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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한의 기아(飢餓) - 그 실태와 배경, 전망
류현수 / 북한민주화학생연대 『Justice』편집위원
지난 2002년 중국에 처음 갔을 때였다. 한 선배의 소개로 어떤 아주머니와 만나 식사를 하게 되었다. 그 아주머니는 함경북도 청진이 고향인 북한 사람이었다. 나름대로 마음의 준비를 하고 약소 장소에 나갔다. 하지만 난생 처음으로 북한 사람과 만나서 이야기한다는 흥분 때문에 그 미리 생각해 두었던 이야기들도 잠시, 내 머릿속은 온통 하얗게 되었다. 그분과 나누는 말 한마디 한마디를 기억하기 위해서 노력했지만, ‘아는 만큼 보인다’는 한 교수님의 말씀처럼 전체의 50%정도만 이해됐던 것으로 기억하고 있다. 그때까지는 내가 북한에 대해서 아는 것이 거의 없었고 그 아주머니가 사용했던 용어들 역시 나에게는 좀 생소했으니, 완벽하게 대화내용을 이해하지 못한 것이 어쩌면 당연했을 것이다.
그 아주머니께서 하신 말 가운데 이런 말이 있었다. 북한의 현실에 관해 이야기하다 나온 부분이었는데, “지금(당시 필자와 만나던 2002년) 당(黨)에서 ‘2차 고난의 행군’을 준비하라는 말이 나돈다”는 것이었다. 물론 나의 무지로 인하여 ‘고난의 행군’ 이라는 말이 함축하고 있는 의미를 당시에는 잘 알지 못하였다. ‘고난의 행군’이라는 구호 속에 배어있는 북한인민의 고단함을 최근에 와서야 깨닫게 되었다. 당시 ‘2차 고난의 행군’을 해야만 하는 북녘을 뒤로 하고 국경을 넘은 아주머니의 심정은 어땠을까? 그 아주머니는 당시 자기의 처지를 어떻게 생각했을까? 지금 생각하면 아무것도 몰랐던 내가 죄송하기만 한데….
학생운동 하면서 가졌던 북한에 대한 의문에 해답을 준 책
북한의 주장에 따르면 ‘고난의 행군’은 원래 김일성의 빨치산 시절인 1938년 12월 중국 몽강현(현재의 정우현) 남패자로부터 1939년 3월 중국과 국경 지대인 압록강 연안의 국경일대까지 일본군들의 집요한 포위망을 뚫고 100여 일간 강행군한 것을 말한다. 이를 김정일은 ‘항일혁명의 투쟁이 더욱 혹독했던 시기에 수령님의 지도아래 조선혁명의 명맥을 끝까지 지켜나간 숭고한 혁명정신’이라고 평가하고 있다. 그리고 이 ‘고난의 행군’ 정신은 1996년도 신년사(新年辭)를 통해 그 해의 가장 중요한 목표와 기본사상으로 제시되었다. 신년사에서 ‘노동당원들과 인민군 장병들과 인민들은 사회주의 3대진지를 튼튼히 다지며 백두 밀림에서 창조된 고난의 행군정신으로 살며 싸워 나가야 한다’ 고 선동했다. 즉, 1995년부터 2000년까지 진행되었던 식량위기 및 그로부터 발생한 체제의 위기를 헤쳐나가기 위한 선전구호로서 ‘고난의 행군’ 이라는 말이 사용된 것이다.
실제로 북한에서는 이 기간 동안 식량위기로 아사 하거나, 영양결핍 등에 의한 면역체계 약화로 전염병이 발생하여 200∼300만의 인민이 사망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식량난을 극복하기 위해 목숨을 건 대규모 탈북 행렬이 이어지기도 했다. 그런데 이 기간만 참으면 된다고 했던 북한당국이 또 ‘제2차 고난의 행군’을 준비하라고 이야기하니 그 아주머니는 얼마나 걱정되고 답답하였을까? 더군다나 최근에는 핵 문제에 가려 북한 인민의 배고픔이 일반인들의 관심에서 멀어지고, 그로 인해 식량원조가 줄어들고 있는 것을 알게 되면 또 어떠한 생각이 들까?
