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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25. 묵상글 들 ( 연중 21주 화요일-나의 잔과 접시에는?. 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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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25.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님.
연중 21주 화요일-나의 잔과 접시에는?
오늘 주님께서는 두 종류의 불행에 대해 말씀하십니다.
하나는 가치 전도의 불행입니다.
"불행하여라. 너희가 율법에서 더 중요한 것들을 무시하기 때문이다."
다른 하나는 눈먼 자의 불행입니다.
"눈먼 바리사이야!
먼저 잔 속을 깨끗이 하여라. 그러면 겉도 깨끗해질 것이다."
제 생각에 우리 인생은 어리석음으로 인한 실수랄까 실패의 연속입니다.
그러나 다른 한편 이런 실패들을 통해 더 중요한 것이 무엇인지
차례로 깨달아가는 인생이기도 합니다.
가치가 전도되어서 젊었을 때는 건강보다 돈을 중요시하였는데
건강을 잃는 고통과 불행을 겪고 나서야 건강이 돈보다 중요함을 깨닫지요.
그런데 이런 깨달음을 얻고 나서도 또다시 잘못을 범하기도 하는데
몸뚱어리의 건강을 너무 신경 쓰다가 건강염려증 때문에
오히려 건강을 해치는 어리석은 짓을 또 범하기도 하지요.
그러니까 우리의 건강에는 육신의 건강, 마음의 건강, 정신의 건강,
영혼의 건강, 이렇게 여러 차원이 있는데 가장 저차원의 몸 건강만
신경 쓰느라 마음이나 정신의 건강을 놓치고말고,
제일 중요한 영혼의 건강마저 잃고 맙니다.
이렇게 우리는 신앙생활보다는 세속의 삶을 더 중요시하기도 하고,
신앙생활을 하면서도 오늘 바리사이와 율법 학자들처럼 더 중요한
의로움과 자비와 신의보다 십일조를 더 중요시하기도 합니다.
지난주 금요일 복음에서 그러니까 오늘 복음의 바로 앞장인 22장에서
율법에서 가장 중요한 계명이 무엇이냐고 율법 학자가 물었을 때 그들은
하느님 사랑이 제일 중요하고 이웃 사랑도 그 못지않게 중요하다는 말씀을
들었음에도 사랑보다 십일조를 더 중요시했던 것인데 십일조를 잘 바치는
것이 이웃 사랑보다 하느님께서 더 좋아하실 거라고 생각하였던 것이지요.
이제 또 다른 불행, 눈먼 이의 불행을 보겠습니다.
오늘 주님은 잔과 접시의 겉은 깨끗이 하지만 그 속이 더러운 그들에게
깔끔은 혼자 다 떨지만 속은 악취가 풀풀 나는 족속이라고 하시는 겁니다.
그런데 악취만 나는 것이면 다행인데 더 불행한 것은 눈까지 머는 겁니다.
그래서 그 먼눈 때문에 하느님을 볼 수 없는 불행에 떨어지는 거지요.
오늘 주님께서는 잔의 겉은 깨끗하지만 그 안이 탐욕과 방종으로 가득 차
있다고 하면서 눈먼 바리사이라고 하시는데 우리 안에 탐욕이 가득하면
돈이 눈을 멀게 하듯 탐욕이 우리 눈을 멀게 하여 하느님을 못 보게 하지요.
그래서 프란치스코는 진복팔단의 '마음이 깨끗함'에 대해 풀이하며
이렇게 얘기합니다.
"'행복하여라, 마음이 깨끗한 사람들! 그들은 하느님을 볼 것이다.'
진정 마음이 깨끗한 사람들은 지상의 것들을 멸시하고 천상의 것들을
찾으며, 살아 계시고 참되신 주 하느님을 깨끗한 마음과 정신으로
항상 흠숭하고 바라보는 일을 그치지 않는 사람들입니다."
주님께서는 앞에서 더 중요한 것을 무시한다고 바리사이를 나무라시는데
우리가 무시하고 멸시할 것은 지상의 하찮은 것들이고,
이 지상 것들을 무시하고 멸시함으로써 천상 것을 늘 바라봐야할 것입니다.
그래서 나의 잔과 접시에는 무엇이 들어있는지 돌아보는 오늘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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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25. 연중21주간 화요일. 반영억 라파엘 신부님.
마음은 신용장
매일 같이 이를 닦고 얼굴을 씻고 옷매무새를 고칩니다. 외출을 하려면 거울을 보고 다시 한 번 몸단장을 합니다. 이것이 우리의 일상입니다. 어떤 이는 ‘아름다운 얼굴이 추천장’이라고 합니다. 그래서 성형수술도 하고 외모를 가꾸려 많은 정성을 기울입니다. 그에 비하면 마음을 가꾸는 일에는 너무도 인색하지 않나 생각합니다. 마음이 깨끗하면 표정이 맑고, 얼굴이 빛납니다. 그‘아름다운 마음은 신용장’입니다. 그리고 “마음이 똑바로 향해 있으면 행동 또한 바릅니다. 그리고 마음과 행동이 일치할 때 구원의 은혜를 입을 것입니다"(성 아우구스띠노).
그럼에도 마음을 가꾸는 것에 정성을 기울인다는 것이 쉽지 않습니다. 바오로 사도는 “여러분은 현세에 동화되지 말고 정신을 새롭게 하여 여러분 자신이 변화되게 하십시오. 그리하여 무엇이 하느님의 뜻인지, 무엇이 선하고 무엇이 하느님 마음에 들며 무엇이 완전한 것인지 분별할 수 있게 하십시오”(로마12,2). 라고 권고합니다.
율법학자들이나 바리사이파 사람들은 정결 예식에 대한 법을 지키고 가르치는 데 신중을 기했습니다. 그럼에도‘위선자’소리를 듣는 것은 중요한 것은 외적인 의식(컵을 닦고 그릇을 닦는 것)이 아니라 속마음이라는 것을 간과했기 때문입니다. 겉을 깨끗이 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먼저 닦아야 할 속을 버려두고 겉만 닦는 데 문제가 있다는 것입니다. 잔이 아무리 좋은 잔이고 화려해도 속이 더러우면 쓸 수가 없습니다. 속이 깨끗하면 다른 것은 문제가 될 것이 없습니다. 그러니 형식적 의로움에 사로잡히지 말고 영적이고 참된 의로움을 추구할 줄 알아야 합니다.
“입으로 들어가는 것이 사람을 더럽히지 않는다. 더럽히는 것은 오히려 입에서 나오는 것이 사람을 더럽힌다”(마태15,11). “입에서 나오는 것은 마음에서 나오는 것인데 바로 그것이 사람을 더럽힌다. 마음에서 나쁜 생각들, 살인 간음, 불륜, 도둑질, 거짓증언, 중상이 나온다”(마태15,19-20). 그러므로 마음을 깨끗이 하고 하느님과 스스로에게 정직할 수만 있다면 외적 행동 또한 빛나게 될 것입니다. 우리의 마음을 가꾸는 데 인색하지 말아야 하겠습니다.
"신독"(愼獨)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홀로 있어도 부끄러움이 없다는 뜻입니다. 사실 우리는 홀로 있을 수가 없습니다. 언제나 하느님 앞에 있습니다. 하늘의 그물은 누구도 빠져나갈 수가 없습니다. 혹여 내가 누구를 속였어도 그것은 내가 빠져 나간 것처럼 여길 뿐입니다. 사람들 앞에 선 내 모습이 하느님 앞에 선 모습보다 우선일 때 위선자가 될 수 있습니다. 그러나 하느님 앞에 선 내 모습은 사람들의 평판에서 자유롭습니다. 나 자신을 하느님 앞에 세울 수 있기를 희망합니다.
성경은 말합니다.“마음이 즐거우면 얼굴이 밝아지고 마음이 괴로우면 기가 꺾인다”(잠언 15,13).“무엇보다도 네 마음을 지켜라. 거기에서 생명의 샘이 흘러나온다”(잠언 4,23). 그러니 기도합니다.“주님, 당신께 찬미 노래 부르오리다. 흠 없는 길에 뜻을 두리니 언제 저에게 오시렵니까? 저의 집 안에서 온전한 마음으로 걷고 불의한 일을 저의 눈앞에 두지 않으오리다.,,,그릇된 마음 제게서 멀리 떨어지고 악한 것을 제가 알지 않으리이다”(시편101,2. 4). 삶의 여정 안에서 ‘더 중요한 것’들이 무엇인지 생각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더 큰 사랑으로 사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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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25. 연중 제21주간 화요일. 송영진 모세 신부님
♣ 위선 ♣
‘위선(僞善)’에는 여러 가지가 있습니다.
