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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적과 싸울 때
(신 20:1-9)
서 론
우리가 살고 있는 21세기는 전쟁이 없는 시대가 아닙니다. 지금은 오히려 비행기 타기
도 겁나는 시대입니다. 왜냐하면 예전에는 폭탄이 금속이기 때문에 금속 탐지기에 걸
려서 테러의 위험을 미연에 방지했지만 이제는 플라스틱과 액체 같은 다른 재료로 만
든 폭탄이 등장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앞으로 비행기를 탈 때는 음료수를 포함한 모
든 액체 형태의 물건을 가지고 탈 수 없도록 할 수도 있다는 뉴스를 엊그제 보았습니
다. 모두 테러의 위험 때문입니다.
다니엘서 9장 26절을 보면 ‘끝까지 전쟁이 있으리니’고 기록되었습니다. 이 말씀처
럼 인류 역사가 존속하는 한 전쟁은 없어지지 않을 것입니다. 미국의 유명한 레이 스
테드먼 목사님의 글을 보면 이와 같은 일화가 소개됩니다. 한국 전쟁 때, 한 막사에
서 주둔하던 미군들이 한국인 하우스 보이 한 명을 고용했습니다. 그런데 이 하우스
보이가 아주 순진하게 생겨서 미군들이 골탕을 먹이기 시작했습니다. 난로 손잡이에
구리스라는 미끈미끈한 기름을 발라서 난로 뚜껑을 놓치게 하기도 하고, 물을 담은 물
동이를 문 위에 올려서 아침에 하우스 보이가 문을 열고 들어올 때 물벼락을 맞게 만
들기도 했습니다. 또한 구두에 못을 살짝 박아서 못이 발을 찌르도록 장난을 치기도
했습니다.
그런데 여러 달 동안 장난을 하다보니 미군들이 양심에 가책을 느끼게 되었습니다. 그
래서 어느 날 미군들이 하우스 보이를 불러서 다음과 같이 말했습니다. “우리가 지금
까지 너에게 너무 심한 장난을 한 것 같다. 우리도 양심이 찔려서 안되겠다. 이제 장
난을 그만 두겠다. 다시는 너를 괴롭히지 않겠다.” 이 말을 들은 하우스 보이가 물었
습니다. “그러면 앞으로 난로 뚜껑에 구리스를 바르거나, 물동이를 문 위에 올려놓거
나, 구두에 못 박는 짓을 하지 않겠다는 말씀이죠?” 미군들은 그렇다고 대답했습니
다. 그러자 하우스 보이가 다음과 같이 말했습니다. “그렇다면 나도 당신들이 먹는
스프에 침 뱉는 짓을 그만 두겠습니다.”
성경에는 전쟁에 관한 이야기가 많습니다. 전쟁에 관한 이야기를 가장 많이 기록하고
있는 책이 출애굽기, 신명기, 그리고 여호수아서입니다. 신명기는 전쟁에 대한 규례
를 정하고 있는 책이고, 여호수아서는 전쟁을 실천하고 있는 책입니다. 그런데 성경
이 관심을 가지고 있는 전쟁은 일반적인 전쟁이 아니고 거룩한 전쟁(Holy War)입니다.
1. 거룩한 전쟁의 개념
그렇다면 어떤 전쟁이 거룩한 전쟁일까요? 거룩한 전쟁은 몇 가지 조건을 가지고 있습
니다.
첫째로 거룩한 전쟁은 하나님께서 허락하신 전쟁입니다. 사무엘서를 보면 다윗은 언제
나 전쟁을 시작할 때 하나님께 다음과 같이 물었습니다. “하나님! 제가 올라가서 전
쟁을 하리이까?” 그 때에 하나님께서 “올라가라. 내가 너와 함께 함이니라”고 말씀
하시면 비로소 다윗은 전쟁을 수행했습니다.
둘째로 거룩한 전쟁에 참여하는 군인들은 스스로를 정결케 해야만 했습니다. 이 거룩
한 전쟁은 군인들이 군사 훈련을 하거나 많은 무기를 가지고 참여하기보다는 먼저 스
스로를 정결케 한 후에 참여하는 전쟁이었습니다. 하나님을 진노케 하는 모든 악한 일
들을 스스로 삼가야 합니다. 신명기 23장 14절을 보면 ‘이는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를 구원하시고 적군을 네게 붙이시려고 네 진중에 행하심이라 그러므로 네 진을 거
룩히 하라 그리하면 네게서 불합한 것을 보시지 않으므로 너를 떠나지 아니하시리라’
고 기록되었습니다. 일반적인 전쟁에서는 군사 훈련이나 무기가 무엇보다 중요한 요소
일 것입니다. 그러나 거룩한 전쟁에서는 군인들의 거룩성이 더 중요한 요소가 됩니
다.
