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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라 최후의 미륵보살 진덕여왕 [한국 불교미술의 원류 12]
1. 위기에 몰린 신라
신라 선덕여왕 14년(645) 9월에 당 태종이 안시성에서 대패하고 별 성과 없이 회군하자 가장 낭패한 것은
신라였다.
당 태종의 친정(親征)으로 고구려가 멸망에 가까운 타격을 받을 것으로 생각하고 국력을 기울여 <황룡사
구층탑>을 세우며 3만 군사를 동원하여 고구려의 배후를 공격했었는데, 정작 당 태종은 수십만 군사를 몸소
지휘하여 두 달 동안이나 안시성을 공격하고도 끝내 함락하지 못하고 천하의 웃음거리가 된 채 물러나게
되었으니 신라의 처지는 말이 아니었던 것이다.
우선 <황룡사구층탑> 건립 의미가 불확실하게 되어 국민적 결속력이 금가기 시작하였다.
이에 선덕여왕 측근의 진골 세력은 반(反)진골 세력을 회유하고 단속하기 위해 반진골 세력의 핵심이자
석(昔)씨 계열의 수장인 이찬 비담(毗曇)을 그 해 11월에 수상 자리인 상대등(上大等)으로 발탁해 들인다.
그리하여 다음 해인 선덕여왕 15년(646)에 황룡사구층탑을 완성해내는 것으로 겨우 민심을 다잡아간다.
그러나 여왕 15년 3월에 수도 장안으로 돌아온 당 태종이 다음 달인 윤 3월에 용동성 일대 점령을 포기
했다는 소식이 전해지자 다시 신라의 위기감은 극도에 다다른다.
결국 선덕여왕 16년(647) 정월 초승에 상대등 비담이 보수 계열의 반진골 세력을 이끌고 그들의 근거지인
왕성 동쪽 명활산성에서 반란을 일으켜 왕성을 공격해 들어온다.
‘여왕이 잘 다스리지 못하니 이를 바꿔야 한다’는 명분을 내걸었다 한다.
이는 선덕여왕이 미륵의 화신이라는 믿음을 정면으로 부인하는 행위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반란 세력이 몹시 강성하여 일시 왕성의 안위를 가늠할 수 없었다 하니 당시 신라의
민심이 얼마나 불안하였던지를 대강 짐작할 수 있다.
그러나 김유신이 탁월한 기지와 지휘력을 발휘해 결국 반란세력을 진압하고 비담 일당을 1월17일에 모두
처형하는 것으로 이 일을 마무리짓는다.
이때 비담 등 반진골 귀족들은 9족이 멸족당했다 하니 오히려 이 반란 사건을 계기로 진골귀족들은 신라
불국토 사상을 거침없이 펼쳐나갈 수 있는 새로운 전기를 마련했다고 보아야 할 듯하다.
사실상 진골세력이 최후의 승리를 거두는 결전이었던 것이다.
그런만큼 진골 세력도 그에 상응하는 대가를 치러야 했다.
진골세력의 구심점이었던 선덕여왕을 잃은 것이다.
반란군과 대치하던 중에 큰 별이 왕성으로 떨어지는 현상이 있었는데, 선덕여왕은 ‘여왕을 갈아치워야
한다’는 반란 구호에 상심한 데다 별이 떨어지는 흉조가 겹치자 낙담하여 1월8일 68세 쯤의 나이로 세상을
하직한다.
이에 김용수(金龍樹)와 김춘추 부자를 중심으로 한 김알천(金閼川) 김술종(金述宗) 김유신 등 왕실 측근
진골 세력은 곤혹스러운 지경에 빠지게 되었다.
신라에 출현한 미륵보살의 화신으로 굳게 믿어 최초로 보위에 오르게 한 여왕인데 국가가 극도의 위기에
처해 있는 상황에 홀연히 세상을 떠났으니 이를 잘못 수습하면 민심이 산산조각이 나 흩어질 염려가 있었다.
더구나 황룡사구층탑을 이제 막 건립해 놓고 그 공덕으로 삼국을 통일하고 구한(九韓)으로부터 조공받는
다고 선전하지 않았던가.
2. 새 미륵보살의 탄생
이에 신라에 하강했던 미륵보살은 그 역할을 끝내고 수미산 위에 있는 도리천(利天)으로 올라가고 또 다른
미륵보살 화신이 이를 계승하여 신라를 이끌어간다는 내용의 후계 구도를 마련하는 듯하다.
그래서 선덕여왕을 장사 지낸 낭산(狼山)을 도리천이라 하고 뒷날 그 아래 남쪽 기슭에 사천왕사(四天王寺)를
지어 이를 현실로 증명해 보인다.
이 내용은 ‘삼국유사’ 권1 선덕여왕이 미리 세 가지 일을 알다(善德王知幾三事)라는 항목에 다음과 같이 씌어
있다.
“왕이 병이 없을 때 여러 신하들에게 이렇게 말했다. ‘짐이 아무해 아무달 아무날에 죽을 터인데 나를
도리천 가운데 장사지내도록 하라’. 여러 신하가 그곳을 알지 못하여 어느 곳이냐고 아뢰니 왕이 낭산
남쪽이라고 하였다.
그달 그날에 이르러 왕이 과연 돌아가니 여러 신하가 낭산의 양지에 장사지냈는데 10여년 뒤에 문무
대왕이 왕의 능 아래에 사천왕사를 창건하였다.
불경에 이르기를 사천왕천 위에 도리천이 있다 하였으니 이에 대왕이 신령스러웠던 것을 알았다.”
그리고 뒤를 이을 미륵화신으로 진평왕의 아우 국반(國飯)의 따님인 승만(勝曼) 군주(郡主)를 지목하니
이분이 진덕여왕이다.
승만군주 역시 미륵선화인 원화로 뽑혀 있었던 모양이다.
‘삼국유사’ 왕력의 제27대 선덕여왕조에 “성골(聖骨) 남자가 다하여 그런 까닭으로 여왕이 섰다.
왕의 배필은 음(飮) 갈문왕(葛文王)이다”라고 하여 선덕여왕에게 음 갈문왕이라는 부군이 있었던 것처럼
기록하고 있다.
그러나 같은 책 권1 ‘선덕왕지기삼사조’에서는 당 태종이 나비 없는 모란 꽃 그림을 보낸 것이 짝없는 자신을
기롱하기 위한 것이라 하여 선덕여왕은 분명 자신이 출가하지 않은 처녀임을 밝히고 있다.
따라서 왕력의 기록은 성골 남자가 끊어져서 여왕을 세웠다는 일연의 이해 한계를 합리화하기 위해 윤색
되었을 가능성이 크다.
진덕여왕조에는 배필의 이름이 없다는 사실이 이런 가능성을 더욱 높여준다.
어떻든 이때 진덕여왕의 나이도 60세 가까웠을 듯하니, 선덕여왕의 사촌동생으로 거의 같은 시기인 진평왕
22년(600) 전후한 시기에 원화로 뽑혔을 가능성이 크기 때문이다.
진덕여왕은 참으로 어려운 시기에 대통을 이었다.
사촌 언니인 선덕여왕이 신라에 하강한 미륵보살의 화신이라는 믿음에 의해 신라 개국 이래 최초의 여왕
으로 등극하였고 화랑의 구심점을 이루면서 민심을 규합하여 힘겹게 고구려와 백제의 침략에 대응하다가
반란을 만나 공방전을 벌이는 소용돌이 속에서 그 충격으로 갑자기 돌아갔는데, 창졸간에 그 뒤를 이었기
때문이다.
당시 신라는 고구려와 백제의 총공세에 직면해 있었다.
바로 전 해에 당 태종이 고구려 정벌에 실패하고 소득없이 회군하여 고구려의 기세가 한없이 높아진 데다
신라는 당 태종의 부탁을 받고 3만 군사로 고구려의 배후를 공격하여 고구려의 미움을 사고 있었기 때문
이다.
그런데 다행히 당 태종은 고구려 정벌의 야욕을 포기하지 않고 적은 병력을 끊임없이 보내 고구려를 괴롭
힘으로써 고구려를 말라죽게 하려는 새로운 전략을 이 해 2월에 확정한다.
그래서 3월에는 좌무위대장군 우진달(牛進達)을 청구도(靑丘道) 행군대총관(行軍大摠管)으로 삼고
우무위대장군 이해안(李海岸)을 부총관으로 삼아 1만 군사를 거느리고 배로 산동반도 내주(萊州)를 출발
하여 바다로 진격하게 한다.
한편 태자첨사(太子詹事) 이세적(李世勣, 592∼667년, 고종 때 태종의 이름인 세민을 피휘하기 위해 세자를
떼어 이적으로 개명하게 함)은 요동도 행군대총관이 되어 군사 3000여명을 거느리고 육로로 진격하게 한다.
수전에 능한 군사만 가려 뽑은 수륙양군은 7월에 고구려 영내에 들어가는데 여러 성을 산발적으로 공략함
으로써 백성들이 농사에 종사할 수 없게 만든다.
뿐만 아니라 당 태종은 고구려 정벌을 위해 8월에는 송주(宋州)자사 왕파리(王波利) 등에게 칙명을 내려
강남 12주 공인(工人)들로 하여금 큰 배 수백 척을 건조하도록 한다.
이런 상황이므로 당 태종은 신라의 협조가 절실하게 필요하였다.
그래서 진덕여왕의 등극 소식을 접하자 2월에 곧바로 진덕여왕을 주국(柱國) 낙랑군왕(樂浪郡王) 신라왕으로
책봉하여 그 지위를 인정한다.
2월에 진덕여왕은 친(親)진골 귀족의 수장인 김알천을 상대등으로 삼아 친진골 내각을 구성하여 이들에게
정치를 맡기니 국가의 중대사는 김알천, 김임종(金林宗), 김술종, 김무림(金武林, 자장율사의 부친), 김염장
(金廉長), 김유신 등 6인의 원로들이 합의체 형식으로 처리하게 된다.
드디어 그 해(647) 7월에 연호를 태화(太和)라 고쳐 진덕여왕 시대를 본격적으로 열어간다
(‘삼국사기’ 연표와 김유신 전에는 다음해인 648년 무신에 개원하였다 기록했다).
진덕여왕은 타고난 자태가 풍만하고 아름다웠으며 키가 7척(약 175cm)이나 되고 손이 무릎 아래까지
내려왔었다 한다.
손이 무릎 아래까지 내려온다는 것은 불보살이나 전륜성왕이 될 수 있는 사람이 타고나는 32상 중의 한
상호에 해당하니 이런 신체적인 특징 때문에 진덕여왕도 일찍이 미륵보살의 화신으로 지목돼 원화로
뽑혔던 모양이다.
이때 고구려는 당나라 장군 우진달의 공격을 받아 7월에 석성(石城)과 적리성(積利城)이 함락되는 대당전을
치러야 했으므로 신라를 응징할 겨를이 없었다.
그러나 백제는 신라의 위기를 그대로 보아 넘기지 않고 10월에 장군 의직(義直)을 보내 현재의 경북 개령,
인동 일대인 무산(茂山), 감물(甘勿), 동잠(桐岑) 3성을 공격해와 김유신이 이를 힘겹게 물리친다.
김유신이 보병과 기병 1만으로 막는데 군대의 사기가 떨어져 백제의 3000 군사를 당적할 수 없었다.
이에 비녕자(丕寧子)로 하여금 적진으로 돌입하여 장렬하게 싸우다 죽게 하니 함께 싸움터에 나와 있던
그의 아들 거진(擧眞)이 소년 낭도로 의분을 참지 못하고 적진으로 달려들어 맹렬하게 싸우다 뒤따라 전사
한다.
비녕자의 부탁으로 거진의 출진을 말리려고 말고삐를 놓지 않다가 거진의 칼을 맞아 팔이 잘린 종 합절
(合節)도 주인 부자가 차례로 싸우다 죽자 뒤따라 적진에 뛰어들어 힘껏 싸우다 장렬하게 전사하였다.
이를 보고 군사들이 감격하여 비로소 사기를 되찾게 되었으며 그래서 겨우 백제 군사를 물리칠 수 있었다
한다.
3. 당 태종의 집요한 고구려 침공
한편 고구려는 안시성에서 당 태종을 물리친 자신감으로 기고만장해 있다가 당나라가 물량공세에 의한
소모전으로 전략을 바꿔 소규모 병력을 끊임없이 보내 지속적으로 침략한다는 사실을 간파하고 크게 당황
한다. 그래서 이해 12월에는 보장왕의 둘째 왕자인 막리지 고임무(高任武)를 사죄사로 보내 당 태종의
체면을 살려주며 화해를 시도한다.
그러나 당 태종은 정관 22년(648), 즉 진덕여왕 2년 무신 정월에 돈황 출신 서역계 사람으로 자신의 친딸
단양(丹陽) 공주의 부마가 된 우무위대장군 설만철(薛萬徹, ?∼653년)을 청구도 행군대총관을 삼아 3만
군사를 거느리고 배로 내주를 출발하여 고구려를 다시 침공하게 한다.
그리고 4월에는 오호도(烏胡島; 산동반도 등주와 요동반도 사이에 있는 묘도 열도 중 가장 북쪽에 있는 섬)
진장(鎭將) 고신감(古神感)으로 하여금 또다시 수군을 거느리고 고구려를 계속 침공하게 하니 설만철은
압록강 하구에 위치한 박작성(泊城)을 함락하고 고신감은 역산(易山)에서 고구려군을 격파한 다음 회군한다.
당 태종의 고구려 정벌 의지는 집요하여 이해 6월에는 고구려가 이제 피폐할 대로 피폐해 있으므로 명년
에는 30만 대군을 동원하여 일거에 이를 멸망시키기로 전략을 세운다.
그리하여 다시 군량선과 병선을 마련하기 위해 수나라의 고구려 침공시에 징발을 면하였던 중국의 남서
쪽인 검남도(劍南道) 지역에 선박 건조를 명령하기로 결정한다.
그래서 7월에는 좌우부장사(左右府長史) 강위(强偉)를 검남도로 보내서 나무를 베 배를 짓도록 하니 큰
것은 길이가 100자, 폭이 50자에 이르렀다.
이들 배는 물길로 양자강을 타고 내려와 산동반도 내주로 집결했다.
이렇게 당 태종의 고구려 정벌 의지가 확고하므로 신하들은 감히 이를 반대하는 의견을 피력하지 못하고
있었는데, 18학사 중 한 사람으로 사공(司空)의 자리에 있던 방현령(房玄齡, 578∼648년)이 병으로 죽음을
앞둔 상황에 목숨을 내걸고 고구려 정벌의 중지를 간청하는 상표(上表)를 올린다.
방현령의 둘째 아들인 방유애(房遺愛, ?∼653년)는 태종의 고양(高陽)공주에게 장가들어 둘 사이는 사돈간
이기도 하였다. 그 내용을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예부터 중국에 해를 끼쳐 근심거리가 되어 온 것은 돌궐을 비롯한 서북쪽 사막지역의 유목민들이다.
그런데 이들을 모두 정벌하여 평정하였다.
고구려는 역대로 정벌하지 못하였으나 폐하는 연개소문이 국왕을 시해하고 백성을 학대한다 하여 친히 6군을
거느리고 가서 죄를 묻고 요동성을 함락하여 수십 만의 포로를 잡아왔으니 전대의 부끄러움을 씻은 것이며
그 공은 전왕에 비하여 만 배나 큰 것이다.
