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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단연구/新 문화권력!] 서울대 美學科가 뜨고 있다
‘대안적 비판세력’에서 主流로 변신
임지은 월간중앙 기자(ucla79@joongang.co.kr)
‘서울대 미학과’가 새로운 문화권력으로 급부상하고 있다. 참여정부 출범 후 문화예술계의 책임자 자리에 미학과 출신이 잇따라 임명되고 있는 것. 이들의 약진에 대해서는 ‘능력에 걸맞은 평가’라는 긍정론과 ‘참여정부와 코드가 맞기 때문’이라는 부정적 시각이 엇갈리고 있다. 상반된 평가 속에 문화예술계에서 두드러진 활동을 펼치고 있는 서울대 미학과 출신들의 면면을 살펴본다.
문화관광부는 지난 5월3일 예술의전당 사장에 피아니스트 김용배(50) 추계예술대 교수를 임명했다. 김사장은 서울대 미학과 출신으로 ‘음악대학을 나오지 않은 피아니스트’라는 특이한 경력의 소유자. 다른 음악 전공자들과 달리 음악에 매몰되지 않고 예술 전반을 꿰뚫어보는 미학적 안목을 가진 점이 인선 과정에서 좋은 평가를 받은 것으로 알려졌다. 이와 관련, 새로운 문화권력의 ‘무기고’(武器庫)인 서울대 미학과의 급부상에 이목이 집중되고 있다.
정부의 문화정책을 주도하는 ‘싱크탱크’인 한국문화관광정책연구원 이영욱(47) 원장, 국립현대미술관 김윤수(68·前 민예총 이사장) 관장, 국립민속박물관 김홍남(56) 관장, 2005년 프랑크푸르트국제도서전 주빈국 조직위원회 산하 ‘한국의 책 100권 선정위원장’을 지낸 황지우(52) 시인, 의정부 예술의전당 구자흥(59) 사장…. 모두 문화행정의 방향을 정하고 실천하는 자리를 새로 차지한 서울대 미학과 출신이다. 영화 관련 정책 등에 깊숙이 참여해온 한국예술종합학교 영상원 심광현(48) 원장 역시 서울대 독문과 학부를 거치고 미학과 대학원을 졸업했다.
문화계의 쌍두마차, 민예총과 문화연대
참여정부가 들어서면서 문화계의 권력은 문화연대와 민예총 쌍두마차에 집중됐다. 이것이 저항정신과 반골 기질을 가진 ‘삐딱이’ 미학과 출신들과 코드가 맞은 것이라는 평.
“세상이 변했다는 것을 느낀다. 예전에 재야에서 목소리를 내던 이들이 주류가 돼 정책을 이끌어나갈 수 있는 위치에 있다.”
서울대 미학과 김문환 교수의 말이다.
심광현 원장은 “김윤수·유홍준·황지우·김지하(63·본명 김영일) … 나를 포함해 다같이 미학과에서 쫓겨난 사람들이다. 사회에서 몸으로 뛰면서 자기 역할을 해온 것이 1990년대 들어 민주화되면서 인정받은 것이다. 일부에서 생각하듯 하루아침에 ‘아웃사이더’에서 ‘메인 스트림’이 된 것은 아니다”라며 사회 참여에 적극적이었던 미학과 출신들의 활동을 높이 평가했다.
‘민중미술의 정신적 지주’라는 꼬리표를 달고 다니는 현대미술관 김윤수 관장은 1970년대부터 국내 리얼리즘, 민중미술 계열의 지도적 역할을 해왔다. 민주화운동을 하다 이화여대와 영남대에서 해직과 복직을 거듭한 그는 민족미술협의회 결성을 주도했고, 한국민족예술인총연합 공동의장을 거쳐 전국민족예술연합을 재창립했다.
이영욱(前 전주대 교수) 한국문화관광정책연구원장 또한 문화개혁시민연대 정책위원회 부위원장 및 문예미학회 편집위원으로 활동하는 등 문화예술 현장에 정통하면서도 개혁적 성향이 강한 것으로 평가받는다.
