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학 서적들은 보통 딱딱하고 건조해서 뭔가 평신도의 신앙생활과 거리가 있어 보이는 경우가 많은 것 같은데요. 폴 R. 하우스의 『구약신학』은 신학 책이지만 마치 강해서나 설교집을 보는 느낌을 주어서 좋은 것 같습니다. 성경 본문을 요약하고 복음적인 뜻을 알려주는 그런 내용입니다. 아래에서 맛보기를 하시면 구입을 하는 데에 조금 도움이 될 것 같아서도 올려 봅니다.
이스라엘을 인도하시고 격려하시는 하나님(민수기 1:1-10:11)
레위기의 내용을 모세에게 계시하셨던 동일한 하나님은 민수기 1:1에서 이스라엘 지도자들과 계속해서 교통하신다. 민수기는 이스라엘의 출애굽 후 1년이 경과했음을 언급한다(1:2). 이제 드디어 하나님의 계획에 따라 가나안 정복을 위해 진군할 때가 되었다. 이리하여 여호와는 이스라엘이 행군 준비를 하도록 인도하시며 그들이 이전에 맺었던 계명에 순종하도록 고무시키신다. 더욱이 여호와는 행군 순서를 알려주시며(민 1-4장) 이스라엘이 행군 시 어떻게 청결을 유지할 수 있는지를 지시해 주신다(5:1-10:11). 여호와는 유월절을 지킨 후(9:1-14) 약속의 땅 점령을 위한 여정을 시작하도록 이스라엘을 고무시킨다(9:15-10:11).
이스라엘의 몇몇 사람들은 의례적이고 공적인 방식을 통해 개인과 공동체의 거룩을 향한 그들의 열망을 나타내도록 부름을 받는다. 예를 들면, 남자들과 여자들은 자신들을 나실인으로 구별시킨다. 이들은 술을 멀리해야 하고 머리를 자를 수 없으며 죽은 자를 만져서도 안 된다(6:1-8). 이들은 단시간 혹은 장시간 동안 이러한 계율을 따라야 할 것이다(6:9-21). 이러한 헌신은 엄격한 생활방식을 통해 여호와를 섬기려는 나실인의 삶의 가치를 드높여 준다. 로날드 알렌(Ronald Allen)은 "나실인 서약은 그의 백성을 향한 하나님의 명령이 아니었다. 그 서약은 하나님을 향한 그들의 헌신을 특별한 방식을 통해 자발적으로 나타내고자 했던 남자나 여자를 위해 주어졌던 것이었다"고 설명한다.
이와 마찬가지로 이스라엘의 족장들은 성소에 예물을 드림으로써 하나님을 향한 그들의 사랑을 나타낸다(7:1-89). 그리고 레위인들은 성소 사역을 위해 구별된 자들로서 하나님의 위대하심을 증거한다(8:5-26). 여기 민수기에 등장하는 백성들은 이스라엘 백성들의 현재를 인도하시는 여호와-이스라엘의 현재를 인도하시는 여호와는 이러한 방식을 통해 과거를 성취하시며 미래의 소망도 제시하신다-를 향해 기쁨의 순종으로 반응한다.
