율법의 재해석에서 드러나는 천국의 의(3)
- 맹세하지 말라 -
마태복음 5장 33-37절 / 33또 옛 사람에게 말한바 헛 맹세를 하지 말고 네 맹세한 것을 주께 지키라 하였다는 것을 너희가 들었으나 34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도무지 맹세하지 말찌니 하늘로도 말라 이는 하나님의 보좌임이요 35땅으로도 말라 이는 하나님의 발등상임이요 예루살렘으로도 말라 이는 큰 임금의 성임이요 36네 머리로도 말라 이는 네가 한 터럭도 희고 검게 할 수 없음이라 37오직 너희 말은 옳다 옳다, 아니라 아니라 하라 이에서 지나는 것은 악으로 좇아 나느니라
‘또 옛 사람에게 말한 바’란 모세의 율법을 가리킵니다. 이것은 예수님이 이 말씀을 하실 당시에 비해서 시대적으로 1500년 - 출애굽 연대/1445-6년 - 이전이 되는 때에 모세를 통하여 이스라엘에게 주어진 것입니다. 그리스도께서 오실 때까지 율법이 말해 온 것이 있었습니다. 그 중에 하나가 “헛 맹세를 하지 말고 네 맹세한 것을 주께 지키라”는 것이었습니다.
헛 맹세란 거짓 맹세를 말합니다. 이는 주께 맹세를 해 놓고 그것을 지키지 않는 것을 이르는 것입니다. 그래서 주께 맹세를 하였거든 그것을 다 지키라는 것이 이스라엘에게 주어진 율법이었습니다.
레위기 19:12. “너희는 내 이름으로 거짓 맹세함으로 네 하나님의 이름을 욕되게 하지 말라 나는 여호와니라.”
민수기 30:2. “사람이 여호와께 서원하였거나 마음을 제어하기로 서약하였거든 파약하지 말고 그 입에서 나온 대로 다 행할 것이니라.”
신명기 23:21. “네 하나님 여호와께 서원하거든 갚기를 더디 하지 말라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반드시 그것을 네게 요구하시리니 더디면 네게 죄라.”
레위기 19:12에서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이 하나님의 이름을 걸고 거짓 맹세하지 말 것을 말씀하십니다. 만일 그렇게 하면 그것은 하나님의 이름을 욕되게 하는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이 말씀을 왜 하시고 있는가 하면, 부당한 억압과 착취로 이웃의 재산을 도둑질하고, 그들을 속이고, 거짓말하는 까닭입니다. 그래서 그날 품삯은 반드시 그날 주어야 하며 다음날까지 미루지 말라고 하였으며, 귀가 들리지 않는 사람이라고 해서 악담을 하지 말라고 하였으며, 눈이 보이지 않는 사람이라고 해서 그 사람 앞에 장애물을 놓지 말라고 하였습니다. 재판관은 판결할 때 불공평하게 하지 말고, 가난한 사람이라고 해서 두둔하지 말 것을, 그리고 돈이 많은 사람이라고 해서 그에게 마음을 구지 말 것을, 오직 정의롭고 공평하게 재판함으로써 부당하고 억울하게 해를 입는 사람이 있어서는 안 될 것을 말씀하셨습니다. 심지어는 이웃을 죄인으로 몰아 죽이는 일도 있는데 그래서는 안 될 것을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면서 이웃을 마음 속으로 라도 미워하지 말 것을, 원수를 갚지 말 것을, 이웃을 자신의 몸처럼 사랑할 것을 말씀하셨습니다.
이 모두는 사람이 하나님의 이름을 걸고서도, 그래서 사람이 그 하나님의 이름으로 인하여 그가 하는 말을 신뢰하게 하고서도, 그것을 이용하여 자신의 탐욕을 채우는 악함을 지적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종종 ‘신의 이름을 걸고 맹세(약속)합니다’ 하면서, 그래서 자신이 하는 말을 좀 믿어달라고 하면서, 그가 언급한 ‘신’을 신뢰하는 까닭에 그가 하는 약속을 굳게 믿었는데, 그것을 악용하여서 상대방을 속이는 것이죠.