문화운동을 통해 사회 변혁을 꾀하는 인물로는 한국예술대 영상원 심광현 원장이 우선 손꼽힌다. 심원장은 민중민주 논지의 계간지 ‘문화과학’의 편집인이자 문화개혁시민연대를 이끄는 집행위원이다. 1982년 서울미술관 기획실장을 맡으면서 사회활동을 시작한 그의 오랜 별칭은 ‘민족미술협의회 대표 이론가’.
당시 김윤수 관장, 김민기(극단 ‘학전’ 대표) 부관장 체제의 서울미술관은 1969년 김지하 시인과 ‘현실동인선언’을 함께 낸 이들이 주도한 ‘미술운동’ 공간이다. 1993년 문을 닫을 때까지 ‘문제작가전’을 통해 신학철·민정기 씨 등을 세상에 알리고 외국의 진보적 작가들도 꾸준히 소개했다. 1985년부터는 그 전해 결성된 민족미술운동협의회 평론분과에 참여했고, 젊은 비평가들을 모아 미술비평연구회도 만들었다.
김홍남 국립민속박물관 관장은 살아있는 역사 현장을 지켜온 미술사학자로 통한다. 전남 영암 구림마을 살리기 프로젝트를 시작으로 내셔널트러스트운동(문화유산보존운동)을 적극적으로 펴왔다. 미국 예일대에서 미술사학으로 박사학위를 받고 1980년부터 미국 스미소니언동양미술관 연구원, 메릴랜드미술대 전임강사를 거쳐 1991년까지 해외에서 활동했던 국제파인 김교수가 국립민속박물관장에 임명된 것은 이례적인 일. ‘민속박물관도 국제 마인드를 가진 이가 세계적으로 키워야 한다’는 것이 발탁 배경으로 알려졌다.
그동안 재야에서 ‘대안세력’으로 통하며 주류 문화권력을 비판하고 소수의 목소리를 내던 이들 서울대 미학과 출신들은 ‘삐딱이 정신’ ‘반골 기질’이라는 표현으로 엮어진다. 이에 대해 김홍남 관장은 “‘삐딱이’니 ‘반골’이니 하는 표현은 잘못된 것이다. 항상 깨어있기 때문에 일반인들이 덮어버리려는 것을 김지하 선배를 비롯한 김윤수 관장, 황지우 시인 등 미학과 동문은 시대의 문제에 대해 양심껏 접근했다”며 “건전한 지성인이라면 그래야 하는 것”이라고 반론을 폈다.
한편 예술에 대한 이해와 필요성이 미미했던 1960, 70년대에 이미 예술 전반에 관한 이론을 쌓고 총체적 시각으로 문화예술 방면에서 활동했던 미학과 출신들이 50대 전후가 되면서 그 저력을 내뿜는 것이라는 시각도 있다. 미학이라는 학문이 자유로운 사고를 요하기 때문에 사고의 넓이와 깊이가 남다르다는 점도 이들의 빼놓을 수 없는 강점이다.
민예총 관계자 또한 “미학과에는 원래 인재가 많다. 사회가 그동안 가치있게 취급하지 않았던 부분에 주목하다 보니 눈에 띄는 것일 뿐, 그들은 이미 ‘홀로 선 문화권력’이었다”며 서울대 미학과 출신들이 주류로 떠오르는 것에 대해 ‘당연하다’는 반응을 보였다.
미학실천파들의 ’힘’
실제로 서울대 미학과의 힘은 어제오늘 이야기가 아니다. 시인이자 사상가인 김지하, 시·조각·사진 등 전방위 예술을 지향하는 황지우, 국내 문화기획가 1호인 강준혁(57·성공회대 예술대학원장), 탈춤·민속극의 대부 채희완(53·부산대 무용학 교수), 문화유산 답사의 붐을 일으킨 유홍준, 코미디 극의 선구자 이상우(53·극단 차이무 창설자), 대박 영화 제작자 신철(46·‘신씨네’ 대표), 정치평론가로 독설을 내뿜는 진중권(41·중앙대 겸임교수, 정치칼럼리스트)…. 이들의 행동반경은 가히 전방위로, 한국 문화계에서 각자 독보적 영역을 개척했다. 미학 최고의 주제인 ‘아름다움이란 무엇인가’ 라는 문제를 이론이 아닌 실천으로 풀어낸 ‘미학실천파’라고 불린다.
