할렐루야! 주님을 사랑하시면 아멘! 하시기 바랍니다.
아멘. 오늘 저는 여러분과 함께 로마서 강해 26번째 시간으로서 “믿음을 가지고” 信仰を持って 이라는 제목으로 은혜를 나누고자
합니다.
자, 오늘은 성경에 등장하는 아브라함에 대해서 살펴보고자 합니다.
마태복음 3장 9절에 보면 당시 세례 요한이 그의 말을 듣기 위에 몰려온 군중들에게 말합니다.
마태복음 3장 9절
“속으로 아브라함이 우리 조상이라고 생각하지 말라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하나님이 능히 이 돌들로도 아브라함의 자손이 되게
하시리라”
あなたがたは、『われわれの父はアブラハムだ』と心の中で思ってはいけません。言っておきますが、神はこれらの石ころからでも、アブラハムの子らを起こすことができるのです。
유대인들은 자신들만이 하나님으로부터 선택 받은 민족이며, 유대인은 곧 아브라함의 후손이기 때문에, 아브라함의 자손이라는 것을
시인하는 것은 자신들이 구원받는 민족, 하나님 나라 백성이라는 것을 근거가 된 것이기에, 그들이 자신의 조상이 아브라함이라는
사실을 대단히 자랑스럽게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이에 대해서 세례 요한은 말합니다. 너희들은 아브라함의 조상이라고 해서 자랑스러워 하고 있을지는 모르지만, 그것은 잘못된
생각이다.
하나님이 원하신다면 이 돌맹이처럼, 인간의 눈으로 본다면 아무런 쓸모 없는 것처럼 보인다 하더라도 아브라함의 자손이 되게 하신다고
말합니다.
이는 무엇입니까.
우리가 이미 공부한 로마서 2장 29절을 보겠습니다.
로마서 2장 29절
“오직 이면적 유대인이 유대인이며 할례는 마음에 할지니 영에 있고 율법 조문에 있지 아니한 것이라 그 칭찬이 사람에게서가 아니요
다만 하나님에게서니라”
かえって人目に隠れたユダヤ人がユダヤ人であり、文字ではなく、御霊による心の割礼こそ割礼だからです。その人への称賛は人からではなく、神から来ます。
여기서 돌맹이라고 세례 요한이 말한 것은 정말로 길가에 떨어진 돌맹이가 아니라, 이방인을 뜻하는 것입니다. 당시 유대인들은
이방인들을 차별했습니다. 멸시했습니다. 그야말로 길가에 떨어져서 사람들 발에 채이는 돌맹이보다도 못하게 취급했습니다.
그러나 성경은 뭐라고 기록합니까. 성경에는 분명히 이면적 유대인이 유대인이라고 합니다. 즉, 이는 구원 받는 백성은 표면적
유대인, 다시 말해서 유전자적인 유대인이 아니라 이면적 유대인인 하나님을 믿고 예수님을 우리 구주로 영접하는 사람이야말로 진정한
영적인 유대인이요, 진정한 구원 받는 하나님 나라의 백성이라고 한다는 사실을 믿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그리고 요한복음 9장 28절에 보면 유대인들이 말하기를 자신은 모세의 제자라고 아주 자랑스럽게 말하는 장면이 등장합니다.
이 말은 무엇이냐 하면, 이집트 애굽에서 400년 가까이 종살이를 하던 자신들을 모세가 이끌어내어 주었을 때, 하나님께서 모세를
통하여 주신 법률이 율법이었습니다.
그래서 자신들은 그 율법만 제대로 지키면 하나님 말씀을 잘 지키는 것이요, 그리고 장차 죽고 난 다음에는 이스라엘 자손이기 때문에
구원 받아서 천국에 갈 수 있다. 이렇게 그들은 믿어 의심치 않았던 것입니다.
하지만 이것이 사실인가요? 아니요. 이것이 사실이 아니라는 것은 우리가 이미 공부한 바와 같습니다.