여호와는 이스라엘이 유월절을 지킨 후 그들의 진군을 위해 그의 인도를 따르라고 격려하신다(민 9:1-10:11). 이스라엘은 정한 때에 유월절을 지킨다(9:1-5). 이 유월절 절기는 출애굽의 구원이 광야생활에서도 의미 있는 것임을 말해 준다. 온 땅을 창조하신 하나님은 어떤 지형에서도 당신의 크신 일을 행하실 수 있다. 해마다 지켜지는 절기가 구원하시고 심판하시는 여호와의 영원한 본성을 경축하고 있으므로, 하나님은 시간에 제한받지 않는다. 하나님은 또한 전심으로 그를 따르는 자들, 즉 신중히 예배드리는 자들을 위해 그들의 필요를 채워 주시려 한다. 민수기 9:6-14는 어떤 제사 봉헌자들이 유월절 절기에 앞서 부정케 되었을 때 발생하는 문제를 소개하고 있다. 모세가 이 문제를 여호와께 아뢰자, 하나님은 유월절의 정기적 시기가 끝난 후 이들을 위해 유월절 절기를 한 번 더 지킬 수 있는 조항을 첨가시켜 주신다(9:6-13). 이스라엘의 믿음을 함께 공유하는 비이스라엘인들 또한 유월절을 지켜야 할 것이다. 이것은 유월절을 향한 여호와의 목적이 인종 혹은 민족의 범위를 초월한 것임을 의미한다. 분명히 하나님은 믿음과 순종에로의 열망이 "율법주의"와 "민족차별"보다 더 우선하는 것으로 간주하신다. 아마도 이 같은 인식은 이스라엘로 하여금 공평, 포괄, 그리고 거룩과 제사 사이의 올바른 관계이해에 관심을 나타내도록 고무시킨다.
이스라엘은 두 가지 방식-하나는 초자연적인 방식이요 또 다른 하나는 지극히 인간적인 방식이다-을 통해 그들이 야영할 때를 알게 될 것이다. 하나님은 안식을 위해 장막 위로 구름을 내려주실 것이다. 이 구름이 이동할 때, 이스라엘 백성들은 이 구름이 나아가는 방향대로 따라가야만 한다(9:15-23). 아론과 제사장들은 나팔을 불면서 백성들이 순서대로 떠날 수 있도록 돕는다(10:1-7). 어떤 학자들은 이 구름을 자연적 현상으로 해석하려 한다. 10) 그러나 야영의 시기와 구체적인 방향을 알려주는 구름의 이동은 그것이 초자연적인 현상임을 말해 준다. 구름은 백성 가운데 거하시는 하나님의 임재를 상징한다.
특히 하나님은 이끄시고 안내하시며 그의 경외로우심을 드러내시기 위해 임재하신다. 다시 말하자면, 여호와의 임재는 백성 가운데 거하시는 하나님의 현현(顯現)을 나타내며, 하나님은 이러한 방식을 통해 그들을 인도하시기까지 사랑하시며 함께 동행하신다. 또한 이 같은 방식은 이스라엘이 전적으로 하나님의 임재에 의존하고 있음을 증거해 줄 뿐만 아니라 그분이 인간과 다른 분이심을 보여 준다. 여호와는 임재의 능력을 지니고 있지만 동시에 구별되신 분이다. 우리는 여호와의 임재를 통해 그분의 근성(性)과 원성(性)을 동시에 느끼며 깨달을 수 있게 된다.
폴 R. 하우스, 장세훈역, 『구약신학』(기독교문서선교회), pp.274~277.
첫댓글 우리 신약교회 성도들은 이면적 유대인과 영적 이스라엘입니다. 위 말씀은 우리에게도 적용됩니다. 인도하시고 격려하시는 하나님께 감사합니다.
네, 매우 공감합니다.
공감합니다22
불 기둥과 구름 기둥(민수기 9:15-23)
<매튜 헨리 주석>
본문에 보면 구름의 이야기가 나오는데, 그것이 자연 현상에 대한 이야기는 아니다. "누가 구름의 평형 운동을 알랴?" 이것은 이스라엘에게 계신 하나님의 임재의 가시적 상징으로 지시된 구름에 대한 거룩한 이야기이다.
Ⅰ. 회막 건립이 완공되자, 이전에는 진 위에 높이 떠 있던 구름이 회막에 내려와서 그것을 덮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그의 규례를 통하여 그의 백성 중에 임재해 계심을 눈으로 볼 수 있게 된 것이다. 거기에서 하나님은 당신을 인간에게 알리셨고, 인간들은 "여호와의 아름다움" 을 앙모하게 되었다(시 27:4; 겔 37:26, 27). 마찬가지로 하나님께서는 그가 친히 세운 명령을 영화롭게 하신 것이요 그 백성의 사랑과 복종을 즐겨 받으신다는 것을 보여 준 것이다.