미학실천파의 역사는 미학과가 미대에 소속됐던 1950년대로 거슬러 올라간다. 연극계의 고(故) 이낙훈·김동훈 씨 등이 원조격. 소위 엘리트였던 이들이 김의경·허규 등과 함께 동인제 극단인 실험극장을 탄생시키면서 한국 연극의 새로운 움직임이 싹텄다. 이후 1960년 미학과가 문리대로 소속을 옮기면서 새로운 실천그룹이 속속 등장한다. 미학실천파의 분위기는 김지하라는 걸출한 인물을 빼놓고는 이야기할 수 없다.
‘오적’ 등의 시를 통해 유신정권과 정면대결을 펼쳤고, 최근 단군으로부터 비롯된 우주적 삶을 회복하려는 ‘율려사상’을 설파하는 그의 미학과 시절 주요 활동공간은 연극 무대였다. 동기생 정일성(64·극단 미학 대표) 씨와 함께 문리대 연극회를 이끌었던 그는 연출이나 기획뿐 아니라 연극회 후배에 대한 카리스마로 유명하다.
“지하 형은 1966년 졸업 후에도 학교 정문 앞에 와서는 후배들 이름을 하나하나 불렀다. 수업을 받다가도 빠져나와 형과 함께 술을 마시며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눴다. 학교에서 배운 것보다 선배들에게 배운 것이 컸던 시절이다. 강의가 끝나면 동숭동 쌍과부집에서 제2강의가 시작되고는 했다.”
프런티어 마인드로 예술분야에 큰 획
연극 연출가 이상우 씨의 추억이다. 당시 연극회를 주도했던 인물들이 대부분 미학과였을 정도로 이들과 연극의 관계는 떼어놓을 수 없다.
정한룡(53·연우무대 대표) 씨는 물리학과로 입학했지만 연극활동을 위해 미학과로 옮긴 경우다. 정일성 씨는 문리대 연극회를 주도한 뒤 1960년대 동양방송(TBC) PD를 지냈다. 1988년 20년 동안의 미국생활을 마치고 돌아와 극단 ‘미학’을 설립해 지금도 왕성한 연출활동을 펼치고 있다. 정한룡·이상우 씨는 문리대 연극회 출신의 김광림 씨 등과 함께 1978년 연우무대를 만들어 ‘새들도 세상을 뜨는구나’ ‘칠수와 만수’ 같은 실험성과 풍자성 넘치는 작품을 만들어내며 80, 90년대 한국 연극사에 한 획을 그었다.
각종 공연이나 행사의 기획자 그리고 영화 제작자 등 우리나라에서 생소했던 분야를 개척한 이도 여럿 된다. 공연기획의 선구자 강준혁과 구자흥, 코미디 연극의 장을 연 이상우, 탈춤 민속극 등 민중예술계의 대부 채희완은 우리나라 문화영역의 발판을 넓힌 것으로 평가된다.
우리나라 문화기획자 1호 강준혁은 김덕수의 사물놀이, 공옥진의 병신춤, 김숙자의 살풀이춤, 이매방의 승무 등을 처음 시험대에 올렸다. 졸업 후 학림다방에 기거하면서 DJ로, 또 연주자로 일한 경험을 바탕으로 ‘공간사랑’ 극장에서 여러 구상들을 꾀했다. 전통예술의 밤을 마련해 당시 젊은 민속음악들의 사설단체였던 ‘시나위’에 공연 기회의 장을 마련해 주었고, 이는 ‘사물놀이’가 보통명사화하는 발판이 되었다.
그런가 하면 무속이 박해받던 1979년 ‘무속굿제’를 열어 동해안 오귀굿, 서울 진오귀굿, 진도 씻김굿 등 천대받던 ‘굿쟁이’들이 인간문화재로 내림받는 데 큰 역할을 했다. 이밖에도 재즈음악, 시낭송회, 현대무용 등 그때까지 공간을 얻지 못한 예술에 ‘공간사랑’의 문을 활짝 열고 이들이 뿌리내리기까지 보살폈다.
