내가 압니다.
명수 (곤혹스럽다. 힐끗 보면)
저만치 테이블 쪽에 제니가 앉아서 내프킨
을 하나하나 접고 있다.
경철 지는 금메달 따봤다 이겁니다. 그러니까
지랄 우리가 다 지 기다릴 줄 아는 겁니
다.
브레드 금메달? 그음메달?
명수 너 가.
경철 뭐야 이 새끼야.
명수 가라구. 너 취했어.
경철 못 가. 이 씹새 내가 여기서두 니 서포트
냐. 니가 가라면 가 이 새끼야.
명수 (경철을 끌어일으킨다)
경철 놔 새끼야. 니가 나한테 이럴 수 있어.
명수 나와.
명수 끌고 나오려하고 경철 거칠게 뿌리치
느라 상이 차이고 요란한 소리가 나고 제니
돌아본다.
브레드는 여전히 몸을 못 가누며
브레드 싸우지 마. 사람은 말이야..
경철 너 새끼야. 나한테 이러면 안되잖아.
안 되잖아아..
경철, 명수에게 막무가내로 달려들고 그 바
람에 둘이 엉기며 테이블 위로 무너져 내린
다.
# 29 도로 / 밤
인적이 드문 엘에이의 빌딩 사이로 달리고
있는 왜곤.
# 30 차의 내부 / 밤
운전석에는 제니. 뒷좌석에는 명수와 경철
이 각기 다른 곳을 보고 있다가..
경철 너 이번엔 잘 뛸 수 있어.
명수 ...
경철 저번엔 씹새 운이 나빴던 거잖아. 지랄
하필 그 때 감기에 걸려가지구..
명수 32킬로였어.
경철 뭐가
명수 지난 번 아시안게임때 내가 뻗은 거. 32
킬로 지점이었다구.
경철 너 감기였어.
명수 감기 아니었어.
경철 감기야
명수 그냥 32키로가 되니까 더 뛸 수가
없드라구.
경철 (고집스레) 너 감기였잖아.
명수 숨이 안 쉬어져!
경철 갑자기 자기 쪽 문을 열어버린다. 돌
아보는 명수. 백밀러로 보는 제니.
# 31 도로 / 밤
왜곤이 급브레이크로 선다.
경철 이미 열려있던 문으로 튀어나오며 차
를 돌아가며 웃옷을 벗어던지며..
경철 나와 새끼야. 나와.
명수 쪽 문을 열어제치며
경철 이빨까지 말고 나와. 나 대가리
나빠서 니새끼 말 못알아들어. 그러니까
나와. 나와서 뛰어봐 새꺄.
명수 천천이 차에서 내린다.
경철 32키로? 시파. 좋다구우.
경철 먼저 뛰기 시작한다. 명수. 윗옷을 벗
어던진다. 명수 경철을 따라 뛰기 시작한다.
차 안의 제니. 핸들에 상체를 기댄 채 그들
을 본다. 어두운 거리로 뛰어가는 두 사람.
경철이 달려가며 으아악 비명을 질러대는
소리가 거리에 울린다.
제니 보고 있다.
# 32 거리 / 밤
텅빈 도시. 홈리스 한둘이 지나가며 보고..
그 거리를 달려오는 명수와 경철.
그들의 심장소리와 바람소리..
저 멀리 뒤에 제니의 차가 천천이 따르고
있다.
건물 사이를 뛰고 또 뛰고..
숨이 목에 차 심장이 터지도록 달리는 둘.
거리를 달려지나가는데..
마약을 한 듯한 히스패닉의 차가 요란한 소
리를 내며 지나가고..
그 차를 피하며 거리로 나동그라지는 경철
과 명수.
넘어진 채 가쁜 숨을 내뱉다가
경철 너 그거 알어. 나 중학교때부터 너 따라
뛰었어. 니 서포트루 국가대표 됐어.
너 금메달 따구 오픈카 타구 지랄 떠는
동안 나 동메달 하나 딴 게 전부야.
그래두 나 맨날 생각했다. 명수 저 새끼
만 죽자고 따라 뛰자.
그러다가 마지막에 한발짝만 응? 딱 한발
짝만 너보다 앞서자. 그럼 난 금메달이다.
근데.. (어느새 울먹이고 있다)
씹새 이제 니가 그만두면 난 누굴 따라
뛰냐. ...바라볼 데가 없잖아.
명수 (우는 경철을 본다)
경철 우는 자신을 못참아 일어나더니 눈물
을 훔치고 명수를 내려다본다.
경철 난 금메달만 따면 고향가려구 그랬다.
가서 땅 파먹구 살려그랬어.
넌? 여기서 뭐하구 있는거야.
꺼질려면 완전 꺼지지 여기서 뭐하고
있는거냐고. 으이씨..
경철 혼자 달려가버린다.
우두커니 일어나 앉은 명수, 경철의 모습이
어둠에 묻힐 때까지 바라본다.
문득 돌아보면 저만치 세워진 차 안에서 제
니가 명수를 보고 있다.
# 33 이층거실 / 새벽
소파가 놓인 앞 창문에 새벽빛이 파랗게 물
들고 있다.
사이드 테이블의 시계가 6시에 가까와지며
채칵채칵 소리를 내고 있다. 돌아가는 초침.
양쪽 방에서 요란하게 들리는 자명종 소리.
이윽고 소리가 하나씩 꺼지고.
제니가 방에서 반은 졸며 나온다. 습관처럼
부엌에서 물조리개를 들고 소파 쪽으로 가
다가 보면.
소파는 비어있고 명수가 덮고 잔 이불이 젖
혀져 있다.
그 뒤에 놓여져 있는 화분.
# 34 거리 / 새벽
엔젤힐. 양철로 되어있는 사인판이 덩그러
니 매달려 있는 언덕.
명수가 달려오고 있다.
사력을 다해 언덕길을 달려오른다.
언덕정상에 다다르기 전에 명수의 발걸음이
느려지다가 엉기다가 명수, 그대로 무너지
듯 주저앉는다.
헐떡이며 그렇게 주저앉아있는 명수.
# 35 세탁기 앞
명수, 세탁기 앞에 우루루 쏟아놓는 옷들.
더러워지고 땀에 절은 운동복들이다.
명수, 옷들을 내려다보며 멀거니 서있는데
제니가 옆으로 온다. 명수는 보지도 않고
옷들을 세탁기에 쓸어넣는다.
세제를 집으려 하다가 명수와 부딪힌다. 제
니가 굳어 가만이 있다. 명수, 옆으로 비켜
주면 제니 세제를 집어 세탁기 안에 넣는
다.
# 36 이층거실 / 낮
명수 혼자 소파에 누워있다. 머리맡의 시계
가 채칵채칵 초침소리를 내며 움직이고 있
다. 명수, 양팔로 얼굴을 가린다. 조금씩 더
커져가는 초침소리. 기억 속에 들리는 자신
의 호흡소리. 점차 커져가다가 갑자기 툭
끊기며 명수 팔을 내려 본다.
제니가 명수의 옆에 드라이된 세탁물을 쏟
아놓고 가버린다.
명수 가는 제니를 보고, 그리고 옆에 떨궈
져있는 옷들을 본다.
# 37 세탁소 앞 / 저녁
명수, 자신의 운동복을 한아름 들고 나오더
니 쓰레기통에 쳐넣어버린다.
명수. 그대로 뒤돌아 들어가버린다. 쓰레기
통에 쌓여진 명수의 운동복들..
세탁소에 다시 어둠이 깃들고 있다.
# 38 이층거실 / 새벽
창가의 화분이 댕그러니 놓여져있는데.. 어
디선가 들려오는 차소리. 청소트럭의 요란
한 소리다.
명수 이미 눈 뜨고 깨어있는 상태에서 그
소리를 듣고 있다. 청소차가 멈추는 소리.
잠시 선 차의 엔진소리. 명수 갑자기 벌떡
일어나더니 달려나간다.
# 39 세탁소 앞 / 새벽
달려나온 명수, 보는 곳에 이미 저만치 청
소트럭이 가버리고 있다. 그래도 혹시나해
서 쓰레기통의 뚜껑을 열어젖히는 명수.
안에는 아무 것도 남아있지 않다.
명수 일순 허탈해지는 기분으로 서있다. 모
든 것이 빠져나가는 기분.. 주위가 갑자기
다아 적막해보인다.
# 40 뒷마당 / 저녁
제니가 빈 바구니들을 끌어내어 쌓고 있다.
(혹은 세탁소에서 사용하는 어떤 물품들..)
# 41 이층거실 / 저녁
명수가 전화를 하고 있다.
명수 한국 가는 비행기표를 예약하려구 하는데
요. 예 서울이요. 왕복 티켓으로 왔는데
요. 표 넘버요? 잠깐만요.
명수 옆에 있던 가방의 앞주머니를 뒤져 티
켓을 찾는다.
가방에는 이미 명수의 남은 옷 몇벌이 쌓여
져 들어있다. 명수는 서울 갈 준비를 나름
대로 끝낸 상태이다.
# 42 세탁소 내부
종업원들은 없고. (휴일이다)
브레드가 컴퓨터 앞에서 뭔가를 정리하고
있다가 돌아본다. 뒷문으로 들어서는 명수.
명수 저 말씀드릴 게 있는데요.
브레드 마침 잘 내려왔네. 안 그래도 부를려구
했어. 동생 키가 얼마나 되지?
(아래 위로 살펴보며) 허리 사이즈는 어
떻게 되나.
브레드는 이미 컴퓨터를 치며 검색을 하고
있다. 옷걸이가 주루루 돌아간다.
명수 갑자기 말씀드리게 되서 죄송한데요.
브레드 (듣고 있지 않다.) 357번 357번 여깄다.
(옷걸이에서 크리닝된 옷 한벌을 꺼내들
어 명수에게 대어보며)
이거 색깔 어때. 이거 진곰탕집 사장껀데
이래뵈도 알마니야. 이 옷이 그래두 제일
긴 사이즌데. 가만있어봐. 여기다 넥타이
는 무슨 색깔을 해야하나..
브레드는 모니터를 검색하며 바쁘다.
명수, 얼결에 옷을 받아들고 얘기할 기회를
놓치고 우물거리는데, 들어서는 제니.
브레드 오우 제니야. 너 일루 좀 와봐.
(옆에 꺼내놓았던 비닐에 싸인 드레스 한
벌을 내밀며) 이거 딱 니꺼야. 너 검은
색 구두 있지. 내가 저번에 사준거 있
잖아. 그거하구 이거하구 코디해봐.
제니 (어리둥절해서 옷을 받아드는)
브레드 (명수에게) 오늘이 무슨 날인지 알어?
미국 독립기념일이야. 그래서 우리 세탁
소도 놀았잖아. 오늘 밤에 우리 파리 가
는거야. 양복에 드레스 입고 부우잣집
가든파리에 갈거야. 내가 초대장을 다
구해놨거든. 우리 기분 좀 내보자구.
왜? 오늘 노는 날이니까. 놀아야지.