로마서 3장 20절
“그러므로 율법의 행위로 그의 앞에 의롭다 하심을 얻을 육체가 없나니 율법으로는 죄를 깨달음이니라”
なぜなら、人はだれも、律法を行うことによっては神の前に義と認められないからです。律法を通して生じるのは罪の意識です。
자기 스스로를 구원할 수 있을 정도로 율법을 지킬 수 있는 사람은 없습니다. 우리가 구원 받을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율법을
어기고 하나님 말씀을 어긴 우리의 죄에 대해서 우리를 대신해서 모든 형벌을 받아주신, 우리 구주 예수님을 믿는 길 뿐이라는 사실을
믿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도 아브라함의 위치가 흔들리거나 과소평가되지는 않습니다. 오히려 이 로마서 4장 이후에 보면 아브라함에 대해서
대단히 높이 평가되고 있다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자, 그렇다면 도대체 아브라함이 어떤 사람이었기에 그렇게 믿음의 조상이라고까지 여겨지고 있는지, 오늘은 이 점에 대해서
알아봄으로써, 우리도 아브라함이 받은 축복을 모두 받는 시간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창세기 11장 26절에 보면 아브라함은 먼저 <아브람>이라는 이름으로 성경에 처음 등장합니다.
그리고 창세기 11장 26절~32절까지에는 아브라함의 집안에 대한 가족사가 소개되어 있습니다.
이를 소개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아브라함의 아버지는 데라라고 하는데, 데라는 70살 쯤에 세 형제 즉 아브라함과 나홀과 하란을 낳았습니다. 그렇다고 아브라함과
나홀과 하란이 세 쌍둥이었다는 뜻인지, 아니면 비슷한 시기에 낳았다는 뜻인지에 대해서는 정확한 기록은 없습니다만, 다른 성경
기록들로 비추어볼 때 아마, 후자, 그러니까 비슷한 시기에 낳았다는 쪽이 더 나을 것 같습니다.
그들은 갈대아인의 우르라고 하는 곳에서 살고 있었는데, 여기는 당시 메소보다미아라고 하는 지역, 지금으로 본다면 대략 이라크
쪽이라고 합니다.
여기서 아버지 데라, 그리고 아들은 아브라함과 나홀과 하란, 이렇게 3형제가 살고 있었는데, 하란이 먼저 장가를 든 모양이에요.
그래서 하란이 롯이라고 하는 아들을 낳습니다만, 여기서 안타까운 일이 일어나지요. 사고인지 아니면 질병 때문인지는 모르지만 이
하란이 자식들을 남겨놓고, 아버지 데리보다 먼저 세상을 떠나고 맙니다.
그리고 난 다음에 나머지 형제, 아브라함과 나홀도 장가를 들어요. 아브라함의 아내는 사라이고, 나홀의 아내는 밀가인데, 이 밀가는
먼저 세상을 떠난 하란의 딸이었다고 합니다. 그러니까 밀가는 자기 형제의 딸, 말하자면 자기 조카 딸과 결혼을 했던 것입니다.
이는 지금으로 본다면 꽤 충격적인 일이겠습니다만, 당시로서는 근친 사이에 결혼하는 것은 오히려 대단히 흔한 일이었으니까 그리
놀랄만한 일은 아닙니다.
당시까지 아브라함의 이름은 아브람이었고, 그의 아내 사라의 이름은 사래였습니다만, 편의상 그냥 아브라함과 사라라고 부르기로
하겠습니다.
창세기 11장 31절에 보면 좀 흥미로운 구절이 나옵니다. 그 때까지 그들은 갈대아인의 우르에 살고 있었는데, 아브라함과 나홀의
아버지인 데라가 무슨 생각을 했는지 대대적인 이사를 추진합니다.
창세기 11장 31절~32절을 보시겠습니다.
