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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국지(三國志 Romance of The Three Kingdoms)]
영한대역 만화 삼국지
엄목포작(掩目捕雀) - 눈을 가리고 참새를 잡다
- 참새를 잡는 데 참새가 보고 날아갈까 두려워 자기의 눈을 가리고 잡는다. 자기 자신을 欺瞞(기만)함을 이르는 말.
후한(後漢) 영제(靈帝) 시대, 하진(何進)은 누이 동생이 황후가 되어서 황태자 변(辨 - 나중의 소제<少帝> : 홍농왕)을 낳게 되므로써 제국의 실권을 수중에 넣기에 이르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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즉, ‘하진(何進)과 같이 무덤을 파는 방향으로 이끌어 갈 수 있다.’라고 하는 능동적인 의미가 된다. 바꾸어 말하면, ‘눈을 감고 참새를 잡는 것(掩目捕雀) 처럼 행동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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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진(何進) He Jin
(1) 하진(何進, ?, 하남성 난양 ~ 189년 9월 22일(음력 8월 25일))은 중국 후한 말기의 관료로, 자는 수고(遂高)이며 남양군 완현(宛縣) 사람이다. 후한 영제의 황후인 영사황후 하씨의 오빠이다.
(2) He Jin (pronunciation (help·info)) (died 22 September 189), courtesy name Suigao, was a Chinese military general and politician. He was the military Grand marshal and regent of the late Eastern Han dynasty of China.[1] He was an elder half-brother of Empress He, the empress consort of Emperor Ling, and a maternal uncle of Emperor Shao. In 189, he and his sister shared power as regents when the young Emperor Shao was put on the throne following Emperor Ling's death. During the time, the conflict between He Jin and the influential eunuch faction intensified. The eunuch faction lured He Jin into a trap in the imperial palace and assassinated him. While He Jin's subordinates slaughtered the eunuch faction in revenge, the warlord Dong Zhuo took advantage of the power vacuum to enter the imperial capital Luoyang and seize control of the Han central government. The subsequent breakdown of central command brought forth the beginning of massive civil wars which led to the end of the Han dynasty and the start of the Three Kingdoms period.
(3) 배경
하진은 원래 백정이었으나 여동생이 영제의 후궁으로 들어가 총애를 받자 낭중(郞中)에 임명되었다. 이후 점차 승진하여 영천태수까지 이르렀는데, 180년에 누이동생이 마침내 황후에 임명되자 중앙으로 불려와 시중(侍中)이 되었다가 다시 승진해 하남윤에 임명되었다.
광화 7년(184년), 거록의 장각이 황건적의 난을 일으키자 대장군에 임명되어 반란 진압의 총지휘를 일임받았다. 이때 하진은 장각의 제자 마원의(馬元義)가 낙양에서 봉기하려는 계획을 간파하였으므로 열후에 봉해졌다.
그 해 12월, 왕윤이 십상시 중 하나인 장양이 황건적과 밀통한 것을 알아차렸다. 장양은 도리어 왕윤을 모함하여 처형당하게 하려했으나 하진이 상소를 올려 왕윤이 죽음을 면하게 하였다.
황건적의 난이 진압된 뒤, 중평 5년(188년) 하진은 영제에게 진언하여 서원삼군(西園三軍)을 만들고 영제에게 대장군의 상급 작위로 군의 최고 작위인 무상장군(無上將軍)을 제수받았다.
(4) 황위 계승 문제
영제의 계승 문제로, 아들 유변을 지지하는 하황후와 유협을 지지하는 영제의 어머니 동태후 사이에 갈등이 생겼다. 상군교위(上軍校尉)이며 십상시 중 하나인 건석은 동태후와 함께 유협을 지지하고 있었고, 중군교위(中軍校尉)인 원소는 하진의 적극적인 지지자였기 때문에 건석과 크게 대립하고 있었다.
중평 6년(189년) 4월 영제의 죽음이 가까이 오자, 건석은 후계자로 유협을 지목했다는 영제의 유조(遺詔)를 갖고 있다고 하였다. 그 후 하진을 죽이려는 음모를 꾸미고 하진을 궁안으로 불러 들였다.
사마(司馬) 반은(潘隱)이 하진과 친했기 때문에 건석의 음모를 하진에게 고해 하진은 자기 진영으로 돌아가고 병이 났다는 핑계로 입궁하지 않아 건석의 음모는 실패로 돌아갔다.
189년 5월 유변이 황제로 즉위했고, 유변의 외삼촌인 하진과 그 하진의 열렬한 부하인 원소는 곧 황제를 보위하게 되었다. 이에 불안해진 건석은 십상시인 조충 등에게 편지를 보내 다시 한번 하진을 죽일 계획을 꾸몄다.
환관 곽승은 원래 하진과 같은 고향 사람으로 하황후가 황후가 되고, 하진이 대장군이 된 것은 곽승이 크게 힘썼기 때문이었으므로 하진 세력과 친밀하였다. 그러므로 곽승은 조충과 의논하여 건석의 계획을 따르지 않기로 하고, 건석의 편지를 하진에게 보여주었다. 이에 따라 하진은 건석을 잡아 들여 죽이고 그의 병사들을 차지하였다.
또한 궁중에서는 동태후와 태후가 된 하진의 누이동생이 충돌하게 되었다. 동태후가 하태후에게 자신의 조카인 표기장군 동중(董重)으로 하여금 하진의 목을 베게 할 수 있다고 하자, 하태후는 이를 하진에게 알렸다. 하진은 그 해 5월에 동태후와 동중을 내쫓았고, 두려움과 근심에 휩싸인 두 사람은 얼마 가지 못하고 죽었다. 이 일로 인해 하진 일가는 민심을 잃었다.