그러니 ‘주역(周易)’에서 말한 진퇴존망(進退存亡; 나아가고 물러나며 살고 죽음)이 다 때가 있다는
이치와 ‘노자(老子)’에서 말한 지족불욕(知足不辱; 만족할 줄 알면 욕되지 않음)과 지지불태(知止不殆; 그칠
줄 알면 위태롭지 않음)의 이치를 깨달아 고구려 정벌을 중지해주기 바란다.
폐하의 위대한 이름과 공덕은 이미 만족할 만하다 할 수 있고 개척한 땅은 그칠 만하다 할 수 있다.
고구려는 변경 오랑캐일 뿐이니 인의(仁義)로 대한다거나 상례(常禮)로 꾸짖을 일이 아니다.
만약 멸종시키려 든다면 궁지에 몰린 짐승이 대드는 것과 같은 현상이 일어날 것이다.
죄없는 병사들이 전장에서 죽어가면 본인은 물론이려니와 그 가족들의 원망이 얼마나 크겠는가.
고구려가 신하의 예절을 지키지 않았다거나 백성을 학대했다거나 오래 놔두면 중국의 걱정거리가 된다는
3가지 사실이 아니라면 중국을 번거롭게 할 일이 없다.
안으로는 전왕을 위해 부끄러움을 씻어주고 밖으로는 신라를 위해 복수해준다고 하나 얻는 것과 잃는 것
중 어느 게 크겠는가.
원컨대 폐하는 황조(皇祖, 노자가 이씨의 시조라 하여 이렇게 일컬었다) 노자가 말한 지족(知足)의 가르
침을 받들어 만대에 우뚝 솟은 이름을 지키시오. 퍼붓듯이 은혜를 베풀고 관대한 조칙을 내려 봄기운에
따라 못물이 펼쳐가듯 고구려로 하여금 스스로 새롭게 하도록 허락하시오.
물결을 헤쳐나갈 배들은 불사르고 응모한 군중을 헤쳐버리면 자연이 중국과 오랑캐가 경축하며 서로 의지
하여 멀고 가까운 곳이 모두 편안해 질 것이다.’
당 태종은 이 표문을 읽고 방현령의 며느리가 된 자신의 딸인 고양공주에게 이렇게 말했다 한다.
“이 사람이 이렇게 위중한데 아직도 우리나라를 걱정하고 있구나.”
방현령의 죽음을 앞둔 최후 충간이 당 태종의 마음을 상당히 흔들어 놓았던 듯하다.
그래서 고구려 정벌을 중지하려는 쪽으로 정책을 바꿔나간다.
4. 신라 태종이 당 태종을 만나다
이에 가장 다급해진 것은 신라였다. 그래서 동지사로부터 이 소식을 전해 들은 신라에서는 윤 12월에
김춘추를 특사로 파견하여 고구려 정벌을 계속해줄 것을 간청한다.
이때 김춘추는 18세가 된 셋째 아들 김문왕(金文王, 631∼665년)을 데리고 갔는데, 당 태종은 김춘추가
실제로 신라의 국정을 좌우하는 실력자라는 사실을 미리 알았기 때문에 광록경(光祿卿) 유형교(柳亨郊)를
보내 성대히 맞아들인다.
그리고 김춘추의 영웅다운 생김새에 반하여 더욱 이를 후대한다. 이때 김춘추의 나이 45세였다.
김춘추가 국학(國學; 현재의 대학)에 나아가서 석전(釋奠; 공자께 드리는 제사) 의식 및 강론하는 것을
보고싶다 하니 당 태종은 이를 허락한다. 그리고 김춘추가 학식 있는 것을 알고 자신의 문장 실력과 글씨
솜씨를 자랑하기 위해 전 해인 정관 21년(647) 7월에 스스로 짓고 써서 돌에 새겨놓은 최초의 행서비(行書碑)
인 <온천명(溫泉銘)>(도판 2)과 <진사명(晋祠銘)>(도판 3)의 탑본과 자신이 칙명을 내려 새로 편찬하도록
하여 근일에 갓 간행해 낸 ‘진서(晋書)’ 한 벌을 선물하여 자신의 문예 실력을 과시한다.
사실 이제까지 비문 글씨는 전서나 예서·해서 등 해정한 글씨로만 써왔던 것인데 당 태종은 <온천명>과
<진사명>을 자유분방한 행서체로 써내 최초의 행서비 형식을 창안했던 것이다.
그런데 이런 행서비 형식이 창안되자마자 바로 그 다음 해에 당 태종 본인의 손에 의해 김춘추에게 선사됨
으로써 신라에 직접 전해지게 되었다.
김춘추가 마음에 든 당 태종은 연회를 베풀어 환영하며 많은 금과 비단 등을 선물로 주며 하고 싶은 말이
있으면 하라고 한다. 이때 김춘추는 이렇게 말했다 한다.
“신의 본국은 바닷가에 치우쳐 있으나 중국 섬기기를 여러 해 해왔습니다.
그런데 백제가 강성하고 교활하여 여러 차례 마음대로 침략하고 있습니다.
지난 해에도 대거 침입해 들어와 수십 성을 함락하여 조공하러 다니는 길조차 막아 버렸습니다.
만약 폐하가 군대를 빌려주어 흉악을 제거하지 않는다면 우리나라 백성들은 모두 포로가 될 터이니 배타고
와서 직분을 다하는 것도 다시 바랄 수 없습니다.”
당 태종은 정말 그럴 것이라 생각한다며 군대 20만을 보내겠다는 약속을 한다.
김춘추는 또 의복을 당나라 제도로 바꾸고 싶다고 한다.
당 태종은 당장 내궁으로부터 김춘추와 그 일행이 입을 수 있도록 품계에 맞는 옷을 내다 입히도록 한다.
김춘추가 자신의 문화를 포기하며 외세를 끌어들이기에 급급한 모습을 보여주는 한심한 대목이다.
기분이 좋아진 당 태종은 김춘추에게 특진(特進)이라는 최고위 벼슬을 내려 변방 국왕 이상의 예우를 하고
이제 겨우 18세밖에 안된 김문왕에게는 좌무위장군이라는 파격적인 벼슬을 내려준다.
그리고 정관 23년(649) 2월 계사일에 김춘추가 본국으로 돌아가려 하자 3품 이상의 조관은 모두 나와 전별
하도록 하는 칙령을 내린다.
일찍이 볼 수 없던 파격적인 예우였다.
김춘추는 감격한 나머지 “신에게는 일곱 아들이 있으니 폐하를 떠나지 않고 숙위(宿衛)하게 하겠다”고
맹세하며 당장 김문왕으로 하여금 남아서 당 태종을 숙위하도록 한다.
김춘추가 당 태종을 격동시켜 고구려 침략을 부추기려고 당나라에 간 사실을 안 고구려는 서해 바다에
순라선을 배치하여 중국에서 돌아오는 김춘추를 잡아 죽이려 한다.
결국 제해권을 장악하고 있던 고구려 수군 소속의 순라선에 김춘추 일행이 탄 배가 붙잡히고 김춘추는
죽을 위기를 맞게 된다.
그러나 온군해(溫君解)라는 시종이 김춘추와 의관을 바꿔 입고 대신 죽으매 김춘추는 그 틈을 타 작은
배에 몸을 숨기고 위기를 겨우 모면하여 환국한다.
온군해의 용모가 김춘추와 비슷하여 고구려 군사가 속아 넘어 갔다니 이것도 미리 대비했던 계책이었을
것이다.
어떻든 이렇게 해서 뒷날 신라의 태종이 되는 김춘추가 당나라 태종인 이세민과 직접 면대하여 외교 교섭을
벌이고 의도했던 외교적 성과를 만족할 만큼 얻고 돌아오게 되니 신라의 사기는 하늘을 찌를 만큼 오르고
고구려와 백제는 불안감을 떨칠 수 없게 되었다.
20만 원병이 곧 파견되리라는 소문이 삽시간에 삼국을 진동시켰기 때문이다.
5. 보살의 시대는 가고
그러나 당 태종은 김춘추와 한 약속을 지킬 수 없게 되었다.
김춘추가 떠난 지 석달 만인 5월 기사일에 갑자기 세상을 떠났기 때문이다.
제일 낭패한 것은 김춘추였고 더욱 실망한 것은 신라 백성들이었다.
당 태종이 유조(遺詔)를 남겨 고구려 정벌을 포기하라 했다 하니 이제 신라는 스스로의 힘으로 살아남는
방법을 강구하는 도리밖에 없었다.
백제는 때를 놓치지 않고 8월에 장군 은상(殷相)이 정병 7000을 거느리고 석토(石吐) 등 7성을 공격하여
함락한다.
진덕여왕은 김유신과 김죽지(金竹旨), 김천존(金天存) 등으로 하여금 이를 막게 하니 김유신은 적의 첩보를
역이용하는 첩보전으로 이를 물리친다.
신라는 어떻게 하든지 다시 당 고종(高宗) 이치(李治, 628∼683년)의 비위를 맞춰 당나라 원군을 끌어
와야 했으므로 고종 영휘(永徽) 원년(650)부터 스스로의 연호를 폐지하고 당나라 연호를 쓰기 시작한다.
그리고 6월에는 김춘추의 장자인 김법민(金法敏, 626∼681년)을 사신으로 보내면서 진덕여왕이 직접 지어
비단에 무늬 놓아 짜낸 대당태평송(大唐太平頌) 5언 시축(詩軸)을 선물로 가져간다.
당나라의 융성과 번영을 칭송한 시였으니 당 고종이 그 정성에 감동할 수밖에 없었다.
다음 해인 영휘 2년(651) 2월에는 김춘추의 둘째 아들인 23세의 청년 김인문(金仁問, 629∼694년)이 조공
사겸 숙위 왕자가 되어 당나라로 떠난다.
바로 밑의 아우인 김문왕과 교대하기 위해서였다. 김인문이 마음에 들었던 당 고종은 바다를 건너온 노고와
충성을 가상히 여긴다며 좌령군위장군(左領軍衛將軍)의 벼슬을 특별히 내려준다.
이로부터 김인문은 한 살 아래인 당 고종과 깊은 인연을 맺어 우정어린 신뢰를 바탕으로 신라와 당 사이를
오가며 여러 가지 외교적 문제를 원만하게 풀어나가는데 진력하게 된다.
그는 대부분의 세월을 당 고종 측근에서 보내다가 결국 66세로 당 고종보다 11년 후에 당나라에서 생을
마감하고 시신이 되어 고국으로 돌아와 부왕인 태종 무열왕의 능 아래에 배총(陪)으로 묻히게 된다.
장차 이렇게 될 줄은 꿈에도 모르고 오직 조국을 위하는 마음으로 아우를 대신해 숙위왕자로 잠시 머물다
가겠거니 하고 온 걸음이었을 것이다.
그런데 3년 뒤인 진덕여왕 8년(654) 3월에 진덕여왕이 돌아가자 부친 김춘추가 신라왕으로 추대되어 그는
진짜 왕자의 신분이 되었다.
그동안 신라에 하강한 미륵보살의 화신으로 선덕여왕과 진덕여왕이 왕위에 올라서 신라를 불국토로 이끌어
나갔던 것인데 두 여왕을 거치면서 그들을 구심점으로 하는 화랑 조직이 충분히 그 진가를 발휘하여
고구려와 백제의 끊임없는 침략에 목숨을 아끼지 않고 저항하여 진흥왕 시절에 확장해 놓은 국토를 잘 지켜
왔었다.
선덕여왕을 원화로 받들며 성장한 화랑 1세대인 김유신 세대가 벌써 60대로 접어들어 국가 원로의 반열에
오르게 되니 원화의 기능은 이제 한계에 도달하게 되었다.
즉 미륵보살의 출현은 더 이상 아무런 의미가 없게 되었다는 뜻이다.
더구나 당이라는 의지할 만한 우방이 생겨 고구려와 백제를 확실하게 견제해 주니 이제 구차스럽게 미륵보살
에 의지하여 민심을 결집시키지 않아도 백성들의 사기는 충천하고 민심은 하나로 결집되게 되어 있었다.
선덕여왕 말년에 비담 등이 반란을 일으키면서 보수 반동세력들이 모두 표면으로 떠올랐다가 일망타진된
것도 민심을 결집하는데 더 없이 큰 도움이 되었었다. 그러니 이제 진골 세력이 국정을 뜻대로 움직여갈
수 있었다.
그래서 진흥왕의 혈통을 가장 순수하게 계승하고 있던 김춘추가 자연스럽게 왕위에 오르게 되었던 것이다.
그의 처남인 김유신이 막강한 군사력으로 이를 뒷받침해주고 있었다는 사실이 결정적인 추대 요인이 된 것도
사실이었다.
김유신은 화랑 집단을 기반으로 하여 전 신라의 군사권을 완전 장악하고 있었다.
그 때문에 당시 진골 귀족의 수장이던 김알천 장군이 보위에 오르기를 극구 사양하고 김춘추를 추대하여
보위에 오르게 하였던 것이다.
혈통으로 보아도 그는 진흥왕의 방계였을 터이니 순수 진골 혈통이어야 한다는 명분에 맞지도 않았다.
이래서 여왕은 양대에서 끝나고 김춘추가 왕위에 올라 진정한 부계 중심적 진골왕통이 이어지게 되었다.
6. 김부식의 유교사관과 일연의 불교사관의 한계
그런데 이런 사실을 모르고 여왕이 양대만 출현했다는 피상적인 현상으로만 파악한다면 여왕 출현의
이유를 합리적으로 설명할 방법이 없게 된다.
그래서 고려 인종 23년(1145)에 김부식(金富軾, 1075∼1151년)이 유교사관(儒敎史觀)에 입각하여 ‘삼국사기
(三國史記)’를 편찬해 내면서 성골(聖骨)이라는 허상(虛像)의 골품을 하나 더 추가하고 그 골품이 끝나가는
현상으로 여왕의 출현을 합리화시키려 하였을 것이다.
유교사적 안목으로 볼 때 이런 방법 외에 이를 합리적으로 설명할 수 있는 길은 없기 때문이었다.
이에 김부식은 진덕여왕이 돌아간 사실을 기록한 다음 아래와 같은 주석을 덧붙여 놓고 있다.
“나라 사람들이 일컫기를 시조 혁거세로부터 진덕에 이르기까지 28왕을 성골이라 하고 무열왕으로부터
끝왕에 이르기까지를 진골이라 일컫는다고 한다. 당나라 영호징(令狐澄)도 ‘신라기(新羅記)’에서 이르기를
그 나라 왕족은 제1골이라 부르고 나머지 귀족은 제2골이라 부른다고 하였다.
(國人謂 自始祖赫居世 至眞德 二十八王 謂之聖骨, 自武烈王 至末王 謂之眞骨. 唐令狐澄 新羅記曰 其國
王族 謂之 第一骨, 餘貴族 第二骨.)”
나라 사람들의 말이라 하여 그 말의 출처를 모호하게 얼버무린 것부터가 김부식이 꾸며낸 말인 것을 보여
주는데, 당나라 사람 영호징이 쓴 ‘신라기’를 구차스럽게 인용하고 있으나 제1골과 제2골의 의미가 성골과
진골의 존재를 의미한다기보다 오히려 진골과 그 밖의 귀족을 의미하는 내용이라서 성골이라는 골품은
없었고 진골만 존재했다는 사실을 더욱 부각시켜 준다.