창세기 11장 31절~32절
“31.데라가 그 아들 아브람과 하란의 아들인 그의 손자 롯과 그의 며느리 아브람의 아내 사래를 데리고 갈대아인의 우르를 떠나
가나안 땅으로 가고자 하더니 하란에 이르러 거기 거류하였으며
32.데라는 나이가 이백오 세가 되어 하란에서 죽었더라”
テラは、その息子アブラムと、ハランの子である孫のロトと、息子アブラムの妻である嫁のサライを伴い、カナンの地に行くために、一緒にカルデア人のウルを出発した。しかし、ハランまで来ると、彼らはそこに住んだ。
テラの生涯は二百五年であった。テラはハランで死んだ。
이를 정리하자면, 데라는 그의 아들 아브라함과 아브라함의 아내 사라, 그리고 이미 세상을 떠난 아브라함의 형제 하란이 남겨놓은
아들 롯, 이렇게 넷이서 이사를 떠나게 됩니다.
여기에는 의문 많이 있습니다.
첫째는 그 때까지 살고 있던 갈대아인의 우르라고 하는 곳을 왜 떠나게 되었는지,
둘째는, 왜 나홀과 그의 아내 밀가는 남겨두고, 아들 아브라함과 며느리 사라, 그리고 하란의 아들인 손자 롯만 데리고 떠났는지,
셋째는, 그들이 왜 가나안 땅으로 가려고 했는지,
넷째는, 가나안 땅에 가다가 도중인 하란 땅에 왜 정착했는지,
여기서 둘째 문제부터 보자면, 창세기 24장에 의하면 나홀은 차후에 다른 곳으로 이주를 한 것으로 나옵니다. 그러니까 그들은
아마도 자신들이 원해서 이주에 동참하지 않고 다른 길을 선택한 것으로 여겨집니다.
자, 그럼 나머지 문제에 대해서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어떤 책에 보니 누구는 이렇게 말합니다. 본래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이 아니라 그의 아버지 데라를 불러서 가나안 땅으로 가게
하셨는데, 데라는 그 말에 순종하지 않고 가나안 땅으로 가는 도중에 하란 땅에 정착하는 바람에 하나님으로부터 축복을 받지 못했다.
그래서 본래 아버지 데라가 받을 그 축복을 아브라함이 대신 받게 된 것이다.
저도 이 이야기를 꽤 설득력 있게 알고 있었습니다. 더구나 그 책은 목사님이 쓰신 책이었으니까 정말인 줄 알고 믿었지요. 하지만,
성경을 읽어보면 그렇지 않다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사도행전 7장에 보면 예수님께서 하늘로 올라가신 다음 첫 순교자인 스데반 집사의 설교가 있습니다.
그 설교는 다음과 같이 시작합니다.
사도행전 7장 2절~4절
“2.스데반이 이르되 여러분 부형들이여 들으소서 우리 조상 아브라함이 하란에 있기 전 메소보다미아에 있을 때에 영광의 하나님이
그에게 보여
3.이르시되 네 고향과 친척을 떠나 내가 네게 보일 땅으로 가라 하시니
4.아브라함이 갈대아 사람의 땅을 떠나 하란에 거하다가 그의 아버지가 죽으매 하나님이 그를 거기서 너희 지금 사는 이 땅으로
옮기셨느니라”
するとステパノは言った。「兄弟ならびに父である皆さん、聞いてください。私たちの父アブラハムがハランに住む以前、まだメソポタミアにいたとき、栄光の神が彼に現れ、
『あなたの土地、あなたの親族を離れて、わたしが示す地へ行きなさい』と言われました。
そこで、アブラハムはカルデア人の地を出て、ハランに住みました。そして父の死後、神はそこから彼を、今あなたがたが住んでいるこの地に移されましたが、
이 기록에 의하면, 아브라함이 하란으로 가기 전에 메소보다이아 갈대아인의 우르라고 하는 지역에 살고 있을 때, 먼저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말씀하시기를 네게 보일 땅으로 가라고 하셨다는 것입니다.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이 말씀을 듣고 아버지를 모시고 아내인 사라와 조카 롯과 함께 가나안 땅으로 향했던 것으로 여기집니다만, 하란
땅에 도착해서 거기 머물렀을 때 아버지 데라가 세상을 떠났다고 이해해야 하겠습니다.
그렇다면 고향 땅을 떠나게 된 직접적인 계기는 아버지 데라가 아니라 처음부터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명하시고, 그리고 아브라함에
의해 가나안 이주가 시작되었다고 해야겠습니다.
