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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린도전서 12:12-26
12. 몸은 하나인데 많은 지체가 있고 몸의 지체가 많으나 한 몸임과 같이 그리스도도 그러하니라
13. 우리가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종이나 자유자나 다 한 성령으로 세례를 받아 한 몸이 되었고 또 다 한 성령을 마시게 하셨느니라
14. 몸은 한 지체뿐 아니요 여럿이니
15. 만일 발이 이르되 나는 손이 아니니 몸에 붙지 아니하였다 할찌라도 이로 인하여 몸에 붙지 아니한 것이 아니요
16. 또 귀가 이르되 나는 눈이 아니니 몸에 붙지 아니하였다 할찌라도 이로 인하여 몸에 붙지 아니한 것이 아니니
17. 만일 온 몸이 눈이면 듣는 곳은 어디며 온 몸이 듣는 곳이면 냄새 맡는 곳은 어디뇨
18. 그러나 이제 하나님이 그 원하시는대로 지체를 각각 몸에 두셨으니
19. 만일 다 한 지체 뿐이면 몸은 어디뇨
20. 이제 지체는 많으나 몸은 하나라
21. 눈이 손더러 내가 너를 쓸데 없다 하거나 또한 머리가 발더러 내가 너를 쓸데 없다 하거나 하지 못하리라
22. 이뿐 아니라 몸의 더 약하게 보이는 지체가 도리어 요긴하고
23. 우리가 몸의 덜 귀히 여기는 그것들을 더욱 귀한 것들로 입혀 주며 우리의 아름답지 못한 지체는 더욱 아름다운 것을 얻고
24. 우리의 아름다운 지체는 요구할 것이 없으니 오직 하나님이 몸을 고르게 하여 부족한 지체에게 존귀를 더하사
25. 몸 가운데서 분쟁이 없고 오직 여러 지체가 서로 같이하여 돌아보게 하셨으니 26. 만일 한 지체가 고통을 받으면 모든 지체도 함께 고통을 받고 한 지체가 영광을 얻으면 모든 지체도 함께 즐거워하나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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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경재 목사
요즈음 우리 교회에 부쩍 아기들이 많아져서 흐뭇합니다. 아기들은 가정의 기쁨과 소망일 뿐 아니라 교회의 기쁨과 소망이기도 합니다. 아기들이 있는 곳에 웃음이 있고, 아기들의 웃음소리 들리는 곳에는 마귀가 가까이 못할 것입니다. 아기들은 하느님이 보내신 천사이기에 마귀가 두려워합니다. 전에도 한 번 소개해 드렸지만 언제 들어도 좋은 조지 라이드 아웃의 “어린이 찬사”를 다시 소개해 드리겠습니다.
하나님께서 아이를 창조하실 때 이른 아침부터 하셨다. 어둠을 물리치며 떠오르는 찬란한 아침 햇살을 바라보시고 밝아오는 하늘색으로 아기의 눈빛을 삼으셨고, 진홍빛 아침 노을로 아기의 뺨을 칠하시고, 황금빛 햇살로 비단결 머리를 만드셨다. 재잘재잘 지저귀고 속삭이는 새들의 노래를 들으시고 아기의 목소리를 삼으셨다. 때로는 부드럽고 낮은 음으로, 때로는 감미롭고 강렬한 음으로 조율하셨다.
양떼 속에서 이리저리 뛰노는 어린양들을 보시고 그 활발한 동작을 아기의 심장에 넣으셨다. 은빛 여울을 보시고 그 음악을 들으시고 아기의 웃음을 여울소리처럼 만드셨다. 사랑의 날개를 타고 성스러운 임무를 수행하려 서둘러 가는 빛나는 천사들의 모습을 보시고 순결과 사랑으로 아기의 마음을 지으셨다.
아기를 만드신 다음 세상에 내려보내 가정에 기쁨을 주시고 푸른 들판에 웃음을 주시고 가는 곳마다 즐거움을 주셨다. 아기를 가정에 보내시고 부모들에게 말씀하셨다. “나를 위해 이 아이를 양육하라.” 교회에 보내시고 말씀하셨다. “나의 사랑과 계명을 가르치라.” 나라에 보내시고 말씀하셨다. “사랑으로 대하여 주라. 나라를 위해 은총을 빌 것이며 저주하지 아니하리라.” 겨레에 보내시고 말씀하셨다. “선하게 대하여 주라. 가장 거룩한 재산이요 희망이니라.”