1989년 ‘스튜디오 메타’를 세워 독자적인 문화기획가의 길을 걷기 시작해 LA예술제(1990)와 유로아시아예술제(1991)의 코디네이터로 입지를 굳혔다. 1998년에는 아비뇽국제예술제의 한국주간 예술감독을 맡아 세계적 문화기획가로 이름을 떨쳤다. 그는 자신과 같은 문화기획자를 양성하기 위해 다움문화예술기획연구회의 산파역을 맡았고, 현재 그 핵심인 다움아카데미 원장으로 있다.
서울대 총연극회장을 지낸 구자흥 씨 또한 강준혁과 양대산맥을 이루는 공연기획자. 대학 시절 그가 조영남을 발굴한 일화는 유명하다. 음악감상실에서 DJ로 활동하면서 조영남이 녹음한 테이프를 틀었는데, 그 테이프를 구하려는 이들이 줄을 이었다고 한다. 지난 10년간 ‘베세토(BeSeTo)연극전’의 사무총장으로 일하며 중국 - 한국 - 일본 간의 연극 통로를 마련했다. BeSeTo란 중국·한국·일본의 각 수도인 베이징(Beijing)·서울(Seoul)·도쿄(Tokyo)의 머리글자를 딴 3국의 공동 연극제로 3개국이 매년 차례로 개최하고 있다.
탈춤·마당극 등을 대중적인 문화로 만든 채희완 교수는 한국민예총 발전에 상당한 역할을 해왔다. 미학과 입학 직후부터 가면극 연구회에서 교습받은 탈춤을 전국 대학에 보급시켰다. 1970년 영화감독 장선우 등과 함께 탈춤반을 만들고 73년부터 시인 김지하, 민중가수 김민기 등과 함께 마당극 운동에 뛰어들었다. 민예총이 출범하던 1988년 민족극운동협의회를 만들어 초대 회장을 지냈고, 민족통일 대동 장승굿의 첫 행사를 주도하기도 했다. 마당극 전문연행단체인 한두레를 만들어 민족극 부흥운동에 적극 나서고 있다.
연극연출가 이상우 씨는 만드는 작품마다 히트를 치는 연극계의 ‘흥행수표’. 씨돼지에 얽힌 우화(寓話) ‘돼지사냥’을 비롯해 변소 풍자극 ‘비언소’(非言所), 여성들의 섹스 거부극 ‘평화씨!’ 등 우리나라에 흔치않은 코미디 연극의 장을 열었다. 극단 차이무(‘차원이동무대선’의 줄임말)는 그가 7년째 이끌고 있는 극단 이름이다.
‘차원을 이동시키는 무대를 싣고 재미와 즐거움을 연료로 삼아 항해하는 배(船)’라는 의미. 그의 연극의 뿌리는 서울대 미학과 시절 주생활 공간이었던 대학극이다. 1980년대에는 김민기등과 함께 사회 부조리를 풍자하는 대표적 극단, 연우무대의 기둥이었다.
미학과 출신들이 뜨는 진짜 이유
대부분의 1960, 70년대 학번 인사들이 연극계, 공연계, 미술사학계에서 행보할 때 상업 대중문화의 핵심인 영화계에 ‘돌풍’을 몰고온 이가 신철이다. ‘결혼이야기’로 한국 영화에 로맨틱 코미디라는 새로운 장르를 처음 소개했던 그는 영화 제작에 ‘기획’ 개념을 도입한 최초의 ‘영화 프로듀서’다. 영화의 제작·투자·기획이 분리되지 않았던 1990년대 초 그는 감독의 열정으로만 만들던 영화를 프로듀서의 머리로도 만들 수 있음을 보여줬다. 그러한 이력에 걸맞게 남들이 평생 한 편 만들기 어려운 ‘대박’ 영화를 여러 편 선보였다.
‘결혼이야기’(1992)로 시작해 ‘은행나무 침대’(1996) ‘편지’ (1997) ‘약속’(1998) ‘엽기적인 그녀’(2001)에 이르기까지, 서울 관객만 50만 명을 넘은 영화가 다섯 편이다. 그는 지금 ‘韓리우드’를 꿈꾸고 있다. 역대 최고인 100억 원대의 제작비가 든 ‘태극기 휘날리며’의 10배인 1,200억 원의 제작비로 ‘드래곤 워리어’(Dragon Warrior)라는 영화를 만들 계획이다.
