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들여 지은 빈집의 시학
--최병근의 신작시
김수이(문학평론가, 경희대 후마니타스칼리지 교수)
최병근의 전작 시집들에서 그의 시의 지향성을 농축한 시 구절을 둘 골라본다. “따뜻한 말 가득 싣고/골디락스 행성 항로를 따라가는/혀는 말의 활주로였다”(「말의 활주로」, 『말의 활주로』, 지혜, 2020). “짧은 도행道行에도 반질하고 곧게 길들여져/정정히 살아가는 수도자가 있다//한 마디 두 마디 쌓아 올린 빈집 같은”(「대나무 수도승」, 『먼지』, 지혜, 2022). 골디락스 행성Goldilocks Planet은 지구와 비슷한 조건을 갖춘, 생명체가 살 가능성이 있는 행성을 뜻한다. 최병근은 자신의 ‘혀’가 “따뜻한 말 가득 싣고 골디락스 행성 항로를 따라가는” “말의 활주로”가 되기를 원하며, 세상에서 가장 짧으면서도 긴, 또한 가장 부드러우면서도 위험한 길인 ‘말의 활주로(=혀)’를 갈고닦으며 ‘반질하고 곧은 수도자’로서 살아가기를 희구한다. 최병근에게 시 쓰기는 “따뜻한 말”을 실어 나르는 타자 지향의 인간적이며 윤리적인 길이자, 더 넓게는 인간을 포함해 생명체가 살 수 있는 골디락스 항로의 ‘활주로’를 정비함으로써 생태 회복의 갈급한 문명사적 요청에 부응하는 길을 뜻한다. 또한 최병근에게 살아가는 일은 도행(道行)의 시간보다는 그 마음가짐과 자세에 좌우되는 수도자의 길을 의미한다. 그는 수행으로서의 삶이 “한 마디 두 마디 쌓아 올린 빈집 같은” 무형이자 무위의 길임을 각오하고 있다. “한 마디 두 마디 쌓아 올린 빈집 같은” ‘수도자’가 쓴 시 역시 ‘공들여 지은 텅 빈 집’의 형상일 것임은 물론이다.
그렇다면, ‘허공으로 가득한 빈집 짓기’로서 최병근의 ‘살아가기’와 ‘시 쓰기’는 집을 짓기 위한 것일까, 허공을 짓기 위한 것일까? 애초에 빈집은 허공 없이는 성립할 수 없기에, 다시 말해 빈집과 허공은 둘이면서 둘이 아니기에 이 질문은 본질적으로 무효하다. 하지만 이전과 구별되는 변화와 성장을 중시하는 현실의 차원에서는 유효하며, 답의 여부보다는 질문의 탐구 과정 자체가 중요한 방법론적 차원에서도 유효하다. 최병근은 자신이 지어온 삶과 시의 집이 ‘허공으로 가득한 빈집’임을 평생의 먼 길을 돌아온 끝에 수긍하며, 이를 통해 삶의 무게를 고스란히 간직한 채 높이 날아오를 마음의 추진력을 얻는다. 이번에 발표한 5편의 신작시 중 「어머니 ― 새를 위한 랩소디」에 의하면 최병근의 추진력의 원천은 ‘어머니’이다. “평생을 등짐지고 살아”온 ‘나’에게 “날개를 주”고 “허공을 기꺼이 내어주었”던 어머니.