Ⅱ. 그것은 낮에는 구름으로 보였고 밤에는 불로 보였다. 그것이 구름 만이었다면 밤에는 보이질 않았을 것이다. 또 불이기만 했더라면 낮에는 식별하기가 어려웠을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들과 같이하신 당신의 임재와 보호하심을 계속하여 눈으로 볼 수 있도록 해주셨다.
그는 "밤낮 그들을 지키셨다" (사 27:3, 시 121:6). 그러므로 우리도 "항상 하나님을 우리 앞에 모셔야" 된다는 교훈을 얻으며 밤이나 낮이나 그를 가까이서 볼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을 듣게 된다. 구약 시대에 나타난 하나님의 계시 중 어떤 것은 그 성실이 하나님의 임재를 나타내는 이러한 가시적 표징으로 나타났다고 할 수 있다. 불은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보여 주신 영광의 현현은 좀 더 분명하고 우리에게 고무적이라는 점과 비교해 볼 때, 구름은 구약 시대의 암흑성을 불은 공포를 나타낸다.
Ⅲ. 이러한 구름 기둥과 불 기둥이 광야에 있던 이스라엘의 모든 이동과 행진과 숙영 일체에 방향을 결정해 주었다.
1. 구름이 회막 위에 정지하면, 그들은 계속 한 곳에 머물러 있었다. 그들은 가나안 땅에 빨리 들어가고 싶은 생각이 몹시 컸지만, 구름이 정지해 있으면 한 달이고 일 년이고 그대로 머물러 있었다(22절). 하나님을 믿는 자들은 서두르지 않는다. 하나님의 때를 기다리는 것은 결코 시간 낭비가 아니다. 우리가 소명 받은 일을 해야 할지라도, 하나님의 뜻이 조용히 기다리고 있기를 바랄 때에는, 또한 그렇게 하는 것도 하나님의 뜻에
대한 복종의 행위로서 여겨질 것이다.
2. 구름이 옮겨가면, 그들의 숙영지가 아무리 편안하더라도, 이동했다(17절). 밤이고 낮이고 구름이 움직일 때는 그들도 지체하지 아니했다(21절). 아마 구름이 움직이나 안 움직이나 보기 위해서 몇 사람의 보초병이 있었을 것이며, 구름이 움직이기 시작하면 즉시 알려야 했을 것이고, 이것이 "여호와의 명을 좇는 것" 이었다. 그들은 이렇듯 경계를 서 있었고 이동과 휴식의 시간이 고정되 있었던 것이 아니었기 때문에, 경보만 나면 즉시 행진할 준비를 늘 갖추고 있었다. 마찬가지 이유로 우리는 이 장막집이 언제 무너질지 모른다는 경각심을 가지고 있어서, "주님의 계명에 따라 떠날" 준비를 갖추고 있어야겠다.
3. 구름이 움직이면 그들은 계속 행진했고, 구름이 머무는 곳에 가서야 다시 진을 치고, 그 구름 밑에다 하나님의 장막을 쳤다(17절). 하나님이 떠나셨는데도 머물러 있는 것은 좋지 못하다. 하나님께서 우리 앞에 가시는 것을 볼 때는 안전하고 즐겁게 갈 수 있으며, 하나님이 머물면 우리도 쾌히 머물 수 있다.
위의 본문 속에는 이 사실이 여러 번 반복되어 있다. 그것은 끊임없는 기적이었고 종종 반복되었기 때문이다.
또한 그들이 여행하는 동안 한 번도 보이지 않은 적이 없었기 때문이요, 우리도 거기에서 중요한 교훈을 들어야 할 문제이기 때문이다. 이 사건을 먼 훗날 다윗(시 105:39)과 또 포로가 되었을 때 하나님의 백성들(느 9:19)이 다시금 언급했다. 또한 이 구름의 인도는 성령의 인도를 말해 주는 것이라고 한다(사 63:14). "여호와의 신이 그들로, 쉬게 하셨고, 주께서 주의 백성을 인도하셨도다." 여기서 교훈을 찾아보자.
