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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천국 문을 닫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은 모세의 자리에 앉아 율법을 가르치면서 자신들은 준행하지 않는 자였다. 예슈아께서는 이런 외식을 배우지 말라고 하셨다. 심지어 율법을 무거운 짐으로 만들고 자신들은 지키지 않았다. 그래서 이들은 천국문에 이르러도 들어가지도 않고 들어가지도 못하게 하는 자들이라고 책망하고 있다. 이들이 천국에 들어가지 못하는 이유는 율법을 지켜서가 아니라 외식 때문이다. 분명한 것은 예슈아께서 이들처럼 외식하지 말고 지켜 행하는 자가 되라고 말씀하신다는 것이다. (마23:2-13)
반면 우리는 반대로 알고 있다.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은 율법주의자들로 율법을 지나치게 열심히 지키는 자들이라고 생각하고 있다. 그러나 이들을 율법을 지키지 않는 외식하는 자들이라고 예슈아께서 증언하고 있다. 이들은 율법 준수자들이 아니었다. 율법을 한 손가락으로도 지키려 하지 않는 자들이었다. 그렇다면 율법을 지키는 자들을 율법주의라고 비난하며 바리새인과 같다고 규정하는 것 자체는 전혀 성경적이지 않고 오히려 반대라고 말할 수 있다.
2 무엇을 하여야 구원을 얻는가?
어떤 부자 청년이 예슈아께 물었다. "무엇을 하여야 영생을 얻습니까?" 이때 예슈아께서 계명을 말씀하셨다. 특히 이웃 사랑의 계명을 말씀하셨다. 물론 이 청년은 어려서부터 모두 지켰다고 말한다. 이때 놀랍게도 예슈아께서 모든 재물을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나눠주고 예슈아를 따르라고 조언하신다. 이 부자 청년은 큰 부자였기 때문에 이 말씀을 듣고 크게 근심하였다.(눅18:18-23)
놀랍지 아니한가? 예슈아께서 구원을 위해 계명을 말씀하신 것도 놀라운데(이웃 사랑 계명만), 모든 재물을 다 나눠주어야 영생을 얻는다는 말도 이해할 수 있는가? 우린 구원의 조건을 '믿기만 하면' 이라고 아주 쉽게 만들어 놓았는데 오히려 예슈아께서는 구원의 길을 너무 어렵게 만드신 것이 아닌가 생각할 수 있다. 과연 이 말은 무슨 뜻일까?
3 다 버리고 주를 따랐다.
이때 제자들이 '그럼 누가 구원을 얻을 수 있겠습니까!'라며 놀라워했다. 이때 베드로는 예슈아의 가르침을 알아들었다. 예슈아를 따르기 위해서는 자신이 가진 것을 버리지 않으면 불가능하다는 사실을 알았다. 사실 부자 청년에게 가르치고 싶은 것은 바로 하나님 사랑에 대한 계명이었다. 너무 많은 재물로 인해 예슈아의 제자가 되지 못한다면 그는 하나님보다 돈을 사랑하는 자이다. 모든 사람이 돈이 없어야 함을 말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보다 더 사랑하는 것이 있으면 안된다는 것을 말씀하신 것이다. 누군가는 집일 수도 있고 아내일 수도 있고 부모나 자녀일 수 있다. 하나님보다 더 사랑하는 것이 있는 자는 우상 숭배자들이다. 심지어 자신의 생명보다 하나님을 더 사랑하는 자는 현세에 여러 배로 보상을 받고 또한 영생이라는 구원에 이를 것이다. 이 가르침은 여호와께서 주신 계명의 원래 뜻을 풀어주신 것이다. 즉 마음을 다해 힘을 다해 목숨을 다해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는 것이 곧 구원의 길임을 말씀하셨다. 이처럼 예슈아의 제자들은 계명들을 전심으로 지키는 자들인 것이다.(눅18:26-30)