누가 나에게 날개를 주었나
허공을 기꺼이 내어주었나
나는 평생을 등짐지고 살았는데
어떻게 나는 내 머리 위를
거침없이 가볍게 날아가는가
- 「어머니 ― 새를 위한 랩소디」 1연
“평생을 등짐지고 살”며 생존에 매진해온 ‘나’는 문득, “내 머리 위를/거침없이 가볍게 날아가는” ‘나’를 발견하며 놀란다. 두 개의 ‘나’, 즉 삶의 무거운 짐을 져온 ‘나’와 허공을 자유롭게 날아가는 ‘나’는 둘이면서 둘이 아니다. 삶의 무게를 감내하는 일과, 허공을 가볍게 날아가는 일 역시 분리될 수 없는 생의 사건이다. 우주 만물의 불가분한 전일성(全一性)을 뜻하는 ‘전체성wholeness’의 다른 두 측면이라고도 할 수 있다. 이를 최병근은 초로의 나이에 ‘어머니’의 삶을 돌아보며 깨닫는다. 어머니의 고달픈 삶은 사랑하는 자식에게 비상의 날개를 달아주기 위한 것이었으니, 어머니는 삶의 육중한 등짐을 지고 힘겹게 걸으면서도 거침없이 가볍게 날아오를 수 있었다. ‘나’는 이제 어머니의 삶을 복기하며 이 동시성의 역설을 다른 각도에서 깨닫는다. 지금까지 내가 삶의 무거운 짐을 지고 걸어온 길은, 어머니가 마련해 준 날개를 달고 허공을 가볍게 날아온 길이기도 하였음을 알아차리는 것이다.
이 시의 2연에서 최병근은 “나는 먼 길을 돌고 돌아와/다시 여기에 쪼그려 앉아 있지/더 이상 바깥을 기웃대지 않겠다고/다른 허공을 고민하지”라고 고백한다. 세간의 현실을 가리키는 ‘바깥’ 대신에 현재 그가 선택한 것은 “다른 허공”이다. ‘다른 허공’에 대한 고민은 삶의 더 깊고 넓은 단계에 대한 모색을 함축한다. 시 「핸드폰」에서도 최병근은 삶의 전환에 대한 동일한 문제의식을 드러낸다. “나는 나를 찾고 있었지 그리고/때로 살아 있어 방황했지// (…) //생의 비밀 감출 주머니도 없이/나는 어떻게 어제를 살았던 걸까”. 단적으로 말하면, 지금까지의 삶에서 최병근이 삶의 크고 작은 일들을 ‘경험하고 성찰하는 주체’로 살아왔다면, 이제 그는 자기 자신과 삶, 타자와 세계를 깊이 육화하며 이전과는 ‘다른 허공’을 품은 ‘깨어 있는 존재’로 거듭나고자 한다. 시 「느티나무가 있는 풍경」에 등장하는 “나는 처음 보았다”라는 진술은 이 변화하는 삶의 풍경들을 이야기하기 위한 최병근의 말머리라고 할 수 있는데, 시 「별」에서 그는 ‘깨어 있는 존재’로서 ‘나’가 처음 본 도약과 감응의 순간 하나를 의문형의 감탄조로 그려 보인다.
그의 존재를 확인해서 어쩌자는 건가
우리는 이미 오래전부터 그와 함께했었거늘
그는 대체 어떻게 영원을 반짝이고 있었던가
그를 바라보는 내 안의 얼굴 하나를 그가 언제 훔친 것인가
- 「별」 전문
“우리는 이미 오래전부터 그와 함께했었”으나, 새삼 “그의 존재를 확인하”면서 ‘나’는 전에는 몰랐던 사태를 발견한다. “그는 대체 어떻게 영원을 반짝이고 있었던가/그를 바라보는 내 안의 얼굴 하나를 그가 언제 훔친 것인가”. ‘나’의 의식이 깨어나면서 촉발된 일종의 존재론적 사건이라고 할 수 있다. ‘나’는 ‘그’와 오래전부터 함께해왔음에도 ‘그’가 변함없이 현시해온 ‘영원’이라는 불가지(不可知)를, 심지어 “내 안의 얼굴 하나를” 훔쳐 자기 것으로 흡수한 정체성 분유(分有, 나누어 가짐)의 사건을 오늘에 와서야 인식한다. 이 인식의 독특한 면모는 ‘나’와 ‘그’의 상호대칭성에 있다. 상호 무한 반영과 육화라고 해도 좋겠다. ‘그’를 바라보는 순간 ‘나’는, ‘그’ 역시 이미 ‘나’를 응시한 후 내 육체의 일부이자 정체성의 표상인 “내 안의 얼굴 하나”를 가져가 체화하고 있음을 알게 된다. 양자역학이 증명한, 관찰하는 순간 관찰 주체가 대상(존재와 사건)에 영향을 미치는 ‘관찰자 효과’가 일방향이 아닌 상호적으로 나타나고 있는 셈이다.