30년 전 세상을 떠난 액션스타 리샤오룽(李小龍)을 컴퓨터로 되살린 이 영화는 할리우드 메이저 배급사의 투자를 받는다. “앞으로는 해외 시장을 염두에 둔 영화를 제작해 해외에서 경쟁해야 한다”고 말하는 그는 영화계의 독보적 ‘기획맨’이다.
미학과 출신들이 이처럼 한국 문화예술계에서 빛을 발하게 된 이유는 어디에 있을까. 경성제대 시절 ‘미학 및 고미술사 연구실’로 출발한 이 학과는 서울대의 출범과 함께 문리대에서 분리돼 예술대학에 편입됐다 문리대로 복귀했지만, 1970년대 들어 철학과에 통합되었다. 별도의 학과로 ‘완전 독립’한 것은 1984년 말이다. 그때까지 미학과에는 전임교수라야 늘 한두 명뿐이었다. 그것이 오히려 서울대 미학과 특유의 독립성, 자유를 중시하는 풍토를 만들었다는 시각도 있다.
개개인의 ‘예술적 재능’도 빼놓을 수 없는 미학과 출신들의 특징이다. 이상우 씨는 “문학·음악적 재능이 뛰어난 이들이 미학과에 입학했다. 그만큼 개성이 강해 자기세계를 고집하다 보니 어느 정도 이름을 얻은 것 같다”며 김용배·강준혁·황지우를 예로 들었다.
“예술의전당 사장이 된 김용배는 고등학교 때까지 콩쿠르를 휩쓸 정도로 피아노에 재능이 있었던 친구다. 결국 대학원에서 피아노를 전공했다. 또 강준혁도 클라리넷으로 입상했고, 황지우도 시인이다. 나도 그림을 했던 사람이고….”
사이버 세상 사로잡은 진중권·변희재
서울대 미학과 출신 문화계 인사 현황
학번 성명 직책
57 김윤수 현대미술관장
59 김지하 본명 김영일
59 오병남 서울대 미학과 교수
59 정일성 극단 ‘미학’ 대표
58 권영필 한국예술종합학교 미술원 교수
62 김문환 서울대 미학교 교수, 前한국문화관광정책원장
63 구자흥 의정부 예술의전당 관장, 문화디자인
63 정귀래 서울산업진흥재단 대표이사
64 송도익 前서울광고기획 부사장
65 최일옥 ‘미디어월드’ 대표
66 강준혁 성공회대 문화대학원장
66 정한룡 ‘연우무대’ 대표
66 최민 한국예술종합학교 영상원 교수
67 김홍남 국립민속박물관장
67 유홍준 명지대 미술사학과 교수
69 김지일 MBC 편성국장
69 이상철 ‘조선일보’ 출판국장
70 이상우 한국예술종합학교 연출과 교수
70 채희완 부산대 예술대학 무용과 교수
70 조상기 ‘한겨례신문’ 편집국장
72 김용배 예술의전당 사장
72 나성린 한양대 경제학과 교수
72 오종환 서울대 미학과 교수
72 정복순 효성카톨릭대 예술학과 교수
72 황지우 한국예술종합학교 연극원 교수
73 박낙규 서울대 미학과 교수
73 신병식 SBS 해설위원
73 이창환 서울대 미학과 교수
74 김태경 도서출판 ‘이론과실천’ 대표
76 신 철 ‘신씨네’ 대표
76 이영욱 한국문화관광정책원장
76 곽병찬 ‘한겨레신문’ 문화부장
82 진중권 중앙대 겸임교수 · 문화평론가
83 심광현 한국예술종합학교 영상원 원장
88 김재인 문화평론가
91 방시혁 작곡가
94 변희재 정치웹진 ‘브레이크뉴스’ 편집국장
구자흥 씨는 “자기가 좋아 미쳐 했는데, 연륜이 쌓여 두각을 나타내는 것”이라며 ‘마니아 정신’에 주목했다.