(옷걸이를 주욱 훑어가며) 넥타이 넥타
이.. (문득 명수를 돌아보더니)
동생 구두 없지? 운동화 말고 구두.
(시간경과)
명수의 발에 약간 큰 사이즈의 하얀 구두가
신겨져 있다. 브레드의 것임이 분명한 요란
한 디자인의 구두이다. 주욱 위로 올라가면
껑충한 사이즈의 양복에 화려한 넥타이 차
림의 명수다.
명수, 웃을 수도 없는 기분으로 서있다. 그
앞에서 역시 양복을 차려입은 브레드가 명
수를 이리저리 보며
브레드 좀 짧긴 하네. 그래도 동생. 양복도 잘 어
울린다. 근데 이거 모레까지 찾으러 올거
니까 조심해서 입어줘. 단추같은 거 잃어
버리면 큰일나. 알지?
명수 (황당하지만) 예
그 때 브레드, 명수의 뒤를 본다.
명수도 뒤를 돌아본다.
거기 제니가 들어서고 있다.
검은 미니 드레스에 구두를 신은 모습. 처
음 보는 여성스러운 차림이다.
명수, 순간 충격을 받은 기분.
제니, 어설프게 브레드를 보고 미소짓는 듯
하다가 슬쩍 명수와 시선이 마주친다.
브레드, 너무나 흐믓해서 보고 있고.
제니 몇걸음 걸어오다가 어색한대로 한바퀴
돌아본다. 스스로도 우스운지 웃는다.
(제니는 이제 명수 앞에서 곧잘 웃는다. 그
만큼 경계심이 없어진 것)
# 43 이층거실
소파 옆에 놓여져있는 명수의 가방.
그 위에 비행기표가 대충 얹혀진 채.
# 44 도로 / 밤
브레드가 운전하는 왜곤이 달리고 있다. 조
수석에는 제니. 뒤에는 명수.
브레드와 제니가 함께 부르는 노래 소리가
들리고. (서울의 노래 정도)
# 45 차 내부
브레드와 제니가 함께 노래를 부르고 있다.
둘 다 아주 열중해있는데.. 한 귀절을 놓고
실갱이를 벌이기도 한다.
제니 아냐 오빠. 다같이 부르자..가 아니고
다아같이 부으르으자.
브레드 그렇게 했잖아. 다아같이 부르자.
이하 다시 합창이 되고...
뒷자리의 명수도 슬그머니 웃고 있다.
에스이오유엘.. 에스이오유엘..
앞자리의 둘은 신이 나서 목청껏 후렴을 부
르고 있다.
# 46 언덕길 / 밤
왜곤이 올라오고 있다.
올라오는데 소리가 갤갤거리더니 어느만큼
에서 멈춘다. 다시 시동을 거는 소리가 몇
번.. 엔진 헛돌아가는 소리가 들리다가 잠잠
해진다.
운전석에서 내리는 브레드. 머리를 긁어대
며 본넷을 연다. 명수도 따라 내리고.. 제니
가 창문을 열고 상체를 밖으로 빼어 보고...
// (시간경과)
본넷을 쾅 닫는 브레드.
순한 브레드가 나름대로 화가 나있다.
브레드 제니
제니 (이미 밖에 나와 서 있고)
브레드 나 결심했어. 7월이 끝나기 전에 이 차
바꿀거야. 뭘루 바꿀까? 무슨 차가 좋아?
제니 밤바람에 양팔을 감싸고 주위를 둘러
본다. 인적이라고는 없는 언덕길이다.
그 때 저 아래에서 헤드라이트를 비추며 차
한대가 올라온다. 제니가 앞으로 달려나가
며 손을 흔든다. 다가온 차의 헤드라이트에
제니와 함께 그 뒤의 두 남자가 비춘다. 차
는 조금 속도를 줄이는가싶더니 그냥 달려
지나쳐버린다.
멍청이 보고 있는 제니와 명수. 그런 그들
을 보며 브레드, 혼자 초조하다가..
브레드 오케이 오케이 오늘은 독립기념일이야.
그러니까 우린 놀아야돼. 어떻게 노냐하
면..
브레드 잠깐 생각해보고, 무슨 생각을 했는
지 차로 달려가 운전석을 열고 상체를 들이
밀고 라디오를 켠다. 주파수를 여기저기 맞
춘다. 뉴스소리.. 말소리.. 등등이 여러개 지
나가다가 드디어 감미로운 음악이 흘러나오
기 시작한다. 브레드 자랑스럽게 둘을 돌아
본다.
브레드 제니에게 한손을 내밀더니
브레드 아가씨
제니 키득거리며 브레드가 내민 손을 잡는
다. 어설프게 춤을 추기 시작하는 브레드와
제니. 브레드는 입장단으로 딴따라..소리까
지 내고 있고. 그러다가 브레드가 보면 저
만치 명수가 멀거니 서서 보고 있다.
브레드 명수를 향해 제니를 이끌어 다가가
서 명수를 제니 앞에 당겨 세워준다.
브레드 아름다운 밤이에요.
그러더니 자기는 부지런히 차로 달려가 샴
페인 정도를 꺼낸다.
명수와 제니가 어색하게 서로 마주보며 서
있다. 아무도 먼저 손을 내밀지 못하고.
브레드가 혼자 흥겹게 샴페인을 터뜨린다.
그것이 펑 하고 터지는 순간.
그들을 배경으로 하는 하늘에 불꽃이 터지
기 시작한다. 모두 불꽃을 쳐다본다. 경이로
움과 환희.. 음악소리..
그 분위기에 용기를 얻으며 명수, 제니의
한손을 잡는다. 제니, 거부하지 않는다. 명
수, 제니의 한손을 자신의 어깨에 얹고 다
른 손을 잡고, 허리를 두르고..
그리고 그들은 춤을 추기 시작한다.
아직은 서로 사이를 떼고 머뭇거리는 듯한
춤. 그래서 좀 더 애절한 느낌. 그들의 배경
으로 불꽃이 현란하게 터져오르고 있다.
# 47 수퍼마켓 내부 / 낮
명수와 제니가 장을 보고 있다.
명수는 밀차를 밀고 있고. 제니는 그 한걸
음 뒤를 따르고 있다.
명수가 휴지를 골라넣으려다가 두개의 상표
를 다 들어서 제니에게 보여준다. 제니가
그 중의 하나를 가르켜보인다. 명수, 그것을
넣고 나머지는 다시 올려놓고.
// 고기 코너
제니가 비닐에 싸여있는 고기 두 뭉치를 들
고 아주 고심하고 있다. 다시 놓고 다른 고
기를 들어 열심히 들여다본다. 옆에서 기다
리는 명수, 지겹지만 참고 있다. 제니, 고기
하나를 선택해서 밀차에 넣으려다가 다시
빼고 다른 고기를 들어본다. 명수, 겨우 참
는다.
# 48 도로 / 낮
왜곤이 달려오고 있다. 제니가 운전중.
그 옆자리에 명수. 앞 유리창에 빗방울이
떨어지기 시작한다. 제니 와이퍼를 작동시
키며 앞의 하늘을 고개를 빼어 본다.
# 49 공원 옆 도로 / 낮
이제 제법 굵게 내리는 빗 속에 왜곤이 서
있다. 시동을 걸어보지만 푸드득 소리와 함
께 다시 꺼진다.
명수가 제니를 돌아본다.
제니 다시 시동을 걸어보려 하고 있다. 이
제는 아예 아무 소리도 나지 않는다.
키를 돌리는 제니의 손. 조용한 차.
제니, 낙담하여 비가 내리는 창 밖을 본다.
명수, 제니의 눈치를 보는데..
제니 (다른 데를 보며 혼잣말처럼)
세상이 이상해졌어. 여긴 원래 여름에 비
가 안오는데..
그리고는 둘 다 말없이 앉아있다. 명수, 뭔
가 말을 하려고 돌아봤다가 그만둔다. (어
떻게 할거냐. 이대로 앉아있을거냐..정도의
말) 좁은 차 안에 침묵이 흐르고 있다.
차유리창에 하얗게 김이 서리면서 내부는
더욱 밀폐되어가는 느낌. 서로의 숨소리가
농밀하게 감지되고.
명수, 제니를 본다. 제니는 차의 저쪽으로
몸을 붙이다시피 하고 김이 서린 유리창에
의미없는 직선들을 그리고 있다.
명수 제니
순간, 제니 옆에 놓인 지갑을 들더니 차문
을 열고 밖으로 뛰어나간다. 명수도 놀라서
자기 쪽 문을 열며 보면, 제니는 내리는 빗
속을 달려가고 있다.
# 50 공원 전화 부근
명수가 빗 속을 달려와 보면 제니가 전화박
스에 서서 전화를 하고 있다. 명수, 돌아보
는 곳에 야외음악당의 지붕이 보인다.
# 51 야외음악당
어설픈 음악당의 지붕 아래에 명수와 제니
가 나란히 쭈그려 앉아있다. 제니도 명수도
비에 흠뻑 젖은 상태. 비는 아직도 내리고
있고. 둘 다 추위에 떨다가...
명수, 문득 시선을 느껴 돌아보면, 제니가
명수를 보고 있다. 얼굴에 웃음기가 있다.
명수, 웃는다. 제니도 키득거리며 웃는다.
그 웃음을 나눔으로 이제까지의 묘한 긴장
이 확 풀어지는 느낌.
//(시간경과)
야외음악당 앞 빈 의자들 위로 비는 계속
내리는데.
빈 무대에서 명수와 제니가 노래를 부르고
있다.
웃지도 않고 각자 진지하게 심수봉의 미워
요를 열창하고 있다. 제니는 마이크를 잡은
듯 한 주먹을 쥐고 몸짓까지 해가면서 불러
대고 있고.
맨 나중의 미워요를 바이브레이션을 잔뜩
넣어 마무리한다.
명수도 아주 진지하게 함께 마무리한다.
# 52 공원 옆 도로 / 낮
이제 비는 그쳤다.
레커차와 왜곤이 연결되어있다. 레커차가
출발해가자 앞바퀴가 들린 왜곤이 레카차의
뒤를 따라 끌려간다.
왜곤의 뒷자리에 제니와 명수가 나란히 타
고 있다.
# 53 왜곤 내부
명수, 제니를 돌아본다. 비에 젖어있는 제니
는 떨고 있다. 제니의 무릎에 놓여진 제니
의 손은 주먹을 쥔 채 추위를 참고 있다.
명수의 손이 떠는 제니의 손을 덮어준다.
제니, 놀란 듯 명수를 보는데 명수, 제니의
입술을 덮친다. 명수는 오래 참아온 갈증으
로 입맞추는데..입 맞추다가 문득 멈춘다.
제니의 반응이 이상하다. 제니는 눈을 뜬
채 마치 이곳이 아닌 다른 곳을 보는 느낌
으로 경직되어있다. 명수, 다시 한번 제니의
입술에 대어본다. 제니, 여전히 부동의 자세
로 앉아있다. 명수, 몸을 떼어 자기 자리로
간다. 제니를 살펴본다. 자기 앞만 노려보고
있는 제니의 눈에 눈물이 어리는 듯 싶다.