그리고 그 도중에 하란 땅에서 아버지 데라가 먼저 세상을 떠났던 것입니다.
여기서 아버지가 먼저 돌아가시게 된 이유는 무엇일까 하는 의문이 들 수 있습니다.
생각하기에 따라서는 직접적으로 하나님의 명령을 들은 아브라함이 본래는 가나안 땅으로 가야하는데도 도중인 하란에 머물렀기 때문에,
이와 같은 불순종 때문에 아버지 데라를 먼저 불러가셨는지, 아니면 다른 이유가 있어서인지 하는 것이지요.
그렇다면 성경 기록을 바탕으로 생각해보도록 하겠습니다.
앞서 스데반 집사님의 기록에 의하면 하란에 있기 전 메소보다미아에 있을 때에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을 부르셨다고 기록합니다.
다음으로 창세기 11장 31절~32절을 다시 보시겠습니다.
창세기 11장 31절~32절
“31.데라가 그 아들 아브람과 하란의 아들인 그의 손자 롯과 그의 며느리 아브람의 아내 사래를 데리고 갈대아인의 우르를 떠나
가나안 땅으로 가고자 하더니 하란에 이르러 거기 거류하였으며
32.데라는 나이가 이백오 세가 되어 하란에서 죽었더라”
テラは、その息子アブラムと、ハランの子である孫のロトと、息子アブラムの妻である嫁のサライを伴い、カナンの地に行くために、一緒にカルデア人のウルを出発した。しかし、ハランまで来ると、彼らはそこに住んだ。
テラの生涯は二百五年であった。テラはハランで死んだ。
여기는 분명히 가나안 땅으로 가고자 하였다고 기록이 있습니다. 그렇다면 그들은 정말 최종목적지가 가나안 땅이라는 사실을 알았을까
하는 의문이 듭니다.
여기에 대해서 히브리서 11장 8절은 다음과 같이 기록합니다.
히브리서 11장 8절
“믿음으로 아브라함은 부르심을 받았을 때에 순종하여 장래의 유업으로 받을 땅에 나아갈새 갈 바를 알지 못하고 나아갔으며”
信仰によって、アブラハムは相続財産として受け取るべき地に出て行くようにと召しを受けたときに、それに従い、どこに行くのかを知らずに出て行きました。
이를 좀 더 알기 쉽게 하기 위해서 현대인의 성경 같은 구절을 보면 다음과 같이 되어 있습니다.
현대인의 성경 11장 8절
“믿음으로 아브라함은 하나님이 주시겠다고 약속하신 땅으로 가라는 명령을 받고 그대로 순종하였습니다. 그는 가야 할 곳이 어딘지도
모르는 채 떠났던 것입니다.”
이는 다른 번역도 마찬가지입니다. 아브라함은 하나님께서 인도하시는 최종목적지가 어디인지 몰랐습니다. 이 이주 계획은 아브라함이
먼저 시작해서 아내 사라와 조카 롯만이 아니라 아버지 데라까지 모시고 출발한 여정입니다. 그런데 아브라함도 모르는 최종목적지를,
데라를 비롯해서 다른 사람이 알았을 리가 없겠지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기에 가나안 땅이라고 명시되어 있는 이유는, 당시 그들은 알지 못했으나 나중에 결론적으로 보자면 가나안 땅으로
인도하시는 것이 하나님의 계획이셨다……라는 뜻이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자, 그런데 문제가 생깁니다. 그들은 결과적으로는 가나안 땅에 가야했지만 그것을 모르는 아브라함 일행은 하란 땅에 도착했을 때,
즉 하나님의 인도하심으로 하란 땅을 지나갈 때 어떻게 했냐 하면, 거기 잠시 쉬었던 것이 아닙니다.
창세기 11장 31절 후반부에 뭐라고 적혀 있었어요.
“……하란에 이르러 거기 거류하였으며”
しかし、ハランまで来ると、彼らはそこに住んだ。
이에 대해서 현대인의 성경판은 더욱 명확하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현대인의 성경 11장 31절 후반부
“그들은 하란에 이르러 정착하고 말았다.”