(1) 하나님은 그의 백성을 특별히 보호하신다. 이 구름 이상으로 이스라엘에게 대한 하나님의 자비를 더 잘 말해 주는 것은 없다. 구름은 그들을 "바른 길" 로 인도했고(시 107:7), 그들의 발걸음과 같이했다. 말하자면 구름을 통해서 하나님은 그들을 당신의 깃털로 덮어 주신 셈이다. 지금 우리는 당시와 같이 하나님의 임재와 인도의 가시적 표증을 구할 수 없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그의 뜻으로 그들을 인도하시며(시 73:24) 죽음에서까지도(시 48:14) 인도하시리라" 는 약속은 모든 영적 이스라엘에게 분명한 것이다. 그리고 하나님의 모든 자녀들은 "여호와의 영으로 인도하심을 받는다" (롬 8:14). 그는 "모든 행실로"
그를 아는 "자들의 발걸음을 인도하신다" (잠 3:6). 하나님의 섭리는 그들의 모든 일을 잘 알고 있어서 언제나 그들을 최상으로 인도해 주신다. "전한 자의 발자취는 여호와께서 정하시느니라" (시 37:23).
(2) 우리의 모든 행실 속에서 언제나 하나님을 생각해야 한다. 우리들의 마음이나 행실로 하나님의 말씀과 영의 지시에 따라야 한다. 우리 영혼의 모든 길과 동작은 하나님의 뜻에 따라서 인도 받아야 한다. 우리의 심령은 늘 주님의 계명대로 움직이고 서야 된다. 우리들의 모든 일상 생황 속에서도 하나님의 섭리를 추종하며 항상 우리 자신을 섭리의 정하심에 맞추어서 어떤 경우에나 우리의 마음을 우리의 형편에 따라 세워야 한다. 이스라엘 백성에게 구름의 인도가 있었으므로, 그들에게 있을 수 있었던 많은 곤경과 논쟁을 피하게 해 주었다. 즉 그들이 언제 어디로 행진할 것인가를 하는 의견 대립의 기회를 주지 않았던 것이다. 또한 그들이 갈 곳에 미리 정보를 입수하려고 정탐꾼을 보내든가 길을 안내할 개척자 또 숙영지 탐색을 위한 작업 등이 불필요했었다. 구름 기둥이 이 모든 일을 맡아 해 주었다. 이와 같이 신앙으로 자기들의 모든 일을 주께 맡기는 자들은,
물론 은총의 방편을 지혜롭게 활용해야 할 의무가 있지만, 좋은 기대를 가질 수 있다. "아버지여 당신의 뜻이 이루어지게 하옵소서. 당신이 원하시는 대로 내 마음을 움직이소서. 내가 여기 있나이다. 끊임없이 내 하나님을 기다리오며, 주의 계명대로 가고 서겠나이다. 당신의 뜻이 무엇이든, 나로 오직 당신의 뜻을 따르며, 항상 그 본분을 지키게 하옵소서."
@장코뱅 아멘!
@장코뱅 아멘22
나팔의 용도(민수기 10:1-10)
<매튜 헨리 주석>
필요할 때마다 나팔 소리로서 공지 사항을 알리라는 지시가 나와 있다. 이런 일은 모세가 꼭 하나님의 지시를 받아서 해야 하는 일은 아니라고 생각하는 자들이 있을 것이다. 모세 혼자서 생각해도 나팔이 필요한 것을 알았을 것이다. 그러나 이스라엘의 모든 구성은 신령한 것으로 되어야 했다. 따라서 하찮게 보이는 이런 일도 마찬가지였다. 모세는 이런 지시를 받았다.
1. 나팔을 만들라는 것. 그 나팔은 은으로 만들어야 했다. 그것은 주형으로 만든 것이 아니라 쳐서 만들었다. 그래야 그 모양이나 소리가 소기의 목적에 적합해질 것이다. 두개만 만들라고 했다. 그 때에는 그 나팔을 사용할 제사장들이 둘뿐이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솔로몬 시절에는 120명의 "제사장들이 나팔을 불었다" 는 기록이 있다(대하 5:12). 이 나팔을 만든 목적은 오늘날과 거의 흡사하다.