아기를 잉태하고 출산하고 양육하는 일은 대단히 힘들고 어려운 일이지만 그 모든 것을 보상하고 남을 만큼 그 생명의 약동이 주는 기쁨은 놀라운 것입니다. 아기가 있으면 집안이 온통 어질러지고 더렵혀지지만 그 아기의 재잘거림과 웃음소리는 너무나 큰 보상이며 은총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러나 아기가 소중하고 아름다울수록 부모의 책임은 더욱 무거워지게 마련입니다. 아기들을 어떻게 양육하느냐에 따라 그의 앞날이 좌우되기 때문입니다. 부모들은 최선을 다해 아기들을 잘 키우려고 하지만 아기 양육에 대해 미리 교육을 받은 바 없기에 나름대로 여러 정보를 수집하여 양육하여 갑니다. 따라서 가장 전문적인 지식이 필요한 아기 양육이 비전문가인 부모의 손에 맡겨질 수밖에 없습니다. 물론 아기 양육에 가장 큰 비중을 차지하는 사랑을 줄 수는 있지만, 그 사랑도 적절하게 조절되지 않으면 아기를 그릇되게 만들 수도 있습니다. 요즈음은 많은 책들이 나왔고, 인터넷을 통한 많은 정보를 얻을 수 있기에 새로 부모된 사람들도 과거에 비해 훨씬 풍부한 정보를 바탕으로 아기를 잘 키울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대체로 부모들의 관심은 아기의 건강과 총명함에 주로 집중되기 마련입니다. 아기가 조금만 크면 곧바로 조기 교육을 통해서 한글과 영어를 가르치며 피아노와 재능을 개발하는데 온 힘을 다 기울이고 있습니다. 그래서 개인적으로는 뛰어난 재능을 발휘하는 아이로 성장하게 됩니다. 이 과정에서 부족한 것은 사회성이나 공동체성의 함양입니다. 지나치게 나 중심으로 자라난 아이들이 함께 어울리고 남을 배려하며 공공질서를 존중히 여길 줄 아는 마음을 갖지 못하는데 문제가 있습니다. 협동심을 길러주고 모두가 함께 살아가는 사회임을 어려서부터 깨닫도록 가르쳐야 하는데 오늘 우리의 현실은 그렇지 못한 것 같습니다. 오늘 우리 사회의 교통질서가 잘 정착되지 못한다든지, 준법 정신이 부족하다든지, 사회 곳곳에 부정이 행해지고 있다든지 하는 것은 결국 공동체성에 대한 교육이 이루어지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봅니다.
이런 영향은 그래도 교회에도 미쳐서 개교회주의가 성행하고 연합과 일치를 이루지 못하며 교회들이 많은 분쟁에 휩싸이곤 합니다. 하느님의 나라라는 큰 공동체를 지향하는 교회가 오히려 분열과 개교회주의에 빠져 하느님 나라 건설을 훼방하는 집단으로 전락하고 있습니다. 오늘 어린이주일을 맞이하면서 우리 아이들에게 공동체의 중요성을 가르침으로 하느님 나라 건설에 참여하는 일군이 되도록 양육하여야 하겠습니다.
탈출 공동체
구약성경에 보면 이집트에서 고난 당하던 히브리였던 이스라엘 민족이 이집트를 탈출하여 약속의 땅 가나안으로 나아갔던 출애급 역사가 이스라엘 역사의 중심을 이루고 있습니다. 이렇게 보면 이스라엘 민족은 탈출 공동체로 모든 기존의 질서, 조직, 가치, 제도 등에서 탈출해 나가는 공동체임을 지시하고 있습니다.
