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68년 고구려를 멸망시킨 다음 이어진 나당전쟁을 승리로 장식한 후 신라의 중기, 통일 신라 시대로 접어들면서 본격적으로 전성기를 맞이하게 된다. 이와 동시에 작은 마을에서 출발한 신라의 천년 고도 서라벌은 당대 콘스탄티노플, 바그다드, 장안과 더불어 주요 도시로 거듭나면서 동시에 비단길의 종착점으로 자리매김하게 된다.
90만 명이 넘는 사람들이 사는 도시로 성장하면서 당시 신라의 왕 경덕왕은 왕이 살던 궁궐을 시작으로 국가를 통치하는 강력한 왕권 시대를 완성하고자 하는 직접적은 의도를 다양한 건축물들을 통해 '왕경'을 완성하려는 의도를 담고 있었고, 이 중 월정교는 일정교와 함께 서라벌로 들어가는 관문의 역할과 동시에 신라 사람들이 신성시하는 경주 남산으로 통하는 관문의 역할도 동시에 수행코자 만들어졌다.

(1) 월정교와 일정교 그리고 '왕경'
월정교가 지어졌을 당시 신라를 다스리던 경덕왕은 국가를 통치하는 강력한 왕권 시대를 완성하고자 하는 직접적인 의도를 다양한 건축에 반영하고자 했다. 인구의 팽창과 비단길의 종착점으로서 늘어나는 물동량을 감당하고자 하는 실용적인 명분과 동시에 불국사와 석굴암이 지어질 정도로 경제력과 건축 기술은 절정을 뽐내고 있었다. 서라벌의 왕궁 반월성을 중심으로 달이 뜨는 곳에 위치하고 있다 해서 지어진 이름 '월정교' 웅장함 속 감춰진 섬세함까지 지금은 터만 덩그러니 남아 있는 일정교(춘양교)의 모습이 문득 궁금해진다.

잠시 월정교에서 멈춰 스마트폰에 깔린 지도 어플을 활용해 보자. 월정교와 반월성을 기준으로 경주 곳곳에 위치한 유적지들과 도로의 모습들을 살펴볼 때 반월성으로 통하는 대동맥의 역할을 위해 만들어졌음을 어렵지 않게 유추할 수 있었다. 서라벌 도심 속 국가 사찰들의 모든 도로들은 반월성 방향으로 향하고 있었으면서 동시에 사람과 물류를 동시에 감당해야 했을 월정교의 당시의 모습을 상상해 보면 참 여러 가지 수식어가 머릿속을 맴돌고 있었다.

무엇보다도 월정교는 당시 서라벌 사람들이 신성시하던 경주 남산과 서라벌을 이어주는 가교 역할을 했다는 점이다. 이 점이 상당히 매력적으로 다가왔는데, 경주 남산의 경우 당시 서라벌 사람들이 신성시했던 곳으로 불국(佛國)으로 받아들였을 만큼, 현세와 이상 세계를 이어주는 가교의 역할도 담당하고 있었다. 경주 남산의 경우 구획 자체가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될 정도로 산 곳곳에 불교 유산들이 즐비해 있다. 현세와 이상 세계를 이어주는 다리, 그리스 아테네의 아크로폴리스가 그랬던 것처럼 당시 사람들의 판타지가 매우 매력적으로 다가온다.

(2) 원효대사와 요석공주 이야기
월정교 부근에 위치한 한옥들이 몰려 있는 교촌 마을에서는 또 다른 이야기가 우릴 반겨준다. 요석공주와 해골물로 유명한 의상 대사의 라이벌 원효 대사가 바로 그 주인공이다. 당나라로 유학을 가던 중 해골에 괸 물을 마시고 "진리는 결코 밖에서 찾을 것이 아니라 자시 자신에게서 찾아야 한다"는 깨달음을 터득하고 돌아오셨다는 바로 그분의 이야기를 여기서 마주할 줄은 전혀 상상치 못했다.

