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달라하라의 오스피시오 카바나스 를 방문했다. 멕시코의 2월 날씨는 건조하고 햇빛이 우리나라 가을 볓처럼 찬란하고 선명하고 눈부시다. 또한 강하다. 햇볕에 서 있으면 피부가 따가울 정도지만 그늘에 가 있으면 선선할 정도다. 땀은 잘 나지 않는다. 카바나스는 1791년 주안 루이스 카바나스 주교가 설립한 건물로 고아와 노인,장애인, 병자를 돌보기 위한 시설이었다. 이 건물이 유명한 것은 두 가지다. 하나는 이 곳이 당시 유럽 스타일의 단순하면서도 웅장한 신고전주의 건축물의 특징을 갖고 있다. 넓은 중앙 안뜰과 대칭적인 구조에 23개읜 안뜰과 106개의 방이 질서정연하게 들어 있다. 둘째는 이 건물 안에 그려져 있는 벽화다. 호세 클레멘테 오로스코의 벽화(프레스코화)가 있기 때문이다. 벽화와 이 분을 알기 위해서는 멕시코 혁명(1910~1920)을 알아야 한다. 혁명은 프랑스 침략을 물리치고 1867년 대통령이 된 베니토 후아레스(멕시코 공항 공식이름)부터 시작된다. 그를 이어 대통령이 된 디아스가 1876년 부터 1911년까지 장기 집권을 한다. 이 시기 주요 이권과 산업이 외국자본으로 넘어가고, 토지의 독점으로 민중의 삶이 피폐해졌다. 혁명의 요구는 정치적 자유와 토지분배였다. 마데로라는 인물이 기수가 되어 디아스를 순식간에 물리쳤다. 그러나 그는 지배계급 출신의 이상주의자였다. 디아스의 군부 잔재 세력인 우에르타에게 암살당했다. 이후 민중세력의 저항에 부딪치는데, 북부에서는 프란시스코 판초 비아, 남부에서는 에밀리아노 사파타, 중부에서는 우에르타, 동부에서는 오브레곤의 군웅할거가 시작된다. 이 영웅들은 차례로 암살당하거나 살해되면서 오브레곤이 정권을 장악했다. 그는 완전하진 않지만 혁명을 제도화하기 시작했다. 교육문제에 있어 바스콘셀로스를 교육부 장관으로 임명했다. 바스콘셀로스는 국민의 문맹퇴치운동을 시작하고 문화적 민족주의를 고취하기 위해 벽화운동을 전개했다. 이때 주요 역할을 한 사람들이 리베라, 시케이로스, 오로스코이다. 리베라는 민중주의 미학에 입각한 공식 역사(주류적 멕시코 학파의 역사 해석)를 그렸고, 시케이로스는 막스적 관점에서 해석한 민족사를 그렸고, 오로스코는 민족사와 당대 역사에 대한 비판적 재구성(수정주의의 역사 해석)을 시도했다고 한다.
하늘을 봐라. 구름 한점 없이 하늘이 가까워서 그런지 너무 너무 눈부시다.
멕시코 시티나 과달라하라 시내를 돌아다 보면 참 벽화가 많다. 내용도 다양하다. 우리의 민중벽화나 시위에 사용하는 걸게 그림의 원천이 멕시코가 아니였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벽화의 내용은 역시 스페인의 통치기간에 대한 것이다. 1521년 스페인의 에르난 코르테스 군대가 아즈텍제국에 들어왔고, 1621년 당시 아즈텍 제국의 수도인 테노치티틀란을 함락했다. 이후 1821년 이투르비데 군대가 멕시코 시티에 입성하여 독립을 이루기 까지 약 300년을 스페인이 통치했다. 그 사이 있었던 스페인 카톨릭과 군대의 학정을 묘사한 그림으로 우리로서는 공공시설에 이러한 그림이 그려져 있는 것이 놀라울 따름이다.
사실 과달라하라는 멕시코의 역사적 수도라 한다. 왜냐하면 1810년 09월 16일 미겔 이달고 신부가 '돌로레스의 외침'을 했던 곳이 과달라하라 쏘깔로(광장)였다. 멕시코 독립기념일은 9월 16일이다. 부랴부랴 오느라 멀리서 사진을 찍었지만 가까이 가서 보면 이 분 굉장히 화 난 상태이고, 사슬을 양 손으로 끊어내고 있는 모습을 하고 있다. 이 신부는 스페인계지만 멕시코에서 태어난 크리요로 스페인에서 태어난 성골이 아닌 관계로 신분차별(우리입장에서는 서얼출신)을 받았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