그런데 이런 김부식의 유교사적 합리성 부여가 뜻밖에 불교사관에 입각하여 편찬된 ‘삼국유사’로 이어
지면서 더욱 뚜렷하게 윤색되는 어처구니 없는 결과를 가져와 이를 확실한 역사사실로 굳혀 놓고 만다.
고려 충렬왕(1275∼1308년)때 석일연(釋一然, 1206∼1289년)이 중국측 불교 역사책인 ‘고승전(高僧傳)’과
‘불조통기(佛祖統紀)’의 체제를 혼합하여 삼국시대의 역사를 불교사적 안목으로 편찬해 놓은 것이 ‘삼국
유사’인데, 거기서 성골의 존재를 재확인해 주었다.
‘삼국유사’ 권 1 왕력(王曆)에서 신라 제 27 선덕여왕조의 세주(細註)에 다음과 같은 기록을 남겼기 때문이다.
“성골 남자가 다하였기 때문에 여왕이 섰다.(聖骨男盡, 故女王立.)”
김부식이 처음 꾸며내느라 모호하게 표현했던 내용을 한층 분명하게 설명해 놓은 것이다.
아마 일연은 김부식이 모호하게 표현해 놓은 사실을 분명하게 밝혀 놓는 것이 의미있는 일이라고 여겼던
듯하다.
700여년 전의 신라 사정을 정확히 알 수 없는 일연이 당시로서는 짐작도 할 수 없는 여왕 출현의 배경을
굳이 불교사적인 시각으로 교정하여 보려하지 않았으리라는 것은 충분히 이해할 수 있다.
그래서 김부식이 모호하게 표현해 놓은 사실을 더 간명직절(簡明直截; 간단하고 명쾌하게 일직선으로
끊어냄)하게 표현해 놓는 것을 자기 몫으로 여겼던 모양이다.
이런 능력은 오히려 일연이 타고난 역사가다운 자질이라고 높이 평가할 수도 있다.
7. 태종(太宗) 무열왕(武烈王) 김춘추(金春秋)
김춘추는 진지왕의 장손이자 이찬 용수(龍樹)의 장자이며 진평왕의 외손자로 가장 순수한 진골 혈통을
타고난 인물이었다.
더구나 그 아버지는 제2의 석가로 불리는 대승불교의 중흥조인 용수보살의 이름을 그대로 물려받고 있었다.
용수보살은 용궁에 들어가 대승불교의 꽃이라 할 수 있는 ‘화엄경(華嚴經)’을 가져왔다고 전해지는 인물
이다. 그러니 김춘추는 신라를 화엄불국세계로 만들어 나갈 자격을 타고난 인물로 지목될 수밖에 없었다.
실제로 그의 용모는 매우 잘생겨서, ‘용과 봉의 모습이요 하늘에 뜬 해와 같은 얼굴(龍鳳之姿, 天日之表)’
이라고 극찬을 받을 만큼 잘생겼던 당 태종조차 한눈에 반할 정도였으니 그만한 기대는 걸어볼 만하였을
것이다. 그러나 그는 인물만 잘생긴 것이 아니라 도량이 넓고 지혜가 출중하며 덕이 높고 문무의 수련을
게을리 하지 않아 이를 겸전했었다 한다. 그러니 거의 전인적인 덕목을 갖춘 현군이 되지 않을 수 없었다.
신라에 이런 어진 임금이 등극했다는 사실은 고구려나 백제에 위협적인 사실이 아닐 수 없었다.
이에 고구려는 무열왕 원년(654) 10월에 말갈병을 이끌고 백제와 함께 신라를 공격하여 신라의 북쪽 33성을
빼앗는다.
그러자 무열왕은 2년(655) 정월에 당나라에 사신을 보내어 구원을 요청한다.
이때 둘째 왕자인 김인문이 당 고종 측근에서 숙위왕자로 시위(侍衛)하고 있었으므로 이 요청은 바로 받아
들여져 3월에 당 고종은 영주(營州)도독 정명진(程明振, ?∼662년)과 좌우위중랑장(左右衛中郞將) 소정방
(蘇定方, 592∼667년)으로 하여금 군사를 거느리고 가서 고구려를 침략하게 하니 이들은 5월에 귀단수
(貴端水)를 건너가 신성(新城)을 함락하여 불지르고 돌아온다.
그런데 무열왕은 등극하면서 자신의 재위 기간에 반드시 백제를 멸망시키겠다고 자신과 한 약속을 결행
하려 한다. 백제 의자왕 손에 잡혀 죽은 큰딸과 큰사위 및 그 가족의 복수를 하기 위해 대장부로서 스스로
약속했던 ‘백제 삼키는 일’을 본격적으로 시작한 것이다.
우선 큰 아들 법민을 태자로 삼고 셋째 왕자 문왕을 이찬(伊), 넷째 왕자 노단(老旦)을 해찬(海), 다섯째
왕자 인태(仁泰)를 각찬(角), 여섯째 왕자 지경(智鏡)과 일곱째 왕자 개원(愷元)을 각각 이찬으로 삼아
왕실의 지위를 튼튼하게 한 다음 손위 처남인 김유신과의 관계를 더욱 긴밀하게 하기 위해 자신의 딸인
지조(智照)공주를 환갑이 된 김유신에게 처녀로 시집보낸다.
백제를 멸망시키자면 신라의 군사권을 한손에 장악하고 있는 김유신의 협조가 절대적으로 필요하였기
때문이다.
이에 김유신은 9월에 백제의 도비천성(刀比川城)을 공격하여 빼앗는데 이미 그전부터 부산(夫山)현령으로
있다가 백제의 포로가 되어 백제의 권신인 좌평 임자(任子)의 종이 되어 있던 조미곤(租未坤)을 간첩으로
삼고 임자를 포섭하여 백제의 기밀을 모두 탐지해내고 있었다.
이에 백제를 삼키는 일이 급속도로 진행되어 나갔다. 그런데 의자왕은 신라의 계속되는 불행에 안도하며
신라의 와신상담(臥薪嘗膽)을 전혀 눈치채지 못하고 교만과 사치 및 음란한 즐거움에 빠져 세월가는 줄
모르고 있었다.
그러나 백제에도 세태를 바르게 보는 눈이 있었으니 좌평 성충(成忠)이 그런 사람이었다.
성충은 의자왕이 환락에 탐닉하는 것을 보다 못해 의자왕 16년(656) 3월에 이를 극간하게 되는데 의자왕은
도리어 그를 옥에 가두어 죽게 한다. 성충은 죽기 전에 이런 상소를 올려 백제의 멸망에 대비하라고 했다.
“충신은 죽어도 임금을 잊지 못하니 원컨대 한마디 하고 죽게 하십시오. 신이 일상 시운의 변화를 관찰해
보니 반드시 전쟁이 일어나겠는데 무릇 용병에는 반드시 그 지세를 택하여 상류를 차지하고 적을 맞아야
그런 연후에 보전할 수 있습니다. 만약 이국의 군대가 쳐들어 오면 육로는 탄현(炭峴)을 지나지 못하게
하고 수군은 기벌포(伎伐浦) 기슭으로 들어오지 못하게 하십시오. 그 험악하게 막힌 곳에 의지한 연후에 적을
막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의자왕은 성충의 이런 충간에 귀도 기울이지 않고 임자와 같은 간신의 말을 믿고 기고만장하여
환락의 나날을 보내게 된다.
한편 신라는 무열왕 3년(656) 숙위왕자 김인문이 당나라에서 돌아오자 그를 군주(軍主)에 임명하고 7월
에는 김인문 대신 셋째 왕자인 우무위장군 김문왕을 숙위왕자로 당나라에 보낸다.
그러나 김인문과 정이 깊었던 당 고종은 다시 김인문을 불러들이는데, 귀국하여 부왕의 백제 병탄 의지를
확인하고 돌아간 김인문은 당 고종을 움직여 백제 정벌군을 발동하도록 막후에서 교섭한다.
신라에서는 이와 때를 맞춰 백제를 정벌할 만반의 준비를 갖춰나간다.
그런데 마침 무열왕 6년(659) 4월에 백제가 경북 인동 지역의 독산성(獨山城)과 동잠성(桐岑城)을 침공해
온다. 신라는 이것을 빌미삼아 사신을 당나라로 보내 군사를 빌리는 한편 8월에는 아찬 김진주(金眞珠)를
병부령(兵府令)으로 삼아 총력전 체제로 돌입한다.
때 맞추어 다음해인 무열왕 7년(660)년 정월에 상대등 금강(金剛)이 죽자 김유신을 상대등에 임명하여
전시 내각을 김유신 중심으로 일원화시킨다.
8. 백제의 멸망
드디어 백제를 병탄할 기회가 온 것이다. 현경(顯慶) 5년인 이 해 3월 신해일에 당 고종은 김인문의 말을
듣고 13만 대군을 발동하여 좌무위대장군 소정방을 신구도(神丘道) 행군대총관으로 삼고 김인문을 부총관
으로 삼아 산동반도의 내주(萊州) 성산(城山)을 출발시킨다.
그리고 무열왕을 우이도(夷道) 행군총관으로 삼아 본국 병사를 이끌고 협공하도록 한다.
이에 무열왕은 5월26일에 김유신, 김진주, 김천존 등 여러 장수를 이끌고 왕경인 서라벌을 출발하여 6월18
일에 현재 경기도 이천인 남천주에 도착한다. 죽령을 넘어 남한강 줄기를 따라 충주·여주를 거쳐 왔을 것이다.
그리고 태자 김법민을 신라 수군 기지인 남양으로 보내 병선 100척을 거느리고 현재 덕적도인 덕물도
(德物島)로 가서 소정방 군대를 맞이하게 한다. 덕적도는 고구려 수군이 점거하고 있는 강화만과 백제
수군기지인 아산만 및 신라 수군 거점인 남양만을 견제할 수 있는 서해상의 전략적 요충지였기 때문이다.
이때 백제와 고구려 수군이 이 전략적 요충지를 탈취당했다는 것은 벌써 해전에서 승기를 놓친 것이었다.
태자의 안내를 받으며 덕적도 앞 소야도(蘇爺島)에 정박한 소정방은 7월10일에 신라 군대와 백제 왕도인
사비성 아래에서 만나 이를 함락하자는 군기(軍期)를 정한다.
이 소식을 들은 무열왕은 곧 대장군 김유신과 장군 김품일(金品日), 김흠춘(金欽春) 등으로 하여금 정병
5만을 이끌고 이에 응하게 한다.
아마 김유신은 왕의 행재소가 있는 이천에서 음죽, 죽산, 진천, 청주, 문의, 회덕을 거쳐 지금의 연산인
황산(黃山)으로 진격해 들어갔을 것이고 상주에서 추풍령을 넘은 군사는 황간, 영동, 옥천을 거쳐 연산으로
진격해 들어왔을 것이다. 그래서 7월9일에 황산벌에 이르렀는데 백제 장군 계백(階伯)이 5000군사를 거느
리고 이미 요지에 진치고 있어 좀처럼 이를 격파할 수가 없었다.
이때 장군 품일은 이제 겨우 16세 난 소년이던 아들 화랑 관창(官昌)으로 하여금 필마단기로 적진에 뛰어
들어 용감히 싸우다가 전사하게 하는 용맹을 보여줌으로써 이 전쟁을 승리로 이끈다.
백제 장군 계백이 관창을 사로잡고 보니 겨우 16세밖에 안된 미소년이라서 차마 죽이지 못하고 돌려보냈
다가 다시 쳐들어오므로 할 수 없이 죽여 목을 말에 매달아 보냈다는 얘기는 지금도 만인의 심금을 울리는
전쟁 비화(悲話)이다. 이때 장군 김흠춘의 아들 반굴(盤屈)도 소년 화랑으로 아버지의 명령에 따라 관창
처럼 적진에 뛰어들어 싸우다 죽었다 한다. 대장군 김유신의 친조카였다.
결국 계백의 결사대 5000인은 황산벌 싸움에서 김유신의 5만 군사에게 전멸당하고 마는데 어찌나 용감히
싸웠던지 김유신의 대군은 소정방과 약속한 날짜인 7월10일에 대어 갈 수가 없었다.
그런데 소정방과 김인문이 거느린 군대는 의자왕이 지금 서천군 화양면 와초리(瓦草里, 기와풀 즉 기벌)
부근이라고 생각되는 기벌포(伎伐浦)의 요새를 막지 않고 당나라와 신라 선단으로 하여금 이를 통과하게
함으로써 쉽게 1만 백제 수비군을 격파하고 사비성 남쪽까지 진격해 올 수 있었다.
이에 소정방은 군기(軍期)를 못맞추고 7월11일에 당도한 신라군에 책임을 물어 독군(督軍) 김문영(金文穎)
을 군문(軍門)에서 참수하려 한다. 대로한 김유신은 황산벌의 격전을 보지도 못하고 다만 군기에 늦었다 하여
죄를 삼는다면 죄 없이 모욕을 받을 수 없으니 먼저 당군과 결전을 벌인 다음에 백제를 격파하겠다고 소리친다.
그때 김유신의 머리칼은 하늘로 솟구치고 허리에 찬 보검은 저절로 칼집에서 빠져 나왔다 한다.
이 정경을 본 소정방은 겁을 먹고 우장(右將) 동보량(董寶亮)의 권고에 못 이기는 체 김문영을 놓아 보냈다.
그리고 다음 날인 7월12일에 나당연합군은 사방으로 사비성을 포위공격해 들어갔다.
다급해진 의자왕은 성충의 간언을 듣지 않았던 것을 한없이 후회하며 몇차례 중신을 소정방에게 보내
퇴군해줄 것을 애걸해보았으나 들어줄 리가 없다.
애당초 이 침공은 신라 무열왕이 백제를 멸망시킬 목적으로 감행한 것인데 그에다 대고 퇴군을 애걸했다니
이렇게 상황 판단을 못하고 있었다는 사실 자체가 백제를 멸망으로 몰아간 직접적인 원인이라 할 수 있겠다.
사비성이 함락 직전에 이르자 7월13일에 의자왕은 태자 부여융(扶餘隆, 615∼682년)과 함께 밤을 도와
웅진성으로 달아나고 사비성은 왕자 태(泰)가 자립하여 지키다가 미구에 항복하고 만다.
이에 웅진성으로 달아나 있던 의자왕은 더 버티지 못하고 우선 태자 부여융과 대좌평 천복(天福)을 보내
신라 태자 김법민에게 항복하게 한다.
법민은 진외가로 6촌 형에 해당하는 부여융을 말 아래에 꿇어앉게 하고 얼굴에 침을 뱉으며 이렇게 꾸짖었다
한다.
“전에 너의 아비가 죄 없는 내 누이동생을 죽여 옥중에 묻었기에 나로 하여금 20년간 마음 아프고 머리
때리게 했었는데 오늘은 네 목숨이 내 수중에 있구나.”
부여융은 땅에 엎드려 말이 없었다 한다.
웅진성으로 피란해 있던 의자왕은 할 수 없이 7월18일 태자와 좌우를 거느리고 나와서 소정방에게 항복
하고 만다. 무열왕은 금돌성에 총본영을 차려 놓고 전쟁을 총지휘하다가 의자왕이 항복했다는 소식을
듣고 7월29일 금돌성으로부터 소부리성(所夫里城), 즉 사비성(泗城)으로 나와 전승을 알리는 노포문
(露布文)을 당나라에 보내고 8월2일에는 대연을 베풀어 장병을 위로하고 승리를 경축한다.