그렇습니다. 아브라함 일행은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고 메소보다미아 즉 갈대아인의 우르를 출발했지만, 도중에 하란에 도착했을 때 거기
정착하고 말았습니다. 하지만 그것은 하나님의 계획이 아닙니다. 그렇다면 이는 무엇입니까. 그렇습니다. 이는 명백한 불순종입니다.
그렇다면 이와 같은 불순종은 누구 때문에 발생 했을까요. 아브라함이 하란에 도착했을 때, 아이고, 여기 보니까 참 좋네. 우리가
살던 곳보다 훨씬 더 좋잖아. 에라, 하나님이고 뭐고 우리 여기서 살자.
아니면, 아브라함의 아내인 사라가, 어머, 여보, 여기가 참 살기 좋네요. 집도 넓고 집값도 싸고. 그러니까 여보. 그냥 우리
여기 삽시다. 그렇게 아브라함을 유혹 했을까요?
성경은 이 부분에 대해서 중요한 단서를 제공해주고 있습니다. 그 단서는 바로 지금까지 몇 번이나 살펴보았던 창세기 11장
31절~32절에 숨어 있습니다.
창세기 11장 31절~32절
“31.데라가 그 아들 아브람과 하란의 아들인 그의 손자 롯과 그의 며느리 아브람의 아내 사래를 데리고 갈대아인의 우르를 떠나
가나안 땅으로 가고자 하더니 하란에 이르러 거기 거류하였으며
32.데라는 나이가 이백오 세가 되어 하란에서 죽었더라”
テラは、その息子アブラムと、ハランの子である孫のロトと、息子アブラムの妻である嫁のサライを伴い、カナンの地に行くために、一緒にカルデア人のウルを出発した。しかし、ハランまで来ると、彼らはそこに住んだ。
テラの生涯は二百五年であった。テラはハランで死んだ。
여러분, 이 글의 부자연스러움. 혹시 아시겠습니까.
자, 앞에서도 말씀 드렸습니다만, 이 이주 계획은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명해서 시작되었습니다. 스데반 집사님의 말씀대로 아직
그들이 메소포타미아 즉 갈대아인 우르에 있을 때에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명령하셨던 것입니다.
그렇다면 이 계획에 관한 주어, 즉 중심인물은 누가 되어야 하겠습니까. 그렇죠. 이는 당연히 아브라함이 되어야 합니다. 그리고
다른 기록들을 보아도 이주에 관한 기록은 아브라함이 주어가 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이 부분의 기록은 어떻습니까. 가족들과 함께 가나안 땅으로 가고자 했더니 하란에 이르러 거기 거류했다. 주어가 누구에요?
예. 그렇습니다. 아버지 데라입니다. 이는 모든 번역본이 그렇게 되어 있습니다.
그렇다면 하란 땅에 정착하자고 주장했던 사람은 누구라는 것인가요. 그렇습니다. 아브라함이 아니라 그의 아버지 데라가 말하기를,
이봐, 나 이제 늙었으니까 더 이상 못 가. 여기 하란 땅에서 그냥 살자. 여기 좋잖아? 그러니까 잔소리 말고 내 말 대로 해!
성경에 기록된 다른 가족들을 보면 아버지가 나이 들고 자녀들이 장성한 후에는 자녀들의 발언권이 강해지지만, 아버지가 아직 젊었을
때라면 아버지의 의견이 절대적이라고 할 수 있겠지요.
갈대아인의 우르에서 출발했을 때에는 어찌 된 일인지 아브라함의 말에 따랐던 아버지 데라였습니다만, 하란 땅에 이르렀을 때에는 거기
정착할 것을 강하게 주장했던 것으로 보입니다.
도대체 왜 그랬을까요. 글쎄요. 어쩌면 그 여정이 대단히 힘들었기 때문일지도 모릅니다.
그렇다면 도대체 그들은 어느 정도 되는 여정을 갔던 것일까요. 신학자들에 의하면 그들이 처음 출발했던 갈대아인 우르에서 하란
땅까지는 직선거리로 약 1040킬로 정도라고 합니다. 이건요. 직선거리로 본다면 서울에서 동경까지 정도 되는 거리입니다.