명수, 놀란 마음으로 다른 곳을 보다가 다
시 제니를 본다. 뭔가 크게 잘못되었다.
# 54 이층거실 / 낮
테레비젼 모니터는 꺼져있다.
소파에 앉아있는 명수, 힐끗거리며 보는 곳.
저만치에서 제니가 걸레질을 하고 있다.
그런데 제니는 어느만큼의 반경에서 이쪽으
로 오지않고 계속 그 경계선만 훔치고 있
다. 그런 제니를 보고 있다가 명수, 일어나
제니의 옆을 비켜 피해준다. 명수가 식탁
쪽으로 이동하자 그제야 제니는 소파 쪽으
로 걸레질을 해간다.
걸레질을 하는 제니의 손이 점점 느려진다.
제니도 명수를 의식하고 있는 것이다.
제니 (불쑥) 배고파요?
명수 (제니를 보는)
제니 아직 저녁 시간 안됐지만.. 비빔국수 먹을
래요? (얼른 명수를 보고 다시 시선 비
키고)
명수 ..어제는..
제니 어제는.. (걸레 들어 나오며 명수를 스치
며) 미안했어요.
명수, 가는 제니를 본다. 제니는 욕실로 들
어가 문을 닫아버린다.
남은 명수, 반쯤의 안도와 반쯤의 곤혹스러
움.
# 55 세탁소 내부 / 낮
모두 바쁘게 일하고 있는 중이다.
명수, 세탁물이 잔뜩 든 밀차를 밀며 좁은
통로를 밀고 가는데 그 앞으로 오던 제니와
부딪힌다. 제니는 뭔가를 잔뜩 들고 있다.
제니, 명수를 똑바로 본다. 전에는 시선도
마주치지 않았지만.
명수 짐짓 화난 표정을 하며 밀차를 좀 더
밀어본다. 제니 비키지 않는다. 명수 그제야
밀차를 뒤로 빼주며 슬그머니 웃는다. 제니,
명수가 비켜준 통로를 빠져나가고. 지나가
며 제니도 얼핏 웃는다.
(그들의 작은 장난이다)
제니 앞쪽으로 나와 들고온 다림질된 옷가
지들을 걸이에 거는데.. 돌아본다.
세탁소 앞으로 달려와 급정거를 하는 왜곤.
브레드가 허겁지겁 내리는 모습.
문으로 달려들어오며
브레드 제니 제니이..
제니 왜
브레드 (잠시 말을 못하고 있다가) 니 엄마 찾았
어. 이번엔 틀림없어. 니 엄마야. 제니. 진
짜 엄마라구.
제니 믿기지 않아서 브레드를 보고 있는데
손에 들린 옷가지가 떨어진다. 그 뒤에서
명수도 보고 있다.
(시간경과)
멕시컨 남자종업원이 기계를 끈다. 일순 조
용해지고. 종업원이 돌아본다. 다른 종업원
들도 다 보고 있는 곳.
카운터 쪽에서 제니가 수화기를 들고 서있
다.
그 옆에 서있는 브레드. 자기가 더 초조하
다.
브레드 안 받어? 지금 이 시간에 기다린다구 했
는데.. 안 받어? 통화중이야?
제니 쉬이..
저만치서 명수도 보고 있다.
제니 여보세요. ...
브레드 (굳어서 본다)
제니 여.. (목을 가다듬고) 여보세요.
저.. 거기 한국이죠? ..(브레드를 본다)
브레드 (종이를 들이밀어 보여주며) 한영선... 한
영선이냐고 물어봐
제니 저기.. 한영선씨 계세요? 여기 미국인데
요.
( 잠시 듣고 있다가..) 네 전데요. 제가
제니인데요. 저 네살 때 평화원에 들어갔
구요. 저기 저 왼쪽 등에 점이 있구요. 그
리고 발가락이... 어디요? 오른쪽 무릎이
요? 네.. 있어요. 흉터요. 딘거요.
(금방 눈물이 쏟아지며) ...엄마?
(브레드를 보며) 엄마래. (다시 전화에
대고) 예 맞아요. 평화원. 거기 네살
때... 노란색 원피스 입구.. 맞아요.. 예?
이명자요? ( 다시 브레드에게)
이명자래. 내 이름. 엄마 울어. 엄마 울고
계셔. 미안하다고 우셔. (자신도 펑펑 운
다) 네.. 네..
브레드 옆에서 자기도 울고 있다. 울며 뒤
에서 보는 종업원들에게 오케이 사인을 보
낸다
종업원들 너무 좋아하며 서로 악수하기도
하고 기뻐서 제니의 주위로 몰려든다. 명수
는 여전히 떨어진 곳에서 여린 미소를 띄고
보고 있다.
제니 (듣다가 울며 브레드를 보며) 나한테 동
생이 있대.
(다시 수화기에) 진짜 동생이에요? 몇명
이에요?
(그리고 상대의 말을 듣는데 점점 표정이
굳는다. 울음도 차츰 잦아든다)
브레드 (제니의 표정이 이상해서 ) 제니?
제니 (말없이 듣고만 있다)
브레드 왜 그래? 뭐라셔?
제니 (듣다가) 네.. 알아요. 네 .. 아니요. 나 좋
아요. 여기 좋아요. 알아요. 네. ...알아요.
(점점 멍청해지는 표정이다)
뒤의 종업원들이 심상치 않은 기색을 눈치
채고 브레드에게 홧?하며 묻는.. 브레드 조
용히 하라고 하는..
제니 (상대의 말을 주욱 듣다가...지겨울만큼
오래..) 전화, 고마왔습니다. 네. 안녕히
계세요. 네.
전화를 끊는다. 침묵 속에서 제니를 바라보
고 있는 사람들.
제니 이제는 거의 무표정이 되서 브레드를
본다.
제니 엄마. 새로 결혼했대. 그래서 아이가 셋이
래. 남편도 애들도 아무도 모른대. 내가
있는 거 모른대. 그래서 엄마는..
...무섭대.
브레드 ..(일부러 웃는) 그럴 리가 없어. 놀라서
그래.
놀라면 다 그러는거야. 만복이 알지. 만복
이도 처음에 전화했을 때 지네 엄마가 그
랬어. (버벅대며) 야 괜찮아. 다 그런거
야. 다시 전화하면 니 어머니도 정신 차
리고..
제니 미안하다고 했어. 미안한데.. 만나진 못하
겠대. 만날 수가 없대.
나보고 미국에 사니까 잘 됐다고. 잘 살
라고. ...행복하래.
브레드 더 이상 해줄 말이 없다.
명수, 뒤로 기대었던 벽에서 몸을 떼고 제
니를 본다.
제니는 가만이 전화기를 내려다보고 있다.
더 이상 울지 않는.. 끈 떨어진 것 같은 그
표정이 어쩐지 불안하다.
# 56 LA 도심 거리 / 낮
도로에 차들이 무수히 다니고 있다.
그 시끄러운 도심의 소음..
그 거리에서 올려다보는 높고 높은 빌딩.
(전에 제니가 올라갔던)
# 57 이층거실 / 낮
책상 앞의 브레드, 앉지도 못하고 엉거주춤
해서 전화를 하고 있다. 초조해서 상대의
신호가 떨어지길 기다리다가
브레드 만복이냐? 나야 브레드. 거기 우리 제 니
안갔니? 안갔지? 그치. 거기 갈리가 없
지. 아냐. 아무 것두 아니라니까.
끊어. 잘 있어라.
브레드 수화기를 내려놓고 초조하게 수첩을
뒤적거린다. 그 뒤에서 보고 있는 명수.
명수 내가 밖에 한번 더 돌아볼까요?
브레드 아니야. 괜찮아. 금방 올텐데 뭐.
걱정할 거 없어. 걱정 안해두 돼. 괜찮아.
하면서도 여전히 조바심을 내며 수첩을 뒤
적이고 다른 전화번호를 찍기 시작한다.
# 58 세탁소 앞 / 저녁
브레드가 걱정으로 지친 상태로 앉아있다.
명수가 거리의 이쪽저쪽을 괜히 기웃거려보
는데..
브레드 제니 그 놈은 열살 때 입양됐어. 공항에
서 양부모가 제니 보구 화냈대.
그 양부모는 더 어린 애를 원했나봐.
그 양부모두 몇년 있다가 이혼했어.
이혼하면서 아무도 제니를 맡으려구 안했
대. 무슨 말인지 알겠어?
이 세상에 제니를 원한 사람이 아무도
없었다구.
명수 (브레드의 불안이 전염되고 있다)
전에도 이렇게 없어졌던 적 있어요?
브레드 (듣지 않고 있다) 그러다가 열다섯살때
어떤 개같은 놈한테 당했어. 그건 정말
개보다 더 ...개같은 놈이었다구.
명수 (점점 초조해지고 있다) 공원 쪽에 한번
갔다 올게요. 거기 같이 가본 적 있거든
요.
브레드 그래서 그 앤 이 세상에 미련이라곤 하나
밖에 없던 놈이야. 무슨 말인지 알어?
그냥.. 지 엄마 찾고 한국에 가보는 거,
그거 붙잡고 살던 놈이라고.
그 놈은 갖고 싶은 것도 없고 하고 싶은
것도 없어. 나 미치겠어.
명수 더 기다릴 것 없이 달려나간다.
# 59 빌딩 옥상 / 저녁
옥상 위에 제니가 서있다. 바람이 불어 제
니의 머리칼을 흐트러뜨리고 있다.
제니는 이제는 구조물 위가 아니라 바로 난
간 옆에 서있다.
제니 아래를 내려다본다. 저 아래에는 길
위로 차들이 지나가고 있다. 제니 하늘을
본다.
하늘은 넓고 자유롭게 펼쳐져 있다.
아무 표정없이 아스라하게 꿈 꾸듯 하늘을
보는 제니, 몸이 조금씩 앞뒤로 흔들리기
시작한다.
# 60 도로
명수가 달리고 있다. 달려 지나쳐간다.
# 61 공원/ 늦은 저녁
명수가 달려오고 있다. 가쁜 숨을 몰아쉬며
둘러본다. 그들이 노래를 불렀던 무대는 비
어있고. 그 앞의 의자들도 비어있다. 다 비
어있다.
# 62 세탁소 앞 / 밤
터덜터덜 돌아오는 명수.
문득 위를 올려다본다. 거실 쪽에 불이 환
하게 켜져있다.
# 63 이층거실 / 밤
들어서는 명수의 시선에 들어오는 모습. 제
니가 가요무대 등의 테이프를 뒤적거리고
있다가 아무 일도 없었던 듯이 돌아본다.
명수, 맥이 빠지는 기분인데. 주방 쪽에서
브레드가 일부러 명랑하게 말을 건다.
브레드 어서 와. 우리 저녁에 육계장 먹을거다.
숙주나물이 없어서 콩나물로 하는데
이거 지 맛이 날래나 모르겠어.