셋째로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진영에 함께 하셔야 거룩한 전쟁입니다. 그런데 하나님께
서 함께 하시려면 앞의 두 가지 조건을 먼저 충족시켜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허락하시
고, 이스라엘 백성들이 거룩해야 하나님께서 함께 거하십니다. 만약 이스라엘 군대가
거룩하지도 않은데 하나님께서 함께 하시면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군대의 대적이 되어
이스라엘이 진멸당할 수도 있었습니다. 그래서 출애굽기 33장을 보면 이스라엘 백성들
이 아론과 함께 금송아지에게 우상 숭배하여 징벌을 받은 후에 하나님께서 다음과 같
이 말씀하지 않으셨습니까? “너희가 가나안 땅으로 올라가라. 나는 너희들과 같이 가
지 않겠다.” 그러자 하나님의 말씀을 들은 모세는 엎드려서 “하나님! 우리 몸에 우
상숭배에 관련된 단장품은 다 제하겠습니다. 그러니 하나님께서 우리와 함께 가주십시
오”라고 간구했습니다. 모세의 목숨 건 중보기도를 들으신 하나님께서는 비로소 출애
굽기 33장 14절을 통해 ‘여호와께서 가라사대 내가 친히 가리라 내가 너로 편케 하리
라’고 대답하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함께 가셔야 거룩한 전쟁이 될 수 있습니다.
넷째로 거룩한 전쟁은 결코 실패할 수 없는 전쟁입니다. 아무리 대적의 말과 병거가
많을지라도, 대적의 숫자가 많을지라도 두려워할 필요가 없습니다. 왜냐하면 이스라
엘 군대가 아무리 소수이고, 병력이나 병기가 부족할지라도 하나님께서 함께 계시기
때문입니다. 이스라엘을 이기려면 하나님과 먼저 싸워서 이겨야만 했습니다. 하나님
과 싸워서 이기지 못하면 이스라엘을 이길 수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함께 계시기 때문
에 이스라엘은 전쟁에서 패할 수가 없습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애굽에서
노예 되었을 때, 그들을 건져내신 하나님이십니다. 엄청난 애굽의 군대와 병거들을 홍
해에 파묻어 버리셨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애굽보다 힘이 약한 가나안의 7족들을 두려
워할 필요도 없습니다. 그들보다 더 큰 군대도 모두 쳐부수었는데 그보다 약한 군대
를 만날 때에 두려워할 필요가 있겠습니까? 거룩한 전쟁을 수행할 때에는 백성들의 거
룩성과 하나님의 임재하심이 중요하지 군인들의 숫자나 병기의 강약은 전혀 중요하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이스라엘 군대가 전쟁에 나가서 적지에 가까워지면 제사장들은 “하나님께
서 우리와 함께 계신다. 우리는 하나님의 군대다. 우리 하나님은 애굽 군대도 무찔러
주신 하나님이시다. 고로 두려워하지 말고 담대하게 나가서 싸워라. 승리는 너희의 것
이다”는 사실을 설교했습니다. 그리고 5절에 ‘유사(officers)'라고 번역된 군대의
장교들은 네 종류의 사람들을 골라내서 집으로 돌려보냈습니다. 첫째로 집을 건축하
고 아직 준공식을 하지 못한 사람, 둘째로 포도원을 건축하고 첫 열매를 먹어보지 못
한 사람, 셋째로 약혼을 했지만 그 여자를 취하지 못한 사람, 넷째로 전쟁이 무서워
서 두려워 떠는 사람입니다. 아무리 군대의 수가 작아도 하나님께서 함께 하시면 반드
시 승리하기 때문에 두려움으로 부대를 전염시킬 사람은 차라리 돌려보내도 아무런 문
제가 되지 않는 것입니다.