(5) 십상시(十常侍)와의 대립
원소는 평소 십상시를 주살할 계획을 꾸미고 있었는데, 하진이 정권을 잡자 그에게 접근해 십상시를 죽일 계책을 바쳤다.
하진은 원소의 계획을 따라 십상시들을 모두 제거하고자 했으나 하진과 하태후의 남동생으로 하진과 사이가 나쁜 하묘는 하태후에게 십상시를 죽이지 못하도록 말해 두었기 때문에 하태후의 허락을 얻지 못하였다.
이에 원소가 외부의 군사를 불러들여 그들로 하여금 십상시를 처단할 것을 제안하였다. 주부 진림이 외분병력을 끌어들이는 원소의 계획을 강력히 반대하였으나 하진은 원소의 계획을 따르기고 하였다.
원소는 이 계획의 지휘를 맡아, 동탁, 왕광과 교모, 정원 등 몇몇 장군들을 낙양 근처로 불러들여 태후와 환관과 탁류 관료들을 압박하는 형세를 취했다. 이에 모두 겁에 질려 환관들을 주살하자고 말하였으나 유독 하태후만이 듣지 않았다.
본래 원소는 십상시를 모조리 주살하고 궁정에 환관을 두는 제도를 완전히 폐지해 국정을 개혁해야 한다는 급진적인 주장을 내세웠던 반면, 하진은 정권의 안정적인 유지에 관심이 있었고 환관들과 결탁하여 정권을 잡았기 때문에 환관들을 은근히 경외시하는 마음이 있었다. 그렇기 때문에 하진은 원소가 계책을 내놓았을 때마다 항상 우유부단하게 대처해 오랫동안 결정을 내리지 못했으며 이 무렵에도 역시 주저하기를 거듭하는 등 기민한 결단을 내리지 못했다.
원소는 하진이 또다시 계획을 바꿀 것이 두려웠으므로 "계획은 이미 완성되었고, 형세는 모두 드러났는데 더 이상 지체한다면 반드시 변고가 생길 것" 이라며 하진을 위협했다. 이에 하진은 왕윤을 하남윤으로, 원소를 사례교위로 삼고 가절을 내리는 등 원소를 필두로 한 청류 사대부에게 강력한 권한을 내렸다.
원소는 이에 더욱 강수를 두어 외부의 장군들을 도성 근처로 더욱 가까이 주둔하게 했고, 자파의 무인들을 금군으로 배치해 환관들을 철저히 감시하게 했다. 공포에 질린 태후는 마침내 굴복하여 십상시 이하를 모두 파면시키고 낙향하게 했는데, 원소는 이 틈에 이들을 모두 처단할 것을 하진에게 세 번이나 거듭하여 권했으나 또 다시 결단을 주저한 하진은 끝끝내 원소의 말을 듣지 않았다.
(6) 죽음
이에 원소는 하진의 명령을 위조하여 모든 주군에 중관의 친속들을 잡아들여 심문하도록 하는 등 하진의 결단을 몰아세웠으나, 하진이 머뭇거리는 사이에 십상시의 수장 장양은 선수를 쳐 다시 하태후의 환심을 샀고 그 결과 십상시들은 모두 복직되었다.
이를 본 하진은 마침내 하태후를 찾아가서 십상시를 죽일 것을 청했으나 오히려 십상시들은 그들의 수하 수십 명을 숨겨 두었다가 하진이 궁궐을 나오자 하태후의 명령을 사칭하며 부하들이 매복한 장소로 불러들였고, 여기에 이끌린 하진을 상방감(尙方監) 거목(渠穆)이 죽였다.
(7) 사후
하진이 사망한 후, 며칠 간 계속된 혼란의 과정에서 원소는 장양이 구성한 내각의 관료들을 살해한 뒤, 협박과 질책을 통해 수습시킨 군사들을 데리고 궁궐에 난입하여 2,000여명을 죽여 내시와 탁류 관료로 간주되는 모든 사람들을 절멸시키는 데 성공하였다. 이때 하진의 피다른 동생 하묘는 하진을 죽인 것으로 오해를 받아 오광과 동탁의 동생 동민에 의해 죽임을 당했다.
한편 원소는 자기 자신이 불러왔던 동탁에게 밀려나 정권을 잡지 못하고 중앙권력에서 실각했다.
정권을 잡은 동탁은 황제 유변을 폐위시키고 유협을 황제로 만들고, 하태후와 폐위된 유변을 감금하였다. 동탁은 하태후를 감금 후 이틀후에 독살시켜 죽이고 유변은 수개월후에 죽였다. 몇개월후 동탁은 하묘의 무덤을 파헤쳐 시체를 꺼내 마디마디 찢어 길에다 버렸으며 하태후의 어머니이고 하묘의 어머니인 무양군(舞陽君)을 죽여 시체를 내버렸다. 한편 며느리 윤씨(尹氏)는 이후 조조에게 재가하였고 손자 하안도 어머니가 조조에게 재가함에 따라 자연스럽게 조조의 양자가 되었다. (그는 249년에 고평릉의 변을 일으킨 사마의에게 처형당한다.)
한편 원소는 동탁의 포학한 통치에 반발한 여론을 결집해 반동탁 연합군을 창설하여 동탁과 헌제를 괴뢰 정권으로 규정했는데 이로써 군웅할거의 시대가 시작된다.
