늦가을 서정은 헐거움이다. 황금들판이 비워지고 나무는 살이 빠진다. 계곡물마저 시름시름 끊겨 간다. 그러나 이맘때, 정서운 할머니의 고향마을은 감빛으로 배부르다. 어른주먹만한 대봉감이 '그렁그렁 붉은 눈물'로 익어간다.
정서운 할머니는 위안부였다. 2011년 제작된 11분짜리 애니메이션 '소녀 이야기'의 당사자다. 15살 소녀가 집을 떠난다. 주재소에 갇힌 아버지 구할 유일한 길이라 여겼다. 일본공장에서 2년만 고생하면 된다 했다. 감언이설이었다. 그는 인도네시아 자바섬으로 끌려갔고 8년간 유린당한다. 강간, 자살 기도, 아편 중독, 성 노리개, 동료의 주검. 죽어도 기어이 살아야 했던 그는 1992년 참담한 증언을 한다. "나는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였다." 고백은 서늘했다.
정 할머니는 2004년 81살로 한 맺히고 귀한 생을 닫는다. 유해가 섬진강에 뿌려졌다. 그리고 그가 고향마을 벽화로 태어났다. 담벼락마다 자유로이 날갯짓하는 나비와 치유 뜻하는 차꽃이 지천이다. 서러운 거 내려놓고 훨훨 날으소서. 남은 자들이 바치는 곡진한 서원으로 하동 땅의 풍요롭고 처연한 가을이 저물어간다.
위안부 고 정서운 할머니와 그 땅 사람들
하덕마을 골목길 갤러리로 재탄생
대축마을 감나무밭 뒤쪽
수령 600년 노거수 범상치 않은 기운 오롯이
수확 끝난 악양들판 허허로워
■하덕마을 골목길 갤러리 정 할머니의 고향마을은 하동군 입석리 하덕마을이다. 거기서 조금만 나서면 악양들판에 닿는다. 지난 9월, 그 땅에 골목길 갤러리가 문을 열었다. 집집 담장은 아슴한 옛 일을 담았다. 작가 27명이 그 땅 사람들을 인터뷰한 작품들이다.
베틀 짜는 할머니 벽화. 그 집 할머니 손재주가 동네에서 제일 갔다. 돌아가는 북이 보이지 않을 정도였다. 고기 낚는 철제 조형물. 그 집 할아버지는 어부였다. 밀짚 모자 쓰고 섬진강에서 은어를 잡았다. 아이가 쇠코뚜레 떠받던 설치물. 그 집 할아버지는 소장수였다. 할아버지가 소 팔러 가는 목판이 함께 걸렸다. 차꽃 활짝 핀 어느 가을날 황혼녘이었던 모양이다. 그 집 할머니가 주홍빛 뚝뚝 떨어지는 대봉감을 따와 건넨다. "한번 맛보고 가시게." 정성 들여 깎은 감이 마루에 내놓은 소쿠리에서 말라간다. 금덩이같은 손자 입속으로 들어갈 게다.
정 할머니 헌정작은 세 점이다. 두 점은 작가가, 한 점은 악양초등학교 아이들 것이다. 여린 소녀가 총구 앞에 떤다. 동심에 비친 위안부다. 그 위로 나비가 날갯짓한다. 붉은 빛 스카프로 날개를 엮었다. 위안부 할머니의 상징색은 노란색인데, 의아하다. "언젠가 정 할머니가 강연차 스웨덴을 들렀죠. 그때 한 여성이 '여성해방과 진보의 꽃'이라며 붉은 장미를 선물했답니다. 마음을 움직였던가 봐요. 그후 붉은 장미를 내 몸 같이 아끼셨죠." 매암차문화박물관 강동오 관장 말이다. 그는 정 할머니의 '양아들' 두 명 중 한 명이다. 정 할머니 사망 후 영정 들고 상주 역할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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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덕마을 골목길 갤러리. |
골목길 갤러리는 하동군과 하동 악양슬로시티위원회가 2년간 공동기획한 산물이다. 정 할머니 기리고 박경리 선생 '토지' 담아 내려 했다. "토지 무대가 상상력의 공간이 아니라 할아버지와 할머니가 살았던 실제 땅이었음을 구체적으로 보여주고 싶었죠."(강 관장) 골목길 갤러리에는 최치수도, 서희도, 용이도, 강청댁도 없다. 그저 정 할머니와 그 땅 사람들로 채워졌다. 그러나 그들의 수난과 일상이 바로 '토지'였다. 박경리 선생도 우리 민족에 대한 슬픔, 눈물, 사랑으로 토지를 썼다 했다.
취간림으로 향했다. 하덕마을에서 5분 거리다. 조선시대 비보림으로 조성됐다. 낙엽진 숲이 구수하다. 취간림 한쪽에 정서운 할머니 추모비가 섰다. "정 할머니가 늘 부탁했죠. 내 동무들 제삿밥이라도 올려줘. 2007년에야 그 약속을 지켜냈죠. 그게 이 추모비입니다." 강 관장은 매년 여기서 명복을 빈다. 추모비 이름이 '평화의 탑'이다. 문득 딸 아이 말이 떠오른다. "아빠, 새가 자유롭게 나는 게 평화래요. 알아요?" 새 울음이 유난히 높다.
