승탑(僧塔)의"기원 우리가 일반적으로 석가모니의 사리를 봉안한 것을 탑이라고 한다면 수행이 높았던 고승대덕을 불타와 같은 대우를 해서 스님의 사리를 두는 곳을 승탑이라고 설명하고 있다. 그러나 승탑의 기록이 남아 있지 않아 어떤 스님을 기리기 위한 것인지 알 수 없는 경우가 많다.
승탑(僧塔)은 앞서 말한 바와 같이 승려들의 묘탑(墓塔)을 말하지만 아직 우리에게는 승탑이라는 다소 생소한 명칭보다는 부도(浮屠).부두(浮頭).포도(浦圖) 등으로도 표기되는데 원래는 불타와 같이 붓다(Buddha) 음을 번역한 것으로 솔도파(Stupa) 즉 탑파의 의미로 쓰이고 부르기도 한다. 즉 부도라는 용어와 승탑이라는 용어를 아직 동시에 사용하고 있다. 승탑의 기원을 한번 알아보면 정확하게는 알 수가 없으나 현재 대체적으로 남아 있는 최초의 승탑으로 보는 것이 중국 서안의 흥교사(興敎寺)에 있는 669년에 조성되었다고 하는 현장(玄藏)법사의 탑과 현장의 제자인 신라 승려 원측(圓測 613~696)의 탑이라고 한다. 우리나라에 불교가 들어온 뒤부터는 불교의 장례법으로 시신을 화장(火葬)하여 그 유골을 거두어서 묻는 장골(藏骨) 불교식 장제(葬制)가 널리 이루어지게 되었다. 통일신라시대 하대에 와서는 선종의 수용과 확산으로 구산선종(九山禪宗)이 크게 일어나 스님의 위치가 높아져 승탑도 많이 만들어지게 되었다.
삼국유사에는 부도로 전남 곡성 태안사(대안사) 적인선사 조륜청정탑비 비문 중에서는 기석 부두지지(起石 浮屠之地)구절이 있어 즉 부도로 쓰여 있는 기록이 보인다.
우리나라에서는 원광(圓光)혜숙(惠宿), 백제 헤현(惠現) 스님의 부도가 정관 연간(貞觀 年間 627~649)에 세워졌다는 기록이 있으나 실제로 실물로는 확인되지 않고 있어 어떠한 형태로 언제 만들어진 것인지는 알 수 없다.
원광법사 승탑에 대한 기록으로 나이 여든이 넘어 당 정관 연간에 돌아가셨다. 부도는 삼기산(三岐山)금곡사(金谷寺)에 있는데 지금의 안강 서남쪽 고을이며 또한 명활산의 서쪽이다.
삼국유사에는 또한 지금 안강현 북쪽에 혜숙사란 절이 있는데 혜숙 스님이 머물럿던 곳이라 하며 또한 부도가 있다.
삼국유사에 기록된 혜현에 대한 기록을 보면 도를 닦은 사흑이나 속인(俗人)이나 모두 스님을 공경하여 영골(靈骨)에 안장(安葬)하였다. 스님의 나이는 58세였으며 당시는 당나라 정관의 초년이었다. 이러한 기록들로 보면 정관 연간에 승탑이 세워져 대체로 7세기 중엽 삼국시대에 이미 승탑이 세워져 있었을 가능성이 있다.
우리나라에서는 41대 헌덕왕 이후 9세기 무렵 중국의 당나라로부터 들어온 선종이 크게 세력을 떨치면서 선문의 제자들이 스승의 죽음을 기리고 예배의 대상으로 삼으면서부터 전국적으로 승탑이 많이 조성되기 시작한다. 이른바 전국의 구산선문의 승탑들이다. 동리산문 태안사 적인선사탑(경문왕 원년861), 사자산문 쌍봉사 철감선사탑 (경문왕 8년 868),가지산문 보림사 보조선사탑(헌강왕 6년 880),희양산문 문경 봉암사 지증대사 적조탑(헌강왕 9년 883), 실상산문 남원 실상사 증각대사탑(893년경).성주산 성주사 낭혜화상 백월보광탑(진성여왕 4년 890년 파손),
봉림산문 창원 봉림사진경대사 보월능공탑(경명왕 7년 923년)이 대표적인 승탑으로 이들은 모두 한국 석조 미술에 있어 대표적인 작품으로 평가되고 있다.