(8) 하진 암살에 대한 묘사
후한서 하진전에 따르면 189년 8월 하진이 장락궁에 들어가 하태후를 만나 모든 상시(常侍) 이하를 모조리 죽이고 삼서(三署)의 랑(郎)들을 뽑아 이들로 하여금 환관들의 거처를 포위하게 끔 해달라고 하였다. 이에 여러 환관들이 모여 의논했다. "대장군 하진이 병이 났다면서 상(喪)에도 나오지 않고, 장례에도 나오지 않았는데 왜 느닷없이 입궁한답니까? 무슨 뜻이 있는거 아닙니까?" "예전에 두무(竇武)가 환관들을 죽일때처럼 또다시 그렬려고 그러는 거 아닐까요?" 곧 장양(張讓)등은 사람을 시켜서 엿듣게 하여 그 엿듣는 말을 전해듣고 상시(常侍)인 단규(段圭)와 필람(畢嵐)등 수십명을 이끌고 무기를 들고 궁궐 측면의 작은 문 주위에 매복하게 하였다. 하진이 나오자 하태후의 조서(詔書)라고 속이고 하진을 불렀다. 하진이 작은문 안으로 들어오자 장양은 하진을 꾸짖었다. "천하가 어지러운 것은 우리들 잘못 때문 만은 아니오! 예전에 영제(靈帝)가 하태후랑 사이가 안 좋아 거의 하태후를 황후에서 폐립하려고 했을 때 우리들이 울면서 간신히 구해 주기도 했고 각각의 집안에서 천만금을 각출하여 예물을 들여 공을 기쁘게 해드렸던 것은 모두 공의 집안에 의탁하려고 그랬던 것이오! 그런데도 이제 공이 우리들을 모조리 죽이려 드니 이것은 너무 심한 것 아니오? 공은 우리들이 더러운 놈이라는데 그렇다면 공의 사람들 중에 그렇게 충성스럽고 깨끗한 사람이 있다면 그게 누구요?" 하진이 어찌하지 못하자 상방감(尚方監) 거목(渠穆)이 가덕전(嘉德殿) 앞에서 하진을 칼로 베었다.
(9) 삼국지연의에서의 하진 암살에 대한 묘사(제3회)
원소와 조조가 칼을 차고 하진을 호위해 장락궁(長樂宮) 앞 당도하자 문지기가 의지(懿旨:황태후의 뜻)를 알렸다. "태후께서 대장군만 들라시니 다른 사람들은 들어올 수 없소." 원소, 조조 모두 궁문 밖에 멈추고 하진이 들어가 가덕전((嘉德殿)) 밖 당도하자 장양(張讓), 단규(段珪) 등이 나와서 하진의 좌우를 둘러쌌다. 하진이 크게 놀라는데 장양이 성난 목소리로 하진을 꾸짖었다. "동태후께 무슨 죄가 있어 함부로 독살하였느냐! 국모의 장례에도 병을 핑계로 나오지 않다니! 네 본래 돼지 잡던 천한 놈인데 우리들이 천자께 천거하여 부귀를 누렸다. 그런데 은혜를 갚을 생각 않고 해칠 궁리만 하다니! 당신은 우리들이 그렇게 더럽다고 지껄이는데, 그렇다면 깨끗한 놈이 도대체 누구더냐?" 하진이 허겁지겁 달아날 길 찾았으나 궁문들은 모두 닫혔고 매복한 병사가 일제히 뛰쳐나와 순식간에 하진을 베어 두 동강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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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출처 : 영한대역 칼라 만화 삼국지(Romance of the Three Kingdoms 제 3권 P190)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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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저자 : 21세기 영어교육연구회
- 출판사 : (주)파우스트 칼리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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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미로 읽는 영한대역 세계명작 만화]
징기즈칸[Genghis Khan, 成吉思汗]
출생 – 사망 : 1162 ~ 1227
재위 기간 : 1206 ~ 1227
지역 : 아시아 대륙
왕조 : 몽골 제국
거대한 몽골 제국은 동방으로부터 중앙아시아를 중심으로 유럽 세계에도 커다란 영향을 끼쳤다. 서양사에 공포의 상흔을 남긴 징기즈칸, 그리고 몽골은 어떠한 존재였을까?
(1) 배경 - 동방 왕의 전설
리처드 왕의 십자군도 만족스러운 전과(戰果)를 올리지 못하고 유럽 세계가 이슬람과의 오랜 싸움에 염증이 났을 무렵, "적국 이슬람의 동쪽 저편에 기독교도들의 나라가 있는데 그 나라 왕은 프레스터 존(Prester John), 즉 '사제 요한'이라고 한다"라는 소문이 나돌기 시작했다.
동방에서 이슬람과 싸우면서 기독교의 성지 예루살렘을 노리고 있다는 이 왕의 이름은 서방의 '십자군' 사이에 하나의 구세주의 전설로서 사실인 양 퍼져 나갔다. 전설의 근원이 된 것은 당시 위구르와 몽골 고원의 일부에서 널리 퍼져 있던 네스토리우스파(派) 기독교(景敎)의 일부인데 그 실체는 전설과는 전혀 다른 것이었다. 그러나 유럽은 이 허상을 바라고 있었다. 페쇄된 시대에 성스러운 왕이 동방에서 나타나 이슬람군을 격파해 주기를 원했던 것이다.
결국 희망대로 동방에서 전설의 왕이 왔다. 하지만 그 왕의 이름은 징기즈칸이었다.
(2) 태생 - 몽골의 고아
징기즈칸이 이끄는 몽골이 역사의 무대에 모습을 드러내는 것은 13세기 초이다. 당시 몽골 고원에서는 위구르 유목 제국이 해체된 이후에 3세기 반에 걸쳐 분열과 할거(割去)가 이어졌다. 요(遼)를 비롯한 주위 국가들은 모두 몽골의 유목 부족이 하나로 뭉치는 것을 두려워했는데 그 이유는 과거의 흉노(匈奴), 돌궐(突厥)같이 하나가 된 부족 연합은 틀림없이 아주 강력한 힘을 발휘할 것이기 때문이었다. 조금이라도 유력한 부족이 나타나면, 그 대항마(對抗馬)를 지원하여 서로 싸우게 했고 그래도 안 될 때는 대군을 북벌(北伐)하게 하여 직접 격파했다. 경연(硬軟) 양면에서 간섭한 결과 유목 부족들이 통일되는 일은 없었다. 하지만 요(遼)가 금(金)에 쓰러지고 멀리 중앙 아시아에서 서요(西遼)가 된 이 당시에는 몽골 고원에 대한 압박도 다소 느슨해져 있었다. 사실, 이 시대에 이르면서 몽골 부(部)는 통일되었고, 칸도 3대째에 이르렀다. 그러나 유목 부족 사이에서 여전히 전쟁은 계속되고 있었고, 몽골 고원 전체를 하나의 군단(軍團)으로 통일할 사람은 아직 나타나지 않았다.