이 자리에서 무열왕과 소정방을 비롯한 여러 장군들은 당상(堂上)에 앉고 의자왕과 태자 부여융은 당하에
앉게 하였는데 그도 부족하여 가끔 의자왕으로 하여금 돌아다니며 술을 따르게 하였다 하니 그 수모를
받고도 목숨을 끊지 않은 의자왕이 측은하다 못해 한심할 지경이다.
그런 용렬한 인물이니 망국의 왕이 되었을 것이다. 이 자리에 배석했던 백제 좌평 등 중신들은 이 광경을
보고 흐느껴 울지 않는 자 없었다 하는데 그들에게 그만한 양심이라도 남아 있었다 하니 다행한 일이었다.
9월3일 소정방은 군사 1만을 남겨 유인원(劉仁願)으로 하여금 사비성에 유진(留鎭)하게 하고 10여 만의
남은 군사를 이끌고 의자왕 등 백제 왕족과 신료 93인, 백성 1만2807인을 포로로 잡아 당나라로 귀환하니
백제는 건국 678년 만에 그 사직이 단절되기에 이르렀다.
이때 백제의 국세는 5부 37군(郡) 200성(城) 76만호(戶)였다 한다.
9. 부여 정림사탑에 새겨진 비명
부여에 가면 금성산 아래 읍내 중심부 길가 평지에 정림사지(定林寺址)가 있고 그 사지 안에 국보 9호인
<정림사지오층석탑>이 서 있다.
백제시대에 건립된 탑으로 현존하는 두 기의 석탑 중 하나에 해당한다.
다른 하나는 이미 언급한 바 있는 국보 11호 <미륵사지구층석탑>이다.
<미륵사지구층석탑>이 목조 탑을 석조로 번안한 초기 양식으로 아직 번잡한 목조적 결구의 흔적을 제대로
정리해내지 못했던 데 비해, <정림사지오층석탑>은 복잡한 목조적 결구를 대담하게 생략하여 함축함으로써
단순 경쾌하면서도 전아한 석탑의 아름다움을 제대로 구현해냈다고 할 수 있다.
따라서 이 <정림사지오층석탑>은 일러도 무왕(600∼640년) 말년 경이거나 의자왕(641∼660) 시대에 만들어
졌다고 보아야 한다.
기단과 초층 탑신에 별개의 기둥을 썼을 뿐 2층 이상의 탑신에서 기둥을 돋을새김으로 표시한 것이라든지,
소루(小累)나 첨차(詹遮) 형태로 돌을 깎아 지붕 추녀를 상징한 옥개석을 받침으로써 포작(包作)을 상징한
것 등이 <미륵사지구층석탑>보다 한 단계 진전한 양식 기법이기 때문이다.
탑신석 크기의 체감률을 급격하게 줄여간 것도 탑의 경쾌미를 드높이는 세련도라 할 수 있고, 옥개석을 얇게
쓰면서 그 크기의 체감률을 완만하게 한 것 역시 경쾌미를 증대시켜 주는 세련된 표현기법이라 할 수 있다.
이 역시 <미륵사지구층석탑>보다 진전한 양식 기법이다.
따라서 이런 정도의 양식 진전이 이루어지려면 적어도 30년에서 50년쯤의 시차는 있어야 할 듯하니,
이 <정림사지오층석탑>은 의자왕 말년에 사치와 호사를 일삼던 일의 일환으로 조성된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정림사(定林寺)라는 절 이름이 ‘계림을 평정한다(平定鷄林)’는 의미를 담고 있는 것으로 보아도
그렇다.
그런데 이 탑의 초층 탑신석 4면에는 소정방이 백제를 멸망시킨 공적을 찬양하는 글인 <대당평백제국
비명(大唐平百濟國碑銘 ; 당나라가 백제국을 평정한 비문)>(도판 5)이 새겨져 있다.
그래서 그 동안에는 <평제탑>이라는 불명예스러운 이름으로 불리기도 하였다.
그렇다면 건립된 지 얼마 안되는 새탑에 소정방은 그의 공적을 기리는 비문을 새기게 하였다고 보는 것이
타당한 견해일 듯하다.
소정방이 현경 5년(660) 7월29일 의자왕으로부터 항복을 받아내 백제를 멸망시키고 난 다음 백제의 옛
땅에 5도독 37주 250현을 설치해놓고 9월3일에 회군하였다고 하는데, 이 비문은 8월15일에 지었다 하고
있다. 그러니 이 비문은 대강 글을 지은 날부터 초층 탑신석 4면에 새겨 나가기 시작하였을 듯하다.
그래서 소정방이 회군해 가는 9월3일 이전에 그 새기는 작업을 끝냈을 것이다.
침략군 총사령관의 서슬퍼런 명령에 노예로 전락한 백제 각공들의 노역(勞役)은 밤낮없이 어어졌을 터이기
때문이다.
비문을 지은 이는 종군문사였던 능주장사(陵州長史) 하수량(賀遂亮)이고 글씨를 쓴 이는 낙주(洛州) 하남
(河南) 출신 권회소(權懷素)라 밝히고 있다.
글의 내용은 백제를 정벌한 이유와 그 과정을 밝히고 의자왕과 태자융 및 대좌평 사타천복(沙咤天福) 등
700여 명의 왕족과 귀족을 포로로 잡아간다는 등 그 뒤처리 과정도 대강 밝히는 것인데, 문체는 당시에
유행하던 사륙변려체(四六騈儷體) 형식이다. 글씨도 역시 당시에 최고의 발전을 이루고 있던 해서체이다.
그런데 짜임새가 매우 엄정하고 힘찬 기운이 가득하되 지나치게 모나지 않고 부드러운 특징을 보이는 것이
초당 삼대가 중 맨 마지막 명필에 해당하는 저수량(楮遂良, 596∼658년)의 글씨와 방불하다.
그래서 일찍이 추사(秋史) 김정희(金正喜, 1786∼1856년)는 그 문집에서 이 글씨를 다음과 같이 평가했었다.
“우리 동쪽나라에 이르러서는 신라나 고려의 금석문 일체가 모두 구양순(歐陽詢, 557∼641년)법이었는데,
평백제탑비는 저수량체로 되었다.”
또한 청나라 말기의 금석학 대가인 강유위(康有爲, 1858∼1927년)도 ‘광예주쌍즙(廣藝舟雙楫)’에 이 비문
글씨에 대해 이렇게 말하였다.
“짜임새가 엄정하니 육조체를 일변시켜 벌써 안진경(顔眞卿, 709∼785년)과 유공권(柳公權, 778∼865년)의
선구를 열어 놓았다.”
이 비문이 새겨지는 것이 당 고종 현경 5년으로 저수량이 죽은 뒤 2년 만의 일이므로 당시 서도계를 주름
잡던 저수량체의 영향을 강하게 받았을 것은 자명한 이치다.
그 뒤를 이어서 세워지는 것이 <유인원기공비(柳仁願紀功碑)>이다.
이 비의 비문 글씨 역시 굳세고 산뜻하며 아리따워 저수량체임을 한눈으로 알아볼 수 있으니, 이 또한 당시
유행하던 글씨체로 새겨진 것이다.
<유인원기공비>는 백제 멸망 후 부여에 머물러 있던 당나라 장수 유인원이 부여복신(扶餘福信)과 부여풍
(扶餘豊)을 정점으로 한 백제 광복군들을 물리치고 그 전승 기념으로 부여에 세운 전승기공비이다.
비를 세운 시기는 대체로 문무왕 3년(663) 경이라고 추정되는데 비석이 비바람에 쉽게 마멸되는 대리석질
이라 글자는 거의 남아 있지 않아서 짓고 쓴 사람이 누구인지 알 수 없다.
원래는 부여 부소산성 안에 있던 것을 지금은 부여 박물관으로 옮겨 보관하고 있다.
그러나 귀부는 잃어버렸고 비신은 세로로 갈라져 철심으로 이를 접합해 놓고 있다.
웅혼한 조각 기법으로 새겨 놓은 이수(首; 용틀임으로 장식한 비석 머리)에는 중앙에 전액(篆額)을 썼던
부분만 남아 있고 전서 글씨는 흔적 없이 사라져 버렸다.
어떻든 이 두 비석 글씨는 우리 손으로 한 것이 아니고 당나라 사람이 짓고 쓴 것이지만 우리나라 영토 안에
세워진 것이기 때문에 장차 우리 글씨에 많은 영향을 미치게 된다.
소정방이 의자왕과 태자 부여융 등 왕족을 포로로 잡아가지고 서해를 건너 장안으로 개선해 돌아가 당
고종에게 바치니 당 고종은 소정방의 무례를 꾸짖고 의자왕 등 왕족과 귀족들을 그 지위에 맞게 우대하게
한다. 그러나 이미 노경에 접어들어 참혹한 수모를 감내해야 했던 의자왕(600년 경∼660년)은 수치와
공포, 분노 등 심리적 타격을 이기지 못하고 이역만리 장안에서 곧 병들어 죽는다.
수모를 당하기 전에 고국에서 망국의 순간 자결한 것만 못한 죽음이었다.
당 고종은 금자광록대부위위경(金紫光祿大夫衛尉卿)을 추증하고 옛 신하들이 장사에 참여하는 것을 허락
하며 남조 진(陳)나라 마지막 황제로 수나라의 포로가 되어 장안으로 끌려와 죽은 진숙보(陳叔寶, 553∼6
04년)의 무덤 곁에 묻어주도록 한다.
비석을 세우는 것도 허락했다 하니 지금 서안 부근의 고총 속에서 의자왕의 무덤을 혹시 찾을 수도 있을지
모른다.
한편 이종사촌형인 백제 의자왕을 파멸시킨 신라 무열왕은 9월3일 의자왕과 그 일족이 당나라로 잡혀
가는 것을 보고 나서 곳곳의 백제 부흥운동을 진압해 가며 회군하기 시작하여 11월22일에 서라벌로 돌아
온다. 곧 논공행상을 베푸는데 백제의 중신으로 신라에 항복하여 귀순한 자들에게도 상당한 지위와 재물을
내려주게 된다.
그러나 무열왕은 백제를 멸망시켜 자신의 큰딸과 그 가족을 몰살한 이종사촌형 의자왕의 몰락을 보는
것을 인생의 목표로 삼고 좌우불고하고 한길로만 치달려 오다가 그 목표를 이루어내자 갑자기 삶의 의욕을
상실했던 듯하다.
그래서 의자왕이 파멸한 그 다음 해인 무열왕 8년(661) 6월에 58세로 홀연히 세상을 떠나고 만다.
백제를 멸망시키고 나서 채 1년도 못산 것이다.
개인적인 원한을 풀기 위해 이민족의 군대를 끌어들여 무고한 동족의 생명을 수없이 빼앗고 또 포로로
잡혀가 이역만리 낯선 땅에서 종이 되어 헤매게 한 과보가 그의 생명을 단축시켰을지도 모른다.
10. 중국식 비석인 태종무열왕릉비
이에 태자 김법민이 36세로 왕위에 오르니 이제야 진골왕통이 자연스럽게 부자세습으로 이어지게 되었다.
진덕여왕 이전에는 생전에 왕호가 있었지만 무열왕부터는 중국식을 좇아 왕호를 갖지 않았기에, 돌아가자
무열(武烈)이라는 시호를 올리고 또 태종(太宗)이라는 묘호(廟號)까지 올린다.
이렇게 독자 연호를 세우지 못하고 당나라 연호를 쓰기 시작한 것이 무열왕이었고 시호와 묘호를 최초로
받은 것도 태종무열왕이었다.
그는 이미 의복제도를 당나라식으로 고치고 그 아들들을 당나라 조정에 상주하게 하는 등 당문화 수용에
적극적인 태도를 보이고 있었으므로 죽은 뒤에 중국식 시호와 묘호를 받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을 것이다.
그래서 그의 왕릉을 법흥왕 이래 김씨왕들의 세장지(世葬地; 대를 물려가며 장사 지내는 곳)인 서라벌의
서악(西岳) 선도산(仙桃山) 동쪽 기슭에 쓰면서 그 앞에 최초로 중국식 비석을 만들어 세우게 된다.
그 비석은 퇴계(退溪) 이황(李滉, 1501∼1570년) 당시까지만 해도 비록 파손된 채나마 남아 있었던 모양
인데, 퇴계가 경주 유생들이 그 비석을 깨뜨려 벼루를 만들어 쓴다는 소문을 듣고 편지로 이를 꾸짖고 있기
때문이다.
그 이후 이 비석이 어떻게 처리되었는지 현재는 그 쪼가리 하나 찾을 수 없으나, 비석을 짊어지고 있던 귀부
(龜趺; 거북 모양을 한 비석 받침)와 용틀임으로 장식한 비석의 머릿돌인 이수(首)는 지금까지 남아 있어
국보 25호 <신라태종무열왕릉비(新羅太宗武烈王陵碑)>라는 이름으로 능 앞에서 잘 보존되고 있다.
백색 화강암으로 거북이 막 목을 빼고 움직이려는 듯한 모습을 실감나게 표현한 이 귀부는 힘주어 딛고 있는
앞·뒤 발에서나 힘차게 뽑아내는 귀두(龜頭)의 기세에서 통일의 힘찬 기상을 실감할 수 있다.
또 4겹 육각형의 귀갑(龜甲)무늬와 그를 둘러싸고 있는 귀갑 둘레의 구름 무늬 띠 장식의 날렵하고 산뜻한
표현에 이르면 절도 있는 화랑정신이 대강 어떤 것인지 짐작이 가는 듯하다.
여섯 마리의 용이 좌우 세 마리씩 나뉘어 머리를 가지런히 땅에 댄 채 서로 꼬리를 맞대고 힘겨루기를
하듯 여의주(如意珠) 하나를 각기 뒷발로 받쳐든 모습으로 표현된 이수의 조각기법 역시 용틀임에서 힘찬
기상이 넘쳐 흐른다.
특히 버팅기는 발의 표현이나 팽팽하게 힘주어 뒤틀고 있는 몸통을 보고 있노라면 저도 모르게 주먹에 힘이
들어가며 짜릿한 쾌감이 전해져 오는데, 이런 표현 능력을 아마 기운생동(氣韻生動)이라 했던 모양이다.
재질 선택도 신중을 기하여 귀두 부분에 은은한 붉은 기가 엿보이는 돌을 씀으로써 더욱 생동감 넘치는
사실성을 강조하고 있다.
우리는 이 비석을 통해서 당시 신라가 초당(初唐, 당나라를 4기로 나누는 시대 구분 명칭, 618년에서
712년 사이를 말한다.)문화를 직수입하여 자기화할 수 있는 고도의 문화수준을 가지고 있었다는 사실을
확인할 수 있다.
초당시기에 글씨의 발전이 극치를 이룬 것과 때를 같이하여 또한 비석 양식이 완벽한 발전을 보이니
이수와 비신(碑身), 귀부의 세 가지 요소를 갖추는 전형(典型)이 이루어진다.
<태종무열왕릉비>는 바로 이런 초당 비석 형식에 가장 충실한 것이라 할 수 있다.
문무왕 3년(663)경에 세워졌으리라고 추정되는 이 비석은 문무왕의 둘째 아들인 김인문(金仁問, 629∼
694년)이 짓고 썼다 한다.
김인문은 유(儒), 불(佛), 선(仙)에 통달하고 시문(詩文)은 물론 사(射), 어(御, 말타기), 서(書)에 능통한
재사로 당나라 제실에 22년이나 숙위하다가 그곳에서 돌아간 당나라통 왕자였다.
