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거정의 '동문선(東文選)' 이래 가장 방대한 시문집으로 꼽히는 '문원(文苑)'을 완성한 한 학자가 작고한 변시연(1922~2006) 선생이었다.
언젠가 이분이 살고 계셨던 손룡의 자택을 찾아 갔던 적이 있다. 방안에는 퇴계가 선조에게 올렸던 '성학십도(聖學十圖)'가 새겨진 병풍이 둘러쳐져 있었고,
여기에서 노학자의 경륜과 기품이 풍겨 나오고 있었다
"혹시 어르신의 좌우명이 있으십니까?" "삼지(三知)를 알아야 하네! 지족(知足), 지분(知分), 지지(知止)가 그것이야!"
'족함을 알고, 자기의 분수를 알고, 그칠 줄을 아는 것'이 바로 변 선생의 좌우명이었던 것이다.
모든 좌우명이 그렇지만 이 좌우명도 매우 난이도가 높은 좌우명이었다.
셋중의 어느 하나도 알기가 어렵다. 더군다나 생활에서 실천하기는 더 어렵지 않은가.
어렵다는 생각을 하고 있던 중에 어느 비 오는 날 산길을 혼자서 걷다가 문득 한 생각이 떠올랐다. '걷는 것' 그 자체가 바로 '삼지'의 출발점이 된다는 생각이었다.
걷는 것을 한자로 '보(步)'라고 표시한다. 보자를 자세히 뜯어 보면 '지(止)'와 '소(少)'자의 결합이다.
이걸 풀어 보면 '멈춰야지 젊어진다'는 뜻이다. 걷는다는 것은 멈춘다는 의미와 젊어진다는 의미가 동시에 내포되어 있다. 또는 멈추다 보면 건강하진다는 뜻으로 해석할 수도 있다.
한 걸음 더 나아가면, 걷기는 지지를 깨닫게 하는 행위이다. 하나를 알면 셋을 알게 되는 법이다. 사람이 1~2시간 걷다 보면 멈출 줄을 알게 되는 것이다.
멈출 줄을 알게 되면 족함도 알게되고, 분수를 알게 되지 않겠는가!
삼지의 출발점은 걷기에서 시작될 수 있다는 생각을 하게 되자, 걷기는 건강을 챙기는 수단일 뿐만 아니라, 인생의 실수를 줄일 수 있게 해주는 '성스러운 의례'로 한 차원 격상되었다.
내가 생각하기에 걸음으로써 성스러움에 다가서는 것이다.
경험에 비추어 보면 최소한 1시간 이상은 걸어야 한다. 1시간쯤 걸을 때부터 복잡했던 머리가 정리되기 시작한다.
나의 경우 100분 정도 걷고 나면 내일 쓸 칼럼의 줄거리가 대강 정리된다.
- '조용헌 살롱' 중에서 -
진해루 부근 바닷가를 걷다가 물을 보고 '상선약수' 라는 말이 생각나 적어봅니다.
물은 형태가 없어 유연하고
낮은곳으로 흐르니 겸손하고
때로는 강하고 때로는 약하니 순응할 줄 알고
결국 바다에 이르니 목표를 알고 달성한다
이렇게 살려고 하지만 나는 얼마나 실천하고 있는지 뒤돌아 보니 부족한 부분이 많은 것같아 반성해 봅니다
최근 집근처 바닷가에서 운동 삼아 걷다보면 많은 사람들과 마주칠 수 있고 주변 경치에다 혼자 생각을 할 수 있어 큰 행복을 누리고 있습니다만
집에 오면 금새 잊어버리고 아쉬워하고 더 자신의 욕심만 앞세우니 언제 평정심을 가질 수 있을지 혼돈스럽습니다.
행복의 문 하나가 닫히면 또 다른 문이 열리는데 닫힌 문들을 멍하니 바라보다가 우리를 향해 열린 문을 보지 못하는 것은 아닐까요?
암튼 오늘에 감사하고 주어진 이 시간에 함께하는 사람들에서서 스스로 행복을 찾아 보아야 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