이스라엘 자손들이 4백년 동안 살았던 이집트를 탈출할 수밖에 없었던 것은 그들이 그곳에서 노예로 고난을 당하였기 때문입니다. 다시 말해서 이집트는 하나의 거대한 국가 공동체였지만, 그 안에는 지배 공동체와 그들에 의해 고난 당하는 피지배 공동체로 나뉘어져 있었습니다. 하나의 우주적 공동체를 창조하신 하느님은 이런 공동체의 분열과 대립을 원치 않으셨습니다. 이집트의 바로로 상징되는 지배 권력은 지배와 착취를 통해서 공동체를 분열시키고 차별화하며 계급화 함으로 크게 하나되는 세계를 만드시고자 한 하느님의 뜻을 거슬렸던 것입니다. 하느님께서 모세를 보내어 히브리인들을 탈출시킨 것은 이런 인위적 공동체 벗어나서 우주적 공동체를 향하여 나가게 하시기 위함이었습니다.
우리는 좁은 땅에서 살면서 지역을 나누고 고향을 따집니다. 5?16 쿠데타 이후 지역 갈등의 골이 깊어지면서 좁은 땅에서 서로를 미워하며 살게 되었습니다. 지역 공동체 의식이 민족 공동체 의식보다 앞서기 때문에 이런 현상들이 일어나게 되었습니다. 우리는 어려서부터 알게 모르게 공동체 의식을 주입 받게 됩니다. 자기 출신 고향에 대한 공동체 의식, 혹은 자기 출신학교를 중심으로 한 공동체 의식을 갖게 되면서 그것이 우리의 삶을 얽어매고 있습니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이런 공동체 의식은 다른 지역 사람들에 대해서 배타적이고 자기 지역만을 사랑하게 되는데 문제가 있습니다. 보다 큰 민족 공동체를 이루지 못하게 하는 요인으로 작용하게 마련입니다. 지역 의식 뿐 아니라 계층의식도 큰 공동체를 방해하는 요소가 됩니다. 가진 자와 못 가진 자, 배운 자와 못 배운 자, 남자와 여자, 도시인과 농어천민들 사이에 갈등이 생기면서 계층의식이 자리잡게 되면 결국 보다 큰 국가 공동체를 지향함에 걸림돌이 되게 마련입니다. 자본주의 사회가 안고 있는 문제점이 바로 여기에 있다고 하겠습니다.
북한사회는 다른 사회와 다르게 강한 이념공동체가 되었지만, 그렇기 때문에 배타적이며 폐쇄적인 사회가 되어버렸고, 세계로부터 고립된 사회가 되어버리고 말았습니다. 경제를 중심으로 한 자본주의 사회나 이념을 중심으로 한 공산주의 사회가 다같이 극복되지 않으면 안될 많은 문제를 가지고 있습니다.
교회는 바로 이런 모든 인간적인 공동체로부터 탈출하는 출애급 공동체로 세워졌습니다. 교회는 인간들이 만드는 이념 공동체나 국가 공동체, 혹은 자연적으로 생겨나는 지역 공동체 등을 넘어서서 인간과 자연이 하느님의 통치 아래서 하나가 되는 우주 공동체를 지향하도록 명령을 받고 있습니다.
오늘 읽어 드린 고린도전서 12장 말씀에 보면,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종이나 자유인이나 다 한 성령으로 세례를 받아 한 몸이 되었다고 하였습니다. 그리고 그 몸의 머리는 그리스도라고 하였습니다. 여기서는 교회를 말하고 있지만, 이런 비유는 더욱 확대되어 하느님이 지으신 만물이 몸이 되고 그 몸의 머리는 바로 그리스도라고 골로새서에서 말씀하고 있습니다. 유대인이나 헬라인, 종이나 자유인은 당시 사회에서 하나될 수 없는 완전히 다른 공동체를 이루고 있었는데, 그리스도 안에서 이들이 모두 한 몸을 이룬다고 하였습니다.