사사기 7장 7절을 보면 사사 기드온이 미디안과 전쟁을 시작하는 장면이 기록되었습니
다. 처음 군대를 모았을 때, 그 숫자가 32,000명이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31,700
명을 모두 돌려보내시고 오직 삼백명의 용사들을 통해서 미디안과의 전쟁을 승리로 이
끄셨습니다. 이것이 거룩한 전쟁의 특징입니다.
마지막으로 10절 이하에 기록된 바처럼 거룩한 전쟁은 절차가 규정되어 있습니다. 전
쟁을 시작하기 전에 먼저 평화를 선언해야 합니다. 만약 상대가 평화를 수락하면 죽이
거나 약탈하는 일이 없이 그 나라를 속국으로 삼고 조공을 받으면 됩니다. 그러나 상
대가 평화를 수락하지 않고 전쟁을 시작하면 쳐들어가서 그들을 죽여야 합니다. 죽이
되 가나안 밖에 있는 성읍에서는 남자들만 죽이고 여자와 유아는 살려둬야 했습니다.
반면에 가나안 안의 성읍들에 있는 남자와 여자와 유아와 짐승과 육축은 가리지 말고
모두 진멸해야 했습니다. 그 이유가 무엇일까요? 가나안 안에 있는 사람들은 우상을
숭배하는 사람들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이스라엘 백성들을 우상으로 오염시킬 가
능성이 있기 때문에 모두 진멸하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또한 전쟁이 끝난 후에는 나무를 마구 착벌하지 말라고 명하셨습니다. 나무를 잘 보존
하면 거기에 열매가 맺혀서 이스라엘 백성들의 양식이 되기 때문입니다. 이와 같은 내
용까지도 자세하게 규정해 놓은 것이 전쟁의 절차입니다. 이것이 신명기 20장전체의
내용입니다.
결국 하나님께서는 거룩한 전쟁을 통해 가나안 족속들을 진멸하라고 명령하셨습니다.
오늘날 우리는 기독교의 개념을 사랑으로 알고 있습니다. 그런데 사랑의 하나님께서
어떻게 이런 잔인한 명령을 내릴 수 있었을까 궁금하게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만, 하나
님의 목적은 “나는 너희의 하나님이 되고 너희는 내 백성이 될 것이다. 내가 약속한
거룩한 땅에서 모든 우상을 몰아내고 너희는 거룩한 백성으로서 가나안 땅에서 존속하
라”는 것이었습니다. 가나안 땅에서 쫓겨나지 말고 그 땅에서 계속 터를 잡고 거룩하
게 살라는 말씀입니다. 이것은 대단히 중요합니다. 왜냐하면 이스라엘 백성들이 가나
안 땅에 터를 잡고 살아야 그 땅에 그리스도 예수님께서 오실 것이고, 인류 구원의 계
획이 올바르게 진행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이 거룩한 전쟁
을 허락하신 것입니다.
2. 거룩한 전쟁의 잘못된 적용
하나님의 말씀은 바르게 이해하는 것(right understanding)도 중요하지만 우리의 삶
에 바르게 적용하는 것(right application)이 더 중요합니다. 유감스럽게도 인류 역사
는 거룩한 전쟁이라는 이름으로 피비린내 나는 악한 전쟁을 많이 수행했습니다. 악한
전쟁을 하면서도 그것을 신명기 20장의 거룩한 전쟁이라고 불러왔습니다.
그 대표적인 전쟁이 바로 ‘십자군 전쟁’입니다. 오늘날 기독교와 회교도 간에 갈등
이 심한데, 그 근원은 십자군 전쟁입니다. 십자군 전쟁은 회교도들이 동로마의 수도
인 콘스탄티노플을 약탈하고 기독교의 성지인 예루살렘을 장악하자 교황 우르반 2세
가 어려운 내치에 대한 관심을 밖으로 돌리기 위해 1095년에 일으킨 전쟁입니다. 우르
반 2세는 1095년 프랑스의 클레르몽에서 다음과 같이 연설을 하였습니다. “여러분!