브레드는 열심히 파를 다듬고 있는 중이다.
브레드 제니 육계장 먹을거지?
제니 싫어.
브레드 왜애?
제니 배 안고파.
브레드 (쫓아오며) 왜 그래. 너 점심도 안 먹었
잖아. 밖에서 뭐 먹었어?
제니 오늘 그냥 잘래.
제니는 테이프를 하나 플레이어에 꼽아넣고
있다. 테잎은 제대로 들어가지 않고 있다.
제니 다시 시도한다.
브레드 그러지 말구 그럼.. 그냥 콩나물국 끓여줄
까? 시원하게 국물이래두 먹자. 어?
제니 테잎을 빼려는데 빠지지도 않는다. 제
니의 손길이 점점 거칠어지더니 테잎을 억
지로 잡아뺀다. 테이프가 걸려서 늘어져있
다. 심상치 않아 보던 브레드..
브레드 놔둬. 내가 고칠게. 그냥 놔둬어.
제니 테이프를 자꾸 잡아뺀다. 자꾸만 늘어
지는 테이프. 제니 울기 시작한다. 마치 테
이프 때문인 듯이. (테이프들에는 가요무대
23 정도의 제목이 잘 보일 것)
브레드 (속이 상해서) 놔두라고 했잖아.
제니 소리내어 울기 시작한다. 브레드, 자기
도 울 것 같은 심정에 제니의 손에서 테이
프를 뺏어들며
브레드 이거 고물이라서 그래. 벌써 바꿨어야 했
다구. 우리집에 고물이 한두개냐. 고물차.
고물 비디오. 그러니까아..
제니 (아예 두 발을 뻗으며 서럽게 울고 있다)
브레드 (더 못 참고) 잊어버려. 그 여자 니 엄마
아냐.
제니 (울며 브레드를 보는)
브레드 (울것 같은 심정에 점점 더 화를 내며)
그 여자 미친 여자야. 니 엄마가 아니래
니까. 내가 나중에 다 알아봤어.
그 여자 아니야. 니 진짜 엄만 따로
있다구.
제니 (울며) 나두 알어. 그 여자 내 엄마 아니
야.
브레드 그래 그거야. 니 엄마가 아니라구.
제니 오빠가 잘못 찾은거야.
브레드 (제니를 안아주며) 내가 잘못했어. 제니.
미안해. 내가 잘못했어.
보고 있는 명수. 끼어들 자리가 없다. 브레
드에게 안겨서 울고 있는 제니.
브레드 우리 다시 시작하자. 첨부터 다시 찾는거
야. 이번엔 진짜루 찾자. 조금만 더 기다
려봐. 조금만 더 기다리면..
제니 브레드를 밀치고 나온다.
브레드 제니
제니, 울음끝의 흐느낌은 남아있지만 이제
울음은 그쳤다.
제니 거짓말이야.
(옆의 테이프들을 휙 집어던진다. 거칠지
는 않게. )
브레드 (애타서) 제니야.
제니 (일어나 서성이다가 손에 잡히는 거 하나
던지며) 거짓말이잖아.
(그러다 화분을 든다)
브레드 (놀라) 제니
제니 (미련없이 화분을 툭 던져버린다)
브레드 놀라서 정지하여 보는데 제니 말없
이 자기 방으로 들어가버린다.
명수, 자기 앞을 스쳐가는 제니를 보고 다
시 브레드를 봤을 때, 브레드는 넋이 나간
사람처럼 깨진 화분을 내려다 보고 있다.
// (시간경과)
주방쪽 싱트대 밑에서 작은 빗자루와 쓰레
받기를 찾아내는 명수.
들고 거실 쪽으로 간다.
브레드는 화분에서 흩어진 흙들을 비닐 봉
지에 꼼꼼이 쓸어담고 있는 중이다. 손으로
살살 모아서 정성스레.
명수, 옆에 와서 쭈그려 앉는다.
명수 내가 치울게요.
브레드 치우는 거 아니야. 잘 모아 담는거지.
(떨어진 줄기를 조심스레 들어서 비닐의
흙에 잘 꼽으며) 이거 잘 모아야 돼.
(속으로 울고 있다) 이게 무슨 흙인 줄
알어. 이거 한국의 흙이야.
누가 갖다줬거든. 한국 갔다오면서..
우리 제니가 여기다 무궁화를 심은거라
구.
명수, 빗자루를 옆에 놓고 비닐을 잡아주고
있다.
브레드 우리 제니.. 지 세수하는 건 잊어두
여기 물 주는 건 잊지 않았다구.
이걸 깨면 어뜩해. 이거 죽으면 어뜩해.
브레드, 바닥의 흙을 손가락으로 정성스레
쓸어모으고 있다.
# 64 세탁소 뒷마당 전경 / 아침
주욱 내려오는 이층거실의 창문.
그 앞에 늘 있던 화분이 없다. 텅 비어있다.
# 65 이층거실 / 아침
식탁에는 한국식의 아침이 정성스레 차려져
있다. 그러나 누구도 별로 손대지 않은 듯
그대로 놓여있다.
모양좋게 만들어놓은 달걀찜, 식어버린 콩
나물국. 등등..
소파는 비어있다. 소파 옆에는 비닐 봉지가
놓여있는데 담겨있는 흙에는 말라가는 잎사
귀의 줄기가 볼품없이 꼽혀있다. 거의 말라
서 죽어있는 듯이 보인다.
# 66 세탁소 내부
여전히 일상적인 일들이 진행되고 있다.
스팀이 퍼져 올라가고, 거의 기계적으로 종
업원은 웃통을 벗다시피 다림질을 하고 있
고, 명수는 거대한 세탁기에서 세탁된 옷들
을 꺼내 바구니에 담는다. 옷걸이가 드르르
르 돌아가며 멈추면 브레드는 옷걸이의 옷
을 재빨리 익숙하게 빼서 손님에게 건네주
며 의례적인 미소와 인사를 건넨다.
명수, 밀차에 가득 담긴 세탁물을 밀며 좁
은 통로를 진행해간다. 맞은편에서 옷을 들
고 오던 제니와 부딪힌다. 제니는 아무 말
없이 뒤로 물러나 길을 비켜준다. 명수, 그
런 제니를 물끄러미 보지만 제니는 명수의
시선을 받지 않고 다른 곳을 보고 있다. 명
수, 통로를 지나간다. 뒤를 돌아보면 제니가
그 통로로 가고 있다.
# 67 뒷마당 / 밤
제니가 세탁소에서 바구니들을 끌어내어 쌓
는다.
마악 바구니 하나를 들어 올리는데
명수E 제니
제니 후딱 돌아본다. 거기 명수가 서있다.
명수 머뭇거리며 한손을 들어보인다. 그 손
에 들린 것은 새 화분이다. 화분에는 말라
가는 무궁화 줄기가 꼽혀있다.
명수 이거 새로 담았는데 살 수 있을진 모르겠
어요.
제니 주춤거리며 다가와 화분을 받아든다.
명수 죽어도 신경쓰지 말아요.
(어눌하게 나름대로는 열심히 )
꼭 한국에 흙이 아니래도 꽃은 피니까..
한국에 흙같은 건 얼마든지 갖고
올 수 있어요. 꽃씨도 다시 구하면 되고..
제니 (잠자코 화분만 내려다보고 있다)
명수 화분이 깨지면 새로 사면 되요.
제니 (천천이 고개를 들어 명수를 보는데 눈물
이 그렁해져있다)
명수, 제니의 이마에 흩어져 내린 머리칼을
쓸어넘겨준다. 그리고 나서도 제니의 얼굴
가에서 손을 떼지 못한다. 제니의 얼굴을
스치듯 말듯 쓸어내리는 명수의 손길.
명수, 머뭇거리며 제니의 이마에 입술을 댄
다. 제니, 눈을 감는데 고였던 눈물이 누루
루 흐른다. 명수, 조금씩, 꿈결처럼 제니의
입가로 입술을 스쳐간다.
그들 사이에는 제니가 두손으로 들고 있는
화분이 있고. 화분을 사이에 두고 명수가
제니에게 아주 조금씩 입맞춘다. 상처받은
서로의 영혼을 위로하는 듯한 느낌으로.
가로등이 켜져있는 고요한 뒷마당이다.
# 68 세탁소 앞 / 새벽
청소차가 요란한 소리를 내며 지나간다.
청소차가 저만치 빠질 때쯤 세탁소 이층에
서 울리는 두개의 자명종 소리.
# 69 이층거실 / 아침
욕실에서 브레드가 세수를 마치고 나오고
있다. 수건으로 물기를 닦으며 지나가는 저
쪽 소파에서 명수가 이불을 개고 있다.
명수, 이불을 옆의 장에 올려놓고 돌아서다
보면, 저만치 제니가 커다란 종이봉지를 들
고 쭈삣거리고 있다.
명수, 저도 모르게 브레드가 들어간 방문
쪽을 한번 흘낏거리고 제니에게 다가선다.
제니 들었던 봉투를 내민다.
명수, 받아서 안을 들여다본다.
제니 저번에 버렸던 거 아까와서 갖다 놨어요.
거기 태극기 모양도 찍혀있고...
명수 (봉지 안에서 자기의 운동복 몇개를 꺼내
보는)
제니 (할말 다했다는 듯 가려다가.. )
몇 키로라고 했어요?
명수 예?
제니 그때.. 몇키로가 되면 더 안뛰어진다구..
숨이 안 쉬어진다구..
명수 ... 32키로요.
제니 (여전히 눈을 맞추지 못하면서)
그럼 거기까지만 뛰면 안되나..
꼭 끝까지 다 뛰어야 되요?
(비로소 묻는 눈으로 명수를 보는)
명수 (뭐라 답할 말을 찾지 못하고 좀
웃는데)
제니, 어색한 듯 얼른 돌아서 자기 방으로
간다. 명수. 손에 들린 운동복을 보며 돌아
서다가 멈칫.
브레드가 자기 방에서 나오다 말고 서서 좀
멍한 눈으로 보고 있었다.
# 70 도로 / 낮
길고 길게 뻗어있는 직선도로가 보인다. 인
적이 드문 길은 아주 멀고 멀어보인다.
길의 이쪽 끝에 명수가 혼자 서있다. 운동
복을 입고 있다. 명수는 가볍게 다리를 풀
며 길의 저 끝을 노려보고 있다.
드디어 마음을 다잡고 출발자세에 들어간
다. 달리기 시작한다. 그러나 몇걸음 뛰어가
지 못하고 그만두더니 다시 출발 지점으로
돌아온다. 다시 처음의 자세로 돌아간다. 출
발 자세를 취하다가 다시 풀고...
나름대로 지금 공포를 극복하고 출발을 해
보려고 하는 중이다.
명수 호흡을 고르며 길을 노려보다가 어느
순간 달려나간다. 명수가 달린다. 명수가 길
의 저 끝까지 달려가고 있다. 아주 외롭고
고독하게. (음악도 없는 분위기)
# 71 세탁소 내부 / 저녁
종업원들이 퇴근하고 있다. 브레드 일일이
인사해서 내보내고 있고.
