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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창조주가 선물한 세상 원문보기 글쓴이: 박종태목사
[어린이주일] 우상으로 섬기지 마라 (창 22:1-18)
I. 말씀을 향하여
독일 베르린 거리에서 한 낯선 외국인이 길거리에서 뭔가를 열심히 주워 부대에 넣곤 했습니다. 그 행동을 수상히 여긴 경찰관이 그 사람을 파출소로 연행하여 부대안에 있는 것을 다 쏟아놓게 했습니다. 부대 속에서는 쭈빗 쭈빗 깨어진 유리조각들과 철사 못들이 쏟아져 나왔습니다. 놀란 경찰관이 "이따위 것들을 왜 모으고 다니느냐"고 물었습니다. 그 사람이 대답을 했습니다. "나는 스위스에서 여행차 독일을 방문한 사람입니다. 거리마다 위험한 유리조각과 못이 행여 철없이 뛰어 노는 어린아이들을 다치게 하지는 않을까 염려가 되어 그냥 지나칠 수가 없었습니다." 그가 바로 스위스의 유명한 교육학자 요한 페스탈로치 선생이었습니다.
독일 거리에 흩어져 있는 유리조각들처럼 오늘 우리주변에 아이들의 영혼을 찌르는 유리조각들이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우리시대는 과거 그 어느때 보다도 유리조각을 줍는 페스탈로치의 마음이 필요한 시대를 살아가고 있습니다. 우리가 준비하지 아니하면 마귀가 준비합니다. 우리가 아이들의 교육을 계획하고 기도하지 아니하면 사탄이 거리마다 유리조각을 흩어 우리 아이들의 영혼을 상하게 할 것입니다.
아이들이 우스개 소리로 하는 바퀴벌레 속담이 있습니다.
멀쩡한 사람 피한 바퀴벌레 술 취한 사람에게 밟힌다는 얘기입니다.
위험들이 온 세상에 널려져 있다는 얘기지요.
II. 교육위기
혹자들은 우리시대를 유혹의 지뢰밭과도 같다고 말했습니다. 우리의 자녀들이 태어나서 대학을 졸업할 때까지 무려 35만번 이상이나 되는 유해한 T.V.상품 선전을 보고 듣고 5만번 이상의 사기사건, 소식을 듣게 된답니다.
아이들이 본 요즘 세상 - 가짜 물건 팔았더니 가짜 돈 받게 되더랍니다. 뿐만 아니라 3만번 이상의 강간사건, 2만번 이상의 살인사건 소식을 접하게 된다고 합니다.
저는 우리 아이들을 바라보며 가련하다는 생각과 함께 안타까움을 느낄 때가 많습니다. 저희들이 어릴때 진달래 먹고 물장구 치고 칡뿌리 캐서 먹고, 시냇가에서 미꾸라지 잡으며 멱감던 시절을 생각하면 컴퓨터 전자기나 뿅뿅거리고 노는 우리 아이들이 불쌍한 생각마저 들었습니다.
특히나 우리집 앞에는 몇 아름드리 소나무 참나무들이 하늘을 찌르고 있었습니다. 저는 어릴 때 그 높은 나무를 보고 자랐습니다. 그 높은 나무에 오르고 바라보며 높은 꿈을 꾸고 살았습니다. 그런데 우리주변에는 높은 나무가 없습니다. 맑은 물도 없습니다. 그 가운데서도 다행스러운 것은 우리 신도시 환경이 아이들에게 꿈을 주려고 노력한 흔적들이 있어서 이런 맑고 신선한 환경속에서 자랐던 우리의 자녀들이 다음 세대를 이끌어 주지나 아니할까 기대감이 있긴 합니다.