단순계산으로 사람 걷는 속도를 시속 4킬로라고 하고, 하루 16시간을 걷는다고 하면, 64킬로 정도를 갑니다. 이렇게 해서
1040킬로를 간다고 계산을 하면 16일 이상이 걸려요. 하지만 1040킬로라고 하는 것은 어디까지나 직선거리입니다. 실제로는 더
거리가 멀었을 것입니다. 그리고 이 여정에는 아브라함의 아내 사라도 있었습니다. 그러니 아무리 사라를 짐승에 태우고 간다 하더라도
매일 꼬박 64킬로로 가기는 어려웠겠지요. 이렇게 생각한다면 대략 1개월 정도 여행을 하지 않았을까 짐작합니다.
사실 말이야 쉽겠지만 이는 보통 힘은 여정이 아니지요. 한달 정도나 걸어서 여행을 한다고 생각해보세요. 그리고 여기에는 연배가
있는 데라, 여성인 사라, 그리고 아마도 나이가 그리 많지는 않았을 아브라함의 조카 롯까지 있었다고 한다면 더더욱 그랬을
것입니다.
그래서 그랬을까요? 데라의 인내심은 여기서 끝났습니다. 됐다. 이제 그만하자. 더 이상 못 간다. 여기까지 왔으면 됐어.
결국 데라의 주장에 따라 아브라함과 그의 일행은 하란 땅에 정착을 합니다. 창세기 11장 32절에 의하면 데라는 205세까지
살았어요.
이 나이를 보면 갑자기 하나님으로부터 벌을 받아 일찍 돌아가신 것 같지는 않습니다. 나중에 보면 아브라함이 175세까지 살았고,
이스마엘은 137세, 이삭이 180세까지 살았다는 것을 감안하면 꽤 오래 사셨습니다.
하지만 그 동안 그 가족은 어땠습니까. 그렇습니다. 발이 묶였습니다. 아브라함은 얼마나 초조 했을까요. 분명히 하나님께서는
자신에게 말씀하셨고, 그리고 아직 가야할 길이 남아있음에도 불구하고 더 이상 움직일 수가 없습니다.
그렇다고 나이든 아버지를 혼자 버리고 떠날 수도 없고, 끝까지 반대하는 아버지를 더 이상 설득할 수도 없습니다.
그렇게 하란 땅에서 지내고 있었더니 아버지 데라가 205세 때 세상을 떠납니다.
그러자 창세기 12장 1절 이후에 보면, 하나님께서, 과거에 자신을 갈대아인 우르 땅에서 불러주셨던 하나님이 두 번째로 불러주시는
장면을 볼 수가 있습니다.
창세기 12장 1절~4절
“1.여호와께서 아브람에게 이르시되 너는 너의 고향과 친척과 아버지의 집을 떠나 내가 네게 보여 줄 땅으로 가라
2.내가 너로 큰 민족을 이루고 네게 복을 주어 네 이름을 창대하게 하리니 너는 복이 될지라
3.너를 축복하는 자에게는 내가 복을 내리고 너를 저주하는 자에게는 내가 저주하리니 땅의 모든 족속이 너로 말미암아 복을 얻을
것이라 하신지라
4.이에 아브람이 여호와의 말씀을 따라갔고 롯도 그와 함께 갔으며 아브람이 하란을 떠날 때에 칠십오 세였더라”
主はアブラムに言われた。「あなたは、あなたの土地、あなたの親族、あなたの父の家を離れて、わたしが示す地へ行きなさい。
そうすれば、わたしはあなたを大いなる国民とし、あなたを祝福し、あなたの名を大いなるものとする。あなたは祝福となりなさい。
わたしは、あなたを祝福する者を祝福し、あなたを呪う者をのろう。地のすべての部族は、あなたによって祝福される。」
アブラムは、主が告げられたとおりに出て行った。ロトも彼と一緒であった。ハランを出たとき、アブラムは七十五歳であった。
이제 누구도 그의 발길을 막을 사람은 없습니다. 당당히 여행을 출발하면 됩니다.
