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제부처들이 경기도 과천청사에 포진했던 1992년, 행정고시에 합격한 뒤 사무관 생활 15년 만에 과장이 된 공무원이 자신이 겪은 공직생활 애환을 책으로 펴냈다. 이름하여 ‘과천 종합청사 불빛은 꺼지지 않는다’란 책이었다. ‘젊은 경제 관료들의 열정과 고뇌’라는 부제를 붙였다.
저자인 이철환 전 금융정보분석원장은 글로벌 경제동향을 수집 분석하고 대책을 세우는 한편 정책을 기획 수립 집행하느라 야근을 밥 먹듯 하는 공무원 일상을 리얼하게 소개했다. 1~9급의 일반공무원 직급 중 가운데인 5급에 해당하는 “사무관이 왜 사무관으로 불리는지 아느냐”며 “사무(私務=개인의 사사로운 일)는 전혀 볼 수 없고, 사무(事務=맡은 직책에 관련된 여러 일을 처리함)에만 몰두해야 하기 때문”이라는 우스개 답을 곁들였다.
그는 당시 ‘경제기획원(현 기획재정부) 청사에 불이 꺼지지 않는 한 한국 경제의 장래는 밝다’라는 세간의 평가가 있는가하면 “‘하루 25시간’을 뛰는데도 때로는 ‘당신, 뭐하는 사람이냐’는 소리를 듣는다”고 고충을 토로했다.
과천청사에 불빛 꺼지지 않던 시절
물론 경제기획원 직원들만 열심히 일한 것은 아니었다. 필리핀 오지에서 가난한 원주민의 삶을 돕는 봉사활동을 하다가 지난달 말 별세한 박운서 전 통상산업부(현 산업통상자원부) 차관은 열혈 통상협상 전문가로 꼽힌다. 1983년 옛 상공부 통상진흥국장 시절 도쿄에서 일본과 무역협상을 벌이면서 재떨이를 깨뜨릴 정도로 격론을 벌였다.
호랑이가 포효하는 듯한 표정의 그를 보고 일본 언론이 붙여준 별명이 ‘타이거(Tiger) 박’이다. 공교롭게도 국제 통상규범에 어긋나는 일본의 반도체 소재 수출규제 등으로 한일간 경제전쟁이 벌어진 시기에 대일 협상장을 주무르던 '타이거 박'이 세상을 떠났다.
한국 정부가 일본의 경제보복에 대응할 수단을 찾느라 분주한데 일찍이 세금 분야에선 일본을 극복(克日)한 사례가 있다. 1965년 한일국교 정상화와 함께 일본 기업의 한국 진출이 늘어났고, 이들 기업들이 한국에서 거둔 이익(사업소득)에 대한 과세방식이 논란이 됐던 1990년대 일이다.
한국은 유엔(UN)식 ‘총괄주의’(일본 기업의 한국 수출액 모두에 과세하되 원가를 일부 인정)를 내세웠고, 일본은 경제협력개발기구(OECD)식 ‘귀속주의’(일본 기업 한국지점이 판매한 금액만 과세)로 맞선 끝에 결국 한국에 유리한 총괄주의 방식을 택했다. 그리고 일본 기업에 대한 세무조사도 원칙대로 했다.
미쓰비시 등 내로라하는 기업들을 조사하면서 그들이 건네는 ‘물 한 모금’ 마시지 않았다. 좌고우면하지 않고 당시로선 거액인 수백억원 세금을 부과했다. 원칙에 입각한 깐깐한 세무조사 과정에 탄복한 일본 기업 책임자가 당시 국세청 조사팀장 고(故) 이병연 서기관에 대해 자국 신문에 '한국에도 이렇게 올곧은 공무원이 있다'라며 ‘독일 병정’이라고 소개했다.
한국과 일본이 세계무역기구(WTO)에서 벌이고 있는 무역분쟁 6건 중 마무리된 3건 모두 한국이 승리한 것도 관련 부처 직원들이 열심히 뛴 결과다. 2004년 일본의 김 수입 쿼터제 철폐와 2006년 하이닉스 D램에 대한 상계관세 부과 모두 부당한 것으로 결론 났다.
관료사회 나라사랑 DNA 깨워야
특히 후쿠시마 주변지역 수산물 수입금지 조치와 관련해선 1심에서 패했다가 지난 4월 최종심에서 예상을 뒤엎고 역전승했다. 이 때 일본에 어퍼컷을 넣은 주인공은 30대 예비신부 고성민 산업통상부 사무관이었다.
알다시피 국가의 3요소는 국민 영토 주권이고, 국가와 정부는 국민을 보호하기 위해 존재한다. 국가의 장래가 어떨지를 가늠하는데 있어 정부의 역할은 여전히 막중하다. 그리고 정부가 제대로 기능하느냐의 열쇠는 공무원들이 쥐고 있다.
누구는 공무원에게 영혼이 없다고 한다. ‘복지부동(伏地不動)’에 이어 엎드려 눈만 굴린다는 ‘복지안동(眼動)’, 낙지처럼 펄 속에 숨는다는 ‘낙지부동’ 등 관료사회의 무사안일과 보신주의를 꼬집는 말도 많다. 그런 가운데에서도 과거 과천청사를 밝힌 불빛과 ‘타이거 박’ ‘독일 병정’ 유전자는 내려온다.
일선 공무원들의 잠재된 나라사랑 DNA와 영혼을 깨우려면 장관·차관 등 정무직이 정책 비전과 리더십을 갖춰야 한다. 이는 비단 내각 경제팀에 국한되지 않는다. 외교안보 리스크가 무역전쟁, 기술전쟁, 환율전쟁으로 번지는 자국이익우선주의 시대다. 대통령이 내 편, 네 편 가리지 않고 인물을 찾아 부처 지휘봉을 맡겨야 한다. ‘캠코더’(대선캠프, 코드, 더불어민주당 출신) 인선에 좁은 인재풀의 회전문 인사로는 공직사회를 깨우기도, 바꾸기도 어렵다.
아울러 청와대 비서실을 줄이고 내각에 힘을 실어주어야 한다. 대통령이 국정현안을 놓고 청와대 수석보좌관회의대신 국무회의에서 장관들과 열띤 토론을 하는 것도 긴요하다. “관료가 말을 안 듣는다”라는 뒷담화 이전에 분명한 정책 비전과 적재적소 인사로 공무원들을 움직이게 하는 것이 정권의 실력이다.
※ 이 글은 2019년 8월 20일 발간된 석간 내일신문 23면 오피니언 페이지 '양재찬 칼럼'에 쓴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