2. 나팔을 사용할 자. 어떤 비천한 사람이 아니라 바로 제사장들 자신이다. 곧 "아론의 아들들" 이라 했다(8절). 비록 그들이 위대한 자라 해도, 하나님의 집에서 나팔수가 된다는 것이 자기들의 지위에 악영향을 준다고 생각해서는 안 되었던 것이다.
이것은, 주의 사역자들은 "나팔처럼 크게 소리를 내어" 백성들의 죄를 일깨워야 하며(사 58:1), 그들을 그리스도께로 인도해야 한다는 사실(사 27:13)을 시사해 준다.
3. 어떤 때에 부는가?
(1) "회중 소집" 때이다(2절). 이와 마찬가지로 시온에서 금식을 위하여 엄숙한 성회로 모일 때에 나팔을 불라는 명령이 있다(욜 2:15). 종교적 집회의 시기와 시간을 누구나 알아야 한다. 하나님의 제 의식의 혜택은 누구나 받을 수 있기 때문이다. "원하는 자는 누구나 오게 하라." 지혜가 광장 큰 거리에서 소리를 친다. 그러나 그 나팔은 "불분명한 소리를 내면" 안 된다. 각 지파의 두령이나 장로들만 소집할 경우에는 나팔 하나만 분다고 했다. 온 회중을 한꺼번에 모을 경우는 별로 없었을 것이다. 그래서 두령이나 장로들이 모든 선행에 있어서 모범을 보여야 했다. 그러나 그 백성 전체를 함께 소집할 때에는, 나팔을 둘 다 불어서 더 먼 거리에 있는 자들도 듣게 했다. 이런 사실에 연유하여, 그들은 "즐거운 소리를 듣는" 복을 받았다는 말을 듣는다(시 89:15). 즉 그들은 공적 규례를 통하여 하나님께 참예하도록 부름을 받는 것이다(시122:1).
그리고 그 큰 날(심판날)에 모일 총회는 "큰 나팔 소리" 에 의해서 소집될 젓이다(마 24:31).
(2) "진의 행진" 을 위해서 분다. 나팔 소리에 따라서 각 편대가 움직여야 한다. 사람의 음성으로는 명령을 능히 전달할 수 없었던 것이다. 잘 훈련 받은 오늘날의 군대는 북소리를 듣고 행진할 수 도 있을 것이다. 행진을 위할 때에는 "경보를 울려야" 한다(" 울려 불어야" 한다)(5절). 즉 급히, 떨리는 소리로 간격을 두고 분다. 이것은 그들의 행군에 용기를 돋우어서 능히 대적을 맞게 하기에 적합하다. 반면에 계속해서 같은 높이의 소리가 나면 총회 소집의 신호가 된다(7절). 그러나 하나님의 심판을 취소해 달라는 애원을 위해서 총회가 소집되었을 때도 경보의 소리가 울린 적이 있다(욜 2:1). 처음 경보가 나면, 유다 편대가, 두 번째에는 르우벤 편대가, 세 번째는 에브라임, 네 번째는 단의 편대가 행동하게 된다(5,6절). 혹자는, 여기에 저들의 행군을 거룩히 구별하려는 의도가 있었다 한다. 즉 그들의 행진이 제사장들의 신호에 따라 진행되었고, 제사장들은 그 백성에 대한 하나님의 일을 대신한 자들이었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명령이
그들을 가게 했을 뿐 아니라 그들의 모든 동작에 하나님의 축복이 함께 했던 것이다. 귀 있는 자들은 "하나님께서 진실로 그들 중에 계심" 을 들을지어다. 아비야 왕은 자기 자신과 자기 군대에게 이 사실을 매우 중대시하게 했다(대하 13:12). 즉 "하나님께서 친히 우리의 대장으로 우리와 함께 계시고, 그의 제사장들이 나팔을 불며 함께 하고 있느니라."