미학이라는 학문 특성도 영향을 미쳤다. 유홍준 교수는 “미학이라는 분야는 아주 근본적인 사고를 필요로 하기 때문에 원칙을 강조하게 된다. 미학과 출신들이 미개척 분야를 과감하게 돌파해 나갔던 것도 이 때문 아니겠느냐”고 말한다.
1980년대 이후 학번으로 내려오면 젊은 진보 진영의 대표적 논객 진중권과 변희재(32·‘브레이크 뉴스’편집국장)가 있다. 사이버 혁명의 흐름에 맞아떨어지는 이들은 인터넷에서 정치색 뚜렷한 도발적 글쓰기로 네티즌들의 여론 형성에 영향을 미쳤다.
노동자문화예술운동연합에서 ‘정치적 문화운동’ 을 전개했던 진중권 씨는 보수주의자들에게 독설을 퍼붓는 ‘네 무덤에 침을 뱉으마’를 출간하면서 화제가 됐다. 대개 지성인이라는 사람들이 인터넷에 글 올리기를 꺼려하는 데 반해 그는 자기 글에 대한 독자 의견에도 끈질기게 대답하고, 독자에 대한 공격도 서슴지 않는다. 정치적 논쟁거리가 생길 때마다 직설적 표현과 다양한 비유를 통해 보수 정치권을 강하게 비판해온 그는 10권 이상의 책을 낸 베스트셀러 작가이자 미학자다. 유홍준이 문화유산 답사의 대중화에 불을 붙였다면 진씨는 그의 저서 ‘미학 오디세이’를 통해 미학 대중화에 기폭제 역할을 했다. 그는 오는 11월부터 방송에서 ‘미학의 눈으로 읽는 서양예술사’를 강연한다. 정치논객이 아닌 미학을 전공한 철학자로서 서양예술사에 나타나는 다양한 관점과 표현 기법을 그리스와 이집트의 고대작품부터 현대미술에 이르기까지 조망할 계획이다.
인터넷신문 ‘대자보’를 창간하면서 일찌감치 인터넷 사이트 ‘안티조선’ 논객으로 명성을 날린 변희재 씨는 지난 대선 국면에서는 정치칼럼 사이트 ‘서프라이즈’의 논객으로 활약하다 올해 뛰쳐나와 정치웹진 ‘시대소리’를 만들었다. 고등학교 시절 이미 통신란에서 글발을 휘날리기 시작해 대학 재학 시절 ‘스타비평’이라는 책을 내고, 인터넷 언론 ‘대자보’와 합병해 ‘브레이크 뉴스’를 만들었다. 현재 ‘브레이크 뉴스’ 편집국장인 그는 서울대, 조·중·동 언론사, 방송 등에 가차없는 독설을 내뿜어 인터넷언론의 힘을 보여줬다. 최근 여러 언론매체에 ‘미디어비평’ ‘대중문화 비틀기’ 등의 칼럼으로 톡톡 튀는 시각을 제시해 독자의 무릎을 치게 만든다.
앞으로는 철학자이자 문화평론가인 김재인의 행보가 주목된다. 질 들뢰즈의 ‘베르그송주의’, 리처드 커니의 ‘현대 사상가들과의 대화’, 로저 스크루턴의 ‘크산티페의 대화’, 로저 스크루턴의 ‘프뤼네의 향연’, 질 들뢰즈 & 펠릭스 가타리의 ‘천 개의 고원’, 프리드리히 니체의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등 왕성한 번역활동을 하고 있는 그는 문화현장에 대한 해박한 정보, 철학·어학에 대한 내공을 갖춘 젊은 학자로 꼽힌다. ‘노무현 정부에 대한 철학자 김재인의 입장’을 과감히 설파해 네티즌들의 공방이 이어지기도 했다. 현재 민예총 문예아카데미에서 철학 강의를 하고 ‘문화마당’에 ‘이 기쁜 철학’을 연재중이다.
대중음악계의 샛별, 방시혁
방시혁(33·대중음악 작곡가)은 미학과 출신 중 처음 대중음악에 발을 내디딘 ‘히트곡 메이커’다. 인기그룹 GOD를 비롯해 김건모·박지윤·이수영·소찬휘·베이비복스 등이 부른 수많은 대중가요를 작곡했다. 그와 ‘작업’하려는 이들이 줄을 설 정도로 대중음악계에서 주목받는 인물이다.