그 뒤에선 명수가 어질러진 것들을 부지런
히 치우고 있다.
제니가 재봉틀 주변 정리를 끝내고 나오다
가 문득 브레드를 본다. 브레드가 제니를
힐긋거리고 있었다.
왜? 하는 얼굴로 보면
브레드 (머뭇거리듯) 제니 너.. 입술 발랐니?
제니, 당황해서 손으로 자기 입술을 부벼
닦으며 뒷문 쪽으로 간다. 브레드의 시선에
명수가 지나가는 제니를 돌아보는 모습이
보인다.
# 72 이층거실 / 저녁
소파 주변에 세사람이 이리저리 앉아 일제
히 텔레비젼을 보고 있다. (브레드가 중간
인 위치)
언제나 가요무대가 흘러나오던 텔레비젼 모
니터에 미국 프로그램 중의 하나인 코미디
가 보이고 있다. ( VTR은 고장난 상황)
모니터에서 코미디언들은 열심히 웃기고 있
고, 관객들의 웃음소리가 들리는데 세사람
은 멀뚱하게 모니터만 바라보고 있다.
브레드는 현재 많이 졸린 상태. 눈을 비비
며 열심히 보고 있다.
# 73 뒷마당 / 밤
제니가 세탁소 뒷문으로 빈 바구니 몇개를
끌고 나와 마당에 놓는다. 다시 들어가려다
가 문득 이층 창문을 올려다본다.
불이 켜져 있는 창문 안으로 지나가는 명수
의 모습이 보인다. 화분도 보이고.
제니, 뒷걸음질을 쳐서 벽에 붙으며 명수가
좀 더 잘 보이는 장소로 옮긴다.
제니 (혼잣말처럼) 요를 펴고 있다.
창문 너머로 펄럭이며 시트를 펴는 모습이
비친다.
제니 베게를 놓는다.
명수가 숙이고 뭔가 하는 모습..
제니 불 끈다.
명수, 소파 옆의 스탠드 불을 끈다. 어두워
진 창문.
제니 혼자 미소짓고 들어가려다 다시 창문
을 올려다본다.
제니 창문을 연다. ...
아무 기색이 없다.
제니 (주문을 외듯) 창문을 연다. 열고 날 본
다. 본다. 본다. 본다.
물론 아무 기척이 없다.
제니, 단념을 하고 혼자 미소지어 불꺼진
창을 올려다보다가 뒷문으로 들어가버린다.
제니가 문을 닫음과 거의 동시에 이층 거실
의 창문이 열린다.
명수가 밤하늘을 내다본다. 명수의 시선이
가로등쪽으로 온다. 거기 켜져있는 가로등.
그리고 며칠전 밤의 추억.
// (시간경과 )
이제 햇살이 들고 있는 이층 창문가.
화분에 자라나는 줄기가 이제 물기를 머금
어 다시 살아나고 있다.
# 74 이층거실
브레드가 책상 앞에서 뭔가 부지런히 찾다
가 슬쩍 주방 쪽을 돌아본다. 거기 제니가
음식 준비를 하고 있는 뒷모습.
브레드 혼자 바빠서 자기 방으로 들어간다.
// 주방 쪽.
불고기감의 고기가 그릇 안에서 녹여지고
있고.
제니, 눈이 매워서 찡그려가며 양파를 강판
에 갈고 있는 중이다. 훌쩍이는데..
브레드E 제니 내 베네똥 가방 어딨지?
제니 오빠 저번에 골프여행 갈 때 갖구 갔었잖
아.
브레드E 글세 그 담에 엇다 놨지..
제니 짧은 팔소매로 눈물을 훔치며 다음 양
파를 집어드는데. 브레드가 뒤로 오며
브레드 제니
제니 오빠 옷장에 없어?
브레드 나 내일 어디 좀 갔다 올게.
제니 (보는) 어디?
브레드 그냥 삼박사일쯤.
제니 (의심스럽다는 듯 실눈으로 보는)
브레드 너 괜찮겠어?
제니 뭘? (하다가 브레드의 뒤로 시선이 간다)
브레드 (돌아보면)
거기 명수가 지나가다가 제니를 보고 피식
웃는다.
브레드 제니?
제니 (명수를 보는 채로) 어?
브레드 삼박사일동안 세탁소랑.. 다 괜찮겠냐고.
제니 (명수가 욕실로 들어가 문 닫는 걸 보고
서야 브레드를 본다)
언제 간다구?
브레드 (말없이 보는)
제니 근데 불고기 양념 어뜩게 하지? 양파 갈
아넣고 간장하고 마늘. 파. 설탕도 넣나?
맞아 참기름도 넣는다 그치?
말없이 제니를 보던 브레드, 뒤돌아 가버린
다.
(시간경과)
욕실에서 세수수건으로 물기를 닦으며 나오
던 명수가 보면.
브레드가 소파 옆의 반닫이를 열고 명수의
가방에 명수의 옷들을 쳐넣고 있다.
명수 형 뭐해요?
브레드 내가 내일 여행을 가거든. 삼박사일. 그래
서 지금 짐 싸구 있는거야.
명수 근데... 그거 내 옷인데요.
브레드, 옷가지들이 삐죽 나와있는 가방을
들고 욕실로 간다.
명수 돌아보면, 제니가 부엌 앞에서 이쪽을
보고 있다.
# 75 욕실 내부
브레드, 칫솔과 면도기를 가방에 쳐넣는다.
명수 뒤따라와 보는데
브레드 가방을 명수에게 퍽 안긴다.
브레드 가자.
명수를 치며 먼저 나간다.
# 76 모텔 전경
카운터에서 브레드가 계산을 하고 있는 모
습. 그 뒤에 선 명수의 모습.
(혹은 모텔의 간판 잠깐)
# 77 모텔 방
문이 벌컥 열리며 브레드가 먼저 들어서더
니 안을 휘이 둘러본다.
비켜서며 뒤쪽에 따라온 명수를 끌어넣는
다.
브레드 나흘치 방값 미리 냈으니까 여기서 지내.
명수 (좀 어이없는 기분) 형.. (말하려는데)
브레드 세탁소에도 나올 거 없어. 문 닫을 거니
까. 요 밑에 식당 있으니까 거기서 밥 사
먹고. (주머니를 뒤져 지폐를 몇장 세어
주며) 타운 나가면 노래방도 있고, 밤새
하는 술집도 있고..
그럼 잘 있어. 갔다 와서 연락할게. 바이.
그냥 나가버린다. 명수, 어이없는 기분으로
서있다가 들고있던 가방을 침대에 던진다.
# 78 세탁소 앞
닫혀진 유리문에 커다랗게 휴업을 한다는
안내문이 한글과 영어로 쓰여있다. 대단히
서툰 글씨다.
택시 한대가 대기하고 있고, 여행복을 입은
브레드가 가방을 택시 뒤에 싣고 있다. 기
사가 짐을 받아 싣고 운전석으로 가고.
이만치에서 보고 있는 제니.
브레드, 뒷자리로 가서 문을 여는데
제니 오빠.
브레드 우물거리며 서있다.
제니 다가오더니 옆에 선다.
브레드 할 수없이 제니를 바라보면.
제니 (미소를 지어보이고) 잘 갔다 와.
브레드 (그제야 마음이 놓이며 미소짓는) 어
제니 운전 조심하고.
브레드 밥 꼭꼭 챙겨먹어.
제니, 브레드의 목을 끌어안는다. 브레드도
제니를 안아주고.
그렇게 남매처럼 안고 있다가 풀고.
브레드 (머리에 얹어놓았던 요란한 선글라스를
내려쓰며) 간다.
씩씩하게 차에 오른다.
차가 출발해가고... 제니 손을 흔들어준다.
# 79 동장소 시간경과
그렇게 제니가 섰던 곳에.. 시간 경과되고..
아무도 없고..
세탁소 문은 닫겨 있고... 그리고 어둠이 내
린다.
# 80 이층 거실 / 늦은 저녁
제니가 청소기를 밀며 거실을 가로 질러간
다.
프레임 아웃되었던 제니가 다시 청소기를
밀며 돌아온다.
문득 제니, 선다.
눈길이 저절로 비어있는 소파 쪽으로 간다.
//
소파 밑을 청소기로 훑어내는 제니. 손길이
점점 느려지다가 청소기를 끄고 제니 소파
에 앉아본다. 좀 더 편히 앉는다.
//
청소기는 의자 옆에 대충 걸쳐져 세워져있
고.
제니는 바닥에 누워 발을 의자에 걸치고 멍
청이 천정을 보고 있다.
# 81 모텔 방
명수, 의자에 널부러져서 테레비젼을 보며
리모콘을 들고 수없이 채널을 바꿔대고 있
다.
E (전화벨소리)
명수, 잠시 전화가 있는 곳을 찾다가 받아
든다.
명수 핼로우
제니F 나에요 제니
명수 제니..(리모콘으로 티브이 볼륨을 줄이다
가 도로 크게 하고 허둥거리다 겨우 끈
다)
제니F 참기름병 어디 있는 줄 알어요?
명수 (못 듣고) 뭐요?
# 82 이층 거실
제니가 소파에 앉아있다.
제니 참기름! 저번에 큰 거 사왔잖아요.
...어디요? 찬장 밑에? 오른쪽의 거?
잠깐만요...
제니 수화기를 귀에서 떼고 잠시 시간을 보
낸다. 그러면서 테이블을 움직거리고 다른
것을 들어 소리를 내고는 다시 수화기를 들
더니
제니 아 여기 있다. 찾았어요. 고마워요. ...
그럼 .. 잘 자요. ...
# 83 모텔방
명수 수화기를 들고 있다.
명수 어. 잘자요. (그리고 수화기를 금방
놓지 못하고 있는데)
# 84 이층 거실
제니 역시 수화기를 끊지 못하고 있다가..
또 할말이 생각났다.
제니 거기 편해요? ...방 지저분하지 않나? ...
예.. 그럼.. 주무세요.
이제는 정말로 수화기를 끊으려는데
명수F 제니
제니 (얼른 다시 귀에 대며) 예?
# 85 모텔방
명수 내일은 70킬로를 뛰어보려구 해요.
아침에 30킬로. 오후에 40킬로. ....
# 86 이층거실
제니 아무 말 없이 숨죽여서 다음의 명수
말을 기다리고 있다.
# 87 모텔방
명수 나 뛰는 거... 봐줄래요?
# 88 이층거실
제니 마음이 놓이며 활짝 웃는다. 명수가
보지 못하니까 맘놓고 소파로 넘어지며 소
리없이 좋아한다.
# 89 뒷마당에서 보이는 전경 밤
이층 창문에 따스한 스탠드 불빛이 새어나
오고 있다.
그 위로
제니E 누구 노랜데요?
명수E 가수 이름은 모르겠어요. 아주 옛날건데.
제니E 불러봐요
명수E 지금요?
제니E 지금.