사도 바울은 몸과 지체의 관계를 자세히 안내하고 있습니다. 몸과 지체는 떨어질 수 없는 유기적 관계를 갖고 있기 때문에 서로 협력하여 몸의 기능을 감당해 간다고 하였습니다. “지체는 많으나 몸은 하나”라고 선언함으로 삼위일체 하느님을 중심으로 그가 지으신 만물이 모두 하나의 통일된 생명체계를 이루고 있음을 교훈하고 있습니다. 사도 바울은 하느님이 지으신 모든 세계가 서로 떨어질 수 없는 유기적인 관계를 맺고 있기 때문에 나뉘거나 누가 누구를 지배하거나 착취해서는 안되며 약한 것과 강한 것 사이의 구별이 있지만 주어진 역할이 다를 뿐 적대적으로 대립하고 싸워야 할 관계가 아니라 협력할 관계임을 교훈하고 있습니다.
우리 예수를 믿는 사람들은 기본적으로 이런 하느님 나라에 대한 이해를 갖고 출발하였기 때문에 이념이나 교리나 지역 감정 등으로 이루어진 작은 공동체들의 대립과 분쟁에 끼여들어 어느 한쪽을 편들 수 없고, 우리는 그 모든 대립을 넘어서서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됨을 이루어가도록 노력하여야 할 것입니다. 그런 관점에서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지역 감정을 초월해야 하며, 좌우 이념의 대립을 극복해야하고, 나아가서 국가 의식, 혹은 민족 의식도 넘어서야 할 것입니다. 우리는 우리 정치가 안고 있는 지역 감정을 극복해야 할 것이며, 우리 사회에 스며있는 학벌주의를 없애버려야 할 것이며, 진보와 수구라는 생각의 차이를 없애고 하느님이 이루시는 역사의 관점을 가지고 문제를 해결해 가도록 노력해야 할 것입니다. 그리고 더 나아가 이념의 골로 패인 남북 간의 관계를 화해로 이끌기 위하여 기도해야 할 것입니다. 그렇다고 우리는 민족주의를 지향하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는 마침내 민족의식도 넘어서서 세계가 모두 하느님의 자녀임을 인식하면서 더불어 살아가는 세계를 지향해야 할 것입니다.
하느님 나라 교육
이런 우주 공동체인 하느님 나라를 목표로 산다는 것은 결국 이 땅의 가치를 부인하고 삼위일체 하느님을 섬기며 그 말씀을 따라 살아감을 뜻합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어린이들에게 가장 먼저 가르쳐야 할 것은 하느님입니다. 하느님이 천지를 창조하시고 인간을 창조하셔서 생명의 역사를 이루신다는 사실을 가르침이 중요할 수밖에 없습니다. 하느님을 모르고 아무리 공동체 의식을 강조한다 하더라도 그것은 결국 또 하나의 작은 공동체가 되어 다른 공동체와 경쟁과 갈등 관계를 가질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므로 우리 아이들에게 제일 먼저 사랑이 풍성하신 하느님 아버지와 우리를 구원하시는 성자 예수 그리스도, 그리고 우리 속에 영원한 생명을 믿고 나아가도록 인도하시는 성령님을 알고 믿도록 가르쳐야 할 것입니다. 어려서부터 신앙교육이 되지 않으면 결국 하느님 나라를 지향하는 하느님의 자녀가 되기가 어렵습니다.
부모들은 항상 그 아이를 위해서 기도하고 하느님의 살아 계심을 저들에게 몸으로 보여 주어야 할 것입니다. 어린이들은 어른보다 훨씬 감수성이 예민하여 어른들이 느끼지 못하는 영적 세계를 더욱 잘 체험할 수 있음을 알고 꾸준한 기도와 영적 교육을 실시하여야 할 것입니다. 우리가 아무리 많은 지식을 그에게 넣어준다 하여도 그 생명이 하느님께 기초하지 않고서는 그 모든 것이 바르게 사용되기 어려울 것입니다. 따라서 신앙교육은 모든 교육에 앞선 가장 중요한 교육입니다. 집을 지을 때 기초를 놓는 것과 같아서 신앙교육이 부실하면 결국 그 아이의 삶 전체가 부실해 질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믿는 부모들이 어려서부터 신앙교육을 시키면서도 그 목적이 순전히 개인의 건강과 지식과 발전시키기 위한 것일 경우가 많습니다. 그것은 결국 부모들이 올바른 신앙을 갖지 못하였기 때문입니다. 위에서 말씀드린 대로 “지체는 많으나 몸은 하나”라는 역사의식을 가질 때 바른 신앙교육이 가능하게 될 것입니다.