일반적으로 이상이 없고 꿈이 없단 말입니다. 요즘 아이들 곁에는 존경할 만한 사람이 없고 따를 만한 인격적 모델이 없고 신문을 펼쳐도 맑은 구석이 없습니다. 그래서 훌륭한 사람이 되라는 말은 많이 듣게 되지만 그 말은 곧 다른 사람을 끄집어 내려서라도 1 등을 하고 유능한 사람이 되라는 말로 아이들에게 전달되어 집니다.
유능한 사람은 되었는데 인격형성이 제대로 안되었기 때문에 출세하면 부정을 저질러서라도 돈을 벌어야 하고, 다른 사람의 눈물을 흘려서라도 피를 빨아서라도 내 배만 채우려고 합니다. 날마다 신문에 새롭게 등장하는 추한 모습의 기성 세대를 보면서 우리 아이들에게 어디를 보고 살라고 가르쳐야 한단 말입니까?
언젠가 신문 외국통신란에 재미있는 기사가 한토막 실렸습니다. 캘빈 쿨리지 고등학교에 다니는 딸아이를 둔 바렌시아 여사는 학교담임교사와 필립스교장이 자기 딸의 성적을 실력보다 더 좋게 평가했다는 이유로 학교당국을 교육감에게 고발했다는 기사였습니다.
자기 딸아이의 실력은 D학점 정도인데 학교에서는 A학점 혹은 B학점으로 성적을 평가하여 부모로 하여금 아이의 성적을 바로 이해하지 못하게 했고, 학생이 자기실력 이상으로 평점을 받아 학생으로 하여금 자기를 바로 이해하지 못하게 했다는 죄 몫으로 고발을 한 것입니다. 그리고 계속되는 고발장에서 바렌시아 어머니는 "나는 아이에게서 정도를 바랄 뿐이지 요행이나 기적을 바라지 않는다"고 말했습니다.
우리 속담 가운데 "모로 가도 서울만 가면 된다"는 못된 속담이 있습니다. 이제는 우리 아이들에게 이 속담을 바꾸어서 가르쳐야 합니다. "사랑하는 자녀들아, 서울은 못가도 좋다. 정도를 가야 하느니라. 시대가 다 썩어도 역사를 거슬러서라도 바른 길을 가야 하느니라."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에게 발렌시아 여사의 이야기는 신선한 충격으로까지 들려졌습니다. 인생은 요술이 아니고 예술입니다. 요행이 좋은 인간되는 것 아니고 요술에 의하여 바람직한 인간이 만들어지는 것 아닙니다. 한 예술가가 부단히 노력하고 힘쓰고 애써서 멋진 작품을 만들어 내듯이 오랜 세월 우리가 기도하고 힘쓰고 애쓸 때만이 바람직한 한 인간이 만들어 질 수 있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는 우리의 자녀들에게 희망을 가져도 좋은가? 우리 자녀들의 장래를 믿어도 좋은가? 어떻게 그 아이들의 장래를 우리가 보장해 줄 수 있는가? 자못 우리의 고민이 아닐 수 없습니다. 교육보험을 들면 아이들의 교육문제를 보장 할 수 있습니까? 생명보험 들었다고 이 험한 시대를 살아가는 아이들의 생명을 보장 할 수 있습니까?
들은 얘기긴 합니다만 두 부부가 한사람은 회사를, 한사람은 큰 가게를 경영하여 부유하게 사는 한 집이 있었다고 합니다. 서로 바쁘게 생활하다보니 고등학교 다니는 자녀들에게 별로 신경을 쓰지 못했던 모양입니다. 그러던 어느날 집안에 있던 패물을 몽땅 도둑맞고 말았습니다. 며칠 후 범인을 잡았다는 연락이 왔습니다. 경찰서에 가보니 그 범인은 바로 자기의 아들이었습니다. 경찰서에서 나오긴 했습니다만 며칠 뒤 아이는 친구들과 어울려 패싸움을 하다가 그만 칼에 찔려 죽었다고 합니다.
스페인 속담에 "청소년을 키워보지 않은 사람과는 인생을 논하지 말라"는 말이 있습니다.