그러나 이제 또 문제가 있지요? 예, 하란을 그의 나이 몇 살이요? 예, 75세였다고 합니다.
당시는 지금보다 오래 살았다고 합니다만, 그래도 나이가 많다는 것에는 변함이 없습니다.
하나님이 축복을 주신다고 했는데 젊은 날은 다 지나가고 이제 나이도 늙어서 힘도 없는데, 이 나이에 축복은 받아서 뭐에다 쓸까.
하는 생각이 들 만도 합니다.
자, 오래 기다리셨습니다. 바로 이 시점에서 여러분께 질문을 드리겠습니다.
지금까지 아브라함의 인생, 대략 75세까지의 삶을 살펴보았습니다. 이와 같은 아브라함의 인생에 대해서 여러분께서는 어떻게
생각되십니까. 참으로 믿음의 조상에 걸맞는, 과연 하나님께서 부르실 만한 뛰어난 삶처럼 느껴지시나요?
물론 이 뒤에는 아브라함의 놀라운 행적들이 많이 나옵니다만, 하나님은 그와 같은 대단한 일을 한 다음에 아브라함을 부르신 게
아니에요. 바로 지금 하나님이 부르셨습니다. 그것도 한 번이요? 아니요. 성경의 기록에 의하면 갈대아인 우르에서 한 번 부르셨고,
그리고 하란 땅에서 아버지 데라가 세상을 떠난 다음에 또 한번 부르셨어요.
제가 여기까지 아브라함의 삶을 정리하고 느낀 것은 무엇인가 하면, 아마도 여러분께서 지금 여러분이 하고 계신 생각과 비슷하지
않을까 합니다.
그게 뭐냐 하면, 여기까지 장황하게 살펴본 아브라함의 인생? 아, 참 재미없다. 잠이 온다. 지루하다. 그렇지 않으세요? 정말
차라리 내가 살아온 인생이 훨씬 더 변화부쌍하다. 아브라함이 이처럼 지루한 삶을 살았는데 왜 하나님께서는 부르셨을까.
그렇다면 아브라함이 뛰어난 인물이라서요? 물론 하나님께서는 뛰어난 인물을 부르십니다.
노아나 모세에 대해서 성경은 뭐라고 기록합니까.
모세에 대해서 민수기는 다음과 같이 기록합니다.
민수기 12장 3절
“이 사람 모세는 온유함이 지면의 모든 사람보다 더하더라”
モーセという人は、地の上のだれにもまさって柔和であった。
그리고 그보다 앞선 노아는 어떨까요?
창세기 6장 9절
“이것이 노아의 족보니라 노아는 의인이요 당대에 완전한 자라 그는 하나님과 동행하였으며”
これはノアの歴史である。ノアは正しい人で、彼の世代の中にあって全き人であった。ノアは神とともに歩んだ。
좀 하나님의 사람으로 쓰임을 받으려면 이 정도는 되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그런데 아브라함에 대해서는 이런 기록 하나가 없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는 그를 버리지 않습니다.
고집이 센 아버지 때문에 오랫동안 발이 묶여 있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를 버리지 않으셨습니다.
그 이유는 무엇일까.
성경은 기록합니다.
창세기 15장 6절
“아브람이 여호와를 믿으니 여호와께서 이를 그의 의로 여기시고”
アブラムは主を信じた。それで、それが彼の義と認められた。
그렇습니다. 그는 끝까지 하나님을 믿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축복을 주신다는 사실, 하나님의 말씀대로 순종하면 축복을
받는다는 사실을 믿었다는 사실을 믿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이에 대한 기록이 오늘 본문 말씀입니다.
로마서 4장 1절~3절
“1.그런즉 육신으로 우리 조상인 아브라함이 무엇을 얻었다 하리요
2.만일 아브라함이 행위로써 의롭다 하심을 받았으면 자랑할 것이 있으려니와 하나님 앞에서는 없느니라
3.성경이 무엇을 말하느냐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믿으매 그것이 그에게 의로 여겨진 바 되었느니라”
それでは、肉による私たちの父祖アブラハムは何を見出した、と言えるのでしょうか。
もしアブラハムが行いによって義と認められたのであれば、彼は誇ることができます。しかし、神の御前ではそうではありません。
聖書は何と言っていますか。「アブラハムは神を信じた。それで、それが彼の義と認められた」とあります。
아브라함의 인생을 보면 특이한 것도 없고 감동적인 것도 없고, 어떻게 보면 정말 평범하고 대단할 것도 없습니다.
