투이호아에서 온 편지(9)
흑인 MP가 새겨 놓은 ELIZA를 만지작거리던 허동준은 빨리 화홍의 집을 찾아야겠다는 마음이 들어서 엣 기억을 더듬어 걸음을 재촉했다. 검문소에서 큰길을 따라 북쪽 퀴논 쪽으로 2km즘 가다가 왼쪽으로 갈라지는 길이 있고 거기서 논밭 사이로 난, 자동차 한 대가 갈 수 있는 정도의 길을 따라 들어가면 큰 나무들 사이에 집들이 듬성듬성 있었는데, 그 몇 집을 지나면 화홍의 집이 있었던 것으로 기억된다.
거기는 시골이니까 씨클로를 불러 탈 수도 없고 택시도 없고 지나가는 차도 별로 없었다. 동준은 구경삼아 천천히 걸었다. 걷다 보니까 어느새 왼쪽 숲속 마을로 들어가는 갈랫길이 나타났다. 자연스레 그쪽으로 진입하게 되었다. 마을 어귀에 들어서니 바나나 밭에서 일하는 남자들이 보였다. 예전엔 없던 큰 바나나 밭이 생겼다. 그 옆에는 드넓은 고무나무 밭도 생겼다. 고무나무들이 울창하게 줄지어 도열하고 있었다. 보기가 좋았다. 동준이 일하는 사람들에게로 다가가서 옛 기억을 더듬어서 약간 아는 월남어로 말을 걸었다.
“또이, 따이한….”
그러고는 말문이 막혔다. 영어를 해 봤다.
“I want to meet Hoa hong.”
이랬는데 그 말이 통한 건지 어쩐 건지 한 사람이 허리를 펴고 바라보다가 천천히 다가오고 있었다. 계속 이상하다는 표정을 지으며 다가왔다. 동준이 어벙벙하여 서 있는데 그 사람은 뭔가 이상하다는 표정을 하다가,
“싸진 허?…. 또이 깐!”
이랬다.
“어? 깐상?”
이러고 둘이 너무 기가 막힌 표정을 하고 있는데, 그 광경을 계속 바라보고 있던 또 한 사람이 잰 걸음으로 다가오며 소리쳤다.
“허 빙장! 헹님! 또이 뚜엉….
뚜엉은 몇 십 년 만에 친형을 만난 것처럼 달려와서 동준을 껴안으며 난리쳤다. 깐상도 매우 감개무량한 듯이 와락 달려들어 눈물까지 흘리며 반가워했다. 셋은 말은 잘 안 통하지만 그 기쁨만은 한가지였다. 깐상은 나이가 50대일 텐데 벌써 늙은이 티가 났다. 뚜엉도 이미 40대이니 중년 티기 났다. 참 너무 반가워서 말이 안 나왔다.
밭에서 함께 일하던 젊은이도 불러내어서 인사시켰다. 화홍의 아들이라는 것이었다. 동준은 정신이 아뜩하고 가슴이 콱 막히는 것 같아서 잠시 숨이 멈추는 듯했다. 나이 스물은 됐을 그 청년은 월남인 같지 않고 중국인이나 한국인 같이 생겼다. 말은 안 하고 허리만 숙여 인사하고는 동준을 유심히 바라봤다. 그와 눈동자가 마주쳤을 때 동준은 또 한 번 현기증이 났다. 틀림없이 한국인이었다. 동준은 가슴이 떨려서 그를 더 바라볼 수가 없었다.
무한한 자책감에 그 자리를 벗어나서 도망치고 싶었다. 그는 화홍을 딱 한번 범한 일이 있었기 때문이다. 의도적으로 한 짓이 아니지만 허 병장은 그때의 그 일이 항상 가슴 속에서 응어리로 뭉클거렸다. 화홍의 아들을 보는 순간 그 응어리가 가슴 전체를 압박하며 숨이 막혔다.
* * *
허 병장이 화홍을 범한 것은 그것이 의도적이 아니었기 때문에 더욱 기억이 생생한지도 모른다.
허 병장이 어느 날 검문소에서 오전 근무를 마치고 귀대하여 점심을 먹고 쉬고 있는데 파견대장 황 상사가 사무실에서 불렀다.
“허 병장, 쉴 시간이 없군. 닌호아에 좀 다녀와야 되겠어. 참모부에서 연락이 왔는데, 외출 나갔던 군인이 그 마을 베트콩에게 당한 것 같아. 조사계 서 병장이 다른 사건 조사를 나가서 그러는데, 우리더러 조사해서 보고하라는 거야. 백차 가지고 가지 말고 내 차로 다녀와. 운전병한테 운전하라고 하고. 권총에 실탄 확실히 장전하고 가.”
황 상사가 메모를 건네며 말하였다. 메모를 보니 친구 지순명 부대 근처였다. 잘 됐다. 얼른 조사 보고 끝내고 친구 만나면 되겠다.
닌호아로 가서 메모지에 적힌 장소로 찾아갔다. 맹호 마크의 군인 셋이 기다리고 있었다. 소위 한 명과 사병 두 명이었다. 소위는 먼저 지순명을 만나러 갔을 때에 만났던 소대장이었다.
“단결! 참모님 지시 받고 사고 조사 나왔습니다.”
소위에게 거수경례하고 경위를 물었다. 소대장은 무엇이 못마땅한지 표정이 굳어 있었다. 좀 늦은 것 때문에 기분이 좋지 않은가? 소대장 대신 옆에 있던 병장 하나가 경위를 설명했다.
PX에 수시로 가서 사다가 친하게 지내는 민가에 숨겨두었던 물건들을 몰래 팔아 보려고 다니다가, 그 낌새를 알고 뒤를 밟던 월남인 청년에게 잡혀서 격투가 벌어졌고, 힘에 부친 그 청년이 권총으로 쏘고 도망쳤다는 것이었다. 동네 사람들은 낮에는 아군이고 밤에는 베트콩이니까 그도 베트콩일 것이라고 했다. 어떻게 하든지 돈을 만들어 가지고 귀국하려는 한국군들….
허 병장은 죽은 군인을 확인하기 위하여, 판초우의로 덮어 놓은 시신 옆으로 가면서, 조서를 꾸미기 위한 메모 용지와 펜을 꺼내며 물었다.
“이름과 계급이 뭔가요?”
소대장이 갑자기 허 병장의 앞을 가로막으며 소리쳤다.
“동작 그만!”
허 병장은 기분이 나쁘면서도 의아해서 행동을 멈췄다. 이와 동시에, 지금까지 설명을 하던 병장이 소리치듯 말했다.아니?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