1) 하느님의 뜻을 실행하는 일에는 관심이 없고, 사람들의 칭찬과 존경을
받는 것만 중요하게 생각해서 ‘사람들에게 드러내 보이는’ 일만
열심히 하는 위선이 있습니다(마태 6,1.5.16).
2) ‘말만 하고 실행하지는 않는’ 위선도 있습니다(마태 23,3).
사람들은 위선자들의 말에 현혹되어서
그들이 말하는 것처럼 실행도 잘하는 줄로 알 때가 많습니다.
3) ‘더 중요한 것’은 무시하고,
‘덜 중요한 것’만 열심히 하는 위선도 있습니다(마태 23,23).
눈에 보이는 일이지만 덜 중요한 일이고, 눈에 보이지는 않지만 더 중요한 일인
경우에, 사람들은 눈에 보이는 대로만 판단하면서
위선자들이 더 중요한 일은 무시한다는 것을 모를 때가 많습니다.
4) ‘큰일’은 억지로 하고, ‘작은 일’은 대충 하는 것도 위선입니다(루카 16,9-12).
5) ‘겉’은 깨끗하게 보이는데,
‘속’은 전혀 그렇지 않은 위선도 있습니다(마태 23,25-28).
사람들은 위선자들의 겉모습만 보고 속도 그런 줄로만 압니다.
위선은 하느님과 사람들을 속이려고 하는 ‘큰 죄’입니다.
(어떤 경우에는 자기 자신마저도 속이려고 할 때가 있습니다.)
그런데 사람들을 속일 수는 있지만 하느님을 속이지는 못합니다.
하느님은 ‘숨은 일도 보시는’ 분이기 때문입니다(마태 6,4.6.18).
위선은 하느님을 속이려고 하는 신성모독죄일 뿐만 아니라,
종교와 신앙의 질서를 무너뜨리고,
‘진실하고 성실한 신앙인들’에게 큰 상처를 주는 일이기 때문에,
예수님께서는 위선자들의 위선을 대단히 엄하게 꾸짖으셨습니다.
“불행하여라, 너희 위선자 율법학자들과 바리사이들아! 너희가 박하와 시라와
소회향은 십일조를 내면서, 의로움과 자비와 신의처럼 율법에서 더 중요한 것들은
무시하기 때문이다. 그러한 십일조도 무시해서는 안 되지만, 바로 이러한 것들을
실행해야만 했다. 눈먼 인도자들아! 너희는 작은 벌레들은 걸러 내면서
낙타는 그냥 삼키는 자들이다(마태 23,23-24).”
이 말씀은, 실제로는 ‘덜 중요한 일들’만 실행하고 ‘더 중요한 일들’은 안 하는
위선자들이 ‘더 중요한 일들’도 잘하고 있는 척 하면서
하느님과 사람들을 속이려고 하는 것을 꾸짖으시는 말씀입니다.
(십일조를 내는 일은 눈에 보이는 일이고, 의로움과 자비와 신의를 실행하는 일은
눈에 안 보일 때가 많은 일이기 때문에, 보이는 일만 잘하고 보이지 않는 일은
안 하면서도, 보이지 않는 일도 잘하고 있는 척 하면서
하느님과 사람들을 속이려고 하는 위선자들을 꾸짖으시는 말씀입니다.)
여기서 “십일조도 무시해서는 안 되지만”이라는 말씀 때문에,
“혹시 예수님께서 위선자들이 십일조를 잘 내는 것은 인정하신 것이 아닌가?”
라고 생각할 수도 있는데, 그것은 아닙니다.
이 말씀은, 십일조 자체를 긍정하신 말씀이지
율법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이 십일조를 내는 일을 인정하신 말씀은 아닙니다.
위선자들이 더 중요한 일들을 실행하지 않는 것은
하기 싫어서 안 하거나, 또는 생색이 나지 않아서 안 하는 것입니다.
따라서 그들이 덜 중요한 일들을 실행하는 것은
자기의 죄를 감추기 위한 위선일 뿐이고, 아무런 가치가 없는 일입니다.
<“그러면 ‘더 중요한 일들’을 잘한다면, ‘덜 중요한 일’은 안 해도 되는가?” 라고
물을 사람이 있을지도 모릅니다.
만일에 실제로 그렇게 하는 사람이 있다면, 그 사람도 위선자입니다.
더 중요한 것과 덜 중요한 것을 따지지 말고
전부 다 똑같이 잘 지키라는 것이 예수님의 가르침입니다(마태 5,19).
진실하고 성실한 신앙인은 더 중요한 일을 할 때에도,
또 덜 중요한 일을 할 때에도, 언제나 항상 변함없이 정성을 다 쏟아서 합니다.>
“불행하여라, 너희 위선자 율법학자들과 바리사이들아! 너희가 잔과 접시의 겉은
깨끗이 하지만, 그 안은 탐욕과 방종으로 가득 차 있기 때문이다.
눈먼 바리사이야! 먼저 잔 속을 깨끗이 하여라.
그러면 겉도 깨끗해질 것이다(마태 23,25-26).”
이 말씀에서, ‘잔과 접시’는 율법학자들과 바리사이들 자신들을 가리킵니다.
“겉은 깨끗이 하지만”이라는 말씀은, 겉으로만 거룩한 척 하는 것을 뜻합니다.
그 안은 탐욕과 방종으로 가득 차 있다는 말씀은,
위선자들의 실제 생활은(또는 마음속은)
겉으로 보이는 모습과는 완전히 다르다는(전혀 거룩하지 않다는) 뜻입니다.
여기서 ‘탐욕’이라는 말에는
탐욕 외에도 가난한 사람들을 억압하고 착취한다는 뜻도 들어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율법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이 가난한 사람들의 재물을
착취하고 약탈해서 방종하게(무절제하게) 살고 있다고 꾸짖으십니다.
(우리는 다른 사람이 진짜로 거룩한 사람인지,
겉으로 보기에만 그렇게 보이는 것인지, 잘 모릅니다.
위선자들 자신들도 자기가 거룩한 사람이라는 착각 속에 빠져 있을 것입니다.
이 말은, 그대로 우리 자신에게도 해당되는 말입니다.
“지금 나는 혹시 겉으로 보이는 모습과는 다른 사람인가? 같은 사람인가?
나는 겉과 속이 똑같은, 진실한 사람인가?
혹시 나는 나 자신에 대해서 착각에 빠져 있지는 않은가?”)
지금 예수님의 말씀은 율법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의 위선을 꾸짖으시는 말씀이지만,
사실 사도단 안에도 배반자 유다라는 위선자가 있었습니다.
“그가 이렇게 말한 것은, 가난한 이들에게 관심이 있어서가 아니라
도둑이었기 때문이다. 그는 돈주머니를 맡고 있으면서
거기에 든 돈을 가로채곤 하였다(요한 12,6).”
배반자 유다의 위선은, 또 그의 탐욕은, 그가 예수님을 실제로 배반하기 전부터
이미 예수님에게서 멀어져 있었음을 나타냅니다.
위선과 탐욕은 예수님의 뒤를 따르는 길에서 멀리 떨어져 있는 다른 길입니다.
“먼저 잔 속을 깨끗이 하여라. 그러면 겉도 깨끗해질 것이다.” 라는 말씀은,
겉으로만 거룩한 척 하지 말고,
속에서부터 진짜로 거룩한 사람이 되라는 훈계입니다.
<진짜로 거룩한 사람은, 그 거룩함을 드러내려고 하지 않아도 저절로 드러납니다.
“우리는 하느님께 피어오르는 그리스도의 향기입니다(2코린 2,15).”
“나는 거룩한 사람이다.” 라고 자기 입으로 말하는 사람은
거룩한 사람이 아닙니다.
진짜로 거룩한 사람은 자기가 거룩한 사람인 줄을 모르고,
더욱더 자기를 갈고 닦는 일에 전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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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25. 연중 제 21주 화요일 / 조욱현 토마스 신부님.
복음: 마태 23,23-26: 먼저 속을 깨끗이 닦아라.