징기즈칸, 그의 어릴 때 이름은 테무진이었는데 초년 시절은 그리 평탄치 않았다. 아버지 에스게이는 쿠트라 칸의 뒤를 이어 몽골 부의 제4대 족장에 오를 것으로 촉망받고 있었으나 테무진이 어렸을 때 숙적(宿敵) 타타르 부(部)에 의해 독살당했다. 그러자 에스게이를 따르던 타이치우트 씨족은 손바닥 뒤집듯이 테무진을 배신했고, 테무진의 복수를 염려해 어린 그를 죽이려고 계획했다. 난세에 이용 가치가 없는 사람을 배척했다는 이유만으로 그들이 각별히 사악했다고 말할 수는 없을 것이다. 테무진이 어리고 힘이 없을 때 제거하려 한 것은 아직 밝혀지지 않은 테무진의 실력을 인정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어머니 호에른의 엄한 교육 때문에 테무진은 아주 가혹하고 격렬한 성격으로 자라났다.
이런 일화가 있다. 어느 날, 테무진을 비롯한 4형제가 강에서 낚시를 하고 있었다. 이때 에스게이의 또 다른 아내의 아들, 이복형제 두 명이 찾아와서 그들이 낚은 고기를 빼앗았다. 테무진은 집으로 돌아가 어머니에게 이 사실을 말했는데, 어머니는 형제끼리 싸워서는 안 된다고 충고했다. 어머니의 책망을 듣고 테무진은 남동생 카사르와 활을 들고 집을 나가 이복형제를 앞뒤에서 공격하여 활로 쏘아 죽였다. 집으로 돌아온 두 아들을 보고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알게 된 어머니는 "같은 집안 사람끼리 싸워서 어떻게 하느냐"고 테무진을 꾸짖었다고 한다. 그런 성격의 소유자가 조용히 참으며 살 리가 없었다.
테무진은 보르테를 아내로 맞이하면서 승승장구하게 된다. '눈에 불이 있고 얼굴에 빛이 있는' 소년 테무진과 소녀 보르테를 약혼하게 한 것은 아버지 에스게이였지만 정식 결혼은 그로부터 9년이 지나서야 성사되었다. 이때 보르테가 갖고 온 결혼 선물 크로텐(검은담비) 가죽옷이 테무진의 운명을 바꾸어 놓았다. 당시에 크로텐 가죽옷은 매우 고가품이었고 유목민 사이에서 진귀한 옷이었다. 테무진은 이 털가죽을 가지고 케레이트 부(部)의 군주 토오릴 칸에게 찾아갔다. 토오릴 칸은 선친 에스게이의 친한 친구였고 그를 같은 편으로 만들면 100만의 우군을 얻게 되는 셈이었다. 테무진은 몽골 고원 최대의 군주를 우군으로 받아들여 그것을 이용하려는 과감한 도박에서 결국 이겼던 것이다. 크로텐 모피에 기분이 좋아진 토오릴은 기뻐하며 말했다.
"답례로 너의 해산된 씨족 사람들을 모아 주마."
(3) 인격 - '유린하라'고 초원은 말했다
유목민의 생활은 가혹한 편이다. 으레 초원이라고 하면 초목과 바람, 끝없이 높은 하늘을 떠올릴지도 모르겠지만 그런 기후는 1년 중 짧은 여름에 불과하며 이 시기를 제외하고는 혹독한 추위 속에 갇힌다. 1월의 평균 기온은 영하 26.1도. '눈에 방목된 소의 머리가 얼어서 깨지거나' '쇠꼬리가 얼어붙어서 뚝 잘려 땅에 떨어지기도' 하는 가혹한 환경 속에서 유목민들이 철저한 약육강식의 논리로 살아가는 것은 너무도 당연하다. 정확한 판단력과 단호한 행동력이 없으면 유목 생활을 해나갈 수 없으며 그것이 몽골 제국 전체의 특징이기도 했다. 그러나 징기즈칸은 그렇게 단순하게 설명할 수는 없다.
그는 "남자가 쾌락과 기쁨으로 삼는 것은 모반인(謀叛人)을 유린하고 적을 정복하여 재산을 박탈하고 그 시종들의 눈, 코에서 눈물을 흘리게 하며, 그들의 살진 말을 타고 그들의 아내를 나의 침상으로 삼아 그 장미 같은 뺨을 애무하고 진홍빛 입술에 입맞춤하며 끌어당기는데 있다"고 말했다.
징기즈칸의 이 잔학성은 젊을 때 겪은 여러 굴욕적인 사건이 원인인지도 모른다.
아버지가 죽음을 당하고 가난의 밑바닥에서 허덕이며 아내를 빼앗기고 아내가 누군지도 모르는 남자의 아들을 낳은('징기즈칸의 큰아들' 박스 글 참조) 데 대한 분노는 마음 속 깊이 앙금으로 남아 있었을 것이다. 징기즈칸이 단순히 어두운 분노에 자극받아 행동할 사람은 아니었지만, 어떤 분노에도 좌우되지 않는 냉철함, 그것이 징기즈칸이 무서운 진짜 이유였다. 그의 냉철함과 지략(智略)은 원정(遠征)에서 충분히 발휘되었다.