그러니 초당 삼대가의 글씨를 충분히 익혀 글씨가 몹시 아름다웠을 터인데 비신이 흔적 없이 사라져 비문
글씨의 아름다움은 찾아볼 수 없게 되었다.
혹시 어느 기회에 이 비신의 파편들이 땅 속에 묻혀 있다가 출토되는 기적이 일어난다면 김인문의 글씨가
세상에 빛을 볼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이수에 남아 있는 ‘태종무열왕지비(太宗武烈王之碑)’라는 전액(篆額; 비석에서 이수의 중앙에
전서로 비의 이름을 새기는 것)의 필법이 마치 삼국시대 오(吳)나라에서 만들어 남긴 <천발신참비(天發神
讖碑)>와 같이 예서(書) 필법으로 전(篆)을 내어 서리듯 나르는 신묘한 필력을 과시하는 것으로 보아,
본문 글씨도 초당 삼대가의 그것에 조금도 손색이 없는 해서의 극치였으리라 생각된다.
더욱 이런 추측이 가능한 것은 현존한 <태종무열왕릉비>의 이수와 귀부의 조각이 거의 동시대에 세워
지는 당나라 <이적비(李勣碑; 677년 건립)를 비롯한 많은 당나라 비석들과 비교해 볼 때 훨씬 사실적이며
활기에 차 있고 날렵하고 산뜻한 무늬로 장식되어 조각 기법면에서 훨씬 뛰어난 면모를 보여준다는
사실 때문이다.
미륵 신앙에서 아미타 신앙으로 [한국 불교미술의 원류 13]
1. 경주 남산배리(拜里) 미륵삼존불
경주 남산의 서쪽 기슭은 신라 초기부터 박씨 왕족들의 터전이었다. 시조 박혁거세와 왕비 알영을 비롯
해서 남해왕, 유리왕, 파사왕에 이르는 초기 4대 왕의 왕릉이 모두 서남산 초입인 탑정동에 들어서 있는데,
현재 사적 172호로 지정된 오릉(五陵)이 그곳이다.
그곳에서 조금 더 남쪽으로 가면 역시 박씨 왕이었던 7대 일성왕릉(사적 173호)이 있고, 언양으로 가는
국도를 따라 조금 더 남쪽으로 내려가면 배동(拜洞)에 6대 지마왕릉(사적 221호)이 있다.
지마왕릉을 지나면 8대 아달라왕과 53대 신덕왕, 54대 경명왕릉이 한데 모여 있으니 이를 삼릉이라 하여
사적 219호로 지정돼 있다.
그 다음이 55대 경애왕릉(사적 222호)으로 견훤에게 피살된 비운의 왕이 묻힌 곳이다.
이들 왕릉의 주인공들이 모두 박씨이니 신라 건국 초기부터 망할 때까지 근 1000년 동안 서남산 일대는
박씨들의 터전으로 대를 물려 살아왔음을 짐작할 수 있다.
그래서 경애왕이 포석정(사적 1호)을 배동 초입에 지었던 모양이다.
아마 그 터가 부왕인 신덕왕이 등극 전에 살던 잠저(潛邸, 왕위에 오르기 전에 살던 집)였기 때문인 듯하다.
서남산 일대가 박씨들의 세습 터전이란 사실은 이미 11회 <삼화령석미륵>에서 밝힌 바 있다.
일성왕릉 부근의 탑정동 남간마을이 자장율사의 누이동생 남간부인 법승랑(法乘娘)이 출가해 살던 동네
인데, 그 남편 사간(沙干) 재량(才良)이 일성왕의 후손인 박씨라고 하였다.
그 자제 삼형제가 모두 출가하여 외숙부인 자장율사를 도와 진골 김씨 왕족이 미륵의 화신이라는 사실을
종교적 신비와 물증으로 확인시키기 위해 반불교 내지 반진골적 성향이 강한 박씨 마을 뒷산인 삼화령에
<삼화령 미륵불삼존상>을 조성해 모셔 놓았으리라고 했다.
아마 이때 자장율사와 국교(國敎) 대덕, 의안(義安)대덕, 명랑(明朗)법사 등 3형제의 숙질들은 벌써
김춘추가 왕위를 계승하여 선덕여왕의 미륵보살 시대를 끝내야 한다고 생각했던 모양이다.
그래서 삼화령에 미륵보살이 아닌 미륵불상을 조성해 남자 왕의 출현을 예고했던 것 같다.
김춘추는 그 부친의 이름이 용수(龍樹, 570년 경∼645년 경)였다.
그런데 ‘미륵하생경’에서 미륵불이 하강해 용화수(龍華樹) 아래에서 깨달아 부처가 되고 3회의 설법으로
중생을 제도하여 미륵불국토를 만들어 간다 했으니 용수, 즉 용화수 밑에서 태어난 김춘추(604∼661년)는
미륵불일 수밖에 없었다.
자장율사와 명랑법사 형제들은 이런 이념을 신라사회에 계속 불어넣는 일을 하였던 것 같다.
그래서 반불교적이고 반진골적 성향이 강한 박씨들을 회유하여 이들의 이해와 동의를 구하기 위해 삼화령에
우선 <삼화령미륵불 삼존상>을 의좌상으로 조성해낸 다음, 지마왕릉 못 미친 곳의 선방곡(禪房谷, 새방 뜰)
에 다시 보물 63호인 <배리미륵불삼존상(拜里彌勒佛三尊像)>을 만들어 세우는 듯하다.
이는 대체로 태종 무열왕(재위 654∼661년)이 등극하던 654년 전후한 시기의 일이었을 듯하다.
<배리미륵불삼존상>은 흔히 <선방곡3체석불(禪房谷三體石佛)>로 일컬어지고 있는데, 이는 1923년 조선
총독부의 발굴조사와 복원작업을 지휘했던 일본인 학자 대판금태랑(大坂金太郞)이 붙인 이름이다.
발굴조사 당시에는 삼존불이 모두 넘어져 있었고 제자리를 떠나 이리 저리 흩어져 있었다 한다.
다만 본존불의 대좌 일부만 제자리에 남아 있었으나 이것도 그 위에 본존을 세울 수 없을 정도로 고의로
파괴돼, 바로 그 뒤에 자연석을 놓고 본존불을 세운 다음 적당한 간격으로 좌우 협시보살을 세워 놓았다.
전체적으로 보아 삼존불 모두 6세기 말의 수나라 양식을 계승한 느낌이 강하다.
4등신의 비례를 보이는 작달막한 키(8자 8치)와 큰 얼굴(2자 2치 7푼)이 아직 다 자라지 않은 소년 소녀의
체구와 같다는 것이 무엇보다도 양식적 공통점을 보여준다.
중국 산서성 박물관 소장의 <의씨현(氏縣) 출토미륵불입상>과 <배리미륵삼존불입상>의 주불을 서로
비교해 보면 그 양식적 공통성을 바로 실감할 수 있다.
우선 얼굴이 정사각형에 가까우리만큼 둥글넓적하고 앳된 동안형이다.
그리고 육계가 낮고 넓어 얼굴이 더욱 넓적하게 보이도록 한 것도 서로 같다. 목이 굵고 짧으며 시무외인
(施無畏印)과 여원인(與願印)을 지은 오른손과 왼손의 표현도 근본적으로 같다.
다만 <의씨현출토미륵불입상>의 왼손이 옷자락을 잡고 있어 순수한 여원인이 아니라는 점이 다르지만
손의 위치는 동일하니 자세의 동질성은 부인할 수 없다.
그리고 오른쪽 어깨를 살짝 덮어 내린 반단식(半袒式; 어깨를 반쯤 드러내는 형식) 2중 착의법이 같다.
다만 옷주름의 처리에서 수나라 불상은 빗금과 부챗살 모양으로 사실성을 드러낸 데 반해 신라 불상은 물결
무늬로 도식성을 드러낸 것이 크게 다르다.
이는 신라 상이 거의 반세기나 뒤에 수나라 상을 모방해 만든 것이라는 사실을 알면 금방 수긍할 수 있는
문제이다.
좌우 양손의 팔뚝을 따라 내려온 옷자락의 경우 신라 상은 짧고 수나라 상은 길어서 신라상을 더욱 어린애
처럼 보이게 한다.
이는 당시 신라사람들이 추구하던 천진무구한 소년기의 인체미를 표출한 것이라고 보아야 할 듯하니,
아직 화랑이 존중되는 사회 분위기의 반영이라 해야 할 것이다.
두 상 모두 불꽃 형태의 광배를 지고 있었으나 수나라 상은 파손되었고 신라 상은 온전하게 남아 있다.
머리칼은 수나라 상이 물결무늬의 곱슬머리 표현인데 반해 신라 상은 나발이다.
신라 상의 육계가 2중인 것처럼 보이는 것은 광배 끝을 육계 위로 포개듯 마무리지음으로써 일어난 잘못
때문이다.
두 협시보살상 역시 수나라 시대 보살상 양식을 충실히 반영하고 있다.
보는 방향에서 오른쪽 보살 입상은 장안 부근 출토의 <메트로폴리탄미술관 소장 보살입상>(도판 3)과
흡사하며 왼쪽 보살 입상은 <개황(開皇) 12년(592)명 관세음보살입상>과 그 양식 기법이 비슷하다.
다만 수나라 보살 입상이 더 화려하고 정교한 영락 장식으로 꾸며져서 완벽한 세련미를 과시한데 비해
신라보살입상은 영락과 천의가 단순 소박하여 소녀다운 천진성을 드러낸 것이 서로 다를 뿐이다
<삼화령미륵불삼존상>의 애기보살상을 바로 뒤잇는 양식 기법이라 하겠다.
굵고 소박한 영락 한 줄이 더 첨가될 정도의 꾸밈새가 진행된 것이다.
2. 아미타 삼존불의 출현
중국 문화의 발상지인 황하 유역은 지구상에서 농업 문명을 일으키기에 가장 적합한 기후 풍토를 갖춘
지역이었다.
이곳 사람들은 현실세계가 만족스러웠으므로 내세를 설정하는 종교나 현실 밖을 생각하는 우주 철학을
출현시키지 않았다.
다만 현실 생활에서 절대로 필요한 윤리 철학만을 발전시켰으니, 사람과 사람 사이의 관계만 원만하게
유지하면 현실이 곧 극락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후한이 멸망한 이후 이민족의 침략으로 5호16국 시대가 전개되면서 끊임없는 전란으로 현실이
지옥으로 변하자 내세에 희망을 걸고 살 수밖에 없었다. 이에 외래 종교인 불교를 수용하여 이념 기반으로
삼고 이민족 지배하의 전란시대를 살아가게 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중국 사람들의 현실적인 사고방식은 내세조차 현실에 직결시키려는 강한 집착성을 보여,
다음 시대로 예고된 미륵불 교화 시대가 중국에서 전개되리라는 확신을 가지고 미륵이 출현하여 현세의
고통을 제거해주기를 간절히 기원하게 된다.
이런 현세 구원적인 미륵신앙은 결국 미륵보살의 화신(化身)이 성군으로 하생하여 현세를 미륵불국토로
만들어가야 한다는 대중의 열망에 따라 황제나 태후가 미륵의 화신을 자칭해 천하를 호령하는 식으로 나타
나기도 하였다.
신라에서 선덕여왕과 진덕여왕이 출현한 것도 이런 배경 아래에서 이루어진 사실이란 것을 이미 앞에서 살펴
보고 나왔다. 그러나 272년에 걸친 분열의 시대가 끝나 수나라가 천하를 통일하고(589년), 그 통일의 대업을
당이 계승하면서 대중들은 더 이상 미륵의 출현을 갈망하는 현세구원적인 신앙에만 매달리려 하지 않게
되었다.
이에 중국 불교 교단에서는 도작(道綽, 563∼645년)과 선도(善導, 613∼686년) 등이 출현하여 아미타불
(阿彌陀佛), 즉 무량수불(無量壽佛)이 교화하고 있는 서방(西方) 정토(淨土) 극락(極樂)세계로 왕생(往生)
하는 것을 목표로 삼는 아미타 신앙을 고취해 나가기 시작한다.
이런 아미타 신앙은 조위(曹魏) 소릉공(邵陵公) 가평(嘉平) 4년(252)에 서역승 강승개(康僧鎧)가 번역한
‘불설무량수경(佛說無量壽經)’ 2권과 오(吳)나라 황무(黃武) 2년(223)에서 건흥(建興) 2년(253) 사이에
서역승 지겸(支謙)이 번역한 ‘불설아미타경(佛說阿彌陀經)’ 2권 및 구마라습(鳩滅什)이 요진(姚秦) 홍시
(弘始) 4년(402)에 번역한 ‘불설아미타경’ 1권 외에 서역승 강량야사(畺良耶舍)가 유송(劉宋) 원가(元嘉)
원년(424)에서 19년(442)에 걸쳐 번역한 ‘불설관무량수경(佛說觀無量壽經)’ 1권 등을 기본 경전으로 삼고
있었다.
그중에서 ‘불설무량수경’ 2권과 ‘불설아미타경’ 2권에서는 각각 권 하에서 거의 비슷하게 석가모니불이
미륵보살에게 아미타불의 서방극락정토에 왕생하는 방법을 가르쳐 주는 내용을 담고 있다.
선행을 받들어 행하고 악행을 짓지 않으면 극락 왕생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 ‘아미타경’을 독송하면
반드시 극락세계로 가서 태어나 아미타불을 뵐 수 있다고 하면서 미륵보살과 아난존자가 이 경전을 잘
받들어 세상에 널리 전파하라고 부탁한다.
‘무량수경’권 하에서 석가세존이 이 경전의 중요성을 강조하는 한 대목을 옮겨 보겠다.
“불타께서 미륵에게 이렇게 말씀하셨다. 여래가 세상에 나오는 것을 만나기 어렵고 뵙기는 더욱 어렵다.
여러 부처님의 경전과 말씀을 얻기도 어려우며 선지식을 만나 법을 듣고 행하는 것 또한 어렵다.
만약 이 경전을 듣고 믿고 즐거워하며 받아 가진다면 어려운 중에 어려움이 이 어려움보다 지나친 것은
없으리라. 이런 까닭으로 나는 이렇게 짓고 이렇게 말하였으며 이렇게 가르쳤으니 응당 믿고 따라서
법대로 수행하도록 하라. 미륵보살 및 시방에서 온 여러 보살 대중과 장로 아난 등 여러 성문 등 일체
대중이 부처님이 설하신 바를 듣고 기뻐하지 않음이 없었다.”
이와 같이 미륵보살을 통해 서방정토인 극락세계로 왕생하는 방법을 가르치게 되니 자연스럽게 미륵신앙에
젖어 있던 대중들은 미륵신앙을 청산하면서 미타정토 신앙으로 빨려 들어가게 되었다.
거기다 구마라습이 번역한 ‘아미타경’ 1권이 이를 더욱 부채질하였다.
그곳에서 아미타불을 마음 속에 간절하게 생각하며 ‘아미타불에 귀의합니다’라는 의미인 ‘나무아미타불
(南無阿彌陀佛)’을 열심히 외우기만 하면 극락세계로 가서 태어날 수 있다고 말했다. 이것이 염불인데 거기
에다 아미타불의 양대 협시보살인 관세음보살과 대세지보살을 ‘나무관세음보살’ ‘나무대세지보살’ 등으로
함께 부르면 더욱 신속하게 극락왕생할 수 있으며, ‘아미타경’을 읽고 외울 수 있다면 더욱 빠르고 확실하게
극락정토에 태어날 수 있다고 했다.