유대인들에게 있어서 십일조를 바친다는 것은 대단히 중요한 법규였다. 신명 14,22에 “너희는 해마다 밭에서 나는 모든 소출의 십 분의 일을 떼어 놓아야 한다.”라고 하였으며, 레위 27,30에 “땅의 십 분의 일은, 땅의 곡식이든 나무의 열매든 모두 주님의 것이다. 주님에게 바쳐진 거룩한 것이다.” 하였다. 이것은 성전의 제사와 제관 일을 돌보는 레위지파를 위한 것이었다. 이러한 법규, 즉 수확물의 십 분의 일을 바치는 것은 보편적으로 다 알고 그대로 행해졌다.
그러나 박하와 회향, 근채는 대량으로 생산되는 것이 아니라 정원 같은 조그마한 터에 조금 양념 정도로 심을 뿐이었다. 이것들의 십분의 일이란 아주 소량이어서 율법을 철저히 지키는 사람들만이 실행하였다. 그런데 바리사이파 사람들은 그런 십일조까지도 드렸다는 것이다. 이들은 십일조에 대해서는 철저하면서도 다른 이들에게 불의를 범하고 거만하고 완고하고 잔인하였으며 자비를 바라는 이들에게는 귀를 막고 있었다.
그래서 예수님은 오늘 복음에서 그렇게 행하면서도 하느님을 제대로 모시고 있다고 자부하는 바리사이파 사람들을 향하여 “불행하여라, 너희 위선자 율법 학자들과 바리사이들아! 너희가 박하와 시라와 소회양은 십일조를 내면서, 의로움과 자비와 신의처럼 율법에서 더 중요한 것들은 무시하기 때문이다. 그러한 십일조도 무시해서는 안 되지만, 바로 이러한 것들을 실행해야만 했다. 눈먼 인도자들아! 너희는 작은 벌레들은 걸러 내면서 낙타는 그냥 삼키는 자들이다.”(23-24절) 하시면서 책망과 회개를 촉구하는 말씀을 하셨다.
율법에서 더 중요한 것이란, 정의를 실천하는 일과 하느님을 향한 사랑, 즉 자비이다. 하느님을 향한 정의와 자비와 믿음이 십일조나 맏물보다 나은 것이기 때문이다. “공정을 실천하고 자비를 구하고 사랑하며 네 주 하느님을 따를 준비가 되어있는 것 아니냐?”(미카 6,8참조). 하느님을 따를 준비가 되어있는 사람들에게서는 진심에서 우러나는 믿음이 보이는 법이다.
우리는 이웃에 대해서 정의롭게 살아가며 다른 이를 자비롭게 대하며 다른 이들에 대해서 신의를 지키고 있는가? 그렇지 못하다면 우리 역시 사람들 눈에 보이는 겉이야 번들 하지만 실상은 위선자, 현대판 율법학자이며 바리사이파 사람들이라는 책망을 예수께 듣는 것을 피할 수가 없을 것이다.
율법의 근본정신을 좀 더 깨달아 알고 하느님과 이웃에 대한 진정한 관계를 이루면서 살아가는 우리가 되어야 한다. 율법 조문이 우리를 얽매어서는 안 될 것이다. 모든 하느님 공동체의 법은 우리의 영적인 이익이 되도록 만들어진 것이지 구속하기 위한 것이 아님을 알고 살아가야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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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25. 한상우 신부님. 더 중요한 것들은 무시하기 때문이다.(마태 23, 23)
더 중요한 것은
모든 것을
뛰어넘어
하느님께서 주시는
하느님의
은총입니다.
우리 삶에
더 중요한
것은 언제나
서로를 살리는
복음의
가치입니다.
복음의 가치는
우리자신이
먼저 깨어있고
먼저 깨끗이
정화되는
기쁨입니다.
우리가 먼저
깨어있어야만
씻어야 할 곳이
어딘지를 알고
제대로 씻을 수
있습니다.
우리자신을
비춰주는
거울또한 깨끗이
닦아주어야
우리자신을
제대로 비추어
줄 수 있습니다.
빛과 소금이
되어야 할
종교의 모습도
이와같습니다.
정화된 종교는
삶의 방향을
일깨워줍니다.
종교인이
부패하면
가장 위험한
타락과 죽음의
늪으로 우리를
인도할 것입니다.
씻어야 할
우리의
모습입니다.
신앙인의
본래 모습은
자기성찰과
올바른 자기 삶의
실천입니다.
어떤 이유든
사회적 혼란을
조장하는
비뚤어진 종교인은
복음을 훼손하는
가장 무지막지한
죄를 범하고
있음을 뼈저리게
반성해야 합니다.
욕심과 자신의
이익에만 눈 먼
우리들에게
필요한 것은
함께 살아가는
복음의 가치를
다시금 회복하는
것입니다.
주님, 제 자신을
먼저 깨끗이
변화시켜 주소서.
깨끗한 마음으로
돌아가는 그 길이
서로를 살리는
복음임을 믿습니다.
(한상우 바오로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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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25. 연중 제21주간 화요일 / 박기석 사도 요한 신부님.
오늘의 묵상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율법 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을 노골적으로 ‘위선자’라고 부르십니다.
실제 삶에서는 의로움과 자비와 신의처럼 율법에서 더 중요한 것들은 무시하면서 매우 하찮은 것까지 십일조를 내는 것에 치중하기 때문입니다.
‘시라’는 1미터 정도 곧추 자라는 다년초로, 유다인들은 향기가 나는 그 씨를 양념으로 썼다고 합니다.
‘소회향’은 30센티미터 정도 자라는 한해살이 풀로, 그 씨를 역시 음식의 맛과 향을 돋우는 데 썼습니다.
박하는 매우 흔한 것이었고, 시라와 소회향은 들에서 그냥 자라기도 하지만 경작하기도 하였습니다.
이처럼 매우 하찮은 것까지 십일조를 내면서 더 중요한 실천 사항들은 간과하고 무시하니
율법 학자들과 바리사이들에 대한 예수님의 불행 선언은 마땅하고 옳은 일이었습니다.
그렇습니다. 율법 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은 겉보기에 하느님을 위하는 것 같지만 실제로는 자기 자신들을 위하여 살고 있었습니다. 율법의 가르침을 일상의 삶에서 실천하는 자선, 단식, 기도를 심지어 ‘숨은 일’로 하라 하셨던(마태 6,18 참조) 예수님의 눈에는, 그들의 신앙 행위가 그저 자신들의 공적을 드러내고 남에게 보여 주려는 비뚤어진 행위였을 뿐입니다.
이 복음 말씀을 통하여 우리는 지금 각자가 일상에서 행하는 신앙생활을 살펴보아야 합니다.
과연 나는 하느님의 뜻을 실천하는 신앙인으로 살아가는가, 아니면 내 욕심을 하느님의 뜻이라고 합리화하며 살아가는 위선자인가를 식별해야만 합니다.
오늘 독서에서 바오로 사도는 우리가 일상의 삶에서 하느님의 뜻에 집중할 수 있도록 중요한 기도를 제시합니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친히, 또 우리를 사랑하시고 당신의 은총으로 영원한 격려와 좋은 희망을 주신 하느님 우리 아버지께서, 여러분의 마음을 격려하시고 여러분의 힘을 북돋우시어 온갖 좋은 일과 좋은 말을 하게 해 주시기를 빕니다.”
- 박기석 사도 요한 신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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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25. 연중 제21주간 화요일/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
한국은 자동차의 번호판이 전국적으로 같습니다. 예전에는 지역을 표시하는 번호판이 있었습니다. 번호의 숫자와 지역이 같이 있었습니다. 정확한 이유는 모르겠지만 지역을 차별하는 요인도 있고, 다른 지역으로 주소를 옮기면 번호판을 바꿔야 하는 번거로움이 있어서 모든 지역의 번호판을 동일하게 만들었던 것 같습니다. 미국은 주마다 번호판의 색상, 디자인이 다릅니다. 제가 있는 뉴욕은 대부분의 차량이 노란바탕의 번호판입니다. 다른 주에서 오다가 차량의 번호판이 노란색이 많으면 뉴욕으로 왔음을 알 수 있습니다. 전부는 모르지만 주마다 번호판에 자신들의 상징을 표현하고 있었습니다. ‘제국의 주, 정원의 주, 미국의 영혼, 햇살이 비추는 주, 외로운 별, 자유롭게 살거나 죽거나, 헌법의 주’와 같이 주의 상징을 번호판에 표현하고 있습니다. 개성과 자유를 드러내는 면에서는 좋은 번호판 같습니다.
