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형조 판서의 퇴청길에서 벌어진 일입니다. 판서는 누군가를 보더니 급히 가마를 세우고 내리더니 거지꼴을 한 사람 앞에 진흙탕을 무릅쓰고 엎드려 절을 올렸습니다. 절을 받은 사람도 놀라고, 지켜보던 모든 사람들이 놀라고 말았습니다. 알고 보니 거지는 몰락한 참판 댁 아들이었고 형조판서의 숨겨진 정체는 바로 어린 시절 참판댁의 노비였습니다.' 이 영화에나 나올 법한 놀라운 이야기는 조선 중기의 유몽인이 쓴 <어우야담>에 나오는 형조판서를 지낸 반석평(潘碩枰, 1472~1540)에 얽힌 야담입니다.
위의 이야기는 민간에 떠도는 야담을 채록한 것으로, 상당히 극적으로 가공된 내용입니다. 정사인 <중종실록>에 따르면 반석평은 실제로 남의 집 노비는 아니었습니다. 그는 할아버지가 한성판윤을 지내고 아버지가 이조판서를 지낸 광주 반씨 명문가의 자손이었습니다. 다만 어머니가 노비 출신이었기 때문에 서얼보다 더 미천한 천얼(賤孼)로 태어났습니다. 천얼은 법적으로 노비에 준하는 낮은 신분이었기에 과거 응시는 거의 불가능한 일이었고, 관직에 올라 형조판서(正二品)까지 오른다는 것은 당시로서는 기적에 가까운 일이었습니다. 천얼이었던 반석평은 어떻게 육경(六卿)의 지위에까지 오르게 되었을까요?
그는 천한 신분인 데다가 어린 시절엔 가문이 몰락하여 시골에서 살았습니다. 그의 총명함을 본 조모가 몰락한 가문을 일으키고자 무모한 도전을 하기로 결심합니다. 그녀는 어린 반석평을 이끌고 서울로 와서 셋집에 살면서 길쌈과 바느질을 하며 돈을 벌어서 손자가 학업을 이어가도록 지원했습니다. 공부에 전념한 반석평은 자신이 천얼임을 숨기고 과거에 응시하여 급제하였습니다. 관직에 나아가 승승장구하여 급기야 형조판서에 이른 것입니다.
하지만 위기가 찾아옵니다. 고위 관직에 오르자 그가 노비의 몸에서 난 천얼이란 소문이 파다하게 퍼지기 시작한 것입니다. 사헌부에서 조사하여 그의 신분을 밝히고 그를 탄핵하려 하였지만 여러 가지 이유 때문에 공론화되지 못하고 묻히고 맙니다. 우선 그는 너무도 유능한 관리였기에 중종은 그를 무척 아꼈고, 그의 모나지 않은 처신 때문에 적이 거의 없었습니다. 또한 그는 어떤 직책을 맡더라도 공평무사하게 잘 처리하여 조금도 흠이 없어서 책잡힐 일이 없었습니다. 게다가 그는 검소하여 청백리로 이름이 높았습니다. 따라서 임금부터 동료 관료들까지 아무도 그의 신분을 드러내어 죄를 묻고 싶어 하는 사람이 없었던 것입니다.
반석평은 신분을 속이고 노비 출신으로 관직에 올랐기에 관직에 오른 후 늘 조마조마한 마음으로 하루하루를 살았을 것 같습니다. 언제나 남다른 조심스러운 처신을 하여야 했고, 매사에 책잡힐 일 없이 죽을힘을 다해서 살았을 그의 일생을 생각해 보면 참 고단하고 힘들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기도 합니다. 다음은 어느 봄밤에 적은 반석평의 시입니다.
夜色/ 潘碩枰
小窓明月夜深時 밤 깊어 작은 창에 달빛 비치니
梅影凄凉上案垂 매화 그림자 처량하게 책상 위에 드리우네
此境寂然無一點 티끌 한 점 없이 고요하고 맑은 정취
便是吾人自樂詩 이것이 바로 홀로 즐기는 나의 시라네
봄밤의 정취를 노래한 시로 맑은 기운이 느껴지는 작품입니다. 깊은 밤, 창가에 비친 달빛과 방 안까지 찾아와 책상에 드리운 매화 그림자는 한 폭의 그림을 보는 것처럼 묘사적입니다. 이러한 정취를 홀로 앉아서 바라보며 즐기는 고독한 남자의 시는 그의 일생을 반영하고 있는 듯하여 잔잔한 감동을 불러일으킵니다.
이 시에서는 마음속에 한 점 부끄러움이나 욕심(티끌)이 없이(寂然無一點) 주변 정리를 철저히 하고 단정하게 살았던 삶을 자부심처럼 적고 있습니다. 당대 문인들이 시를 주고받으며 친분을 쌓았던 것과 달리, 반석평은 많은 시를 남기지 않았습니다. ‘나 홀로 즐기는 시(吾人自樂詩)’라는 구절처럼, 그는 스스로를 절제하며 비교적 고독한 길을 걸었던 듯합니다. 그에게 밤마다 마주한 달빛은, 세상 누구에게도 털어놓지 못한 마음의 유일한 위로가 아니었을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