명수E (목을 가다듬는)
제니E (작은 웃음소리)
# 90 이층거실
소파에 누워있는 제니. 귀에 대고 있는 수
화기에서 서툰 명수의 노래 소리가 들린다.
명수소리 가도 가도 끝이 없는 외로운 이
나그네길..
소리 죽여 웃던 제니.. 차츰 웃음이 잦아들
고 노래에 귀기울인다.
# 91 모텔 전경
유리창으로 보이는 내부.
침대에 누운 명수가 수화기를 들고 노래를
부르고 있다.
# 92 세탁소 전경 / 새벽
동이 터오고 있다.
# 93 모텔방 / 새벽
명수가 침대에 잠들어있다. 손 옆에 수화기
가 떨어져있다.
창문으로 들어온 햇살이 얼굴에 비치고, 찡
그리며 돌아눕는데..
누군가 문을 쾅쾅 두들기고 있다.
명수, 조금 잠이 깬다. 어리벙벙한 상태로
일어나다가 옆에 떨어져 있는 수화기를 보
고 들어서 귀에 대본다. 물론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는다. 다시 문을 두들기는 소리.
명수 수화기를 얹어놓고 비칠비칠 걸어가
문을 연다.
제니가 문을 두들기려는 자세로 서있다가
어색한 듯 웃는다.
제니 하이
명수 (목이 잠겨서 반가와서) 하이
# 94 엔젤힐 / 낮
명수가 사력을 다해서 언덕을 뛰어올라가고
있다.
그 뒤를 제니가 자전거로 열심히 따라오르
고 있다.
제니의 속도가 점점 느려지며 명수와의 차
이가 벌어지고 있다.
제니 결국 넘어지다시피 내려서서 달려가는
명수를 본다. 명수는 힘을 다해 달려가고
있다.
# 95 세탁소 앞 / 저녁
명수가 자전거를 끌고, 자전거를 사이에 두
고 제니가 함께 걸어오고 있다.
둘다 말이 없다. 명수가 제니를 힐끗 보는
순간 제니도 명수를 돌아봤다가 시선이 마
주치고 어색하여 각자 딴데를 보는 둘.
세탁소 앞이다. 명수, 자전거를 제니 쪽으로
기울여준다.
제니, 자전거를 받아들면, 명수 어색하게 한
손을 들어보인다. 제니, 미소짓고 약간 고개
숙여보이고 자전거를 끌고 뒷마당 쪽으로
간다. 가며 제니는 뒤를 의식하고 있다. 제
니, 못 참고 돌아보았을 때 명수는 저만치
달려가고 있다.
그 위로
명수E 학교 다니면서 공부는 해본 기억이 없어
요.
# 96 모텔방과 이층거실 / 밤
와이퍼로 양쪽 화면이 대칭적으로 만들어지
며 마치 하나의 화면 안에 있는 느낌.
명수는 침대에 길게 누워 전화를 하고 있
고. 제니는 소파에 책상다리로 앉아 전화를
하고 있고.
명수 어느날 지각을 했는데요.
교문에 체육선생이 서있었거든요. 도망을
쳤는데 체육선생이랑 지도부 형들이랑
다 쫓아오다가 도저히 못 잡겠으니까 그
러드라구요.
육상부 들어오면 용서해주겠다구.
# 97 엔젤힐 / 낮
명수가 달리고 있다. 고개를 돌려 뒤를 본
다.
제니가 저 뒤에서 기를 쓰고 자전거를 몰아
오다가 결국 자전거를 팽개치며 나동그라져
버린다.
명수 언덕을 달려올라간다.
순간 명수, 발이 엇갈리며 넘어져 버린다.
엎어진 채 잠시 있다가 한바퀴 굴러 하늘을
본다.
아직도 가쁜 숨을 몰아쉬며 명수, 손목에
차고 있던 스톱 워치를 본다.
# 98 거리 / 저녁
명수가 자전거를 타고 그 뒤에 제니가 타고
오고 있다.
명수의 허리를 잡은 제니의 손이 처음에는
거리가 있다가.. 조금 더 깊이 안는다. 명수
의 등 뒤에 닿을 듯 고개를 기대고 있는 제
니.
# 99 세탁소 앞 / 저녁
둘이 함께 탄 자전거가 도착했다.
자전거를 멈추고, 제니가 내리고 명수도 내
리고.. 하는 와중에 둘의 작은 접촉들..
명수가 자전거를 내어주고, 제니가 받아잡
고.. 그리고 잠시 움직이지 않는다.
명수는 제니를 보고, 제니는 자전거만 내려
다본다.
문득 제니가 명수를 올려다보자. 명수, 갑자
기 스스로에게 짜증나는 얼굴이 되며 뒷걸
음질치다가 돌아서 뛰어가기 시작한다.
뛰어가는 명수를 보는 제니.
그 위로
제니E 그게.. 네살때였어요.
# 99 모텔과 거실 / 밤
침대에 누운 명수와 역시 소파에 누운 제
니. 전날보다 좀 더 풀어진 분위기.
제니 고아원 원장님이 그러는데 어느날 아침에
나가보니까 대문 앞에 내가 앉아있드래
요. 노란색 원피스를 입고.
그래서 들어가자고 그랬드니 내가 그러드
래요. 안돼요. 우리 엄마가 데리러 온다고
그랬어요. (킥킥 웃고)
아주 똑똑했던 거 같아요. 네살짜리가.
명수 그 때 생각이 나요?
제니 음.. 내가 기억을 하는건지.. 얘길 들어서
아는건지 모르겠어요.
# 100 엔젤힐 / 낮
사력을 다해 뛰어 올라오는 명수.
언덕 꼭대기에 이르러 멈추어 헉헉대며 시
계를 본다. 만족한 시간이다.
그 때 저 아래에서 자전거를 끌고 낑낑대며
올라오던 제니가 명수를 본다.
명수, 두 팔을 번쩍 들어보인다.
제니, 자기도 활짝 웃으며 한팔을 들어보인
다.
# 101 모텔 전경 / 밤
혹은 모텔의 비어있는 긴 복도. 적막하게.
# 102 모텔 방 내부 / 밤
명수, 웅크리고 앉아있다. 그러다 돌아보는
곳에 전화기가 놓여있다.
명수, 전화기를 집으려다가 멈춘다. 멈춰서
그냥 본다.
# 103 도로 / 밤
명수 달리고 있다. 밤 길에 무섭게 질주해
오는 차에 받힐 뻔하면서 길을 건너 달린
다.
# 104 세탁소 앞 / 밤
달려온 명수, 거친 숨을 몰아쉬며 왜곤을
짚어 숨을 고른다. 이층을 올려다본다. 불이
꺼져있다.
# 105 뒷마당
명수 이층을 보며 뒷마당으로 들어선다. 이
층의 제니 방에 불이 켜져 있다. 애타는 마
음. 그러나 차마 소리내어 부르거나 문을
두드리지는 못하는 마음.
그 때 문득 가로등 두개의 불이 꺼진다. 그
바람에 멈칫했던 명수, 제니의 방 창문을
올려다보며
명수 (작은 소리로) 제니 ..제니.. 제니..
아무런 기척이 없다가 제니의 방 불이 꺼져
버린다.
명수 잠시 더 보고 단념한다. 뒤의 벽에 기
대어 창문을 올려다본다.
이제 더 기대는 하지않지만 그래도 한번
더.
명수 (낮게) 제니.
잠시의 침묵.
그리고. 다음 순간. 뒷문이 벌컥 열린다. 제
니다.
마주보는 두사람. 그리고 누가 먼저랄 것
없이 서로에게 다가가 안는다. 명수, 너무나
소중하고 절실하게 제니를 안고 또 안는다.
이제는 둘 다 자제의 한계를 넘었다.
# 106 뒷마당에서 본 전경 / 아침
아침이다. 창문으로 보이는 커튼.. 그 옆에
화분. 그 너머 그 안의 거실.
현관문이 열리더니 브레드가 들어선다.
브레드 제니이.. 나 왔다. 제니이..
# 107 제니의 방
제니를 뒤에서 끌어안고 자고 있던 명수.
눈이 번쩍 떠진다.
브레드소리 안 일어났냐? 제니이..
명수. 급히 제니를 흔들어 깨운다.
제니 돌아누우며 명수의 품으로 파고 드는
데..
명수 (낮게..급해서 ) 일어나. 형 왔어.
제니도 눈이 번쩍 떠진다.
브레드소리 지금 몇 신데 아직 자냐? 제니이
제니 벌떡 일어나 앉는다. 시트를 감싸쥔
채. 둘, 황당해서 서로 마주본다.
# 108 이층 거실
브레드, 유리컵에 물을 따르고 있다.
한모금 마시며 제니 방으로 가서 문을 두들
기며
브레드 제니 (문을 두들긴다)
순간 안에서 문이 열리며 셔츠 하나를 걸쳐
입은 제니가 문을 막듯이 서서...
제니 오빠 왔어?
브레드, 제니를 살펴본다. 헝클어진 머리칼.
그리고 입고 있는 명수의 셔츠.
브레드 (제니를 밀치고 안으로 들어가려는데)
제니 (필사적으로 막으며) 일찍 왔네. 내..내일
오는 거 아니었어?
브레드 (들어가려고)
제니 (막고)
브레드 ...같이 잤니?
제니 (당황) 뭐가? 누가?
브레드 너 지금 입고 있는 옷..
제니 자기가 입고 있는 셔츠를 내려다본다.
명수의 셔츠이다.
제니, 당황해서 힘이 빠지는 순간, 브레드
문을 벌컥 열어버린다.
방안에서 바지를 입고 있던 명수가 엉거주
춤해서 본다.
브레드 돌아서서 몇 걸음 걸어나오다가 들
고 있던 컵을 냅다 팽개쳐버린다. 요란하게
박살이 나는 물컵
(시간경과)
명수, 빗자루로 아까 깨뜨린 컵의 유리를
쓸고 있다.
저만치에 등을 돌리고 서있는 브레드.
제니는 테이블 옆 정도에 서서 손가락 하나
로 테이블을 문지르고 있다.
브레드, 문득 생각난 듯이 아까 던져놓았던
가방을 당겨 뭔가를 꺼낸다. 커다란 봉투다.
제니 앞의 테이블에 밀어놓는다.
제니 뭔가 해서 브레드를 본다.
브레드 나 한국에 갔다 왔어.
명수도 브레드를 본다.
브레드 가서 제니, 니 엄마 만나고 왔어.
제니 (놀란 마음... 테이블에 놓인 봉투를 다시
본다)
브레드 (정작 하고 싶은 말 대신에 이 말을 하고
있는 중이다. 분노는 억누르고 약간 허공
에 뜬 듯한 말투. )
제니 니 엄만 아주 착하고 아름다운
분이야.
나 만나서 헤어질 때까지 울고 계셨어.
근데 제니, 한국 사람들은 입양아 같은
거 이해못해. 그래서 느네 엄마한테 너
만나달란 말 못했어.
사실은 그 말 하러 갔는데.. 괜찮지?
제니 .....