이런 단순 신앙은 대중의 마음을 사로잡기에 충분한 것이었다.
이미 대승사상이 출현한 이래 600년의 세월이 흘러 그동안 경전의 이해를 돕기 위해 경전에 주석을
붙이고 다시 그 주석에 또 주석을 붙이는 일을 거듭하였으므로 이른바 논(論)과 소(疏)가 경전을 압도할
만큼 쌓이게 되었다.
그래서 교리가 문자와 논리의 늪에 빠질 형편에 이르렀으니 일반 대중들이 교리를 통해 불교를 이해
하기는 거의 불가능한 형편이었다. 따라서 염불 신앙과 같은 단순 신앙이 대중들에게는 절실하게 필요
했던 것이다.
더구나 통일을 이루어 가는 과정에 무수한 살육이 자행되면서 미륵불이 출현해도 현실의 예토(穢土; 더러운
땅, 오염된 땅)는 정화되지 않는다는 사실을 확인하고는 이 시대가 이미 정법(正法)이 끝나는 시대인 말법
(末法) 시대이므로 지금 이 현실에서 구원을 얻기는 어렵다는 판단 아래 모두 극락왕생을 염원하는 신앙
으로 쏠려가게 되었던 듯하다.
그래서 수나라가 통일을 이룩한 직후부터 아미타삼존상이나 관세음보살상 등이 차차 많이 조성돼 가는
듯하니, <개황 12년(592)명 관세음보살상> 등이 이를 증명해준다.
그러나 아직 관세음보살상은 그 정형이 확립되지 않았던 듯, 이 보살상의 보관에는 정면에 화불이 조각돼
있지 않다. 아직까지는 상생(上生)미륵보살의 보관 정면에 화불이 표현되는 전통을 지켜왔기 때문에
갑자기 관세음보살의 보관에 화불을 표현할 경우 미륵보살과 관세음보살이 서로 구별되지 않을 터이므로,
서로간의 혼동을 피하기 위해 관세음보살의 보관에 화불을 표현하는 것을 주저하지 않았나 추정한다.
그러나 곧바로 ‘불설관무량수경’의 대량 유포에 따라 그곳에서 설한 대로 관세음보살 보관 정면에 화불을
표현하는 형식으로 관세음보살의 상 양식을 확정해 놓으니, 1976년 선산에서 출토된 <국보 184호 금동
관세음보살입상>이 그 대표적인 예이다.
이런 수대의 관세음보살상 양식은 뒤이어 백제와 신라에 영향을 미쳐 <보물 195호 금동관세음보살입상>
이나 <국보 183호 금동관세음보살입상>과 같은 우수한 관세음보살입상을 만들어 내게 되었다.
3. 선도산(仙桃山) 아미타 삼존대불
경주박물관 강우방 관장이 실측 조사하여 논고한 바에 의하면 경주 선도산 정상 아래 동남면한 절벽을
깎아 만든 마애삼존대불은 아미타 삼존이라 한다. 좌협시가 분명히 보관에 화불을 표시하고 있다 하였다.
그러나 암벽의 석질이 잘 부스러져 떨어지는 안산암(安山岩)이라서 높이 약 13m, 폭 약 20m의 절벽에
삼존을 다 새겨내지 못하고 주불만 제 바위에 새긴 다음 좌우 협시 보살상은 백색 화강암으로 따로 만들어
세워 삼존의 구도를 이루어 놓았다는 것이다.
<선도산아미타마애삼존대불>이 있는 선도산 정상에 가면 이를 확인할 수 있다. 본존상은 현재 눈 부위
이상이 모두 부스러져 떨어져 나갔는데 이는 인위적인 파괴가 아닌 박락 현상에 따른 파손이라고 한다.
현존 높이가 5.9m인데 복원 수치는 약 7m에 해당한다고 한다.
시무외여원인을 지었으나 왼손의 여원인은 새끼손가락과 무명지를 꼬부려 <서선마애삼존불>의 주불 형식을
그대로 따르고 있다.
옷주름마저 정면에서 타원형으로 중첩하는 형식을 그대로 답습하여 <서산마애삼존불>이 모본이 되었던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더구나 우협시 보살의 형식도 <서산마애삼존불>의 우협시 보살 형식을 철저하게 모방하여 두 손으로 보주
를 받쳐 든 모습이 같다.
천의가 정면에서 2중으로 타원형을 지으며 흘러내린다든지 두 팔뚝에서 양쪽 측면으로 발 아래까지 떨어
진다든지 하는 것이 모두 같다.
그러나 양식 기법은 수나라 삼존불 입상 양식이어서 <돈황 제427굴 삼존불 입상>(도판 9)과 동일 양식이다.
아마 육계도 <돈황 제427굴 삼존불 입상>처럼 넓고 낮았을 듯하다. 입술이 얇고 입을 굳게 다문 듯 표현
한 것도 수나라 불상 양식 기법을 보인 것이다.
좌협시인 관세음보살은 우협시인 대세지보살과 함께 백색 화강암으로 만들어서, 마애 석불로 조각된 주불의
좌우 벽에 기대어 세워놓았다.
딴 산에서 떼어낸 돌을 옮겨다 조성해 세웠으므로 산 아래에서 정상까지 그 석재를 운반해 오는 것이 쉽지
않은 일이었을 것이다. 높이가 4.55m에 달하는 거상이기 때문이다.
이에 돌을 두 덩어리로 분리하여 옮겨다가 상하를 따로 조성하여 조립해 세우는 기지를 발휘하였다.
한 덩어리의 돌로 무릎 이하에 해당하는 부분을 감실 형태로 파내 땅에 묻어 고정시킨 다음 다른 한 덩어리의
돌로 발목까지 조각한 보살신을 그 감실 안에 끼워 세우는 방법을 택한 것이다.
감실 안 밑바닥에는 발의 표현이 되어 있고, 바닥 아래에는 엎어 놓은 연꽃무늬가 새겨져 연화대좌를 상징
하며, 감실 좌우벽은 천의자락으로 이루어져 있다.
그러니 턱진 보살신의 천의자락과 감실벽을 이룬 천의자락이 서로 맞물리도록 계산해 만들어서 서로 끼워
맞춘다면 두 돌로 하나의 석상을 감쪽같이 만들어 세울 수 있게 된다.
이런 공법으로 큰 돌을 운반해 오는데 들이는 인력 낭비를 최소화하면서 현존하는 국내 최대의 협시보살상을
만들어냈던 것이다.
관세음보살상의 보관은 근본적으로 모란꽃잎 같은 꽃잎 장식 세 개를 세우고 관띠로 이를 연결 고정한
삼산관 형식인데, 이는 수나라 보살상의 일반적인 보관 양식이다. 다
만 정면 꽃잎 장식 위에 화불좌상이 표현되어 관세음보살입상임을 드러내는데 아직 윤곽만 희미하게 파놓은
상태이다. 오른손으로 시무외인을 짓고 왼손으로 정병을 들고 있다.
협시보살이 시무외인을 지은 것은 특이한 예라 하겠는데, 혹시 이는 <서산마애삼존불>의 좌협시 반가사유
상의 턱받친 손 모양을 의식하고 이런 표현을 했던 것이 아닌지 모르겠다.
관세음보살상의 얼굴을 둥글게 표현하고 대세지보살상의 얼굴을 깊게 표현하여 한쪽은 미소띤 화사한 표정
으로, 다른 쪽은 정색한 듯 근엄한 표정으로 만들어낸 것도 <서산마애삼존불>의 기본 구도를 따르려 했던
듯하다.
대세지보살이 4.62m로 조금 큰 것도 이런 구도의 영향일 것이다. 보관 윗부분에 감실 같은 흔적이 남아
있어 이곳에 정병(淨甁)을 조각해 끼워 넣지 않았던가 추측하고 있지만 아직 속단할 일은 아니다.
어떻든 선도산 정상에 거대한 <아미타삼존마애대불>이 조성되었다는 것은 신라 사회가 이제 미륵신앙
에서 벗어나 아미타신앙으로 전환해 간다는 사실을 표방한 것이라 해야 할 터이니, 이런 일이 언제 어떻게
해서 일어날 수 있었는지 살펴보아야 하겠다.
선도산은 경주의 백호(白虎)에 해당하는 산으로 서악(西岳)이라 불리는데 일찍이 김씨왕족이 그 동쪽 기슭을
차지하고 있었다.
법흥왕릉(사적 76호)이 동쪽 기슭의 맨 남쪽에 들어서면서부터 진흥왕릉(사적 77호) 진지왕릉(사적 78호)
태종무열왕릉(사적 20호) 김인문묘 등이 차례로 세워진다. 아마 용수의 무덤도 태종무열왕릉 군(群) 4무덤
중에 하나일 것이다.
따라서 태종무열왕이 그 8년(661) 6월에 58세로 돌아가 그 부친 용수의 무덤 아래에 왕릉을 쓴 다음 비석을
세울 때에 이 <선도산아미타마애삼존대불>도 함께 조성되지 않았나 한다. 그러니 문무왕 원년(661)으로
부터 3년(663)에 걸치는 사이에 <선도산아미타마애삼존대불>이 조성되었다고 보아야 하겠다.
아마 법흥왕 이래 역대 김씨 진골왕들, 그중에도 진흥왕 진지왕 태종무열왕으로 이어지는 적장손 계열의
순수 진골왕들의 왕생 극락을 기원하는 동시에 태종무열왕의 추복을 비는 의미로 아미타삼존상을 조성
했을 터이다.
이제는 돌아간 태종무열왕이 미륵불이 아닌 아미타불이 되어 서방극락세계로 왕생하기를 기원하는 뜻을
담고자 했을 것이다.
그래서 백제 위덕왕의 초상 조각인 <서산마애삼존불>을 범본으로 삼아 그보다 세배는 더 큰 규모로 태종
무열왕의 초상 조각인 <선도산아미타마애삼존대불>을 조성해냈을 듯하다.
이 <선도산아미타마애삼존대불>은 선도산 정상에서 바로 태종무열왕릉을 내려다보고 있기 때문이다.
이런 사상적 근거를 마련해준 것은 문무왕의 매제이기도 했던 원효(元曉, 617∼686년)대사였던 듯하다.
그는 벌써 아미타 삼존불 조성의 이념적 근거인 ‘불설관무량수경’을 완전히 이해하여 ‘불설관무량수경종요
(佛說觀無量壽經宗要)’ 1권을 저술해 놓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와 거의 동시에 백제 웅천주 출신 학승인 경흥(憬興)대덕이 나와 ‘불설관무량수경연의술문찬(佛說觀無
量壽經連義述文贊)’을 지어 ‘불설관무량수경’을 일반에 더욱 널리 홍포함으로써 아미타 신앙은 점차 일반
대중에게 확산돼 나가고 이에 따라 아미타삼존상의 조성도 증가해 나간다.
4. 백제부흥 운동
백제 의자왕(600년 경∼660년)이 그 20년(660) 7월18일에 당장 소정방에게 항복하여 백제가 멸망했지만,
백제 유민들은 즉각 각처에서 일어나 침략군을 물리치고 나라를 되찾으려는 부흥운동을 전개해 나간다.
좌평 정무(正武)가 두시원악(豆尸原嶽, 연산 도솔산으로 추정)에서 일어나 나당 연합군을 납치 살육하고,
흑치상지(黑齒常之)는 임존성(任存城, 대흥)을 근거로 치열한 항쟁을 벌인다.
이에 금돌성(金突城, 신창)에 본영을 차리고 있던 무열왕은 8월26일에 군사를 거느리고 임존성을 직접 공략
하지만 지세가 험준하고 저항군의 군사력이 3만여명에 이를 만큼 막강하여 실패하고 만다.
의자왕이 항복했는데도 소정방이 군율을 풀어 약탈을 허락했기 때문에 백제인들이 결연히 일어나 한데
뭉쳐 맹렬히 저항한 결과였다.
이에 소정방은 부흥의 구심점을 제거하기 위해 9월3일 의자왕을 비롯한 백제 수뇌부 93인과 포로로 잡은
백성 1만2000인을 데리고 황급히 바다를 건너 귀환하고, 낭장(郎將) 유인원(劉仁願)으로 하여금 1만 군사를
거느리고 부여에 남아 이들을 진압하도록 한다.
신라왕자 인태(仁泰)는 7000 군사를 거느리고 부장(副將)으로 이를 돕도록 하였다.
그러나 백제 저항군들은 9월23일 사비성을 공략하여 탈환하려 하고 나당 연합군은 이를 힘겹게 물리친다.
이런 와중에 당에서는 백제의 옛 땅을 직접 통치하려는 야욕으로 좌위중랑장 왕문도(王文度)를 9월28일
웅진도독(熊津都督)으로 파견하니 무열왕은 심기가 극도로 불편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백제 부흥군이 도처에서 일어나 저항하므로 이의 제압이 시급했기 때문에 10월9일에는 태자와
함께 군사를 직접 거느리고 이례성(禮城, 연산 도솔산성)을 공격하여 함락하니 부근 20여 성이 두려워서
모두 항복했다.
내친 김에 사비성의 탈환을 노리고 집결해 있는 부흥군 주력부대의 거점인 사비남령을 공격하여 1500인을
참수하고, 이어 왕흥사잠성(王興寺岑城)을 11월7일에 격파하여 사비성 부근의 부흥군 세력을 소탕한 다음,
11월22일에 서라벌로 돌아와 백제 정벌의 논공행상을 행한다.
그 사이 백제 부흥군들은 주류성(周留城, 홍성)을 근거지로 부흥운동의 체제를 정비하여 본격적인 복국
(復國)사업에 돌입하고 있었다.
백제 해상활동의 근거지로 무녕왕 이래 백제 문화의 선진 지역이 되어 왔던 태안반도 일대는 당시에도
당연히 백제 수군의 근거지가 되어 있었을 것이다.
그런데 제해권을 장악하고 있던 당시 백제 수군이 소정방이 거느리고 온 강남 수군에게 변변한 저항 한번
하지 못하고 아산만과 남양만, 강화만을 한눈에 제압할 수 있는 해상 요충인 덕물도(덕적도)를 그대로
내주었다는 것은 전략상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대목이다.
이것이 혹시 의자왕의 무능과 전횡에 따른 전략적 실수인지 아니면 수군을 장악하고 있던 부여복신과의
불화 탓인지 지금으로서는 밝힐 길이 없다.
어떻든 백제 멸망기에 태안반도의 실력자였던 부여복신이 수군을 제대로 활용하지 않았던 것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인 듯하다. 그 결과 의자왕은 수륙양군의 협공으로 쉽게 무너지게 되었다.
이후 복신은 태안반도의 중심지인 주류성을 근거지로 본격적인 부흥운동을 일으키는데 해상세력의 수장
답게 해상세력으로 연결되어 있는 일본 수군 세력의 지원을 이끌어내려는 전략을 세운다.
그러기 위해 일본에 가 있던 의자왕의 왕자 부여풍(扶餘豊)을 불러들여 왕으로 추대한다.
그러자 백제의 서북부, 즉 태안반도 일대가 모두 이에 호응하였다.
드디어 무열왕 8년(661) 2월에 복신은 승장(僧將) 도침(道琛)과 함께 사비성 탈환을 시도하기 위해 수륙
양군으로 진격하여 포위하지만, 백마강 입구에서 다시 나당연합수군에게 대패하여 수군 1만여 명을 잃는
손실을 입고 임존성으로 물러나온다.