이 시대에 고개숙인 아버지들, 걱정하는 어머니들, 방황하는 아이들. 그러나 오늘 본문의 당당한 한 아버지의 모습속에서 그리고 한 어린 자녀의 맑고 깨끗한 영혼속에서 한줄기 어둠을 꿰 뚫는 희망의 빛을 만나게 됩니다. 그가 바로 오늘 본문의 주인공 아브라함과 이삭입니다.
III. 본문
오늘 본문의 아브라함은 유대민족의 조상입니다. 그는 오랫동안 자녀가 없어서 고독한 삶을 살게 됩니다. 어느날 여종 하갈의 몸을 빌려 이스마엘이라는 아들을 얻게 됩니다. 그후 그가 백살쯤 되었을 때, 약속의 아들 이삭을 얻게 되었습니다. 이스마엘은 육정의 아들이었고, 이삭은 약속의 기업, 약속의 상급이었습니다. 이스마엘은 아브라함의 수치가 되었고, 이삭은 축복이 되었습니다.
그러나 이 이삭도 축복의 아들이 되기까지는 시험이 있었습니다. 이삭이 열다섯살쯤 되었을 때에 하나님은 아브라함에게 특별한 지시를 합니다. 아들 이삭을 모리아 산으로 데리고 가서 그를 잡아 번제로 드리라고 하는 것이었습니다. 아브라함은 짐승대신 아들을 잡아 번제로 드리라는 하나님의 명령이 불합리하고 이해가 되지 않았지만 즉시 순종합니다.
모리아 산에 올라가 이삭을 묶어 놓고 칼로 내리 치려는 순간 하나님의 음성이 들렸습니다. "아브라함아 아브라함아 그 아이에게 네 손을 대지 말라. 아무 일도 그에게 하지 말라. 네가 네 아들 네 독자라도 내게 아끼지 아니하였으니 내가 이제야 네가 하나님을 경외하는 줄을 아노라" (창22:12)
그리고 계속하여 아버지 아브라함과 아들 이삭을 축복하십니다.
"네가 이같이 행하여 네 아들 네 독자를 아끼지 아니하였은즉 내가 네게 큰 복을 주고 네 씨로 크게 성하여 하늘의 별과 같고 바닷가의 모래와 같게 하리니 네 씨가 그 대적의 문을 얻으리라. 또 네 씨로 말미암아 천하만민이 복을 얻으리니 이는 네가 나의 말을 준행하였음이니라" (창22:16-18)
우리는 여기 아브라함과 이삭의 사건을 보면서 한 가지 중요한 사실을 발견하게 됩니다.
어떻게 하면 우리의 자녀들이 우리 가정의 복이 될 수 있는 것인가?
어떻게 하면 우리의 기업이 복된 기업이 될 수 있는가?
어떻게 하면 우리 가정이 하나님 앞에 복이 될 수 있는가? 하는 비결이 여기에 있습니다. 한마디로 "우상으로 섬기지 말라"는 것입니다.
IV. 아들을 결박하라
자식을 우상으로 만들지 않기 위해 우리는 무엇을 해야 합니까?
첫째, 아들 이삭을 결박하라는 것입니다.
그때 그 아들이 복된 아들이 된다는 것입니다. 결박이란 꽁꽁 묶는 사건인데 우리는 우리 자녀들을 묶는 끈은 노끈이나 나이롱 끈이 아닙니다. 믿음으로 결박하고 말씀으로 결박하여 제물로 드릴 때 이 아이들이 여호와의 주신 기업이 되고 그의 상급이 되는 것입니다.