이 전쟁은 거룩한 전쟁입니다. 하나님께서 이 전쟁에 함께 하십니다. 여러분이 이 전
쟁에 참여하면 완전한 면죄부를 얻을 수 있습니다. 여러분이 이 전쟁에 참여하다가 전
사하면 연옥을 거칠 것도 없이 즉각 천국에 올라가게 됩니다.” 이 연설을 들은 많은
평민들이 전쟁에 참여하기 시작했습니다. 봉건제도 하에 평생 한 곳에서 살아 이름도
없이 직업을 이름삼아 살고 있었던 평민들이 일어나서 1095년에 십자군 전쟁이 일어나
게 된 것입니다. 군사 훈련도 안 된 오합지졸 군사들로 이루어진 십자군이 1099년에
가까스로 예루살렘을 탈환했습니다. 십자군들은 그 당시에 예루살렘에 살고 있던 40만
명의 회교도들 중 36만명을 예수의 이름으로 처단하는 살육을 벌였습니다. 이와 같은
만행을 저지르고도 십자군들은 ‘예루살렘의 골목길은 피로 강을 이루었다’고 자랑스
럽게 떠들기까지 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지금까지도 기독교와 회교간의 갈등은 끊이
지 않고 계속되고 있는 것입니다. 지금도 회교도들은 기독교 국가를 향해서 테러를
할 때마다 ‘너희 조상이 우리 조상을 엄청나게 살육하지 않았느냐? 우리가 하는 일
은 새 발의 피다’라는 태도를 가지고 있습니다.
1차 십자군 전쟁에서는 승리를 거뒀지만 결국 90년 뒤인 1,181년에 애굽의 살라딘이라
고 하는 회교 지도자에 의해 예루살렘은 다시 회교도들의 차지가 되었습니다. 1095년
에 시작되어 1291년까지 200년 동안 무려 여덟 번이나 계속된 십자군 전쟁은 단 한 번
을 제외하고는 모두 패배하는 결과를 낳았습니다. 십자군 전쟁은 오늘 본문이 말하는
거룩한 전쟁이 아닙니다. 왜냐하면 거룩한 전쟁에는 패배가 있을 수 없기 때문입니
다. 십자군 전쟁은 여덟 번 중에 일곱 번을 패했으니 이것은 거룩한 전쟁이 아닌 것
이 분명합니다. 오히려 십자군 전쟁은 기독교가 회개해야 할 아주 근본적인 제목입니
다.
또한 제2차 세계대전을 일으킨 독일의 나치스 아돌프 히틀러는 2차 세계대전을 ‘하나
님의 특별한 보호 아래 있는 하나님의 전쟁(God's War under God's special
protection)’이라고 불렀습니다. 히틀러는 성경을 마음대로 변경시켜 만든 히틀러 성
경 10만부를 발간해서 ‘나의 투쟁’이라고 하는 자신의 자서전과 함께 전국 교회에
나누어 주고 그것을 읽게 했습니다. 이 히틀러 성경의 제목은 ‘하나님이 함께 하시
는 독일’이었습니다. 또한 어떤 독일 군인들은 헬멧 뒤에 ‘우리와 함께 하는 하나
님’이라는 문구를 새기고 다니기도 했습니다.
이런 독일군들이 유대인을 6백만이나 학살하는 대참사를 일으켰다는 사실은 역사의 아
이러니입니다. 하나님의 이름으로, 예수님의 이름으로 십자가를 내걸고 저지른 어처구
니없는 인간의 죄악입니다. 신명기 20장을 모독하는 참으로 말도 안 되는 죄악인 것입
니다.
한편 오늘날 이스라엘의 북쪽에는 크기가 충청북도만하고 인구도 3백만이 채 안되는
레바논이라고 하는 나라가 있습니다. 원래 레바논에는 기독교 인구와 회교 인구가 균
등하게 균형을 이루면서 살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팔레스타인 해방기구(PLO)가 레바
논 남쪽에 정착하면서 레바논의 회교도의 숫자가 늘어났고, 균형이 깨진 레바논에는
내전이 빈번하게 발생하게 되었습니다.
이 레바논에 정착한 테러집단 중에 헤즈볼라라고 하는 집단이 있습니다. 헤즈볼라는
강경파인 시아파 회교도들이 ‘회교로 통일하자’라는 기치를 내걸고 이란에서 처음
시작한 무장단체입니다. ‘헤즈볼라’라는 말의 의미는 ‘신의 정당, 하나님의 정당’
입니다. 이 헤즈볼라는 1983년도에 레바논 베이루트에 소재한 미국 해병대 사령부에
폭탄을 가득 실은 트럭으로 자살공격을 감행하여 241명을 사살하는 테러를 일으키기
도 했습니다. 이 헤즈볼라는 현재 레바논에서는 국회의원 12명을 배출한 레바논 두 번
째 정당으로 성장하였습니다. 이번에도 헤즈볼라가 이스라엘 군인들을 납치해서 또 전
쟁이 일어나지 않았습니까? 회교도들도, 유대인들도 ‘거룩한 전쟁’이라는 명분으로
계속해서 전쟁을 수행하고 있습니다. 인류는 여전히 하나님의 이름을 내걸고 못된 전
쟁을 계속 수행하고 있는 것입니다.
