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지섭(金祉燮) 의사
The Hero of May, Kim Jisub
(1884. 7. 21. ~ 1928. 2. 20.)
김지섭 의사는 1884년 경상도 안동대도호부 풍북면 오미동(現 경상북도 안동시 풍산읍 오미리)에서 태어났다. 공립 상주보통학교 교원으로 근무했던 그는 집안 족형 김응섭(金應燮)의 영향으로 진로를 바꿔 재판소 통역관 시험에 합격, 1909년 금산구(錦山區)재판소 통역관보 겸 서기에 임명되었다. 그러나 이듬해 일본에 의해 대한제국의 국권이 피탈되고, 각별한 관계였던 금산군수 홍범식(洪範植)이 나라를 되찾으라는 유서를 남기고 자결하자, 1913년 모든 직을 내려놓고 독립운동에 투신하였다.
1919년 3·1운동이 일어난 뒤 중국으로 망명한 김지섭 의사는 1922년 의열단(義烈團)에 가입하였다. 가입 이후 총독부 등 조선 내부의 식민통치기관 및 주요 인사를 공격하기 위해 폭탄을 경성으로 반입하였으나 아쉽게도 경찰에 발각되어 실패하였다. 이외에도 거사를 위한 군자금 모금 등 활발한 투쟁 활동을 벌였다.
1923년 9월 관동대지진 당시 일본인들이 유언비어를 퍼뜨리며 한국인들을 학살하는 모습에 충격을 받고 격노한 김지섭 의사는 일본 본토를 직접 타격하기로 결심했다. 이에 의열단원들과 일본 제국 의회 개회 중 폭탄을 투척하기로 결의하고 직접 의거를 자청하였다. 12월 20일 수류탄과 여비를 건네받고 일본으로 밀항한 김 의사는 10일 뒤 후쿠오카[福岡]에 도착하여 이듬해 1월 3일 기차를 타고 도쿄로 향했다. 그러던 중 의회가 휴회하였다는 소식을 접하자 곧 목표를 일본 왕궁으로 변경하였다. 1월 5일, 궁성이 있는 히비야[日比谷]로 향한 김지섭 의사는 해가 지자 궁성 정문 니주바시[二重橋]에 폭탄을 투척하였다(니주바시 투탄 의거). 그러나 폭탄을 지하에 오래 보관한 탓에 습기가 들어 뇌관이 작동하지 않았고, 급박한 나머지 다른 폭탄도 안전핀을 뽑지 못한 채 던졌다.
현장에서 체포된 김지섭 의사는 1925년 8월 12일 공소심에서 무기징역을 선고받고 치바[千葉]형무소에 수감되었다. 그리고 투옥된 지 4년만인 1928년 2월 20일 순국하였다. 유해는 화장되어 고향에 안장되었다가 광복 후 사회장으로 경북 예천군 호명면 직산리로 이장되었으며 2004년 11월 2일 대전국립현충원 독립유공자 묘역에 안장되었다. 정부는 김지섭 의사의 공훈을 기려 1962년 건국공로훈장 복장(現 건국훈장 대통령장)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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