미국의 한인 성당에도 특징이 있습니다. 대부분은 지역이름이 앞에 옵니다. 퀸즈, 베이사이드, 부르클린, 펜실베이니아, 워싱턴과 같습니다. 그 다음에는 성당의 주보성인을 표시합니다. 한국의 성당은 주보성인이 마리아, 요셉, 베드로, 예수성심, 바오로와 같은 교회의 성인이 많습니다. 제가 전에 있던 본당은 성 요셉을 주보성인으로 모셨습니다. 말없이 성가정을 돌보셨던 요셉 성인, 노동자와 임종자의 수호성인인 요셉의 전구함으로 본당이 신앙 공동체로 성장하기를 바라는 마음을 담았다고 합니다. 그러나 미국의 한인 공동체는 대부분 한국의 성인을 주보성인으로 모시고 있습니다. 성 정하상 바오로, 성 김대건 안드레아 사제, 103위 순교성인과 같은 주보성인을 모십니다. 외국에서 신앙생활을 하지만 한국에 대한 그리움과 자부심을 이렇게 표현하는 것 같습니다. 우리가 발처럼 여기는 고마운 자동차가 있습니다. 신앙인들은 자동차에 성물을 놓고 다닙니다. 묵주, 고상, 성화를 걸거나 붙여 놓습니다. 성인들의 전구하심을 청하기도 하지만, 안전운전을 하겠다는 다짐이기도 합니다.
미국의 집은 대부분 마당이 있습니다. 마당에는 잔디와 나무 그리고 꽃이 있습니다. 신앙인의 집은 마당에 성상을 모셔놓곤 합니다. 프란치스코 성인, 성모님, 예수님을 보았습니다. 집을 나가고 들어올 때 성인들의 모습을 보면서 하루의 시작을 감사드리고, 하루의 마침을 고마워하는 것 같습니다. 한국에서도 교우들의 가정을 방문하면 성상을 볼 수 있었습니다. 세례 때 선물로 받기도 하고, 축일에 선물로 받기도 하고, 마음에 드는 성상을 마련하기도 합니다. 좋은 것을 보면 좋은 마음이 생기듯이, 성상과 성물을 보면 우리의 부족한 신앙에도 도움이 될 것입니다. 본당에 주보성인을 정하고 모시듯이, 가정에도 가족들이 상의를 해서 주보성인을 모시면 좋을 것 같습니다. 가족들이 기도할 때 주보성인의 전구하심을 청하면 주보성인이 함께 하실 것입니다. 상징과 표징도 필요합니다. 성물과 성상도 필요합니다. 주보성인의 전구하심을 청하는 것도 필요합니다. 그러나 가장 중요한 것은 주님께 대한 항구한 믿음이며, 믿음을 삶을 통해서 드러내는 것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십일조도 필요하다고 하셨습니다. 그러나 더 중요한 것은 의로움과 자비를 드러내는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신의를 지키는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성물과 성상이 집안에 있는 것도 필요합니다. 성물을 차안에 놓는 것도 필요합니다. 그러나 더 중요한 것은 가족들이 함께 모여 기도하는 것입니다. 준법운전을 넘어 양보운전을 하는 것입니다. 오늘 바오로 사도의 말씀을 함께 나누고 싶습니다. “굳건히 서서 우리의 말이나 편지로 배운 전통을 굳게 지키십시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친히, 또 우리를 사랑하시고 당신의 은총으로 영원한 격려와 좋은 희망을 주신 하느님 우리 아버지께서, 여러분의 마음을 격려하시고 여러분의 힘을 북돋우시어 온갖 좋은 일과 좋은 말을 하게 해 주시기를 빕니다.”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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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25. 연중 제21주간 화요일 /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하느님 중심의 정주의 삶 - 지혜와 겸손, 안정과 평화, 성장과 성숙 -
어렵고 힘든 시기일수록 하느님 중심의 정주의 삶이 정신 건강, 영혼 건강에 참으로 중요합니다.
삶의 중심인 하느님 안 제자리에 깊이 뿌리내리는 내적 여정의 삶에 항구할 때 제정신으로 제대로 살 수
있습니다. 삶의 중심이 없어, 삶의 중심을 잃어, 삶의 중심을 잡지 못해 뿌리 없이 방황하는, 표류하는 영혼들은 얼마나 많은지요. 얼마전 써놓은 ‘꽃자리’란 시가 생각납니다.
-“수주작처隨處作主 입처개진立處皆眞
“머무르는 곳마다 주인이 되라 지금 있는 그곳이 바로 진리의 세계이니라”
어디든 자리 잡으면 오늘 지금 여기가
주님을 만나는 꽃자리 좋은 자리이기에
다니고 싶은 곳이 가고 싶은 곳이 없네”-
그렇습니다. 오늘 지금 여기 내 삶의 중심인 제자리가 주님을 만나는 꽃자리입니다.
꽃자리 삶의 중심인 주님 안에 깊이 뿌리 내려갈 때 지혜와 겸손, 안정과 평화. 성장과 성숙입니다.
바로 이렇게 살고자 분도수도자들의 정주서원입니다.
밖으로는 산같은 정주의 산이지만 안으로는 하느님 안 제자리에 깊이 뿌리내리는 내적 여정의 삶입니다.
잘 들여다 보면 대부분의 불행은 무지의 소산입니다. 무지에서 오는 탐욕이요 교만이요 어리석음이요 위선이요 불행이요 분별력의 상실입니다. 하여 끊임없이 강조하는 회개의 삶입니다.
삶의 중심인 하느님안 제자리로 돌아감이 회개입니다. 참으로 삶의 중심인 주님 안에 뿌리내려갈 때 초연한
이탈의 자유에 분별력의 지혜요 온유와 겸손입니다. 이런 관점에서 보면 오늘 말씀의 이해가 확연해집니다.
“불행하여라, 너희 위선자 율법학자들과 바리사이들아!
너희가 박하와 시라와 소회향은 십일조를 내면서, 의로움과 자비와 신의처럼 율법에서 더 중요한 것들은
무시하기 때문이다. 그러한 십일조도 무시해서는 안되지만, 바로 이러한 것들을 실행해야만 한다.”
삶의 중심을 잃을 때 바로 이런 분별력의 상실입니다.
지엽적이고 부수적인 일에 충실하지만 본질적인 일에 무지한 눈먼 주객전도, 본말전도의 삶입니다.
삶의 우선순위을 잃은 것입니다. 우선 생각해야 할 본질적인 것이 분별의 잣대가 의로움, 자비, 신의이기
때문입니다. 참으로 하느님 중심에 뿌리내릴 때 분별력의 지혜요 삶의 기본에, 기초에 충실하게 됩니다.
“불행하여라, 너희 위선자 율법학자들과 바리사이들아!
너희가 잔과 접시의 겉은 깨끗이 하지만, 그 안은 탐욕과 방종으로 가득차 있기 때문이다. 눈먼 바리사이야! 먼저 잔 속을 깨끗이 하여라. 그러면 겉도 깨끗해질 것이다.”
필사하는 마음으로 복음 말씀을 그대로 옮겨 봅니다. 참으로 눈이 있어도 보지 못하는 탐욕의 무지에 눈먼 사람들입니다. 아무리 공부 많이 하고 학식 많아도 탐욕에 귀멀고 눈멀면 무지의 사람들입니다. 내면의 탐욕과 방종을, 온갖 잡다한 부정적인 것들을 끊임없이 깨끗이 비워낼 때 저절로 지혜와 겸손입니다. 안이 깨끗해지면 겉은
저절로 깨끗해져 빛나기 마련입니다. 영육의 건강이 뒤따르고 맑고 향기로워 화장을 하지 않아도 됩니다.
내면의 빛과 향기는 저절로 밖으로 발산하기 때문입니다.
오늘 제1독서에서 바오로 사도는 어떤 처지에서도 쉽사리 마음이 흔들리거나 불안해 하지 말고 속임수에도 넘어가자 마라 충고합니다. 굳건히 서서 배운 전통을 굳건히 지키라 합니다.
본연의 하느님 중심의 제자리에서 정주의 삶에 충실하라는 말씀입니다.
하느님께서는 복음을 통하여 우리를 부르셨으니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영광을 차지하게 하려는 것입니다.
삶의 중심인 하느님 안 제자리에 깊이 뿌리내리는 정주의 삶에 충실하십시오. 구체적 영적 훈련이 긴요합니다.
