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주연문장전산고(五洲衍文長箋散稿)의 석전총설(釋典總說)-10
【석각(石刻) 불경(佛經)】서장(西藏)의 석애산(石崖山)에 범서(梵書)로 된 대비주(大悲呪) 1편(篇)이 있는데, 청(淸) 나라 죽타(竹垞) 주이준(朱彝尊)의 석각불경기(石刻佛經記)에 "태원현(太原縣)의 서쪽 5리에 풍욕산(風峪山)이 있는데, 풍욕산 입구에는 풍혈(風穴 땅속에서 찬바람이 불어 나오는 구멍)이 있다. 서로 전하기를 '신(神)이 이르면 으스스한 느낌이 들면서 구멍에서 소리가 나는데, 이는 바람이 거기서 나오기 때문이다.' 한다. 어떤 사람이 흙으로 그 구멍을 막고 그 안에 석불(石佛)을 세우고 또 석주(石柱)에 불경을 새겨서 빙둘러 세웠는데 그 석주가 모두 1백 26개나 된다. 그 후에 오랜 세월이 흘러 뱀 같은 것들이 그 안에 서식하므로, 아무리 유람을 좋아하는 사람도 함부로 들어가지 못하였다. 병오년 3월에 내가 그 지방 사람을 대동, 횃불을 만들어 가지고 들어가 그 서법(書法)을 자세히 살펴보니, 근대의 서법으로 미칠 바가 아니었다. 그러나 애석하게도 석주마다 3면(面)이 가려져서 그 전부를 마음대로 구경할 수가 없었다.
당대(唐代) 이전에는 서책(書冊)을 옮겨 필사하는 것을 일삼았다. 심지어는 가죽이나 대, 또는 부들을 잘라 엮어서 필사하는 데 사용하였고, 불경도 산화(山花)나 패엽(貝葉)을 엮어 모아 책을 만들었으므로, 이 때문에 학자들이 평생토록 필사해 보았자 그 백분의 1도 다 써 모으지 못하였으니, 어려운 일이다. 석경(石經)은 채옹(蔡邕)에게서 비롯되었는데, 오랜 세월이 지나는 동안 이지러져 없어진 것이 많았다. 당 나라 때에 이르러서는 정담(鄭覃)ㆍ주지(周墀)가 다시 경조(京兆)에 새겼고, 후당(後唐) 장흥(長興 명종(明宗)의 연호, 930~933) 연간에는 다시 베껴 써서 이를 출간(出刊)하였다. 아주 어려운 방법을 버리고 아주 쉬운 방법을 선택한 이후부터 서적(書籍)이 날로 성하여졌으나 세상 학자들은 그 쉬운 점에 의한 경홀한 마음이 생겨 혹은 묶어만 놓고 보지 않으니 어찌 되겠는가. 이 어찌 날로 성해진다는 것이 도리어 날로 쇠해진 격이 아니겠는가.
북조(北朝) 시대 군신(君臣)들은 석씨(釋氏)를 숭봉하기 때문에 석각한 불경과 불상이 어느 곳에도 많이 있다. 태원(太原)에 사는 나의 친구 부산(傅山)이 평정현(平定縣)의 산중(山中)에 들어갔다가 잘못 벼랑길에 빠져들어, 어느 동굴 입구에서 석경(石經)이 죽 늘어서 있는 것을 보았는데, 이것이나 풍욕산에 있는 것 모두가 북제(北齊) 천보(天保 문선제(文宣帝)의 연호, 550~559) 연간의 글자였으며, 방산석경(房山石經)은 수(隋) 나라 때부터 새겨진 것인데, 그 서법이 매우 다양하다.
지금 불궁(佛宮)에 있는 승도들이 작은 데는 백 명, 많은 데는 무려 수천 명이나 되지만, 불법의 요지를 통달한 자는 모두가 언어와 문자를 쓸데없는 것이라 하여, 불경을 강설하는 자도 이따금 차치해 버리고 탐탁잖게 여긴다. 아, 불설(佛說)이 비록 성인(聖人)의 말에는 어긋나지만, 모두가 그 나라 선생 장자(先生長者)의 말이다. 기왕 그 법을 쓰면서 그 선생 장자의 말을 죄다 버린다면 과연 어찌 되겠는가? 구경(九經)의 글은 서안부(西安府)의 학궁(學宮)에 있는데, 유자(儒者)들이 비록 다 보지는 못하였지만, 그를 얻어본 자는 다 아낄 줄을 안다. 그런데 풍욕산(風峪山)에 소장되어 있는 불경의 경우는, 승도들이 그렇게 많아도 누구 하나 돌아보는 자도 없다. 이것으로 미루어 보면 불도의 쇠미해진 것이 우리 유도(儒道)의 쇠미해진 것보다 더 심하지 않는가. 부산(傅山)이 내 말을 듣고, 그렇다고 하기에 이렇게 써서 기(記)로 삼는 바이다." 하였다.