여기서 일방향의 관찰이 시의 주체가 대상을 일방적으로 전유하거나 대상에 자신을 이입하는 태도와 연결된다면, 상호성 혹은 상호대칭성의 관찰은 시의 주체가 대상을 자신과 대등한 주체로 재인식함으로써 전통 서정시가 갇혀 있던 일면적인 세계를 극복하고 확장하는 작업과 연결된다. 그런데 최병근의 작업은 전통 서정시의 어법을 부정하고 낯선 언어의 발명을 추구하는 방식이 아니라, 전통 서정시의 양식을 계승하면서도 주체와 대상의 평등한 구도를 새롭게 만들어 내고 있는 점에서 의의가 있다. 최병근이 현재 고민하고 있는 ‘다른 허공’은 이 상호성에 의해 열리는 새로운 세계이며 지평이라고 할 수 있다. 예컨대, 어머니와 ‘나’의 삶이 상호 공명하며 수십 년의 시차 속에서도 각자-함께 앞으로 나아가고, ‘나’와 ‘그’의 시선(의식)이 서로의 존재에 변형을 일으키며 확연한 거리 속에서도 공유와 연대의 풍경을 빚어내는 세계.
시 「단추」와 「느티나무가 있는 풍경」은 이 상호성의 존재적 교류의 순간이 ‘삶’의 빛나는 정점을 이룩하는 것임을 아름답고 감동적으로 그린 수작이다. 시 「단추」에서 최병근은 삶의 환한 에너지를 거리에서 잠시 스쳐 지나간 익명의 ‘그’에게서 전달받고, 시 「느티나무가 있는 풍경」에서는 시골의 작은 볼트 공장 노동자인 ‘그’와 공장 앞에 있는 “수령 오백년 보호수”인 ‘느티나무’에게서 나누어 받는다.
아주 작은 눈길로도
오늘을 여밀 수 있다니!
붐비는 거리에서
목적지를 향해 건너가는 발걸음들 사이로
맞은편에서 건너오는 한 사람이 보인다
그의 등 뒤에서
길을 재촉하는 파란 눈이 깜박이고
어디로 가는 것인지
그의 잰걸음이
어깨를 스친다
살아야 한다는 물증인 듯
아침 햇살에
그의 가슴에 달린 눈 하나가 반짝, 빛난다
- 「단추」 전문
이 시에서 최병근은 붐비는 거리의 교차로에서 맞은편에서 걸어오는 모르는 “그의 가슴에 달린 눈 하나가 반짝, 빛나”는 장면을 목도한다. ‘단추’의 변주인 “그의 가슴에 달린 눈”은 시 「별」에서 ‘영원을 반짝이고 있는 별’인 ‘그’처럼 반짝이며 빛난다. 복잡한 거리에서 짧은 순간 “어깨를 스친” 익명의 ‘그’는 빛나는 삶의 에너지를 뿜어내면서 자신과 아무 상관 없는 행인인 시인에게 “살아야 한다는 물증”을 전해주고 간다. ‘그’가 발산하는 삶의 빛나는 기운은, 영원을 반짝이는 별처럼 이미 ‘우리’가 오래전부터 함께해왔음에도 최병근이 지금에 이르러서야 발견한 것임에 분명하다. 최병근이 현재 지향하는 ‘다른 허공’을 향한 의식의 전환과 열림이 왜 필요하며, 그것이 어떤 일을 하는가를 알게 하는 장면이다.