외적질서와 내적질서, 외적안정과 내적안정, 외적평화와 내적평화는 함께 갑니다.
영성생활의 성패는 좋은 습관에 달렸습니다.
내 삶의 처지에 맞는 기도와 공부, 일이 균형잡힌 하느님 중심의 일과표를 준수하는 습관입니다.
저절로 삶의 중심과 질서가 잡힐 것이며 오늘 지금 여기서 꽃자리의 삶을 살 것입니다.
주님은 매일의 이 거룩한 미사은총으로 우리 삶의 중심과 질서를 잡아 주시며, 지혜와 겸손, 안정과 평화, 성장과 성숙의 삶을 살게 하십니다. 우리 모두를 위한 바오로 사도의 주옥같은 기도로 강론을 마칩니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친히, 또 우리를 사랑하시고 당신의 은총으로 영원한 격려와 좋은 희망을 주신
하느님 우리 아버지께서, 여러분의 마음을 격려하시고 여러분의 힘을 북돋아 주시어 온갖 좋은 일과 좋은 말을
하게 해 주시기를 빕니다.”(2테살2,16-17).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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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25. 새벽을 열며. 연중 제21주간 화요일. 빠다킹 신부님.
요즘이야 반려견 관리에 더 철저해서 목줄을 반드시 채워 산책해야 합니다. 만약 목줄을 하지 않고 풀어 놨다가 사람이 다치기라도 하면 반려견의 주인이 책임을 져야 하지요. 그런데 제가 어렸을 때만 해도 거의 개를 풀어서 키웠습니다. 그래서 동네에 목줄 없이 돌아다니는 개들이 정말로 많았습니다.
한 번은 학교 갔다가 집으로 오는 길에 돌아다니는 개 한 마리를 마주하게 되었습니다. 당시 초등학교 1학년이었던 제게 앞에 있는 개는 너무 크게만 보였지요. 그래서 개를 향해 가까이 오지 말라면서 손을 흔들고 소리를 질렀습니다. 어떻게 되었을까요? 그 개에게 물리고 말았습니다.
마침 지나가시던 어떤 아저씨가 나서서 개를 쫓아내서 저를 구해주셨습니다. 그리고 울고 있는 제게 이렇게 말씀하셨지요.
“개 신경을 건드려서 물린 거야. 가만히 있었으면, 또 무시하고 지나갔으면 아무 일도 없었을 거다. 다행히 크게 물린 것 같지는 않은 것 같으니까 얼른 집에 가라. 괜찮아.”
유혹에 대해 묵상을 하다가 어렸을 때의 이 일이 생각났습니다. 유혹을 대하는 방법과 돌아다니는 개를 대하는 방법이 같지 않을까 싶습니다. 우리에게는 많은 유혹이 다가옵니다. 그런데 이 유혹이 무섭다고 또 두렵다고 유혹을 건드리고 있는 것이 아닐까요? 유혹은 건드리는 것이 아니라 그냥 지나가는 것입니다. 이를 위해 유혹에 관심을 두지 않는 것이 중요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율법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의 위선을 꾸짖습니다. 그 위선이 바로 불행선언의 주인공이 될 수밖에 없다는 것이지요. 그들은 유혹 그 자체만을 바라본 사람이었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에게 끝이 없는 힘든 의무를 부과했습니다. ‘이것도 하지 마라, 저것도 하지 마라.’고 하면서 죄인으로 살 수밖에 없게 만들었습니다.
가장 중요한 것은 ‘사랑’입니다. 하느님께서 율법을 주신 이유도 ‘사랑’ 때문이지요. 구원의 길로 들어설 수 있도록 지켜야 할 율법을 주신 것입니다. 그런데 사랑이 완전히 빠져 있다 보니, 제대로 사랑하지 못하게 하는 율법이 되고 말았습니다. 사랑이 전혀 없이 율법을 해석하면서 사람들이 진리를 바라볼 수 없도록, 그래서 하늘 나라의 문을 닫아 버리고 말았습니다.
자신의 기준으로 판단하고 단죄하는 교만함은 유혹만을 바라보게 합니다. 그러나 주님과 이웃에 기준을 두는 사랑의 말과 행동은 함께 살아가는 기쁨의 삶을 우리에게 줍니다. 어떤 삶을 살아야 할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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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기 존재에 대해 끊임없이 놀라는 것이 인생이다(라빈드라나트 타고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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겸손의 삶
라틴어에서 겸손을 뜻하는 단어 Humilitas는 흙, 먼지를 뜻하는 Humus에서 유래합니다. 따라서 겸손이란 말은 흙에서 난 인간 존재임을 기억하면서 사는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흙에서 와서 흙으로 돌아가는 존재임을 기억할 때, 교만과 허영심 등에서 벗어날 수가 있습니다.
그래서 성인들은 “겸손은 하느님과 자기 자신에 대한 인식에서 생겨난다.”라고 했습니다. 전지전능하신 하느님과 부족하고 나약한 나 자신을 확실히 깨닫게 된다면 언제 어디에서든 겸손의 삶을 살 수가 있습니다. 이를 깨닫지 못해서 하느님과 나의 위치가 뒤바뀌었을 때 우리 안에는 교만이 자리 잡게 됩니다.
따라서 자신이 불완전한 인간이며 죄인임을 인식하며 하느님의 자비에 희망을 두는 마음이 필요합니다. 이는 나 자신을 위해서도 필요합니다. 왜냐하면, 교만은 내게 몇 가지 불능을 가져다주기 때문입니다.
1) 청각불능. 남의 말을 듣지 못하고 자기 자신에 집착합니다.
2) 시각불능. 남의 결점과 잘못만 눈에 들어옵니다.
3) 언어불능. 언어폭력이 쉽게 이루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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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25. 오 상선 바오로 신부님. 연중 제21주간 화요일
오늘 미사의 말씀은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진정으로 바라시는 것이 무엇인지 알려 주십니다.
"불행하여라, 너희 위선자 율법 학자들과 바리사이들아!"(마태 23,23)
예수님께서 율법 학자들과 바리사이들에게 불행을 선언하십니다. 그들은 율법과 관습이 정하는 십일조 등의 규정을 철저히 지키는 것으로 정평이 나 있어, 겉으로 전혀 하자가 없을 뿐만 아니라 스스로에 대한 자부심이 가득했습니다. 하지만 그 자부심이 오만으로 흘러넘쳐 함부로 동족을 심판하기 일쑤였지요.
"십일조를 내면서 의로움과 자비와 신의처럼 율법에서 더 중요한 것들은 무시하기 때문이다."(마태 23,23)
예수님은 십일조 이상으로 지켜져야 하는 율법의 정신을 말씀하십니다. 정신과 실천은 신앙을 받치는 두 기둥과 같아서 어느 것 하나도 소홀히 해서는 안 되지요.
사실 인간 삶에서 사랑과 존경을 표현하는 방식은 다양합니다. 상대에게 필요한 무언가를 주는 것도 사랑의 표현이고, 상대를 닮고 따르고 일치하려는 것도 사랑입니다. 하느님과 우리의 관계에 있어서도 그렇지요.
십일조는 하느님에게서 받은 것의 일부를 떼어 감사의 마음으로 되돌려 드리는 제도입니다. 이는 사제나 레위인들처럼 하느님께 봉사하는 이들의 생활과 성전(교회)의 유지를 위한 재원으로 활용되었지요. 십일조가 단순히 의무 때우기나 요식행위로 그치지 않으려면 십일조를 골라내어 바칠 때의 마음가짐이 중요합니다. 하느님께 대한 진심 어린 감사와 사랑의 표현이어야 받으시는 그분께서도 흡족하시겠지요.
"의로움과 자비와 신의"
의로움과 자비와 신의는 하느님의 속성입니다. 이 모든 덕행의 완전한 상태가 바로 하느님이시지요. 우리는 부족하나마 이 덕들을 얻고자 노력하면서 하느님을 닮아갑니다. 사랑하는 이와 같아지려는 노력이 곧 사랑의 표현이니까요. 예수님께서는 하느님께 무엇을 드리는 행위 못지않게 그분을 닮아 일치하려는 지향도 경시해서는 안 되는 사랑이라고 강조하십니다.