아브라함이 아들 이삭을 결박한 장소가 어디입니까? 모리아 산이었습니다. 역대하 3장 1절을 보면 모리아 산은 솔로몬이 성전을 지은 터라고 말합니다. 예루살렘 성전터가 바로 모리아 산입니다. 우리의 자녀들을 이 성전에, 교회에 결박하라고 말씀하십니다. 북한 땅에서 하나님을 버렸습니다. 공산주의는 교회를 버렸습니다. 그러나 결국 그들이 버림을 받고 말았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문설주에 손과 이마에 그리고 소매 끝과 눈썹에 신명기 6장 4절 '쉐마'라고 하는 하나님 말씀을 붙이고 다녔습니다. 여호와 하나님을 사랑하라는 말씀이었습니다. 그들은 고백하고 살아갔습니다. "나는 하나님의 율법에 결박당하여 살아간다." "우리는 하나님께 결박당한 민족이다." "우리 가정은 말씀 결박당한 가정이다." 그 때에 하나님께서 그 민족을 그 가정을 그 백성을 축복하셨습니다.
지브란이란 사람의 [자녀교육]이란 시가 있습니다.
"너희들의 아이란 너희 것이 아니다. 저들은 너희를 거쳐 왔으나 너희로부터 온 것이 아니니라. 저들은 너희와 함께 있으나 너희에게 속하지 않았다. 너희는 저들에게 너희의 사랑을 줄 수 있으나 너희의 사상을 강요할 수는 없다. 너희는 활, 저들은 화살, 궁수는 하나님 한 분. 그러니 과녁을 세우시는 분은 오직 하나님 한 분이시니라."
사랑하는 내 자녀들이 어디를 향하여 날아갈 때에 성공적인 삶을 살 수 있을 것인가? 어디에 가서 어떤 과녁에 맞혀질 때에 그들의 삶이 행복할 수 있을 것인가? 오직 하나님의 계획에 가서 맞춰져야 된다. 우리의 소중한 자녀들이 하나님 한분을 향하여 날아가야 한다는 것을 선언하고 있습니다.
여러분들의 가정에 자녀들이 때로 여러분의 마음에 들지 않을 때도 있을 것입니다. 고통으로 몸부림할 때도 있을 것입니다. 남몰래 밤을 지새우며 울어야 할 때도 있을 것입니다. 여러분이 도무지 이해가 안되고 용납이 안되고 납득이 안되는 순간 순간을 만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기억하십시오. 이 땅에 태어난 그 누구도 오발탄 없다. 그 자식을 향한 하나님의 분명한 계획이 있고 목적이 있고 경륜이 있음을 믿으십시오. 인생의 매뉴얼을 만드신 분은 하나님이십니다. 그 자식을 이 땅에 보낼 때 설계도를 함께 보내 주신 분이 하나님이십니다. 반드시 하나님은 그 설계를 이루고야 말 것입니다.
V. 아들을 번제로 드리라
둘째, 결박했으면 아들 이삭을 번제로 드리라는 것입니다.
이스마엘은 욕정의 아들이라고 내 쫓았고 이삭만이 약속의 아들이라고 말씀하시더니, 이제는 그 아들마저 죽이라는 것입니다. 왜요? 아들을 향한 하나님의 본심을 알라는 것입니다. 그 아들 이삭이 너의 아들이 아니고 나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것을 알라는 것입니다.
번제라는 것은 우선 조각 조각 쪼개야 됩니다. 이것을 다 불에 태워서 온전히 향기가 되어서 하나님앞에 드려도록 하는 제사가 번제제사입니다. 그래서 온전히 바친다고 하여 온전제사라 이름하고 불로 깨끗이 태운다고 해서 화제라 이름하는 것입니다. 그 자식 내 생명 우리가정의 기업 삶의 환경 터전 50%는 내 것이고 50%는 하나님의 것 아닙니다. 100% 하나님의 것이다. 이것이 번제제사가 우리에게 가르쳐 주시는 교훈입니다.