브레드 (웃으려 애쓰며)
그 대신 사진을 찍어왔어. 니가 갖고 싶
어할 거 같아서. 봐봐..
제니 (여전히 봉투만 내려다본 채 열지 못한
다)
브레드 (더이상 참아지지 않는 분노)
어제 비행기 타기 전에 계속 전화했었어.
근데 너도 안 받고 명수도 안 받았어.
난.. 미치는 줄 알았어.
명수, 장승처럼 서 있고.
브레드, 명수 옆을 지나 밖으로 나가버린다.
남은 제니, 조심스레 봉투를 열어 열장 정
도의 사진을 꺼내본다.
40대 후반의 여인이 제니를 보고 있다. 쓸
쓸한 얼굴.
넘겨보면 같은 옷의 같은 여인 사진들..
제니 무너지듯 앉으며 울기 시작한다.
명수, 제니에게 다가가지 못하고 보고만 있
다.
# 109 뒷마당
햇볕이 환하게 들어오는 뒷마당.
그 구석에 브레드가 웅크리고 앉아있다. 그
뒷모습.. 브레드는 혼자 울고 있다. 마치 외
로운 어린 아이처럼.
그렇게 울다가 어휴우... 어휴우... 한숨처럼
심호흡을 몇번 하며 겨우 진정한다. 주머니
를 뒤적거려서 요란한 색깔의 손수건을 꺼
내더니 코를 푼다. 그러더니 문득 뒤를 돌
아본다.
이만치 뒷문 쪽에 명수가 서서 보고 있었
다.
//
벤치에 나란히 앉은 두 남자.
브레드 (울음 끝의 지친 마음)
이년 전에 제니를 만났어. 애가 세상천지
에 혼자서. 돈도 한푼 없이.. 있던 방에서
도 쫓겨나게 생겼드라구.
그래서 내가 말했지. 제니. 나 게이야.
...그날로 제니가 여기 들어와 같이
산거야.
명수 (의외라서 돌아본다) .... 형 게이였어요?
브레드 (바보를 보듯 명수를 보고) 모자란 놈.
둘 사이에 다시 침묵이 흐른다. 그러다가
문득, 브레드 자세를 바로 잡더니
브레드 너 갈거지?
명수 (보는)
브레드 너 가야되잖아. (뭔가를 마지막으로 부여
잡는 심정)
명수 형. 난..
브레드 제니는.. 제닌 아주 상처가 많은 애야.
걔 더 상처받으면 안돼.
그래서 니가 걔한테 장난 치는 거 나 못
봐. 내 피를 나눈 동생이라도 그건 용서
못해. (간절하게)
명수 .. 나 장난 친 적 없어요.
브레드 넌 지금 니가 하는 게 ..
(일부러 우습다는 듯) 사랑이라구 생각하니?
명수 (브레드를 노려보는)
브레드 넌 떠날 놈이잖아. 넌.. 잠깐 도망쳐서 우
리 집에 와있는 거잖아. (점점 격앙되며)
난 너같은 놈 알어. 돌아갈 집도 있고, 기
다리는 부모도 있잖아. 너같은 놈은 아무
리 폼잡고 도망쳐봤자 언제고 돌아간다
고. 아니야? 그렇지? 너 갈거잖아.
# 110 뒷문 안
제니가 바닥에 웅크려 앉아있다.
조금 열린 문 틈으로 빛이 새어들고 그리고
브레드의 말소리가 들린다.
브레드E 나한텐 제니밖에 없어.
넌 잠깐 쉬었다 가면 그만이지만.
난 제니가 필요해. 나한테 제니가 있어야
된다구. 그러니까 너.. 이제 그만 해.
그만하라구. 부 탁이야.
# 111 선수단 숙소 앞 / 저녁
(혹은 선수들이 가볍게 운동을 하는 숙소 주변 어느 곳)
선수들이 모여서 가벼운 몸풀기를 하고 있다.
경철, 파트너와 서로 잡아주며 운동을 하다가 문득 정지하더니 한
곳을 본다.
함께 운동을 하던 선수도 경철이 보는 곳을 본다.
다른 선수들고 하나씩 돌아본다.
경철, 감격을 해서 괜히 침을 찍 뱉고
경철 씹새.. 으이그.
그들이 보는 곳에 저만치에서 오고 있는 명
수.
명수는 나갈 때 들었던 가방을 메고 있다.
감독이 명수를 돌아본다.
명수, 감독 앞까지 오더니 고개를 숙여 인
사를 한다. 고개를 드는데 감독 냅다 명수
의 따귀를 갈겨버린다.
명수, 휘청하여 서는데 감독, 물고 있던 담
배를 뱉어내더니 선수들을 향해.
감독 뭣들 하고 있어. 밤 샐거야
# 112 이층거실 / 낮
텅 비어있다.
소파 옆, 명수의 이불을 올려놓던 반닫이
장 위도 비어있고. 그 옆 창가의 화분만 덩
그러니 놓여있다.
# 113 세탁소 내부 / 낮
다르르르.. 재봉질을 되어지고 있다.
익숙한 솜씨로 옷에 박음질에 되고 있다.
(바지단 정도를 지그재그 수로 박고 있는
모양도 좋고)
재봉질을 하는 제니의 얼굴. 무표정이다.
옷을 뒤집다가 문득 돌아보는 곳에 멕시컨
남자 종업원이 명수가 하던 일, 바구니에
옷을 담아 밀고 온다.
옷에 태그를 붙이고 있던 브레드. 괜히 제
니의 눈치를 살피다가.
브레드 제니
제니 어? (돌아보는데 아까의 무표정이 싹 지
워지고 미소를 띈다)
브레드 저녁 뭐 먹을래.
제니 음.. (생각해보더니) 수제비.
브레드 더워 죽겠는데 수제비는...
제니 그럼 오빠 먹고 싶은 거 먹자.
브레드 ... 수제비 먹자. (계속 일하는)
제니 (다시 재봉틀을 향하는데 미소가 지워졌
다)
다르르르 다시 재봉질이 계속된다.
# 114 뒷마당 / 밤
벤치는 비어있고. 가로등이 켜있고.
# 115 이층거실
불이 꺼져있는 상태.
소파 옆의 탁상시계, 밖의 가로등 불빛을
받아 밤 12시에 가까와지며 초침소리를 내
고 있다.
소파에 제니가 앉아서 창 밖을 내려다보고
있다. 제니가 보는 곳에 가로등이 보인다.
제니 (들릴듯 말듯) 꺼진다. 꺼진다. 꺼진다.
시계의 12시에 겹쳐지고.
그리고 가로등이 꺼진다.
어두워진 속에 제니가 움직임없이 앉아있
다.
브레드의 방문이 열리며 브레드가 나와 욕
실 쪽으로 가려다가 제니를 본다.
브레드 제니? 뭐해 안자고.
제니, 브레드를 보며 미소를 띄는데..
순간 울리는 전화벨소리.
한번 두번.. 제니도 브레드도 언뜻 전화기로
움직이지 못하는 새, 세번째 벨이 울리더니
이내 조용해진다.
브레드와 제니는 조용해진 전화기를 보고
있다.
# 116 거리 공중전화
(혹은 숙소의 어디 전화기. 주위는 어둡고
조용한 곳. )
명수가 수화기를 내려놓은 직후다.
명수 먼곳을 보다가 문득 전화기를 다시 본
다. 다시 수화기를 든다. 그러더니 버튼도
누르지 않고 빈 수화기에 대고 말하기 시작
한다.
명수 제니. 나야. 명수야.
잠시 말문이 막힌다. 수화기에서는 이제
띠띠..하는 기계음이 계속 나오고 있다.
명수 ...나 내일 마라톤 시합에 나가.
제니 니말대루 끝까지 뛰지 못해두 좋아.
그래두 나갈거야. 왜냐면.. 난 달리는 게
좋아. 내가 뛰는 거 .....봐줄래?
...........
난... 지금 니가 내 옆에 있음 좋겠어.
너두 ..그러니?
이제 명수는 더 말이 없다. 수화기를 든 채,
공중전화 박스의 벽에 이마를 댄 채 명수,
기도하는 마음으로 서있다.
계속되는 수화기의 기계음이 마치 카운트
다운처럼 들리고....
# 117 마라톤 대회 출발 지점
인산인해의 사람들이 모여들고 있다.
대회에 참가할 사람들과 구경나온 사람들.
선수들이 도열해 있는 가운데, 한국 선수단
들의 모습이 보이고, 명수가 몸을 푸는 모
습도 보인다.
경찰들이 대회장을 정리하고 있고.
리포트를 하는 TV 촬영팀이 지나가고..
# 118 출발지점 일각
운동복을 입은 리포터 한명이 카메라를 향
해 약간 들뜬 목소리로 ..
리포터 (영) LA 마라톤 대회 개막 시간이 다가
오고 있습니다.
오늘 대회에는 세계각지에서 모여든 정규
선수 오천여명과 일반인 참가자 십육만여
명, 총 인원 십육만명이 참가하는 세계
최대의 규모입니다.
# 119 마라톤 출발지점 일각
한국팀 선수들과 감독이 모여있다. 선수들
은 겉에 입었던 옷들을 벗거나 다리를 풀거
나 준비를 하고 있다.
명수 겉옷을 벗는데 경철이 옆에서 다리운
동을 하다가..
경철 너 말이야.
명수 (보면)
경철 중간에 자빠질거면 멀리 가서 자빠져.
나한테 걸리적거리지 말고.
명수 (피식 웃는)
경철 웃지 마 씹새. 너 오늘 감기도 안 걸렸고,
발목도 멀쩡해. 그러니까 더 핑게 댈 것
두 없어. 맞지?
명수 맞어.
경철 그러니까 ... (망설이다가) 너 잘 뛸 수
있어. (돌아서 가려는데)
명수 경철아.
경철 왜
명수, 경철에게 다가가더니 끌어안는다. 고
마움과 그 간의 우정으로. 경철 잠시 명수
에게 안겨있다가 밀고 나오며
경철 씹새.. 뭐하는 짓이냐.
불쾌한 듯 돌아서는데 그 얼굴에 어쩔 수
없이 비죽이 미소가 지나간다.
# 120 세탁소
제니가 자기 자리에 앉아서 재봉질을 하고
있다. 다르르 다르르..
그 옆에 와 서는 브레드.
브레드 중계하는 거 안 볼거야?
제니 (맑은 얼굴로) 이거 마저 하고. 이 옷 저
녁까지 찾으러 오기로 했거든.
제니 아무렇지도 않다는 듯이 미소를 보이
고 일을 계속한다. 그런 제니를 보다가 브
레드, 돌아선다.
# 121 마라톤 출발지점
출발선상에 수많은 선수들이 모이기 시작한
다. 출발 직전의 숨막힘. 숨소리들이 거칠게
들리기 시작하고.
경철과 명수, 다른 선수들도 자리를 잡고
섰다.
긴장이 가득 흐르고 있다.