간판 없는 공장은 그의 1인 놀이터였다
수령 오백 년 보호수 발치에
기와 정자 하나 빈 채로 앉아 있었다
나는 그 주름진 나무 옆구리에 붙어 있는
볼트 공장 사장을 만나
담배 한 대 피우고 싶었을 뿐이었다
한 치 오차 없이 여름을 깎아
가을의 힘줄을 한껏 조여야 할 그의
볼트
이순에 늦장가 들어 세 살 딸아이를 둔 그는
나무 그늘을 나이테처럼 둥글게
둥글게 땀 흘려 깎고 있었다
그와, 그의 필리핀 아내와
저녁이 여전히 무서운 딸아이
웃음만으로 세상이 어찌 환해질 수 있겠는가
나는 처음 보았다
느티나무가 수만의 푸른 눈동자로
그의 볼트 공장 지붕 그늘을 완성한
한여름 그 오후를
- 「느티나무가 있는 풍경」 전문
어느 시골에서 오백 년 세월을 견뎌온 느티나무의 발치에는 “기와 정자 하나 빈 채로 앉아 있”고, 또 그 느티나무의 옆구리에는 간판도 없는 조그만 공장이 있다. 공장의 유일한 노동자인 ‘그’는 사장 얼굴도 잘 볼 수 없는 채로 매일 혼자 볼트를 깎는다. 이순에 늦장가 들어 필리핀 아내와 세 살 딸아이를 둔 ‘그’는 볼트를 깎으면서 볼트만 깎(아 만드)는 것이 아니다. 부양해야 할 아내와 어린 딸의 생계와 환한 웃음을 깎아 만들고, “나무 그늘을 나이테처럼 둥글게/둥글게 땀 흘려 깎”아 만들며, “한 치 오차 없이 여름을 깎아/가을의 힘줄을 한껏 조여” 가을(결실)을 만들어 간다. 최병근은 이 고단하면서도 아름다운 노동, 가난하면서도 풍요로운 삶의 눈부신 경지에 대한 목격담을 이렇게 노래한다. “웃음만으로 세상이 어찌 환해질 수 있겠는가//나는 처음 보았다/느티나무가 수만의 푸른 눈동자로/그의 볼트 공장 지붕 그늘을 완성한/한여름 그 오후를”.
‘그’가 깎아 만든 셀 수 없이 많은 볼트만큼 ‘느티나무’는 “수만의 푸른 눈동자로 그의 볼트 공장 기분 그늘을 완성한”다. 그와 느티나무 사이에 그도 모르게 이루어진 이 가없는 존재적 교류, 상호대칭의 생명의 노동 혹은 삶의 작업을 무엇이라고 이름 붙여야 할까. 그가 볼트를 깎아 만드는 ‘노동’과 느티나무가 “수만의 푸른 눈동자”로 반짝이는 잎들을 피워낸 ‘수고’는 이제 다르면서도 같은 것임이 드러난다. 둘이면서 둘이 아닌 것. 인간의 긍정적인 자세를 뜻하는 ‘웃음’만으로는 획득할 수 없는 삶의 생명력을 ‘그’는 외로운 노동의 현장에서 자신에게 그늘을 드리워주는 ‘느타나무’를 통해 얻고 있다. 이를 발견하고 경이로워하고 있는 ‘나’는 시인 최병근 자신이자, 그가 현재 탐구하고 있는 ‘다른 허공’을 향해 나아가는 서정시의 주체이기도 하다. 마치 우주의 생명력을 응축한 우주수(宇宙樹, 세계수) 같은 느낌을 주는 이 시의 느티나무 옆에 ‘비어 있는 기와 정자’가 있다는 점도 다분히 암시적이다. 현대문명 속에서 몰락하고 있는 과거, 전통, 인간적인 가치, 인간의 따뜻한 소통 등이 ‘빈집’의 형상이 되어가는 지금, 우리가 정작 상실한 것은 각자의 마음의 빈집과 허공의 세계이기 때문이다. 여기에 덧붙여 최병근의 시는, 삶이 본래 빈집이며 인간은 그 빈집에 거주하다 가는 존재라는 사실을 환기한다. 이 비어 있음을 온전히 품을 때 빈집은 완성되며, 그 완성을 향해 가는 순간들에 누구든 무엇이든 타자에게 충분히 나누어 줄 수 있을 만큼 눈부시게 빛나는 삶의 에너지를 뿜어낸다는 역설적인 섭리와 함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