사실 이삭은 낳을 때부터 하나님이 개입하여 낳은 아들입니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과 사라에게 자식을 주겠다고 약속해 놓고 25년을 기다리게 합니다. 사라는 경도가 끝나고 아브라함은 남자구실이 끝나는 그 시점에서 아들 이삭을 주신 것입니다. "이 아들은 네가 낳을 수 있어서 낳은 아들이 아니다. 하나님이 주셔서 낳은 아들이다" 이 말입니다. 우리의 자녀들 가운데 하나님이 주시지 않은 아들이 누구입니까?
제가 고등학교 다닐 때 무주구천동에서 오신 교장선생님이 늘 하시던 말씀이 있습니다. "구약은 할머니가 애기 낳는 얘기고, 신약은 처녀가 애기 낳는 얘기다. 그래서 성경은 생명의 주인은 하나님임을 가르치고 불가능을 가능케 하는 능력이다"라고 말씀 하셨습니다.
이삭을 번제로 드리라는 얘기는 우리의 자녀들이 나의 자녀임을 포기하고 하나님의 자녀임을 깨끗이 인정하라는 것입니다. 왜요? 그래야 우리의 소중한 자식들이 우상이 되지 않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오늘을 살아가는 현대인들에게 무서운 한 가지 사실은 가정에서 자녀를 사랑하는 것이 지나쳐 우상화되고 있다는 것입니다. 사무엘상에 보면 엘리제사장이 자녀들에게 무분별한 사랑으로 가르칠 것을 바로 가르치지 못하여 패가 망신하는 이야기가 나옵니다.
상록상을 받은 풀무원에 원경선 선생님이 제가 다녔던 학교의 이사장 이신데 그 분은 주례를 설 때마다 하시는 말씀이 있습니다. "아내들이여, 남편을 뜨겁게 사랑하십시오. 그러나 하나님보다 더 사랑하지는 마십시오. 남편들이여, 아내를 생명처럼 사랑하십시오. 그러나 하나님보다 더 사랑하면 아니 됩니다."
그렇습니다. "아비나 어미를 나보다 더 사랑하는 자도 내게 합당치 아니하고 아들이나 딸을 나보다 더 사랑하는 자도 내게 합당치 아니하고 자녀를 하나님보다 더 사랑하는 것은 자녀를 더욱 불행하게 만드는 것이니라." 성경은 그렇게 가르칩니다.
아무리 소중한 자녀라 할지라도 아무리 중요한 기업이라 할지라도 아무리 소중한 남편, 아내라고 할지라도 복된 기업이 되어야지, 우상이 되어서는 안 된다고 말씀하십니다. 이것이 바로 번제 사건이 우리에게 주는 교훈입니다.
우리는 우상이라고 할때 부처상, 동구밖 정자나무, 부적 따위들을 생각합니다. 그러나 성경에서 우상이란 하나님보다 우선하는 것, 하나님보다 사랑하는 것, 하나님보다 더 큰 관심이나 가치를 부여하는 모든 것을 말합니다.
우리가 만약 하나님만이 채우실 수 있는 인생의 목적이나 행복을 어떤 사람이나 사물로부터 기대하거나 구하고 있다면 그것이 바로 우상입니다. 우리의 아내나 남편, 자식이나 기업 무엇이든지 우상이 될 수 있습니다. 우리의 자녀들이 우리의 우상이 될 때 그것은 자식을 사랑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 소중한 자식이라 할지라도 그것이 우상이 될 때 하나님은 그것을 번제로 드리라 말씀하십니다. 번제로 드리지 못할 때 하나님이 빼앗아 가십니다. 하나님은 영광을 누구에게도 빼앗기지 않으십니다. 그래서 때로 온갖 기대를 품고 길렀던 자식이 세상으로 돌아갈 때가 있고 부모의 원수거리가 되기도 하는 겁니다. 그러므로 너의 이삭을 번제로 드리라는 것입니다.
VI. 우상으로 조각하지 마라
셋째, 아들을 결박하여 번제로 드리라 말씀하신 하나님께서 이제는 그 아들에게 손을 대지 말라 말씀하십니다. 우상으로 조각하지 말라는 겁니다.