중국에서의 경험 이후로 나의 대북관은 상당히 많이 바뀔 수밖에 없었다. 그렇지만 대학시절에 가졌던 의문들 역시 쉽게 깨지는 성질의 것이 아니었기에 나의 고민은 계속되었다. 나초스의 ‘북한의 기아’ 라는 책은 그러한 고민의 와중에 읽게 되었다. 한반도에 사는 사람이 아닌 외국인으로, 정부기관이 아닌 ‘월드비전’ 이라는 NGO에서 인도주의 구호활동에 종사해온 저자가 바라보는 시각은 어떠할까라는 궁금함이 들었다.
이 책을 통해 나는 많은 의문을 해결할 수 있었다. 1997년 직접 북한을 방문한 경험, 북-중 접경지역을 방문하면서 얻은 인터뷰 자료, 1996년부터 98년까지 3년 동안 북한과 관련한 여러 단체에서 일하는 사람들과의 네트워크를 통해 얻은 수 천 통의 메시지는 이 책에 논리의 정확성은 물론이요, 자료의 풍부함을 제공하고 있다. 그리고 무엇보다 ‘북한 인민에 대한 애정’에서 시작하는 저자의 글쓰기 자세야말로 이 책의 진실 됨을 반증하고도 남지 않나 싶다.
채무 불이행 상태에서도 특권층을 위한 벤츠를 구입
1995년 가을부터 북한은 외부세계에 구원을 요청하는 메시지를 보냈다고 한다. 이는 예전에 알려져 있던 ‘주체의 나라’ 북한의 행태 와는 거리가 있는 것이었다. UN 산하기구인 세계식량계획(WFP)의 조사에 의하면, 이때 북한의 식량 부족 분은 전 주민이 필요로 하는 전체 식량의 50%에 이르는 양이었으며, 이는 1985년 100만 명의 목숨을 앗아간 에티오피아의 부족분보다 더 많은 양이었다.
그렇다면 북한의 기아발생의 원인은 무엇일까? 심각한 홍수로 농작물이 감소해서 식량이 부족하다는 내용이 북한 정부의 공식적인 이유였지만 저자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북한 정부는 개인 사유토지를 몰수하여 농업집단화를 이루는 마르크스-레닌 농업정책을 무비판적으로 수용하고, 거기다 김일성은 ‘청산리 방법’을 덧붙여 강조했다. ‘청산리 방법’이란 중앙 집중화된 농업 통제시스템에 사상적 요소를 강조하여 생산효율성보다는 정치사업을, 기술지도보다는 사상적 지도를 강조하는 방법이다. 일시적으로 북한이 이룩한 농업생산량의 증가는 이에 고무된 측면이 있지만, 차츰 시장체제가 가져다 주는 경제적 유발동기는 재고해보지도 않은 채 이 같은 농업정책을 지속적으로 추구한 것이 문제가 되었다. 즉 경제와 과학을 정치사상의 하위에 두게 된 것인데, 이는 김일성식 주체사상의 특성으로, 변화와 개혁에 대해서는 둔감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저자는 또한 산업분야와 농업분야의 기능장애에도 불구하고 국가예산과 외환보유고가 충분하였다면, 국제곡물시장을 통해 식량부족분을 사들일 수 있었을 것이라고 주장한다. 물론 북한의 재정상태와 외환보유고에 관한 사실적 통계가 존재하지 않지만 저자는 이렇게 말한다.
“북한은 1976년 서구국가들에게, 그리고 1994년에는 동구권의 몇몇 국가에 채무불이행을 선언하였다. 북한은 더 이상 국제사회에 돈을 빌릴 수 없게 되었다. 그러나 이러한 외환사정에도 불구하고 1999년 초 북한은 벤츠를 수입하고 1998년 여름 북한주민이 사용할 자전거를 수입하는데 외화를 지불하였다. 외화가 부족한 상황에서도 일반주민이 아닌 특별계층을 위한 상품구입은 하였던 것이다.”