학계로 눈을 돌리면 미학과 출신 교수들이 각 예술학과에 포진하고 있다. 경성대 시절부터 이어져온 역사를 가지고 있지만 적게는 5명에서 많게는 20명 정도의 작은 학과였기에 이제까지 졸업생은 650여 명 남짓. 그 중 60명 정도가 대학에서 교편을 잡으며 각 예술 분야의 후진 양성에 힘쓰고 있다. 특히 미술사 연구에 미학적 관점을 접목시킨 인물들이 눈에 띈다. 권영필(63·한국예술종합학교 미술원)·김홍남(56·이화여대 미술사학과)·김기주(57·인천가톨릭대 종교미술학과) 교수 등은 우리 미술의 역사를 폭넓은 시각으로 조망해 왔다. 그중 ‘나의 문화유산 답사기’로 미술사를 대중화한 유홍준 교수는 가장 널리 알려져 있다.
순수학문적인 연구와 현실에 대한 고민을 동시에 진행시킨 김문환(55·서울대 미학과) 교수는 사회미학적 관점에 입각해 문화정책이나 문화경제학에 대한 연구를 전개했다. 한국문화정책개발원장을 맡은 바 있으며 30년간 연극평론가로 활동해왔다. 그는 “미학이라는 학문에 대한 인식이 높지 않다. 미학이라는 학문이 관념론적 철학이기 때문에 현실로부터 거리를 취한 상태였다. 판단미학의 한계를 벗어나 예술과 사회의 관계, 21세기에 주목받는 영상예술에 관심을 기울이고 있다. 문화정책, 예술경영 분야까지 연결점을 스스로 마련해야 하지 않을까 생각한다”며 미학계가 나아가야 할 방향을 제시했다.
이렇게 한 분야에서 우뚝 서 있는 이들은 말 그대로 ‘1인 문화권력’이다. 이상우 씨는 “권력이라는 말에서는 예전 기득권층이 뿌리깊게 자리잡은 ‘문화권력’의 부정적 이미지가 강하게 느껴진다”며 ‘똘똘’ 뭉쳐 세를 형성하는 움직임은 미학과 동문들이 가장 싫어하는 일이라고 강조했다. 그는 “유홍준 선배에게 문화권력이라는 말을 한다. 그가 그만큼‘영향력 있다’는 의미로서의 ‘문화권력’이라면 자부심을 가질 만하다”며 “나도 내 작품 안에서만은 권력이다. 후배들이 내가 연극할 때면 돈 안 받고도 하겠다고 많이들 온다”(웃음)고 덧붙였다.
구자흥 씨는 미학과 출신들의 ‘홀로서기’에 대해 “서울대 미학과 출신들은 서울대 사람들이 흔히 그렇듯 서로 잘 모이지 않는다. 그러나 특출난 연극연출가, 공연기획가가 따로 극단을 차리기보다 함께 하면 더 좋은 작품이 나오지 않겠느냐”며 이색적인 의견을 내놓았다. 다양한 재능꾼들이 함께 일하면 폭발력이 배가될 수 있는데, 자기 분야만 파고드는 경향이 있다는 것이다.
이들에 대한 우려의 시각도 없지 않다. 사회 참여 지향적 인물들이 ‘뜨는’ 것은 미학이라는 학문 자체에 대한 오해를 불러일으킬 수 있다는 것. 학계에서는 “이제까지 민중예술이 주목받지 못했다고 해서 기존에 주류문화로 생각됐던 고급예술을 민중예술로 대체해서는 안된다”며 우려를 나타냈다. 오래전부터 문화예술 정책에 깊이 관여해온 한 교수는 “고급예술, 민중예술 어느 하나 없이 문화의 총체성은 성립되지 않는다”며 “문화 전반에 관한 파이 키우기에 주력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한정된 국가 예산을 형평성 있게 배분해 그동안 결핍됐던 문화 부분을 키워 나가자는 것이다.