교촌 마을에 자리하고 있는 경주 향교 남단에는 과거 태종 무열왕의 딸 요석공주가 기거했던 요석궁이 자리한 곳이라고 전해져 오고 있다. 하루는 당나라 유학길을 포기하고 신라로 돌아온 원효대사가 자유롭게 떠돌아다니며 불교의 교리를 설파하고 다니다가 어느 순간부터 이상한 노래를 불렀다는데 그 내용은 이러하다 "자루 없는 도끼를 내게 주시오, 그리면 내가 하늘을 떠받칠 기둥을 찍을 테요"

하지만 그 누구도 원효가 부르는 노래의 뜻을 알 수 없었다. 하지만 그 노래를 전해 들은 무열왕은 대사가 훌륭한 아들을 낳고 싶은가 보다 라는 생각과 함께 당시 남편을 잃고 혼자 있는 요석 공주를 떠올렸다고 한다. 그렇게 부름을 받고 반월성으로 가던 도중 지금 사진에 보이는 이 월정교에서 냇물에 풍덩 빠지게 되고, 이를 빌미로 옷을 말린다는 핑계와 함께 요석궁에서 며칠이나 머무르며 요석 공주와 사랑에 빠졌다는데, 그렇게 태어난 아이가 바로 '설총'이다.

파계승이라는 불명예를 감내하면서 까지 낳은 아들 설총은 아빠가 불교계의 거목이라면 아들은 유교계에서 성인으로 추앙받을 만큼 업적을 남긴 사람이다. '화왕계'라는 명문과 함께 한자가 너무 어려웠던 사람들을 위해 우리말의 조사와 한자의 뜻을 적절하게 섞은 '이두'의 체계를 정리해 집대성 한 학자로 당대에 명성을 떨쳤다고 한다. 사람은 사람은 알아보는 걸까? 잠시 난간에 기대 냇물에 빠진 원효 대사의 모습을 상상하며 근처에 해골이 그려진 카페로 휴식을 위해 발걸음을 옮겼다.

(3) 주경 만큼 야경이 아름다운 곳, 그리고 소프트 파워
그렇게 자리를 옮긴 곳은 카페 사바하라는 곳으로 멀리서부터 보이는 해골 문양이 매우 인상 깊은 곳이었다. 한창 배우 이민호와 김고은이 시공을 초월해 가며 찍은 드라마 촬영지로 월정교가 선정됐을 적 여기서 배우가 촬영 준비를 이어 갔다고 한다. 더불어 2020 Asia Song Festival에서는 남자 아이돌이 이곳을 배경으로 무대를 펼친 모습 또한 상당히 인상적으로 다가왔다. 얼마나 많은 콘텐츠들이 월정교를 배경으로 만들어 질지 가치는 시간이 천년이 넘는 세월이 지나도 여전한 듯해 보였다.

앞서 언급한 드라마를 보면 이곳을 배경으로 군주와 근위대장이 천천히 걸어오는 장면은 인물과 잘 어우러지는 전통 건축 특유의 고풍스러움이 잘 느껴질 만큼 인상 깊었다. 당시 김유신 장군이 천관사로 가기 위해 지나던 다리도 이곳이고 그때도 지금의 모습과 엇비슷했을까? 실제 당시의 모습을 알지 못하는 나로선 그저 짐작할 수밖에 없어 그렇게나마 아쉬움을 달래 본다.
그렇게 시간이 지났고 숙소에 들려 서울에서부터 들고 내려왔던 삼각대 위에 카메라를 고정시켜 놓고 본격적으로 월정교 야경 촬영을 시작했다. 동궁과 월지와 함께 경주 야경은 월정교 다라고 왜 이야기를 하는지 오지 않고 그냥 가면 왜 후회를 하는지 제대로 느낄 수 있었던 순간이었고 사진을 담는 내내 너무 아름다웠던 기억이 지금도 가득하다.

월정교의 등장으로 경주의 야경은 더 깊어졌고 수려해졌다.라고 말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압권 그 자체였다. 사진을 담기 위해 이곳을 느지막이 찾았던 순간에도 월정교의 야경을 즐기기 위해 사람들은 끊임없이 모여들고 있었고 아쉬웠던 것은 당시 바닥에 보수 공사가 진행될 당시라 밤 시간에 내부 모습을 세심히 담을 수 없다는 점이었다. 하지만 그 아쉬움도 잠시 머무는 2시간 내내 황홀경을 제대로 느끼게 된다.