우리는 흔히 자식을 잘 교육하려고 할 때에 내 입맛에 맞도록 조각해 가는 것을 교육이라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어떤 가정이 불행한 가정이 되는지 아십니까?
결혼 하자마자 자신의 아내를 자기 구미에 맞게끔 조각해 가려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때부터 불행을 싹트고 꽃피고 열매로 맺혀지게 되는 것입니다. 남편을 잔소리하고 바가지 긇어서 내 구미와 내 취향에 맞게끔 조각하려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때부터 가정은 불행해 지기 시작하는 것입니다.
"아브라함아 아브라함아 그 아이에게 네 손을 대지 말라" 이제는 네 아들이 아니니 손대지 말라는 것입니다. 우리는 내 생각으로 우리의 아이들에게 손을 댈 때가 있습니다. 내 계획대로 만들어 보려고 하고, 내 욕심대로 빚어 보려고 합니다. 아이의 미래를 내 손으로 요리해 보고자 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렇게 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그렇게 하는 것은 자식을 우상으로 새기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계획이 있고 하나님이 책임질 것입니다.
그런데 아이들이 조금 똑똑해 보인다고 교만할 게 어디 있습니까? 조금 못나 보인다고 낙심할 것도 없습니다. 우리가 우리의 자녀들에게 관심을 가지고 기도하고 함께 염려하고 얘를 쓰는 것은 나무랄 일이 아니고 마땅한 일이요 아름다운 일입니다. 그러나 아이들의 미래를 내가 어찌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이 하실 것입니다. 억지로 빚지 마십시요. 하나님이 만들어 주신 그 모습 그대로 격려하고 사랑할 때 하나님의 멋진 작품이 만들어져 갈 것입니다.
저는 고등학교 학창시절 모범생이 되지 못했습니다. 개구쟁이 가운데서도 개구쟁이 였습니다. 친구와 함께 장난을 하다가 내 한쪽 손과 친구의 발이 엉겨서 교무실 창문을 깼고 내 손이 찟겨져서 피가 흘렀습니다. 교무실에서 훈육주임 선생님이 달려 나오시더니 감히 교무실 옆에서 어떤 놈이 장난치냐면서 박달나무로 머리를 내려치는데 머리가 두 개로 나누어 지는 줄 알았습니다.
그때 지금은 목사님이 되신 국어 선생님이 달려 나오시더니 손수건으로 피 흐르는 내 손바닥을 감싸시면서 그 선생님을 향하여 호되게 나무라는 것입니다. "깨어진 유리조각은 당신 눈에 보이고 찟겨진 아이의 손은 보이지 않소." 저는 그때 신앙적으로 몹시 방황하고 있을 때였습니다. 내 손을 덮은 선생님의 손수건은 하나님의 사랑의 손수건으로 여겨졌고 꼭 품에 안아주시는 선생님의 품은 예수님의 사랑의 품으로 느껴졌습니다.
내 신앙의 방황은 거기서 끝났고 접어두었던 성경책을 펼쳐들기 시작하였고 원망했던 하나님을 향하여 감사와 찬송을 하기 시작했고 내 인생의 미래를 그 분과 의논하기 시작하여 오늘의 나를 이루어 갈 수 있었습니다.
저는 8살 어린나이에 아버지를 여의고 홀어머니 밑에서 자랐습니다. 재산이 넉넉하거나 좋은 환경에서 산 것도 아니었습니다. 그러나 이만큼 어른이 되기까지 하나님이 저를 먹이고 입히고 키워 주셨습니다. 물론 저희 어머니께서도 때로는 농사를 짓고 때로는 행상을 하시며 저를 키우느라 온갖 고생을 하셨지요. 저도 어릴 때부터 고학생활을 하며 남다른 고생도 해 보았습니다. 그러나 어머니나 나의 고생이 오늘의 나를 만든 것은 분명 아니었습니다. 돌이켜 보면 전적으로 하나님의 은혜였습니다. 나를 향한 하나님의 계획이 있었고 여기에 오기까지 하나님의 사랑과 역사가 있었습니다.