4 사람의 계명(전통)을 지키려고 율법을 버리는가? (사람을 섬기는 자)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이 예슈아께 그분의 제자들에 대해 항변한다. 왜냐하면 이들이 먹기 전에 손을 씻으라는 전통을 준행하지 않고 빵을 먹었기 때문이다. 이때 예슈아께서 오히려 이들을 책망하신다. 이들은 장로들의 전통을 준행하면서 사람의 계명(명령들)을 가르치는 헛된 예배자들이었다. 전통을 지키지 않아서 더러워지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계명을 지키지 않으므로 부정해지는 것이다. 사람의 전통과 명령을 가르친다면 이들은 사람을 섬기는 자들이다. 말로는 하나님을 공경한다고 하면서도 마음은 먼 자들이며, 사람의 전통을 지키려고 하나님의 계명을 멸시하는 자들이다. 이처럼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은 사람의 전통을 지키고 사람이 만든 명령들을 지키는 사람의 종들인 것이다. 이들은 사람의 종들로서 하나님의 명령들을 무시하고 경멸하는 자들이었다.(막7:2-9)
만약 우리 사이에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이 있다면 이들은 오히려 우리의 마음을 편하게 해주는 사람일 수 있다. 특히 윗사람을 깍뜻하게 모시고 권위에 순종하는 모습일 수 있다. 그러나 하나님의 종들은 진리를 사람들의 관계를 위해 타협하지 않는 사람들이다.
5 허탄한 사람아 행함이 없으면 귀신의 믿음이다. (믿음이 없다)
믿음으로 우리는 구원을 받는다. 이것은 변함없는 진리이다. 아브라함도 믿음으로 구원받았고 이는 모두가 동일하다. 그러나 야고보는 믿음이 우리를 구원하지 못한다고 말하고 있다. 그 이유는 죽은 믿음이기 때문이다. 믿음이 있노라 하면서 행하지 않는다면 사실은 믿지 않는다는 것이다. 이것이 죽은 믿음이다. 죽은 믿음이 어떻게 구원하겠는가! 이건 바리새인이 들었던 책망과 같다. 율법을 안다고 하면서 하나님을 공경한다고 하면서 행하지 않는자들, 외식하는 자들은 헛된 예배자들이고 천국문을 닫고 들어가지 않는 자들이라고... 이것을 통해 알 수 있는 것은 행함이 없는 죽은 믿음을 가진 자들이 바로 외식하는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이라는 것이다. 율법을 준행하는 자들이 아니라 말로만 믿는다고 말하는 자들이 바리새인의 믿음인 것이다. 이러한 죽은 믿음은 귀신들도 가지고 있다. 귀신들은 하나님을 믿고 두려워하지만 말씀에 순종하지 않는다. 이처럼 죽은 믿음을 가진 자들의 몸은 하나님의 성전이 아니라 귀신의 처소가 될 수 있으므로 경각심을 가져야 한다. 믿음으로 구원을 받은 아브라함도 행함으로 믿음이 온전하게 되었다고 말씀은 분명하게 증언하고 있다.(약2:14-22)
6 다윗의 믿음은 어떠한가?
다윗은 행위가 온전한 자는 율법을 따라 행하는 자들이라고 증언하고 있다. 그리고 그런 자에게 축복이 있다라고 선언하고 있다. 또한 다윗은 여호와의 법을 준행하고 전심으로 지킬 수 있도록 깨닫기 원했고 율법을 사랑하는 자였다. 그리고 율법과 계명들은 진리라고 고백하고 있다. (시119:1,34,142,151,163) 이를 통해 다윗은 율법을 전심으로 준행하는 믿음을 가진 자였음을 알 수 있다. 다윗의 장막을 회복하시고 예슈아께서 왕으로 오실 것이다. 그러므로 우린 행함이 없는 믿음을 회개하고 다윗의 살아있는 믿음을 갖어야 할 것이다.