월정교와 건너편에 위치한 다리를 중심으로 크게 한 바퀴 돌기 전에 멀찍이 떨어진 기분으로 월정교 내부를 관망하고 싶었다. 바닥을 새롭게 보수한 후 내부를 은은하게 감싸주는 조명들 덕분에 외부와는 또 다른 포근한 기분을 느낄 수 있었다. 낮과 다르게 사람이 지나가지 못하게 막아 놓은 덕분에 방해 없이 오롯이 이 순간을 즐기며 집중할 수 있어서 위의 사진을 볼 때마다 기분이 절로 참 좋아진다.


약 160cm 정도의 삼각대에 카메라를 들고 구도를 잡기 위해 쉴 새 없이 높낮이를 조절하고 가로, 세로 구도를 잡고 있다 보면 시간이 나도 모르는 사이에 쏜살같이 흘러간다. 동시에 지나가던 사람들의 이목이 집중되는 것 또한 당연한 일이다. 거기에 옆에 와서 스마트 폰 카메라로 셔터를 누르는 걸 보게 되면 서로 대화는 없지만 같은 순간을 공유하고 있다는 생각에 왠지 모를 동질감마저 느낄 때도 간혹 생기는 것 같다.


실제로 야경과 아련한 분위기의 보케를 담고 있는 도중 지나가는 분들께서 여기가 가장 아름다운 가요?라고 묻는 상황이 발생했다. 예상치 못한 상황에 이제 막 담은 무보정의 사진을 보여 드리면서 순간을 공유하며 즐길 수 있었던 건 익숙하지 않은 환경과 우연이라는 특수성이 가져다준, 여행을 해야만 경험할 수 있는 순간이 아닐까 싶다. 물론 질문 후 그분 께서도 스마트 폰을 켜고 계속 사진을 담기 위해 집중하는 모습은 아직도 머릿속에 신나는 기억으로 남아 있다.


(4) 로마와 아테네 그리고 왕경 특별법 제정
월정교를 다녀오고 관련 여행기를 어떻게 풀어낼까를 한창 고심하던 찰나 매스컴에서 반가운 소식이 들려왔다. 과거 경주를 옛 전성기 서라벌 시대로 복원하겠다는 야심 찬 계획을 들었던 게 벌써 몇 년이 훌쩍 지났지만 국회에서 경주에 근거지를 둔 국회의원이 발의 한 경주 왕경 관련 특별법이 국회를 통과해서 예산의 증액은 물론 복원 작업의 속도를 붙일 수 있게 됐다는 소식을 접하면서 그동안 국립경주북물관이나 분황사 주변 황룡사지 황룡사 문화관 또는 보문관광단지 쪽 황룡원을 통해 추측할 수 있었던 그 과거 전성기 시절 신라를 직접 만나볼 수 있겠구나 라는 생각에 절로 입가에 흐뭇한 미소가 지어졌다.

고대 민주주의가 시작됐고, 유럽 곳곳의 문화의 시발점이 됐던 그리스 아테네와 지중해를 중심으로 중동, 북부 아프리카에 대제국을 형성했던 로마도 보면 지역 특유의 고풍스러움을 잘 간직하고 있으며 고층빌딩을 찾아보기 힘들고 곳곳에 숨겨진 고고학적 가치를 지닌 문화재들이 끊임없이 발견되고 있다. 경주 또한 위 두 도시들과 많은 유사점을 갖추고 있다 사료되며, 경주의 도심이 크게 확장되지 않은 것 또한 앞으로 벌어질 복원 계획에 따라 한국뿐 아니라 한국을 찾는 해외 관광객들에게도 충분히 매력적인 공간으로 재탄생될 수 있다고 믿어 의심치 않는다.

서기 935년 신라의 마지막 왕 경순왕이 고려의 왕건에게 항복을 선언하고 약 1000년의 세월 동안 과거 반월성을 중심으로 서라벌 도심의 경계를 자연스레 그어주던 북천과 남천 그리고 형산강은 묵묵히 시간의 흐름과 맥락을 함께 하며 자리를 묵묵히 지키고 있는 와중이다. 형체는 이미 없어진 지 오래고 이곳에 그 건축물이 있었구나 를 짐작할 수 있는 몇 줄의 기록들과 터만 남아 있을 뿐. 비단길의 종착지로서 당대의 전성기를 누렸다는 서라벌의 모습이 궁금해진다. 앞으로 변화될 경주의 모습이 벌써부터 궁금해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