인간이 손댈 수 없는 곳에 하나님이 손을 대십니다. 아버지 어머니가 미치지 않는 그곳에 하나님께서 그 아이를 붙들고 어루만져 주십니다. 아니 하나님이 손대야 할 곳에 인간이 손을 댐으로 하나님의 계획을 오히려 무너뜨릴 수가 있습니다.
하나님을 믿으십시오! 하나님께 맡기십시오! 부지런히 물주고 기도하고 사랑하며 내 할 일만 하십시오. 하나님이 그 아이를 빚어 만들 것입니다. [그 아이를 우상으로 새기지 말라] 그래야 복된 자녀가 될 수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 어떤 훌륭한 예술가가 항아리를 빚어 만들고 있는데 내가 가서 뭘 좀 도와드리겠다고 손을 대는 순간 그 항아리는 찌그러지고 그 작품은 망가지고 말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빚겠다. 어루만져 작품만들겠다. 말씀하십니다. 주여 전능한 손에 맡깁니다. 하나님께서 빚어 만들어 주실 줄로 믿습니다. 우리의 자녀들을 주님의 전폭적인 능력의 손에 맡겨드립니다. 할렐루야!
VII. 다시 돌려 받으라
넷째, 끝으로 아이를 하나님께 바치고 다시 돌려 받을 때 그 아이가 진정 복된 자녀가 될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 드려야 할 것을 내가 움켜쥐고 있을 때 그것이 바로 우상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 드리고 되돌려 받으면 축복이 됩니다. 이삭은 하나님께서 축복의 씨로 주신 아들이었습니다 그런데 이 아들을 바치면 하나님의 약속은 어떻게 되는가? 이 모순된 명령속에서 아브라함은 심각한 갈등과 고민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때 아브라함은 결단합니다. '약속도 하나님의 약속이요, 명령도 하나님의 명령이다. 그렇다면 하나님께선 그 다음도 책임지신다.' 하나님께서 책임지시는 길은 하나밖에 없습니다. 다시 살아나는 길 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아브라함은 지금까지 듣지도 보지도 못했던 부활신앙을 믿게 되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을 히브리서 기자는 이렇게 주석하고 있습니다.
"아브라함은 하나님이 능히 죽은자 가운데서 다시 살리실 줄로 생각한지라 비유컨데 죽은자 가운데서 도로 받은 것이니라"(히11:9) 돌려 받을 때 비로소 복된 자녀가 됩니다.
오늘 본문 창세기 22장 5절에 보면 아브라함은 확실히 말합니다. "내가 아이와 함께 저기 가서 경배하고 너희에게로 돌아오리라" 개역 성경에는 주어가 빠져 있어서 분명치 않습니다. 그러나 개역 개정판에 보면 "돌아오리라" 올라 갈 때도 복수로 되어 있습니다. 영어 성경에 보면 We, "우리"라고 하는 주어가 있습니다. 원문에도 "우리가" 돌아오리라고 되어 있습니다.
"내가 아이와 함께 저기 가서 경배하고 우리가 너희에게로 돌아오리라" 둘이 산에 올라가서 하나를 죽이고 또 둘이 돌아 오겠는 겁니다. 성경상 처음으로 부활을 신뢰하는 신앙. 이 얼마나 놀라운 믿음입니까? 이는 자녀뿐만 아니고 사업도 마찬가지고 교회를 섬기는 일도 마찬가지고 만사가 마찬가지의 이치입니다.
하나님앞에 송두리채 바치고 다시 돌려 받는 신비를 알아야 합니다. 재물을 바친 다음에 하나님으로부터 다시 받은 재물이 축복의 재물입니다. 자녀를 하나님께 바친 다음 다시 돌려 받을 때 그 아이가 축복의 자녀가 되었습니다.