"먼저 잔 속을 깨끗이 하여라. 그러면 겉도 깨끗해질 것이다."(마태 23,326)
예수님께서 보여지지 않는 사랑과 보이는 사랑이 하나이길 촉구하십니다. 품은 마음과 드러나는 실천이 유리되지 않기를 바라시는 겁니다. 하느님께도 이웃에게도 마찬가지지요. 사랑 없는 봉헌이나 희사는 오히려 상대에 대해 모욕이 될 수도 있습니다.
제1독서에서 사도 바오로는 그리스도의 적이 퍼뜨리는 교설에 흔들리지 말라고 테살로니카 신자들을 격려합니다.
"굳건히 서서 우리의 말이나 편지로 배운 전통을 굳게 지키십시오"(2테살 1,15)
사도들은 자신들이 체험한 예수님을 전합니다. 예수님에게서 받은 복음 이외에 다른 복음은 없지요. 예수님께서 곧 복음이십니다. 그리고 그 복음 내용이란 예수님께서 보여 주신 사랑의 하느님이십니다. 사도는 신앙의 길에서 형식이 지나치게 세분화되고 비대해져 이 본질이 가려질까 염려합니다.
사랑하는 벗님! 생명과 숨, 건강과 에너지, 재능과 재물, 기도와 축복... 우리는 주님께 받은 것을 주님께 도로 바치고, 또 이웃과도 나누면서 살아갑니다. 크건 작건, 많건 적건 우리의 봉헌이 사랑에서 우러날 때, 진정 하느님의 의로움과 자비와 신의의 표현인 것이지요 아울러 우리는 이 덕행들을 실천하면서 점점 더 주님을 닮아갑니다.
"행복하십니다, 사랑하는 분을 닮아가고 그분과 일치하려는 엄청난 사랑의 여정 안에 있는 여러분 모두!"
▶ 작은형제회 오 상선 바오로 신부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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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25. 이병우 루카 신부님. <연중 제21주간 화요일>
"불행하여라, 너희 위선자 율법 학자들과 바리사이들아!"(마태23,23)
예수님께서 이 세상에 오셨을 때 그 토양은 '유다교'라는 토양이었습니다.
유다교는 모세오경, 곧 창세기.탈출기.레위기.민수기.신명기와 십계명이라는 율법의 틀 안에서 움직여지는 종교였습니다.
그 유다교를 이끌고 있었던 그룹 중에 하나가 바로 율법 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의 그룹이었는데, 그들이 예수님으로부터 불행한 사람들, 위선자들이라는 소리를 들으면서 호된 질책을 받습니다.
십일조를 내는 헌금도 중요하지만, 의로움과 자비와 신의와 같은 더 중요한 율법의 본질을 그들이 무시했기 때문입니다.
그들의 겉과 속이 달랐기 때문입니다.
곧 말만하고 실행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오늘날의 그리스도교는 그런 유다교 전통 위에 세워진 종교로써, 완전한 계시이신 예수님께서 직접 세우신 종교입니다. 이는 전 세계에서 숫자적으로만 보면 가장 큰 종교입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이런 그리스도교 안에 계셔야 할 예수님이 잘 보이지 않는 것 같습니다. 입으로는 하느님과 예수님의 거룩한 이름을 끊임없이 부르고, "아멘", "할렐루야"를 소리 높여 외치고는 있지만, 구체적인 행동을 보면 하느님과 예수님의 모습이 잘 보이질 않습니다.
"나에게 '주님, 주님!' 한다고 모두 하늘 나라에 들어가는 것이 아니다.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을 실행하는 이라야 들어간다."(마태7,221)고 예수님께서 분명하게 말씀하셨는데도, 구체적인 삶의 자리에서는 하느님 아버지의 뜻을 실행하지 않습니다.
이 위선이 바로 오늘날 그리스도교가 간직하고 있는 가장 큰 문제점이라고 생각합니다.
모든 그리스도교인들이 지금의 이 위선적인 모습을 털어내고, 구체적인 삶의 자리에서 예수님을 드러낼 때, 지금의 이 세상이 보다 더 예수님께서 원하시는 세상의 모습으로 변할 수 있을 것입니다.
지금 여기가 예수님께서 선포하신 하느님의 나라가 될 수 있도록 먼저 나의 위선을 털어냅시다!
마산교구 이병우 루카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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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25.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연중 제21주간 화요일]
2테살로니카 2,1-3ㄱ.14-17
마태오 23,23-26
언제나 기뻐하십시오. 끊임없이 기도하십시오. 모든 일에 감사하십시오!
바오로 사도는 제2차 전도여행(50~52년경) 중에 테살로니카에 그리스도교 공동체를 설립했습니다.
그러나 유다인들의 계략으로 인해 바오로 사도는 그곳에서 추방되어 코린토로 향하게 됩니다.
테살로니카서는 바오로 사도가 코린토에 머물고 있던 중 집필한 서신으로 추정됩니다.
편지를 읽다보면, 테살로니카 교회가 지니고 있었던 고민과 문제점들, 신앙생활을 잘 엿볼 수 있습니다.
동시에 초세기 그리스도인들의 목자이자 아버지로써 바오로 사도의 따뜻한 마음과 애정 또한 잘 확인할 수 있습니다.
결국 테살로니카서는 자식들에 대한 사랑과 연민으로 가득한 아버지, 바오로 사도의 편지라고 볼 수 있겠습니다.
그리스 북부 항구 도시 테살로니카는 꽤나 오랜 역사와 함께 번영과 명성을 지닌 도시입니다.
테살로니카는 기원전 315년 마케도니아의 왕 카산드로스가 건설했는데, 도시 건설을 마무리한 그는 부인의 이름을 따서 테살로니카라고 명명하였습니다.
테살로니카는 아직도 현존하는 도시로, 아테네 다음으로 큰 그리스 제2의 도시입니다. 30만여명의 인구에, 정치, 경제, 문화, 교통 등 다양한 측면에서의 중심지 역할을 하고 있습니다.
바오로 사도의 권고 말씀 한 마디 한 마디는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들에게 너무나 절실히 필요한 말씀이기도 합니다. 몸과 마음으로, 눈과 귀로, 잘 경청할 필요가 있는 말씀입니다.
간교한 유다인들에 의해 테살로니카로부터 추방되었던 바오로 사도의 마음은 온통 근심 투성이였습니다.
갓난 아기 같은 그곳 신자들을 향한 염려와 걱정이 참으로 컸습니다.
그런데 자신을 대신해 사목방문을 다녀온 티모테오가 현지 상황을 생생하게 전해줬는데,
바오로 사도의 걱정과는 달리 테살로니카 교회 신자들이 영적으로 건강하게 잘 지내고 있다는 소식을 듣습니다.
이렇게 기쁨으로 충만해진 바오로 사도가 하느님께, 그리고 테살로니카 신자들에게 감사하며 쓴 편지가 테살로니카서인 것입니다.
바오로 사도는 복음 말씀을 기쁘게 받아들인 테살로니카 교회 신자들의 신앙을 칭찬합니다.
또한 새로 탄생한 테살로니카 교회 공동체가 환난과 고통 가운데서도 굳건히 서 있다는 소식을 전해듣고, 크게 감격하면서 감사의 인사를 전합니다.
앞으로도 주님 안에서 믿음의 부족함을 채워나가면서, 서로 베풀고, 서로 격려하며, 서로 성장시키고, 서로 사랑하면서 살아갈 것을 당부합니다.
더불어 바오로 사도는 어떻게 사는 것이 하느님을 기쁘게 해드리는 것인지를 늘 생각하라고 촉구합니다.
주 예수님 안에서 하느님 뜻에 맞게 생활할 것을 요청합니다.
조만간 반드시 주님께서 오실 것이며, 영원히 함께 하실 것이니 슬퍼하거나 외로워하지 말고, 서로 위로하며 살라하십니다.
믿음과 사랑의 갑옷을 입고, 구원에 대한 희망을 투구로 쓰고, 늘 깨어 기도하라고 신신당부하십니다.
이어서 그 감동적이고 유명한 권고 말씀을 건네십니다.
“언제나 기뻐하십시오. 끊임없이 기도하십시오. 모든 일에 감사하십시오.
이것이 그리스도 예수님 안에서 살아가는 여러분에게 바라시는 하느님의 뜻입니다.”
이렇게 바오로 사도는 따뜻한 마음이 담긴 필치로 세상의 박해와 시련 앞에 직면한 초보 그리스도 신자들을 안심시키고 격려합니다.