7 하늘의 법도를 추구하라
다윗은 계속해서 여호와의 율례를 배우기 때문에 고난은 유익하다고 고백하고 있다. 우리가 하나님의 법도대로 행하지 않기 때문에 고난이 온다. 이는 웃사의 사건으로도 율례대로 행하는 것이 중요하다는 것을 다윗을 깨달았다. 또한 다윗은 구원과 율례를 행하는 것을 연결시켰다. 구원이 악인들에게서 멀어지는 이유는 그들이 여호와의 율례들을 구하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말하고 있다. 주의 법도를 추구하지 않는 자, 토라를 구하지 않는 자에게 구원이 멀어진다고 다윗을 증언하고 있다. 그리고 구원을 소망하면서 계명을 행하였고 구원을 사모하며 율법을 즐거워한다고 고백하고 있다. 이처럼 다윗은 구원을 위해 마땅히 하나님의 법도, 하늘의 법도, 성령의 법을 추구하는 것이 중요함을 증언하고 있다. 그러므로 행함이 구원을 위해 필요없다고 하는 사람들의 가르침은 바로 바리새인들의 가르침인 것이다. (시119:71,117,155,166,174) 이것은 바울도 동일하게 말하고 있다. 바울의 말이 오해가 많고 헷갈릴 수 있지만 분명하게 선언한 것이 있다. 믿음은 율법을 파기하는 것이 아니라 율법을 오히려 더욱 굳게 세운다는 것이다. 이것은 바로 다윗의 믿음이며 바울도 동일하게 가르치는 구원받을 수 있는 믿음이다. (롬3:31)
8 누가 성령을 거스르고 스데반을 죽였는가?
모든 선지자들을 박해하고 죽이고 결국 스데반을 죽인 자들은 누구인가? 이들은 항상 성령을 거스르는 자들이었다. 그때나 지금이나 변함이 없다. 이들은 예슈아의 제자들을 죽였고 성도들을 죽였으며 앞으로도 죽일 것이다. 바울은 이들이 마음과 귀에 할례를 받지 못한 사람이라고 말한다. 더 명확하게는 율법을 받고도 지키지 않는 외식하는 자들었다. 이것은 지금도 변함이 없다. 바로 하나님의 계명을 지키지 않고 사람의 전통을 지키는 자들이 항상 성령을 거스르며 결국 성도들을 죽이는 자리에 가는 것이다. 물론 지금은 몰라서 못지키지만 하나님께서 반드시 계시할 것이고 깨닫지 못한다면 다시 이러한 역사는 반복될 것이다.(행7:51-53)
9 예슈아가 귀신에 들렸다고 비난하다.
예슈아를 죽이려 한 자들은 모세가 준 율법을 지키는 자들이 아니었다. 즉 율법 준행자들이 아니었다. 이들은 예슈아를 죽이려했으며 심지어 예슈아께 귀신에 들렸다고 비난했다. 이것은 지금도 동일하다. 오히려 율법 준행자들을 바리새인이라고 생각하고 독사의 자식들이라고 여긴다면 성령을 따르는 자가 아니라 마귀를 따르는 자들이라고(귀신들린) 정죄하는 것이다. 이 말씀을 통해 예슈아를 죽인 자들도 율법을 지키지 않는 외식하는 전통주의자(사람의 종들)라는 것을 알 수 있다.(요7:19,20)
우리는 다시오실 예슈아를 기다리고 있다. 만약 불법을 회개하지 않는다면 초림때와 똑같이 다시 죽이는 자리에 서게 될 것이 분명하다.