한편 현재 문화계 정책에 깊이 관련하고 있는 관계자는 “예전 몇 십년 동안 문화계 주류를 장식했던 이들의 문화권력은 무서울 정도로 뿌리가 깊고 조직적이다. 지금 새롭게 부상하는 문화권력은 결집력이 없다. 그동안 검증받지 않고 학계에 뿌리내린 이들, 그리고 비정부기구(NGO)야말로 여전히 거대한 문화권력이다. 지금 ‘혁신’하려는 몸부림이 실패할 가능성이 있는 것도 변화에 적극적이지 않고 안주하려는 기존의 세력 때문”이라고 강하게 비판했다.
결집력 없는 ‘1인 문화권력’
이제 미학과 출신 50대 안팎의 문화예술계 인사들은 한국의 문화 정책을 세우고 집행하는 ‘권력’이자 주류가 되었다. 권력 그 자체가 나쁜 것은 아니다. 문화권력 또한 ‘어떻게 사용하는가’에 따라 독이 될 수도 있고, 약이 될 수도 있다. 이들이 ‘비주류―대안적 비판 세력’으로 지녀왔던 건강성과 분방성을 과연 주류 문화로 수렴해가는 데 성공할 것인가. 한국의 문화 발전은 새로운 시험대에 놓였다. 스스로 견제하며 성찰하는 문화권력이 기대되는 시점이다.
[인터뷰] 김용배 예술의전당 사장(서울대 미학과 72학번)
“미학과 약진은 사회 성숙의 결과”
서울 예술의전당 9대 사장에 피아니스트 김용배(50·추계예술대 교수) 씨가 임명되자 문화예술계의 관심이 쏠렸다. 연주자가 국내 최대 복합문화공간의 경영을 맡게 된 것은 처음 있는 일이기 때문이다. 미학과 출신의 피아니스트라는 독특한 경력도 큰 화젯거리가 되었다. 그에게 ‘서울대 미학과’ 이야기를 들어보았다.
― 요즘 서울대 미학과가 주류로 떠오르는 이유가 무엇이라 생각하나?
“그동안 각 예술 분야에서 자기의 길을 꾸준히 걸었던 사람들, 스스로를 갈궜던 이들이 폭발력을 가지게 된 것이다. 그동안 사회가 주목하지 않았을 뿐이다. 사회가 성숙해 가고 있는 하나의 징표라고 생각한다.”
― 임명 배경에 대해 조금 ‘의아하다’는 반응이다(언론과 문화계 일각에서는 서울대 문리대 72학번 모임인 ‘마당모임’ 멤버로 열린우리당 정동영 의장, 이해찬 의원 등과 친분이 있는 그가 예술의전당 사장에 임명되자 ‘정치권 추천설’을 제기하기도 했다).
“그동안 예술의전당 수장에 주로 행정가들이 임명됐는데, 문화관광부에서 이제는 공연예술에 관계되는 사람이 한번은 이끌어가는 것이 좋지 않나 생각한 것 같다.”
― 일각에서는 미학과 출신들의 ‘삐딱이 기질’이 정권과 코드가 맞았다는 이야기도 있는데….
“그 시대 젊은이들은 다 그랬다. 언론에서 그렇게 이름을 붙인 것뿐이다. 청바지·통기타…. 그 시대 젊은이들이면 그런 낭만은 있지 않은가.”
― 친하게 지낸 동문들로는 어떤 이들이 있나?
“황지우와 친했다. 그 친구는 학창 시절부터 ‘천재 끼’를 보였다. 사물을 보는 눈이 독특했고, 어린 나이에도 슬픔과 비장함이 느껴졌다. 나는 기억이 잘 안나는데, 내가 지우한테 ‘너 왜 그렇게 인상을 쓰고 사느냐?’고 했단다. 시·연극·도예 할 것 없이 정말 멀티플레이어, 만능 재주꾼이다.”
― 앞으로 포부가 궁금하다.
“유홍준 씨는 ‘아는 만큼 보인다’고 했다. ‘명언 중 명언’이다. 예술을 아는 만큼 인생이 풍요로워진다고 생각한다. 가능한 한 많은 이들이 문화를 접할 수 있도록 하고 싶다.”
2004년 07월호 | 입력날짜 2004.06.1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