나 개인은 독립된 인격이지만 그러나 혼자서 살 수 없고 의존적으로 살도록 지음 받았음을 가르쳐야 할 것입니다. 우리는 이런 공동체 의식의 교육을 별로 중요하게 생각하지 않는 것 같습니다. 우리 몸에 지체가 많지만 그것이 서로 몸에 연결이 되어 있을 때 의미가 있지, 몸에 떨어져 나오는 순간 그 지체는 죽어버리고 만다는 사실을 가르쳐야 할 것입니다.
우리 집에 요즈음 손녀가 자기 부모와 떨어져 와 있습니다. 한 번도 그렇게 떨어졌던 일이 없었는데 약 한 달간 할아버지, 할머니와 살게 되었습니다. 이것은 그에게 새로운 경험이 될 것입니다. 그러나 그 아이에게 중요한 것은 다른 아이들과 접촉하면서 사귀는 일이라고 생각이 되어 우리 교회 어린이집에 맡기려고 합니다. 실험적으로 하루 갔는데, 역시 처음 경험이어서 자기 중심으로 행동하였다고 합니다. 그러나 계속 어린아이들과 접촉하면서 지내다 보면 공동체의식이 생겨날 것이라고 봅니다.
어려서부터 하느님을 배우게 하고 다른 사람과 더불어 살아가는 법을 알게 하며, 사회 공공질서가 있음을 깨우쳐 주고 그것을 지키는 것이 중요함을 가르쳐야 할 것입니다. 그러나 거기에 머물지 않고 공동체의 단계를 높여가면서 마침내 우주 공동체인 하느님 나라까지 가르쳐야 할 것입니다. 우리 총회 교육부가 2000년부터 『하느님 나라: 부르심과 응답』이라는 새 교과과정을 마련하고 교재를 만들어 보급하고 있습니다. 거기에 나타난 교육목적은 다음과 같습니다.
“기독교교육의 목적은 모든 세대들에게 하나님의 은혜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이룩하셨고 성령을 통해 지금도 계속 이루시는 구원의 복음을 신앙 공동체 안에서 깨달아 알고, 하느님의 말씀과 복음의 빛 안에서 가정과 교회, 이웃사회와 자연 및 세계와 바른 관계를 이루어서, 예배와 선교의 사명을 지닌 하느님의 백성으로서 삶속에서 하느님 나라와 그 의를 위해 헌신하도록 양육하고 훈련하는 것이다.”
“하느님의 말씀과 복음의 빛 안에서 가정과 교회, 이웃사회와 자연 및 세계와 바른 관계를 이룬다”는 것이 바로 우주 공동체 의식을 길러줌을 의미합니다. 그 모두가 독립된 존재이지만 동시에 유기적으로 연결되어 있는 하나의 생명체계임을 깨닫도록 가르치는 것이 기독교교육의 목적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 인간은 독립된 인격을 가졌지만 그러나 결코 혼자 살 수 있는 존재는 아닙니다. 하느님과 이웃과 자연과 더불어 함께 살아가도록 창조되었음을 깨닫게 하여 하느님을 사랑하고 이웃과 자연을 사랑할 줄 아는 사람이 되도록 양육하여야 할 것입니다. 나 개인의 욕망의 성취를 가장 큰 성공으로 생각하는 이기주의 교육은 결국 나도 너도 다함께 파멸로 나가도록 만드는 가장 나쁜 교육입니다. 교회는 복음에 기초하여 이기주의를 배격하고 하느님과 이웃과 자연을 사랑하도록 가르쳐야 할 책임이 있습니다. 하느님의 뜻을 살피고 이웃의 형편을 돌아보며 자연을 아낄 줄 아는 마음을 갖도록 교육할 책임이 교회에 있습니다.
이제 어린이가 귀하고 예쁠수록 올바른 가치관에 입각한 교육을 받을 수 있게 하여 하느님이 기뻐하시는 그의 자녀가 되게 하여야 할 것입니다. 이 어린이주일에 삼위일체 하느님의 풍성한 은총이 여러분의 자녀들과 가정 위에 늘 넘치시기를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