# 122 이층거실
거실 가운데 선 채 텔레비젼 중계를 보고
있던 브레드. 출발 직전의 현장 상황을 스
케치하는 영어 어나운스멘트가 들리고있고.
(가능하면 화면도..)
브레드 손에 들고 있던 리모콘으로 TV를
끈다. 리모콘을 테이블에 놓으려고 돌아서
다가 브레드, 정지하여 한 곳을 본다.
브레드는 소파가 있는 창문턱 방향을 보고
있다.
# 123 마라톤 출발지점
누군가 신호총을 든다.
선수들 자세를 잡고 ..
총을 쏜다.
와아 밀려나가는 선수들.. 도로를 가득 메우
며 수많은 선수들이 밀려나오고 있다.
달려가는 수많은 발들..
그 중에 명수가 있다. 옆의 선수들을 죽죽
젖히며 앞으로 나아가고 있다.
# 124 세탁소
제니가 작업하고 있던 옷가지가 떨어진다.
브레드, 무조건 제니의 손을 잡아 끌어간다.
제니 오빠 왜. 손 아파.
# 125 이층거실
제니를 잡아끌어 들어오는 브레드.
영문 모르고 끌려와 선 제니에게 창문쪽을
가르켜 보인다.
브레드 제니. 봐
제니 비로소 그것을 본다.
거기 창가에 놓여진 그 화분에 꽃이 활짝
피어있다. 그것은 정말로 무궁화 꽃이다.
# 126 마라톤 길 1
맨 앞을 달리고 있는 경찰 오토바이.
그 뒤로 안내차며 중계차들이 따른다.
그 뒤로 이십여명의 선수들이 무리를 지어
달려온다. 선두그룹이다.
그들의 뒷 부분에 경철이 끼어있다.
카메라 앞을 선두그룹의 선수들이 주욱 지
나간다. 그들이 다 지나가도록 명수는 보이
지 않는다. 그들의 저 뒤, 저만치에서 명수
가 혼자 달리고 있다.
선두그룹쪽으로 조금씩 다가가고 있다.
# 127 이층거실
제니, 소중하게 화분을 들어 테이블 가운데
에 놓는다. 믿기지 않아 살펴보며
제니 진짜네. 진짜 꽃이 폈어.
이거 무궁화 맞지?
브레드 맞을 거야.
제니 오빠 잘 몰라?
브레드 사실은 진짜 무궁화, 한번도 본 적이
없어.
제니 (웃고 다시 꽃을 살펴보는데)
브레드 제니
제니 응?
브레드 제니
제니 (의아해서 보며 좀 웃는) 왜
브레드 (어쩔줄 몰라 혼자 쩔쩔매다가 갑자기
테이블에 두손을 짚더니 고개를 숙이는
기분) 그동안 고마웠어. 제니
그러니까 이제.. 가. 너 갈데루 가.
제니 ..오빠
브레드 나 그동안 니 덕분에 살 수 있었어.
넌 내가 아니면 안되니까
너 보살피면서 나, 살맛났어.
아주 행복했어.
그러니까 이제.. 가. 가도 괜찮아.
보고 있는 제니, 울고 있다.
# 128 마라톤 길 2
이제 선두그룹은 여섯명 정도로 좁혀져 있
다. 네번째를 달리는 경철. 여섯번째를 달리
는 명수.
경철, 속도를 올리며 한명의 선수를 제친다.
명수 속도를 내며 자기 앞의 한 선수를 제
친다. 이제 그들의 자리는 세번째와 다섯번
째.
# 129 음료수대1
경철이 지나치며 물병을 나꿔채간다.
그 뒤로 한명의 선수가 달려지나친다.
그 뒤로 달려오는 명수. 물병을 나꿔챈다.
마시다가 머리에 부으며 뛴다. 이제 명수의
얼굴에는 괴로움이 드러나고 있다.
음료수병을 던져버리고 뛰는데 호흡소리가
점점 거칠어진다. 명수의 옆을 한명의 선수
가 달려 지나쳐 앞서간다.
# 130 마라톤길 3 엔젤힐 앞
명수 달리고 있다. 이제 명수의 귀에는 자
신의 호흡소리와 심장소리만이 들리고 있
다. 그리고 타닥타닥 아스팔트를 달리는 자
신의 발소리.
연도에 늘어선 사람들이 보인다.
그들 뒤로 누군가 언뜻 스친다.
달리던 명수, 그쪽을 다시 한번 돌아본다.
모여있는 사람들의 무리가 끝나면서 그들
뒤로 자전거를 타고 모습을 드러내는 제니.
제니는 인도로 자전거를 달리고 있다.
명수, 놀라서 본다. 제니가 뒤도 보지 않고
자전거를 타고 죽죽 나아간다.
언제나 연습을 하던 그 언덕. 양철 사인판
옆으로 경찰오토바이와 인도차가 지나가고
그 뒤로 거의 간격이 없이 달리는 세명의
선수.
조금 떨어져서 경철이 달려가고 있다.
그리고 잠시 뒤 도로의 옆을 자전거로 오르
고 있는 제니. 있는 힘을 다해서 자전거를
달리고 있다.
명수 달려가며 제니를 본다. 제니는 언제나
처럼 기진맥진 겨우겨우 자전거 페달을 밟
고 있다.
제니의 자전거가 비틀거리기 시작한다.
그러나 제니 끝까지 페달을 밟고 있다. 명
수의 시선으로 드디어 제니의 자전거가 언
덕을 오르더니 엔젤힐을 넘어간다.
명수 달리며 어쩐지 울 것 같은 심정이 된
다. 달리는 속도가 붙기 시작한다.
//언덕길 이쪽
명수가 언덕을 넘어온다.
넘어오며 제니를 찾는다. 제니는 이만치에
자전거와 함께 널부러져 있다.
명수, 제니의 옆을 지나쳐 가며 제니를 돌
아본다. 제니는 애써 일어나 앉더니 두 손
을 흔들며 활짝 웃어보인다.
명수 이제 앞을 보며 달린다. 경철의 옆으
로 따라붙는다. 명수, 경철을 힐끗 돌아본
다. 일그러진 얼굴로 달리던 경철도 명수를
본다. 명수가 경철을 앞지른다. 경철 죽을
힘을 다해 명수를 따라 뛰기 시작한다.
한두걸음 뒤에 경철을 데리고 뛰며 명수,
이제 해방된 기분을 느끼고 있다.
바람이 그를 스쳐 지나간다.
저 앞에 보이는 선두그룹과의 거리가 점차
좁혀지고 있다.
# 131 마라톤 길 몽따쥬.
달리는 명수.
일반인 그룹들이 달리고..
달리는 명수.
장애자 그룹이 달려오고..
달리는 명수 한명을 제치고 또 한명에게 따
라붙는다. 그 뒤를 또 경철이 따라 붙는다.
마라톤 경기의 모습들.. 다만 명수 뿐이 아
니라 달림으로써 뭔가에서 해방되려는 사람
들의 아름다움..
//
결승점에 가까와지는 명수. 이제 경철과 둘
이 각축전을 벌이고 있다.
명수는 마치 꿈꾸는 듯한 표정으로 달리고
있다. 명수의 시선에 모든 것이 꿈처럼 보
인다. 길가에 도열한 사람들이 흐려져 보이
고...모든 소리가 주관적인 써라운드로 바뀐
다.
환호하는 사람들.. 박수소리. 태양빛..
그의 시점에서 세상이 입체적으로 굴절되어
보인다. 그 모든 소리가 낮아지며 그 자신
의 호흡소리와 심장소리가 점점 커진다.
# 132 결승지점
결승테이프가 늘어져 있고.
그 위로 전광판 계시기가 2시간 09분을 가
르키고 있고.
기다리는 사람들이 모두 몸을 빼어 보는
곳.
저 멀리 길을 돌아오는 명수와 경철.
테이프가 눈 앞에 있다. 경철이 바로 명수
의 옆으로 달린다.
그리고 마지막 순간 명수는 경철에게 한걸
음을 내주고 경철이 테이프를 끊으며 들어
선다. 거의 동시에 들어서며 같이 나동그라
지는 두 사람. 멀리 진행요원들이 달려오는
속에서. 길바닥의 명수와 경철이 서로 마주
본다.
명수, 괴로운 헐떡임 속에서 얼핏 미소를
짓는 듯 하다.
# 133 도로 / 낮
낡은 왜곤이 달리고 있다.
# 134 차 내부
운전석에는 제니. 그리고 그 옆은 보이지
않는다.
제니 속으로 무슨 노래인가를 흥얼거리는
듯 하다. 차가 코너를 돌면서 옆에서 명수
가 제니에게 기대온다. 명수는 깊은 잠에
들어있다. 제니, 자기 어깨를 명수에게 내어
준 채로 계속 운전을 한다. 제니의 입가에
미소가 어린다. 명수는 아주 평화롭고 깊은
잠에 빠져있다.
# 135 세탁소 외경 / 저녁
브레드가 쓰레기 봉투를 들고 나와 쓰레기
통에 넣는다.
그러다 돌아보면 저만치에 십대 후반의 소
년 한명이 야구모자를 깊이 눌러쓰고 브레
드를 살펴보고 있다. 한국인이다.
브레드 역시 눈을 가늘게 뜨고 소년을 살펴
본다.
소년, 잔뜩 경계심을 품은 채 두어걸음 나
서더니
소년 미스터 오?
브레드 너 한국애지?
소년 (좀 망설이다가 서툰 한국말로)
아저씨가 입양아 엄마 아빠 찾아줘요?
브레드 (잠시 째려보다가 가까이 오라고 손짓을
한다)
소년 (망설이며 두어걸음 더 다가온다)
브레드 너 양부모는 어디 계셔.
소년 (의심스러운 눈으로 보는)
브레드 너 양부모 모르게 몰래 온거냐? 혼자
여길 찾아왔냐고.
소년 ... 나 양부모 없어요.
브레드 임마. 너 입양아잖아. 그런데 왜 양부모가
없어.
소년 난 없어요. 난 혼자에요. 나 혼자 올 수
있어요.
브레드 짜식 너 사연이 좀 있는 놈인 거 같은데..
식사는 했어?
소년 왓?
브레드 밥 먹었냐고. 저녁 먹었어?
소년 (노려보는)
브레드 들어와. 밥 먹으면서 천천이 얘기해보자
구.
머뭇거리는 소년의 등을 밀어 들어가며
브레드 오늘 져녁엔 육계장을 끓일건데...
너 육계장 먹을 줄 알어?
소년 왓 이즈 육계장
브레드 너 정통 한국의 맛을 잘 모르는구나.
너 매운 거 먹을 줄 모르지?
한국에 가면 말이다. 이 매운 걸 먹을 줄
알아야 어른 취급을 해준다구.
너도 어른이 되야 할거 아니냐.
브레드와 소년이 세탁소 안으로 들어간다.
그들이 들어간 뒤로 서있는 세탁소.
세탁소 위에 브레드 크리너라는 간판.
그 뒤로 엘에이의 도심이 노을에 물들며 거
대하게 펼쳐져 있다.
-끝-
첫댓글 고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