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시대 명문장가
(삼걸三傑 · 사군자四君子 · 팔문장八文章 · 구대가九大家)
□ 집현전 8대 문장가
신숙주, 최항, 이석형, 박팽년, 성삼문, 유성원, 이개, 하위지
世宗이 처음으로 集賢殿을 설치하고 학문하는 선비들을 맞아들였는데, 신숙주·최항·이석형·박팽년·성삼문·유성원·이개·하위지와 같은 사람들이 있어 모두 한때 이름을 떨쳤다. 성삼문의 문장은 호방하고 구애됨이 없으나 시는 잘하지 못했다. 하위지는 대책문이나 소장에는 능하나 시를 알지 못했다. 유성원은 천재로 숙성했으나 지식이 넓지 못했다. 이개의 글은 맑고 총명해 뛰어났으며 시도 정절했다. 선비들은 모두 박팽년이 집대성했다고 추앙했는데 그는 경술·문장·필법을 모두 잘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모두 주살당해서 저술한 것이 세상에 드러나지 않는다. 최항은 사륙문체에 능하고, 이석형은 과문에 능숙했다. 신숙주는 문장과 도덕이 한 시대의 존경을 받았다. 『용재총화』
□ 산림삼걸(山林三傑) : 김시습, 남효온, 송익필
□ 관각삼걸(館閣三傑) : 정사룡, 노수신, 황정욱
* 산림삼걸과 관각삼걸은 모두 남용익의 호곡시화에서 언급된 명단.
□ 송도삼절(松都三絶) : 최립, 차천로, 한호
황진이는 박연폭포와 화담선생 그리고 자신을 송도삼절이라고 했으니, 자부심이 이와 같이 높았다. 그 후 동고 최립의 문장과 오산 차천로의 시 그리고 석봉 한호의 글씨가 세상에 나란히 뛰어나서, 또 그것을 삼절이라고 했다. 어찌하여 송도에만 유독 뛰어난 것들이 많았을까? 『서포만필』
5. 삼당시인(三唐詩人) : 이달, 백광훈, 최경창
만당풍의 당시를 읊어 삼당시인이라 불렸다고 한다.
6. 월상계택(月象溪澤) : 이정귀, 신흠, 장유, 이식
당시에 또 상촌(象村), 월사(月沙), 계곡(溪谷), 택당(澤堂)이 있었는데, 세상에서 '상월계택(象月溪澤)'이라 일컬었다 상촌의 글은 단련하고 깨끗하게 씻어내어 명말청초(明末淸初)의 문기(文氣)가 있었고 월사의 문장은 아로새기고 채색하는 데 힘을 기울이지 않았지만 문장을 짓는 것이 순조롭고 익숙해서 말하고자 하는 바를 다할 뿐이었다. 논하는 이들이 또 말하기를 “계곡은 타고난 재주가 넉넉하고 택당은 인위적인 솜씨가 뛰어나다.”라고 하였으니, 각기 그 잘하는 바가 있는 것이다. 『운양속집』
7. 팔문장(八文章) : 호출된 시기마다 명단이 달라졌다.
1-1 : 이산해, 최립, 최경창, 백광홍, 이순인, 윤탁연, 송익필, 이이
이순인은 젊었을 적에 이산해·최립·최경창·백광홍·윤탁연·송익필, 이이(李珥)와 벗이 되어 ‘팔문장(八文章)’이라고 일컬어졌다.
『선조수정실록』 17년 2월 1일 5번째 기사
1-2 : 이산해, 최립, 최경창, 백광홍, 이순인, 윤탁연, 송익필, 하응림
송익필은 처음에 시명(詩名)이 있어 이산해·최경창·백광홍·최립·이순인·윤탁연·하응림 등과 함께 팔문장(八文章)으로 불리었다. 『선조수정실록』 22년 12월 1일 11번째 기사
1-3 : 이산해, 최립, 최경창, 백광훈, 이순인, 윤탁연, 송익필, 하응림
(옥봉은) 일찌기 큰 이름을 얻었고, 고죽 최경창(崔慶昌), 손곡 이달(李達), 구봉(龜峯) 송익필, 이산해(李山海), 최립(崔岦), 이순인(李純), 윤탁인(尹卓仁), 하응림(河應臨)과 함께 한때 화려하게 꽃을 피웠다. 이들을 사걸(四傑)이라 일컫기도 하고, 혹은 팔문장(八文章)이라고 말한다. 『옥봉별집』 묘갈문
훗날 송자대전에서도 백광홍 대신 백광훈을 팔문장에 넣었다. 반면 유몽인의 어우집에서는 최립, 이산해, 고경명 등을 팔문장으로 언급하였다. 그러나 전체 명단을 제시하지는 않았다. 한편 오상(吳祥)은 동시대의 또다른 인물들을 팔문장으로 꼽았다.