현존하는 승탑 중에는 실물로 남아 있으며 절대 연도가 가장 오래된 유물로는 강원도 원주 흥법사에서 전래된 것으로 보이는 (전)흥법사지 염거화상탑((국보 104호 신라 문성왕6년 884)으로 사리함에서 나온 금동 탑지판에 의해서 연대를 알 수 있다.
승탑이 세워진 장소는 절의 중심부가 아닌 절의 어귀나 뒤쪽의 의외로 외곽 호젓한 곳이며 스님의 법계(法階)에 따라 탑비(塔碑)와 같이 세워지기도 했으며 고려시대 때 부터는 석등까지 갖추어서 마련되었음을 볼 수 있다. 그러나 현재 가장 오래된 승탑으로는 강원도 양양군 진전사지에 있는 보물 제 439호 양양진전사지 도의선사탑이다. 이 승탑은 진전사지 부도라고 불렸으며 진전사를 창건한 선종의 종조(宗祖)인 도의선사의 묘탑으로 추정 하였으며 최근 거의 확실하게 보여 도의선사탑이란 명칭으로 개정되었고 조성 시기는 9세기 중반으로 추정된다.
승탑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기본적으로 탑파와 사리에 대한 이해가 필요하며 탑파와 사리에 대한 설명을 전체적으로 개관 하고자 한다.
사신(死身)을 태워서 그 유골을 매장하는 장법(葬法)인 다비와 함께 탑파는 불교가 발생하기 오래전부터 인도 사회에서 전통적으로 내려오던 사회관습이다. 기원전 5세기 초에 석가세존께서 입적하시자 그를 모시기 위한 분묘로 축조 되었으며 그 형식이 후세에까지 불탑의 기준으로 전래된 것으로 추정된다. 불교 초기에는 일반 신도들만 탑 공양이 허락되었고 스님은 탑을 신앙하지 못하게 하였다고 한다.
석가세존 입멸 후 석존의 유골 분배 전쟁을 거쳐 연고가 있는 마가다국의 아자타샤트루왕, 바이살리의 리차비족, 카필라 바스투의 사카족, 알라캄파의 부리족, 라마그라마의 콜라족, 베타두비파의 바라문, 파바의 말라족,쿠시나가라의 말라족 등 부족들과 나라들이 각각 나누어 탑을 세우니 이것이 팔분사리탑(八分舍利塔)이다. 배분을 결정한 드로나는 사리를 계량할 때 사용한 병을 가져가 세운 탑이 병탑(甁塔)이고 늦게 도착한 파팔라마나의 모랴족은 남은 재를 가지고 가서 역시 탑을 세웠는데 이것이 회탑(灰塔)인데 모두 열 개의 탑이 세워졌다.
그 후 인도를 통일한 아소카 왕이 넓은 대륙을 힘으로만 통제 하기가 힘들어지자 종교의 힘을 빌리고자 불교에 귀의하였다. 아소카왕이 팔분사리탑을 발굴하여 팔만 사천의 탑을 인도 전역에 세웠다고 북방 불교의 경전은 전하고 있다. 이렇게 세워지기 시작한 탑이 불교 전파와 더불어 간다라 지방(인도의 서북부 파키스탄 페샤와르지역)을 거쳐 중국에 전해질 때 다층누각의 형태로 건립되거나 황하 유역에서는 다층전탑으로 변화되어 건립된다. 현재 인도에 남아 있는 가장 오래된 탑은 산치대탑이다.