10 개, 돼지에게 거룩한 것을 주지 마라
비판하지 말라고 바울은 경고하고 있다. 이 경고를 누구에게 하는 것일까? 바로 외식하는 자들에게 하는 것이다. 왜냐하면 이들은 외식함으로 눈이 어두워져 세상의 이치를 바로 깨닭을 수 없는 사람들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먼저 자신의 눈속에 있는 들보를 빼라고 하는 것이다. 그 들보는 외식하는 것, 바로 사람의 종이 된 것을 말한다. 우리 눈에 들보는 바로 전통이고 사람이 세운 교리이다. 이 전통적인 교리를 빼지 않으면 결코 진리를 보지 못할 것이다. 그래서 바울은 경고하고 있다. 거룩한 것을 개에게, 진주를 돼지에게 주지 말라. 즉 개와 돼지처럼 부정한 사람들이 있다. 누구겠는가? 바로 사람의 종들, 전통주의 자, 외식하는 위선자들을 말한다. 이들은 거룩한 것과 진주를 보지 못하고 깨닫지 못하는 자들이다. 그래서 계명의 놀라운 가치를 버리고 사람의 명령을 지키는 것이다. 이들에게 아무리 생명보다 귀한 계명과 토라를 준다해도 오히려 귀신들렸다고 말하며 죽이려 하지 않겠는가? 우린 하나님 앞에 개, 돼지로 사는 것이 아니라 그분의 형상을 회복해야 할 것이다. 그리고 하나님의 형상을 회복하기위해 하늘의 법도를 주신 것이다.(마7:1-6)
11 판단할 만한 지혜있는 자가 하나도 없느냐
바울은 고린도 교회에서 성도들을 책망하고 있다. 지극히 작은 일 하나도 판단하지 못하고 감당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우리의 본분은 천사를 정죄하고 판단할 자들이다. 하물며 세상 일을 판단하지 못하겠는가! 옳고 그름을 판단하는 것은 성도들의 본분이다. 마태복음의 '비판'과 고린도전서의 '판단'은 같은 단어이다. 이처럼 비판하는 것이 문제가 아니라 누가 비판하느냐가 문제이다. 밝히 보는 자가 세상 일을 분별하여 판단해 줄 때 억울한 자가 없을 것이며 공의로 세워질 것이다.(고전6:2-5)
12 율법대로 판단하는 것이 제사장의 일이다
모세는 서로 다투고 고소하여 판결하기 어려운 문제가 생길 때 제사장과 재판장에게 물으라고 말하고 있다. 그리고 이들은 율법이 말하는 대로 좌로나 우로나 치우치지 않고 그대로 판결할 것이다. 이들은 무법하게 자신의 뜻대로 판결하면 안된다. 하나님의 법대로 판결하는 자들임을 기억해야 한다. 하나님께서 주신 권위로 마음대로 판결한 것은 2000년동안 가톨릭 교회에서 행해온 불법이다. 이들은 교회의 권위로 샤밧을 일요일로 바꾸었고 여호와의 절기를 없애버렸다. 이들이 한 것 처럼 하나님께서 주신 권위로 무법하게 판단하라는 것이 아니다. 바로 이미 하나님께서 주신 법도대로 판결하라는 말씀이다. 만약 율법의 뜻대로 내려진 판결을 듣지 않고 무법하게 행한다면 그런 악한 자는 죽이라고 명하고 있다. 이를 통해 알 수 있는 것은 사람은 두가지 부류이다. 율법을 지키는 자들을 율법주의라고 부른다면 율법주의와 무법주의이다. 그러므로 전통주의자들은 무법주의라고 할 수 있으며 이들은 마땅히 죽을 악한 자임을 알아야 한다. 불법을 회개할 수 있을 때 경고를 받는 자가 복된 자일 것이다.(신17:8-13)
13 길흉화복을 묻지 말라
왜 하나님께서는 진언자, 신접자, 박수나 초혼자와 같은 길흉화복을 점치는 자들을 가증히 여기시고 쫒아내라고 말씀하시는 것일까? 이들이야 말로 제대로 판단하는 자들이 아닐까?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귀신에게 물을 것이 아니라 토라대로(율법) 판단하라고 말씀하고 있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것이고 하나님께서 왕으로서 우리를 통치하시는 방법이다. 그러나 길흉화복을 점쟁이에게 묻는 순간 우린 토라에서 말하는 순종의 복과 불순종의 저주를 불신하고 오히려 복을 위해 토라를 판단하거나 타협하게 될 것이다. 이것은 여호와께서 결코 용납하지 않으신다. 길흉화복을 물으려는 마음을 회개하고 오직 순종으로 나아가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다. 복을 따르는 순간 우린 우상숭배자의 자리에 있을 수 있다.(신18:9-14)
14 토라를 왜 주셨는가?