이 세상 살아가는 동안 고통과 시련이 끊임없겠지만, 주님께서 친히 인도하실 것이며, 자상하게 보살펴주실 것이니 흔들리지 말라고 용기를 불어넣습니다.
세상의 박해가 크면 클수록 더 열렬히 기도하고 희망하며 살아갈 것을 당부합니다.
안팎으로 다양한 난관에 직면한 오늘 우리들입니다.
사방이 가로막혀 있어 그저 주저앉아 울고만 싶은 오늘 우리들입니다.
포기하고 싶고 다 때려치고 싶은 오늘 우리들입니다.
이런 우리에게 테살로니카서를 통한 바오로 사도의 말씀 한 마디 한 마디는 마치 한 모금 시원한 샘물처럼,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던 뜻밖의 선물처럼 다가옵니다.
힘들면 힘들수록, 때로 생명수 같고, 때로 주옥같은 바오로 사도의 서간을 좀 더 자주 펼쳐봐야겠습니다.
“누가 예언이나 설교로 또 우리가 보냈다는 편지를 가지고 주님의 날이 이미 왔다고 말하더라도, 쉽사리 마음이 흔들리거나 불안해하지 마십시오.
누가 무슨 수를 쓰든 여러분은 속아 넘어가지 마십시오.”
(2 테살로니카 2장 2~3절)
(살레시오회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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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25. 전삼용 요셉 신부님. [연중 제21주간 화요일]
2테살로니카 2,1-3ㄱ.14-17
마태오 23,23-26
십일조의 의미와 목적
아주 가끔은 어떤 분들이 자신은 십일조를 내는데 집이 더 어려워졌다고 합니다.
이것은 아마도 십일조의 목적을 더 많이 받는 것으로 삼았기 때문일 것입니다.
십일조를 내면 대부분 주님께서 충분히 보상해주십니다.
그러나 십일조의 진정한 목적은 재물을 더 많이 받는 것에 있지 않습니다.
십일조의 목적은 사랑을 회복하는 데 있습니다.
어떤 자매님이 성지순례를 이혼하려는 목적으로 떠났습니다.
그녀는 엄청난 술주정뱅이에다가 도박, 폭력을 일삼는 남편과 살았습니다.
임신했을 때 남편이 자신의 아기가 아니라며 발로 차서 아기가 검게 죽어서 나왔습니다.
또 도박하려고 돈을 찾다가 돈이 없다는 아내를 유리창으로 밀어서 피바다가 된 적도 있었습니다.
더는 살 수 없다는 마음으로 있는 돈을 다 털어 메주고리예로 성지순례를 떠났습니다.
이혼을 결심하러 간 것입니다.
그런데 십자가 산을 맨발로 올라가던 중 갑자기 자신이 남편에게 더 잘못했다는 마음이
올라오기 시작했습니다.
불평만 했지 진심으로 따듯한 밥 한 끼 차려준 적이 없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돌아가면 남편에게 잘못했다고 말하고 따듯한 밥 한 끼 차려줘야겠다는 결심을 했습니다.
그렇게 공항에 도착했을 때 남편이 나와 있었습니다.
자신이 잘못했다고 말하며 술과 도박을 다 끊고 함께 성당에도 열심히 다니겠다고 말하는 것이었습니다.
성지순례의 목적은 사랑의 회복입니다.
우리가 결정하는 것이 아니라 이미 결정되어 있습니다.
십일조의 목적도 마찬가지입니다.
이 목적을 잃으면 성지순례나 십일조의 의미도 퇴색됩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십일조는 잘 바치지만, 더 중요한 ‘의로움과 자비와 신의’에 대해서는 신경 쓰지 않는 바리사이들과 율법학자들을 나무라십니다.
그들이 십일조의 목적과 정신은 잊고 그것을 내는 데에만 치중하고 있었기때문입니다.
이것을 율법주의라고 합니다.
율법주의는 율법의 목적을 잊고 율법 안에 갇혀버리는 것입니다.
기차만 타면 된다고 생각하고 목적지는 보지 않는 어리석은 행동입니다.
의미와 목적을 모르고 십일조를 하면 안 됩니다.
예수님은 그렇다고 십일조를 부정하지도 않으십니다.
분명 “십일조도 무시해서는 안 되지만”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오늘 예수님의 말씀은 십일조의 의미와 목적을 명확히 알라는 취지의 말씀입니다.
십일조의 목적은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는 “의로움과 자비와 신의”를 얻는 것입니다.
십일조를 하되 의로움과 자비와 신의를 무시해서는 안 된다고 하십니다.
우리 번역에는 “의로움과 자비와 신의”를 “실행해야만 했다”라고 나와 있는데, 사실 의로움과 자비와 신의는 실행하는 것이 아닙니다.
십일조로 주님께 받는 대가입니다. 그래서 십일조를 내면서 그 대가로 오는 의로움과 자비와 신의를 무시하거나 버리지 말라는 뜻입니다.
‘의로움’은 무엇을 의미할까요?
에덴동산에서 아담과 하와가 선악과를 따먹고 의로워지기 위해 무엇을 해야 했을까요?
바로 가죽옷을 입어야 했습니다.
가죽옷이 곧 의로움입니다.
그리스도의 살과 피가 곧 의로움인 것입니다.
우리는 그리스도 덕분으로 의로워지는 것이지 우리 행위로 의로워질 수 없습니다.
‘자비’는 무엇일까요? 우리에게 자비나 사랑이 들어있을까요?
자비와 사랑은 주님으로부터 받는 것입니다. 성령으로 사랑이 우리 안에 부어지는 것입니다.
자비는 곧 그리스도의 살과 피입니다.
우리가 탕감받는 일만 탈렌트인 것입니다.
‘신의’는 무엇일까요? 신의는 바로 ‘믿음’(pistis)입니다. 믿음은 성령의 열매입니다.
우리는 그리스도의 십자가로 믿음을 얻게 되었습니다.
이 믿음만이 우리를 구원에 이르게 합니다.
지금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는 ‘의로움과 자비와 신의’는 당신 살과 피를 말씀하고 계신 것입니다.
바리사이와 율법학자들은 십일조를 바치지만 그리스도는 받아들이지 않습니다.
그러나 십일조를 바치는 이유가 바로 그리스도를 먹고 마시기 위함입니다.
그리스도께서 에덴동산에서 선악과를 바치는 조건으로 먹을 수 있었던 나무가
‘생명 나무’입니다.
생명 나무는 그리스도의 살과 피입니다.
그리스도의 살과 피는 의로움과 자비와 신의입니다.
이런 것들은 버리며 십일조는 내서 무엇하냐는 것입니다.
개신교는 십일조는 내면서 생명 나무는 먹지 못하고 있습니다.
방법은 있는데 목적을 잊은 것입니다.
아브라함은 멜키체덱에게 십일조를 봉헌하였습니다.
멜키체덱은 주님께 빵과 포도주를 봉헌하며 아브라함을 축복하였습니다.
이것이 신약의 파스카, 곧 그리스도의 살과 피를 먹고 마시는 미사가 된 것입니다.
가톨릭은 목적은 있는데 과정을 잊어가고 있습니다.
십일조는 내지 못하며 생명 나무는 먹고 있습니다.
그러나 생명 나무는 선악과를 봉헌한 대가입니다.
개신교는 더욱더 생명 나무의 의미를 깨달으려 노력해야 할 것이고, 가톨릭은 선악과의 의미를 깨달으려 노력해야 할 것입니다.
생명 나무의 의미를 모르고 십일조를 내는 개신교는 어쩌면 당첨된 복권을 돈으로 바꿀 줄 모르는 사람과 같습니다.
십일조는 내고 성체 성혈은 포기했기 때문입니다.
반면 가톨릭은 당첨될 수밖에 없는 복권을 사지 않고 어차피 당첨될 것이니 돈을 달라고만 하는 것과 같습니다.
하지만 선악과를 먹으면 생명 나무가 효력이 없습니다.
물론 어느 정도 교무금과 봉헌, 자선 등을 하고 있기에 당연히 가톨릭이 더 낫기는 합니다.
하지만 십일조와 빵과 포도주, 그리고 성체 성혈로 이어지는 의미가 다시 회복되어야 할 필요가 있습니다.
(수원교구 전삼용 요셉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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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25. 이영근 신부님. “먼저 잔 속을 깨끗이 하여라. 그러면 겉도 깨끗해질 것이다.”