(3) 전시에는 군대의 사기를 북돋우기 위해서 불였다(9절). "너희가 대적을 치러 나아갈 때에는 나팔을 불라. 이것은 대적에 대한 너희들의 결의를 하늘에 호소하는 것이요, 승리의 기원이니라. 그리고 하나님은 이것이 당신 자신의 제도임을 인정하실 것이며, 너희가 여호와 너희 하나님 앞에서 기억되라." 하나님은 나팔 소리를 하감하시고 그들의 전쟁에 개입하실 것이다. 또한 온 백성이 이것을 알고 하나님의 싸움을 싸우는 데 용감해지리라. 다윗도 "뽕나무 꼭대기에서라는 소리를" 듣고 용기를 얻었다. 그러나 풍랑 만난 제자들이 그리스도를 깨울 필요가 없었듯이, 저들도 나팔 소리로 하나님을 깨울 필요는 없었다(마 8:25).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그것을 통하여 당신의 자비를 보이시려 하신 것이다.
사역자들은 그리스도의 선한 군병들이 죄와 세상과 사탄을 대적하여 잘 싸울 수 있도록 독려해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그리스도께서 "그들의 구원의 대상" 이시니 "그들의 발 아래 사탄을 밟게" 할 것임을 확신케 해 주어야 한다.
(4) 저들의 거룩한 절기의 집례를 알릴 때 불었다(10절). 그들에는 "나팔을 불어 기념할 날" 이라는 절기도 있었다(레 23:23 이하). 또 이렇게 함으로써 저들의 모든 절기의 제전(시 81:3)과 제물들을(대하 29:27) 아름답게 꾸몄던 것 같다. 이것은 저들이 기쁨과 즐거움으로 하나님께 대한 의무를 준행한다는 것을 뜻하며. 그들이 섬기는 하나님의 거룩한 승리의 예배에 참여하고 싶은 마음을 더욱 분발시켰던 것이다. 그리고 그들의 의식은 "하나님 앞에서의 기념" 을 위한 것이다. 우리가 의식을 지킬 때 하나님은 그 의식을 즐거워하시기 때문이다. 거룩한 일은 거룩한 기쁨으로 해야 한다.
@장코뱅 구름과 나팔에 대한 매튜 헨리의 설명을 들으니 성경 이해가 더 풍성해지네요.
구름이 가만히 머물러 있을 때도 많았다는 것을 보아서도 단순한 자연 현상이라고 볼 수는 없을 것 같습니다. 사 63:14에서 여호와의 영이 인도하셨다 했고, 느헤미야, 시편에서도 하나님께서 인도하셨다는 것을 보면, 그리고 예수께서 승천하실 때와 재림하실 때 등에도 구름이 등장하는데 하나님의 인도하심과 임재, 등장을 상징적으로 표현한 것이라고 할 수 있겠죠. 많은 천사들이 수행할 때의 현상 정도로 이해를 하면 좋을 것 같습니다.
낮에는 구름, 밤에는 불기둥으로 하루 온종일, 광야생활 40년간 내내 하나님의 보호하심과 인도하심 속에 있었다는 게 대단한 일이 아닐 수 없네요. 그러니 그 많은 환난을 겪으면서도 이스라엘 민족의 정체성을 잃지 않고 또다시 뭉치기를 반복하면서 믿음과 역사를 전승할 수 있었던 것 같습니다.
설명이 세심하고 풍성하네요.
@코람데오 공감합니다.
민 1-10장의 내용을 평이하고 간략히 설명하고 있네요. 너무 평이한 거 아닌가 싶을 정도인데, 그래도 나실인에 대한 설명과 구름 및 여호와의 임재에 관한 설명이 좋은 정보를 주네요. 감사합니다.
어느 면에서는 평이하기 때문에 초신자와 평신도들에게 도움이 많이 될 것 같습니다.
하나님의 인도하심과 격려해 주심을 믿고 늘 의지합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