오늘날에도 자신이 종교인인 것을 내세우면서, 그래서 자신이 믿는 신의 이름을 빙자하여서 상대방을 안심시킨 후, 상대방을 속이고 거짓말하여 도둑질<탈취>하는 악행에 사람이 있기 때문에, 그러한 사람을 아시는 하나님께서는 주께 거짓 맹세를 하지 말 것을 말씀하셨습니다. 이는 십계명에서 6, 7, 8, 9, 10계명에서 사람을 죽이지 말라, 간음하지 말라, 도둑질하지 말라, 거짓 증언을 하지 말라, 이웃의 재산을 탐내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이 모두에서 사람들이 매일 같이 쏟아내는 것이 바로 맹세입니다. 그리고 그 모든 맹세에서는 그렇게 하면서까지라도 자신이 목표하고 있는 욕심을 이루겠다는 것입니다. 사람은 처음부터 자신이 한 맹세에 대해서, 하나님의 이름을 걸고서라도 하고 있는 맹세에 대해서 지킬 의도가 없습니다. 단지 그 맹세를 함으로써 자신이 얻고자 하는 것을 얻고, 자신에게 불리하게 된 상황을 벗어나고자 할 뿐입니다. 1500년이 흘러오는 예수님이 오신 시대까지에서도 그랬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오셔서 그러한 사람에 대하여 제동을 거셨습니다. 그것은 말이죠. 어떤 맹세도 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하늘을 두고도 맹세하지 말라고 하였으며, 땅을 두고도 맹세하지 말라고 하였습니다. 예루살렘을 두고자 맹세하지 말라고 하였습니다. 그 모두에는 하나님이 계십니다. 하늘은 하나님의 보좌이며, 땅은 하나님의 발판입니다. 예루살렘은 하나님의 도성입니다. 그리고 머리를 두고도 맹세하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그것은 머리카락 단 하나도 희거나 검게 할 수 없는 것이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여기에도 하나님의 이름이 걸려 있습니다. 하나님만이 사람의 머리카락을 희거나 검게 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이 말씀을 하시는 것을 통해서 사람이 어떤 맹세도 할 수 없는 것이, 그 맹세를 하나님의 이름을 걸고서도 할 수 없는 것이 하나님은 사람이 원하는 바 자신의 탐욕을 이루는 것에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사람이 벌리는 일에 악용 당하시는 분이 아니십니다. 사람은 하나님에게 아무런 관심이 없습니다. 다만 하나님의 이름을 이용하여서 자신의 인생을 자신이 원하는 대로 살고자 할 뿐입니다.
이에 대하여 예수님은 어떤 방식으로도 맹세하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이는 아예 맹세를 못하게 하시고 있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맹세로 먹고 산다고 해서 사람은 결코 선한 자가 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맹세로 사람이 결코 기쁨이라든지 행복이라든지 이러한 것이 될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맹세로부터 자신들을 끌고 가는 사람들을 전혀 용납하지 않겠다는 것을 의도하십니다. 이것에 의해서는 사람들은 결코 하나님의 용서에 있을 수가 없습니다. 맹세로 하나님의 이름을 욕되게 하여 하나님의 진노를 사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자신을 따르는 제자에게 어떤 것으로도 맹세하지 못하게 하심으로써 그들을 자신 안에 있는 하나님의 자비에 두십니다. 왜냐하면 말입니다. 맹세를 하는 것으로 그들의 믿음 여부를 시시비비 가리지 않겠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1500년 가까이 끌고 왔던 사람의 그릇된 생각을 단번에 끊어버리십니다. 하늘을 두고, 땅을 두고, 예루살렘을 들먹이며, 자기 머리카락을 두고 맹세하는 것으로 자신들의 잘못을 정당화시키며 자신을 의롭게 여겨 나가는 것의 싹수를 잘라버리신 것입니다.