(4) 징기즈칸의 큰 아들
징기즈칸의 아내 보르테는 결혼하고 얼마 지나지 않아 메르키드족에 의해 납치당했다. 그녀는 토오릴 칸이 9개월 동안 교섭을 벌인 끝에 징기즈칸에게 돌아올 수 있었는데, 돌아온 직후에 사내아이를 낳는다.
징기즈칸은 아들의 이름을 주치[朮赤]라 했는데, '객인(客人)' 즉 '이방인'이라는 뜻이다. 이런 이름을 붙인 이유는 보르테가 남편에게 돌아오는 도중에 뜻하지 않게 태어났기 때문이라는 설과 사실은 징기즈칸의 아들이 아니기 때문이라는 설이 있다.
(5) 대서정(1) - 호레즘 샤와의 대립
1219년, 징기즈칸은 서양 세계에 모습을 드러내는데, 그때까지의 10년 동안 그는 몽골을 강력한 통일 국가로 통합하고 중국 북부의 금(金)을 침략하여 정복했다. 당초에는 유목민 특유의 약탈 행위로 시작된 이 침략은 해를 거듭하면서 토지를 제압하고 항구적으로 지배하는 정복 행위로 그 성격이 바뀌어 갔다. 혹독한 자연 속에 자란 유목민들에게 정착민들의 토지는 처분하기에는 너무 풍요로웠던 것이다. 지배를 하게 되면서 몽골 유목민들의 성격도 바뀌어 많은 나라를 정복하고 지배하기 위해 서쪽으로 눈을 돌렸다. 몽골의 서양 정복이 시작되었던 것이다.
이 당시에 서아시아 최대의 이슬람 국가이던 호레즘 샤 왕조는 1210년에 국력이 쇠퇴해 있던 서요(西遼)를 멸망시키고 북쪽은 카스피해 연안으로부터 남쪽은 페르시아, 동쪽으로는 힌두쿠시로부터 서쪽은 코카서스(카프카스)까지 영토를 확장했다. 징기즈칸은 몽골의 접경 지역에 위치한 호레즘 샤와 당초에는 우호적인 관계를 유지하고 있었다.
1215년에 징기즈칸은 호레즘 샤가 보낸 사절단에게 말했다.
"내가 동방의 패자가 될 것이니 샤는 서방의 패자가 되시오. 우리는 서로 평화와 우호를 유지하여 상인들이 자유롭게 왕래할 수 있게 해야 하지 않겠소?"
그러나 징기즈칸의 진의는 다른 데에 있었다. 『집사(集史)』에 의하면 1216년에 대금(對金)침략에 일단락을 지은 징기즈칸은 몽골 전군에게 2년간 휴식을 명령했다. 부족 전체적으로 대원정 준비가 진행되어 서방으로 첩보(諜報)·조략(調略)을 목적으로 통상단이 보내졌다. 표면상의 우호 관계는 적의 내정을 다 살필 때까지의 수단이었을지도 모른다.
그리고 1219년에 호레즘 영(領)인 오트라르(시르다리야 강의 동안, 그 지류 아리스 강 남쪽에 있었으며 옛 명칭은 파라브. 호레즘 왕국 시대에는 그 국경 도시가 되고, 태수가 몽골의 대상을 살해했기 때문에 징기즈칸이 서부 정벌을 하게 된 원인이 되었다.)에서 몽골 통상단이 첩자 혐의로 학살을 당했다. 문명국 사이에서 통상단이 파견되는 경우 그것은 보통 스파이로 생각하는 것이 당연하며, 그것을 잘 알고 있는 상태에서 받아들일지 아닐지 판단하는 것이 일반적 방식이었다. 호레즘이 취한 방법은 그다지 문명적이지 못했다. 징기즈칸은 분노했고, 이것은 침략을 개시할 아주 좋은 빌미였다.
(6) 대서정(2) - 중앙 아시아에서 러시아로
용의주도한 첩보 활동을 벌인 결과 호레즘에 대한 조사가 끝났다.
골 왕조, 아바스 왕조를 누르고 이슬람 세계의 최대 패자(覇者)로 알려졌던 서방의 강국은 실은 겉보기보다 실속은 없었다.
호레즘 샤 왕조가 갑자기 대두하게 된 것은 아랄해(海) 북방의 사나운 유목 민족인 터키계 캉글리족(族)의 무력 때문이었다. 하지만 그들이 직접 충성을 맹세한 것은 호레즘 국왕 무하마드의 생모, 캉글리족 출신의 테르켄 하튼이었고, 호레즘 왕조에서는 어머니와 아들이 대립하고 있었다. 캉글리족이 군사 쿠데타를 일으킬 것을 염려한 무하마드는 병력을 집중시킬 수 없었다. 이러한 사정은 몽골측에 바로 누설되었다. 몽골의 철저한 내부 교란(攪亂)의 결과, 공격의 손길은 무하마드의 어머니 테르켄 하튼에게까지 뻗어 있었다고 전해진다. 결국 호레즘 군대는 전쟁이 끝날 때까지 개별적 도시 방위군으로 몽골 군대 전체와 싸워야 했고, 마침내 모조리 패하고 만다.
1219년, 징기즈칸이 이끄는 원정군은 오토라르 시를 공격하고, 이어서 마와라 안나르 지역을 침공했다. 나중에 제왕 티무르에 의해 번영하는 이 지역은 옛날부터 중앙 아시아에서 가장 비옥한 지대였고 수도 사마르칸트는 알렉산드로스 대왕도 탐내던 곳이었다.