북한경제의 붕괴는 정치가 경제를 지배했기 때문
나도 그렇게 생각하고 있었지만, 지금도 많은 사람들은 미국의 대북 경제제재로 인하여 북한의 경제가 어렵다고 이야기한다. 예를 들어 북한은 경제제재로 인하여 나진?선봉 자유경제무역지대에 새로운 외국기업의 자본을 받아들이기 어렵다고 말한다. 하지만 저자는 이에 대해 ‘노(no)’라고 단호히 말한다. 1997년 아시아의 경제위기 이후 아시아지역에 대한 미국의 투자가 대폭 삭감되었던 것이며, 사실 미국의 경제제재는 2000년에 끝이 났지만 북한의 잘못으로 많은 외국자본을 끌어들이는데 실패하고 있다고 말이다. 예까지 들어가며 자세하게 설명하고 있다.
“김정일이 1998년 나진?선봉지역을 방문했을 때의 일이다. 김정일은 김일성의 정치슬로건이 담긴 깃발이 여덟 개의 상업광고판에 가려진 것을 목격하고 아연실색하였다. 그 다음날 아침 김정일을 아연실색케 한 여덟 개의 상업광고판은 당장 철거되었다. ‘자유’ 라는 단어가 사라지는 순간이었다. (46p)
위의 상황에서처럼 경제가 정치사상의 발목에 잡혀있는데 도대체 누가 수익을 기대하고 투자하려고 하겠는가, 이런 질문이 나올 수밖에 없다. 더욱이 공산주의 최초의 성공적인 왕조세습체제는 인민들의 이익보다도 수령의 이익을 더욱 강조하면서 엄청난 비효율을 감수하고 있는데 말이다.
“기아에 관한 연구로 노벨상을 수상한 센과 동료학자 드레제는 두 가지 이유에서 민주주의 국가에서는 기아가 발생한 적이 없다고 설명한다. 첫 번째 이유는 직관적으로도 이해가 되는 명백한 사실이지만, 만약 굶어 죽어 가는 사람이 있다면 민주주의 사회에서는 자신의 고통과 분노를 투표를 통해 전달할 수 있기 때문이다. 더욱이 민주주의 체제에서 자유로운 언론매체를 통하여 위기 상황을 대중에게 전달함으로써 정부에 즉각적인 대응을 요구할 수 있다. 북한은 자유로운 언론이 보장되어 있는 체제도 아니고, 긴박한 재난에 효율적으로 대처할 수 있는 체제도 아니다. 사실상 지구상에서 북한보다 더 고립적이고 폐쇄적이며 주민에 대한 완전통제와 비밀이 이루어지는 국가도 없을 것이다.” (33p)
살아남은 자들이 말하는 북한에서의 생존방법
지금까지의 이야기들로 우리는 조금이나마 북한 식량위기의 원인을 알 수 있게 되었다. 하지만 300만 명의 사람이 희생된 가운데 살아남은 사람들은 누구이며, 어떠한 방법으로 그 위기에서 살았을까 하는 의문이 생기게 된다. 저자는 이에 대해 북-중 접경지역에서의 인터뷰 등을 통하여 세밀하게 생존방법을 서술한다.
그는 북한인민의 위기대처 작동체계를 세 개의 범주로 나눈다. 첫째는 가족구성원 중 먹을 ‘입’을 줄이는 것이며, 둘째는 식량형편이 나은 지역으로 이주하는 것, 그리고 셋째는 예전에 국가가 보장해주었던 식량배급체제와는 상관없이 자기 스스로 대체식량을 찾는 것이다. 이어 이러한 세 범주에 속하는 하위 항목들을 소개한다. 첫째 범주에는 인구억제와 가족계획, 버려진 아이들의 증가, 인신매매 등의 방법이 속한다. 우리가 알다시피 꽃제비라든지 중국의 농촌으로 팔려 가는 북한의 여성들이 이 같은 부류에 속할 것이다. 최후의 방법으로 선택되는 동반자살도 이에 포함된다. 둘째 범주를 선택하는 사람들은 주로 중국에서 만날 수 있다. 중국 조선족 가운데 친척이 있는 경우는 물론이고, 친척이 없더라도 일단 중국의 경제상황이 북한에 비하면 천국이라고 불릴 만큼 좋기 때문에 많은 사람들이 이 방법을 택했다. 이 부분에서 저자는 그들이 체포되었을 때 수용되는 927수용소에 대해서도 언급하고 있다.