우리나라로 말하면, 정조(正祖) 20년(병진)에 《은중경(恩重經)》을 옥석(玉石)에 새기라 명하였고, 또 어필(御筆)을 화성(華城)의 용주사(龍珠寺)에 소장하였는데, 이는 대개 현륭원(顯隆園 장헌세자(莊獻世子)를 가리킨다)의 원찰(願刹)이기 때문이었다.
【전서(篆書) 불경(佛經)】 왕오(王鏊)의 《진택장어(震澤長語)》에 "송(宋) 나라 영은사(靈隱寺)의 중 막암도(莫菴道)가 전서 모으기를 좋아하여 《금강경(金剛經)》이 여러 체의 전서로 갖추어졌다. 이것이 꼭 다 갖추어진 것은 아니지만 변모되어 온 역대의 서법을 엿볼 수 있다." 하였다.
【패엽경(貝葉經)】 돈원거사(遯園居士 청(淸) 나라 장조(章詔)의 호)의 《제사기물기(諸寺奇物記)》에 "보광사(寶光寺)에 서역에서 가져온 패다파력차경(貝多婆力叉經)이 있는데, 패엽의 길이는 6~7촌(寸)쯤 되고 넓이는 그 절반이나 되고 잎사귀의 질은 마치 섬세한 어린 싹의 죽순(竹筍) 껍질과 같으며, 부드럽고 반지르르한 것은 마치 파초(芭蕉)와 같다. 불전(佛典)에 이르기를 '패다수(貝多樹)는 마가타국(摩伽陀國)에서 나는데, 크기는 6~7장(丈)이고 추운 겨울에도 잎이 시들지 않으며 그 잎은 글자를 쓸 수 있다. 패다파력차는 번역하면 엽수(葉樹)이다. 경(經)의 글자는 크기가 마치 붉은 팥알만하고 횡서(橫書)로 쓰인 글씨는 마치 꿈틀거리는 벌레 모양과 같은데, 무슨 경인지 알 수 없다. 겉에 두 개의 나무 조각으로 꼭 끼워 놓았는데, 그 나무는 삼나무[杉] 같아서 무늬가 조밀 섬세하여 사랑스럽다.' 했다." 하였다.
또 《제사기물기》에 "이 패엽경은 6~7 백 년 동안을 지탱할 수 있다." 했다.
우리나라 경기도(京畿道) 장단부(長湍府) 보봉산(寶鳳山)의 화장사(華藏寺)에 패엽경이 있는데, 고려(高麗)의 중 나옹선사(懶翁禪師)가 서역의 중 지공대사(指空大師)에게 가서 사사(師事)하고 돌아올 때 가져온 경이다. 이 경의 길이는 포척(布尺)으로 반 자쯤 되고 너비는 4촌(寸)쯤 되는데, 그 빛깔은 희고 무늬와 결은 마치 자작나무 껍질과 같으며 두께도 그와 같다. 한 잎에 6~7행(行)씩 범자(梵字)가 쓰여졌고 세자(細字)가 쓰여진 것까지 합하면 모두 천여 잎이나 되는데, 위아래 두 군데에 구멍을 뚫고 실로 꿰맸으며, 겉에는 양쪽으로 나무 조각을 대어 꼭 끼워 놓았다.
감주(弇州) 왕세정(王世貞)의 패다료게(貝多寮偈)에 상고해 보면 "패다는 천축(天竺)의 나무 이름이다. 그 정어(正語)로 다라(多羅)라 하는데, 이것이 곧 안수(岸樹)이다. 높이는 49척이고 녹음[蔭藹] 또한 그와 같으며, 잎의 너비와 길이는 마치 불설(佛舌)과 같고 빛이 윤택하여 물체가 비칠 정도여서, 금서(金書)ㆍ은서(銀書)ㆍ칠서(漆書) 등을 쓰기에 알맞다. 모든 아난총지(阿難總指)의 글이 모두 여기에 들어 있다." 하였다.