오늘 <복음>은 어제 복음에 이어, <네 번째>와 <다섯 번째>의 불행선언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여전히 당시의 종교지도자들을 신랄하게 질타하십니다. 사실, 여러 가지 부패 중에서도 종교적 부패는 항상 가장 신랄한 지탄의 대상이 됩니다. 특히 종교지도자들에 대한 부패는 더욱 그렇습니다. 그리고 종교지도자들의 윤리적 부패 못지않게 탐욕에 의한 부패는 더욱더 그렇습니다. 이러한 종교적 부패와 분열은 <요한 묵시록>에서는 세상 종말의 징표로 제시되고 있기도 합니다.
오늘 <복음>은 종교지도자들의 탐욕에 대한 경고가 우선적입니다.
<네 번째> 불행선언은 그들의 십일조에 대한 형식적이고 맹목적인 태도에 대한 경고입니다.
그들은 율법에 대해서는 규정 이상으로 열성적이었으며, 철저했고, 엄격했습니다. 그러나 율법의 정신인 ‘의로움과 자비와 신의를 행하는 일은 실천하지 안했던 것입니다.’(마태 23,23). 그들의 마음을 탐욕으로 채웠기 때문입니다.
<다섯 번째> 불행선언은 속은 감추고 은폐하면서 겉은 기만과 허위로 깨끗이 닦는 정결법에 대한 경고입니다.
곧 “잔과 접시의 겉은 깨끗하게 하지만, 그 안은 탐욕과 방종으로 가득 차”(마태 23,25) 있음을 경고하십니다.
이는 단지 속을 씻는 일이 겉을 씻는 일보다 낫다는 차원을 넘어서, 애초에 그릇 안에 담고 있는 음식을 정당하게 취득하였는지를 문제 삼는 것입니다. 곧 불의와 착취, 부정과 탐욕, 이기와 방종에 대한 경고입니다.
앞의 첫 번째에서부터 네 번째 불행 선언에서 ‘무엇이 더 중요하냐?’ 하시며, 본질적이고 우선적인 것을 깨우쳐주신 예수님께서는 <다섯째 불행선언>에서도 마찬가지로 ‘무엇을 먼저 해야 하는지?’를 깨우치십니다.
“먼저 잔 속을 깨끗이 하여라. 그러면 겉도 깨끗해질 것이다.”(마태 23,26)
동시에, <루카복음>의 병행구절에서는 깨끗해지는 방법, 곧 더러움을 비워내는 방법도 가르쳐주십니다.
“그릇 속에 담긴 것을 가난한 사람들에게 주어라.
그러면 모든 것이 다 깨끗해질 것이다.”(루카 11,41)
결국, 탐욕과 방종으로 가득 채운 그릇을 비우는 방법은 다름 아닌 이웃사랑이라는 말씀입니다. 이는 정결법의 정신이 자신을 지키는 데 있기보다, 사랑하는 데 있다는 사실을 말해줍니다.
그렇습니다. 잔 속을 깨끗하게 하는 일, 그것은 그릇 속에 담긴 것을 가난한 사람들에게 주는 일입니다. 그러면 모든 것이 다 깨끗해질 것입니다(루카 11,41).
하오니, 주님! 오늘 제 마음 속, 탐욕과 방종을 비우소서!
제 잔과 접시를 의로움과 자비와 신의로 채우소서! 사랑을 채우소서!
제 잔은 당신의 피요, 제 접시는 당신의 몸이기 때문입니다.
제가 당신의 것인 까닭입니다. 아멘.
-오늘말씀에서 샘 솟은 기도 -
“먼저 잔 속을 깨끗이 하여라. 그러면 겉도 깨끗해질 것이다.”(마태 23,26)
주님!
깨끗한 것을 깨끗한 채 드러나고 , 더러운 것을 더러운 채 드러내게 하소서!
겉모양을 깨끗이 닦고 치장하면서, 속을 탐욕과 이기로 채우지 말게 하소서!
제 마음 속, 탐욕과 방종을 비우소서!
제 잔과 접시를 의로움과 자비와 신의로 채우소서!
제 잔은 당신의 피요, 제 접시는 당신의 몸입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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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25. 연중 제 21 주간 화요일-묵상과 기도: 이재을 사도요한 신부님.
말씀의 주제는 '복음으로 그리스도의 영광 차지와 의로움과 자비와 신의를 실행'입니다. 바오로 사도는 하느님께서 복음 말씀을 통해서 부르셨고, 그분께서 예수 그리스도의 영광을 차지하게 하신다. 마태오 복음에서는 십일조와 함께 의로움과 자비와 신의를 실행하고 탐욕과 방종을 멀리하라. 고 하였습니다. 그리스도인은 복음의 참된 지식을 통해서 의로움과 자비와 신의를 실천합니다.
주님의 기도
지난시간 돌아봄
지난 시간 걸어온 시간과 길을 회상합니다. 주님 앞에서 나 자신을 깊이 바라봅니다. 3분 동안.
-. 현장을 되돌아 봅니다. 나와 만난 이들과의 대화, 일, 사건을 구체적으로 바라봅니다.
-. 사랑과 진리 생활, 허물과 그릇됨.. 복음적 생활도 묵상합니다. 회개함과 나의 개선을 묵상합니다.
-. 지난 결과를 감사의 마음으로 기도합니다.
말씀 묵상
누가 예언이나 설교로 또 우리가 보냈다는 편지를 가지고 주님의 날이 이미 왔다고 말하더라도, 쉽사리 마음이 흔들리거나 불안해하지 마십시오. 누가 무슨 수를 쓰든 여러분은 속아 넘어가지 마십시오.
하느님께서는 우리의 복음을 통하여 여러분을 부르셨습니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영광을 차지하게 하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제 형제 여러분, 굳건히 서서 우리의 말이나 편지로 배운 전통을 굳게 지키십시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친히, 또 우리를 사랑하시고 당신의 은총으로 영원한 격려와 좋은 희망을 주신 하느님 우리 아버지께서, 여러분의 마음을 격려하시고, 여러분의 힘을 북돋우시어 온갖 좋은 일과 좋은 말을 하게 해 주시기를 비니다. 1테살 2,2-3. 14-17
"불행하여라. 너희 위선자 율법학자들과 바리사이들아! 너희가 박하와 시라와 소회향은 십일조를 내면서, 의로움과 자비와 신의처럼 율법에서 더 중요한 것들은 무시하기 때문이다. 그러한 십일조도 무시해서는 안 되지만, 바로 이러한 것들은 실행해야만 했다. 눈먼 인도자들아! 너희는 작은 벌레들은 걸러 내면서 낙타는 그냥 삼키는 자들이다.
불행하여라, 위선자 율법 학자들과 바리사이들아! 너희가 잔과 접시의 겉은 깨끗이 하지만, 그 안은 탐욕과 방종으로 가득 차 있기 때문이다. 눈먼 바리사이야! 먼저 잔 속을 깨끗이 하여라. 그러면 겉도 깨끗해질 것이다."
마태 23,23-26
-. 성경 말씀을 1독, 2독을 합니다. 1독은 소리내어, 2독은 마음으로 읽습니다.
-. 3분 동안. 마음 깊이 와 닿는 말씀. 메시지를 묵상합니다.
-. 메시지 말씀의 내용으로, 주님께 기도로 봉헌합니다.
실천하기
균형있는 거룩한 말씀과 성경을 통하여 교회의 전통을 지켜갑니다. 그 거룩한 말씀과 성경은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총을 통하여 하느님 아버지의 격려와 희망을 깨닫게 되고, 성령께서 힘을 북돋우며, 우리는 좋은 일과 좋은 말을 하게 됩니다. 신앙인으로 눈멀거나 위선을 벗어나게 됩니다. 그리스도의 제자들은 종교 활동과 신심과 함께 의로움과 자비와 신의를 실천합니다. 자신의 탐욕과 방종을 극복해 나갑니다.
그리스도 신앙인은 공동선과 의로움과 자비를 통하여 자신을 깨끗이합니다. 그렇게 하여 그리스도의 영광을 차지하는 그분의 일꾼이 됩니다.
오늘 주님의 의로움과 자비를 알고, 그 길을 따라갑니다. 복된 신앙인이 됩니다.
마치기
성모송 영광송으로 마무리 기도합니다.
이재을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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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년 8월 25일 화요일 연중 제21주간 화요일 매일미사
_서광호 베네딕도 신부 집전
•2020. 8. 25.
서광호 베네딕도 신부 (성 베네딕도 왜관 수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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