오아시스 여러 도시를 공격, 함락시킨 몽골군은 공성전(攻城戰)에도 뛰어났다. 오토라르를 공략하는 데는 5개월이 걸렸지만 부하라는 며칠 만에, 그리고 사마르칸트는 4일 만에 함락되었다. 금(金)과 서하(西夏)에서 등용한 기술자에게서 습득한 공성전 기술이 주효했음은 물론이고, 몽골군(軍)이 두려워 자진해서 문을 여는 도시들도 많았다. 사전에 조사한 대로 호레즘 샤 왕조의 행동은 전혀 통일되어 있지 않았다. 또한 몽골군은 강력하고 잔학한 군대임을 알려 전쟁 전부터 정보전에서 상대방의 사기를 꺾어 놓았다. 사마르칸트에 몽골군이 오기 직전에 국왕 무하마드는 도시에서 도망쳐 버렸다.
서양 세계에 이 사태는 전설의 구현으로 전해졌다. 프레스터 존은 다윗 왕으로 이름을 바꾸고, 페르시아를 석권하고 바그다드 근처까지 육박했다는 정보가 로마 교황청을 통해 유럽에 퍼졌다. 환상의 구세주가 나타났다는 데 힘을 얻은 십자군은 아이유브 왕조의 수도 카이로를 공격했으나 물론 동방으로부터의 원군(援軍)은 오지 않았다. 십자군은 참패하고 말았다.
그리고 서양 세계에 동방에서 온 군단이 루시(러시아)를 향해 올라오고 있다는 새로운 소문이 퍼지기 시작했다.
(7) 진격 - 러시아 공략전
사마르칸트에서 도망친 호레즘 국왕 무하마드는 서쪽으로 달아났다. 무하마드가 도망친 것은 몽골군을 내지(內地)로 유인, 공격하려는 책략이었다는 설이 있지만 이미 때늦은 일이었다. 국왕의 추태가 호레즘 샤 왕조의 해체를 앞당겼다는 설도 있다.
이 시기에 니샤푸르에서 징기즈칸이 낭독한 선언문에는 다음과 같이 되어 있다.
"사령관, 대관, 평민들이여. 신이 동에서 서에 이르는 지상의 제국을 짐에게 준 것을 알라. 항복하는 자는 목숨은 살려 줄 것이다. 그러나 저항하는 자는 불행을 당하여 처자(妻子), 평민 모두 죽음을 면치 못할 것이다."
풍요로운 마와라 안나르를 제압한 징기즈칸은 세계 제패의 실현을 계획했는지도 모른다. 징기즈칸의 군대는 이란 서부 여러 지역을 공략하는 한편, 장군 제베와 스베테이가 군대를 이끌고 루시로 향했다. 무하마드를 쫓아간다는 것이 명목이었지만 사실은 새로운 땅을 정복하기 위한 침략 행위였다.
무하마드는 추격을 피해 카스피해 남안의 쿠르간까지 달아났다. 그러나 결국 몽골군에게 발견되어 카스피해 앞바다의 아바스쿤 섬으로 다시 탈출했으나 폐병이 악화되어 죽고 말았다. 이것이 1220년 12월의 일이다.
제베와 스베테이의 진군은 계속되었다. 몽골군은 그대로 카스피해 서안에서 북진하면서 도시들을 함락해 나갔다. 카프카스 지방을 지나 흑해 연안으로 들어간 원정군은 곧 칼카 해반(海畔)에서 루시군(軍)과 일전을 벌인다.
몽골군은 당초에 남러시아 초원에 분포하는 터키계 유목민 부족 킵차크족(族)을 정복하려는 계획도 있었는데, 킵차크족은 예전의 징기즈칸의 숙적 메르키드족과 교류하는 부족이기 때문에 제압해야 할 적이었다. 몽골군이 쳐들어오자 킵차크의 족장이며 루시와 인연이 있던 코치아는 루시측에 협력을 요청했고, 루시의 대공 게오르규는 몽골에 대항하는 동맹을 맺게 된다.
루시 제후들로 이루어진 연합군은 드네프르 강 우안(右岸)에 진을 치고 몽골군을 기다렸다. 연합군은 8만 정도였고, 이에 비해 몽골군은 훨씬 열세였다. 첫 전투에서는 연합군의 가리치 공(公)이 몽골군을 압도했다. 기세등등해진 연합군은 후퇴하는 몽골군을 추격했고, 몽골군은 연합군을 방어하면서 칼카 강 동안(東岸)까지 후퇴했다. 그러나 그것은 몽골군의 책략이었다. 몽골에 비해 기동력이 뒤떨어지는 루시군(軍)은 추격전에 지쳐 있었는데, 가루치 공은 혈기만을 믿고 칼카 강을 건너는 작전을 감행했다. 때를 기다리고 있던 몽골군은 일제히 반격에 나섰고 루시군은 꼼짝없이 격파당하고 말았다.
가루치 공의 군단과 그것을 지원한 킵차크 군대는 괴멸되었고 몽골군은 제후들을 추격하여 그들을 꼼짝 못하게 만들었다. 키에프 공, 체르니고프 공은 붙잡혔고 공전승(共戰勝)의 연회석상에서 함께 처형되었다.
칼카 강의 결전은 이렇게 막을 내렸다. 그후 원정군은 동쪽으로 전진하여 징기즈칸의 본군대와 합류하여 본국으로 돌아갔다. 루시 남쪽에 몽골군의 직접적 영향이 미치지는 않았지만, 이 패배는 루시 제후, 그리고 흑해 건너편의 비잔틴 제국을 공포에 떨게 만들었다.
상흔(傷痕)을 남기고 몽골은 이렇게 떠났다. 1227년 징기즈칸은 서하 정복전이 한창일 때 죽었는데, 그가 만든 제국과 정복에 대한 야망은 사라지지 않았다. 10년도 채 지나지 않아 서양 세계는 다시 한번 징기즈칸의 그림자에 떨게 된다.