■대축마을 대봉감 대봉감은 씨알이 굵다. 큰 봉우리 감이라 대봉(大峰)이다. "일제강점기의 개량종이죠."(강 관장). 일본이 그들 나라에서 들여온 감 종자를 지리산 대감에 접붙였다. 대감은 지리산 토종감이다. 대봉감의 3분의 2 크기인데, 하동뿐 아니라 산청 구례 광양에서 자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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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을걷이 끝나가는 악양들판. |
대봉감은 악양들판 둘레 마을 어디서나 흔하다. 주산지는 대축마을이다. 악양들판을 가운데 두고 하덕마을과 마주한 땅이다. 대축마을은 예부터 감으로 자자했다. 임금에게 진상했다. 우리나라 유일한 '감계'를 둔 땅이기도 했다. 감계는 일종의 협동조합. 농민이 계원이었다. 1980년대 초반까지 명맥을 유지했던 감계는 전국적인 유통망을 가진 자율적인 농민조직이었다. 상인이 오면 물량을 조절했고 감 값을 매겼다. "농민이 시장을 장악한 드문 케이스였죠." 강 관장 설명이다.
대축마을이 온통 감빛으로 그득하다. 감밭은 주렁주렁 주홍빛이다. 참으로 넉넉한 풍경이다. 돌담 너머로 걷이가 바쁘다. 이 땅 사람들은 효자 딴다고 한다. 겨울 나려면 비타민이 필요하다. 이 빠진 어르신들에게 살살 녹는 대봉감 홍시는 비타민이었다. 감나무는 아들보다 나은 '효목'이었고 대봉감은 '효자'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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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미산 노거수인 문암송. |
감밭 뒤쪽 아미산으로 길을 잡았다. 5분쯤 걸었을까. 하늘로 아름드리 가지 뻗은 소나무가 육중한 바위 뚫고 우뚝하다. 문암송이다. 수령 600년의 천연기념물. 둘레가 3.2m나 된다. 줄기가 묵직하게 몸을 뒤틀어 올렸다. 범상치 않은 노거수의 기운이 오롯하다.
문암송 아래 감밭은 풍년이다. 그 너머로 넓은 들판이 펼쳐진다. 악양들판. 천석군을 당대 5명 배출한다는 기름진 땅. 이 땅 사람들은 무담들, 무딤이들이라 호명했다. 담 없는 들이었다. 홍수 닥치면 섬진강물이 쳐들었다. 들판 한복판 부부송까지 넘쳤다. 시도 때도 없이 물 차는 땅은 지주가 버린 땅이었다. 그러나 농민에게 그 땅은 일구고픈 희망의 땅이었다. 무담들은 그러나, 일제강점기 신작로가 놓이면서 그만 '유담들'로 변했다. 19번 국도가 그 신작로다. 수확 끝낸 악양들판이 허허롭다. 문암송으로 불어오는 바람이 차다. 먼 산 뒤로 겨울바람이 서성인다.
매암차문화박물관에 들렀다. 강 관장 데리러 주던 길이었다. 차꽃이 곱다. 노란 꽃술이 하얀 소복을 둘렀다. 꽃향이 은근히 진하다. 차꽃은 품성이 소박하다. 보란듯이 내세워 피지 않았다. 이파리 사이 사이에서 수줍음을 탄다. 10월 중순부터 한 달쯤 만개한다. 보름 전이 절정이었다. 이날은 차나무가 꽃잎을 주섬주섬 거두는 중이었다. "이 꽃이 지고 나면 겨울일 겁니다."
글·그림=임태섭 기자 tslim@busan.com
TIP
■둘러볼 곳
매암차문화박물관(055-883-3500·사진)은 2000년 개관했다. 4천700 평의 차밭을 보유했다. 강동오 관장의 부친이 1968년 첫 차 씨를 뿌렸다. 박물관 터는 일제강점기 조선총독부 산림국 임업연습림 부지였다. 지리산 식생을 자원화하는 일종의 전진기지였던 셈. 박물관 건물도 그 당시 지어진 적산가옥이다. 강 관장이 1999년까지 살았던 집이다. 다방을 뒀는데, 무인 계산시스템으로 운영된다. 1인당 찻값 2천 원을 돈 통에 넣고 차를 즐기는 식이다. 차를 마시지 않더라도 차밭 구경은 자유롭다. 악양농협 맞은편에 위치했다. 악양교회(055-883-3083)는 하덕마을 초입인 봉대마을에 있다. 111년 된 건물로 소담하다. 1939년 이 교회 신도들이 신사참배를 거부했고 전도사 3명은 순교했다. 1943년엔 폐쇄되기도 했다. 격자창에서 세월이 읽힌다. 정서운 할머니가 다녔던 교회다.
■찾아가는 법 자가용:남해고속도로 하동IC에서 빠져나와 19번 국도를 타고 30분쯤 달리다 평사리삼거리에서 우회전해 8분쯤 직진하면 하덕마을에 닿는다. 총 2시간 30분. 하덕마을~대축마을 10분, 하덕마을~매암차문화박물관 5분.
대중교통:부산서부시외버스터미널(1577-8301)에서 하동시외버스터미널(055-883-2662~3)까지 2시간 20분 걸림. 오전 7시~오후 7시 출발, 1~2시간 간격, 1만 1천100원. 하동 교통 문의는 하동군청 055-880-2379.
■먹을 곳 아빠의 부엌(055-883-5289)은 하덕마을에서 걸어서 5분 거리에 있는 한식집이다. 된장찌개, 갈비탕, 비빔밥, 낚지볶음, 아구찜, 메기탕 등 메뉴가 다양하다. 어떤 걸 골라도 후회는 없다. 일대에서 소문난 맛집이다. 밑반찬도 정갈하다. 된장찌개 6천 원, 낚지볶음 1만 5천 원. 임태섭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