그러나 딱 하나, 하나님을 믿었습니다. 아무리 눈앞에 어려움이 닥치고, 내 발걸음을 늦추는 장애요소가 있더라도 그는 끝까지
하나님에 대한 믿음을 놓지 않았고, 그와 같은 아브라함을 하나님은 포기하지 않으시고 불러 주셨다는 것을 믿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아브라함이 하란 땅을 떠난 것이 몇 살 때요? 예, 75살입니다. 75살. 무언가 새로운 것을 시작하기에 적합합니까, 아니면
늦었습니까.
예, 인간적으로 보면 대단히 늦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어디까지나 우리 부족한 인간의 생각입니다.
이사야 55장 8절
“이는 내 생각이 너희의 생각과 다르며 내 길은 너희의 길과 다름이니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わたしの思いは、あなたがたの思いと異なり、あなたがたの道は、わたしの道と異なるからだ。──主のことば──
아브라함의 데라가 당시 사람들 중에서도 오래 살았던 이유 중 하나는, 어쩌면 하나님께서 그가 마음을 돌이켜서 다시 일어서기를
기다리셨기 때문인지도 모릅니다.
앞서 갈대아인 우르에서 하란까지의 거리가 1040킬로 정도였다고 말씀 드렸습니다만, 그렇다면 하란에서 가나안 땅까지의 거리는 어느
정도 였을까요. 예, 그들에게 남겨졌던 거리, 가나안 땅까지의 거리는 대략 630킬로 정도 남아 있었다고 합니다. 지금까지
걸어왔던 길보다도 짧아요.
힘들면 조금 쉬고 체력을 회복한 다음에 다시 걸으면 됩니다. 하지만 하나님의 명을 거역하고 도중에 눌러앉아버리면 안 됩니다.
데라는 일어나야 했습니다. 늦더라도 일어나서 축복의 땅까지 가야 했었던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그 순간을 기다리셨는지 모릅니다. 이봐. 조금만 가면 돼. 지금 온 거리에 비하면 조금만 더 가면 축복의 땅, 약속의
땅이야.
그러나 데라는 끝까지 일어나지 않았습니다. 아무리 기다려도 일어나지 않았습니다. 왜 일어나지 않았겠습니까. 그렇습니다. 믿음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에 대한 믿음이 없었기 때문인 것입니다.
여러분, 하나님은 우리를 사랑하십니다. 얼마나 사랑하십니까.
로마서 8장 32절
“자기 아들을 아끼지 아니하시고 우리 모든 사람을 위하여 내주신 이가 어찌 그 아들과 함께 모든 것을 우리에게 주시지
아니하겠느냐”
私たちすべてのために、ご自分の御子さえも惜しむことなく死に渡された神が、どうして、御子とともにすべてのものを、私たちに恵んでくださらないことがあるでしょうか。
그렇습니다. 하나님의 독생자 예수님의 목숨을 죄인 된 우리를 위해 주실 정도로 우리를 사랑하십니다. 믿으시면 아멘 하시기
바랍니다.
여러분, 이미 늦었습니까? 물 건너 갔습니까? 아닙니다. 아직 늦지 않았습니다. 이제 일어설 때입니다. 바로 지금이 하나님에 대한
믿음을 가지고 일어서야 할 때인 줄 믿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우리 모두 사람의 눈으로 사람의 기준으로 나를 바라보고 세상을 바라보는 것이 아니라, 내 멋대로 생각해서 좌절하고 절망하고
주저앉는 것이 아니라, 이제 하나님에 대한 믿음, 예수님에 대한 믿음을 가지고 지금 당장 일어서서 약속의 땅, 가나안 땅으로
인도해주시는 하나님을 믿고 달려가는 우리 모두가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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