한편 신라 조정은 2월에 사비성의 위급을 통보받자 이찬 품일(品日)을 대당장군으로 임명하여 여러 장수
들을 거느리고 가서 이를 구하게 한다. 품일은 3월5일에 군사를 나누어 두량윤성(豆良尹城, 정산)에 이르렀
으나 이후 한달 6일 동안 공격하고도 함락하지 못하고 많은 병기와 군량만 잃은 채 4월19일 회군하고 만다.
신라군의 참패소식을 들은 무열왕은 장군 김순, 김진순, 김천존, 김죽지 등을 보내 이를 구원하게 하지만
이들이 고령 가시혜진(加尸兮津)에 이르렀을 때 벌써 패군이 거창 가소천(加召川)에 이르렀다는 소식을
듣고 그대로 회군한다. 격노한 무열왕은 패장들의 죄를 물어 엄벌에 처한다.
이런 판국에 고구려 장군 뇌음신(惱音信)이 말갈 장군 생해(生偕)와 함께 술천성(述川城, 여주)과 북한
산성(서울)을 차례로 공격하여 북한산성은 거의 함락될 지경에 이르렀다.
이런 내우외환이 결국 무열왕을 격무에 시달리게 하고 노심초사하게 하여 수명을 단축시켰으니 이해 6월
무열왕은 급서하고 말았다. 그래서 태자 김법민(金法敏, 626∼681년)이 즉위하니 이가 문무왕이다.
문무왕은 즉위하자마자 부왕의 장례도 치르기 전에 아우 김인문 등이 가져온 당 고종의 칙서를 받고 당의
고구려 침략을 거들기 위해 직접 군대를 거느리고 출진해야 했다.
6월에 벌써 소정방이 수륙 30만 대군을 이끌고 고구려 침략에 나섰다는 것이다.
문무왕은 8월에 서라벌을 떠나 선산 시이곡(始飴谷, 餘次里津)을 지나 상주 웅현(熊峴)을 넘어 청산(靑山),
문의(文義), 청주, 진천, 죽산, 이천으로 이어지는 노정을 잡고 떠나온다.
문무왕은 김유신을 대장군으로 삼아 진주, 흠돌, 천존, 죽지 등 장군을 친히 거느리고 남천주(이천)까지
왔던 것이다. 남천주에서는 사비를 떠나 해로로 달려온 유인원 군대와 합류하여 다시 바다로 북진하려
하니, 백제 부흥군이 옹산성(甕山城, 수원 禿山城)에 진을 치고 이를 저지하려 한다.
문무왕은 이 사실을 알고 9월25일에 이를 격파하여 배후의 근심을 없앤다.
그리고 양식이 떨어져 발이 묶인 소정방군에 다음 해(662) 정월까지 수레 2000여 대에 쌀 4000 석과
벼 2만2000여 석을 실어다 전해주니, 소정방은 겨우 굶어죽는 것을 모면하고 회군할 수 있게 되었다.
문무왕은 북한산주(서울)에 머물면서 김유신을 시켜 고구려 영토를 지나 평양 부근까지 와 있는 소정방
에게 군량미를 전달해 주게 하는데, 김유신의 군대는 임무를 완수하고 돌아오는 길에 임진강을 건너다
고구려 추격병에게 걸려 임진강 중류 호천(瓠川, 장단의 수탄)에서 격전을 벌이다가 오히려 대승을 거두고
돌아온다.
한편 백제 부흥군은 승장 도침이 스스로 영군(領軍) 장군을 일컫고 복신이 상잠(霜岑) 장군을 일컬으며
군세를 더욱 불려 나간다. 그래서 유인원과 유인궤 군대를 위협하고 신라의 구원군을 격파하여 다시
나오지 못하게 할 정도로 성장하였다.
그러나 미구에 복신이 도침을 시기하여 살해함으로써(661년) 세력이 크게 위축된다.
이에 유인원 등은 문무왕 2년(662) 7월에 두량윤성(정산), 대산성(大山城, 홍산) 진현성(眞峴城, 진잠)
등을 공격해 빼앗아서 신라로부터 군량미를 운반해올 통로를 확보한다.
이렇게 세력이 약화돼 가는 중에도 부여 복신은 신왕 부여풍과 화합하지 못하고 서로 시기하여 제거하려다
문무왕 3년(663) 부여풍이 먼저 부여복신을 살해한다.
부흥운동의 근거지인 태안반도 일대의 실력자인 부여복신을 살해했다는 것은 곧 부흥운동의 기반을 포기
했다는 얘기이니, 나당연합군이 이 기회를 놓칠 리 없었다.
그래서 복신의 근거지이자 부흥운동의 근거지인 주류성을 치기 위해 수륙양군을 일으켜 사방에서 진격해
들어간다.
웅천주에서도 병선과 양곡선이 내려오고, 남양만과 덕물도에서도 병선이 발동했을 것이며, 남천주와
사벌주에서도 군사가 진격해 들어왔을 것이다.
이때 덕물도에는 손인사(孫仁師)가 거느린 당나라 수군 40만이 들어와 있었으며 문무왕은 김유신 등 28
장군을 거느리고 두량윤성과 주류성 공략에 앞장섰다.
이에 풍왕은 일본으로부터 수군을 불러들여 해상에서 격파함으로써 전세를 역전시켜 보려 한다.
그러나 당나라 수군을 격파할 수 있으리라 믿었던 일본 수군은 백강 입구의 해전에서 네 번 싸움에 네 번
모두 패배하여 400여 척의 배가 불태워지는 참패를 당하고 만다.
풍왕은 전쟁의 소용돌이 속에서 전사한 듯 종적을 찾을 수 없게 되고 풍왕의 왕자들인 부여충승(忠勝)과
충지(忠志) 등은 그 부하를 거느리고 왜인과 함께 항복하니 나머지 백제의 모든 성들도 따라서 항복하여
백제 부흥운동은 허무하게 무너지고 말았다.
이때 지수신(遲受信)만은 임존성에 웅거하며 끝내 항복하지 않았는데 이곳 출신인 흑치상지와 사타상여
(沙咤相如) 등이 항복하여 적의 앞잡이가 됨으로써 결국 이들의 공격으로 임존성마저 함락당한다.
그래서 지수신은 가족을 버려둔 채 단신으로 고구려에 망명하고 말았다. 이로써 백제 부흥운동의 기반은
완전히 무너지게 되었다.
사실 임존성의 저항이 얼마나 강하였던지 나당연합군이 10월21일부터 11월4일까지 보름 동안 쉬지 않고
공격하였으나 끄떡도 하지 않아, 결국 신라군은 이를 포기한 채 11월4일 회군하면서 설리정(舌利停, 서천)에
이르러 논공행상을 베풀었다 한다.
5. 고구려의 멸망
당나라가 백제를 멸망시킨 것은 신라에 그 영토를 넘겨주기 위한 것이 아니었다.
오히려 신라까지 복속시켜 당의 군현으로 편입시킴으로써 과거 한사군 시대와 같이 식민통치를 하고
싶었던 것이었다.
이에 당은 신라가 백제 영토를 차지하려는 의도를 처음부터 차단하기 위해 백제 부흥운동을 일단 잠재운
다음부터는 백제의 옛 태자 부여륭을 웅진도독으로 임명하여 귀국시킨 다음 백제의 옛땅을 관리하게 하고
과거의 국경대로 그 경계를 구획짓게 하는 회맹(會盟)의식을 치르게 한다.
이에 신라는 마지못해 문무왕 4년(664) 2월에 왕제 김인문을 보내 유인원 및 부여륭과 함께 상주 웅령
(熊嶺)에서 회맹의식을 갖고 그곳을 국경으로 확정짓게 된다. 그리고 다음 해인 문무왕 5년(665) 8월에는
문무왕이 직접 웅진(공주)으로 가서 취리산(就利山)에서 다시 유인원, 부여륭과 회맹하여 서로 화친할 것을
맹세한다.
그러나 신라는 백제의 부흥운동 기반을 철저히 무너뜨렸으므로 백제인들이 이제 더 이상 조직적인 부흥
운동을 일으키는 것이 불가능하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그러니 당나라 군대만 철수하면 백제의 고토가 신라 것이 된다는 확신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이런
회맹의식에 매우 여유로운 태도를 보일 수 있었다. 그래서 당이 회맹을 하자고 요구하면 순순히 회맹에
응하면서 백제 영토에 대한 욕심을 겉으로 드러내지 않았다.
그리고 문무왕 6년(666) 4월에는 도리어 김유신의 장자인 삼광(三光)과 장군 김천존(金天尊)의 아들 한광
(漢光)을 숙위학생으로 보내면서 이들로 하여금 고구려를 멸망시키고자 하니 군사를 보내달라고 요청한다.
사실 고구려는 백제 부흥운동이 전 해에 완전히 실패로 돌아가자 나당의 협공을 두려워하여 태자 복남(福男)
을 당나라로 보내 고종을 시위하게 하는 등 대당 외교에 적극성을 보이고 있었다.
더구나 이 해에 대당 항쟁을 주도하던 절대권자인 막리지 연개소문이 죽고 그의 장자 연남생(淵男生)과 차자
연남건(淵男建)이 막리지 자리를 놓고 다투다 장자가 밀려나서 당나라로 망명하는 불상사가 일어나 국세가
분열되는 불행이 겹치고 있었으니 고구려는 여간 위태로운 상황에 몰린 것이 아니었다.
그러자 신라가 이 틈을 노린 것이다.
남생이 당나라에 망명한 것이 6월이고, 고구려 보장왕이 막리지 자리를 남건에게 넘긴 것이 8월이며,
당고종이 남건에게 특진요동도독겸평양도안무대사현도군공(特進遼東都督兼平壤道安撫大使玄郡公)을
봉하는 것이 9월이고, 이적(李勣, 592∼667년)을 요동도행군대총관으로 임명하여 고구려 침공을 준비
하게 하는 것이 12월이다.
이 해 연개소문의 아우인 연정토(淵淨土)는 조카들의 싸움을 지켜보다 미구에 고구려가 멸망할 것을 예견
하고 그가 다스리던 고구려 남쪽 12성을 가지고 신라에 귀순해 온다.
문무왕 7년(667) 7월에 당 고종은 문무왕에게 그의 제 6왕제인 김지경(金智鏡)과 제 7왕제인 김개원(金愷元)
을 장군으로 삼아 요동 침략에 출정시키고, 유인원과 제 5왕제 김인태(金仁泰)는 비열도(卑列道, 안변길)로
침공하며, 왕은 다곡(多谷, 평산) 해곡(海谷, 해주) 길로 침공하여 이적과 평양에서 만나라는 명령을 내린다.
이에 문무왕은 8월에 대각간 김유신 등 30 장군을 거느리고 서라벌을 출발하여 9월에 한성정(漢城停, 서울)
에 이르러 이적을 기다린다.
한편 당나라에서는 요동도행군대총관 이적이 9월에 요하를 건너 신성(新城) 등 16성을 격파하고 좌무위장군
설인귀(薛仁貴, 612∼681년)는 남소(南蘇), 목저(木底), 창암(蒼) 3성을 함락하며 연남생군과 합세하였다.
곽대봉(郭待封)이 거느린 수군은 해로로 평양에 진격해 들어갔으나, 풍사본(馮師本)이 거느린 군량곡선이
제 때에 도착하지 못해 공격에 차질이 빚어졌다.
부총관 학처준(處俊)도 안시성 아래에서 3만 고구려 병사를 격파하였으나 고구려 막리지 연남건이 압록
강구를 막아 방어하므로 쉽게 육군이 평양으로 진격해 들어올 수 없었다.
이에 당고종은 다음 해인 문무왕 8년(668) 1월에 유인궤와 김인문을 요동도부대총관으로 삼아 요동성
공략에 투입하는 한편 신라에 투항한 연정토를 당으로 불러 돌려보내지 않는다.
고구려 침공에 필요한 정보를 얻고 그를 앞잡이로 쓰기 위해서였다.
드디어 이적과 설인귀는 2월에 부여성을 함락하는데 이 소식을 들은 부여천(川) 일대의 40여 성이 모두
따라 항복했다. 이때 당고종은 요동의 전황이 궁금하여 시어사(侍御史) 가언충(賈言忠)을 보내 살펴보게
하였더니, 그는 돌아와 이렇게 복명(復命, 일처리를 명령받은 사람이 그 결과를 보고함)했다 한다.
“반드시 이길 것입니다. 예전에 선제(先帝, 당태종)께서 죄를 묻다가 뜻을 이루지 못한 까닭은 저들의 틈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속말에 이르기를 ‘군사에 중매가 없으면 중도에서 돌아온다’ 하였습니다.
이제 남생 형제가 서로 헐뜯으며 우리 향도가 되었으니 저들의 뜻과 속임수를 우리는 모두 알고 있으며
장수는 충성스럽고 병사는 힘을 다합니다. 신이 그래서 반드시 이길 것이라 말씀드렸습니다.
또 고구려의 비기(秘記)에 이르기를 900년(700년이어야 한다)에 이르지 못하고 80세의 대장이 있어 멸망
시킨다고 했다는데 고씨가 한나라 때부터 나라를 가지고 있어 이제 900년이 되었고 이적의 나이가 80입니다.”
과연 남생 형제들의 불화가 고구려의 멸망을 직접 불러들이는 원인이었다.
그러나 이들 형제가 절대 권력을 놓고 다툴 수밖에 없게 된 데는 연개소문의 권력욕이 근본 원인이었다는
사실을 외면해서는 안된다. 절대권력이 존재하게 되는 것은 기득권을 놓치지 않으려는 보수세력이 그에
기생하여 맹목적으로 추종하기 때문에 가능한 것인데 이 자체가 사회의 노쇠화 현상이라고 보아야 한다.
고구려가 평양으로 천도해온 지 241년이 지나 그 한계 수명에 도달해 있었기 때문에 그런 일들이 일어
났다고 보아야 한다. 즉 문화 말기 현상인 것이다.
어떻든 연남건은 부여성이 위급하다는 급보를 받고 5만 군사를 급파하였으나 이적의 군사와 설하수
(薛賀水)에서 만나 일전을 벌인 끝에 3만 명이 전사하는 참패를 당하여 대행성(大行城)마저 함락당한다.
이적은 대행성을 함락한 후 압록강에 이르러 남건의 최후 저항을 받지만 여러 길로 몰려드는 대군의 공세에
힘입어 이를 간단하게 물리치고 단숨에 200여 리를 달려가 욕이성(辱夷城)을 함락하니 모든 성들이 항복
하거나 성을 비우고 달아나 평양성까지 무인지경으로 쓸고 갈 수가 있었다.
여기에는 7월16일에 한성(漢城, 서울)까지 나와 군사를 독려하며 고구려를 협공한 문무왕의 공적도 결코
무시할 수 없는 것이었다.
철륵(鐵勒) 흉노 출신의 설필하력(契苾何力, ?∼677년)이 가장 먼저 군사를 이끌고 평양성 아래 도달하고
이적의 군대를 비롯한 대군이 차례로 뒤따라와 평양성을 포위 공격하기를 한 달 넘게 하니, 고구려의
보장왕은 견디다 못해 9월21일 연개소문의 막내아들 연남산(淵男産)으로 하여금 수령 98인을 거느리고
백기를 들고 나가 이적에게 항복하게 한다.
이적은 예로써 이를 대접하며 항복을 받아들이는데 막리지 남건은 끝내 항복하지 않고 저항하다가 군사권
을 맡고 있던 승려 신성(信誠)의 내응으로 성이 함락하자 자살하려 했으나 이루지 못하고 포로가 되었다.