3. 거룩한 전쟁의 올바른 적용
신명기가 명령하고 여호수아서가 실행하는 거룩한 전쟁은 과연 오늘날 어떻게 적용되
는 것일까요? 신명기 20장의 말씀대로 하나님의 교회가 뭉쳐서 여호와 하나님을 인정
하지 않는 나라에 선전포고를 하고 이를 받아들이지 않으면 쳐들어가서 진멸하는 문자
적인 적용을 해야 할까요? 만약 그렇다면 기독교는 인류의 재앙이 될 것이고 목사는
전범자가 될 것입니다.
구약성서는 하나님의 말씀이지만 실체가 아닌 그림자입니다. 구약성서는 실체가 되는
신약성경의 빛에 비추어서 해석하고 적용해야 합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이 말씀을 바
르게 이해하기 위해서는 하나님의 왕국(Kingdom of God)이 무엇인지 바르게 이해해야
합니다. 구약시대의 하나님의 왕국은 물리적인 왕국(Physical kingdom)입니다. 이스라
엘 나라 자체를 의미합니다. 따라서 이스라엘이 수행하는 전쟁이 거룩한 전쟁이 됩니
다.
그러나 신약시대의 하나님의 왕국은 영적인 왕국(Spiritual kingdom)입니다. 하나님
을 왕으로 삼는 하나님의 백성들로 구성된 나라이기 때문에 유대인과 이방인 간의 민
족차별이 모두 철폐되었습니다. 유대인이나 레바논인이나 상관없이 하나님 왕국의 백
성이 될 수 있습니다. 따라서 신명기 20장의 실체는 영적인 하나님의 나라가 영적인
전쟁을 수행하는 것입니다. 21세기에 거룩한 전쟁을 하겠다고 물리적인 수단과 총칼
과 방법을 동원하는 것은 시대착오적인 발상이자 어처구니없는 적용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신명기 20장을 영적으로 적용해야 합니다. 하나님 나라는 영적인 나
라이며, 거룩한 전쟁은 영적인 전쟁입니다. 사도 바울은 에베소서 6장 12절을 통해
이 점을 분명히 하였습니다. ‘우리의 씨름은 혈과 육에 대한 것이 아니요 정사와 권
세와 이 어두움의 세상 주관자들과 하늘에 있는 악의 영들에게 대함이라.’
악의 영과의 전쟁에는 세 가지 국면이 있습니다. 첫째는 내 안에 있는 죄와의 전쟁입
니다. 이것은 영적 전쟁의 대내전입니다. 악한 영은 우리의 죄성을 자꾸 부추깁니다.
“술 먹어라. 바람 펴라. 도적질해라. 거짓말해라. 쾌락을 즐기면서 살아라.” 이러
한 유혹에 넘어가서 ‘딱 한 번만, 딱 한 잔만’ 하다보면 거기에 코 꿰어서 인생을
망치게 됩니다. 따라서 우리는 내 안에 있는 죄성과의 전쟁에서 먼저 승리해야 합니
다.
둘째는 밖에서 역사하는 악한 영들과의 전쟁입니다. 악한 영들은 악한 소리와 악한 사
상과 악한 신학과 악한 철학을 만들어내서 사람들을 유혹합니다. 우리가 치른 한국 전
쟁은 단순히 동족과 동족간의 전쟁이 아닙니다. 한국 전쟁은 자유 민주주의라는 사상
과 사단이 만들어낸 공산주의 사상과의 사상적인 싸움입니다. 그러므로 우리 그리스도
인들은 외부에서 역사하는 악한 영들과 싸워야 합니다. 이것이 영적 전쟁의 대외전입
니다.