우리나라에서는 고구려 소수림왕 2년(372) 불교가 들어온 이래 백제,신라 모두 찬란한 불교문화의 꽃을 피웠고 절들이 세워지면서 탑들도 많이 만들어졌는데,대체적으로 목탑,전탑,석탑의 순서로 전래 건립되었다. 지금 목탑의 오랜 흔적을 더듬어 볼 수 있는 곳으로 고구려시대의 것으로 평양 청암리 절터의 팔각형 기단, 백제시대의 것으로 부여 군수리 절터의 방형 기단 터와 익산 제석사 절터의 방형기단, 신라시대의 것으로는 경주 황룡사 9층 목탑터, 사천왕사 동서 목탑터, 망덕사 동서 목탑 터,보문사 동서 목탑터 등이 남아 그 흔적을 볼 수 있다.
전탑은 안동 법흥사지 7층 전탑, 안동 운흥동 5층 전탑,안동 조탑동 5층 전탑, 칠곡 송림사 5층 전탑, 여주 신륵사 다층전탑이 현존하며 파괴되어 전탑 재료만 전하는 것으로는 안동 금계리 다층 전탑, 청도 불령사 전탑, 안동 장기리 전탑, 안동 개목사 전탑, 청도 운문사 작압전 등이 있다.
모전석탑으로는 경주 분황사 모전석탑,경북 영양 현이동 5층 석탑,영양 산해리 5층 석탑 영양 삼지동 석탑,안동 대사동 석탑, 군위 남산동 석탑, 제천 장락동 7층 석탑 제천 교리 석탑 등이 남아 있다.
석탑은 목탑 건립의 기술과 경험을 바탕으로 삼국시대 말경에 건립되기 시작하였다. 현존하는 백제시대 석탑으로는 익산 미륵사지 석탑, 부여 정림사지 5층 석탑이 있으며 신라 석탑으로는 현존하는 신라 석탑 중 가장 오래된 것은 선덕여왕 3년(634)에 만들어진 분황사 석탑, 그 외에 통일신라시대의 대표적인 작품으로 감은사지 동서 3층 석탑, 나원리 5층 석탑 장항리사지 5층 석탑 등 많은 석탑이 남아 있다.
탑은 불사리를 봉안하기 위하여 건립되는 조형물이며 시대와 지역 재료에 따라 그 특색이 다르다. 그러나 불탑,묘탑의 구별 없이 탑 내부에 사리를 보관하는 것은 변함이 없다. 봉안되는 유물로는 불사리 외에도 불경이나 불상 같은 법신사리를 봉안하기도 하였다. 탑의 조성이 개인의 원탑(願塔)인가 아니면 국가적인 사업인가에 따라서도 봉안 유물의 내용이 많은 차이를 보인다. 승탑에서의 봉안 유물은 다비한 스님의 사리와 여러 가지 장엄구이며 법신사리는 보이지 않는 듯하다. 사리는 죽음을 의미하며 죽음은 곧 열반을 의미하고 해탈(解脫)과 정각(正覺)을 의미하기도 한다. 사리는 인간을 화장한 후 남은 최후의 흔적이라 할 수 있는 유골(遺骨)을 말한다. 불교에서는 화장을 다비(茶毘),즉 불에 태운다는 뜻으로 시체를 화장(火葬)하는 일을 이르는데 다비하고 나서 뼈를 골라내는 과정에서 나오는 각종 구슬 모양을 사리라고 하기도 하며 오랜 수행의 결정체로 보아 신안의 대상물로 삼고 있다. 우리가 일반적으로 아는 사리는 석가의 사리를 말하며 불사리(佛舍利),승려의 사리를 승사리(僧舍利)라 한다. 탑은 그러한 사리를 봉안한 무덤이며 불사리를 안치한 탑을 불탑이라 하고,승사리를 모신 탑은 흔히 묘탑,승탑 혹은 부도,사리탑이라고 부른다. 우리나라에 처음 사리가 들어온 것은 대략 진흥왕 10년(549)으로.양(梁)무제((武帝)가 사신 심호(沈湖)로 하여금 진흥왕에게 보내온 것이다. 