이적이 보장왕과 그 왕자 복남(福男) 덕남(德男)을 비롯하여 대신 등 20여만 명을 포로로 하여 당나라로
돌아가니 고구려는 나라를 세운 지 705년 만에 멸망하고 말았다.
이때 고구려의 국세는 5부 176성 69만호였다 하는데, 당은 고구려 땅을 9도독부 42주 100현으로 나누고
평양에 안동도호부(安東都護府)를 두어 다스리게 하였다. 고구려 침략에 수훈을 세운 우위위(右威衛)
대장군 설인귀가 검교(檢校) 안동도호가 되어 군사 2만 명을 거느리고 평양에 남아 이 지역을 처음 다스려
나갔다 한다.
한편 문무왕은 고구려가 항복했다는 소식을 듣고 한성으로부터 평양으로 가기 위해 길을 떠났으나 혜차양
(次壤)에 이르렀을 때 당의 여러 장수들이 이미 돌아갔다는 소식을 듣고 한성으로 되돌아온다.
10월22일에 김유신을 태대각간으로 삼고 김인문을 대각간으로 삼는 등 논공행상을 행하고 11월5일
포로로 잡은 고구려인 7000명을 거느리고 서라벌로 돌아온다.
그리고 6일에는 문무신료를 거느리고 선조 사당에 나가 당나라와 함께 백제와 고구려를 멸망시킨 사실을
고한다.
이로써 삼국시대는 막을 내리게 되었다. 그러나 신라가 삼국을 통일했다 할 수는 없으니, 당을 끌어들여
우리 민족이 대물려 살아오던 터전을 저들의 손에 넘겨주고 우리 민족을 저들의 노예로 끌려가게 함으로써
오히려 우리 국토를 분열시키고 우리 민족을 흩어지게 만들었기 때문이다.
6. 군위(軍威) 석굴 아미타삼존상
경상북도 군위군 부계(缶溪)면 남산(南山)동 양산(陽山)에는 국보 109호로 지정된 <군위석굴 아미타
삼존상>이 있다.
일명 학소대(鶴巢臺)라 불리는 바위산 절벽 중턱에 천연동굴이 뚫려 있는데 그곳을 조금 확장 정비하고
아미타 삼존불을 모셔 놓은 것이다.
인도의 아잔타 석굴을 비롯한 무수한 석굴사원이나 중국의 돈황석굴, 운강석굴, 용문석굴 등을 모방하여
조성한 석굴사원으로, 인공석굴이 아니라는 점에서 인도의 석굴사원 형태를 계승한 진정한 의미의 석굴
사원이라 할 수 있는 곳이다.
그런데 여기에 모셔져 있는 불보살상이 삼국시대 말기에서 통일신라 초기에 걸치는 시기의 양식기법을
보이고 있다.
주불좌상은 얼굴이 크고 상체가 우람하나 무릎 폭이 좁아서 마치 <삼화령미륵불삼존상>의 조성 비례를
연상시킨다.
그러나 전체적인 양식기법은 당태종 정관(貞觀) 13년(639) 명이 있는 <정관 13년명 불좌상>(도판 12)과
비슷하다. 다만 <정관 13년명 불좌상>이 시무외 촉지인(觸地印)을 짓고 있는데 반해 <군위석굴 아미타
삼존상> 주불은 항마(降魔) 촉지인을 짓고 있는 것이 다르다.
아미타불이 항마 촉지인을 짓는 통일신라 특유의 조상 양식이 이로부터 비롯되는 듯하다.
항마 촉지인이란 석가세존이 마왕(魔王) 파순(波旬)을 항복받고 대각(大覺)을 이루어 불타가 되는 순간에
짓고 있던 손짓이다. 왼손을 왼쪽 무릎 위에 손바닥이 보이도록 위로 펼쳐서 편안히 놓은 것이 항마인이다.
마왕을 항복받은 사실을 표시하는 손짓이다.
이때 석가세존은 지신(地神; 토지를 맡아 다스리는 신)을 건드려 깨어나게 해서 마왕으로부터 항복받은
사실을 증명하게 하는데, 증인으로 지신을 불러내기 위해 오른손을 오른쪽 무릎 위에 엎어 대고 손가락은
무릎 아래 땅을 가리키게 하여 지신을 건드리는 시늉을 하니 이런 손짓을 촉지인(觸地印; 지신을 건드리는
손짓)이라 한다.
그런데 아미타불로 하여금 이런 항마 촉지인을 짓게 한 것은 백제와 고구려를 항복받은 것이 마왕을 항복
받은 것이라고 생각한 당시 신라인들의 사고를 그대로 반영한 것이 아닌가 한다.
그래서 항마 촉지인을 지은 아미타불상이라는 독특한 불상양식이 출현하였고, 이런 불상양식이 이후
아미타 신앙의 토착화와 더불어 우리 고유의 불상양식으로 자리잡아 나갔다고 보아야 하겠다.
주존은 굴실의 안벽 중앙에 턱을 만들어 엉덩이 부분을 걸치게 하고 무릎 아래로는 높이 70cm의 딴 돌을
받쳐 고정하였는데 앞에 받친 네모난 딴 돌의 표면에 옷주름무늬를 새겨놓아 포수좌(袍垂座) 형식의 방형
(方形) 대좌임을 상징하였다. 머리로부터 무릎까지 이르는 주존불의 불신(佛身) 높이는 218cm이다.
좌우 협시보살상 역시 <삼화령미륵불삼존상>의 협시보살상이 보이던 작은 키에서 벗어나 초당(初唐)
양식을 계승한 백제 말기의 <보물 195호 금동 관세음보살입상>처럼 늘씬한 몸매를 자랑하는데, 약간
몸매를 비틀어 이른바 삼굴신(三屈身, 3방향으로 몸을 꺾음)의 교태를 지었다.
7세기 중반 초당 시대에 유행하던 보살상 양식의 전형을 보이고 있는 것이다.
따라서 이 불보살상은 7세기 중·후반기에 당나라 양식을 받아들여 조성한 것으로 보아야 한다.
그런데 삼존의 근엄한 얼굴 표정에서 <선도산아미타마애삼존대불>보다도 더 초당 양식에 근접한 느낌이다.
따라서 <선도산아미타마애삼존대불>이 조성된 이후 어느 시기에 만들어진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그렇다면 언제 왜 이곳에 이런 삼존불상을 조성해 모셨을까.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이 삼존불상의
성격을 먼저 규명해야 한다.
이 삼존불상이 학계에 알려진 것은 1962년 9월22일 황수영 선생을 비롯한 신라 오악조사단에 의해서였다.
이때 조사에서 석굴의 크기는 폭 380cm, 높이 425cm, 깊이 430cm, 주불 총 높이 288cm, 좌협시보살상
높이 192cm, 우협시보살상 높이 180cm라는 것을 확인하고 우리나라 최초의 석굴사원임을 인정하여
국보 109호로 지정하였다.
그리고 좌협시보살입상의 보관에서 화불(化佛)좌상의 존재를 확인하고 우협시보살입상의 보관에서는
정병(淨甁)의 존재를 확인하였기 때문에 <군위석굴 아미타삼존상>으로 이름을 붙이게 되었다.
보관에 화불이 새겨지면 관세음보살이고 정병이 새겨지면 대세지보살인데, 이 두 협시 보살을 좌우에 거느
리는 것은 아미타불이라는 이유에서였다.
이런 교리적 근거는 유송(劉宋) 원가 연간(424∼442년)에 서역승 강량야사(畺良耶舍)가 번역한 ‘불설관
무량수경’에서 찾을 수 있다. 그 내용을 옮겨보면 다음과 같다.
“부처님께서 아난(阿難)과 위제희(韋提希, 마가다국 빈바사라왕의 왕비)에게 이르시기를 이 생각이 이루어
졌으면 다음에 마땅히 무량수불의 불신(佛身)과 광명(光明, 몸에서 나오는 빛)을 살펴보아야 한다.
무량수불의 몸은 백천만억 야마천의 염부전단 나무와 같은 황금색이고 불신의 높이는 60만억 나유타
항하사 유순이다.
미간에 있는 백호(白毫)는 오른쪽으로 뚜렷하게 돌아서 5개의 수미산과 같고 부처님의 눈은 맑고 깨끗하기가
사방의 큰 바닷물같이 분명하다. 몸에 있는 모든 터럭의 구멍에서는 빛이 솟아나서 수미산과 같이 커지고
머리에서 솟아나는 둥근 빛(圓光)은 백억 삼천대천세계(三千大千世界)와 같은데 원광 안에는 백만억 나유타
항하사 수의 화불(化佛)이 있고 하나하나의 화불은 또 무수한 화보살(化菩薩)을 시자로 삼고 있다.
무량수불은 8만4000 대인상(大人相, 미남이 되는 기본적인 요소)을 가지고 있으며 하나하나의 대인상은
각각 8만4000 수형호(隨形好, 미남이 되는 세부적인 요소)를 가지고 있다. (중략)
다음에는 응당 관세음보살을 살펴보아야 한다. 이 보살은 키가 80억 나유타 항하사 유순이고 몸빛은 자금색
(紫金色, 자주빛이 도는 황금색)이며 정수리에는 육계(肉)가 있고 목에서는 원광(圓光)이 나오며 그 지름이
100 유순이다.
그 원광 중에는 500 화불이 있는데 석가모니와 같고 하나하나의 화불은 500 보살과 무수한 여러 천인들로
시자를 삼고 있으며 거신광(擧身光, 온몸에서 나오는 광명) 중에는 5도(五道, 인간, 축생, 아수라, 아귀, 지옥)
중생의 일체 모습이 모두 나타난다.
정수리 위에는 비릉가마니(毘楞伽摩尼)와 같은 기묘한 보배로 천관(天冠)을 만들어 썼는데, 그 천관 중에
하나의 화불을 세워 놓았으니 키가 25 유순이다. 관세음보살의 얼굴은 염부전단 나무와 같은 황금색이고
미간의 백호상은 7보(寶) 색을 갖추어 8만4000 종류의 빛을 뿜어내는데 하나하나의 광명에는 한량없는
숫자의 화불이 있고 하나하나의 화불은 무수한 화보살로 시자를 삼고 있다.(중략)
그 나머지 몸매가 아름다운 것은 불상과 다름없는데 오직 정수리 위의 육계와 정수리를 볼 수 없는 상호만
세존에게 미치지 못한다.(중략)
다음은 대세지(大勢至)보살을 보아야 한다. 이 보살은 몸의 크기가 역시 관세음보살과 같으나 원광의 지름은
250 유순으로 250 유순을 비추며 거신광은 시방(十方)의 나라를 비추는데 자금색으로 인연있는 중생은 모두
볼 수 있다.
다만 이 보살의 한 털구멍에서 나온 빛을 보면 곧 시방세계의 무량제불의 깨끗하고 신묘한 광명을 모두 볼
수 있으므로 이 보살을 무변광(無邊光)이라 부른다.
지혜의 빛으로 일체를 비춰서 삼악도에서 벗어나 무상도(無上道)를 얻게 하므로 이 보살을 일컬어 대세지라
한다. 이 보살은 천관(天冠)에 500의 보배로운 연꽃이 있고 하나하나의 연꽃에는 500의 보배로운 받침이
있으며 하나하나의 받침에는 시방제불의 깨끗하고 신묘한 국토의 크고 작은 모습이 모두 나타나 있다.
정수리 위의 육계는 발두마화(伐摩花, 홍수련 꽃)와 같은데 육계 위에는 한 개의 보병(寶甁)이 있어 여러
광명을 가득 담고 있다가 불사(佛事)가 있으면 널리 드러낸다.
나머지 여러 신상(身相, 생김새)은 관세음과 같아 다름이 없다.”
이로 보면 이 군위 석굴 안에 봉안한 삼존상은 틀림없이 아미타삼존상의 전형을 완벽하게 갖춘 아미타삼
존상이라 할 수 있다.
<선도산아미타마애삼존대불>의 경우 우협시 대세지보살상의 보관에서 아직 정병이 있었던 확증을 찾아
내지 못한 상황이므로, 현존한 아미타삼존불 양식으로는 이 <군위석굴아미타삼존상>이 ‘불설관무량수경’의
내용을 가장 충실하게 구현해낸, 우리나라 최초의 아미타삼존상이라고 해야 하겠다.
그렇다면 어째서 이곳에 이런 아미타삼존상을 앞장서 조성해 놓았을까. 이것은 이곳의 지리적 여건을 살펴
보아야만 해결될 문제이다. 지금은 이곳이 군위군이지만 옛날에는 신녕(新寧)의 속현인 부계(缶溪)현에
소속된 땅이었다.
팔공산 북쪽 지맥이 흘러 내려와 동남쪽으로 팔공산 상봉을 바라볼 수 있도록 터진 계곡의 뒷산 절벽 중턱에
석굴이 있어 그 안에 아미타삼존상을 조성해 모셔 놓은 것이니, 이 아미타삼존상은 파계사 뒷산인 팔공산
연봉을 한눈에 바라볼 수 있는 지점에 안치되었던 것이다.
신라가 백제와 고구려를 멸망시킨 다음 그 영토를 차지하고 나서는 팔공산을 중악(中岳), 계룡산을 서악
(西岳), 지리산을 남악(南岳), 토함산을 동악(東岳), 태백산을 북악(北岳)으로 설정하게 되니 통일 후 가장
먼저 중악의 위치를 확정하여 이를 성지화(聖地化)할 필요성이 절실했을 듯하다.
그래서 중악 기슭인 이곳에 자연 석굴이 있고 그 석굴 안에서 중악의 상봉을 조망할 수 있다는 점을 감안
하여 아미타삼존상을 조성해 모시려는 생각을 해내지 않았나 한다.
더구나 이곳은 경주에서 백제나 고구려의 옛땅으로 가려면 반드시 거쳐야만 하는 길목이었다. 경주-영천-
신령-부계-군위-선산-상주로 해서 백제로 가거나, 신령-부계-함창-문경으로 새재를 넘든지 신령-부계-군위-
비안-예천-풍기로 해서 죽령을 넘는 길이 모두 이곳을 거쳐 가지 않을 수 없었다.
따라서 백제와 고구려를 멸망시키기 위해 동원된 장병들이 모두 이곳을 거쳐갔을 터인데, 전쟁터에서 죽고
다시 돌아오지 못한 사람들이 허다했을 것이다.
이에 이들이 서방정토인 극락세계로 왕생하기를 기원하는 불사가 거국적으로 이루어질 필요가 절실했을
터이니, 문무왕이 그 8년(668)년 11월5일에 고구려 정벌을 끝마치고 서라벌로 회군해 돌아오면서 이곳에
아미타삼존상을 조성해 모시도록 명령한 것이 아니었던가 한다.
이런 생각을 하도록 한 것은 원효(元曉, 617∼686년)대사였을 듯하다. 앞서 밝힌 대로 원효는 이 <아미타
삼존상> 조성의 교리적 배경이 되고 있는 ‘불설관무량수경’에 대한 연구가 깊어 ‘불설관무량수경종요’ 1권을
지어 놓았을 뿐만 아니라, 그의 고향이 이곳에서 그리 멀지 않은 자인(慈仁)현이었고, 요석공주에게 장가들어
문무왕에게는 매제에 해당하는 인척 관계가 있었으니 말이다.
[최완수 간송미술관 연구실장]
[최완수의 우리문화 바로보기 13]