셋째로 사회의 구조를 장악해서 부패를 일으키는 구조악과도 싸워야 합니다. 최근에
판사와 검사 등 사회의 정의를 실현해야 할 사람들이 줄줄이 구속되지 않았습니까? 그
런데 이 분들이 구속되면서 하는 말이 “왜 나만 죄가 되느냐? 똑같은 일을 한 다른
사람들은 왜 구속하지 않느냐?”는 것이었습니다. 이것은 이 사회가 구조적인 악을 안
고 있다는 사실을 잘 보여주는 단면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구조악은 한 두 사람이 거
기 끼지 않는다고 해서 없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그러므로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끊임
없이 구조악과 싸워야 합니다. 노예 제도가 폐지되는데도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습
니까? 우리는 계속해서 싸워야 합니다.
결 론
신앙생활은 육적 전쟁의 삶이 아닙니다. 그러므로 우리 성도들은 혈과 육의 전쟁은 피
할 필요가 있습니다. 제가 어떤 사람에게 이런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자기가 학교 다
닐 때 태권도를 배웠습니다. 열심히 수련을 해서 2단이 되었는데 자기를 가르치는 사
범은 태권도가 무려 9단이었다고 합니다. 태권도로 치면 그 지역에서 최고의 사람이었
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함께 길을 가다가 정신이상자가 몽둥이를 들고 싸움을 걸며
욕을 하는 것을 보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이 사람은 한 번 싸워보자고 마음을 먹고 자
세를 잡은 후에 자기 사범님은 어떻게 하는지 보았습니다. 그런데 자기 사범님은 벌
써 도망을 가고 그 자리에 없었습니다. 이 사람은 그 자리에서 정말 잘 싸우는 사람
은 아무 곳에서나 싸우지 않는다는 사실을 한 수 배웠다고 합니다. 우리는 혈과 육에
속한 육적인 무기와 수단을 가지고 걸어오는 전쟁은 피해야 합니다.
그러나 우리가 도망가서는 안 될 전쟁이 있습니다. 바로 영적인 전쟁입니다. 신앙생활
의 본질은 영적 전쟁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이 전쟁을 수행하라고 이미 명령하셨습니
다. 이것은 총과 칼과 숫자와 병기로 이기는 전쟁이 아닙니다. 이 전쟁은 우리의 거룩
성으로 싸우는 전쟁입니다. 우리가 거룩할 때에 이기는 전쟁입니다. 성도들은 신명기
20장을 통해서 어떻게 하면 내 안에 거룩성을 이룰 것인지 생각해야 합니다. 거룩성
을 이루고 세상을 향해 담대히 나가면 하나님께서 우리 가운데 임재하셔서 반드시 영
적인 전쟁에서 승리하게 하십니다.
마음에 공허함과 슬픔을 가진 분이 계십니까? 집 안에 원인도 모르게 갖가지 재앙이
임하는 분이 계십니까? 그러면 이것이 영적인 싸움임을 깨달으시고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담대히 나가 싸우시는 여러분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하나님께서 함께 하실
수 없는 모든 거짓과 비열함과 야비함과 사기와 악독과 시기와 다툼과 미움을 버리시
고 여러분 안에 거룩성을 이루십시오. 거룩함에서 나오는 담대함과 용기를 가지고 나
가서 싸우면 우리의 싸움이 백전백승이 될 줄로 믿습니다.
로마서 8장 33-37절을 결론으로 오늘 말씀을 맺겠습니다. ‘누가 능히 하나님의 택하
신 자들을 송사하리요 의롭다 하신 이는 하나님이시니 누가 정죄하리요 죽으실 뿐아니
라 다시 살아나신 이는 그리스도 예수시니 그는 하나님 우편에 계신 자요 우리를 위하
여 간구하시는 자시니라 누가 우리를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끊으리요 환난이나 곤고나
핍박이나 기근이나 적신이나 위험이나 칼이랴 기록된바 우리가 종일 주를 위하여 죽임
을 당케 되며 도살할 양 같이 여김을 받았나이다 함과 같으니라 그러나 이 모든 일에
우리를 사랑하시는 이로 말미암아 우리가 넉넉히 이기느니라.’ 우리는 모든 악한 영
과의 싸움에서 가까스로 이기는 것이 아니라 넉넉히 이기게 될 것입니다. 가정을 훼파
하고, 교회를 혼돈케 하며, 사회를 어지럽히는 악한 영들의 역사와 싸우십시오. 기도
로, 믿음으로, 거룩함으로 담대하게 싸워 이기는 성도님들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
로 축원합니다.
[피영민목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