그리스도께서 이렇게 하시는 것은 맹세 없이 살아가는 것으로 자신의 정당성을 내세울 어떤 의를 생각할 수 없는 그들에게 그리스도께서 의가 되셔서 구원의 근거가 되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본래 맹세란 사람이 어떤 일에 대한 계획을 가지고 그것을 실천해 나가는데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자신이 하실 일에 대하여 나타내시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맹세는 하나님께서 사람으로부터 받아내는데 있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인간의 맹세에 대해 응답 하신다든지 혹은 인간하고 의논해서 맹세를 세우시고 실천에 옮기시는 분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자신이 하실 일의 굳은 의지를 알게 해주시는 것이 맹세입니다.
그 맹세를 히브리서 기자는 아브라함을 통해서 하신 하나님의 맹세에서 알게 해줍니다.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약속하실 때에 가리켜 맹세할 자가 자기 보다 더 큰이가 없으므로 자기를 가리켜 맹세하여 가라사대 내가 반드시 너를 복주고 복주며 너를 번성케 하고 번성케 하리라 하셨더니 저가 이같이 오래 참아 약속을 받았느니라"(히 6:13-15).
여기서 알 수 있듯이 하나님은 아브라함에게 맹세를 하나님에게 하게 하고 그에 따른 실천을 행할 것을 말씀하시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자신에게 맹세를 하면서 자신이 약속을 한 것을 반드시 이루겠다고 하셨습니다.
여기에서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의 맹세 여지를 두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맹세하며 왜 그러하신지를 알려주십니다. 그것은 장차 오실 그리스도를 통해서 하실 일이었습니다. 맹세란 충성 맹세와 같이 본시 자신보다 높은 자에게 하는 것인데, 하나님보다 더 높으신 분이 없습니다. 즉, 하나님 자신 보다 더 높으신 분이 없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는 자기를 가리켜 맹세하여 “내가 반드시 이루겠다”는 것을 나타내십니다.
그런데, 오늘날에 이르기까지 사람들은 자신의 맹세를 하나님에게 쏟아냅니다. 그러면서 이렇게 저렇게 하겠다며 굳게 약속하며, 그래서 자신이 맹세한 대로 반드시 할 테니까 그럴만한 자신으로 만들어 달라고 생떼를 씁니다. 교회 예배당은 그 좋은 처소가 됩니다. 기도원은 참으로 적당한 장소가 됩니다. 시간을 정하고 날을 잡아서 울며 고함치며 기도합니다. 그런데 말이죠. 하나님은 그들의 그러한 기도의 모두를 인정하지 않습니다. 그러기에 결코 그 기도를 수납하지 않습니다. 왜요? 맹세는 하나님이 하실 일로 인해서 하나님이 하신 것인데, 사람이 그 하나님의 맹세에 있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맹세를 내세우기 때문입니다. 어떤 사람은 자신이 뜻한 바를 이루기 위해서 백일기도를 하고 천일기도를 하고 예배 때마다 기도할 때마다 헌금을 합니다. 하나님은 그것이 그들의 뇌물임을 아십니다. 사람은요. 맹세를 하여 자신이 하나님을 위해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한다고 하며, 그것으로 하나님의 전부를 뽑아내고자 합니다.
예수님은 사람들의 그러한 맹세를 모두 거부하십니다. 거기에 귀 기울이지 않으시며, 따라서 어떤 기대에도 계시지 않습니다. 예수님은 자신을 따르는 제자들에게 하나님이 맹세한 아들 그리스도를 통해서 자신의 인자하심을, 곧 사랑을 베푸십니다. 구원의 용서에 두시는 것입니다.
우리가 그리스도를 바라봄에 있는지요. 우리가 그분을 믿는 믿음에 있는지요. 우리가 그분의 교회로 몸을 이루는지요. 하나님께서 맹세하신 성취에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서 ‘예’와 ‘아니오’가 됩니다. 다른 말로 말해서 그리스도는 우리의 ‘예’와 ‘아니오’가 됩니다(고후 1:20). 우리가 어떤 것에 있든지 간에 그리스도는 우리가 해야 할 맹세와 그 성취가 되심으로써 하등의 영향을 받지 않으십니다. 즉, 자신의 용서 속에 두시고서 언제나 용납함이 되십니다. 이 하나님의 맹세를 이루시기 위해서 하나님은 오늘도 우리를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에 두고 계십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