영취산(靈鷲山)이 유사천(流沙川)의 상류(上流)에 있는데, 이 산에 다라수(多羅樹)가 많이 난다.
《수능엄경요해(首楞嚴經要解)》에 "수국(隨國)에서 생산된 화피(樺皮)ㆍ패엽지(貝葉紙)ㆍ소백첩(素白氎)에 이 주문(呪文)을 썼다." 하였고, 《대방광원각수다라요의경략소주(大方廣圓覺修多羅了義經略疏注)》에 "불이(佛耳)가 마치 말린[捲] 화피와 같다." 하였으니, 화피는 천축에도 생산되었던 것이다. 우리나라 북관(北關) 막바지에 이 나무가 많이 있는데, 그 속껍질이 희고 깨끗해서 글씨를 쓸 만하다.
【불경(佛經)의 절운훈고(切韻訓詁)인 《용감수경(龍龕水鏡)》】 《몽계필담(夢溪筆談》에 "유주(幽州)의 중 행균(行均)이 불서(佛書) 중의 글자를 모아 절운훈고를 만드니, 모두 16만 자였다. 이를 4권으로 나누어 《용감수경》이라 호칭하였는데, 연(燕)의 중 지광(智光)이 여기에 서(序)를 썼다." 하였고, 조씨(晁氏 송(宋) 나라 조 공무(晁公武)를 가리킴)의 《군재독서지(郡齋讀書志)》에 "《용감수경》 3권은 거란(契丹)의 중 행균이 찬하였는데, 모두 2만 6천 4백 30자에 주석이 16만 3천 1백여 자이다." 하였다.
【범아(梵雅)】청(淸) 나라 왕사진(王士禛)의 《지북우담(池北偶談)》에 "안구(安丘)에 사는 예부(禮部) 마응룡(馬應龍)이 《범아》 12권을 찬하였는데, 제1은 석언(釋言), 제2는 석의(釋義), 제3은 석상(釋相), 제4는 석교(釋敎), 제5는 석불(釋佛), 제6은 석보살(釋菩薩), 제7은 석성문(釋聲聞), 제8은 석외도(釋外道), 제9는 석인륜(釋人倫), 제10은 석천문(釋天文), 제11은 석지리(釋地理), 제12는 석조수(釋鳥獸)이다." 하였다.
【팔만대장경(八萬大藏經)】 우리나라 해인사(海印寺)에 소장되어 있는 《팔만대장경》 또한 변증하지 않을 수 없다.
해인사는 경상도(慶尙道) 합천군(陜川郡) 가야산(伽倻山)에 있는 신라(新羅) 시대 고찰(古刹)이다. 경판(經板)은 해인사 보안당(普眼堂) 남쪽과 북쪽 두 각(閣)에 저장되어 있는데, 모두 15칸[間]에다 옆이 3칸으로 도합 90칸이다. 한가운데 3층으로 시렁을 설치하고는 경판을 가득 꽂아 놓았는데, 경판의 길이는 주척(周尺)으로 1척 반이고 너비는 주척으로 2척이며, 변격(邊格)만 있고 오사란(烏絲欄)은 없다. 12항(行)에 항마다 14자(字)인데 글자의 크기는 마치 바둑알만하고, 글씨는 매우 해정하나 별로 취할 만한 것은 없다. 경판은 모두 옻칠을 하였는데 별로 윤이 나지 않고, 네 귀퉁이에는 구리[銅]를 얇게 올려 장정(裝釘)하였다.
《고적지(古籍志)》에 상고해 보면 "신라 경장왕(景莊王) 때에 합천(陜川)의 이서(里胥 촌락의 하급관리)인 이거인(李居人)이 명부(冥府 저승)에 들어가 삼목인(三目人)을 만나 염왕(閻王)에게 발원(發願)하고 이승[陽界]에 돌아와 왕에게 고하여, 왕의 명으로 거제도(巨濟島)에서 팔만대장경(八萬大藏經)을 판각하여 해인사에 옮겨 저장했다."고 하였으나 그 설이 황당무계하여 믿기가 어렵다.
<석전총설(釋典總說)-11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