“1997년 9월 27일, 김정일은 (명령한 날짜를 따라 927수용소라 명명) 210개의 지역관리들에게 국내 유민들을 수용할 수 있는 시설을 만들라고 명령하였다. (중략) 중국에서 북한 난민들은 강을 건너기 전 중국공안에 체포된다. 그 후 북한으로 강제 송환되고 보통 각 군에 위치한 악명 높은 927수용소에 보내진다. 수용소는 혹한의 추위에도 불구하고 전혀 난방이 되지 않으며, 위생시설은 엉망이다. 수용소내의 식량은 부족하고 전염성 질병과 사망률 또한 높다. 난민들 증언에 의하면 각 수용소는 300~1500명을 수용하고 있으며, 각 방에 40∼50명을 감금하고 있다. 출신지역으로 강제적으로 보내지기 전까지는 북한 전역의 이 같은 수용소에는 6만∼31만 5천명의 북한 내 유민들이 동시에 수용된다. (중략) 이들이 수용소에 머무르는 기간은 몇 주에서 2달에 이르는 단기간이 대부분이라고 한다. 1년에 6번 정도의 회전이 이루어지고 있다는 근거를 기준으로 수감자에 대한 통계를 추출해보면, 최소 37만에서 최고 190만 명이 해마다 이 수용소를 거쳐나가고 있다는 통계가 나온다.” (115p)
둘째까지의 범주가 워낙 상상을 초월하다 보니 셋째 범주의 이야기는 상대적으로 그리 심한 것 같지 않다는 느낌이 들기까지 한다. 셋째 범주, 즉 식량배급체제와는 상관없이 자기 스스로 대체식량을 찾았던 사람들 가운데는 우선 조총련(재일조선인총연합)이나 조선족 친척 등으로부터의 송금을 받았던 사람들이 있다. 어려운 사람한테는 참 유용한 방법이었을 것이지만 이런 사람들은 얼마 되지 않았다. 이도 저도 없는 사람들은 땅 위에 나는 모든 것을 대체식량 삼아 굶주림을 해결해야 했다. 한마디로 ‘독이 없는 것이면 모두 먹었다’는 말로 당시의 실정을 짐작할 수 있는데, 1996년 여름에는 야생의 대체식량이 북한인민이 먹는 전체식품의 30%에 이르렀다고 하니 우리가 그 끔찍한 실태를 과연 상상이나 할 수 있으랴.
억압적이고 폐쇄적인 북한사회는 실패할 수밖에 없어
저자는 많은 탈북 난민들을 만나고, 직접 북한 사회의 모습을 접하면서 나름대로의 희망과 대안을 찾으려 노력한 것 같다. 이러한 그의 노력은 나의 마지막 의문점을 해결해 주었다. 기아로 인하여 북한이 정치 ? 사회적으로 어떻게 변했는지, 또 앞으로는 어떻게 될까 하는 ‘전망’에 대한 궁금증이었다.
“재난으로 발생된 북한주민의 이동은 정치적으로 북한 체제의 생존에 위협적인 영향을 미치게 되었다. 식량난민들은 점차 외부세계의 실체를 깨닫게 되었다. 평양도 이러한 결과를 예상하고 주민의 이동을 엄격하게 통제하였다. (중략) 북한주민들이 빈번하게 중국국경을 넘나들자 당국의 선전이 거짓말임이 여실히 드러났다. 북한주민들은 등소평의 시장자본주의 개혁으로 중국의 발전된 모습을 여기저기서 발견할 수 있었다. 중국으로 탈출한 난민들은 북한에서 소문으로 듣던 사실들을 직접 눈으로 확인하였다. 자신들의 원수인 남한, 유럽, 미국인들이 북한 사람들의 고통을 덜어주기 위해 식량원조와 의약품을 공급해주고 있다는 사실도 알게 되었다.” (303p)
그렇다. 억압적이고 폐쇄된 사회 속에서 오직 ‘위대한 수령 김일성 대원수님’과 ‘친애하는 지도자 김정일 동지’에게 충성했던 북한사람들의 모습은 이제 과거의 이야기가 되어가고 있다. 인류 역사상 최고의 비극이자 학살로 기록될 ‘북한의 기아’는, 역설적이게도 그를 통해 인류 역사상 가장 폐쇄된 체제 속에 살아온 북한 주민들에게 새로운 각성을 주었다. 지금까지 부당하게 자신들의 자유와 권리가 짓밟혀왔고 속아왔다고 말이다. 북한의 지도층은 기아가 어느 정도 수습되면 김정일의 체제를 다시 재건하려고 할 것이고, 실제로 최근 국경수비대의 숫자를 증가시키고 순찰을 강화하였다는 소식도 들린다. 그로 인하여 국경을 넘어 중국으로 탈출하는 것이 더욱 어려워졌다고도 한다. 하지만 저자는 그러한 통제가 실패할 수밖에 없다고 본다.