2 : 김주金澍, 이이李珥, 민기閔箕, 정유길鄭惟吉, 임수林洙, 이량李樑, 심수경沈守慶
이후 18세기에는 오달운(吳達運)이 새로운 팔문장 명단을 언급하였다.
3-1: 오원, 이천보, 남유용, 황경원, 김원행, 원경순, 원경하, 남유상
반면 이규상(李圭象)은 오달운과는 다른 팔문장 명단을 제시하였다.
3-2: 오원, 이천보, 남유용, 황경원, 이덕수, 조최수, 조귀명, 임상원
당시에 세상에서 '팔문장(八文章)'이라고 사람을 지목했으니, 오원(吳瑗)·이천보(李天輔)·남유용(南有容)·황경원(黃景源)·이덕수(李德壽)·조최수(趙最壽)·조귀명(趙龜命)·임상원(林象元)이 그들이다. 『일몽고』 병세재언록
8. 사군자(四君子) : 최립, 장유, 이식, 김창협
『사군자문초』는 간이 최 공, 계곡 장 문충공, 택당 이 문정공, 농암 김 문간공의 문장 중에서 뽑은 것이다. (···) 저 사군자는 빼어나고 특별한 자질로 창대하고 융성한 시대를 만나 무너진 풍속을 여유롭게 진작시켰다. (···) 아! 사군자의 문장이 참으로 옛 작가들과 완전히 합치되지는 않겠지만, 우리나라의 한유·유종원·구양수·증공이 되기에는 충분할 것이다. 『사군자문초』 서문
9. 영조조 사가(英祖朝 四家) : 오원, 이천보, 남유용, 황경원
당시에 동촌파로서는 오월곡의 문이 가장 원숙하였으나 여운이 부족했으며, 재분이 높기 로는 이진암이 제일에 해당되나 시와 문에 있어 모두 지은 것이 많지 않고 맥락이 어그러 진 경우가 많았다. 남뇌연은 문이 굳세고 예스러웠으나 지나치게 얽매인 편이었다. 오직 예스런 뜻이 넘쳐서 거침없이 나아가는 것은 황강한 한 사람뿐이다. 『일몽고』 병세재언록
10. 백탑청연(白塔淸緣) : 박지원, 이덕무, 이서구, 서상수, 유금, 유득공, 박제가, 이희경
한양을 빙 두른 성곽의 중앙에 탑이 있다. 멀리서 바라보면 마치 눈 속에서 죽순이 삐죽이 나온 듯한데, 그곳이 바로 원각사의 옛 터다. 지난 무자년과 기축년 사이, 내가 18~19살 때쯤 박지원 선생이 문장에 조예가 깊어서 당대에 이름이 높다는 소문을 듣고, 탑의 북쪽으로 선생을 찾아뵈러 갔다.
(···) 당시 형암 이덕무의 사립문이 그 북쪽에 마주 대하고 있었고, 낙서 이서구의 사랑이 그 서쪽에 우뚝 솟아 있었다. 또한 수십 걸음 가다 보면 관재 서상수의 서재가 있고, 북동쪽으로 꺾어져서는 유금과 유득공이 살고 있었다. 그래서 한번 그곳을 찾아가면 집에 돌아가는 것을 까마득히 잊고 열흘이고 한달이고 머물러 지냈다. 곧잘 서로 지어 읽은 글들이 한 질의 책을 만들 정도가 되었고, 술과 음식을 구하며 꼬박 밤을 새우곤 했다.
(···) 벗 이희경이 박지원 선생과 이덕무 그리고 여러 사람들과 나의 글을 베껴 몇 권의 책을 만들었다. 내가 그곳에 '백탑에서의 맑은 인연' 이라는 뜻을 담아 『백탑청연집』이라고 제목을 붙이고 이렇게 서문을 지었다. 이 글을 통해 나(박제가)와 벗들이 당시 얼마나 융성하게 교유했는가를 보여주고 또한 내 평생의 한두 가지 일을 밝혀둔다. 『백탑청연집』 서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