신라 진흥왕 때의 구법승(求法僧) 각덕이 귀국하는 길에 양 무제가 사신 심호를 파견하여 양나라 사신과 함께 불사리를 보내오므로 왕이 백관과 함께 홍륜사 앞길에 나아가서 맞이하였다.이후 삼국사기에 576년 안흥이 중국 진나라에서 불사리를 갖고 들어와 봉안 하였다. 진평왕 14년(582)중국에서 들어온 사리 1200과를 대구 동화사에 안치하였다는 기록과 석가모니 몸에서 나온 진신사리를 가져왔다는 것이 삼국유사에 기록되어 있으나 어디 안치했는지 알 수가 없다. 다만 선덕여왕때 자장율사가 중국 당나라에서 가져왔다는 진신사리는 설악산 봉정암 오대산 중대사 영축산 통도사 사자산 법흥사 태백산 정암사에 봉안되어 5대 적멸보궁이라 불리며 알려져 있다. 그 중 경남 양산 통도사의 진신 사리는 당시 조정의 높은 관리가 와서 계단을 예배하고 사리를 직접 보기 위하여 사리함을 열어 보았다고 전한다. 신라의 자장율사는 선덕왕12년(643)석가의 두골과 불아(佛牙), 불사리 백 매,석가가 입던 바라금점가사 등을 가져 왔으며, 인도를 순례했던 현장 스님은 여래의 육사리(肉舍利)백오십 매를, 의정 스님은 사리 삼백 매를,자장 스님은은 당나라에서 불사리 백 매를 가져 왔다고 기록은 전하고 있다. 분사리((分舍利)는 사람팔분과 같은 곳으로 석가 입멸 후에 나온 한정된 수량의 불사리를 늘리는 하나의 방법 이었다. 우리 나라에서는 분사리가 통일신라 말기부터 이루어졌다고 하나 고려 말에 와서 성행한 것으로 보는데 그 예로 경가도 여주 신륵사에서 입적한 나옹화상의 경우 입적하자 신륵사, 양주 회암사, 원주 영전사,밀양 영원사에 사리를 나누어 봉안 하였다고 하며,이러한 경향들은 조선 시대에 들어와 더욱 많아지는데 한적당(1603~1690)지경의 경우가 그 대표적인 예로 문경봉암사, 의성 대곡사, 봉화 각화사,달성 용연사, 거창 연수사, 제천 덕주사, 춘천 청평사에 봉안 되엇다. 사리에는 전신사리,쇄신사리(碎身舍利)가 있다. 사시(死屍)를 전신사리라 하고 다비 하여 남은 유골은 쇄신사리라 한다.
고 인도 에서는 토장(土葬)하는 유체(遺體)는 전신사리라 하고 화장하는 유체는 쇄신사리라 불렀다. 사리는 또한 신골사리(身滑舍利)와 법송사리(法頌舍利), 혹은 법신사리(法身舍利),,로 분류되기도 한다.신골사리는 화장 후 남은 유골을 말하며,법송사리는 불타가 설한 법,즉 법신의 으미를 갖게 된다.
우리가 흔히 쓰는 사리는 이 두가지를 모두 포함하는것이 보통 이지만 골사리(骨舍利),발사리(髮舍利),육사리(肉舍利)등 세 가지로 나누는 방법도 있어 일정하지 않다. 사리라고 하면 대체로 신사리와 법사리 두 종류를 뜻하는것이 일반적으로 통용되며 특히 불사리를 지칭할 때는 진신사리라 하는데,진신은 법신을 가리키기도 하므로 진신사리 역시 두 가지 의미를 내포하고 잇는 것을 알수 있다.
승탑은 불가에서는 숭배의 대상이 될 수는 있으나 신앙의 주심이 될 수는 없기 때문에 사찰의 경내를 벗으난 한적한 곳에 많이 건립 하며 대부분 되도록 한 장소에 모아서 밭을 형성 하는데 흔히 부도밭 부도군이라 하여 속세의 공동묘지와 같은 의미로 보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