(8) 재방문 - 유럽 침입
1236년, 루시인들이 몽골을 거의 잊어갈 무렵에 몽골은 다시 동쪽에서 왔다. 징기즈칸의 뒤를 이은 오고타이 칸의 명령하에, 죽은 징기즈칸의 장남 주치의 아들인 바투 칸이 군을 이끌었다. 이번 원정의 목적 또한 킵차크족 지배, 호레즘 잔당의 괴멸, 그리고 서양 세계의 정복이었다.
바투 원정군은 우선 가까이 있는 킵차크족을 공격했다. 유목민 집단에 불과하며 몽골처럼 군단으로서 통일되지 않은 킵차크족은 몽골군의 적수가 못 되었다. 어떤 자들은 서쪽으로 도망치고 어떤 이들은 투항하여 대부분이 몽골의 지배하에서 몽골군의 일원으로 재편성되었다.
새롭게 킵차크군을 얻게 된 바투 원정군은 그 다음으로 루시를 침공했다. 카스피해에서 북상하여 모스크바, 블라디미르 여러 도시를 장악하고 노브고로드를 위협한 후에 방향을 바꾸어 폴란드, 헝가리 방면으로 침입해 들어갔다.
겁에 질린 두 나라는 동유럽의 비잔틴 제국과 로마 교황에게 사신을 보내 구원을 요청했지만 당시 교황 그레고리우스 9세는 신성 로마 황제 프리드리히 2세와의 전쟁에 패해 그 호소에 귀를 기울이려 하지 않았다.
(9) 압도 - 발슈타트 전투
유럽의 권력자들이 방관하고 있는 동안, 몽골군 별동대는 폴란드에 침입하여 폴란드 대공은 국내가 수습되지 않은 채 이를 맞아 싸우게 되었다. 1241년 4월, 양군은 리그니츠 평원에서 대규모 전투를 벌이고 몽골군은 폴란드군을 괴멸했다. 이곳은 훗날 발슈타트라 불렸는데 독일어로 '시체의 도시'라는 뜻이다. 이는 전투 후에 시체가 많이 나왔기 때문인 듯하다. 이 전투의 규모에 대해서는 여러 의견들이 있지만, 몽골군의 가차없는 살육은 러시아인들에게 이질적인 모습으로 비쳤을 것은 확실하다.
그 무렵 바투가 이끄는 본대(本隊)는 헝가리로 향하고 있었다. 당시 헝가리 왕국의 군대는 유럽 최강으로 알려져 있었고, 국왕 베라 4세가 이끄는 헝가리군은 전력상 몽골군에 뒤지지 않았다고 한다.
헝가리의 수도 부다(현 부다페스트)로 진로를 잡은 몽골군과 헝가리 국왕군은 사요 강의 하반(河畔)에서 대치했다. 몽골군의 노궁포(弩弓砲)가 빗발치듯 쏟아져 헝가리군 내부에서는 참전한 수도원장과 국왕 사이에 균열이 생겼다. 이 혼란을 틈타 몽골군은 헝가리를 격파했다. 참패한 헝가리군은 몽골군의 추격을 받아 퇴로에는 여정 이틀에 걸쳐 시체가 흩어져 있었다고 한다.
(10) 공포의 전설 - 타타르의 멍에
유럽은 위기에 처해 있었고, 몽골군이 어디까지 공격할지는 아무도 예측할 수 없었다. 헝가리에서부터 서쪽으로 향하면 그곳은 독일, 프랑스와 평원이 이어져 있었다. 라인 강 이외에 몽골군의 진격을 저지할 요충지는 없었다. 그대로 대서양에 도달하고 마는 것이다. 바투군은 헝가리 평원의 목초 지대에 주둔하며 전진에 대비하고 있었다. 만약 몽골군이 유럽을 정복했더라면 라인 강가의 구릉지대는 목초지대로 모습을 바꿔, 훗날 유럽의 역사, 아니 세계의 역사는 완전히 달라졌을 것이다.
유럽을 구한 것은 1241년 12월의 오고타이 칸의 갑작스런 죽음이었다. 정복 명령은 본래 오고타이 칸이 내렸으므로 그것을 계속할 것인지는 대회의를 열어 결정할 문제였다. 바투 칸은 빈을 눈앞에 두고 군사를 돌려 유럽을 떠났다. 그후에 몽골군이 유럽을 공격하는 일은 없었지만, 루시 땅에서는 제후와 각 도시, 그리고 정교회(正敎會)가 몽골의 지배를 완전히 받아들여 이후 수백 년간 루시는 킵차크 한국의 지배를 받게 되었다. 이를 러시아인들은 '타타르의 멍에'라 불렀고, 이 말은 지금도 불행을 뜻한다.
몽골인들의 지배는 몽골군의 가혹함과 잔학성에 비하면 훨씬 온후한 편이어서 기독교는 보호되었고 국내의 치안은 양호했다. 하지만 그들은 러시아인으로부터 10분의 1세(稅)를 거두는 한편 그들의 노동력을 이용했는데, 거역할 경우에는 가차없이 학살했다.
러시아 제후는 이 타타르의 멍에 아래에서 단결을 결의했다. 1380년에 모스크바 대공 드미트리 돈스코이는 주위의 제후에게 킵차크한국의 지배로부터의 해방을 호소하여 크리코보 전투에서 한번 승리를 거두었다. 그러나 대군을 이끌고 역습한 킵차크한국에 패하여 모스크바는 황폐화되었고 1만 내지 2만 명의 사상자를 내었다.
결국, 러시아가 타타르의 멍에에서 탈출하려면 이반 뇌제(雷帝) 시대까지 기다려야만 했다.