우리는 율법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는가? 율법이 속죄처럼 여겨지는가? 쇠창살처럼 여겨지는가? 아니면 무거운 짐처럼 여겨지는가? 오히려 이러한 속쇠나 쇠창살과 짐은 율법이 아니라 죄때문에 생기는 짐이다. 심지어 죄는 우리를 종으로 삼는다. 그러나 율법은 죄를 깨닫게 하고 회개하여 죄에서 벗어나게 한다. 즉 율법은 죄의 무거운 짐을 버리게 만든다. 그래서 우리가 자유하게 하고 죄의 감옥에서 나오게 한다. 그러므로 여호와께서 이렇게 말씀하고 계시다. 우리의 행복을 위해 명령과 규례를 주셨는데 지켜야하지 않겠냐고... 이 모든 명령들은 우리로 항상 복을 누리고 살게 하기 위해 주신거라고... 그래서 여호와의 명령을 지키는 것이 우리들의 의로움이 될 거라고 말씀하고 계시다. 우리는 죄인이라서 결코 율법을 준행할 수 없고 지킬 수 없다고 생각하는가? 그래서 예슈아께서 오셨고 우리의 죄성을(옛사람) 십자가에 못박으신 것이 아닌가! 우리가 사는 것이 아니라 우리 안에 예슈아께서 사심으로 이제는 지켜 행할 수 있는 것이 복음이 아닌가 말이다.(신10:13 6:24,25)
15 지혜로운 자에게 교훈을 더하라
지혜자는 이렇게 말하고 있다 거만한 자를 징계하면 도리어 능욕을 받고 흠을 잡힌다 그래서 거만한 자를 책망하지 말라고 오히려 미움을 받는다고 말한다. 그러나 지혜로운 자를 책망하면 사랑을 받고 그 사람은 더욱 지혜로와질 것이고 의로운 자를 가르치면 그는 더욱 학식이 많아질 것이다. 그러므로 우린 겸손하고 지혜로운 자의 귀에 말하여 그들이 더욱 지혜의 길을 깨닫고 지식이 많아지도록 도와야 할 것이다. 미련한 자의 귀에 말하는 자는 그 사람도 지혜가 없는 것이다. 들을 귀 있는 자가 복음을 들을 수 있기 때문이다 이 또한 하나님의 뜻이다. 우린 하나님의 뜻을 거스를 수 없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들을 자가 들을 것이다.(잠9:7-9 23:9)
16 바리새인들은 무법주의자들이다
다시 처음으로 돌아가보자. 지금까지 예슈아 시대의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을 보았을때 이들은 사람의 명령을 지키고 전통을 지키는 자들이었고 하나님의 계명을 폐하고 지키지 않는 자들이었다. 그러므로 이들은 법은 말하나 법을 지키지 않는 무법주의라 할 수 있다. 예슈아께서 다시 오셔서 하늘의 법도로 천년왕국을 다스리실 것이다. 그러나 무법주의는 예슈아의 오실 길을 막고 성령을 거스르는 정신이다. 그러므로 정신을 차리고 율법을 준행하는 다윗의 믿음으로 회복해야 할 것이다.
샤밧 예배: 토요일 10시 30분
대전시 동구 가양동 39-11 2층 레올람 토라 하우스
깃발 재작 문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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