그때 주시는 축복의 말씀을 들어보십시오.
"내가 이제야 네가 하나님을 경외하는 줄을 아노라. 네 독자를 아끼지 아니하였은즉 내가 네게 큰 복을 주고 네 씨로 크게 성하여 하늘의 별과 같고 바닷가의 모래와 같게 하리니 네 씨가 그 대적의 문을 얻으리라. 또 네 씨로 말미암아 천하 만민이 복을 얻으리니 이는 네가 나의 말을 준행하였음이니라" 할렐루야!
VIII. 말씀을 맺으며
아브라함이 아들 이삭을 결박하여 번제로 드린 다음 다시 돌려 받는 그토록 장엄했던 모습을 아들 이삭은 평생을 기억하며 살았을 것입니다. 시시때때로 인생에 시련이 올 수 있고 아픔이 올 수 있고 고난이 올 수 있지요. 그러나 문제가 있을 때마다 당당함으로 믿음으로 말씀으로 기도로 해결했던 장엄했던 우리 아버지! 인자했던 우리 어머니! 우리 자녀들 가슴과 삶과 신앙에 장엄한 인상을 남기지 아니하겠습니까?
영국 런던에 있는 대형박물관에는 강철같이 단단한 돌 하나가 있는데 거기에는 작은 새들의 발자국이 새겨져 있답니다. 필경 그 단단한 돌이 언젠가는 작은 새가 디뎌도 발자국이 날 정도로 물렁 물렁 했었다는 증거지요. 그토록 물렁했던 물체가 오랜 세월이 흐르는 동안 저토록 강철같이 단단한 돌이 된 것입니다. 저토록 단단한 돌이 된 후로는 어린새가 아니라 점보같이 큰 코끼리가 밟아도 자국은 커녕 흠집도 나지 않습니다.
어린이나 청소년의 마음은 굳어지기 이전의 물렁 물렁한 것과 같습니다. 어떤 자국을 남기느냐에 따라서 어떤 영혼 어떤 인간이 될 것인가? 어떤 존재가 될 것인가? 결정되어지는 것입니다.
존 로크의 '타브라 라자' 심의 백지설이라고 하는 교육학 이론이 있습니다. '어린아이 마음은 백지장과 같다'고 하는 것입니다.
거기에 어떤 그림을 그리느냐에 따라서 인생의 미래가 결정된다고 하는 것이지요. 아이들의 심령의 밭이 굳어지기 전에, 내게 맡겨주신 복된 기업들의 영혼이 굳어지기 전에, 사탄이 험악한 자국을 남기기 전에, 사탄이 어린아이들의 영혼속에 잘못된 가치관을 남기기 전에,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그의 사랑의 자국을 남겨야 되지 않겠습니까? 그 자국이 그 아이들의 생애를 이끌어 줄 것입니다.
여러분이 앉은 그 자리가 모리아산 언덕입니다. 아브라함이 사랑하는 자식 이삭을 모리아산 언덕에 올려놓았던 것처럼 이 시간 우리의 자식을 하나님 앞에 올려드리십시다. 여러분의 배우자와 여러분의 가정을 주님 앞에 올려드리십시다. 상처난 여러분의 환경과 기업들을 주님 앞에 올려드리십시다. 주님의 보혈의 피로 상처난 자국들을 깨끗케 해 주실 것입니다. 약속하십시다. 모든 것이 주께로부터 왔음에 주님의 것임을 고백합니다. 주께서 주신 것이니 주께서 이루어 가시옵소서. 100% 하나님의 것입니다. 우상으로 섬기지 않겠습니다. 축복으로 섬기기를 원합니다. 주여 아브라함 앞에 이삭을 되돌려 주셨듯이 하나님 우리에게 되돌려 주시옵소서. 모든 것에 부활의 신앙을 부활의 신비를 가르쳐 주시옵소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