(11) 몽골 제국
오늘날에 이르기까지 서양 제국에게 몽골, 그리고 징기즈칸은 파괴와 약탈의 상징으로 여겨지고 있으며, 몽골에 관한 저서들은 대부분 그들의 파괴와 약탈, 폭력과 살육만이 묘사되어 있다. 그들이 서양 세계에 던져준 공포를 생각하면 당연하겠지만, 몽골이 서양 세계에 준 또 다른 영향 ― 몽골이 동서의 교통을 활발하게 만들었다 ― 에 대해서도 간과해서는 안 될 것이다.
몽골의 지배자들은 '초원의 길'이라 전해지는 동서의 교통로에 역과 말과 숙사(宿舍)를 마련했고 그 때문에 외국 사절과 여행자들은 안전하게 여행할 수 있었다. 또한 금과 은으로 된 파이자라는 여권이 발행되어 이것이 있으면 외국인도 여행할 때 시설을 이용할 수 있었다. 이탈리아 상인 마르코 폴로가 멀리 중국을 여행하다 돌아올 수 있었던 것도 그 영향이 크다. 파이자는 현재의 러시아 영(領)에서 여러 장 발견된 바 있다.
몽골인들은 통상을 통해 얻는 이익에 대해 잘 알고 있었고, 결국은 육로뿐 아니라 해상로도 열렸다. 몽골 제국의 지배하에 통일을 회복한 중국 남부 항구에서 3층 갑판의 큰 배가 인도를 향해 항행(航行)했다. 몽골 제국의 보호하에 중국, 페르시아, 인도, 중앙 아시아, 흑해 주변에서 러시아까지를 포함한 거대한 통상 시장이 나타나 세계는 동과 서가 서로 통하게 되었던 것이다.
"······인쇄술, 항해자의 나침반, 화기(火器), 사회생활의 매우 중요한······이것들은 유럽에는 없는 것들이며 몽골의 영향에 의해 극동(極東)에서 유럽에 이입된 것이라고 나는 생각한다"라고 말한 사람도 있다.
몽골 고원의 한촌(寒村)에서 태어난 소년 테무진, 징기즈칸은 세계를 공포에 떨게 한 상징으로서, 또 한편으로는 세계를 발전으로 이끈 공로자로서 역사에 그 이름을 남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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걸리버 여행기 Gulliver's Travels / 조나단 스위프트 (Jonathan Swift)
1. 걸리버 여행기 Gulliver's Travels / 조나단 스위프트 (Jonathan Swift)
걸리버 여행기 Gulliver's Travels 개요 / 조나단 스위프트 (Jonathan Swift)
(1) 걸리버 여행기 Gulliver's Travels 개요 / 조나단 스위프트 (Jonathan Swift)
영국 작가 : 조너선 스위프트(Jonathan Swift)의 풍자소설.
저자 : 조너선 스위프트(Jonathan Swift)
국가 : 영국
장르 : 풍자 소설
발표 년도 : 1726년
《걸리버 여행기》(Gulliver's Travels)는 영국의 작가 조너선 스위프트의 1726년작 풍자 소설이다.
총 4권, 1726년 간행. 주인공 걸리버가 항해 중에 난파하여, 소인국·대인국, 하늘을 나는 섬나라, 말[馬]나라 등으로 표류해 다니면서 기이한 경험을 한다는 줄거리이다.
당시 시대의 상황을 풍자한 소설로, 오랜 시간에 걸쳐 많은 나라에서 동화로 각색되어 아이들을 위해 많이 읽혔다. 주로 동화에서는 3부까지의 여행을 수록하였으며, 4부는 신성 모독 등을 이유로 들어 삭제해왔다.
많은 사람들에게는 1부인 작은 사람들의 나라인 릴리퍼트 기행을 걸리버 여행기의 전체 내용인 것처럼 알려져 왔다. 소설의 내용을 모델로 각색하여 만들어진 영화 걸리버 여행기가 개봉하였다.
자유분방한 상상력 때문에 지금도 세계 각국에서 애독되고 있다. 특히 오늘날에는 첫 2권인 소인국과 대인국 편이 다소 고쳐져서 아동물(兒童物)로 인기를 끌고 있지만, 원래는 모두가 통렬한 인간 매도(罵倒)의 풍자적 작품으로, 그 점에서는 마지막의 말나라편이 가장 뛰어나다. 이 나라에서는 이성을 가지고 나라를 지배하는 존재가 말이며, 인간에 해당하는 야후(Yahoo)라는 동물은 말에게 사육되고 있든, 야생이든 간에 매우 추악·비열·불결하고 뻔뻔스러운 종족으로 그려져 있다. 이 작품은 과거·현재·미래와 동서고금을 통해서 적어도 인간인 이상 그것은 모조리 혐오해야 할 동물이라는 철저한 불만으로 일관되어 있다. 또한 인간증오의 정신과 비범한 착상이 결합하여 이루어진 특이한 작품이다.
한국에서는 1946년 조선아동문화협회 편집부에서 소인국편과 대인국편이 처음 번역 출간되었으며, 완역판은 1992년에 이루어졌다.
(2) Gulliver's Travels, or Travels into Several Remote Nations of the World. In Four Parts. By Lemuel Gulliver, First a Surgeon, and then a Captain of Several Ships is a 1726 prose satire by the Anglo-Irish writer and clergyman Jonathan Swift, satirising both human nature and the "travellers' tales" literary subgenre. It is Swift's best known full-length work, and a classic of English literature. Swift claimed that he wrote Gulliver's Travels "to vex the world rather than divert it".
The book was an immediate success. The English dramatist John Gay remarked "It is universally read, from the cabinet council to the nursery."[3] In 2015, Robert McCrum released his selection list of 100 best novels of all time in which Gulliver's Travels is listed as "a satirical masterpiec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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