“북한의 총 국민생산량은 줄어들었으며, 당국에 대한 주민들의 실제적인 불만들이 계속 증가추세에 있고, 당원들조차 생활수준이 급격하게 하락하고 있다. (중략) 구질서를 복구하고 역사의 시계를 거꾸로 다시 돌려놓으려는 북한의 의도가 의심스럽기는 하지만, 기아로 인한 상처가 너무 깊고 주민의 분노가 광범위하게 퍼져 있으며, 경제변화가 이미 사회저변에 뿌리내리고 있어서 구질서를 다시 세우는 일이 그리 쉽지는 않을 것이다. 만약 북한체제가 계속적으로 개혁을 회피하고 점진적인 발전을 도모하지 않는다면, 북한은 틀림없이 붕괴될 것이다. 붕괴 후 일어날 수 있는 상황은 어떻게 북한체제의 분열이 발생했는지에 따라 결정지어질 것이다. 예측해볼 수 있는 가능한 시나리오는, 차우세스쿠가 루마니아에서 통치권을 이양했듯이 김정일은 쿠데타 성공으로 물러나게 될 것이다.” (307p)
북한기아에 대한 종합적인 보고서
저자는 북한의 상황이 변화하지 않으면 김정일 정권까지 어려워질 것이라고 전망한다. 현재의 상황이 기아 발생 초기의 상황과 비교하여 그리 많이 변화되지 않았으며, 7?1경제관리개선조치나 신의주 경제특구 같은 피상적인 개혁들은 실패를 거듭하고 있기에 커다란 변화가 없는 한 저자의 예측대로 김정일 정권은 막다른 길에 봉착할 가능성이 크다. “북한에서 구호활동을 펼쳐 온 구호요원들과 분석가들로부터 수집된 정보, 그리고 역사적 사례들을 통해 볼 때, 북한주민의 복수 기회는 임박해오고 있는 것 같다”라는 저자의 경고는 김정일이 새겨들어야 할 말이다.
식량난은 지금도 계속되고 있고, 대북 식량지원 역시 계속되고 있다. 식량지원은 쉼 없이 계속되어야 한다, 그로 인해 주민들의 삶이 달라진 것이 없으니 차리리 그만두는 것이 궁극적으로 돕는 길이다, 라는 의견이 엇갈린다. 북한의 현실이 과연 그렇게 어려운가 하는 질문도 아직까지 들려온다. 현실에 대처하고 전망하기 위해서는, 우선 현실을 정확하게 파악하고 있는 것이 중요하다. 북한의 현실에 대한 책은 이제 제법 많지만, 그래서 이제는 너무 많아 무엇부터 살펴보아야 할지 망설여질 때가 있다. 그러한 사람들을 위해, 현장에서 직접 부딪히며 느낀 경험을 총망라한 책 - 나초스의 ‘북한의 기아’를 소개하고 싶다.
앞에서 소개한 내용 이외에도 ‘북한 정부는 기아에서 벗어나기 위해 어떠한 정책을 폈을까?’ ‘국제사회는 어떻게 북한의 기아에 반응하였을까?’ 라는 주제의 글도 담겨있으니 북한의 실정과 그 배경, 해결전망에 관심 있는 사람이라면 일독을 권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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